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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처신이 바르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_오십의 경륜
제1절 배를 잘 골라서 타라_개운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말을 섞지 말아야 한다.
군자가 정하면 크게 가고 작게 오니 불리하리라.
否之匪人.
不利君子貞 大往小來. (제12괘 천지비괘 괘사 ; 185쪽)
태의 경우에는 작게 가고 크게 오니 길하며 형통하리라.
泰小往大來 吉亨. (제11괘 지천태괘 괘사 ; 188쪽)
역경에는 비인(匪人)이라 하여 사람이 아닌 사람이 등장한다. 역경이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주인공인 군자가 대인과 소인, 그리고 또 비인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소인을 넘어 사람이 아닌 사람에 이른 지경의 비인이 이 세상에 또 있으니, 그들과는 아예 말을 섞지 않는 것이 최선의 대응이라는 것이다. (186쪽)
* 제12괘 천지비괘와 제11괘 지천태괘에서 ‘크게 오고 가는’ 것은 군자의 움직임을 말하고, ‘작게 오고 가는’는 소인의 움직임을 말함. (박희택)
더불어 말을 나눌 만한 사람인데 더불어 말을 나누지 않으면 사람을 잃게 되고,
더불어 말을 나눌만하지 않은 사람인데 더불어 말을 섞으면 할 말을 잃게 된다.
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논어 위령공편 제7장 ; 187쪽)
승리의 비결은 '얼마나 열심히 노를 젓는가'가 아니라, '어떤 배를 선택해서 올라타느냐'에 있다. 무거운 배에 올라탄다면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저어도 속도가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작게 가고 크게 오는 태의 공동체라는 배에 올라타야 한다. 태의 공동체에서는 작게 노력해도 큰 성과로 돌아온다. 그 때문에 '길하며 형통할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반면 비의 공동체에서는 큰 노력을 기울여도 작게 돌아올 뿐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일은 어그러져 간다. 노력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더 빨리 망가질 뿐이다. (189쪽)
지금 내가 속한 공동체가 어느 쪽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 이 같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의 마음을 기준으로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역시 사람이 삼양이음의 존재라 기본적으로 희망 과잉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부여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부작용도 있다. 우리는 부정적인 현실에 나의 희망을 섞어서 인식하기 때문에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비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쉽지 않다. (190쪽)
* ‘삼양이음’의 한자 표기는 ‘三陽二陰’임.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어 지상의 세계는 순수한 하늘의 세계와 같은 이양이음이 되지 못하고 삼양이음이 되어, 지상의 존재는 양의 기운인 희망 과잉과 의욕 과잉 등으로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는 시각임. 이에 대해서는 강기진의 「삶이 불안할 땐 주역 공부를 시작합니다」 149-152쪽을 참조하시기 바람. (박희택)
*선천 상극 삼양이음이고, 후천 상생 이양이음임. 선천역과 후천역에 관해서는 고은주의 「주역 입문 강의」 29-30쪽을 보시기 바람. (박희택)
붉은 주사를 지닌 사람은 붉어지고,
검은 옻을 지닌 사람은 검어지게 되니,
군자는 반드시 그 함께하는 자를 삼가야 한다.
丹之所藏者赤,
漆之所藏者黑,
是以君子必愼其所與處者焉. (명심보감 교우편 제19장 ; 191쪽)
역경은 경고하고 있다. 비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내주는 것은 많은데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므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삶은 침체에 빠진다. 하지만 무감각해진 그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 결국 '삶이란 원래 이런 것인가 보다', '내 운명은 이런 것인가 보다' 하고 체념과 절망에 빠진 채 무기력하게 살아갈 수 있다. (191쪽)
머무르며 애쓸 곳이 아닌데 그리하면 이름이 필시 욕됨이 있고,
의자할 것이 아니데 의지하면 몸이 필시 위태롭게 된다.
非所困而困焉 名必辱,
非所據而據焉 身必危. (계사하전 제5장 ; 192쪽)
역경이 경계하는 바와 같이 만약 현재 내가 속한 곳이 비의 공동체라면 무슨 일을 이루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데 주력해서 소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특히 상대가 비인일 경우라면 아예 말을 섞지 말아야 한다. 태의 공동체레서라면 가만히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내주며 교류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 자칫 흥분할 경우 이를 반대로 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비의 공동체에서 드잡이 싸움을 벌이느라 시간과 에너지의 대부분을 쓰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의 시간과 에너지가 한정된 자원이라는 사실이다. (...) 비의 공동체에서 대부분을 써 버리면 태의 공동체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 정작 태의 공동체가 인생의 가치와 보람을 창출할 수 있는 곳인데, 비의 공동체에서 싸우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태의 공동체를 잃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193쪽)
제2절 나이 들수록 인간관계에 현명하게 처신하라_기미
기미를 아는 것 그것이 신묘하도다! (...)
기미라는 것은 미세한 움직임으로 길한 결과를 먼저 드러내는 것이다.
군자가 기미를 보고서 지으니 날이 다 저물어 버리도록 기다리기만 하는 일이 없다.
知幾其神乎! (...)
幾者動之微 吉之先見者也.
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계사하전 제5장 ; 196쪽)
역경은 길흉에 대해 언급하지만 그것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길흉회린은 행동에서 생겨나는 것(吉凶悔吝者 生乎動者也, 계사하전 제1장 )"이라고 말한다. 내가 선택한 행동에 따라 길흉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195쪽)
* 기미 알아차리기의 ‘기미’를 불교에서는 ‘법문’이라고 함. 부처님과 스승님의 가르침을 법문이라 하기도 하고, 법신불의 무형의 설법을 법문이라 하기도 함. 주역의 기미는 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기미는 불교적 시각으로는 법신불의 무형의 설법을 뜻하고, 이 설법을 군자보살은 들을 줄 알아야 함. 이 설법을 듣는 것이 불교수행에서 주요함. (박희택)
끼어듦이 돌에 이르렀으니,
하루가 다 저물어 버리도록 정하지는 말아야 길하리라.
介于石,
不終日 貞吉. (제16괘 뇌지예괘 2효사 ; 195-196쪽)
끼어듦이 돌에 이르렀다고 하면 어찌 하루가 다 저물어 버리도록 용을 쓰겠는가.
중단해야 함을 알아야 하리라.
介如石焉 寧用終日.
斷可識矣. (계사하전 제5장 ; 196쪽)
아무리 사람이 정(貞)해야 한다고 하지만, 대상이 무정한 돌이라면 날이 다 저물어 버리도록 기다리기만 해서는 길할 수 없는 것이다. 원래 모든 일에는 자체의 결이 있어서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그 결과가 길할지 흉할지를 먼저 드러내는 법이다. 이처럼 결과의 길흉을 먼저 드러내는 미세한 움직임이 기미인 것이다. (196쪽)
다음에 역경을 읽어 길흉과 존망, 진퇴와 소장의 기미를 일일이 관찰하고 즐겨서 끝까지 연구해야 할 것이다.
次讀易經 於吉凶存亡進退消長之幾 一一觀玩而窮硏焉. (격몽요결 독서장 ; 196-197쪽)
일의 기미를 살핌이 치밀하지 못한 즉 성취에 해를 끼친다.
幾事不密 則害成. (계사상전 제8장 ; 197쪽)
오직 기미를 살피는 연고로 능히 천하의 책무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唯幾也,故能成天下之務. (계사상전 제10장 ; 198쪽)
이 세상의 기미를 관찰한다고 할 때 가장 기본이 되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대인, 소인, 비인 중 누구인가를 보아 내는 것이다. 군자가 대인을 만나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이로움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다. 이 때문에 대인은 흔히 귀인으로 불린다. 반면 내가 만난 사람이 비인인데 기미를 알채지 못하면 기가 막힌 꼴을 보게 된다. (198쪽)
사람의 기미를 관찰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역시 내가 속한 모임이나 공동체의 기미를 관찰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태의 공동체인지 비의 공동체인지를 보아 내서 그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다. (...) 비의 공동체로 이루어진 세상이 주역 상경의 세계요, 태의 공동체로 이루어진 세상이 주역 하경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 하경의 세계는 쉽게 말해 '치세'라고 할 수 있다. 군자와 대인이 주도권을 확립한 세계이며, 그에 따라 규범이 확립된 세계다. 소인은 대세를 따르게 마련이므로 이 세계에서는 소인도 대의를 따르게 된다. 반면 상경의 세계는 '난세'라고 할 수있으며, 규범이 채 확립되지 못하여 비인이 설쳐 대는 세상이다. 이 세계에서 소인은 비인을 따라 부화뇌동한다. 흥미로운 점은 역경이 예와 의리는 하경의 세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9-201쪽)
* 강기진은 기미에는 일의 기미, 사람의 기미, 모임이나 공동체의 기미로 나누어 설명하였음. 「중용」 제31장에서는 리더(군자)의 자질로 ‘총명예지(聰明睿智)’ 네 가지를 들고 있는데, ‘총’은 잘 듣기, ‘명’은 잘 보기, ‘예’는 일머리를 잘 생각하기, ‘지’는 사람을 잘 판단하기로 해석함. 일의 기미 알아차리기는 ‘예’에, 사람의 기미 알아차리기는 ‘지’에, 모임이나 공동체의 기미 알아차리기는 ‘총’과 ‘명’에 해당함. (박희택)
의(儀)는 '거동, 의식, 법식' 등의 뜻을 가지며, '사람의 올바른 행동거지'를 의미한다. 서양의 에티켓과 같다. 이에 비해 예는 제단 앞에서 신에게 합당한 예를 다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로 '신을 공경한다'는 뜻을 가진다. 즉 의는 겉으로 표시하는 행동거지의 문제인 데 비해 예는 공경하는 마음, 진실된 마음까지 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역경이 예는 하경의 세계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진실된 마음을 다하는 예는 비인에게 적용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1쪽)
군자는 상경의 세계에서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비인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경이 '비인과는 말을 섞지 말라'고 할 때 일상적인 대화조차 나누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상대와 말을 섞는다는 것은 상대에게 나의 진심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상대에게 나의 진심이 통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며,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이다. (...) 신뢰할 만하지 않은 사람을 신뢰하여 나의 진심을 드러내면 기 막힌 꼴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역경이 '비인과는 말을 섞지 말라'고 한 취지도 마찬가지다. 비인에게도 의(儀)를 다함으로써 그를 존중하고 그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해야 하지만, 그를 신뢰하지는 않아야 하는 것이다. (201-202쪽)
역경은 의와 예를 구분해서 인식하고 예의 질서에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 예의 질서에는 들어가기도 어렵고, 한번 들어간 이상 나오기도 어려운 것이다. (...) 의리는 하경의 세상에서 다하는 것이지 상경의 세상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 비인이 섞여 있는 상경의 세계에서도 의리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큰 상처를 입는 것이다. 비인일수록 이런 사람을 잘 알아보고 이용하려 들기 때문이다. (...) 결국 진실된 마음은 그리 쉽게 쏟는 것이 아니며, 의리 역시 그리 쉽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둘 다 그만큼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와 의리가 적용되는 하경의 세계와 상경의 세계를 구분하는 문제가 얼마나 중대한지 알 수 있다. (202-203쪽)
제3절 소신과 자존심을 지켜야 이롭다_처세
몽이 형통하려면 내가 동몽을 구할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를 구하도록 해야 한다.
처음 점친 것은 알려 주지만 두 번 세 번은 모독이다.
모독인 즉 알려 주지 말라.
정해야 이로우리라.
蒙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제4괘 산수몽괘 괘사 ; 204쪽)
역경의 4번째 괘인 몽의 괘사인데, 그 내용은 신하인 점인이 무지몽매한 왕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 조언의 내용은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괘사는 동몽의 대해 말한다. 동몽은 '어린아이의 어리석음'이라는 뜻인데, 어린아이는 최소한 남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수함이 있음을 의미한다. (...) 몽의 길에서 몽매한 왕은 발몽 - 곤몽 - 동몽 - 격몽의 순서로 발전해 간다. (...) 둘째, 왕이 동몽의 상태라 할지라도 그 왕을 상대할 때 내가 먼저 찾아가 돕겠노라 해서는 안 되고 왕이 나를 찾게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왕쪽에서 뭔가 아쉬운 것이 있어서 먼저 나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다. 만약 내가 먼저 다가가면 내게 아쉬운 게 있어서 찾아왔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므로 왕 쪽에서 나를 먼저 찾아올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그때 조언해야 비로소 동몽의 왕이 나의 조언을 가치 있게 들을 것이다. 셋째, 처음 점친 것은 알려 주지만 두 번 세 번은 모독이니 알려 주지 말라는 조언이다. (...) 조언을 존중해서 무언가 그 조언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성의도 보이지 않으면서 두 번 세 번 다시 자문을 구하는 것은 조언자에 대한 모독이니 그에 응하지 말라는 뜻이다. (...) 만약 이때 정중히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응하면 그때부터 그 조언자는 '쉬운 사람'이 되고 만다. 그때부터 동몽의 리더는 그 조언자를 함부로 대하게 될 것이다. (205-208쪽)
* 제4괘 산수몽괘의 괘사가 나왔습니다만, 괘사에 대한 해설을 단전(彖傳, 십익의 하나)이라 하는 바, 산수몽괘의 괘사에 대한 단전에 ‘양정(養正)’이 나옴. 이 양정이 손기정 선수가 나온 양정고등학교의 교명이 되었음. 몽매함을 깨우쳐서 바름을 기른다는 뜻임. (박희택)
제4절 말의 순서가 잡혀야 관계가 잡힌다_말
음이 다섯 번째에 올 때는 광대뼈에서 버티면 말에 순서가 잡히리라.
艮其輔 言有序. (제52괘 중산간괘 5효사 ; 210쪽)
역경에서 하경은 34가지 괘를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도로 구분하고 있다. 간의 도는 여기서 치국의 도로 분류된다. 즉 간의 도는 왕의 말을 세우는 방법이며, 왕이 왕답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다. (...) 한자 艮은 '버틴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간의 길은 사람들이 군자에게 어떤 일을 해 달라고 요청할 때 군자가 버티며 들어주지 않는 경우를 보여 준다. 이를 통해 나의 말을 세워 내 삶의 주체로 바로 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버티는 것은 아니며 일정한 리듬과 법칙이 있다. (211-212쪽)
* 제52괘 중산간괘의 5효사는 「홍범연의」 오사편에도 인용되어 있음. ‘오사(五事)’는 리더의 다섯 가지 자질인 ‘모언시청사(貌言視聽思)’를 일컫는데, 오사편 언장에 인용되어 있음. (박희택)
역경이 계시한 인간 세상의 법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같은 행동을 세 번 연속으로 하면 싸움이 벌어질 수 있지만 두 번까지는 괜찮다는 것이다. 즉 연속해서 두 번 거절당한 상대가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아느냐며 위협적으로 나오더라도 그냥 말에 그칠 뿐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세 번째에 들어주면 된다. (...) 두 번째까지는 거절해도 괜찮다. (214쪽)
* 산수몽괘에서 설하는 두 번까지 침묵한다는 것은 공자께서 「논어」 공야장편 제19장에서 세 번 생각하다는 것은 지나쳐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으니 두 번이면 족하다는 가르침과 통함. (박희택)
남에게는 다소 무심하며 자기 위주로 사는 사람이 이익을 보는 경우가 많다는 말일 수도 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은 이것저것 말하면서 이쪽에서 무언가를 말하면 귀담아들어 주지 않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반면 섬세한 사람은 앞서 설명한 간괘의 조언조차 그대로 따르기가 쉽지 않다. 두 번 연속으로 거절하려면 통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남에게 무언가를 강제로 하도록 만드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남이 나에게 무언가 해 달라는 것을 해 주지 않고 버티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다. (215쪽)
역경의 조언은 섬세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더욱 도움이 된다. 역경이 변화의 법칙을 미리 밝히고 응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두 번 연속으로 거절해도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 없을 테니 용기를 내서 거절하라'며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 2효사를 통해 "아직 합당한 따름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 마음을 풀지 말아야 하리라(不拯其隨 其心不快)"라고 특별히 조언하고 있다. 1단계에서 한 번 거절한 이후라서 마음이 약해지기 쉬운데, 그렇게 해서 마음을 풀어 버리면 아직은 상대가 합당한 따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반면 군자가 굳게 먹은 마음을 풀지 않고 계속 버티어 내면 절정의 단계인 5단계에 이르러 원하는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 (...) 간의 길의 경우 1단계에서는 발에서 버티고, 2~5단계에서는 장딴지 - 허리 - 몸통 - 광대뼈로 점점 올라가기 때문에 '광대뼈에서 버틴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이다. (216쪽)
군자가 힘든 상황 속에서도 굳게 버티며 흔들림 없이 간의 길을 걷는 것은 공동체에 말의 순서를 확립하기 위해서이며, 그 목표는 5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달성된다. 말의 순서가 잡혀 주변인들이 군자의 말을 진지하게 듣기 시작하면 공동체의 혼란이 바로잡히는 것이다. (219쪽)
제5절 믿고 지켜 주고 그다음에 행하라_원숙
양이 다섯 번째에 오니, 친근함을 드러내 보이고자 왕으로 삼구의 법을 쓰는 상이다.
먼저 나오는 짐승은 놓아 주면 읍인들이 경계하지 않게 되어 길하리라.
九五, 顯比 王用三驅.
失前禽 邑人不誡 吉. (제8괘 수지비괘 5효사 ; 220쪽)
역경에서 제시하는 '삼구의 법'은 나이 오십에게 어울리는 원숙한 리더십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원숙한 리더십이라면 친근함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더로서의 권위가 서지 않는 것도 곤란하다. 이 양자를 적절하게 조화하여 균형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기에 원숙한 리더십을 달성하는 것이 보통일은 아니다. (...) 군자의 다스림이 오직 복종만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오래갈 수 없는 법이어서, 군자가 읍인들과 친근한 관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220-221쪽)
처음에 음이 올 때, 믿음을 가지고 친근하게 대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믿음이 들 때는 술동이를 가득 채우듯 하면 종국에는 사람이 달라짐이 있게 되니 길할 것이다.
初六, 有孚比之 无咎.
有孚盈缶 終來有他 吉. (제8괘 수지비괘 1효사 ; 222쪽)
음이 두 번째 오면, 안으로부터 친근하게 대하는 상이다.
정하면 길하리라.
六二, 比之自內.
貞吉. (제8괘 수지비괘 2효사 ; 223쪽)
음이 세 번째에 오니, 친근하게 대했는데 상대가 사람이 아닌 상이다.
六三, 比之匪人. (제8괘 수지비괘 3효사 ; 223쪽)
군자가 기껏 친근하게 대하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막상 사람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이처럼 군자의 읍인 중에도 '사람 같지 않는 사람(匪人)'이 더러 섞여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과 친근해지기 위해 비의 도를 행할 때도 비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23-224쪽)
음이 네 번째에 오니, 겉으로 친근하게 대하는 상이다.
정하면 길하리라.
六四, 外比之.
貞吉. (제8괘 수지비괘 4효사 ; 224쪽)
계속 숨어서 버티다 마지막 세 번째에야 왕 앞으로 나오는 짐승은 무도하다 하여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모두 쏘아 잡았다. 이는 백성들에게 왕의 인자한 아량을 과시함과 동시에 통치의 엄정함을 같이 보여 주기 위해 고도로 계산된 상징 의식이었다. (...) 삼구의 법은 리더의 인자한 아량을 보여 줌으로써 친근한 관계를 수립할 수 있고, 동시에 리더의 권위도 훼손당하지 않는 절묘한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226-227쪽)
* 제8괘 수지비괘의 5효가 군주 자리라 하고 있음. 효사마다 해당 위치가 있는데, 이는 고은주의 「주역 입문 강의」 47쪽을 보시기 바람. 수지비괘 5효사의 ‘삼구(三驅)’도 두 번까지 자비를 베풀고 세 번째에 행한다는 점에서 위 중산간괘나 공자의 두 번이면 족하다는 가르침과 통한다고 하겠음. (박희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