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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서울 청진동에 있던 한 합동 변호사 사무실이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합동 법률사무실 이었지만 실제로는 동립 운동가들이 모여 이 나라 독립을 위해 얘기를 나누던 사무실이었습니다.
이인선생님이 쓴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
이 사무실은 이인, 김병로, 허헌님이 개설한 합동 법율사무실이고 허헌님이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뒤에도 이 사무실에서 독립에 관한 얘기를 나누웠습니다. 여기에 송진우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이 만났고 이 분들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시던분은 주로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던 홍익범, 아동문학가 송남헌님이었습니다.
홍익범,
허헌, 송남헌님은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옥살이를 하셨고
이 가운데 동아일보 기자였던
홍익범님은 옥사,
1990년 성기석, 조종국님과 함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셨읍니다.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방송인들이 옥고를 치르고 있을무렵
이인님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셨습니다.
이인 선생님은 일본에서
명치대학을
나온후 1923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 해방될 때
까지 변호사 생활을 하시면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단파방송으로 들어온 해외정보를
활용하셨습
니다.
해방 후에는 초대
법무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셨습니다.
오늘 글은 “
경성방송국 단파사건 "
이라는 제목으로 1964년 9월 30일자
조선일보에
실렸으며 1965년에 발행된 선생님 수상 논평집 애산여적
제2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좀 길지만 전체 상황을
파악하시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전문을 올렸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청진동 사무실시절 변호사, 독립운동그룹원입니다.
경성방송국 단파사건
VOA와 중경의 우리말 방송을 청취 (1964년 9월 31일 조선일보) 횃불은 줄기차게
흘렀다.
그것은 일제가 패망하는 1945년 8월
15일
그날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해외에서의
일이요 일체의
조직이 파괴되고 일체의 집회가
금지되고 대부분의 인족
앨리터가
소위 사상범
보호구속령에 의하여 죄 없이 생선두름처럼
엮여
붉은 담으로 사라지곤 하던 해방직전의 국내에 있어서는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원수에 대한 항쟁이
마냥
식어 들어갈 수만 있었으랴 여기에
태평양전쟁도
고비를 넘어선 1943년 국내 민족항쟁의 또 한
장을
장식하는 경성방송국 단파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을 버르집은
일제는
한때 상대국보다 우세했던 화력을
믿고 北支,
南支,
中支를 석권하였다. 중국정부는 서쪽 오지인
중경으로 천도하였고
불령 인도지나까지 침공한 일군은 동양 대륙의 태반을
유린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는 전략적으로 장기전을
각오한 중국군읜 곤비 (困憊)작전에
의거해서의 작전이
그대로 연출되어서의 현상이요, 대륙의
일반을
점거했다는 일본의 영향력도 其實 겨우 점과
선을
유지하는데 급급할 정도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일제는 초조의 빛을 감추지
못했고
그것은 태평양전쟁으로 다가선 1941년도부터는
우리국내에
있어서 거의 히스테리적인 발작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한 증상은 한낱 가냘픈 여학생의 일기 몇 줄을
근거로
어마어마하게 强作해 내였던
조선어학회
사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그들의 광태가 심하면
심할수록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들이 저질러 놓은
일체의
사태를 수습 못하는 고민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는 점점 제국주의자들에게 불리 해가고
피압박민족에게
유리 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제국주의자
스스로가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양태가 이렇다
하여도
외부와의 연락은 일체 두절되고 국내의
감시망이
이중, 삼중으로 휩싸고 있는 조건하에서 당시
시국의
추이에 대한 정확한 정세 판단이란 실로 곤란한 일이었다.
안타까운 인사들을 조금 눅지게 해준 것은 오직 한
가닥
외국인을 통한 정보망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이 정보연락에는 미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하고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했던 홍악범이
당하였고
정보를 제공하는 외국인은 선교사들이었으며
그들은 단파수신기로
모국의 방송을 청취하여 이를
친밀한 한국인들에게
비밀리에 알려 주었던 것이다.
이 무렵 그러니까 태평양전쟁 발발
전후해서
서울 원서동 송진우가와 청진동, 김병로, 이인 합동
변호사
사무실에는 허헌을 낀 송, 김, 이의 4자 회합이
빈번히 있었다.
그들은 전세의 추이를 검토하고 해외에서의 구국전선의
정보를
교환하고 국내에서 장차 있을 투쟁력방안을
모색하였다.
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입수한
해외정보는
홍익범에 의해서 이 4자회담에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유일한 정보 루트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무모하게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유발시켰고
태평양전쟁과 함께
외국인이 가지고 있었던 단파수신기를 압수하는
동시에
일체의 외국인을 본국으로 추방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유일한 정보입수의 길이 끊긴 4자를 축으로
한
그룹은 다른 정보루트를 개척하기 위하여 갖은 애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경성방송국에서는 단파로
해외방송을
청취할 수 있다는 기밀을
캐치하였다.
이 기밀을 캐치한 사람은 그룹의
한사람인
송남헌이었고 송남헌은 홍익범에게
연락하였고
두 사람은 숙의 끝에 아동문학 동인관계로
경성방송국
편성과에 근무하고 있던 양제현 일명 미림의
협조를 얻기로
하였다. 양재현은 쾌락
하였다. 그런데
경성방송국의
단파방송수신이 가능했던 내력은
이러하다.
적치 총독기관은 앞서 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압수한 단파수신기를 국내 각 방송국에
분배하고
동경방송국을 직접 수신하게 하여 국내에 방송하게
하였다.
이 단파기를 조작하던 한국인 기술자들이 비밀이
미국의 소리 방송과
우리말 중경방송을 청취하였고 내용은 한국인
직원들 간에 은밀히
전달되어 몇몇 아나운서와 편성과 양제현에게
까지도
알려지게 된
것이다.
송남헌과 접선이 된
양제현은
매일같이 한국인
기술자들로부터VOA와
중경방송의 내용을 입수하여 송남헌에게
전하였고
송남헌은 이를 홍익범에게 전달, 홍익범은
다시
4자 회합에다가 보고
하였다.
“한국의 호랑이” 라는 타이틀로
보내지는
VOA의 우리말 방송은 30분씩 하루에 세
번이었고
중경방송은 하오 6시부터 30분간 매일 빠짐없이
있었다.
그밖에도 샌프란시스코 특별방송으로
이승만의 “ 국내 동포들에게
고함"
이라는 격렬한
선동조의 방송이 있었는데 이승만은 언제나 ” 광복의
날이
멀지 않았으니 동포는 일심협력하여 일제에
대한 일체의 전쟁협력을
거부하고 때를 기다리라 “ 고 호소하곤 아였으며
중경에서는 해방 후
입국하여 입법의원을 지낸 신기언이
명아나운서로 국내동포를
격려하고 임시정부의 활동상황을
보도하고 광복군의 전과를
알렸으며 미국에
있는 구미 외교위원회의 성과와
아울러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 졌으므로 눈물겹도록
열
띤 목소리로 전해주곤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경성방송국 단파 수신
내용은
조금씩, 일반에게도 퍼져 나갔다. 아나운서및
기술자들이
그들의 가까운 친구들에게 그 내용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그러나 또한 “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이렇게 해서 퍼지기
시작한 해외 소식은 그만큼 국내
동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또한 고무 격려를 나누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게 한 그 내용은 귀에서 귀로 입에서
입으로
물이 흐르듯 세어 드디어 정치경찰의
탐지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1943년 이른 봄 경성방송국 한국인
기술자들이
방송국에서 혹은 자기 집에서 일경의 급습을
받았다.이어
아나우서 들에게도 손이 뻗혔다. 성기석, 염준모,송진근, 박용신 외 수명이 일차로 검거되고 배후관계를 케기위한 혹독한 고문이 연일 계속 되었다. 한편 일경간부 사이카 시치로(齊賀七郞)가 지휘하는 경기도 경찰부는 당시 보성중학 교사였던 문석준,민중의원 의사였던 경기현, 신문기자였던 황문철, 기타 민간인 안필수등이 포함된 지식층 인사 150여명이 밤, 낮없이붙들려 들어갔다. 마침내 그룹까지도 손이 미쳤다.
송남헌, 홍익범, 허헌이 검거된
것이다.
고문은 절정에 달했다 몇 번을 산송장이
되어
감방을 업혀 들어오곤 하였다. 그중에서도
홍익범은
사경에 이르러 형식적인 병보석으로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으나 끝내 지도층인 송진우, 김병로,
이인의이름을 입에
내지 않았다. 가혹한 고문은 그밖에도 문석준외 5명의 옥사자를 냈고 허헌은 병보석 출감케 하였다. 결국 20여명이 보안법위반, 치안유지법위반, 육해공군형법위반으로 기소되었고 가족의 방청조차 허락지 않은 비공개 공판에서 “중경에서 어떠한 지령이 있었는가.” “이승만과의 연락내용을 말하라” “행동계획과 음모내용을 대라” 는등 상상을 넘는 일방적인 비약심리 끝에 전원이 최하2년이상의 체형을 언도받고 경성, 청주, 대전으로 분산 수감되었다.
기아와 병고에 시달리다가 옥사를
면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인사들은 거개가
해방직전이거나
해방으로서 였고 이 사건을 취급하므로 서 일본의
최고 훈장을
받은
사이카 시치로는 8.15직후 중국으로부터 환국한 의열단
단원이었고 한때 독립자금 염출을 위하여
천진은행을
습격한
바도 있는 김 모 씨에게 서울
원남동
일우에서
민족적 보복을 당하고 말았다.
끝으로 전기 그룹은 경성방송국
한국기술진을
통하여 해외와의 연락도 시도하였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음을 부기 해
둔다.
이인님의 경성방송국 단파사건 글 부분에
"고문…….그래도
나는 약과였다고 당시를 말하는 송남헌씨 " 라는 글이 있습니다.
고문.....그래도 나는 약과였다고 당시를 말하는 송남헌씨
「경성방송국 단파사건」에 연좌했든 한 사람으로 반백의 머리가 된 송남헌씨는 딩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한밤중이면 꼭 불려나가 그 지긋 지긋한 물고문이며 비행기 타기 등의 악형을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다. 그러나 나 보다도 더 혹독한 고문으로 산송장이 되어 업혀서 감방으로 오곤하던 선배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나는 약과였다고나 할까.... 그 중에서도 끝내 자기 이외의 일에는 입을 열지 않은채 순사를 하고만 홍익범씨를 생각하면 살아남아 이렇다 할 일도 못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 럽기만 하다. 또한 경성, 청주, 대전 형무소 등을 전전하면서 추위와 주림에 신음하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모습이며, 형기를 마쳤음에도 출옥을 못하고 소위 사상범 보호 구금령에 묶여 그대로 감옥살이를 하고있던 선배, 동지들을 생각 할 때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지금 생각하면 방송국에 근무했던 우리 기술인들은 실로 애국자였다고 여겨진다. 평소에 이렇다 할 민족적 교양을 받을 기회도 없었고 또한 뜻있는 사람과의 접촉도 아니 했는데 있을지도 모를 무서운 일을 예기하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매일같이 「라디오」를 청취해서는 전해주곤 했다는것이 그리 쉬운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꼭 정기적으로 있는 방송을 제때에 듣기 위해서 일인들을 속이는 修理명목의 연극도 꾸몄으며 숙직도 아닌데 열성을 부리는 척 밤에 남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때의 뜻 있는 분들이 지금은 거의 유명을 달리하는 고인이 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도 외국에, 혹은 북에, 혹은 행방조차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그때의 동지였던 민족진영 인사들을 등지고 공산주의 자들과 합작 해 버린 허 모의 경우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없다. 하루빨리 모두가 태극기 아래 옛날의 동지애로 되 돌아가서 보다 나은 조국을 건설하는데 함심 했으면 하는 염원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한마디로 경성방송국 단파사건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지방방송국에도 단파수신기가 있었고 혹은 비밀히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던 터라 이 밖에도 단파사건 으로 해서 희생된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닌줄 안다. 마지막으로 고인이 된 선배, 동지의 명복을 충심으로 빌어마지 않는다.
참고로 책 내용의 원문을 올립니다.
취임 하셨습니다. 앞줄 중앙에 계시는 분이
이인님입니다.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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