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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
절집을 기웃거린 인연, ‘엉거주춤’이라는 춤사위
임연태
엉거주춤은 춤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도 이 엉거주춤의 춤사위를 어쩌지 못했다. 족보도 없고 정형(定型)도 없는 춤사위. 이도저도 아니게 하루가 지나가고 또 이도저도 아니게 하루가 다가온다. 앉은 것도 아니고 선 것도 아닌 자세. 내 일상은, 아니 내 살아 온 시간은 아무리 뒤져 봐도 엉거주춤 아닌 것이 없다.
과일을 딸 때는 그 나무를 생각하고 한 모금 물을 마셔도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落實思樹 飮水思源]고 했던가? 오십을 넘긴 나이에, 여전히 어쩌지 못하는 엉거주춤의 출발점을 되짚어 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후회해도 때가 늦었고 각성을 해도 지나가 버린 시간을 리셋(reset)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 다만, 어쩌다 궁벽한 변명거리라도 하나 캐 낼 수 있다면 거기 딱 멈춰 서서 한 마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 너는 살아 있지 않느냐?”
절집에서 발견한 ‘리듬’
1978년,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절집에 인연이 닿았다. 그땐 그 인연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는 게 없으니 생각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 인연이 내 삶을 지탱해 주는 나무가 되고 원천源泉이 되었다. 엉거주춤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청룡암. 그 암자에 연결된 오래된 기와집 한 채에 깃들어 살면서 자연스레 절집 사람들과 한 식구가 됐다. 모든 게 새로웠고 그 새로움에는 즐거움이 있었다.
나는 시골에서 고무신 신고 올라온 촌놈이었다. 교회를 몇 번 나갔다가 재미가 없어서 집어치운 뒤 종교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절집에 드나들면서 종교와 문학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오면 쪽문을 통해 절 마당으로 갔고 또래의 행자와 놀았다. 행자는 큰방을 쓰고 있었다. 큰방이란 말 그대로 큰방이다. 법당 옆에 붙어 있는 큰방은 신도들이 둘러 앉아 회의를 하거나 잡담을 하기도 하고, 가끔 스님들이 둘러 앉아 발우공양을 하기도 하는 공용공간이었다. 그런 방이 행자의 방이었는데 두 개의 책상이 있었고 책장이 하나 서 있었다. 책장 속에는 한문으로 제목을 단 책들이 크기에 맞춰 똑바로 서 있었다.
행자도 나만큼이나 공부하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이 잘 맞았다. 하지만 별로 놀 거리도 없는 게 절집이었다. 어느 날, 행자가 스님으로부터 받은 숙제는 ‘반야심경 외우기’였다. 며칠이 지나도 별 진척이 없었다. 통틀어 270글자인데, 그게 그렇게 외워지지 않았다. 뜻은 모르고 글자만(그것도 한자를) 머리에 우겨 넣으려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행자의 숙제를 도와주기 위해 반야심경을 함께 외웠다. 누가 빨리 외우나 경쟁을 하듯. 뜻도 모를 글자들을 마주앉아 읽고 외우기를 반복하며 그 지겨운 숙제를 했다. 그런데 어떤 리듬을 느끼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니까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같은 대목에서 묘하게 이어지는 그 굴곡에서 춤사위 같은 흥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재미에 깊이 빠지지는 않았다. 며칠 기를 쓰고 외운 덕에 숙제검사를 무사히 통과했으므로 더 이상 반야심경을 외울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겨울방학이었다. 큰방에서 행자가 얇은 책을 놓고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이번 방학 때 이 책을 공부해야 한다고 하며 보여주는 책이, 세상에! 한문 원본 그대로였다. 대장경 판을 그대로 찍어낸 듯한, 세로줄에 한자가 새겨져 있고 한글이라곤 한 자도 없었다. 실로 꿰맨 책의 표지는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었다. 행자는 말했다. 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이 책을 꼭 배워야 한다고.
행자의 굳은 표정과는 달리 나는 이상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스님이 안 될 사람은 배울 수 없는 건가? 배워서는 안 되는 건가? 무슨 내용이기에?
다음날부터 행자와 둘이 스님 앞에서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공부했다. 스님이 한자의 뜻을 새겨주고 문장의 의미를 가르쳤다. 더러 관련된 일화나 실생활에서의 사례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우리는 꿇어 앉아 그 말씀을 자세히 들었고 그날 배운 대목은 그날 외웠다. 다음날 공부의 시작은 전날 배운 것을 암송하는 것부터였다. 스님은 입으로만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어깨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며 염불을 하듯 리듬 있게 외워야 한다고 했다. 아하! 절집의 모든 문장은 리듬을 타는 것이로구나!
시집 한 권의 인연
청룡암에는 다섯 분의 스님이 사셨다. 큰스님(지관스님, 당시 동국대교수)은 법당에 딸린 방에 계셨고 길다란 요사채에는 총무 태현스님, 청원스님, 향운스님의 방이 있었다. 그리고 쪽문을 넘어 후원채에 법조스님의 방이 있었고 그 후원채와 연결된 집에 내가 살았다.
절집과 후원채는 총무스님의 방 옆으로 난 쪽문을 통해 들락거렸다. 어느 날 청원 스님의 방에 갔다가 시집 한 권을 얻었다. 『귀향』이라는 제목의 시집이었다. 자명, 황청원, 박진관 세 스님의 공동 시집.
누구에게 책을 받는 것이 처음이었다. 더구나 저자가 사인을 해서 주는 책을 받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스님들이 시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시집의 서문 끝에 ‘未堂居士 徐廷柱 識’이라는 글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유명한 시인이 서문을 쓴 것도 놀라웠지만, 청원 스님의 시집에 그 유명한 시인이 서문을 썼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놀람의 크기만큼 청원스님이 커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집을 읽었다. 아주 여러 번 읽었다. 자명스님의 시는 간결하면서도 뭔가 깊은 뜻이 있다고 느꼈고, 청원스님의 시에서는 어떤 그림이 그려지기고 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바닥에 흐르는 듯 했다. 진관스님의 시는 「님의 침묵」 같은 분위기로 쓰였는데, 그것은 형식이 비슷한 것이고 내용은 좀 다르다는 인상이 깊었다.
자명스님과 진관스님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래도 시집을 읽는 동안은 그 스님들도 청원스님처럼 한집 식구 같았다. 처음에는 시말 읽다가 뒤에 붙은 해설을 읽었다. 송혁 선생님과 정현종 성생님의 해설을 읽으면서 나는 세 스님의 시를 좀 더 이해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시를 쓰는 사람과 그 시를 이렇게 저렇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러면서 나는? 이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는데. 당연히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스님들의 공동시집 『귀향』에 실린 시들은 국어시간을 제외하고 처음 통독을 한 시들이다. 시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흥미를 위해서 읽은 첫 시집.
그 뒤로 절집에서 간간히 들춰본 책들에서도 많은 시를 보았다. 그 중에서도 손바닥만 한 신행안내서에서 『열반경』에 나오는 게송을 만났다. ‘생은 어디서 오는가[生從何處來]? 죽음은 어디로 향해 가는가[死向何處去]? 생은 한조각 뜬구름 일어남이요[生也一片浮雲起] 죽음은 한조각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死也一片浮雲滅]’ 이렇게 시작되는 게송이었다.
나름 사춘기였지만 나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두고 고민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이 게송을 읽는 순간 삶과 죽음이란 것을 한 조각 뜬 구름에 빗대어 설명 한 것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 게송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대구와 반복의 리듬이 입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 더 좋았다. 역시 절집에서의 모든 문장은 리듬이었다.
그렇게 절집을 들락거리며 지내는 동안 막연히 ‘시를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여름날 밀가루 반죽처럼 굳어져 갔다. 마침내 청원스님에게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별 신통한 답을 듣지 못했다. 그냥 많은 시를 읽고, 뭘 쓸까 생각하고, 자꾸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면 잘 쓰게 된다는 시시하고 무책임한 대답이었다. 수업시간마다 ‘밑줄 쫙’을 강요당하던 중학생이 알아먹기에는 너무나 두루뭉수리 한 대답이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서문을 써 줄 만큼 대단한 청원스님의 말이었지만 뭔가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어떡하지? 달리 방법도 없었다. 시를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은 굴뚝같은데 어디 가서 배울 곳이 없었다. 그래서 흉내 내기를 시작했다. 자명스님의 시 한편을 읽고 그 비슷한 시를 하나 써 보는 것이었다. 청원스님의 시를 읽고 또 그 시와 비슷하게 써봤다. 진관스님의 시는 좀 길어서 싫었지만 그 흉내도 내봤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습작의 시간들이 나름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어쩌다 읽은 글의 좋은 대목을 적기도 하고, 하루 중에 있었던 일을 시의 형식으로 적어 보기도 했다. 경전의 게송을 옮겨 적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나중엔 부산에 있는 여학생과 3년 동안 펜팔을 했는데, 거의 매주 한 통 이상의 편지를 썼다. 말하자면 나는 시를 습작하면서 ‘대고마고 글쓰기’를 병행한 셈이다.
어느 날 큰형님이 극작가로 등단했다는 분과 함께 왔다. 당시 큰형님이 서울예전 문창과를 다녔는데 김운경이라는 선배를 모시고 온 것이다. 그래서 습작 노트를 보여 드리게 됐는데, 대강 몇 장을 넘기더니 덮어 버렸다. 곁에 서서 꼴깍 마른침을 삼키던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데 그 극작가는 “다른 방법이 없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말이 진리다”라고 했다. 작년에 청원스님께 들은 얘기를 또 듣다니! 뒤통수가 멍해졌다.
문예반과 학생법회, 홀로 가는 길
고등학생이 되었다. 절집의 스님들은 정릉동에 있는 절로 일제히 이사를 가셨고, 행자는 어느 추운 겨울 날 절을 나가버렸다. 절집으로 통하던 쪽문은 새로 온 스님들이 시멘트를 발라버렸다. 방학 중에는 정릉까지 스님들을 뵈러 갔지만 학기가 시작되면서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러다가 나도 한강 남쪽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절집 사람들과 만날 시간이 더 없어져 버렸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도 다 배우지 못했고 큰방에 있던 많은 책들을 더 이상 볼 수도 없었다.
절집에서 승도 속도 아니게 엉거주춤하게 더부살이하듯 사춘기를 보내고 있다가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달라졌다. 암담했지만 괜찮았다. 나도 꼭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꿈 한 자락이 가슴 속에 옹이처럼 배겨 있었으므로. 그래서 고등학교를 입학하자마자 문예반을 찾아갔다.
경동고등학교 상단문학회. 선배들은 엄격했다. 대학백일장에서 상위권을 휩쓸고 다니던 선배들의 전통이 ‘빳따(대걸래 자루)’처럼 서 있는 곳에서 습작을 했다. 선배들이 지도하는 대로 시를 쓰고, 선배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시를 읽었고 이해했다. 가끔 종교의식처럼 빳따를 맞고 화끈 거리를 엉덩이를 주무르며 시를 쓰고 읽는 날도 있었다.
1학년이 끝날 무렵, 많은 것이 강요되는 문예반을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탈퇴 빳따’는 50대라고 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짜인 틀대로, 시어에 생각을 맞추는 시 쓰기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생각대로 내방식대로 시를 쓰고 싶다는 말과 함께 탈퇴를 선언했다. 나에게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격식을 만들어가고 스스로 흥취를 담는 것이 중요했고, 무엇보다 절집에서 느낀 리듬이 중요했다. 그걸 제약하는 문예반은 견딜 수 없었고, 시는 홀로 가는 길이지 남을 따라 가는 길이 아니란 것을 믿게 되었다.
문예반을 탈퇴하고 절에 다녔다. 숭인동 언덕에 있는 청룡사 학생법회였다. 청룡암에서 청룡사로 인연의 공간이 달라진 것이다. 혼자 일기장을 채워가며 습작을 하고, 토요일마다 법회에서 법문 듣고 법우들과 토론 하는 시간들이 즐겁고 즐거웠다. 그러다보니 정작 해야 할 공부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간신히 대학을 마치고 불교신문에 기자로 입사하게 되었는데, 나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내 삶의 나무줄기는 불교였고 글쓰기였던 것이다. 청룡암과 청룡사에서 맺은 열매가 제대로 여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근원으로부터 온 시간들에 대해 늘 감사하는 마음은 변함없다.
결국 혼자다. 혼자 가는 길, 이리저리 기웃거려봐야 별 것도 없는 길에서 엉거주춤한 이 자세를 어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관 밖으로 발을 쑥 내밀듯이, 내 몸에서 근사한 시 한편이 쑥 나올 날이 있지 않을까?
임연태/ 2004년 《유심》 등단. 시집 『청동물고기』, 여행집 『부도밭 기행』 『절집기행』 『히말라야 행선트레킹』, 르뽀집 『철조망에 걸린 희망』 외. 금강신문사 주간.
첫댓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