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신문 제180호 포덕162(2021)년 10월 7일
사설
홍암 나인협 선생 특별전시회에 부쳐
지난 10월 1일부터 11월 3일까지
부산 남구청에서는 홍암 나인협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그 업적을 돌아보고자 특별전시회를 마련했다.
천도교 도사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었던 나인협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소 하였다.
출소 후에는 천도교 대종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중앙총부 종리원 종리사로 선임되기도 했다.
1923년 선생은
천도교 활동에 주력하면서 서북청년들이 주도하던
문화운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고향인 평남 성천에 머무르면서
교회 원로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당시 천도교 교사로서
천도교청우당을 결성하여
위원장에 취임한 김달현이 김일성과 손잡고
사회중의 국가 수립에 뛰어들자,
이에 반대 입장을 펴다가 6개월 간 수감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1.4후퇴 때 월남하여
부산 범일동 피난민 ‘바라크촌’에서
토담집 한 칸을 얻어 8인 가족이 생활했다.
선생의 딱한 사정을 듣고 당시 관재청에서는
적산가옥 한 채를 알선해 주겠다고 했지만,
선생은 현재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쫓겨나야 하는 처지라는 것을 알고는
거절했다고 한다.
1952년 4월 16일
나인협 선생이 환원한 직후 보도된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선생이 기거했던 토담집은
다다미 두 장 정도 되는 흙방에
문은 거적으로 둘려져 있었고, 벽은 종이를 발랐으며
비새는 지붕은
거적때기 몇 장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선생이 환원하자, 빈소는
부산 초량역 앞의 부산시교구에 마련하였으며,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는데,
4월 20일 오전 초량역 광장에서 영결식을 갖고
유해는 부산 대연동 범디산 중턱에 안장되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200만원을 장의비 명목으로 지원하였으며,
국회의원들은 세비의 1할을 거둬
조의금으로 내었다고 한다.
이후 선생의 유해는 유족의 뜻에 따라
1973년 10월 31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현 서울 현충원)로 이장되었으며,
정부는 1962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나인협 선생의 묘지가 국립묘지로 옮겨지면서
묘지석은
천도교대연교구(현 대동교구)가 보존해 왔으나,
2016년 대연2지구 재개발공사 과정에서 파손되어
교인 가정에 보관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 같은 사실을 흥신포(직접도훈 덕암 성강현)와
당시 대연교구(교구장 원암 유재원)가 주축이 되어
남구청(구청장 박재범)에 알리고 청원하여
복원 방안과 대책을 촉구하였다.
그 결과 금년 말에는
나인협 선생의 묘소 표지석이 복원되고
흉상도 제작되어
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영구 전시될 예정이다.
그에 앞서 이번에 부산 남구청에서는
나인협 선생 특별전시회를 마련하여
관련자료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부산 남구청의 지원과 협조는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유공자의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는 차원에서
매우 뜻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아울러 지방교구가 앞장서
자칫 사라지고 묻혀버릴 것 같았던
천도교 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재 조명하고 되살리려는 노력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해주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내 스스로 일을 찾아 이루어가는
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내 옳고 네 그르다는 식의
제 살 깎는 대립이나 내부를 향한 총질이 아니라
기도와 참회, 봉사와 자기희생을 통한 감응받기,
이 감응을 통하여 동귀일체로 나아가
마침내 교회중흥을 이루어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