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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은 누구인가?
당신 자신이
다른 존재가 되어 당신을 바라본 적이 있나요?
그리고 완전한 관찰자로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누구일까요?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는 걸까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그것이 긍극적인 질문 아닐까요?
현실은 무엇인가요?
예전엔 내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떤 점에서 현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지요.
사람들이 비현실이라고 말하지만 말이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설명하면 할수록 그것을 설명하려고 투자하면 할수록
신비의 굴속에서 길을 잃기가 쉽지요.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 확률적 과정을 이야기 하려합니다.
즉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문제 말이죠.
우리가 세상을 느끼는 방식과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
그 차이의 문제 이야기 입니다.
생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 바라보는 지금 이 문화의 많은 것들
잘못된 패러다임 위에 존재한다는 신호 아닌가요?
즉 생각의 힘을 너무나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죠.
모든 시대와 세대에서 만들어진 가정은 항상 존재했습니다.
지구가 평평하다든가 둥굴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죠.
우리가 당연히 어기는 숨겨진 가정들이 수없이 존재합니다.
이 말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가정의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당연하다고 배우고 여기는 것들이
맞지 않다는 좋은 지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너무나도 자주
이런 개념 속에 갇혀버립니다.
그것이 패러다임입니다.
현대의 물질문명은
사람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신비일까요? 모두가 수수께끼일까요?
분명히 그렇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더 깊이 물어보는 것은
새로운 나의 세계로 문을 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삶을 더 즐겁게 해줍니다.
삶의 진정한 요령은 앎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현실을 왜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걸까요?
같은 관계와 똑같은 일들을 왜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걸까요?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이 뮤한한 가능성의 바다위에서
왜 우리는 똑같은 현실을 계속해서 창조해내는 걸까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선택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지 ! 놀랍지 않나요?
우리가 일상에 익숙해져서 즉 우리가 하루의 삶을 창조해내는데
너무 익숙해져서
현실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는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외부의 세계가 우리안의 세계보다 훨씬 더 실질적이라는 사실에
너무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외부 세계를 창조한다는
절대적으로 견고한 물리적 현실에 우리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물리적 현실이라는 것은
다른 물리적 현실 몸 세포의 가능성과 확률의 활동
즉 전자의 흐름 그 원리에 따라 삶을 보는 것입니다.
전자 흐름의 양이 증가할 때 현실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른 물리적 현실이라는 것에 우리 자신 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움직임의 일부이구요.
하지만 둘 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연히 홀로 날아온 돌멩이라고도 볼 수도 있죠.
그래서 서로서로 복잡한 물질들이 반응해서
특정 존재의 상태로 나타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철학자들은 “내가 돌부리를 걷어차면”
발가락이 아프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 아픔을 현실로 느끼고 생생하게 와 닿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경험이고
그 사람이 현실이라고 느끼는 인식입니다.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실험대상자에게 어떤 물체를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뇌를 컴퓨터로 PET 스캔했습니다.
그리고 뇌의 일정부분이 반응하는 것을 측정 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게 한 뒤 똑같은 물체를 상상하게 했습니다.
대상자가 같은 물체를 상상하자 뇌의 같은 부분이 반응 했습니다.
마치 실제 눈으로 그 물체를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보는 것은 누구인가?
뇌인가?
눈인가?
그리고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가 뇌로 보는 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눈으로 보는 것이 현실인가?
그리고 뇌는 주위에서 보는 것과
뇌가 기억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부분의 뇌신경망이 반응했기 때문이죠.
이 실험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던집니다.
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수많은 정보에 폭격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 정보들이 몸으로 들어와서 우리가 그것들을 처리하는 것이죠.
그것들은 우리의 오감을 통해 거르고 걸러져서 각 단계별로
정보를 걸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의식까지 올라오는 것들은 대부분 자기 보존을 위한 정보들입니다.
뇌는 초당 4천억 비트의 정보를 처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 중 단지 2천여 가지만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이 2천여 가지의 정보들 대부분 몸과 주위환경
그리고 시간에 관환 것들입니다.
우리는 빙산의 일각만을 보며 살고 있습니다.
무한한 우주라는 빙산에서 낡은 부분만을 보는 것이입니다.
뇌가 4천억 개의 정보를 처리하고 그중 우리는 2천여 개만 인식한다면
현실은 뇌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뇌는 정보를 계속 받아내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통합시키지 못하는 것이죠.
눈은 렌즈와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뇌 뒤의 테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카메라 테잎과 같습니다.
뇌가 볼 수 있다고 하는 것들만 뇌 안에서 저장해둔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이 카메라는 제 주위의 것들을 더 많이 봅니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반대의견이나 판단이 없기 때문이죠.
뇌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믿는 것들 뿐입니다.
뇌가 볼 수 있다고 투영하는 것 이상을 볼 수 있을까요?
그런 식으로 뇌는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들만 보는 것이죠.
우리의 삶은 늘 조건화를 통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과 맞는 패턴만을 연결시킵니다.
우리는 현실을 창조 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창조하는 기관입니다.
우리는 항상 현실 속에서 결과를 창조해 냅니다.
우리는 항상 기억의 거울에 비춰보고 난 뒤에 그것들을 인식합니다.
우리가 견고하고 거대한 갑판위에 살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정답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학적으로 우리는 항상 관찰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을 인식하고 볼 수 있게 하는 !
우리의 뇌가 인식하는 것들에 의해 한정되어 있습니다.
뇌는 우리에게 사물을 인식하고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레서 이 모든 것들이 단지 거대한 환상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외부에 있는 것을 보기위해 외부로 나가는 길은 사라집니다.
우리의 뇌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과 뇌에서 일어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밖에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과
동떨어진 외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삶의 방향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멈추지 않는
전자단계의 흐름 엉킴이 중첩되는 결과에 좌우 합니다.
물질은 우리가 오랫동안 그렇다고 생각해온 것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물질을 궁극적으로 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원자나 분자 안은 대부분 이 공간이고 입자의 크기는 극히 작습니다.
나머지는 진공입니다.
입자는 항상 존재와 소멸을 반복합니다.
그러면 소멸되었을 때 그 입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시간의 방향에는 신비라고 하는 거대한 신비가 존재합니다.
우주의 기본법칙은 과거와 미래 사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물리 법칙에서 사용하는
미래를 바라볼 때 쓰는 인식론적인 관점이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주물리는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수수깨끼가 생깁니다.
왜 우리는 어떤 것은 지금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하고
과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오직 미래에만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는가 하는 것들...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원칙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공은 대부분 텅 비어있죠.
사실 우주는 대부분 텅 비어있습니다.
우리는 우주가 비어있고 물질은 견고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에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없습니다.
우주는 전혀 물질적이지 않습니다.
원자를 살펴보죠.
우리는 원자를 딱딱한 공기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자는 중앙에 밀도가 높은 물질을 가진 작은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위는 전자가 무작위의 가능성으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맞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밀도가 높다고 생각하는 원자핵 역시
전자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를 반복합니다.
이러한 비물질적인 물질들에 대해
우리가 가장 견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구체화된 정보조각 같은 것입니다.
물질을 구성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생각이나 개념, 정보들입니다.
이 전자들은 충전이 돼서 닿기도 전에 다른 전자들을 밀어냅니다.
우리가 시간의 앞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단지 의식의 경험에 불과 합니다.
우주원리에서의 우리는 시간을 거꾸로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항상 의식적으로 끝없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관찰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관찰하면 입자처럼 보이죠.
관찰하지 않을 때는 가능성의 파동이 존재하고
관찰할 때는 경험의 입자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견고한 것이라고 여기는 입자는 실제로 중첩되어 존재합니다.
가능한 위치가 펼쳐지고 입자는 한 순간 모든 위치에 존재합니다.
조사하는 순간 입자는 가능한 위치 중 하나로 고정됩니다.
중첩이란 입자가 동시에 두 개 이상의 상태로 둘 이상의 위치에 존재하는 것,
세포입자을 감싸는 전자가 선택할 때까지는
몸의 세계는 가능한 조각들로 존재한다는 것의 중첩입니다.
동시에 여러곳에 존재하던지
많은 가능성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들로 있고
그리고 하나를 선택해 다른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물질은 물질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주위의 사물을 내가 입력하거나
선택과는 별개로 이미 존재하는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서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없애야 합니다. 대신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
물질세계라 하더라도 의자,탁자, 방, 카페트, 카메라까지 포함해서
이 모든 것들이 단지 의식의 가능한 흐름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흐름에서 순간순간 선택해서
나의 실질적 경험이 구체화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너무 중요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원자는 물질이 아니라 단지 경향일 뿐이기에....“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경험과는 별개로
세계가 외부에 이미 존재하는 것에 나의 경향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사물을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관찰자로 가능성과 확률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관찰자란 무엇일까?
저는 관찰자를 몸속에있는 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계속의 귀신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껍데기를 움직이는 것은 의식입니다.
그리고 의식은 주위를 관찰하고
몸은 온갖 종류의 감각기관으로 갖추고 주위의 신호들을 포착해 냅니다.
물은 4대 원소 중에 수용성이 가장 뛰어납니다.
물은 비 물리적인 현상에도 반응합니다.
생각이 어떻게 물 분자구조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대부분 알고 계시죠.
우리몸의 90%가 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매혹적인 이야기죠 놀랍지 않나요?
만일 물에 생각을 전하는 일들을 할 수 있다면 생각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해 보세요.
정말로 생각 하나만으로도 몸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실질적인 방식으로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의지를 적어내려 가다가도 지워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게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런 다음 다시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시간적 평균으로 보면 그 의지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결국 그 의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믿어버리는 사실로 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것을 견고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갇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일한 현실에 갇혀버립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구체적이라면 분명 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실제 현실을 바꿀 수도 없게되죠.
하지만 현실이 나의 가능성 즉 의식 자체의 가능성이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내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느냐의
문제가 다가오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고
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라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의 이미지를 확정할 수 있을까요?
고전적 사고관에서는 나는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현실에서 어던 역할도 맡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나름대로 움직이는 물질적인 존재입니다.
결정적인 법칙에 의해서 말이죠.
그리고 수학은 주워진 환경 속에서 사물이 움직이는 것을 결정합니다.
경험자인 나는 어떤 역할도 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새로운 관점에 따르면
수학이 어떤 것을 알려줄 수도 있고
이러한 움직임들이 취하는 여러 가능성을 알려줄 수도 있지만
네가 나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경험은 알려줄 수 없습니다.
내가 그 경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내가 나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폭탄선언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질책이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무엇인가?
그리고 너의 인생이 왜 내 인생의 목적에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도대체 사물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의 생각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현실의 경험 속으로 성공이란 생각이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생각의 본질이 존재하는 걸까요?
난 내가 실제라고 생각하는데....!!
세상은 현실의 시간선 위에서 우리가 선택하기 전 까지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하죠
우주학에는 우리 각자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합니다.
거시적인 세계도 존재하고 세포의 세계도 존재합니다.
원자와 핵의 세계도 존재합니다.
이 세계들은 각자 모두 다른 세계입니다.
그 세계들은 나름의 언어와 수학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작은 세계가 아니라 각자가 모두 다른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 세계들은 서로 보충해 줍니다.
왜냐하면, 저는 원자이기도 하고 세포이기도 하며 눈으로
보이는 생물학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진실이고 단지 다른 단계의 진실일 뿐입니다.
과학과 철학에 의해 밝혀진
가장 깊은 진실은 단일성이라는 기초적인 진실입니다.
현실의 가장 깊은 소립자적 단계에서는
여러분과 저는 글자 그대로 하나입니다.
무위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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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