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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일본 에서 G7 선진국 정상회의가 있었을 때
아베가 자랑한 이세신궁(일본 왕실 사당)은 일본 신을 모신 곳이 아니고
원래는 조선신 단군을 모시던 곳 이었다.
일본 미에현(三重縣)에 있는 왕실 최고의 사당 이른바 국가 신도의 성전이라는 이세신궁을 세웠을 때 본래 이곳에 모신 신은 단군왕검을 신봉하던 조선신(朝鮮神)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그 터전이‘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주신으로 삼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와 같이 역사를 뒤집은 것이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역사를 조작한‘황국신도(皇國神道) 2천6백년 만세일계의 천황’이라고 하는 역사 날조 당시의 처사였다. 그들은 일본 이세신궁의 단군 신앙을 말살하면서 천조대신을 신주라고 위작(僞作)했다. 대다수 일본인들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으나 그것은 너무도 큰 반역사(反歷史)의 죄악이다.
19세기 말엽, 도쿄대학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 교수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주신은 본래 부여의 영고신(迎鼓神), 고구려 동명신(東明神), 예(濊)의 무천신(舞天神) 등등 조선신(朝鮮神)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숨기고 천조대신을 주신으로 삼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神道は祭天の古俗]1891).
이 논문에 당황한 일본 군국주의자들(倉持治休 등)은 구메 구니다케 교수댁을 기습하여 일본도를 교수의 목에 들이대고 논문을 취소하라고 협박했다. 교수는 끝내 그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옳은 것은 옳다고 주장했다([東京日日新聞] 1882.3.4일자).
살벌하기 그지없던 19세기 말엽 군국주의 치하에서도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은 본래 단군(檀君)을 받드는 조선 민족의 모든 신들을 주신으로 제사모셔 온 사당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는 학문의 자유와 양심에 입각한 이성적인 냉철한 연구론을 발표했으나 극단적인 극우 반한 세력들의 가택 습격까지 받았다.
“일제 군국주의자들은 강압적으로 구메 구니다케 교수를 도쿄대학의 현직 교수직에서 추방하고야 말았다. 그 뿐 아니라 논문을 게재한 학술지 <사학회잡지>와 <사해>는 판매금지 처분했다. 당국의 압박 뿐 아니라 황국 신도가며 극우 역사가는 박사를 불경이라 매도하며 황실(皇室)의 이름을 빌어 사회적 압박을 가했다.”(向坂逸郞[嵐のなかの百年‥學問彈壓小史]1962). 이렇듯 극단적인 황국 신도가들은 조선 단군 역사 말살책에 광분했다.
근년에 와서도 황국사관은 한일관계사를 부당하게 왜곡하고 있어서 양식 있는 역사 학자들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가토 아키라(加藤 章) 교수는 “생각하자면 전후사(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 속에서 역사교육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은 ‘황국사관’으로부터 껍질을 벗는데서 시작되었다. 과거의 국사교육(일제시대의 잘못된 신도주의 황국사관 교육, 필자주)에 대한 틀 바꿈이 시행되었으며 그 후에 학습 지도요령이 거듭하여 개정되었다. 그러나 역사교육의 목표나 내용에 있어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 특히 이웃나라이면서 과거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본 측으로서는 자각적으로 충분한 검토를 하는 일이 시행되어 오지 못했다. 그 때문에 철저하게 행해진 일본 제국주의 비판 하에서 자라난 세대와 일본의 전후세대 사이에는 한국에 대한 역사교육에 있어서 커다란 간격이 벌어지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日韓歷史敎育交流のなかで>, 1993).
<일본서기> 기사에서 천일창 왕자가 신라로부터 일본에 건너갔다는 것은 신라 왕실과 신라계 스진왕가의 밀접한 혈연관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지금도 일본 각지에는 천일창왕자의 신주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들이 곳곳에 많아 그 당시 천일창의 존재가 왕에 필적하는 신분이었음을 살피게 한다”(谷川健一 [靑銅の神の足跡] 集英社, 1979). 그렇다면 과연 그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연오랑인가라는 추찰도 동시에 앞으로의 연구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곰 신단의 ‘곰신’(熊神)은 단군이 제사 모시던 모신(母神)인가 곰족(熊族) 조상신인가
천일창 왕자에 의하여 일본에 천신 제사 의식이 등장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곰신단(熊の神籬)을 가리켜 18세기의 저명한 고증학자 도데이칸(藤貞幹, 1732~97)은 그의 역사 고증 저서인 [쇼코하쓰]([衝口發],충구발)에서 다음과 같이 신라의 신앙 체계라고 단정했다. “곰신단(熊の神籬)의 신리(神籬, 히모로기)는 후세의 신사(神社, 사당)이니라. 무릇 신리는 그 분의 몸으로 삼아 제사 드리는 분을 모시는 물건이로다. 신리를 ‘히모로기’(比毛呂岐)라고 새겨서 읽는 것은 본래 신라말(新羅語)이며, 신라어를 그 당시 일본에서 빌려서 쓰게 된 것이로다. 천일창이 가지고 온 곰신리도 천일창이 조상을 신주로 모신 것임을 알아둘 것이다.”
이와 같이 도데이칸은 곰신 신앙은 곧 한국 고대의 단군 신앙(檀君信仰)인 동시에 천손(天孫) 민족인 한국 민족의 조상 단군을 섬기는 신앙의 발자취를 천일창의 곰신단을 통해서 지적하고 있다. 더구나 주목되는 것은 신라의 ‘이두(吏讀)’가 일본 고대에 일본어 표기법으로 처음 등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은 이두에 의하여 일본말의 한자 표기법인 ‘만엽가나(萬葉假名)’가 일본에 생겼다는 것은 일제하 서울의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과 오구라 신페이(小倉新平) 교수가 밝힌바 있다([吏讀の硏究], 1925).
해마다 11월 23일 저녁이면 곰신단에 의해 일본 고대왕실 신상제(新嘗祭) 제사에 조선신 신주들 세분을 제사 모셔오고 있는 것이 오늘날까지 일본 왕실의 왕실법도(<延喜式 연희식> 전50권, 927)에도 밝혀져 있다. 즉 ‘한신韓神’이라는 제목의 축문에는 원신(園神, 신라신) 한분과 한신(韓神, 백제신) 두 분의 신주를 제사모시며 현재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 겨레가 동이(東夷)며 고조선과 부여(扶餘, 만주 벌판)시대에 천신(天神)에게 추수를 감사하고 제사 지낸 영고(迎鼓)며, 고구려 때의 동맹(東盟.東明)이나 예의 무천(舞天) 마한의 10월제 등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 거행했던 제사축제였다. 농본(農本)시대에 가장 고맙고 또한 두려운 존재는 하늘의 조상인 천신이었기에 결코 잊지 않고 외경하며 숭앙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농경시대는 햇빛과 비를 잘 내려주시는 ‘풍백, 운사, 우사’등 우리의 하늘신을 우러렀고, 쇠붙이를 달구어 삽이며 괭이 따위 농기구며, 또한 전쟁 도구로서 칼이며 창을 만드느라 대장간을 세웠다.
“천일창은 대장간이며 철기(鐵器)문화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 왔다”(谷川健一 [靑銅の神の足跡])고 했거니와 곰신단을 모시고 아울러 전쟁 도구인 칼을 가지고 왜나라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강력한 무력이었으며 현재까지도 천황가의 신보인 옥과 거울도 가지고 건너감으로써 왕도(王道)를 형성하는 삼박자를 빈틈없이 갖추었던 것이다. 그가 신라인 스진왕조의 제2대 왕인 스이닌천황에게 찾아 갔다는 것은 스이닌천황을 신라 왕족으로서 승인하고 일본 열도의 신라인 정복 왕조를 공고하게 떠받쳐 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고대 한국인들이 하늘의 신 환인(桓因) 등 천신(天神)의 후손인 천손족 (天孫族)이라는 것은 중국 고대 역사인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등으로도 밝혀진 바 있다. 그 점은 일본 <고사기>의 신대(神代) 기사 등과 함께 일본 고대 사학자들의 공론이기도 하다. 왜나라 최초의 정복왕인 스진천황의 숭신(崇神)이라는 휘(왕의 이름)에도 ‘신을 숭배한다.’는 천신신앙사상(天神信仰思想)이 구체적으로 내포되어 있음을 본다.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우(水野 祐) 교수는 천일창왕자가 스진왕조 때 칼이며 옥과 거울 등 신보(神寶)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 간 데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칼은 옛날부터 일찍이 금속기(金屬器)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옛날 귀화인계의 대장간 기술민 집단, 이를테면 천일창 전설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신라계 귀화인들의 신보(神寶)였다고 생각한다. 옥과 거울과 칼이라는 신보(神寶)를 천황이 갖추어서 갖는데서 비로소 주권의 표상으로서 ‘삼종의 신기’(三種の神器)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고 단정했다.(水野 祐[天皇家の秘密] 山手書房, 1977)
홍윤기 교수글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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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메 구니다케교수의 1891년 논문중 일부)
http://www.asahi-net.or.jp/~xx8f-ishr/kume.htm
神道は祭天の古俗
新嘗祭神嘗祭大嘗祭
日本の上古は。彼禹貢の冀州に島夷皮服と。楊州に島夷卉服と見ゆ。冀州の島夷は。韓人の皮を以て交通したるにて。楊州の島夷は。倭人の麻穀の木棉を以て交通したるなり。此く四千年前より。三土互に交通したれば。風俗も交互に輸入したらん。然れども倭韓は尚神祇を分つことはなく。純に天を祭れり。又一千年を經て。周初に至り。黒龍江の山野に於て。最獷獰文盲と稱したる粛愼さへも。石?(奴/石)?(木+苦)矢を以て交通したる程なれば。倭韓の發達は。彼少昊氏衰世の如きを經過する時代ならん。天皇繼統の世數を人世の通率にて推算すれば。天祖の降跡は二千四五百年前と思はる。周の中葉なり。此時巳に天兒屋命(神産靈の裔)太玉命(高産靈の裔)の二氏。中臣部・忌部を分掌し。中臣は太占・祓除の法を傳へて神に事へ。忌部は齋物を調へて民を率うるは。彼重黎の天地を分掌したるに甚相似たり。其祭天の大典は新嘗祭なり。新嘗祭は天照大神を祭るに非す、天を祭る古典なり其は神代巻に。〔素戔鳴尊見天照大神新嘗時。則陰放屎於新宮。又見天照大神方織神衣居齋服殿。則剥天斑駒。穿殿甍而投納云云〕と見ゆ。是大神窟戸籠りの原因にて、天照大神の親ら新嘗祭神衣祭を行はせられたるにて明證となすべし。又觸穢不淨を忌むの風俗も。みな此時代以前より早くあることなり。且新嘗祭は支那にもあり。爾雅釋天に。〔春祭曰祠。夏祭曰?(示+勺)。秋祭曰嘗。冬祭曰蒸〕(王制も畧同し、周禮は異なり、取らす、)董仲舒は〔祠者以正月始食韮也。?(示+勺)者以四月食麥也。嘗者以七月嘗黍稷也。蒸者以十月進初稻也〕と説き。郭璞は嘗を嘗新穀也と。蒸を進品物也と注す。然れば嘗蒸は同死く新穀を進むる祭にて。我神嘗新嘗兩祭に似たり。我九月に神嘗。十一月に新嘗と分つは。何代比より例なるや。紀の天武五年九月に。〔神官奏曰。爲新嘗卜國郡〕と。十月に〔發幣帛於相新嘗諸神祇〕とあるは。神嘗例幣のことにて。〔十一月乙丑。以新嘗事不告朔〕とある。是を史に見えたる始めとす。
新嘗祭は東洋の古俗にて。韓土も皆然り。後漢書(魏志も同し)に。高勾驪は〔以十月祭天。國中大會。名曰東盟。〕とあり。東盟は東明にて。豐明節會のことならん。?(シ+歳)は〔常用十月祭天。飲酒歌舞。名之爲舞王〕とあり。馬韓は〔常以五月田竟(魏志は下種訖に作る)祭鬼神。晝夜群聚歌舞。輙數十人相随。踏地爲節。十月農功畢亦如之〕とあれば。夏冬兩度の大祭をなし。皆節會を行ふなり。夫餘ハ〔以臘月祭天。大會連日。飲食歌舞名曰迎鼓〕とありて。此國のみ十二月なれど。其趣は同し。我國の嘗祭も。固り兩度行はるゝには非す。式に九月の神嘗ハ伊勢神宮の條に記し。十月の新嘗ハ四時祭の條に記す。神祇令の義解に。〔神嘗祭。謂神衣祭日便即祭之〕とありて。伊勢神宮に於て擧行せらる。天皇ハ神祇官に行幸ありて。奉幣使を發せらるゝまでなり。(前の天武紀の文を見よ)江家次第に。〔天皇宣常毛奉留長月乃神嘗乃御幣會。汝中臣能申天奉禮。中臣微音稱唯退〕とあり。是を例幣と稱す。十一月の新嘗こそ。令に下卯大嘗祭とありて。天皇神祇官(正式は中和院)に於て親祭ある。職員令義解に〔謂嘗新穀以祭神祇也。朝者諸神之相嘗祭。夕者供新穀於至尊也〕とあり。祭畢て。豐明節會を行はる。格の宇多天皇の詔に。(寛平五年三月)〔二月祈年。六月十二月月次。十一月新嘗等。國家之大事也。欲歳災不起。時令順度。預此祭神。京畿九國大小通計五百五十八社〕とあるにて。其大要を知るべし。古は新嘗祭を大嘗ともいひたれど。令に〔凡天皇即位。惣祭天神地祇。〕又〔凡大嘗者。毎世一年。國司行事〕とある。天子一代一度の大祭に混同するを以て。毎年の嘗を新嘗といふことになりぬ。大嘗會は神祇官に悠紀主基兩神殿を新造せられ。天子天之羽衣をめして親祭ある。其は二條良基公假名文の文和大嘗會記あり。就て其概略を見るへし。今上は明治四年十一月に擧行せられたり。是は世に記臆したる人も多かるべし。余は岩倉全権大使に随ひ米國へ航する船中に在りしに。其日米國公使「デロンク」氏。天皇陛下一代一度の大祭日とて。祝辭を演し。祝杯を擧たり。此の如く新嘗大嘗祭は大神宮も親察し給へる古典にて。皇統と共に繼續し。神道に於て最重の祭なれハ。臣民は皆知らざるべからず。
太神宮も天を祭る
伊勢太神宮には。三神器の鏡劔を(後に劍は尾張熱田太神宮)齋奉ること。普く世の知所なるべし。此鏡は。古事記に。太神宮の詔を記して。專爲我御鏡而如拜吾前伊都岐奉〕とあれば。俗に太神を祠ると思ふも無理ならねど。是も實は天を祭るなり。我御魂の字に注意すべし。此に適例あり。大三輪社は。書紀一書に〔大己貴神曰唯然。廼知汝是吾之幸魂奇魂、今欲何處住耶。對曰。吾欲住於日本國之三諸山。故即營宮彼處。使就而居。大三輪神之神也〕と見えて。大己貴神の自ら幸魂奇魂を祠たる所なり。魂とは天の靈顯をいふ。さなくては己が己の魂を崇拜するの理あらんや。大神の我御魂と詔給へるも正にこれに同し。又垂仁紀に〔故随大神教。立其祠於伊勢國。因興齋宮於五十鈴川上。是謂磯宮。乃天照大神始自天降之處也〕とあるを熟看すべし。始自天降之處とは。天孫瓊々杵尊西降の時。猿田彦大神の〔吾則應到伊勢之狹長田五十鈴川〕(紀一書)といひたるに考合すれば。其時天照大神は。高天原(大倭)より伊勢に遷都ありて。東國を經營し給へると思はる。磯宮は其宮址なれは。大神の在す時も必す新嘗殿齋服殿を造りて天を祭り。其大殿にて政事を裁せらるゝこと。崇神以前の式の如くにてあるべし。外宮は其離宮なり。古事記傳に。外宮は師の祝詞考に。萬葉集なる登都美夜の例を引て。其は常の大宮の外に建置れて行幸ある宮を云なれば。即天皇の宮にして。別に主あることなし。然れば此伊勢の外宮も。五十鈴宮の外宮にして。天照大御神の宮なりと云たるは。昔より比なき考にして。信に然ることなり。然れば元來有し天照大御神の外宮に。豐受大神をば鎭祭たるなりとあるは。本居氏諸説の中に。最價値ある金言なり。故に外宮は豐受姫を祠るに非す。磯宮の外宮なり。又磯宮は天照大神を祠るに非す。其大宮の跡に神鏡を齋奉りたるなり。大三輪社には。今も寶殿を造らす。只拜殿のみなりと。是は三諸山を幸魂奇魂の鎮まる所として崇拜し。別に神體を齋かさればなるべし。伊勢三輪兩神宮の起りは此の如し。皆天を祭るなり。然れども伊勢は天照大神の御魂にて。三輪は大國魂の御魂といへば。直に其人を祭るが如く聞ゆ。因て早き時代より伊勢を天神。三輪を地祇と別ち。之を推究むれば。亦人鬼崇拜の堂の如くにも聞ゆ。因て後世に伊勢を大廟などゝ誤稱するものあり。其は次に辨明すべし。又天照大神の徳を日に比べて天照と申し。大日?(靈の下が女、≒靈女)貴と申奉る。故に五瀬命ハ我日神子孫而向日征虜。此逆天道也と云給ひ。聖武帝は東大寺に大佛を鑄造し給へり。毘廬遮那佛は大日如來なれば。大神を其權化と信し給ふ故なり。天に在て最も人に功用の顯著なるは。日輪に過るものなし。因て大神の徳を賛稱したるにて。大神は日輪のことには非す。又日を天と思ひたるにも非す。大神は天の代表者と信し。日に比べたるなり。大神宮は其詔に我前に拜むが如くせよとの旨に從ひて。其御魂を拜む所なり。漢土の宗廟に國祖を天に配亨するとは。大に異な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