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오해와 남용
신애는 아들이 죽었다는 말에도, 경찰서에서 범인을 만났을 때도 쓰러지지 않았다.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보낼 때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범인이 용서받아 평안을 얻었다는 말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신애에게 가장 큰 충격은 피해 당사자인 자신을 소외시키고 하나님과 가해자사이에 용서가 끝났다는 데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았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끝난 것인가? 그러면 신애는 무엇인가?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광주를 떠올렸다고 했다. 1980년 광주에서 어린 아들과 딸을 잃고, 남편과 아내를 잃고 세살박이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잃었던 그 참혹하고 천인공노할 만행에 희생된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 중에 있는데 가해자들은 떵떵거리며 국가로부터 용서받았다고 말한다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일본은 잘못을 시인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잔인무도하게 아시아의 수 많은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강점기를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는데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을 용서했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누가 누구를 용서했단 말인가? 이게 말이 되는가? 이렇게 용서라는 말이 남용되고 있다.
죄를 용서하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다면 신애는 왜 저렇게 쓰러졌는가? 죄에 대한 용서가 마음먹기 달렸다면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서서 십자가를 져야 했던가? 만약 당신이 신애의 입장이라면 “할렐루야! 하나님이 용서하셨으니 나도 기쁩니다.” 하시겠는가? 피해자인 신애를 쏙 빼고 가해자가 하나님을 만나 용서받고 평안을 얻었다고 한다면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신애에게는 하나님이다. 물론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정말 개입하셨는지 아니면 가해자 혼자 그렇게 믿는 것인지는 또다른 논쟁거리이다. 사실 신애 자신이 용서라는 거룩한 행위의 주인공임 에도 이 일에서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켜 버렸다. 이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버렸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미리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기쁨으로 환영할 일이지 분노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앞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네 자신이 정말 그를 용서하고 싶은가?”를 물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위선의 신앙에 자기도 속은 것이다.
사실 신애는 지금 하나님께 화를 낼 일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의 인생을 상처투성이로 만든 가해자에게 분노해야 하지 않겠는가? 신애는 한 번도 가해자를 향해 자신의 분노를 드러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참았던 분노를 하나님을 향하여 무제한적으로 폭발시킨다. 자신에게 가장 큰 사랑을 베풀었고 자신이 가장 견디기 힘들 때 지탱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교회를 공격한다. 이 것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하나님께 용서받아 평안합니다” 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배신이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이 대체로 이렇다. 어찌 말로 다 설명 할 수 있으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애, 그는 천사도 아니고 신앙의 영웅도 아니며 연약한 죄인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스스로 감추고, 하나님도 가려버린 채, 허상을 두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치 시나이산 아래서 지도자 모세가 없는 사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춤추고 좋아하며 하나님의 은혜라고 노래했던 이스라엘처럼…
회개의 오해와 진실
우리는 용서를 말하기 이 전에 회개를 말해야 한다. 그것이 성서적이다. 용서는 회개하는 이에게 주는 선물이다. 성서를 읽어보라 이 두 단어, 용서와 회개가 다른 곳에서 말한 적이 있던가? 이 두 단어는 항상 같이 있다.
우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고 한 말,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로 평안해졌다는 말이 성서적인가? 맞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에게 용서의 은혜가 있다. 이 것이 성서의 일관된 진리다. 그러면 신애는? 여기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그리고 교리에 대한 중대한 오해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피상적 이해이다.
성경의 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를 파괴하는 죄다. 우리는 이를 원죄라 말한다. 인간의 본성 안에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될 수 밖에 없는 원인들이 있다. 또 하나는 이웃과의 관계성에서 파국을 몰고 오는 죄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이웃과의 관계회복을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것이 구약 율법의 핵심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핵심이다.
따라서 회개를 말할 때 하나님과 관계 회복과 사람과 관계회복을 말한다. 영화에서 가해자가 신애에게 한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회개를 했을 지 모르지만 신애와의 관계회복을 위한 회개를 시도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 회개한 것으로 신애에게 할 회개를 대신한 것처럼 말한다. 이러한 신앙은 이기적(Selfish) 기독교인을 만든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면 사람과 관계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만 좋으면 이 세상과 이웃에 대한 관계와 책임에는 무관심해도 된다는 태도로 사는 기독교인이 실제로 많지 않은가?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언제나 하나이다. 이 것이 성서의 핵심이다. 그러니 범인이 하나님을 믿고 그의 자비와 은총을 입었다면 반드시 신애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여야 했다. 그러나 가해자는 신애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만 할 뿐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할 말인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한 말이라면 몰라도.
회개에는 3단계가 있다. 뉘우치고, 고백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 것이 성서적이다. 혼자서 뉘우치고 후회하는 데서 멈추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뉘우치고 후회하며 눈물 흘린 것을 회개의 전부인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얼마나많은가? 뉘우친 후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는 했으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변화된 행동으로 나아가는데 실패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야 값 없이 받았다고 하지만 피해 당사자인 신애와의 관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신실한 회개와 용서 그리고 화해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 롤랑 조페가 만들어 1986년에 상영되었던 영화 ‘미션(The Mission)’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로버트 드니로’ 연기했던 ‘로드리고 멘도자’라는 인물은 브라질과 우루과이 국경 지역의 원주민 ‘과라니족’을 잡아 노예로 팔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동생과의 결투로 동생을 죽이게 된다. 그 죄책감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아무 쓸모 없는 존재라고 자학하고 있던 ‘로드리고’를 ‘과라니 족’ 신앙공동체를 건설한 ‘가브리엘’신부가 새로운 삶의 길을 설득해 ‘과라니족’이 살고 있는 정글 로 데려간다. ‘로드리고’는 자신이 쓰던 갑옷과 칼 등의 무기들을 묶어 끌며 자신의 죄에 대한 참회로 험악한 정글을 통과하는 고행의 길을 간다.
다른 신부들이 이제는 그정도면 되었으니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 했고 심지어 한 신부가 지켜 볼 수 없어 줄을 끊어 짐을 벼랑 아래로 던져버리기도 했지만 ‘로드 리고’는 고집스럽게 그 짐을 다시 몸에 달고 사투를 벌이며 신부들의 뒤를 따라 자신이 피해를 입혔던 ‘과라니족’의 공동체로 향한다.
마중을 나온 ‘과라니’족과 ‘로드리고’가 만나는 장면은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돌지만 피해자였던 ‘과라니족’은 온 몸 흙투성이가 되어 무거운 짐을 끌고 기어오는 가해자 ‘로드리고’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로드리고’의 노예사냥 때 간신히 도망쳤던 한 아이가 칼을 들고 달려가 ‘로드리고’ 몸에 묶여있던 짐의 끈을 끊어 짐을 벼랑 아래로 던져버린다. 그 순간 ‘로드리고’는 용서받은 것에 감동하여 통곡을 하고 ‘과라니족’은 어린아이처럼 우는 ‘로드리고’를 바라보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한참 동안 웃는다. 이리하여 원수관계였던 ‘로드리고’와 ‘과라니족’은 화해를 하게 된다. 이후 ‘로드리고’는 신부가 되고 과라니족을 섬기며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나에게는 지금도 이 영화의 아름다운 주제음악 못지않게 이 장면이 감동으로 남아있다. 회개와 용서, 그리고 화해가 아름다운 감동으로 남아있는 장면이다.
심용섭/엘파소한인신문 2008년 12월호
http://www.elpasokorean.com/newspaper/Dec2008/Dec08-11.pdf
http://blog.daum.net/truechristian/7710607
첫댓글 다시 이 영화를 보고 싶어집니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샘물은 있지요. 영화 한 편으로 자기 세계의 깊이 속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면 행복이지요.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