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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十六回 楚商臣宮中弒父 秦穆公殽谷封屍
제46회: 초나라 상신이 궁중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진목공이 효곡에서 시체를 묻었다.
話說,翟主白部胡被殺,有逃命的敗軍,報知其弟白暾。白暾涕泣曰:「俺說『晉有天助,不可伐之。』吾兄不聽,今果遭難也!」欲將先軫屍首,與晉打換部胡之屍,遣人到晉軍打話。且說,郤缺提了白部胡首級,同諸將到中軍獻功,不見了元帥。有守營軍士說道:「元帥單車出營去了,但吩咐『緊閉寨門』。不知何往?」先且居心疑,偶於案上見表章一道,取而觀之,云:「臣中軍大夫先軫奏言:臣自知無禮於君。君不加誅討,而復用之,幸而戰勝,賞賚將及矣。臣歸而不受賞,是有功而不賞也;若歸而受賞,是無禮而亦可論功也。有功不賞,何以勸功?無禮論功,何以懲罪?功罪紊亂,何以為國?臣將馳入翟軍,假手翟人,以代君之討。臣子且居有將略,足以代臣。臣軫臨死昌昧!」
한편, 적(翟)나라 군주 백부호가 죽자, 어떤 도망쳐 온 패잔병이 그 동생 백돈에게 보고했다. 백돈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진(晉)나라는 하늘이 도우니 칠 수 없다.’고 했으나, 형님은 듣지 않더니 오늘 결국 화를 당했구나!” 했다. 백돈이 선진(先軫)의 시신을 백부호의 시신과 바꾸려고 사람을 진(晉)나라 진영으로 보내어 죽은 두 사람의 시신을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한편, 극결(郤缺)이 백부호의 수급을 들고 와서 장수들과 같이 중군에 이르러 바치려고 했다. 그러나 선진 원수가 보이지 않았다. 막사를 지키던 군사가 말하기를, “원수께서는 전차 한 대를 타고 진영을 나가면서 분부하기를, ‘영채 문을 굳게 닫아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어디로 가셨는지 모릅니다.” 했다. 선차거(先且居)는 의심이 나서 둘러보다가 우연히 탁자 위에 놓인 표문(表文)을 발견했다. 그것을 집어 보니 이르기를, “신 중군 대부 선진은 아룁니다. 신은 주군에게 무례를 저질렀음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신에게 죄를 물어 죽이지 않으시고 다시 중용하여 다행히 싸움에서 이겨서 제가 장차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이 돌아가 상을 받지 않는다면 이것은 공을 세웠음에도 상이 없는 일이 됩니다. 만약 돌아가서 상을 받는다면 이것은 주군에게 무례를 저질렀음에도 상을 받는 일이 됩니다. 공이 있는데 상을 내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떻게 공을 세우라고 권하겠습니까? 무례한 짓을 저질렀음에도 공을 논하여 상을 준다면 어떻게 죄를 지은 자를 벌할 수 있겠습니까? 공과 죄가 문란하게 되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신이 장차 적군(翟軍)의 진영으로 돌진하여 적인(翟人)들의 손을 빌려 주군의 처벌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신의 아들 차거(且居)는 장수의 지략이 있으니 족히 신을 대신할 만합니다. 신 선진은 죽음에 임하여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이 표문을 올립니다.” 했다.
且居曰:「吾父馳翟師死矣!」放聲大哭。便欲乘車闖入翟軍,查看其父下落。此時郤缺、欒盾、狐鞫居、狐射姑等,畢集營中,死勸方住。眾人商議:「必先使人打聽元帥生死,方可進兵。」忽報:「翟主之弟白暾,差人打話。」召而問之,乃是彼此換屍之事。且居知死信真實,又復痛哭了一場。約定:「明日軍前,各抬亡靈,彼此交換。」翟使回復去後,先且居曰:「戎狄多詐,來日不可不備。」乃商議令郤缺欒盾仍舊張兩翼於左右,但有交戰之事,便來夾攻。二狐同守中軍。
선차거가 말하기를, “제 부친께서 적(翟)의 군중으로 달려가 돌아가셨습니다!” 하고, 목을 놓아 통곡했다. 그리고 당장 전차를 타고 적(翟)군 진영으로 쳐들어가서 그 부친의 죽음을 알아보려고 했다. 이때 극결, 난돈, 호국거, 호사고 등이 모두 진영에 모여 있다가 달려들어 진정시켰다. 여러 사람이 상의하기를, “먼저 사람을 적진으로 보내어 원수의 생사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군사들을 진격시키도록 합시다.” 했다. 갑자기 보고하기를, “적(翟)나라 군주의 동생 백돈(白暾)이 전할 말이 있다고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했다. 불러서 물으니. 피차의 시신을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선차거가 부친이 죽었다는 것이 진실임을 알고 다시 한바탕 통곡했다. 그리고 약정하기를, “내일 진영 앞에서 각기 시신을 가지고 나와 피차 교환하기로 한다.”고 했다. 적(翟)나라의 사자가 돌아간 후에 선차거가 말하기를, “융적은 속임수가 많으니 내일은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했다. 이에 상의하여 극결과 난돈은 옛날처럼 좌우 양쪽으로 포진하여 그 날개 부분을 맡고 있다가 만일 교전하게 된다면 즉시 협공하기로 하고, 호국거와 호석고는 함께 중군을 지키기로 했다.
次日,兩邊結陣相持,先且居素服登車,獨出陣前,迎接父屍。白暾畏先軫之靈,拔去箭翎,將香水浴淨,自脫錦袍包裹,裝載車上,如生人一般,推出陣前,付先且居收領。晉軍中亦將白部胡首級,交割還翟。翟送還的,是香噴噴一具全屍;晉送去的,只是血淋淋一顆首級。白暾心懷不忍,便叫道:「你晉家好欺負人!如何不把全屍還我?」先且居使人應曰:「若要取全屍,你自去大谷中亂屍內尋認!」白暾大怒,手執開山大斧,指揮翟騎沖殺過來。這裏用軘車結陣,如牆一般,連沖突數次,皆不能入。引得白暾躑躅咆哮,有氣莫吐。
다음날 양쪽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서로 대치했다. 선차거가 소복을 입고 전차에 올라 혼자 적진 가까이 다가가 부친의 시신을 받으려고 했다. 백돈은 선진의 영혼을 두려워하여 시신에서 화살을 뽑아내고 향긋한 물로 깨끗이 씻어서 자기의 비단 전포를 벗어 시신을 싸서 수레에 실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같은 선진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진영 앞으로 나가 선차거에게 넘겼다. 진(晉)나라 군중에서도 역시 백부호의 수급을 적(翟)나라 진영으로 보냈다. 그러나 적(翟)군이 보낸 선진의 시신은 향기가 나는 완전한 시신이었지만, 진(晉)나라에서 보낸 백부호의 수급은 단지 피가 떨어지는 한 덩어리의 머리였다. 백돈이 이를 보고 참을 수 없어 문득 외치기를, “너희 진(晉)나라 놈들은 사람을 이렇게 속이느냐? 어찌하여 온전한 시신을 보내 주지 않는가?.” 했다. 선차거가 사람을 시켜 응하기를, “만약 백부호의 시신 전부를 찾으려면 너희가 대곡에 가서 시체들 속에서 찾아라!” 했다. 백돈이 크게 성을 내어 손에 커다란 도끼를 들고 기병들을 지휘하여 공격해 왔다. 그러나 전차를 연결한 진(晉)나라의 영채는 담장과 같아서 몇 번의 충돌에도 돌파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백돈은 말발을 구르며 고함을 질렀지만 분한 기운을 토할 수가 없었다,
忽然晉軍中鼓聲驟起,陣門開處,一員大將,橫戟而出,乃狐射姑也。白暾便與交鋒。戰不多合,左有郤缺,右有欒盾,兩翼軍士圍裹將來。白暾見晉兵眾盛,急忙撥轉馬頭,晉軍從後掩殺。翟兵死者,不計其數。狐射姑認定白暾,緊緊追趕。白暾恐沖動本營,拍馬從刺斜裏跑去。射姑不捨,隨著馬尾趕來。白暾回首一看,帶轉馬頭,問曰:「將軍面善,莫非賈季乎?」射姑答曰:「然也。」白暾曰:「將軍別來無恙?將軍父子,俱住吾國十二年,相待不薄,今日留情,異日豈無相見?我乃白部之弟白暾是也。」
갑자기 진(晉)나라 군중에서 북소리가 자주 울리더니 진영의 문을 열리고, 대장 한 사람이 극을 옆으로 잡고 나오는데 바로 호사고였다. 백돈이 문득 그와 싸움을 걸었다. 싸운 지 몇 합 되기도 전에 왼쪽에서 극결이, 오른쪽에서 난돈이 양 날개처럼 군사를 이끌고 나와 백돈의 군사들을 포위하려고 했다. 백돈이 진(晉)나라 군사가 많음을 보고 황급히 말머리를 돌리자, 진(晉)나라 군사가 뒤를 추격했다. 적(翟)나라 군사들이 수없이 많이 죽었다. 호사고가 백돈을 알아보고 뒤를 바짝 추격했다. 백돈이 진(晉)나라 군사를 본영으로 끌어들일까 걱정하여 말을 산비탈 쪽으로 몰아 달아났다. 호사고가 놓치지 않고 백돈의 말꼬리에 따라붙었다. 백돈이 머리를 돌려 한번 보고, 말머리를 돌리며 묻기를, “장군은 얼굴이 익소, 혹시 가계(賈季)가 아닙니까?” 하니, 호사고가 말하기를, “그렇소!” 했다. 백돈이 말하기를, “장군은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장군의 부자가 모두 우리나라에서 12년을 지내셨는데, 우리가 대접을 박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온정을 베풀면, 후일에 어찌 다시 만나지 않겠습니까? 나는 백부호의 동생 백돈입니다.” 했다.
狐射姑見提起舊話,心中不忍,便答道:「我放汝一條生路,汝速速回軍,無得淹久於此。」言畢回車,至於大營。晉兵已自得勝,便拿不著白暾,眾俱無話。是夜白暾潛師回翟,白部胡無子,白暾為之發喪,遂嗣位為君。此是後話。且說,晉師凱旋而歸,參見晉襄公,呈上先軫的遺表。襄公憐軫之死,親殮其屍。只見兩目復開,勃勃有生氣。襄公撫其屍曰:「將軍死於國事,英靈不泯,遺表所言,足見忠愛,寡人不敢忘也!」乃即柩前,拜先且居為中軍元帥,以代父職,其目遂瞑。後人於箕城立廟祀之。
호사고는 백돈이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듣고 차마 매정하게 대하지 못해 대답하기를, “내가 그대를 놓아주겠으니, 그대는 속히 군사들을 거두어 회군하시오.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어 보았자 이득이 없을 것이오.” 하고, 말을 마치자 전차를 돌려 본영으로 돌아왔다. 진(晉)나라 군사들이 이미 승리를 거둔 뒤라 백돈을 붙잡지 못한 것을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백돈은 몰래 군사를 이끌고 적(翟)나라로 돌아갔다. 백부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백돈이 백부호의 상을 치르고 마침내 자리를 이어 군주가 되었다. 이것은 뒷날의 이야기다. 한편, 진(晉)나라 군사는 개선하여 돌아가서 진양공을 뵙고, 선진이 남긴 표문을 바쳤다. 진양공은 선진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하여 친히 그 시신을 염했다. 선진은 두 눈을 다시 뜨고 생생하게 생기를 띠었다. 진양공이 그 시신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장군이 나라의 일을 위해 죽었으나 영혼은 떠나지 않았소. 표문을 남겨 말한 것은 충성과 사랑이 넘쳤소. 과인이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했다. 진양공은 즉시 선진의 관 앞에서 선차거를 중군 원수로 삼아 그 부친의 직을 대신하게 하자, 선진은 눈을 감았다. 뒷사람이 기성(箕城)에다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襄公嘉郤缺殺白部胡之功,仍以冀為之食邑,謂曰:「爾能蓋父之愆,故還爾父之封也。」又謂胥臣曰:「舉郤缺者,吾子之功。微子,寡人何由任缺?」乃以先茅之縣賞之。諸將見襄公賞當其功,無不悅服。時許蔡二國,因晉文公之變,復受盟於楚。晉襄公拜陽處父為大將,帥師伐許,因而侵蔡。楚成王命鬥勃同成大心,帥師救之。行及泜水,隔岸望見晉軍,遂逼泜水下寨。晉軍營於泜水之北,兩軍只隔得一層水面,擊柝之聲,彼此相聞。晉軍為楚師所拒,不能前進。如此相持,約有兩月。看看歲終,晉軍糧食將盡,陽處父意欲退軍。既恐為楚所乘,又嫌於避楚,為人所笑。
진양공은 극결이 백부호를 죽인 공을 칭찬하면서 기(冀)땅을 식읍으로 주고 말하기를, “그대는 능히 부친의 허물을 덮을 만하오! 그래서 그대 부친의 봉지를 돌려주는 것이오.” 했다. 또 진양공이 서신에게 말하기를, “극결을 추천한 것은 그대의 공입니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과인이 어찌 극결을 임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이에 선모(先茅)현을 상으로 주었다. 장수들이 진양공이 그 공에 마땅한 상을 주는 것을 보고 모두 기쁘게 복종했다. 이때 허(許)나라와 채(蔡)나라가 진문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초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이에 진양공이 양처보를 대장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가서 허나라를 토벌한 후에 다시 채나라를 치도록 했다. 초성왕은 투발에게 명을 내려 성대심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구원하도록 했다. 초나라의 구원군이 지수(泜水)에 이르자 강 건너의 진(晉)나라 군대를 바라보고, 마침내 초군도 지수 가까이 맞은편에 진을 쳤다. 진(晉)나라 군대는 지수의 북쪽에 진을 치고, 양군이 다만 물을 사이에 두고 딱딱이 치는 소리가 피차간에 서로 들렸다. 진(晉)나라 군대는 초나라 군대가 막아서 전진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대치하여 약 두 달이 지났다. 곧 연말이 되자, 진(晉)나라 군대의 양식이 장차 바닥을 보여서 양처보가 회군하려고 했으나, 초나라 군대가 그 틈을 타서 추격하지나 않을까 염려도 되고, 또 초나라를 피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乃使人渡泜水,直入楚軍,傳語鬥勃曰:「諺云『來者不懼,懼者不來。』將軍若欲與吾戰,吾當退去一舍之地,讓將軍濟水而陣,決一死敵;如將軍不肯濟,將軍可退一舍之地,讓我渡河南岸,以請戰期。若不進不退,勞師費財,何益於事?處父今駕馬於車,以候將軍之命,惟速裁決!」鬥勃忿然曰:「晉欺我不敢渡河耶?」便欲渡河索戰。成大心急止曰:「晉人無信,其言退舍,殆誘我耳。若乘我半濟而擊之,我進退俱無據矣。不如姑退,以讓晉涉。我為主,晉為客,不亦可乎?」
이에 사람을 시켜 지수를 건너 초나라 진영에 바로 가서 투발에게 말을 전하기를, “속담에 ‘오는 자는 두렵지 않다. 두려운 것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 자다.’라고 했습니다. 장군이 만약 우리와 싸우고 싶다면 내가 마땅히 일사(一舍 ; 30리)를 물러나 장군이 강을 건너 진을 친 후, 결사적으로 싸워 봅시다. 만약 장군이 강을 건너는 것이 내끼지 않는다면, 장군이 일사를 물러나서, 우리가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서 싸우기를 청합니다. 만약 나아가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아서 군사들을 피곤하게 하고 재물을 낭비하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 양처보가 전차를 타고 장군의 회답을 기다리니 속히 결단을 내려 주기 바랍니다.” 했다. 투발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진(晉)나라 놈들이 내가 감히 강을 건너지 못할 것으로 업신여기는구나!” 하고, 즉시 강을 건너 싸우려 했다. 성대심이 급히 저지하며 말하기를, “진(晉)나라 놈들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일사를 뒤로 물러선다는 말은 거의 우리를 유인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하면 우리는 진퇴양난이 됩니다. 우리가 잠시 후퇴하여 진(晉)나라 군사들이 강을 건너게 양보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주가 되고 진(晉)나라 군사는 객이 되니 우리가 주도권을 잡지 않겠습니까?” 했다.
鬥勃悟曰:「孫伯之言是也!」乃傳令軍中,退三十里下寨,讓晉濟水。使人回復陽處父。處父使改其詞,宣言於眾,只說:「楚將鬥勃,畏晉不敢涉水,已遁去矣。」軍中一時傳遍。處父曰:「楚師已遁,我何濟為?歲暮天寒,且歸休息,以俟再舉可也。」遂班師還晉。鬥勃退舍二日,不見晉師動靜,使人偵之,已去遠矣。亦下令班師而回。卻說,楚成王之長子,名曰商臣,先時欲立為太子,問於鬥勃。勃對曰:「楚國之嗣,利於少,不利於長,歷世皆然。且商臣之相,蠭目豺聲,其性殘忍,今日愛而立之,異日復惡而黜之,其為亂必矣。」
투발이 깨닫고 말하기를, “손백(孫伯 ;성대심)의 말에 옳소!” 하고, 즉시 군중에 명령을 내려 3십 리를 물러나서 진을 쳐서, 진(晉)나라 군사들이 강을 건너게 양보했다. 사신이 돌아와 양처보에게 복명하니, 양처보는 투발이 전한 말을 바꾸어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초나라 대장 투발이 우리를 두려워하여 감히 강을 건너지 못하고 이미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 버렸다.” 했다. 군중에 이 말이 일시에 두루 퍼졌다. 양처보가 말하기를, “초나라의 군사들이 이미 물러갔는데 우리가 무엇 하러 강을 건너겠는가? 연말이 되어 날이 차니 돌아가 쉬었다가 때를 기다려 다시 출병하도록 하겠다.” 했다. 마침내 군사를 돌려 진(晉)나라로 돌아갔다. 투발은 3십 리를 물러나 이틀을 기다렸으나 진(晉)나라 군사의 움직임을 볼 수가 없어서 사람을 시켜 정탐해 보니, 이미 멀리 가버린 뒤였다. 투발 역시 영을 내려 군사를 돌려 귀국했다. 한편, 초나라 성왕의 장자는 이름이 상신(商臣)인데, 일찍이 초성왕이 상신을 태자로 세우려고 투발에게 물었다. 투발이 대답하기를, “초나라의 왕위 계승 방법은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유리하고,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불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역대에 다 그랬습니다. 또한 상신의 관상은 벌처럼 동그란 눈에 승냥이같이 쇳소리를 내고, 성질이 잔인합니다. 오늘 상신을 사랑하여 태자로 세우시고 후일에 다시 그를 싫어하여 쫓아내면 반드시 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했다.
成王不聽,竟立為嗣,使潘崇傅之。商臣聞鬥勃不欲立己,心懷怨恨。及鬥勃救蔡,不戰而歸,商臣譖於成王曰:「子上受陽處父之賂,故避之以為晉名。」成王信其言,遂不許鬥勃相見,使人賜之以劍。鬥勃不能自明,以劍刎喉而死。成大心自詣成王之前,叩頭涕泣,備述退師之故,如此恁般:「並無受賂之事,若以退為罪,罪宜坐臣。」成王曰:「卿不必引咎,孤亦悔之矣!」自此成王有疑太子商臣之意。後又愛少子職,遂欲廢商臣而立職,誠恐商臣謀亂,思尋其過失而誅之。宮人頗聞其語,傳播於外。
초성왕이 듣지 않고 결국 상신을 태자로 세우고 반숭(潘崇)을 사부(師傅)로 삼았다. 상신은 투발이 자기를 태자로 세우지 않으려 했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었다. 투발이 채나라를 구하러 갔다가 싸우지 않고 돌아오자, 상신이 성왕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자상(子上 ; 투발)이 양처보의 뇌물을 받고 일부러 피하여 진(晉)나라 군에게 퇴군의 명분을 주었다고 합니다.” 하니, 초성왕이 그 말을 믿고, 마침내 투발의 알현을 허락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 단검을 전하게 했다. 투발이 스스로 죄를 밝힐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단검으로 목을 찔러 죽었다. 성대심이 스스로 초성왕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리고, 군사를 물리친 까닭을 자세히 서술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울러 뇌물을 받은 일은 없습니다. 만약 퇴군한 것이 죄가 된다면 그 죄는 마땅히 신에게도 있습니다.” 초성왕이 말하기를, “그대가 굳이 책임질 필요는 없다. 나도 투발을 죽인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이때부터 초성왕은 태자 상신의 뜻을 의심했다. 후에 초성왕은 다시 어린 아들 직(職)을 사랑하여, 마침내 상신을 폐하고 직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으나, 상신이 반란을 모의할까 두려워하여 상신의 잘못을 찾아서 죽이려고 생각했다. 궁중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궁궐밖에 퍼트렸다.
商臣猶豫未信,以告於太傅潘崇。崇曰:「吾有一計,可察其說之真假。」商臣問:「計將安出?」潘崇曰:「王妹羋氏,嫁於江國,近以歸寧來楚,久住宮中,必知其事。江羋性最躁急,太子誠為設享,故加怠慢,以激其怒,怒中之言,必有洩漏。」商臣從其謀,乃具享以待江羋。羋氏來至東宮,商臣迎拜甚恭,三獻之後,漸漸疏慢,中饋但使庖人供饌,自不起身,又故意與行酒侍兒,竊竊私語,羋氏兩次問話,俱失應答。羋氏大怒,拍案而起,罵曰:「役夫不肖如此,宜王之欲殺汝而立職也!」商臣假意謝罪,羋氏不顧,竟上車而去,罵聲猶不絕口。
상신은 머뭇거리며 그 말을 믿지 못하다가 태부 반숭에게 고했다. 반숭이 말하기를, “저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니, 상신이 묻기를, “어떤 계책입니까?” 했다. 반숭이 말하기를, “부왕의 여동생 미씨(羋氏)는 강(江)나라에 시집갔는데, 지금 친정인 이곳에 와서 오래 궁중에 머물고 있으니, 반드시 그 일을 알 것입니다. 강미는 그 성질이 아주 조급합니다. 태자께서 연회를 베풀어 성심껏 대한 후에 일부러 태만히 대하여 그녀의 분노를 일으키십시오. 성내어 말하는 중에 반드시 궁중의 일을 누설할 것입니다.” 하니, 상신이 그 계책을 따라 즉시 잔치를 마련하고 강미를 모셔오게 했다. 미씨가 동궁에 이르니, 상신이 공손히 절하며 맞이했다. 상신이 술을 세 번 권한 후에 점점 거만하게 굴며, 부엌에서 일하던 요리사를 불러서 강미의 음식 시중을 들게 하고, 자신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또 일부러 술을 따르는 아이에게 귓속말을 하며, 미씨가 두 번이나 말을 걸었으나 상신은 모두 응답하지 않았다. 미씨가 크게 화를 내어 상을 치고 일어나 욕하기를, “이 돼먹지 못한 놈아! 대왕께서 너를 죽이고 직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했다. 상신이 거짓 사죄했으나 미씨는 돌아보지도 않고 수레를 타고 가는데 욕하는 소리가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
商臣連夜告於潘崇,因叩以自免之策。潘崇曰:「子能北面而事職乎?」商臣曰:「吾不能以長事少也。」潘崇曰:「若不能屈首事人,盍適他國?」商臣曰:「無因也,祇取辱焉。」潘崇曰:「舍此二者,別無策矣!」商臣固請不已,潘崇曰:「有一策,甚便捷,但恐汝不忍耳!」商臣曰:「死生之際,有何不忍?」潘崇附耳曰:「除非行大事,乃可轉禍為福。」商臣曰:「此事吾能之!」乃部署宮甲,至夜半,託言宮中有變,遂圍王宮。潘崇仗劍,同力士數人入宮,徑造成王之前。左右皆驚散。成王問曰:「卿來何事?」潘崇答曰:「王在位四十七年矣,成功者退,今國人思得新王,請傳位於太子!」
상신은 그날 밤 반숭에게 고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계책을 물었다. 반숭이 말하기를, “태자께서는 능히 북면하여 직(職)을 섬길 수 있습니까?” 하니, 상신이 말하기를, “내가 맏아들로서 어린 동생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했다. 반숭이 말하기를, “만약 머리를 숙여 어린 동생을 섬길 수 없다면 어찌 다른 나라로 달아나지 않습니까?” 하니, 상신이 말하기를, “달아날 이유가 없으며, 달아난댔자 치욕을 당할 뿐입니다.” 했다. 반숭이 말하기를, “이것도 저것도 못 하겠다면,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했다. 상신이 굳이 청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반숭이 말하기를, “한 가지 계책이 있으나 아주 재빨라야 하니 태자께서 차마 그 일을 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하니, 상신이 말하기를,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인데 무엇인들 차마 못 하겠습니까?” 했다. 반숭이 상신의 귀에 대고 말하기를, “대사를 행하신다면 곧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니, 상신이 말하기를, “이 일은 제가 능히 행할 수 있습니다.” 했다. 이에 동궁 소속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한밤중이 되자, 궁중에 변이 일어났다는 핑계를 대고 마침내 왕궁을 포위했다. 반숭이 검을 들고 장사 몇 사람을 데리고 궁궐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바로 초성왕의 침실로 들어갔다. 좌우의 시종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다. 초성왕이 묻기를, “경은 무슨 일로 왔는가?” 하니, 반숭이 대답하기를, “대왕께서는 왕위에 계신 지 47년이 되었습니다. 공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니, 백성들이 새로운 왕을 모시고자 합니다. 청컨대 왕위를 태자에게 전하십시오.” 했다.
成王惶遽答曰:「孤即當讓位,但不知能相活否?」潘崇曰:「一君死,一君立,國豈有二君耶?何王之老而不達也?」成王曰:「孤方命庖人治熊掌,俟其熟而食之,雖死不恨!」潘崇厲聲曰:「熊掌難熟,王欲延時刻,以待外救乎?請王自便,勿俟臣動手!」言畢,解束帶投於王前。成王仰天呼曰:「好鬥勃!好鬥勃!孤不聽忠言,自取其禍,復何言哉!」遂以帶自挽其頸,潘崇命左右拽之,須臾氣絕。江羋曰:「殺吾兄者,我也!」亦自縊而死。時周襄王二十六年,冬十月之丁未日也。髯翁論此事,謂成王以弟弒兄,其子商臣,遂以子弒父,天理報應,昭昭不爽。有詩嘆曰:「楚君昔日弒熊囏,今日商臣報叔冤。天遣潘崇為逆傅,痴心猶想食熊蹯。」
초성왕이 당황하여 허둥지둥 대답하기를, “내가 즉시 양위를 할 것이니, 능히 살려 줄 수 있겠느냐?” 하니, 반숭이 말하기를, “한 군주가 죽어야 새로운 군주가 설 수 있습니다. 나라에 어찌 두 군주가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대왕께서는 늙었는데도 저세상에 가지 않으려 하십니까?” 했다. 초성왕이 말하기를, “내가 방금 요리사에게 곰 발바닥을 요리하라고 했다. 그것이 익기를 기다려 먹을 수 있다면 비록 죽어도 한이 없겠다!” 하니, 반숭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곰 발바닥은 빨리 익지 않습니다. 왕께서 시간을 지연시켜 외부의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리겠다는 것입니까? 청컨대,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오. 신하가 손을 쓰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했다. 말이 끝나자, 반숭은 허리띠를 풀어서 왕 앞에 던졌다. 초성왕이 하늘을 우러러 소리치기를, “투발아, 투발이여! 내가 그대의 충성스러운 말을 듣지 않아 스스로 화를 불러들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띠로 스스로 목을 매었다. 반숭이 좌우에 명하여 허리띠를 잡아당기게 하니, 곧 숨이 끊어졌다. 강미가 말하기를, “내 오라버니를 죽인 것은 나다!” 하고, 역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때는 주양왕 26년(기원전 626년) 겨울 10월 정미 일이었다. 염옹이 이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초성왕이 형을 죽이고 왕이 되더니, 그 아들 상신이 자식으로서 아비를 죽였으니 하늘의 이치가 인과응보로 밝아서 틀림이 없다고 했다. 시를 지어 탄식하기를, ““초성왕이 옛날에 형인 웅간을 죽이고 왕이 되더니, 오늘은 상신이 아비를 죽여 큰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하늘이 반숭을 보내 반역의 스승으로 삼게 했는데, 어리석은 초성왕은 죽음에 임해서도 곰 발바닥을 먹고 싶어 했다.”고 하였다.
商臣既弒其父,遂以暴疾訃於諸侯,自立為王,是為穆王。加潘崇之爵為太師,使掌環列之尹,復以為太子之室賜之。令尹鬥般等,皆知成王被弒,無人敢言。商公鬥宜申聞成王之變,託言奔喪,因來郢都,與大夫仲歸謀弒穆王。事露,穆王使司馬鬥越椒擒宜申仲歸殺之。巫者范矞似言:「楚成王與子玉子西三人,俱不得其死。」至是,其言果驗矣!鬥越椒覬令尹之位,乃說穆王曰:「子揚常向人言:『父子世秉楚政,受先王莫大之恩,愧不能成先王之志。』其意欲扶公子職為君。子西之來,子揚實召之。今子西伏誅,子揚意不自安,恐有他謀,不可不備。」
상신이 그 부친을 죽이고, 곧 부왕이 급한 병으로 죽었다고 여러 제후에게 부고를 보내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목왕(楚穆王)이다. 초목왕은 반숭의 벼슬을 높여 태사(太師)로 삼아 왕궁을 호위하는 군사들을 관장하도록 했으며, 다시 자기가 태자 시절 쓰던 동궁을 내주었다. 영윤 투반(鬪般) 등은 초성왕이 태자에게 피살된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상공(商公) 투의신(鬪宜申)은 성왕이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 참석을 핑계 삼아 영도(郢都)에 들어와서는 대부 중귀(仲歸)와 모의하여 초목왕을 살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모의는 사전에 누설되어 초목왕이 보낸 사마 투월초(鬪越椒)에 잡혀서 투의신과 중귀는 살해되었다. 지난날 무당 범율(范矞)이 친 점괘에 ‘초성왕과 자옥(子玉 ; 성득신) 및 자서(子西 ; 투의신) 세 사람은 모두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에 이르러 그 점괘가 과연 맞게 되었다. 투월초가 영윤(令尹)의 자리를 탐내어 초목왕에게 말하기를, “자양(子揚 ; 투반)이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부자가 대를 이어 초나라의 정사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선왕(초성왕)의 크나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선왕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라고 했습니다. 그 뜻이란 공자 직(職)을 도와 군주로 삼는 것입니다. 자서(子西)가 자기의 봉지인 상(商) 땅에서 왕성으로 들어온 것은 실은 자양(子揚 ; 투반)이 불렀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서가 잡혀 죽게 되자 자양이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음모가 있을지 걱정됩니다.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했다.
穆王疑之,乃召鬥般使殺公子職,鬥般辭以不能。穆王怒曰:「汝欲成先王之志耶?」自舉銅鎚擊殺之。公子職欲奔晉,鬥越椒追殺之於郊外。穆王拜成大心為令尹。未幾,大心亦卒。遂遷鬥越椒為令尹,蒍賈為司馬。後穆王復念子文治楚之功,錄鬥克黃為箴尹。克黃字子儀,乃鬥般之子,子文之孫也。晉襄公聞楚成王之死,問於趙盾曰:「天其遂厭楚乎?」趙盾對曰:「楚君雖橫,猶可以禮義化誨。商臣不愛其父,況其他乎?臣恐諸侯之禍,方未艾耳!」不幾年,穆王遣兵四出,先滅江,次滅六,滅蓼,又用兵陳鄭,中原多事,果如趙盾之言。此是後話。
초목왕이 의심하여, 즉시 투반을 불러 공자 직을 죽이라고 했다. 투반은 자기는 할 수 없다고 사양했다. 목왕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네가 선왕의 뜻을 이루고자 했느냐?” 하고, 직접 구리망치를 들어 투반을 내리쳐 죽였다. 공자 직은 진(晉)나라로 달아나려고 했으나, 투월초가 뒤를 쫓아가 교외에서 살해했다. 초목왕은 성대심을 영윤으로 삼았다. 그러나 성대심은 오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마침내 투월초를 영윤에, 위가(蔿賈)를 사마(司馬)로 삼았다. 후에 초목왕은 자문이 초나라를 다스린 공을 생각하여 투극황(鬪克黃)을 잠윤(箴尹 ; 간관)에 임명했다. 투극황의 자는 자의(子儀)이고 투반의 아들이며 자문의 손자였다. 진양공(晉襄公)은 초성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돈(趙盾)에게 묻기를, “하늘이 마침내 초나라를 미워하시는가?” 하니, 조돈이 대답하기를, “초성왕이 비록 횡포를 부리기는 했으나 그래도 예의로써 백성들을 교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상신은 그 아비를 죽였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안중에 두겠습니까? 신은 앞으로 제후들의 재앙이 그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했다.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초목왕이 사방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먼저 강(江)을 멸하고, 다음에 육(六)을 멸하고, 그리고 료(蓼)를 멸했다.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진(陳)나라와 정나라를 침략하니, 중원이 시끄러워져서 과연 조돈의 말대로 되었는데, 이것은 다음 이야기이다.
卻說,周襄王二十七年,春二月,秦孟明視請於穆公,欲興師伐晉,以報崤山之敗。穆公壯其志,許之。孟明遂同西乞白乙,率車四百乘伐晉。晉襄公慮秦有報怨之舉,每日使人遠探,一得此信,笑曰:「秦之拜賜者至矣!」遂拜先且居為大將,趙衰為副,狐鞫居為車右,迎秦師於境上。大軍將發之際,狼曋自請以私屬效勞,先且居許之。時孟明等尚未出境。先且居曰:「與其俟秦至而戰,不如伐秦。」遂西行至於彭衙,方與秦兵相遇,兩邊各排成陣勢。狼曋請於先且居曰:「昔先元帥以曋為無勇,罷黜不用,今日曋請自試,非敢求錄功,但以雪前之恥耳。」
한편 주양왕 27년(기원전 626년) 봄 이월에 진(秦)나라 맹명시(孟明視)가 진목공에게 군사를 일으켜 진(晉)나라를 쳐서 효산의 패배를 설욕하기를 청했다. 진목공은 그 뜻을 장하게 여겨 허락했다. 마침내 맹명시가 서걸술, 백을병과 함께 전차 400대를 거느리고 진(晉)나라를 공격했다. 진양공은 진(秦)나라가 원수를 갚기 위해 쳐들어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매일 사람을 시켜 멀리 정탐하다가 마침내 이 소식을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말을 받아 가려는 사람이 오는구나!” 했다. 진양공은 즉시 선차거를 대장으로, 조쇠를 부장으로, 호국거를 차우장군에 임명하여, 국경에서 진(秦)나라 군사를 맞이하게 했다. 대군이 출동하려는 순간, 낭심이 개인적으로 모은 사병을 거느리고 와서 종군을 자청하니, 선차거가 허락했다. 그때 맹명시 등은 아직 국경을 나오지 않았다. 선차거가 말하기를, “진(秦)나라 군사들을 기다려서 싸우기보다는 진(秦)나라로 쳐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오.” 하고, 마침내 서쪽으로 진군하여 팽아(彭衙)에 이르러 진(秦)나라 군사와 서로 만나 양쪽이 각각 진을 펼쳤다. 낭심이 선차거에게 청하기를, “옛날에 선진 원수께서 저를 용기가 없다 하시면서 쫓아내 쓰지 않았습니다. 오늘 제가 스스로 시험하기를 청하니 감히 공을 기록하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옛날의 치욕을 풀고자 할 뿐입니다.” 했다.
言畢,遂與其友鮮伯等百餘人,直犯秦陣,所向披靡,殺死秦兵無算。鮮伯為白乙所殺。先且居登車,望見秦陣已亂,遂驅大軍掩殺前去。孟明等不能當,大敗而走。先且居救出狼曋,曋遍體皆傷,嘔血斗餘,踰日而亡。晉兵凱歌還朝。且居奏於襄公曰:「今日之勝,狼曋之力,與臣無與也。」與襄公命以上大夫之禮,葬狼曋於西郭,使群臣皆送其葬。此是襄公激勵人才的好處。史臣有詩誇狼曋之勇云:「壯哉狼車右,斬囚如割雞!被黜不妄怒,輕身犯敵威。一死表生平,秦師因以摧。重泉若有知,先軫應低眉。」
말을 마치자 마침내 낭심은 그 친구인 선백(鮮伯) 등 100여 인과 함께 곧바로 진(秦)나라 진영으로 돌격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는 쓰러지고 죽은 진(秦)나라 군사가 무수했다. 그러나 선백은 백을병에게 살해되었다. 선차거가 전차에 올라 진(秦)나라 진영이 이미 어지러워진 것을 바라보고, 마침내 대군을 몰아 돌격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맹명시 등이 당해 내지 못하고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선차거가 낭심을 구출해서 살펴보니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낭심이 피를 한 말 넘게 토하더니 날을 넘기고 죽었다. 진(晉)나라 군사는 개선가를 부르며 강도(絳都)로 귀환했다. 선차거가 진양공에게 말하기를, “이번 싸움의 승리는 낭심의 분전 때문이었지 신은 아무 공도 없습니다.” 했다. 진양공이 명하여 낭심을 상대부의 예로 서쪽 성곽 밖에 장사지내게 하고, 여러 신하가 그의 장례를 전송하도록 했다. 이것은 진양공이 인재를 격려한 좋은 점이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낭심의 용기를 칭찬하기를, “장하다, 차우 장군 낭심이여! 죄수의 목을 닭 모가지 자르듯 했구나! 쫓겨나도 망령되이 분노하지 않았고, 가볍게 몸을 날려 적의 위엄을 꺾었다. 한번 죽음으로써 평생의 공을 드러냈으니, 진(秦)군은 이로 인하여 꺾였도다! 만약 먼 저승에서 안다면, 선진은 마땅히 고개를 숙였으리라!” 했다.
卻說,孟明兵敗回秦,自分必死,誰知穆公一意引咎,全無嗔怪之意,依舊使人郊迎慰勞,任以國政如初。孟明自愧不勝。乃增修國政,盡出家財,以卹陣亡之家。每日操演軍士,勉以忠義,期來年大舉伐晉。是冬,晉襄公復命先且居,糾合宋大夫公子成、陳大夫轅選、鄭大夫公子歸生,率師伐秦,取江及彭衙二邑而還。戲曰:「吾以報拜賜之役也。」昔郭偃卜繇,有「一擊三傷」之語,至是三敗秦師,其言果驗。孟明不請師禦晉,秦人皆以為怯。惟穆公深信之,謂群臣曰:「孟明必能報晉,但時未至耳。」
한편, 맹명시는 싸움에서 패하고 진(秦)나라로 돌아오며 자신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누가 알았으리요, 진목공은 한마디로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전혀 비난하지 않고, 여전히 사람을 시켜 교외에 나가 영접하도록 하고 위로의 말을 전하여 국정을 전처럼 맡게 했다. 맹명시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했다. 이에 진(秦)나라 정치를 더욱 쇄신하고 모든 가재를 털어 싸움터에서 전사한 군사들의 가족들을 구제했다. 매일 군사들을 조련하고 충의로 힘을 써서 다음 해를 기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진(晉)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그해 겨울, 진양공은 다시 선차거에게 명하여 송(宋)나라 대부 공자 성(成)과, 진(陳)나라 대부 원선(轅選), 정(鄭)나라 대부 공자 귀생(歸生)을 규합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진(秦)나라를 쳐서 강읍(江邑)과 팽아(彭衙) 두 고을 빼앗고 돌아왔다. 진양공이 농담하기를, “(세 장수가) 말을 받으러 온 것을 내가 보답한 것이다.” 라고 했다. 옛날에 곽언(郭偃)이 점을 쳐서 점괘에, ‘한번 치니 세 번 상한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세 번 진(秦)나라 군사를 패배시켰으므로 과연 그 점괘가 맞았다고 할 수 있었다. 맹명시가 군사를 일으켜 진(晉)나라를 막지 않은 것을 진(秦)나라 사람들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목공만은 그를 깊이 믿고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맹명시는 반드시 진(晉)나라에 보복할 것이다. 다만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뿐이다.” 했다.
至明年夏五月,孟明補卒蒐乘,訓練已精,請穆公自往督戰:「若今次不能雪恥,誓不生還!」穆公曰:「寡人凡三見敗於晉矣。若再無功,寡人亦無面目返國也。」乃選車五百乘,擇日興師。凡軍士從行者,皆厚贈其家,三軍踴躍,皆願效死。兵由蒲津關而出。既渡黃河,孟明出令,使盡焚其舟。穆公怪而問曰:「元帥焚舟,何意也?」孟明視奏曰:「『兵以氣勝。』吾屢挫之後,氣已衰矣。幸而勝,何患不濟?吾之焚舟,示三軍之必死,有進無退,所以作其氣也。」穆公曰:「善。」
다음 해 여름 5월에 이르자 맹명시가 군사들을 보충하고 전차를 점검하여 훈련을 마친 후, 진목공에게 직접 가서 독전하기를 청하면서, “만약에 이번에도 치욕을 씻지 못한다면 맹세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했다. 진목공이 말하기를, “과인은 진(晉)나라에 세 번에 패했다. 만약 다시 공이 없다면 과인도 역시 귀국할 면목이 없을 것이다.” 했다. 이에 전차 500대를 선발하고 길일을 택해 군사를 일으켰다. 싸움터에 나가는 모든 군사의 집에 후하게 보상했기 때문에 3군이 뛸 듯이 좋아하며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기를 원했다. 군사들은 포진관(蒲津關)을 거쳐 나가서 황하를 건너자, 맹명시가 군령을 내려 배를 모두 불태우게 했다. 진목공이 괴이히 여겨 묻기를, “원수가 배를 불태우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이오?” 하니, 맹명시가 아뢰기를, “‘군대는 사기로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번 싸움에 져서 병사들의 사기가 많이 꺾여 있습니다. 다행히 싸움에서 이기면 황하를 건너는 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배를 불태운 것은 3군이 필사의 각오로 오로지 전진만 있지, 후퇴는 없다는 각오를 보여주어 그 사기를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했다. 진목공이 말하기를, “훌륭한 생각이오.” 했다.
孟明自為先鋒,長驅直入,破王官城,取之。諜報至絳州,晉襄公大集群臣,商議出兵拒敵。趙衰曰:「秦怒已甚,此番起傾國之兵,將致死於我。且其君親行,不可當也,不如避之。使稍逞其志,可以息兩國之爭。」先且居亦曰:「困獸猶能鬥,況大國乎?秦君恥敗,而三帥俱好勇,其志不勝不已。兵連禍結,未有已時,子餘之言是也。」襄公乃傳諭四境堅守,毋與秦戰。繇余謂穆公曰:「晉懼我矣!君可乘此兵威,收崤山死士之骨,可以蓋昔之恥。」穆公從之。遂引兵渡黃河上岸,自茅津濟師,屯於東崤,晉兵無一人一騎敢相迎者。
맹명시는 스스로 선봉이 되어 곧바로 진격하여 왕관성(王官城)을 깨트려 점령했다. 왕관성이 함락되었다는 첩보가 강주(絳州 ; 晉나라 도읍)에 이르자. 진양공이 여러 신하를 모아 출병하여 적을 막을 것을 상의했다. 조쇠가 말하기를, “진(秦)나라는 분노가 극에 달해 이번에 국력을 기울여 군사들을 일으켜 장차 우리와 죽기로 싸우려고 합니다. 또한 그 군주가 친히 왔으니 우리가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싸움을 피해 잠시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가 천천히 두 나라 사이의 분쟁을 끝내야 합니다.” 했다. 선차거도 역시 말하기를, “곤경에 빠진 짐승이 사나워집니다. 하물며 큰 나라이겠습니까? 진목공이 우리와의 싸움에서 진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있으며, 또한 세 장수는 모두 용기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의지가 이기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을 기세입니다. 전쟁이 계속되어 재앙이 끊이지 않을 것이니, 자여(조쇠)의 말씀이 옳습니다.” 했다. 진양공이 명령을 전하여 사방의 성읍들은 굳게 지키고 진(秦)나라 군사들과 싸우지 말라고 했다. 한편, 요여(繇余)가 진목공에게 말하기를, “진(晉)나라가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이번의 군사적 위세를 이용하여 효산에서 전사한 군사들의 시신을 거두시면, 가히 옛날의 수치를 덮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진목공이 그 말을 쫓아, 즉시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강변으로 올라 모진(茅津)에서 군사를 건너게 하여 동효산(東崤山)에 진을 쳤다. 진(晉)나라 군사는 하나도 감히 맞서지 않았다.
穆公命軍士於墮馬崖、絕命巖、落魂澗等處,收檢屍骨,用草為襯,埋藏於山谷僻坳之處。宰牛殺馬,大陳祭享。穆公素服,親自瀝酒,放聲大哭。孟明諸將伏地不能起,哀動三軍,無不墮淚。髯仙有詩云:「曾嗔二老哭吾師,今日如何自哭之?莫道封屍豪舉事,崤山雖險本無屍。」江及彭衙二邑百姓,聞穆公伐晉得勝,哄然相聚,逐去晉之守將,還復歸秦。秦穆公奏凱班師,以孟明為亞卿,與二相同秉國政。西乞白乙,俱加封賞。改蒲津關為大慶關,以志軍功。卻說,西戎主赤班,初時見秦兵屢敗,欺秦之弱,欲倡率諸戎叛秦。及伐晉回來,穆公遂欲移師伐戎。繇余請傳檄戎中,徵其朝貢,若其不至,然後攻之。
진목공은 진(秦)나라 군사에게 명하여 타마애(墮馬崖), 절명암(絶命巖), 낙혼간(落魂澗) 등에서 시신과 해골들을 거두게 하여 풀로 싸서 산골짜기의 외지고 우묵한 곳에 매장하도록 했다. 소와 말을 잡아 크게 제사를 차려 진목공이 흰옷을 입고 친히 술을 따라 제단에 바치고 목놓아 곡을 했다. 맹명시와 여러 장수도 땅에 엎드려 오랫동안 일어설 줄 몰랐다. 진(秦)나라의 3군이 애통해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일찍이 두 늙은이가 출정하는 군사를 곡한다고 성을 내더니, 오늘은 어이하여 스스로 곡을 하고 있는가? 시신을 거두어 호화롭게 장례를 치렀다고 말하지 말라! 효산은 비록 험하지만 본래 시신은 없었다.” 했다. 강(江)과 팽아(彭衙) 두 고을의 백성들은 진목공이 진(晉)나라에 쳐들어가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서로 모여 진(晉)나라 장수를 쫓아버리고 다시 진(秦)에 복귀했다. 진목공이 개선가를 부르며 회군하여, 맹명시를 아경(亞卿)으로 삼아 두 재상(요여와 공손지)과 함께 국정을 돌보게 했다. 서걸술과 백을병에게도 모두 봉작을 더하여 주고 상을 내렸다. 다시 포진관(蒲津關)을 대경관(大慶關)으로 바꾸어 군사들의 공로를 기념하게 했다. 한편, 서융(西戎)의 군주 적반(赤斑)은 처음에 진(秦)나라가 여러 번의 싸움에서 지는 것을 보고 진(秦)나라가 약하다고 깔보아, 여러 융족을 거느리고 진(秦)나라에 반기를 들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진(晉)나라를 치고 돌아온 진목공이 마침내 군사를 이동하여 서융을 치려고 했다. 요여가 청하기를, 격문을 써서 서융에 보내어 조공을 요구하다가 만약 오지 않으면 그때 공격하자고 했다.
赤班打聽孟明得勝,正懷憂懼;一見檄文,遂率西方二十餘國,納地請朝,尊穆公為西戎伯主。史臣論秦事,以為「千軍易得,一將難求。」穆公信孟明之賢,能始終任用,所以卒成伯業。是時秦之威名,直達京師,周襄王謂尹武公曰:「秦晉匹也,其先世皆有功於王室。昔重耳主盟中夏,朕冊命為侯伯。今秦伯任好,強盛不亞於晉,朕亦欲冊之如晉。卿以為何如?」尹武公曰:「秦自伯西戎,未若晉之能勤王也。今秦晉方惡,而晉侯驩能繼父業,若冊命秦,則失晉歡矣。不若遣使頒賜以賀秦,則秦知感,而晉亦無怨。」襄王從之。
적반(赤班)이 맹명시가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두려운 마음을 품었다. 한번 격문을 읽어 보고 마침내 서쪽의 20여 나라를 인솔하여 땅을 바치고 조공을 청하며 진목공을 높여 서융의 우두머리로 받들기로 했다. 사관이 진(晉)나라 일을 논하기를, “천군의 병사는 얻기 쉬어도 한 사람의 장수는 구하기 어렵다.”라고 했다. 진목공이 맹명시의 어짊을 믿고 시종일관 임용해서 마침내 패업을 이룰 수 있었다. 이때 진(秦)나라의 위세외 이름이 주나라 왕실에까지 전해져 주양왕이 윤무공(尹武公)에게 말하기를,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국세가 비슷하다. 그 선대에 모두 왕실에 공로가 있다. 옛날에 중이가 중원에서 회맹을 주재할 때 내가 왕명으로써 후백(侯伯)에 임명하였다. 오늘 진(秦)나라 군주 임호(任好)가 강성하여 진(晉)나라에 뒤지지 않으니 내가 역시 그를 진문공(晉文公)과 같이 후백으로 임명하려고 하는데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윤무공이 말하기를, “진(秦)나라가 스스로 서융의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아직 진(晉)나라만큼 왕실을 위해 힘쓰지는 않습니다. 지금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사이가 나쁘고, 진(晉)나라 군주 환(驩)이 능히 아비의 패업을 잇고 있으니, 만약 진(秦)나라 군주를 후백에 봉한다면 진(晉)나라는 우리의 처사를 싫어할 것입니다. 섬진의 군주를 후백으로 임명하기 것보다는 차라리 사자를 보내어 진(秦)나라를 축하한다고 하면, 진목공은 감을 알아차릴 것이며 진(晉)나라 역시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주양왕이 그 말을 따랐다.
要知後事如何,再看下回分解。
뒷일이 어찌 될지 알고 싶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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