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여기서 말하는 외모는 얼굴 생김새나 키나 집안이나 학벌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내면’이라고 여기는 것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시선으로는 ‘외모’에 불과한 것들이 있다.
연예인들을 보면 두 부류가 있는 것 같다.
연예인답게 보이려는 연예인과 굳이 연예인답게 보이려고 하지 않는 연예인...
나이에 매여 있으며 나이에 민감한 우리 나라에서 “나이 값” 이란 말은 사실 굉장한 부담을 주는 말이다.
10대면 10대에 맞게, 40대면 40대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찬양사역자답게 보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먼저 ‘목사 같아 보인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자.
‘목사’ 하면 떠오르는 공통된 이미지가 분명 우리들 가운데 존재해 왔다.
다소 크고 낡은 성경책을 들고 정장을 입은 모습, 커다란 강대상 뒤에서 마이크에 대고 고함 치듯
설교하는 모습....
물론, 요즘의 목사님들은 이런 고정된 이미지에서 많이 벗어나긴 했다.
하지만, 아직도 ‘목사 같다’라는 이미지에는 정장과 커다란 성경책과 어떤 특정한 말투가 생각나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대학생 때 과 친구들에게서 ‘박 목사’라는 별명으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나의 어떤 점 때문에 그런 별명이 생겼을까?
항상 하나님 이야기, 성경 이야기만 하고 잘 어울려 놀지도 않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모습에서인 것 같다.
크리스천에도 두 부류가 있다.
자신이 크리스천인 것을 티내려고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으면서도 크리스천인 사람이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율법을 잘 지키며 죄를 짓지 않고 의롭고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찬양 사역자다운가?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찬양사역자로 보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나의 어떤 점 때문에 나를 찬양사역자로 보아 주는 것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찬양사역자의 모습은 어떤가?
하드 케이스에 브랜드 기타를 넣어 가지고 다니는 사람? 최신 휴대폰과 사양 좋은 노트북이나 아이패드가
있는 사람?
패셔너블한 옷과 신발과 가방? 뭔가 음악 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헤어 스타일?
예배 인도자스러운 얼굴 표정?
만약 위와 같은 것들로 ‘찬양사역자답다’ 라는 것을 판단한다면, 분명 나는 찬양사역자답지 못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했던 ‘메시야스러운 모습’에는 맞지 않는 분이셨다.
그러나, 이사야는 ‘메시야스러움’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분명히 선포했다.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겨우 자라난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모습
(사 53:2)’..... 바로 이 모습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메시야다운 모습’이셨다.
나에게는 외모적인 콤플렉스가 많다. 사실, 나는 거울로 내 얼굴을 잘 안 본다.
내가 봐도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음악가 같지도 목사 같지도 않다.
내가 봐도 내가 찬양사역자나 작곡자나 한 교회의 찬양전도사 같지가 않다. 겉으로는 말이다.
사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나의 부족한 외적인 조건들이 아니다. 나의 속사람의 모습이다.
다윗은 겉의 모습과는 달리 속사람이 이미 하나님의 용사였기에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다.
다윗은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왕답지 못 하게 막춤을 추며’ 예배하는 부족해 보이는 예배자였지만,
하나님께 그의 속사람은 참된 예배자였다.
내가 찬양사역자인 것을, 작곡자인 것을 굳이 외적으로 티를 내야지만 다른 사람들이 인정한다면,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인 티를 내면서’ 화려하게 사역을 시작하라고 유혹했지만
그분은 단숨에 거절하셨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굳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찬양사역자라면 비록 음반을 못 내고 곡이 알려지지 않고
교계에서 나를 몰라도 나는 분명한 찬양사역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