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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로니에 풍경 원문보기 글쓴이: (08)이선희
제7강 쇼와유신과 국가개조운동
1. 위기(Crisis)란 무엇인가?
- 정치학에서 위기란 시간과 중요성, 그리고 예측성(돌발성)에 의해 정의된다. 즉 예측하지 않은 일이 돌발적으로 발생하여 짧은 시간 내에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세우지 않으면 중대한 결과가 발생하는 상황이 위기라고 할 수 있다.
2. 위기 혹은 위기상황과 위기의식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 위기와 위기의식, 혹은 위기담론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차원의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위기가 절대온도라고 하면, 위기의식은 체감온도에 가깝다.
- 어떠한 위기상황에서 세계관과 사유방식, 관념이나 신념의 차이는 무엇을 지킬 것이며, 무엇을 양보할 것인가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3. 위기상황은 정책결정과정에서 어떠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가?
- - 심리학적으로 보면 위기상황 하에서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고조되며 이러한 상태에서는 가능한 모든 정책대안들을 면밀하게 분석, 검토하여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골라내는 합리적 선택이 불가능해진다.
- 특히 불안과 긴장 상태에서는 대체로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그 대신 상대방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며 상대방의 의도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려는 충동이 강해진다.
- 뿐만 아니라 빠른 시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정책결정자는 새로운 정보를 평가함에 있어 관념이나 신념, 그리고 유사한 사건에 대해해 이미 가지고 있는 상(像,image)에 의거하려는 충동을 강하게 받게 된다.
4. 일본군부, 특히 청년장교들은 쇼와시기의 위기상황에서 왜 일본의 정치와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리고 일본의 군부세력이 1930년대를 전후해서 갖고 있던 불만이란 무엇일까?
- 1882년 천황이 군인에게 내려준 <군인칙유>는 교육칙어와 더불어 일본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짐은 너희들 군인의 대원수이니라. 그런즉 짐은 너희를 손발같이 의뢰하고 보호하며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고 조상의 은혜에도 보답할 수 있는지 여부는 너희들 군인이 맞은 직분을 다하고 못하고에 달려있다.
.....오로지 자기의 본분인 충절을 지키고 의리는 산보다 무겁고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고 각오하라. 아래 사람이 상관의 명을 받는 것이 곧 짐의 명을 받느는 도리로 여길지라."
따라서 군인들은 유사시에는 세상의 악에 물들 지 않은 자신들이 나서서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장교의 출신성분이 점차 중류계급 혹은 서민층으로 확대되면서 당시 농촌 및 서민들의 생활이 날로 피폐해져 가는 문제의 책임이 정경유착 및 금권정치 같은 재계, 군벌 권력층의 부패와 타락에 있다는 인식이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군부는, 일본의 안보가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는 있지만 많은 국가적, 문명사적 과제를 안고 있는 일본이 정당정치, 특히 당파정치를 해간다는 것이 변명할 여지가 없는 사치이며, 국민의 소망과 필요에 대한 불감증에 다름 아니라고 간주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1차대전 이후 수차에 걸친 군축이 정당, 재벌, 원로, 군벌 등이 경솔히 세계 풍조를 타고 군부를 희생시켜 가면서 국가를 위태롭게 만드는 경솔한 행동이라는 생각을 가졌고 따라서 공격의 당면목표를 이들에게 맞추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간 국가 개조론자들과 혁신계 군인이 연합하여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을 취한 사건은 1931년 3월에서부터 시작된다.
5. 1931년 9월에 일어난 만주사변은 일본정부가 군부의 행동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일까?
-일본의 관동군은 시데하라 외상으로 대표되는 평화외교, 경제중심의 외교 이념을 '바보같은 꿈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몽상적인 정책을 버리고 '현실적'이라고 생각되는 방책을 추진하려고 했고, 만주사변은 그것이 표면화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이른바 '15년전쟁'이라고 부를만한 지리한 전쟁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이 시기 이시하라 간지를 비롯한 관동군 참모들은 세계가 '인류 최후의 대전쟁'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야말로 국제정치의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만주사변은 당시 일본 국민의 '대내적인 불만'을 '대외적인 애국적 열정'으로 몰입시키는 기점이 되었고, 일본 외교의 방향을 군사문제 위주로 다시 복귀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결국 일본은 1932년 9월에는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만들어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시켰고, 구미국가들이 이에 대해 비난하고 나서자 1933년 3월 국제연맹 탈퇴, 1934년 12월과 1936년 1월 워싱턴 및 런던 양 조약의 파기와 같은 파국적인 상황을 연출하면서 기왕의 구미국가와의 협력체제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과정에서 국제연맹은 어떠한 단호한 조치도 취하지 못함으로써 사실상 상황을 양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6. 1931년 3월사건 이래 청년장교와 민간인 사상가들이 중심이 된 쇼와유신운동을 일본정부가 쉽게 제어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쇼와유신운등을 추진해간 이 급진적 국가 개조론자들은 다른 반체제제 지식인들처럼 쉽게 다루기 어려운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의식에 있어서 이들 국각 개조론자들 만큼 일본의 국체에 대해 흠잡을 데 없는 신앙을 가진 세력이 없었다는 명분상의 측면과 함게 물리적인 힘을 장악하고 있던 고위 군인들 또한 이들의 불만을 많은 부분에서 공유하고 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7. 1937년 3월 문부성에서 <국체의 본의(本義)>를 발간, 배포하게 된다. 그 주요한 내용은 무엇일까?
--<본의>는 일본에 수입된 서양의 이데올로기들이 합리주의 실증주의에 근거한 계몽주의의 산물이며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개인주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 서양과 일본이 겪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혼란과 위기 상황이 개인주의에서 빚어진 산물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일본의 국체는 '신성한 기원을 지닌 만세일계의 천황제를 모태로 하는 가족국가'이기 때문에 충과 효는 완전히 일치하는 가치체계일 뿐 아니라 이러한 특징을 지닌 일본 역사의 전통에는 진정한 의미의 '조화'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어 일본의 '상무정신(尙武精神)"하에서는 평화와 창조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에서 '전쟁'도 파괴와 지배를 위해서가 아닌 대화(大和)와 평화, 창조를 위한 것이 되며, 이 안에서 사는 개인은 순수하고 사심없는 마음으로 자신의 사사로움을 없애 근본적이고 참된 대아(大我)를 위해 스스로를 소멸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헌신의 정신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국체를 분명히 하여 이를 바탕으로 서양의 문화를 채택하고 승화시켜 세계 문화 발전에 기여해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8강 제국일본과 신민의 길
1. 어떠한 사회이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이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신민의 길(臣民の道)』에 나타나듯이, 잘못된 권력이 윤리적인 명분에 의해 덧칠되고 도리의 이름으로 권력화가 진행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
-이념은 어떠한 특정한 신념체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념체계가 '피지배자가 자신의 피지배상태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일종의 허의의식으로 변질되고, 윤리적인 논의를 통해 잘못된 정치권력의 악마적인 성격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면, 개개인의 정신은 분열적이고 파탄적인 성향을 띄게 될 소지가 강해진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되면 윤리는 개인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샘솟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인 외부 권력에 종속되어 권력에 대한 의지를 정당화시키는 구실 안에서 변질되어 사용될 수지가 커지게 마련이다.
2. 일본인들의 미적 정서나 미적 가치를 일본 군국주의가 정치적으로 활용한 사례를 들어보라
-이에 대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중에서도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꽃인 사쿠라를 통해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주지하는 것처럼 사쿠라는 오랜 세월동안 일본인으로부터 사랑받아왔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는 사쿠라에 대한 일본인의 애정을 이용하여 사쿠라의 이미지를 일본신민의 헌신을 끌어내는 수단으로 동원하게 된다. 즉 두려움 없이 죽음과 마주할 수 잇는 고결한 정신을 야먀토 다마시라고 부르고, 사쿠라 꽃의 시각적인 미적 가치를 야먀토 다마시이(大和魂)이라는 개념에 접합시키는 것이다. 환언하면 사쿠라가 한 순간 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상기시키면서 옥쇄(玉碎) 즉 옥처럼 산산히 부서져 죽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지를 세뇌시켰다. 뿐만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에 피어나는 사쿠라가 전사한 병사가 환생한 것이라고 선전되었다. 일본군에 가장 유행한 군가가 '동기의 사쿠라'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너와 나는 동기 사쿠라/ 같은 병학교의 뜰에 피어/ 피었다 지는 것은 각오한 바/ 기꺼이 지겠다. 나라를 위해"
3. 포츠담 선언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 결정 시기, 그리고 원폭투하에 관련해서는 여전히 논쟁적인 부분이 많이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 1945년 7월 16일
-포츠담선언 발표: 1945년 7월 26일= 13항: "일본정부가 즉시 전 일본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지 않으면, 일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신속하고도 완전한 괴멸뿐"
-7월 초순 일본의 정책결정세력의 중추부에서 이미 미국과 영국에 대한 강화를 요청하는 진언이 존재, 그러나 히로히토가 소련을 중개자로 한 화평 교섭을 고집하면서 결단을 미루고 있었고,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일본의 국체를 수호할 방안은 무엇인지, '3종의 신기(神器)'를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지 등의, 천황의 안전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지 등의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히로시마 피폭: 1945년 8월 6일 =즉시 7~8만, 1945년 말: 14만, 1950년: 20만
-나가사키 피폭: 1945년 8월 9일 =즉시 3~4만, 1945년 말: 7만, 1950년: 14만
-45년 8월 9일 심야의 <어전회의>를 다룬 자료에는 도쿄대공습, 오키나와 전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의 원폭투하로 숨져간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보다는 '일본의 패배를 슬퍼하는' 정책결정자들의 눈물만 등장한다.
-아울러 트루먼의 원폭투하 결정에 대해서도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다는 논쟁이 존재한다. 트루먼의 원폭 투하 결정이 오로지 전쟁을 끝내기 위한 것이었는지, 전후 국제문제에서 소련을 압박하는 것을 포함하여 어느 정도 다른 요인을 고려한 것인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4.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투하를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이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할까? 토론해보자
-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는 히로시마에 살던 사람들의 아픔을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의 김지하는 오에 겐자부로에게 히로시마가 왜 원폭을 맞아야했는지를 일본인들은 생각해 보아야한다고 따끔한 지적을 한 바 있다. 이후 오에 겐자부로는 이러한 김지하의 지적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김지하의 지적만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을 이해하고 기억의 저편으로 접어둬도 되는 것일까?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보통사람들. 여기에는 조선인도 포함. 21세기의 상황에서는 민족이라는 관점에서만 문제를 보지 말고, 인류 혹은 시민의 관점에서 함께 접근해가는 성숙한 자세 필요. 물론 일본의 과거역사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앞으로도 우리가 견지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피해의식에 묻혀 원폭이 던지는 메시지를 협소하게 해석하게 넘어가고 만다면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사태로 이어지지 않을까?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5.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인들은 라디오를 통해 히로히토 천황의 '옥음방송'을 듣게 된다.
일명 '종전(終戰) 조서'에 담긴 내용에는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일까?
- '종전조서'에는 패전에 관한 인식이 없으며, 주변국에 대한 침략 등에 대한 언급이 젼혀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태평양전쟁을 '자존과 자위의 전쟁'이며 '동아의 안정을 위한 전쟁'라고 의미 부여함으로써 '전쟁책임' 문제를 애초에 회피하고 있다. 더욱이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천황의 '성스러운 결단'만이 강조됨으로써 '개전조서'를 발표했던 천황의 전쟁책임 문제는 애매모호하게 봉합되어지고 오히려 천황제는 지속되어야하는 것이라는 의도를 전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전후 일본의 역사인식에서 나타나게 되는 문제가 종전조서에 이미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6. 일본사회는 일본의 전쟁과 군국주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 일본의 좌파적 관점을 견지하는 지식인들은 15년 전쟁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 곧 서구의 제국주의라는 흐름위에서 살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후발국가인 일본이 전쟁으로 치닫게 되는 측면도 중요하지만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점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일본제국주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할 필요성이 약해질 소지가 크다.
한편 일본의 중도적 지식인 혹은 일반인들은 대체로 15년 전쟁이 잘못된 것이며, 불행한 역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15년전쟁은 메이지유신이후 잘 해오던 일본이 궤도를 일탈하게 되면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반면 일본의 우익들은 일본의 전쟁이 대체로 정당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실패했기 때문에 비판의 도마위에 올라간 것이지,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인들에게 일본의 메이지 시기는 훌륭한 시기였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의외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성찰이 풍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여지가 많음을 알 수 있다.
7. 19세기 메이지 일본과 20세기 제국 일본의 행보는 과연 연속이라고 보아야하는가 혹은 불연속 내지 단절로 보아야하는가? 이에 관해 토론해보자.
- 이 문제는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가 메이지 이후 일본이 걸어 온 행보로부터 일탈이냐, 아니면 메이지 입헌체제의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냐”라는 질문이라고 바꿔볼 수 있으며, 일본근대사를 관통하는 가장 논쟁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필연적’으로 파시즘 혹은 초국가주의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하거나, 혹은 이것은 매우 우연적인 사태였다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답변은 매우 명쾌한 것처럼 보이지만, 별로 의미없는 답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일본의 추락은 이미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다거나 혹은 반대로 일본의 추락은 전혀 예기치 못한 우연한 결과 였다는 둘 중 하나의 선택지 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이 질문에 대해 Yes 나 No 라고 답한 사람들 간에 의미 있는 대화가 성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그것보다는 양자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으며, 동시에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를 구체적인 역사적인 경로를 따라가며 종합적으로 통찰해가야 메이지 일본 내셔널리즘의 가능성과 한계를 보다 사실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으며, 대화의 가능성도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많은 성찰을 거듭해야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8. 일본인에게 제국주의와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 일본의 보통 사람들은 전쟁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여기서 일본 국민을 피해자라고 한 것은, 오늘날 일본에서 흔히 논의되는 것처럼, 일본인들이 미군들에 의해 피해를 본 피해자라는 측면이라기보다, 일본 내부의 억압과 천황제 이데올로기, 국체이데올로기의 구체적인 피해 당사자라는 것이다. 한편 가해자라고 하는 것은 그토록 왜소하고 착한 사람들이 무서운 ‘광기’를 발하며, 악마적인 정치에 적극적으로 동의했거나 혹은 적어도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무책임한 국가의 행태를 견제하지 못함으로써 사실상 인류에 대한 범죄에 동참했다는 의미를 안고 있다.(이른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성찰요) 제국 일본의 전쟁에 의해 주변국가 국민들은 깊은 상처를 입고 헤아리기 어려운 피해를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들 전체가 가해자로서 비춰지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에는 이른바 역사문제, 과거사문제가 주변국의 피해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오던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진행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히려 일본 내부에서 비판적인 자기 성찰을 통한 본격적인 울림이 있어야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균형’ 잡힌 일본의 성숙한 자기성찰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제9강 미국의 점령통치와 전후 개혁
1. 냉전 시대 핵전쟁의 가능성이 가장 컸던 상황은 언제일까?
① - 1962년 10월 미국은 소련이 쿠바에 비밀리에 핵미사일을 배치했음을 알게 된다. 케네디 대통령의 대응은 '격리'의 이름으로 실시된 쿠바에 대한 부분적 해상봉쇄였고, 미국의 핵전력은 유례없는 경계태세에 돌입한다. 이른바 쿠바미사일위기라고 불리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바로 이 때가 핵전쟁의 위험이 가장 높았던 시기였던 때로 평가된다. 케네디의 격리 선언이후 지속되던 양국의 외교적 대치상태는 흐루시초프가 미국의 쿠바 불침공 보장을 조건으로 미사일을 철수함에 따라 6주 만에 해소되었다.
2. 다음은 1945년 9월 27일 일본의 쇼와천황이 맥아더 장군을 접견한 사진이다. 이 사진은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3. 평화헌법은 제9조의 내용이 특히 중요하다. 그러면 9조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 것일까?
- 평화헌법 제9조 :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이 발동하는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방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기타 전력을 보지(保持)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제10강 상징천황제화 평화헌법체제
1. 평화헌법은 패전직후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 일본국 헌법이 GHQ에 의해 주도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 배경에는 당시의 일본정부가 일본의 민주주의 실현을 기축으로 한 점령정책의 방향을 존중하고 독자적으로 신헌법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한 것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GHQ측에서는 헌법을 주도적으로 제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맥아더 초안이 만들어지는 데 일본 민간에서 만든 초안들이 기초자료로 활용되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일 것이다.
2. 전전과 전후의 일본 천황제를 연속으로 보아야할까, 불연속 혹은 단절로 보아야할까?
-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해 ‘구조’와 ‘과정’이라는 두 개의 측면을 통하여 대답을 생각 해 보자. 우선 구조라는 측면에서 보면, (생각해보기 코너에서 다룬 것처럼) 전전과 전후의 천황제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분명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권력과 권위의 일체로서 전전 천황제가 전후에는 양자가 분리됨으로써 천황은 권위의 중심이지만 실질권력과는 어떤 식으로든 거리를 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적 측면에서 보면 양자간의 관계는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이번 강의를 통해 언급한 바 있는 역사적 과정, -즉 에도시대 미미했던 천황의 위상, 그리고 막말의 상황에서 메이지 유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천황이 권위의 중심에서 정치권력과 권위의 일체로 부상하는 과정, 그리고 다이쇼이후의 위기상황과 패전 직전의 극적인 위기상황에서 다시 부상하는 천황의 위상 등 -을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으로 고려하면 전후의 상징천황제가 앞으로도 극적으로 부상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전과 전후 천황제의 연속과 불연속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는 천황제가 어떻게 지그재그로 맞물려 움직이는 것인지를 통찰하면서 천황제의 의미를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3. 한국전쟁은 전후 일본의 진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의 영향을 간략히 설명한다면?
- 한국전쟁으로 인한 특수는 전후 일본 부흥의 기폭제가 되었다. 평화헌법의 체계 안에서 경찰예비대가 창설되어 이후 자위대가 만들어지게 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안보조약의 체결 등도 한국전쟁의 경과와 맞물려 진행되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일본을 공산권에 맞서는 ‘방파제’로 인식하는 확실한 계기가 된다. 미국의 세계전략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방파제로서의 주요한 거점이 된 곳이 오키나와였다.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은 군사거점으로서 오키나와의 전략적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베트남전쟁에서도 오키나와는 최대규모의 폭격거점으로 활용된다.
4.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냉전 상황에서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 1951년 9월 4일부터 5일 동안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전쟁의 전후처리를 위한 국제회의가 54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다. 중국과 인도는 회의에 불참했으며, 한국은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당사국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공식참가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옵저버 자격으로 참가했다. 당시 회의를 주도한 미국이 한국정부의 회의 공식참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인데, 이유는 일본을 아시아에서의 반공봉쇄를 위한 중추기지로 삼고자하는 미국의 전략적 고려 때문이었다. 미국은 한국이 강화조약의 서명국으로 참여하여 상당한 규모의 배상을 요구하게 되고, 이 요구가 관철될 경우 일본의 경제적 회복이 지연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미국은 일본의 주권회복과 재군비, 그리고 미군의 계속적인 일본 내 기지사용과 주둔을 추구했는데, 샌프란시스코회의는 이러한 미국의 정책을 반영하는 내용의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1951년 9월 8일 체결된 강화조약에는 49개국이 조인했으며,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은 서명을 거부했다. 그리고 강화조약과는 별도로 미일양국의 상호방위보장조약도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1952년 4월부터 발효되었고, 이로써 미국의 일본점령은 종결되고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반면 미국은 오키나와를 비롯한 일본 내 기지를 계속 사용 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게 된다.
5.패전 이후 일본은 이후 역사적인 문제로부터 많은 부담을 부여받게 된다. 일본이 현재까지 과거의 부담을 극복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독일의 전후처리를 고려하면서 이를 설명하라.
- 독일의 경우 전승국, 연합국, 점령국에 의한 전후처리 뿐만 아니라 독일 자신이 전후처리에 관여하여 '과거의 극복'에 직접 나섰다는 점은 일본의 전후처리와 가장 큰 차이.
독일의 '과거의 극복' 노력에는 첫째, 전쟁책임이 아닌 가해자에 대한 책임추궁. 둘째, 피해자의 구제 및 보상, 셋째, 재발방지라는 세 개의 축이 존재했으며, 독일인들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를 풀어나가려고 노력했다.
이는 독일이 과거의 부정적인 유산에 대해 감싸고도는 것이 아니라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스스로를 과거의 속박에서 분리시키는 지혜를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근린제국주의의 성격을 지닌 일본제국주의가 주변국들에게 남긴 깊은 상처를 돌아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상처를 돌아보고 깊이 성찰하는 시간조차도 충분히 갖으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전히 자신들이 역사적 피해자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역설적으로 역사적 그늘에 스스로 묶이고 만 결과를 낳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11강 55년체제의 성립과 고도성장기 일본정치
1. 55년체제의 의의를 설명하라.
- -(60년 안보투쟁이후)보수당 우위의 안정된 지배체제 정착 : 보수합동을 통해 등장한 정당시스템은외형상으로는 보-혁 양당제였지만, 실제로는 1과 1/2 정당제. 대항정당으로서의 사회당 의석률이 자민당 의석률의 1/2에 불과. (보수> 혁신) = 자민당 일당 우위 하의 보-혁 양당제적 구조.
- 자민당 파벌정치의 제도화 : 보수합동에 참여한 정당들의 인맥이 그대로 파벌로 유지됨. 자유당계로부터 사토(佐藤)파와 이케다(池田)파가, 민주당계로부터 기시(岸)파와 코노(河野)파가, 그리고 개진당계로부터 미키(三木)파가 형성(이후 자민당의 5대 파벌 구성). 야당이 열세이고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낮은 만큼 실질적인 정책결정은 정당 내의 정치, 즉 주요 파벌간의 경쟁과 연합의 결과가 되었던 것.
- 성장 위주 경제정책의 일관된 추진 가능.
2. 근대 국제관계에서 ‘협력’이 힘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 근대국가는 주권국가이며, 근대 국제관계는 이러한 주권국가들 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권국가의 배타적 독립성으로 인해 국제사회는 모든 행위자들을 구속할 수 있는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할 수있는 권위와 힘을 가진 ‘세계정부’가 존재하지 않으며, 구조적으로 무정부적 성격을 갖는다. 이에 따라 근대 국제관계는 독립적인 선택을 하는 행위자간에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 딜레마라고 할 수 있는 ‘상대적인 이익’의 문제, 그리고 ‘배신’의 문제 등이 늘 따라 다닌다. (사슴사냥의 사례)
3. 안보외교란 자국의 안전보장을 강화하기 위해 행하는 외교를 말한다. 근대 국제관계에서 ‘안보외교’가 핵심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 근대국제사회는 무정부적 성격으로 인하여, 모든 국가는 최종적으로는 자국의 안전보장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국가들은 전쟁을 억지하고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군비를 강화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이 상대국가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나의 안전이 위협받을 가능성이 증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안보딜레마’로 인하여, 근대 국제관계에서는 군비경쟁의 악순환이 일어나게 될 소지가 항시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이유로 안보문제는 외교정책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으로 고려해야할 사항이 되는 것이며, 근대국제질서에서는 대개의 경우 일국의 군사력만으로는 전쟁억지력을 충분히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국가와 군사동맹을 맺거나 다자간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자국의 안전보장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4. 전후 일본의 소극적 안보정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제도적인 틀은 무엇인가?
ⓛ 평화헌법 제9조와 전수방위정책(專守防衛=Exclusively Defense Oriented Policy).
② 비핵 3원칙(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1976년 6월 핵무기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
③ 무기수출 3원칙(공산권 국가, UN의 결의에 의해 무기 등의 수출이 금지된 나라, 국제분쟁의 당사국에
대해서 무기 및 관련기술 수출 금지)=군산복합체의 발전 억제.
④ 미일안보체제의 확립= 일본이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게 한 보호막이자 일본이
세계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제약하는 걸림돌
⑤ 문민통제(civilian control)제도의 확립=일본 방위력의 확대는 일본 국민의 동의 없이 불가능하다는 원칙.
5. 전후 일본의 ‘보수본류’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가?
- 일반적으로 보수본류라고 하면, 요시다 시게루의 정치적 입장을 계승한 정치가나 정치적 파벌을 가리킨다.
즉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를 정치적 이념에 입각해서 설명한다면, 평화헌법의 정신을 견지하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미일안보조약 등 전후 일본을 지탱한 주요 틀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고 하는 의식을 가진 보수세력이 보수본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보수본류는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을 겪게 되면서 세계적으로 나타난 복지국가 이념의 후퇴와 시장원리주의의 재부상 움직임과 맞물리면서 쇠퇴하게 된다.
6.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의 ‘일본열도개조계획’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어떠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는가?
- 이는 대규모 공업지대의 배치, 신칸센과 고속도로 등의 전국적인 교통 네트워크의 구축, 그리고 지방으로의 인구분산을 목적으로 한 25만 도시의 건설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책이 추진됨에 따라 땅투기와 주식투기가 성행함으로써, 부동산 값이 폭등했고 그 영향으로 물가가 폭등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1차 석유파동을 맞이하게 되면서 일본의 고도성장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제12강 55년체제의 위기와 변용
1. 국제공헌론에는 비군사적 국제공헌론과 군사적 국제공헌론이 있다. 이에 대해 설명하라.
- 비군사적 국제공헌론이란 국제사회에 대한 일본의 공헌이 어디까지나 경제원조나 기술원조 등 비군사적 분야에 국한되어야 하며, 군사적 분야에서의 개입은 극히 자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말한다. 반면 군사적 국제공헌론이란, 비군사적 국제공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위책임의 분담이나 UN의 평화유지군(PKO) 활동에의 참여 등 군사적 분야에서도 서방 동맹국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말한다.
2. 70년대 나타난 두 차례의 석유파동은 일본이라는 국가와 사회시스템을 크게 바꿔놓았다. 이에 관해 설명하라.
- 석유파동으로 대폭적인 '경영합리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노조는 저항할 의지를 잃고 석유파동을 국난과 같이 받아들이고 노사협조, 관민일체의 주장에 빨려 들어갔고, 이에 따라 일본의 노조는 쇠퇴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정치의식도 보수화해갔고, 그 결과 일본은 대기업 우선의 기업국가 혹은 경제국가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다. ‘경제대국’과 ‘생활소국’이라는 일본의 양면성은 고도 성장기에 형성되어 석유파동을 계기로 완성되었다고 평가된다.
3. 20세기 후반 근대에 나타난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새로운 화두로 등장한 오리엔탈리즘이란 무엇인가?
-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동양을 바라볼 때 가지는 선입견, 혹은 서양의 동양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관념, 이미지를 의미한다. 유럽은 동양을 스스로와 대조가 되는 이미지, 관념, 성격, 경험을 갖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보는 주체'인 유럽을 중심으로 아시아를 바라보는 시각으로서, '문명화의 사명'을 강조한다.(케이크 나누기의 사례를 통해 오리엔탈리즘 설명)
20세기 후반 근대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오리엔탈리즘이 세계적인 화두로 등장하였다.
4. 전후 일본의 통상외교는 대미관계를 중심축으로 전개되었다. 이를 크게 3개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면?
-첫째시기: 미국이 압도적인 경제적 우위 하에 호의적이고 관용적인 통상정책을 전개한 시기. 일본은 이시기에 전후 경제부흥 달성.
-둘째 시기: 미국 경제의 상대적 지위가 뚜렷하게 하락한 6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의 시기. 미일간 무역불균형 심화. 미국의 통상정책은 보호주의로 변화, 일본은 통상마찰을 완화하기 위해 수출자주규제로 대응.
-셋째 시기: 80년대 중반이후 현재까지. 통상마찰에서 더 나아가 구조마찰로 발전. 미국은 보다 적극적인 시장개방과 불공정 거래관행의 시정 요구. 일본도 적극적인 국제공헌과 국내 구조개혁 추진.
5. 쇼와 시대 일본정치의 대체적인 흐름을 주요한 전환점을 중심으로 설명하라.
- 쇼와초기의 대공황→ 15년전쟁(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원폭투하 그리고 패전)과 초국가주의(국체론, 천황제이데올로기, 옥쇄< 신민의 길, 근대의 초극)→무조건항복→연합국의 일본점령과 전후개혁추진 →동유럽의 공산화. 중국공산화. 한국전쟁 등 동서냉전의 진행과 미국의 일본에서의 점령정책수정. (‘역코스’ reverse course 진행으로 전후처리 과정 생략) ⇒‘평화헌법’과 미일안보조약을 근간으로하는 전후체제의 형성, 경제우선주의 전략⇒ 고도 경제성장, 자신감 회복 ⇒ 미일경제마찰의 심화. 버블경제현상 심화. ⇒쇼와시대 종언/탈냉전.
제13강 탈냉전질서와 일본정치
1. 일본이 탈냉전의 상황에서 적극적인 안보외교를 추진하는 요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공헌 요구
-중국의 급부상과 아시아의 세력균형의 변화.
-북한정세의 변화: 북한의 미사일과 핵무기 보유. 1993년 북한의 노동미사일 실험 발사를 시작으로 1998년대포동 미사일 실험 발사는 일본열도의 위기의식을 부추김.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안보문제로 부상.
-보수화된 국내 여론: 경제력에 걸맞은 적극적인 대외 역할 담당할 것 요구. 오자와 이치로()의 ‘보통국가론’ 등장. 전후의 상인국가, 통상국가의 이미지를 벗고, 군사적 보통국가로 거듭날 것 주장.
2. 세계적 차원의 안보환경 변화에 따라 일본의 선택지는 두 개로 대별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설명하고 양자간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생각해보라.
-선택지 : A)독자적인 안보전략의 추구 vs. B)미일안보동맹의 효용성 발전적으로 계승
-차이점 : 전자는 자주적 재군비를 요구하는 주장으로서 내셔널리즘에 기초한 우익들의 입장인 반면 후자는동북아 지역 안정을 위해 미일안보체제를 지속 발전시키되,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확대하려는 관점. 국제주의에 기초한 실용적 현실주의자들의 입장임.
-공통점 : 헌법 제9조의 개정을 목표로 한다. 일본은 그동안 ‘해석개헌’을 통해 헌법9조가 개별적 자위권의 행사마저 부인한 것은 아니라는 해석을 내리고 있었으나,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는 금지되어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공식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헌법상의 제약이 존재하는 한, 미일안보체제 조차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 실용적인 현실주의자들의 생각이다.
3. 일본은 경제대국으로서 국제적으로 많은 재정적 기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까?
-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미래상에 대한 신념과 비전의 부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도 보편적 가치에 기초한 이념이라기보다는 일국적 체험에 기초한 특수이념으로서 전쟁의 피해의식에 기초한 방어적ㆍ소극적 평화주의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한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는 선악에 대한 절대적 가치기준의 부재, 상황논리에 따른 현실순응주의 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일본에 대한 주변국들의 신뢰회복을 어렵게 하고 있다.
제14강 근현대 일본정치문화의 특징
1. 우리의 삶이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 인간은 사회적 동물.
따라서 개인과 조직, 혹은 개인과 전체 간의 긴장은 불가피해진다. 그러면 각자의 자유와 만인의 자유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정치학은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2. 권력이란 무엇인지 설명하라.
-권력에 관한 고전적 정의:
사회적 관계에서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능력(막스베버)→권력관계는 기본적으로 '비대칭'적인 상호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
3. 일본식 의사결정방식에 관해 설명하라.
- 일본식 의사결정방식은 무엇보다 '합의'(consensus)에 이르는 절차를 중요시 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 집단 성원 간에 의견이 결정될 때까지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 경향이 있다. 대신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가능한 많은 성원들의 동의를 얻기 위한 논리적 설득이나 정서적 일체감을 만들어 간다. 둘째, 이처럼 논의를 거듭하다보니 신속하고 시기적절한 결정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또한 결정이 소극적인 성격으로 중화되어진다. 따라서 결정된 집단의사는 집단 성원 대부분의 지지에 의한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일치단결하여 실행되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의사결정은 느리지만, 실행은 성실하게 진행되는 경향을 지닌다.
4. 다수파인 자민당은 왜 야당을 배제한 채 단독으로 의사진행을 하지 않는 것일까?
- 합의를 존중하며 개인보다 조직을 중시하는 일본인의 전통을 반영한 것. 야당이 반대하는 경우 여당은 끈질긴 설득공작을 펼치며, 혹시 예외적으로 결정이 강행될 경우에는 다수결로서가 아니라 위원장 직권으로 행해진다. 이유는 의사 강행의 책임을 위원장 개인에게 전가함으로써 정당 간의 결정적인 대립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럴 경우 위원장의 사과나 사퇴로 문제를 수습하는 것이 오랜 관행이다.
제15강 21세게 정치의 서막/강의 총정리
1. 북핵문제가 21세기 안보환경에서 특히 주목받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해 달라진 안보환경이라는 측면을 고려하여 설명하라.
- 911테러이후 달라진 안보환경 하에에서 대량살상무기와 테러조직의 연결은 세계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안보위협으로 간주되고 있다. 북한의 정세가 불안한 상황에서 북한의 핵능력이 테러조직에게 절대 이전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따라서 북한의 핵은 21세기의 달라진 안보환경에서 그 존재만으로도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에게 가장 큰 위협요소로 간주되는 것이다.
2. 2003년 11월에 미국이 발표한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계획(GPR: Global Defense Posture Review)은 어떠한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가?
- 911테러이후 미국의 '동맹'전략은 크게 변화한다. 기존의 해외주둔 미군은 배치된 지역에서 싸울 것을 전제로 주둔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미군이 배치된 지역에서 싸울 가능성이 크게 줄었으며 더욱이 대양 너머의 동맹국들의 영토를 방어하는 것이 더 이상 미국에게 원거리 보호막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군의 새로운 글로벌 방위태세의 핵심은 반테러전쟁과 미래의 위협에 보다 효율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해외에 주둔하는 미군을 필요한 곳에 그리고 미군의 주둔에 가급적이면 우호적인 곳에 주둔시키려는 것이다.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계획은 만일의 사태에 신속하게 대응하면서 다양한 전장능력에 유연한 적응력을 가진 ‘보다 기민하고 빠르며 경량화된’ 해외주둔군을 양성하겠다는 목표를 갖는다. 즉 냉전기의 붙박이형 군대에서 신속기동대응군 형태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3. 전환기적 상황일수록 유연한 사고와 풍부한 상상력의 필요성이 중요하다. 왜 그런 것인가? 설득력 있는 사례를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해보라.
- 각주구검( 刻舟求劍)의 사례: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이 검을 품고 양쯔강을 건너다 강에 검을 목적지에 도착한 후 그는 표시해둔 곳으로 내려가 검을 찾으려 했지만 검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강물이 흐른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였던 것. 만일 그가 흐르는 강물위에 서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 사람의 행위는 매우 정당한 대응방식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각주구검의 사례는 게임의 룰이 변하고 경기장이 바뀌는 상황 즉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전환기를 이해할 때 매우 유용할 수 있다. 이는 기왕의 패러다임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적절하다고 간주되던 방식이 전환기의 상황, 즉 새롭게 부상한 패러다임에서는 이미 전혀 ‘비’현실적인 해법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