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카이 에이돈 에크 테스 달라세스 데리온 아나바이논, 에콘 케라타 데카 카이 케팔라스 헵 타˙ 카이 에피 톤- 케라톤- 아우투 데카 디아데마타, 카이 에피 타스- 케팔라스 아우투 오노마 타 블라스페미아스.
또 나는 그 바다에서 한 짐승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 짐승은 열개의 뿔들과 일곱 개 의 머리들을 가졌으며 그 뿔들에는 열개의 왕관을 썼고 그 머리들에는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 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담한 이름들이 있더라)
붉은 용과 짐승은 다 같이 일곱 개의 머리들과 열개의 뿔들을 가졌다. 용은 그 일곱 머리들에 왕관을 썼고, 짐승은 그 열 뿔들에 왕관을 썼다.
용은 성령이 에클레시아를 위하여 행하시는 그의 일곱 가지 일들을 제 것으로 바꾸었다. 즉 용은 성령의 은혜와 영광과 진리와 성결과 생명과 영적 언약과 영원을 세상의 거래와 성공과 선악지식과 음행과 생존과 육적 언약과 영존으로 바꾸었고 그 스스로 왕관을 썼다.
용은 마귀로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서, 짐승은 밖에서 그와 함께 역사하며 사람들에게서 물질의 십일조를 받아 점점 부강해진다. 에클레시아의 십일조는 그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과 짐승은 그것을 거래로 바꾸어 물질의 십일조를 내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그에게 한 없이 육적인 축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한다.
사람의 열 손가락은 그 마음의 다스림을 받는다. 에클레시아가 그의 마음을 용에게 빼앗기면 그가 열 손가락으로 일하여 얻은 물질(돈)의 십일조를 짐승에게 드리면서 육신의 복을 내려달라고 애원한다. 이와 같이 짐승에게 돈의 십일조를 내는 자의 열 손가락은 짐승의 열 뿔들이 되어 있고 짐승은 그 뿔로서 어린양을 대항하며 그 스스로 왕관을 쓰고 있다.
짐승의 일곱 머리들에 있는 모독하는 이름들은 용에게서 받은 것이다. 붉은 용과 짐승의 일곱 머리들은 그들의 선악지식이요 열 뿔들은 그들의 욕심이다. 붉은 용은 육신의 생존전쟁을 짐승이 일으키게 한다. 짐승은 누구인가. 종주들이다.
2 카이 토 데리온 호 에이돈 엔 호모이온 파르달레이, 카이 호이 포데스 하우투 호스 아르 쿠, 카이 토-스토마-아우 투 호스 스토마 레곤토스. 카이 에도켄 아우토 호 드라콘 텐 뒤 나민-아우투 카이 톤 드로논 아우투, 카이 엑수시안 메갈렌.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을 닮았고, 그의 발들은 곰과 같고, 그의 입은 사자의 입과 같았 다. 그 용은 자기의 그 능력과 그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다.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다)
붉은 용은 하늘에서 미가엘과의 전쟁에 패하여 땅으로 쫓겨났고 땅에서 그 여자와 전쟁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바다에서 그 여자의 씨의 남은 자손들과의 전쟁에서 그가 이기지 못하면 그는 무저갱으로 쫓겨날 것이다. 그는 그의 모든 능력과 보좌의 높은 자리와 큰 권세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주어서 에클레시아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에클레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하나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그 믿음은 짐승의 능력에 의해 무너질 것이요, 에클레시아가 오늘 여기서 일으킴을 받는 카이로스 부활의 소망 안에 거치지 아니하면 짐승의 보좌의 높은 자리에서 오는 영광을 탐하게 될 것이요, 에클레시아가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사랑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지 아니하면 그는 큰 권세를 가진 짐승을 좇으며 그에게 돈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다.
용과 짐승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음을 알고 그들의 모든 능력과 자리와 권세를 동원하여 전쟁에 임한다. 여기 짐승은 표범과 곰과 사자를 섞어 놓은 짐승이다. 다니엘서의 무섭고 놀라운 짐승이다. 이 짐승은 배의 우상(표범), 가슴의 우상(곰), 머리의 우상(사자)을 하나로 아우른 우상이며 요한 계시록의 청황색 말과 그 위에 앉은 자다. 이 짐승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하여 좋은 소식이 아닌 복 소리(복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속이며 종교전쟁을 수행한다.
3 카이 미안 에크 톤 케팔론 아우투 호스 에스파그메넨 에이스 다나톤˙ 카이 헤 플레게 투 다나투 아우투 에데라퓨데, 카이 에다우마스데 홀레 헤 게 오피소 투 데리우.
그 짐승은 머리 하나에 치명상을 입어 거의 죽게 되었다가 그의 죽음의 상처가 나았다. 그 온 땅이 기이하게 여기고 그 짐승을 따르고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 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붉은 용은 성령의 은혜와 영광(승리)과 진리와 성결과 영적 언약과 영원을 세상의 거래와 성공과 선악지식과 음행과 육적 언약과 영존으로 바꾸어 가지고 있다. 용은 미가엘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여인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그 때문에 그가 가진 성공의 머리는 거의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짐승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함으로써 다시 성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이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행하는 생존 전쟁이다. 오늘날 온 세상은 생존 전쟁이라 불리우는 그것에 몰두되어 있다. 그 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자 찾기 어렵다. 용이 그 전쟁을 위하여 짐승을 바다에서 끌어 올리자 그 죽게 되었던 머리 하나가 나았고 사람들은 그것을 기이하게 여기고 그 짐승을 따른다. 사람들은 짐승에게서 거짓 부활(기적)을 보고 놀랐다.
4 카이 프로스퀴네산 토 드라콘티 호티 에도켄 텐 엑수시안 토 데리오, 카이 프로스퀴네산 토 데리오, 레곤테스, 티스 호모이오스 토 데리오; 카이 티스 뒤나타이 폴레메사이 메트 아우투 ;
사람들은 그 짐승에게 권세를 준 그 용에게 경배하였다. 또 그들은 그 짐승에게 경배하며 말하기를 "누가 그 짐승과 같으냐, 누가 그와 맞서 싸울 수 있느냐" 하였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 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미가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으냐'이다. 사람들은 미가엘이 붉은 용과 싸우면서 '누가 하나님과 같으냐'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머리 하나가 죽게 되었다 살아난 짐승을 경배하며 '누가 그 짐승과 같으냐, 누가 그와 맞서 싸울 수 있느냐' 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짐승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다. 오늘날 큰 건물, 많은 사람, 많은 재산을 가진 종주들은 '누가 우리와 같으냐, 누가 우리와 맞서 싸울 수 있느냐' 하면서 종교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의 모양은 무섭고 놀라우며 그 소리 또한 매우 커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하며 움츠러든다. 그러나 여자의 씨의 남은 자손들은 그들의 모양이나 소리가 도리어 그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징조임을 안다.
5 카이 에도데 아우토 스토마 라룬 메갈라 카이 블라스페미아스? 카이 에도데 아우토 엑수 시아 포이에사이 메나스 테사라콘타 카이 뒤오˙
그 짐승에게 큰 소리와 모독하는 소리를 말하는 입이 주어졌고 또 그에게 마흔 두 달 동 안 행사할 권세가 주어졌다.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담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그 짐승은 마치 에클레시아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말하는 것처럼 큰소리와 모독하는 소리로 말하는 입을 가졌다. 또 그는 큰 소리와 모독하는 소리를 선악지식으로 미화하는 권세도 가졌다. 그 입과 그 권세는 붉은 용이 주었고 많은 무리가 그 입과 권세를 좇는다.
6 카이 에노익센 토-스토마-아우투 에이스 블라스페미아스 프로스 톤 데온, 블라스페메사 이 토 오노마 아우투, 카이 텐-스케넨- 아우투, 투스 엔 토 우라노 스케눈타스.
그는 그의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모독하면서 그의 그 이름과 그의 그 장막과 그 하 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였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짐승이 하나님을 향하여 모독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일을 알지 못하면 요한 계시록을 아무리 읽어도 소용이 없다. 짐승이 하나님을 향하여 공공연히 욕을 한다는 말인가.
가령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자. 그런데 그 고양이가 그 주인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인의 아들을 형님이라 부른다면 그 주인과 그의 아들은 고양이가 된 것이다. 이것은 고양이가 고양이임을 알지 못하고 행하는 주인 모독이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그 겉은 사람일지라도 그 속은 짐승이다. 짐승이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 부르며 찬양한다면 그것은 더할나위 없는 하나님 모독이 아니면 무엇인가. 이런 일들이 짐승의 무리에게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생각은 너희 생각이 아니며 너희 길은 내 길이 아니다"(사 55:8) 하셨다. 그럼에도 짐승은 하나님의 생각인 말씀을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제 길을 하나님의 길이라 한다. 짐승이 행하는 하나님 모독은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생각을 제 생각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은 말씀의 육신화이다. 말씀의 육신화란 말씀을 문자대로 읽으며 자기의 육적 소욕을 이루는 일이다. 말씀을 문대대로 읽는 자마다 하나님을 붉은 용이 되게 한다. 말씀이 육신의 종이 되는 일이 말씀의 육신화이다.
그러므로 기록된 바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후3:6) 하였다.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을 영과 생명 안에서 읽지 않고 문자대로 읽으면 그 문자는 읽는 자의 머리의 우상 곧 붉은 용이 되고 만다. 하나님을 붉은 용이 되게 하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모독이 없다.
짐승이 첫 사람의 길 곧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이루는 것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복과 선이라 말하며 그것을 여기 저기의 성경 구절이나 선악지식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육신의 말씀화다. 육신의 말씀화는 육신의 선악지식의 길을 미화하는 짐승의 교리를 낳는다. 오늘날 예수의 십자가는 육신의 말씀화를 이루는 알파와 오메가다. 이것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은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모노게네스의 진리는 말씀의 육신화도 아니요 육신의 말씀화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말씀이 겉 사람인 '나' 안에 떨어져서 속 사람인 '나'가 되어 둘이 온전한 하나를 이루는'나의 나 됨'이다. ‘육신화’ 와 ‘말씀화’는 하나님의 모독이다. 사람의 모든 말이 영과 생명 안에서 거듭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장막은 어떻게 짐승에게 모독을 당하고 있는가.
기록된 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천지의 주인이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한다"(행 17:24) 하였고, "너희의 그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하였다. 그러나 짐승은 짐승을 따르는 무리에게서 돈의 십일조를 받아 그 손으로 그들의 하나님인 붉은 용이 거할 집을 짓는다. 이 이상의 장막 모독이 없다. 하나님의 성전은 사람의 몸 이외에는 없다. 온 세상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을 넘치게 모독하고 있다.
7 카이 에도데 아우토 포이에사이 폴레몬 메타 톤 하기온, 카이 니케사이 아우투스˙ 카이 에도데 아우토 엑수시아 에피 파산 퓔렌 카이 라온 카이 글로산 카이 에드노스.
그에게는 거룩한 자들과 싸워서 이기는 전쟁이 주어졌고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나라 위에 군림하는 권세가 주어졌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짐승이 땅 위에서 가진 권세는 사람을 죽이는 폭력의 권세요, 거룩한 자들의 권세는 사람을 살리는 섬김의 권세다. 짐승이 땅에서 거룩한 자들을 이기는 것은 거룩한 자들이 짐승의 폭력에 대항하지 않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이다. 거룩한 자들이 짐승의 폭력에 대항하지 않고 죽기까지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은 그들이 받은 권세가 죽었다가 부활하는 권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땅(육)에서 지는(죽는) 일이 하늘(마음)에서 이기는 일이다.
8 카이 프로스퀴네수신 아우톤 판테스 호이 카토이쿤테스 에피 테스 게스 후 우 게그라프 타 이 토 오노마 아우토 엔 토 비블리오 테스 조에스 투 아르니우 투 에스파그메누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이 땅 위에 뿌리내리고 사는 모든 사람들 곧 세상의 기초가 놓여진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그 생명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자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할 것이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거룩한 자들은 이 땅 위에 뿌리내리고 사는 자들(호이 카토이쿤테스)이 아니라 하늘에 거하는 자들(호이 스케눈테스 엔 토 우라노)로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산다. 그러므로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짐승에게 경배하지 아니한다.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세상의 기초가 놓여진 이후로)
근원 안에 하나님이 그 하늘들과 그 땅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땅(땅의 기초)으로부터 엿새 동안 새롭게 하늘들과 땅을 지으시고 엿새째 날 사람을 그의 형상 안에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형상 안에서 창조하신 사람을 그가 창조하신 하늘들과 땅에 거하게 하시면서 그의 영의 모양을 본받게 하셨다. 그러므로 첫 창조의 오메가에서 새롭게 지어진 그 하늘들과 그 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의 모양을 닮아 가는 징조가 되었다.
'카타볼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창조를 위한 말씀의 씨를 뿌리는 일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말씀은 창세기의 그 하늘들과 그 땅의 창조 이후란 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근원이시다. 그 창조의 근원 안에서 에클레시아는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모양으로 새롭게 지어진다. 그의 마음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가 하나님의 모양을 이룬다. 하나님의 모양은 에클레시아가 육에서 죽고 영으로 부활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을 이루는 일이다. 즉 ‘아포 카타블레스 코스무’는 어린양이 사람을 새롭게 짓기 위하여 모노게네스의 씨알을 뿌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을 이룬 그 사람의 심비가 생명책이다. 그 마음을 짐승에게 빼앗긴 자들 곧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자들은 어린양의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 이름들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사람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한다.
9 에이 티스 에케이 우스, 아쿠사토.
누구든지 귀 가진 사람은 들으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듣는 데에도 알파와 오메가가 있다. 계시의 말씀이 들려올 때 듣고자 하는 귀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처음부터 듣지 아니한다. 어느 누구도 듣지 아니한 것을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듣고자 하는 귀가 먼저다. 누구든지 듣고자 하는 귀로 계시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무엇인지 그에게 들려진다. 오늘날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짐승의 교리에 갇혀서 계시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도 아니하며 도리어 그들의 선악지식으로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장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고 있다. 이런 일은 땅에 뿌리를 내리는 자에게 일어난다. 누구든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서 그 땅에 뿌리내리게 되면(카토이케오) 그 속 사람은 짐승이 되고 만다. 짐승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모독이니 그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더욱 큰 모독이 될 뿐이다.
10 에이 티스 에이스 아이크말로신 에이스 아이크말로신 휘파게이˙ 에이 티스 엔 마카이레 아포크탄데나이, 아우톤 엔 마카이레 아포크탄데나이? 호데 에스틴 헤 휘포모네 카이 헤 피스티스 톤 하기온.
잡혀갈 사람은 잡혀갈 것이요 칼에 죽임을 당할 사람은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 거 룩한 자들의 그 인내와 그 믿음은 여기에 있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 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 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에 있느니라)
부활의 실존으로 사는 거룩한 에클레시아는 짐승이 땅에서 일으키는 육신의 전쟁에서 지게 되어 있는 것이 그들의 권세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편에서 죽고 오른편에서 부활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로잡혀 가거나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다. 짐승이 거룩한 자들을 사로잡거나 칼로 죽이는 것은 그들의 부활의 믿음을 빼앗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죽은 후에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자는 어린양이 사로잡힌 것과 같이 사로잡히며 그가 죽임을 당한 것 같이 죽임을 당하며 그가 부활한 것 같이 부활하는 인내와 믿음으로 짐승을 이긴다.
11 카이 에이돈 알로 데리온 아나바이논 에크 테스 게스, 카이 에이켄 케라타 뒤오 호모이 아 아르니오, 카이 엘라레이 호스 드라콘.
또 나는 그 땅에서 다른 한 짐승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어린양처럼 두 뿔들을 가졌고 용처럼 말했다.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 라)
붉은 용은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고, 첫번째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왔고, 두번째 짐승은 땅에서 올라왔다. 붉은 용은 머리의 우상, 첫번째 짐승은 배의 우상, 두번째 짐승은 가슴의 우상이 되어 땅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어린양처럼 두 뿔들을 가진 짐승은 한 뿔은 용을 위하여, 또 한 뿔은 짐승을 위하여 가지고 있다. 두 뿔들은 거룩한 에클레시아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항하려 함이다. 두번째 짐승은 용의 말을 대변하는 거짓 예언자이다.
12 카이 텐 엑수시안 투 프로투 데리우 파산 포이에이 에노피온 아우투˙ 카이 포이에이 텐 겐 카이 투스 엔 아우테 카토이쿤타스 히나 프로스퀴네수신 토 데리온 토 프로톤, 후 에데라퓨데 헤 플레게 투-다나투- 아우투˙
그는 그 첫째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며 그 땅과 거기에 뿌리내리고 있는 자들로 그의 치명적 상처에서 회복된 그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였다.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를 증거한다. 그러나 두번째 짐승은 이 일에 대항하여 용처럼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대신 첫번째 짐승의 치명적 상처가 나은 기적(기사)을 증거한다. 그리하여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는 첫 사람의 마음(땅)과 거기에 뿌리내리고 있는 자들로 그 짐승에게 경배하게 한다.
13 카이 포이에이 세메이아 메갈라, 히나 카이 퓌르 포이에 에크 투 우라누 카타바이네인 에이스 텐 겐 에노피온 톤 안드로폰.
그는 큰 징조들을 행하는데 그 사람들 앞에서 그 하늘로부터 그 땅으로 불이 내려오게까 지 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두번째 짐승이 큰 징조들을 행하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는 것은 그가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의 예언자로 보이게 하려 함이다. 그리하여 이 짐승은 엘리야를 흉내내고 있다. 오늘날 용(욕심)의 불은 사람이 그의 지혜로 만든 각종 무기 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때때로 그 위력을 드러내곤 한다.
14 카이 플라나 투스 카토이쿤타스 에피 테스, 디아 타 세메이아 하 에도데 아우토 포 이에사이 에노피온 투 데리우, 레곤 토이스 카토이쿠신 에피 테스 게스, 포이에사이 에 이코나 토 데리오 호스 에케이 텐 플레겐 테스 마카이레스 카이 에제센.
그리고 그 짐승 앞에서 행하도록 주어진 그 징조들을 통하여 그 땅 위에 뿌리내리고 있 는 자들을 미혹했다. 그는 그 땅에 뿌리내리고 있는 자들에게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였다.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 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두번째 짐승은 어린양이 하나님의 나라의 징조들을 보이신 그 일을 흉내내어 땅에 뿌리내리고 있는 자들을 미혹하고, 또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첫번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게 한다. 그는 말씀의 칼에 상함을 입고 죽게 되었으나 다시 선악지식으로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을 만들게 한다.
15 카이 에도데 아우토 두나이 프뉴마 테 에이코니 투 데리우, 히나 카이 랄레세 헤 에이콘 투 데리우, 카이 포이에세, 히나 호소이 에안 메 프로스퀴네소신 테 에이코니 투 데리우 아포크탄도신,
그에게 또 권세가 주어졌는데 그 짐승의 우상에게 영을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또 그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죽이게 하였다.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거짓 예언자에게 주어진 권세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는 그 짐승의 우상에게 영을 주어 말하게까지 하였다. 이것이 성령의 일을 모독하는 일이다. 사람이 선악지식을 좇는 것은 우상의 영이 말하기 때문이다.
에클레시아는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부활의 권세자요, 거룩한 영을 받아 육체의 휘장을 찢고 창조의 근원 안으로 들어가는 초월의 실존이다. 거짓 예언자가 아무리 짐승의 우상에게 영을 주어 선악지식을 말하게 할지라도 에클레시아는 그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은 자신의 칼로 사람을 죽이고, 거짓 예언자는 큰 말과 큰 징조로서 사람을 죽이고, 말하는 우상은 거짓 영으로 사람을 죽인다. 이 셋은 사람의 영과 마음과 육체를 함께 망하게 한다.
16 카이 포이에이 판타스, 투스 미크루스 카이 투스 메갈루스, 카이 투스 플루시우스 카이 투스 프토쿠스, 카이 투스 엘류데루스 카이 투스 둘루스, 히나 도신 아우토이스 카라그 마 에피 테스 케이로스 아우톤 테스 덱시아스, 에 에피 토 메토톤 아우톤,
그는 작은 자들이나 큰 자들이나 부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이나 자유자들이나 종들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 오른 손에나 그 이마에 표를 받게 하였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 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카라그마'(표)
'카라그마'의 원래 의미는 뱀에게 물린 자국이다. 붉은 용은 옛 뱀이다. 그 옛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 뱀의 독으로 죽는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는 사망을 받는 자의 정체성이다. 거짓 예언자는 어린양의 인침의 일을 모방하여 모든 사람에게 그 오른 손이나 그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 이마는 머리다. 짐승의 표를 그 이마에 받은 자는 짐승의 두뇌 집단이 되고 그 오른 손에 짐승의 표를 받는 자는 짐승의 수족 집단이 된다. 짐승은 그의 표를 받은 자들은 오른 편에 그의 표를 받지 않는 자들은 왼편에 둔다. 이것 또한 어린양이 염소와 양을 가르는 그 일을 흉내 낸 것이다. 짐승의 두뇌 집단과 수족 집단은 작은 자들이나 큰 자들이나, 부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이나, 자유자들이나 종들이나를 불문하고 그들의 왼편에 있는 자들을 박해하며 죽인다.
17 카이 히나 메-티스 듀네타이 아고라사이 에 폴레사이, 에이 메 호 에콘 토 카라그마 토 오노마 투 데리우, 에 톤 아리스몬 투 오노마토스 아우투.
그리고 누구든지 그 표를 가진 자 외에는 사거나 팔거나 하지 못하게 했다. 그 표는 그 짐승의 이름이나 또는 그 이름의 숫자이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이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붉은 용과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행하는 첫번째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래로 바꾸는 일이다. 그리하여 예나 오늘이나 종교 비지니스가 번창하고 있다. 어린양은 그의 피로 사람들을 사서 값없이 그들을 하나님께 왕과 제사장을 삼으셨다. 그러나 짐승은 사람들을 장사꾼으로 바꾸었다. 그들이 입으로는 예수를 구세주라, 만왕의 왕이라, 만주의 주라 부르지만 실상 예수는 그들의 땅의 욕망을 채워 주는 용에 다름 아니다. 짐승은 '예수 시장'을 크게 열어 놓고 그의 표를 가진 사람들이 예수의 구원과 능력과 권세를 사고 팔게 한다.
그 시장에서 사람들은 큰 자가 되고, 높은 자가 되고,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려고 밤낮없이 일한다. 그들의 기도와 찬송과 설교와 간증과 헌금과 봉사와 각종 행사는 예수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한 댓가이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이 일이 자신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바로 그 짐승의 일임을 알지 못한다.
18 호데 헤 소피아 에스틴. 호 에콘 눈, 프세피사토 톤 아리드몬 투 데리우˙ 아리드모스- 가르 안드로푸 에스틴, 카이 호-아리드모스-아우투 헥사코시오이 헥사콘타 헥스.
여기에 지혜가 있다. 깨닫는 마음을 가진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 수는 사람 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 백 육십 육이니라)
'누스'(마음)
'누스'는 욕심의 겉 마음(카르디아) 너머에 있는 사랑의 속 마음이다. 어린양의 신부는 사랑에서 흘러 나오는 영적 지혜로 산다. 그러나 짐승은 겉 마음에서 나오는 선악지식으로 산다. 666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함인가.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그의 지혜나 이해력이나 통찰력이나 명민함을 동원하여 666을 계산해서 어느 한 사람을 666이라 지적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666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람들이 그 수에 해당하는 이름을 계산해 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런 일을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영의 눈으로 '호라오'하는 말씀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6은 육신의 첫 사람을 징조하고 7은 영의 둘째 사람을 징조한다.
성경에 666의 숫자가 관련된 한 사람은 지혜자 솔로몬이다. 기록된 바 "솔로몬의 세 임금의 중수가 육백 육십 육 금 달란트다"(왕상 10: 14) 하였다. 솔로몬의 세입금의 중수는 그가 누렸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징조한다. 성경은 분명히 그가 자기의 지혜를 좇아서 하나님의 사람에서 짐승으로 변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 사랑을 버리고 일곱 머리 열 뿔의 짐승의 원형이 되었다. 그가 너무나 유명한 유다의 왕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이 그의 실상을 가리웠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사랑하시어 이스라엘 나라(6)와 권세(6)와 영광(6)을 주셨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666)을 제 것으로 움켜쥐었다. 나라(6)도 권세(6)도 영광(6)도 내 것(666)이라는 것이 솔로몬이 가진 선(善)이다. 아담 아래로 모든 인생이 이 선을 좇고 있다. 666은 모든 인생들이 큰 자가 되고, 높은 자가 되고,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기 위하여 좇는 육신의 정욕(6), 안목의 정욕(6), 이생의 자랑(6)이다.
그 셋을 선악지식을 좇아서 하나로 모은 것이 666이다. 육신의 첫 사람이 짐승을 좇아가게 되면 그의 이마나 오른손에 666의 표를 받는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솔로몬의 계산법은 육과 생존을 좇는 이에게는 지혜로운 것이지만 영과 생명을 좇는 이에게는 그 이상 어리석은 것이 없다. 인간의 지혜로는 솔로몬과 같은 자가 없었으나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버리고 자기의 지혜를 움켜쥐었다. 그는 그의 지혜로 땅에서 얻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취하려기에 아버지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버렸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로운 사람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의 총명을 헛되게 하리라"(고전 1:19) 함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세상 지혜자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의 총명을 헛되게 한다. 이는 십자가의 도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게 하려 함이다.
666을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다.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 신상의 높이가 육십 규빗, 넓이가 육 규빗이었다. 이는 느부갓네살 자신은 육백 규빗의 거인임을 징조한다. 느부갓네살이야말로 나라(6)와 권세(6)와 영광(6)을 움켜쥔 큰 자다. 우리가 영의 눈으로 '호라오'할 때 솔로몬이 느부갓네살이요, 느부갓네살이 솔로몬이다. 느부갓네살의 뜻은 '느보(지식의 신)는 나의 경계석을 지켜주셨다'이다. 모든 사람이 섬기는 느보(용)는 그 사람들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땅에 속한 선악지식으로 지켜주고 있다. 오늘날 666을 좇는 이들이 144,000에 속한 임금들이 되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계시록에 씌여 있는 숫자를 영의 눈으로 '호라오'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그 숫자를 움켜쥐고 멸망을 자취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