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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편지(김판출)
이보 게 친구, 나 치백이 아비일세!
벌써 9월이 다 지나고 오늘이 10월 1일이군.
지난 2010년 11월 23일 8시 20분에 북한 놈들이
연평도에 무력 침공한 그날
치백이를 하늘나라에 보내고,
목메어 불-러 보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지아비보다 먼저 간 불효자식이란
마음만이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을 뿐이라네,
치백이 아들, 두 손자 놈들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학교에 가고 오는 것 먼발치에서
보살펴 주는 것이 요즈음 나의 일과일세!
세상이 하도 혼란스럽기도 하고,
무료한 시간도 달래볼 겸
자네가 관리하는 홈피에도 들러보고
컴퓨터 키보드가 내손까락을 하도 두드리라
재촉을 하여 이글을 쓰고 있다네.
항상 웃는 얼굴에 좋은 인상으로 기억되는 친구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자네가 부럽기도 하네 그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끈끈한 정을 나누게 된 것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에 등록 하면서
행정학을 같이 만학도로 공부를 할 때가 아니겠나.
1년에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보고 학교 게시판
Q&A 상에서만 현실에 대해 사회적 비판과 평가를
그 어느 학우들보다도 우리 둘 만의 문제제기가
교수님들이 가장높이 평가 해주었지,
조교님들도 우리에게 멘트를 잘 달아주었지 않았나.
요 며칠 전에 학교에 들러
허중경,신종렬,김지원,문병기교수님들과
점심을 한 그릇 할 시간이 있었다.
그때 허중경 교수님께서 너의 안부를 묻더구나.
요즈음도 한 번씩 통화는 하느냐고.
그 분은 김해출신 교수님이라 그런지
네를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더라.
한번 전화라도 해 드림이 어떨지 모르겠다.
아마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나 보더라.
나 또한 자네만의 중요한 팩트(fact)를 알게 되면서,
우리가 짝지가 되어 어려운 공부를 서로 이끌어 준 덕분에
무사히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그리고 학생회장 하던 인천관세청 이상환 사무관도
금년에 정년퇴직을 하는가 보더라.
출근은 하질 않았고 총무에게 전화하니까
중국에 11박12일 코스로 여행 중이라고 하더군.
요즈음 나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형님들도 만나고
토, 일요일이면 화백(화려한 백수)들끼리 등산도하고
그들과 어울리다 보면 막걸리 한 잔이 두잔 되고,
두 잔이 세 잔 되다가 고주망태가 되어
어떻게 집에는 왔는지,
자고나면 다음날 아침이 되어 있을 때가 많다네.
담배는 끊었는데 술이 문제야 내게는!
우리들도 술판에 모이기만하면 주로 나오는 화두가
자식자랑 아니면 세월호 사건에 국회의원 욕하는 것이
좋은 안주꺼리가 되어주고 있다네.
약간씩은 임병장 사건, 윤일병 사건 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나는 그냥 듣고만 있을 뿐, 아무래도 내 맘에는
국가는 국방이 최우선이고,
다음에는 경제부흥이 아닌가. 말이여!
내 초등학교 3학년 손자 녀석이 학교에서 돌아와 질문하기를
‘할 배! 전쟁이 진짜 일어나는 기가?
나도 군대 가야 되는 기가?’ 식의 질문을 한다네.
이거 내가 요즈음 글만 쓸려고 하면
항상 내 뜻과 빗나는 글이 나온단 말이야.
미안하네, 그려!
제작연인가? 자네 모친상을 당해서 상환회장과
몇이서 부산에 내려갔을 때 그날 눈이 엄청 내렸던 기억이 난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세상천지가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던 눈을 보면서.
아마도 자네 모친은 좋은 곳으로 가시려고,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자네 또한 펑펑 내리는 눈과 같이
무량한 복을 받겠다며 우리는 거북이걸음으로
경부고속도로로 차를 몰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아마 1월 초순 인걸로 알고 있는데,
1월이면 대부분의 꽃들이 눈 속에 숨어서
봄을 준비하지만, 겨울에 꽃망울을 터뜨리며
피어나는 꽃이 동백꽃이 아닌가?
자네 모친 조문을 마치고 우리일행은 해운대 동백섬
근처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부산 시티투어관광을 마치고
상경하였다네.
UN평화공원, 자갈치, 태종대, 이기대, 유람선도 타 보았지.
UN평화공원 안에 동백나무가 아주 많이 심겨있더라,
해설 사에게 누가 冬栢나무의 꽃말이 뭐냐고 질문을 했더니
해설사가 머뭇거리기에 내가 얼른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까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한다.’라는 말이었어.
그때부터 나는 그 꽃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내 아들 치백이를 자꾸 생각나게 만들고 있다네.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허전함을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것 같으이!
이 말은 정말로 친구 너에게나 해보는 말이다.
이제는 세상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은 하지만, 울컥울컥 받쳐 오르는 서러움을
식히기가 싶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라네.
내 아들 장례 치룰 때 자네도 참석해주었지.
나와 내처가 발인을 할 때 관을 부여잡고.
가슴 도려내는 아픔으로 울다가 지친 우리내외를
자네들이 부축하여 주면서 같이 울어 주었고
나 역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더구나, 친구야!
고맙다 친구야! 어떤 말로도 표현을 할 수가 없구나.
우리가 대학원에서 정책학이며, 복지학이며,
지방행정학 등등, 어떠한 과목을 이수했는지 조차 지금은
아련하지만 영어, 논문, 종합시험은 통과해야 된다며
외우고 적고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요즈음도
A-4, 6장 분량의 글은 써야 적성이 풀리는 것 같더라.
나라가 어렵고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요즘같이 서해에는 연평도, 대청도에
북한이 시도 때도 없이 장사정포, 로켓포를 쏘아올리고,
핵실험을 하면서 위협을 가하고 있고,
동해는 독도를 일본이 지네들 땅이라고
우겨대고 있으니 말일세.
술자리에서 누가 말하더군.
연평도는 꽃게가 많이 나는 곳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생산량의 50%를 웃돈다고들 하던데..
시민들은 연평도와 서해 5도는 서울로 통하는
전략 요충지라고 말을 하더라,
내 집사람의 친구가 우리 집 거실에서
커피를 한잔 하다가 나에게
좀 무거운 질문을 던지더군.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어떤 관계냐? 고
그래서 한국전쟁 때 중국 국가주석 모택동의 장남이
6.25에 참전하여 죽은 그런 관계라고. 했었지
모택동이 자신의 장남을 6.25때 참전시킨 것을 보면,
중국에게는 북한이 얼마만큼 중요한 나라인지 이해가 가더군.
자네는 아들만 셋이니까 아들 셋 모두 군대를 마쳤다고 하였지,
자네는 요즈음 보기 드문 애국자야.
돈 없고 힘없는 자녀들만 군에 간다는 사회가 되면
안 되질 않는가?
정치꾼들 감투만 쓰고 나면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자신부터 진실 되게 다가가야 한다.”
며, 말들이야 그럴싸하게 해놓고
선거 때 공약(公約)은 말 그대로 공약(空約)이 되고
선거철도 아닌데 재래시장을 찾아다니며
물건은 하나도 팔아주지도 않으면서
지네들 얼굴 알리기 사진이나 찍겠다고 하니
요즈음은 상인들도 그들 오는 것
막을 방도를 찾고 있다고 한다더라.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나라꼴이 어떻게 될 것인지 참 우습기도하고 말이지.........
동해안의 독도는 국제법상 영유권 주장이 가능하도록
2인 이상 민간인의 경제활동을 하는
거주민이 있어야 한다고 했었지.
그래야 국익이 수호된다고 하면서 말이야.
한 발짝 더 나아가,
대한민국은 독도에서 러시아의 태평양 함대와
일본, 북한의 해군, 공군의 이동상황을 세밀히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라고 했었지.
독도 주변은 풍성한 연어, 상어, 오징어 등의
황금어장이 아니겠나?
또한 차세대 에너지 자원인 아트레라이트
매장량이 무진장이라고 하던데 그렇게 본다면
경제적으로나 국가안보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곳이지,
그 중요한 자원과 전략적인 요충지를
두 눈 뜨고서야 어찌 빼앗길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내가 부산에 시티투어를 하면서
우리나라부산이 국제 관문국으로도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정말로 볼거리가 많은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네.
오륙도 유람선을 탓을 때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노래 가사를
흥얼흥얼 읊었지,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이 가사가 요즈음은 내개는 어울리지가 않고,
노산 이은상 선생님의 시에서
‘안개 자욱하면 아득한 빈 바단데.
오늘은 비속을 보매 더더구나 몰라라’라는 말도
내 가슴만 허전하게 만드는 말이 되어 있다네.
배를 따라 날아드는 갈매기 때들만이
나를 반겨주는 듯해서 새우깡 한 봉지를 마구 뿌렸었지.
최근 들어서는 영도다리도 하루에 한 번씩
들어 올리는 영상물을 보았네.
그날 태종대 선착장에서 개불과 멍게 한 접시
맛을 안 볼 수야 없지 않나, 부산까지 와서 말이다.
요즈음, ‘학공치’가 동해와 남해안 전역에서 활발하게
입질을 해서 낚시 피크시즌이라고 하더구나.
매년 12월 중순부터 설 연휴를 지나 3월까지
용호동 이기대 갯바위에서 ‘학공치’ 낚시가 호황이고
전국에 강태공은 한 번씩은 다녀간다고 하던데
자네가 한번 ‘학공치’ 낚시도 할 겸 날을 잡으세, 그려!
부산의 용호동 앞바다 이기대의 역사는 정말로 기억이 생생하다.
임진왜란 당시 ‘이기대’에는 두 명의 기생이 함께
왜장을 끌어안고 바다에 투신한 곳이라고 들었다.
진주 촉석루에서만 의기, 명기가 있는 줄 알았는데
이름 모를 두 떨기 꽃,
길이길이 영면 하소서 라는 그 말,
못내 아쉬움이 남더라고.
이기대는 6. 25당시에도 국토 안보와도 밀접하게
관련 된 곳이라, 이 지역은 50년 동안이나
군사보호지역이어서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자연 그대로 보존 되어 있는 곳이라서.
젊은이들 쌍쌍이 달밤에 아베크 코스로 각광을 받고
광안대교를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기도 하는 장소라 하더군.
아 참!
자네가 2011년도에 ‘사랑의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고 했었지?
‘장기기증’은 건강한 삶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나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장기를 꺼져가는 생명을
위해 대가 없이 기증하는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네.
그래서 나도 그해 장기기증에 서명을 하였네, 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요즈음, 혈압 약에 간장보호, 위장보호, 신경안정제까지
들어있는 알약을 매일아침 밥알로 한 숟가락 정도씩 먹는 내게,
어디 성한 것이 있어 한곳이나 기증할게 있겠나 싶기도 하이.
그래도 요즈음은 아침에 등산도 하고 맑은 공기도 마시고
과음했을 때는 찬물로 위세척이라도 하려고
냉수 한 컵 정도는 마시고 있다네.
그러다 보면, 또 요즈음은 너무 오래 살면 어쩌나 싶어진다네,
나라에 복지재원은 자꾸 바닥나고 있는 마당에
내같은 놈 빨리 죽어야 자라나는 내 손자들이
복지 세를 조금이라도 적게 낼 수 있지 않을까 말이지.
그리고 자네는 전자공학도 였잖아.
나는 요즈음 정보화 사회를 내 가족에게 알려보려고
집사람에게 아날로그가 뭔지를 물어보았더니.
아 글쎄 아줌마가 그래도 정의를 잘 내리더라고.
온라인에서의 관계를 능숙하게 오프라인 관계로
연결시키는 훈련이 잘되어 있는 상태나 세대,
가령, 트위터를 통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디지털이라고.
어떠한가?
정의가 괜찮지 않은가?
중요한 Contents는 다 들어가 있지 않은가? 말일세,
초등학교 5학년인 큰 손자에게도 물어봤지.
“정환아, 아날로그(analog)와 사이버가 어떻게 다르지?”
반에서 꽤나 공부를 잘한다고 담임선생님께서
칭찬받는 놈이라서 그런지, 대답을 잘 하더군.
‘아날로그와 사이버가 다른 점은 예.’
‘아날로그(analog)는 신호와 자료가
연속적인 물리량을 말합니더. 가령 자연에서 얻는 신호
이를테면, 빛의 밝기, 바람의 세기, 소리의 높낮이나
크기 등이 아날로그지 예.’
그럼 디지털은?
‘디지털이란 사람손가락, 동물 발까락에서 유래된
라틴어 digit에서 나온 것 입니더.
디지털이란 애매모호한 점이 없고,
정밀도를 높일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더. 그래서
컴퓨터의 모든 자료는 디지털로 처리하고 예.
원본과 차이 없이 복제, 삭제, 편집이 가능하고 예.
그런데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이어주는 기계가 있습니더.
그것이 바로 모뎀 입니더.‘
이야기가 좀 빗나간 것 같군.
자네는 아날로그 세대인가? 디지털 세대인가?
내 생각엔 자네는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를
연결하는 모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계층간, 세대 간의 생각의 차이를
잘 읽어내는 자네는 협상론에서 다루었던 중재의 역할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이어주는 모뎀이 아니겠나.
홈피와 트위터를 운영하고, 300명이 넘는 회원들에게
매달 몇 차례씩 메일도 보내고, 오프라인 모임도
자주 갖고 하니까 말이다.
거기서 나도 배울 점이 참 많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천이 잘 안 된다. 말이다.
미디어라는 것은 뭘까?
요즘 같은 세상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대중매체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여
성숙된 시민의식으로 사회를 정화시키는 활동이
미디어의 역할이 아니겠나.
시민들이 정부를 제대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정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고 그 정보의 많은 부분을
TV, 스마트 폰, 인터넷, 신문, 잡지 등 뉴미디어가
개인적인 속성과 시민적 이슈의 중요성을 증가시킨
것이 분명하다고 보는데.
자네 글이 어느 싸이트 였는지는 기억이 잘나질 않지만
어느 날 접속율 1위 글 중에서 우연히 클릭 해보니까
게시자의 이름이 자네라고 되어있더구나.
축하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계속 통화중이더라.
그래서 나도 그 글에 댓글도 올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퍼다 날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네.
다시 부산에 있는 UN기념공원 이야기나 더 해보자.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서울은 3일 만에 함락되었고,
UN군이 참전했지만 현격한 전투력의 열세로
남한의 군대는 북한의 공격을 감당해 내지 못했다.
북한 김일성은 8월에 남한을 완전하게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고
남한의 운명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이 지속되었다.
먼 나라에 와서 목숨 바친 미국청년들
만일 미군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북한에 적화 통일되어
지금의 행복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며,
3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이 패망의 문턱에서 살아나게 된 것은 바로
목숨 바쳐 싸워준 미군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냐 말이다.
한국전쟁 때 미국이 자국군인을 178만 명을 참전시켰고,
사망했거나 실종된 병사가 3만 5천여 명,
부상자는 약 10만 여명에 이르렀단다.
물론 16개국의 참전용사들도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남의 나라전쟁에 삼국지에서나 들어보는 100만 대군도 넘는
군인을 파견해준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인가 말일세.
이러한 상황도 모르고 무조건 적인 반미 감정만을 부추기고
촟 불 집회에만 매달리는 시민의식을 좀 계몽시켜 나갈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세계평화와 자유라는 대의 아래 공산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수호해주신 고귀한 생명을 바친 사람을 추모하는
UN 평화공원이 부산에 있는 것이 자랑스럽더라고.
그래서 내가 부산에 대해 좀 알고 싶어서 자료를 살펴보았지.
부산은 통일 신라 시대부터 동래라고 불렀고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쌓은 성터가 많이 남아있고
동래 부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왜관 등 대일외교 사무를
총괄하던 중요 관문인데, 불행히도 일제 때에는
조선의 곡물과 지하자원을 수탈하고, 한반도 침략의
전진기지 역할까지도 하게 됐다고 하더군.
그래서 부산 동래사람들은 일찍부터 국제적인
감각이 있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는지도 모르지,
1877년 고종 14년에는 일본, 청국, 영국과
영사관이 설치되면서 국제도시로 변모되기 시작했고,
신라, 고려, 조선을 막론하고 일본인들이 소란을
피웠을 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복, 추방 등의
조치를 취했던 곳이 부산이고
고려 창왕 때인 1389년 박위 장군은 쓰시마 섬을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적장 노사태를 죽이고
무고하게 끌려간 고려 민간인 포로 1백 명을 찾아왔다는
기록이 1차로 대마도를 정벌한 내용이고,
조선시대에도 태조 때 1396년에는 김사형 장군이
두 번째로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세종 때 1419년에는 이종무 장군이
3차로 대마도를 정벌 했는데도 어찌해서
대마도가 일본 놈들의 영토가 되어 있느냐 말이다.
자네가 만든 단체가 행복도시부산 만들기 단체였지?
‘작게는 지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가는 선진시민의 요람이 되고,
크게는 시대가 요구하는 바른 시민의 모범이 된다’라는 취지로
자네가 만든 그 단체가 이러한 정보를 많은 시민들에게 알려서
애국하는 시민, 더불어 잘사는 사회,
네 것, 내 것, 너무 찾지 않고
양보하며 살아가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네.
부산의 꽃은 동백꽃이지!
시계를 돌려서 1965년도 쯤 일거야
당시 가수 이미자에게 최고의 전성기를 안겨준 노래가.
바로 ‘동백아기씨’. 35주 연속 가요순위 1위라는
한국대중가요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었지,
지금도 아마 60대 정도의 사람이면 ‘동백아가씨’노래 정도는
옆에서 불러주면 따라 부르기는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이.
원래 동백나무는 부산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남부와
일본, 중국에 자생하는 상록수인데,
동양의 꽃나무인 동백(冬栢)이 서양에 소개되면서,
뒤마 소설인 “동백꽃 여인” 주세페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가 창작되었는데
‘라 트라비아타’는 동백을 뜻한다고 하더군.
동백꽃이 동양에서 세계로 뻗어 나갔듯이
한반도의 평화도 국제 관문국인 부산에서
한국, 동양, 서양 등으로 스며나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지금 부산을 말하라고 한다면.
푸른 바다 넘실대고, 바닷내음 마시며
청춘남여가 이기대 산책길을 거닐고
찬란한 광안대교를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고,
갈매 길을 따라 남녀노소가 하이킹을 즐기며
정월 초하룻날 해운대 백사장에 헬기가 나라 오르며,
장엄한 일출을 향해 남녀노소 없는 빽빽한 군중 속에서
시린 손을 비비대며 한해의 소원을 비는 사람들!
유람선을 따라 사람과 화답하며 떠다니는 갈매기 때들
기장 대변의 멸치떨이 축제장에서
주서 올린 멸치를 막걸리로 씻어다가
고추장, 된장 풋 상치에 쌈장을 곁들인 멸치 회!
자갈치 수산시장에서 차가운 새벽공기마시며
딸랑딸랑 경매 소리에 생기가 넘쳐나는
그러한 새벽이 바쁜 부산 사람들.
자갈치 아줌마의 억센 사투리,
광어, 우럭 도다리 전어 회 한 접시에
매운탕 한 그릇 밥 한 공기 추가해서
소주한잔 하는 그러한 부산이
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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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편지 형식으로 세태를 잘 비판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