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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
3.1혁명 100주년 특집
봉황각, 3.1독립정신의 원류
- 3.1혁명 100주년에 부쳐 -
중암 박충남_의창수도원 원장
청사에 길이 빛날 3.1독립운동 100주년이 코앞으로 닥아 왔다.
서울 삼각산 우이동 소귀(牛耳) 골에는 3.1정신, 3.1혁명, 3.1독립운동의 역사가 고동치고 있다. 봉황각은 우리나라 3.1독립 정신의 발원지요, 3.1운동의 발상지요, 민족의 성지이다. 봉황각의 중심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영도자 의암 손병희, 의암성사가 우뚝서있다.
봉황각이 어떤 곳이던가! 우리나라 독립운동 정신의 발원지요 독립운동의 검용소이다. 발원이란 말이 무엇인가! 아름다운 한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백산이 나오고 그 태백산 중턱 ”검용소”에서 비가 오나 눈이오나 맑은 날이거나 똑 같은 양의 물이 계속 솟아올라 그물이 장강대하의 아름다운 한강을 이루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내었다. 우리나라 3.1독립운동도 그 역사를 따라 가면 1919년 3.1일을 10년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 이곳 봉황각에서 그 장엄한 3.1독립정신이 발원하였으니 이 나라 3.1독립정신의 검용소, 발원지임에 틀림없다.
1910년(경술국치) 8월에 우리나라는 완전히 망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나라가 망했으니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 의암성사께서는 땅 바닥을 치면서 “내 10년 안에 기필코 조국을 되찾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시고 당시 미아리 고개에서부터 봉황각까지는 심산유곡으로 숲이었을 때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이곳에 약3만여 평을 당시화폐 8백원에 구입하고, 독립과 보국안민의 계책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천민보록에 기록 되어 있듯이 비운의 왕세자 의친왕 이강 공도 천도교에 입교를 하고 봉황각 건축에도 많은 조언을 하였다고 전한다. 경복궁내 건청궁의 옥호류는 봉황각 건축양식과 닮았다.
드디어 1912년 봄에 28평의 봉황각을 건축하고 천도교 지도자, 후일 3.1독립운동 때 전국 독립운동의 지도자급 483명을 매회 49일간 7회에 걸쳐 이신환성, 규모일치로 인재를 양성 하였다. 이곳 강북 구청장은 삼각산 아래 봉황각과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가 있는 이 일대를 민족의 성지라고 한다. 또 어떤 시민은 봉황각은 보물이라고도 한다. 지나간 우리 교단에서 현존 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 문화재 봉황각이 성축된 지 107년이 지났다. 무심 할 수가 없다. 취운정, 상춘원, 쌍두마차, 자동차는 모두 없어졌지만 수련 기도도장 봉황각(서울시유형문화재제2호)만은 건재하다. 28평의 궁을 형상위에 석가래 49, 21, 13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봉황각이 풍운 급박의 교단과 이 민족을 살려낸 원동력이 되었고, 483명의 지도자가 300만 교도를 이루어 내었다.
봉황각은 3.1운동의 원초이고 3.1정신의 구심점임에 틀림없다. 3.1독립운동의 초석이 되고 후일 전국적인 조직망을 통하여 3월1일 각 지방의 선봉에 서서 팔도 내놓고 다리도 내놓고 하나밖에 없는 목도 내 놓고 재산까지 몽땅 내 놓았던 483명의 천도교 교역자, 독립투사들을 나는 영웅이라고 부른다. 평안북도 정주의 최태일 교구장이, 경기도 화성 제암리의 김성열, 김흥렬 영웅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 땅에 살아 돌아오고 있다.
1919년 2월22일 아침 봉황각에서는 3.1독립운동에 대비한 전국적으로 그해 1월 5일부터 시작한 49일 특별기도를 끝내면서 의암성사 께서는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건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이 말씀은 10년 동안을 보국안민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준비하고 쌓아온 마지막 결행의 선언이였다. 또 그 당시 저 유명한 독립선언서를 적자 경영 하면서도 35,000매를 인쇄하고 만세부를 태극기를 인쇄하고, 왜놈에 의해 1919년 6월28일 밤 분소된 보성사의 처절한 절규는 누가 위로해 줄 것인가 !
인류역사상 그 어떤 영웅도 인생일대에 3대 혁명을 장식한 분은 더물다. 의암 손병희성사께서는 갑오동학혁명(1894), 갑진개화혁신운동(1904), 기미 3.1 혁명(1919)의 3대혁명의 선구자요 화신이었다. 그리고 인생 일대의 대미를 장식 한 것이 3.1 혁명이요, 봉황각 이였다.
의암성사는 이 땅에 서자로 태어나면서부터 이 세상에 한줄기 밝은 광명을 던져야 하는 고난과 사명이 부여 되어 있었다. 불우한 젊은 세월을 청산하고, 나이 21세 때 고향 청주에서 “이놈의 세상은 삼재팔난이 와서 망해야 될 세상”에서, 동학은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큰 목적과 무극대도”란 말씀에 크게 느껴 입교하게 된다. 입교한 후로는 과거의 호방한 기질을 청산하고, 하루에 주문 3만독씩을 읽을 것과, 하루에 짚신 2컬레 씩을 삼아 5일마다 열리는 청주시장에 내다파는 것을 일과로 독공한 결과 도통문장을 지으셨다.
“천지일월입흉중天地日月入胸中
천지비대아심대天地非大我心大
군자언행동천지君子言行動天地
천지조화오임의天地造化吾任意”
해월신사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보은 장내리, 광화문 복합상소의 시대를 지나, 갑오년에는 스승님의 명에 따라 전봉준 녹두장군과 결의형제를 맺고 논산벌의 대일 항전을 일으켜 저 청사에 길이 빛나는 동학혁명을 일으켰으니 우금치 견준산의 40여만의 시산혈하屍山血河, 시체배미의 처절함, 진정 처음으로 이 땅의 풀뿌리 민주주의 효시를 가져 왔고, 진정 백성이 이 나라의 주인이며 만민평등의 새 세상을 건설함으로써, 집강소는 오늘날 지방 자치행정의 초석이 되었으니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이로써 시작 되었다.
스승이셨던 해월신사 마저 1898년 원주 송골에서 피체되시어 서울 한성감옥 단성사 자리에서 72세의 나이로 순도, 순국하시니, 교단의 명운이 두 어깨에 달려 있었을 때 그 마음과 고뇌가 어떠 했으리오. 두 분 스승님이 당시 대명률에 의한 최고 형벌인 참형, 교수형을 당하시고 의형인 전봉준 장군마저 광화문에서 처형당하는 것을 목도 하면서, 성사 또한 붙잡히면 죽고 만다는 절박감에서 1900년 초에 들어서면서 몸을 피하여 세계 개조의 대세를 살필 겸 “이상헌”으로 변성명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시었고, 또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여 조국의 청년준재 64명을 신문명, 신문화 교육을 위하여 일본교토에 유학 인재를 양성하였다.
포덕 45년 1904년(갑진)에는 일본에 계시면서, 교도들로 하여금 상투를 자르고, 물색 옷을 입게 하는 “단발흑의”를 단행하였다. 생활 의식의 대 변화와 혁신을 일으킴으로서, 새 세상을 열어 나가지 않고서는 우리나라가 새로워 질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하루아침에 16만명의 교도가 상투를 깎았다. 그리고 갈나무 껍질 등으로 물색 옷을 입도록 함으로서 백의민족으로 일컫던 백의를 칼라로 바꾸었다. 나라 임금이 단발령을 내렸으나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하였는데 내 어찌 부모에게서 받은 머리카락을 임금이 자르라하여 따르겠는가 하고 반대 하였는데 동학에서는 하루아침에 16만 명이 단발을 하고 나서니 10년 만에 또 동학군이 난리를 치는구나 하고는 조정에서는 탄압하기 시작 하였으니 가발도 없던 세상, 평안도 태천 땅 고치강에는 수많은 삭발한 교인들이 두둥실 떠내려갔다는 고치강의 노래가 전하여 오고 있다. 이름하여 갑진년 개화혁신운동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국민은 흑의단발의 신문명 새 문화의 역사를 알아야 할 것이다.
대신사께서 논학문에서 “무슨 도라고 이름합니까 하고 제자가 물으니 천도이니라” 하시고 또 “도수천도道雖天道 학즉동학學則東學”이라 하셨으니 이제로부터는 숨고 도망 다니고 좆기고 핍박받든 동학 세월을 마감하고, 당당한 새 한울 새 땅 새 사람의(天地人) 무극대도 천도교로서 이 세상에 새 진리, 새로운 종교로서 대고천하 하기에 이르렀으니 1905년이요 포덕 46년 12월1일 이었다. 다시 말하면 천도교와 동학은 양면의 동전 같은 것으로 동학이 천도교요, 천도교가 바로 동학인 것이다. 다음해 의암 성사께서 환국하사 “이세상은 하늘을 뜯어 고쳐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천심을 회복하고 마음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드디어 다음해 1907년에는 순종황제께서 지금까지 “좌도난정”으로 제1세 교조 수운대신사, 제2세 교조 해월신사가 국가로부터 참형을 당하였던 것에 대하여 그 죄가 사하여 졌으니 그 얼마만한 세월의 고난이 끝났는가!
1906년 서울 다동에 처음으로 교당을 세우고 교기인 궁을 깃발이 처음으로 장안에 휘날리고, 주문소리가 장안에 진동하였으니, 분명 새 세상이 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10년 무더운 8월 여름날 우리나라는 나라가 망했다. 또다시 비극, 비운의 역사가 시작 되었다. 나라 망한 시대의 풍운아, 의암성사의 시대에 처한 감상이 어떠했으리오. 아둔한 나의 필설로서는 이 시대의 감상을 어찌 감히 표현 하며, 3대혁명을 일으킨 의義와 용勇으로 점철된 인생을 말할 수 있을까! 심히 두렵다.
이러한 도도한 흐름이 있었기에 80년도 채 안된 1931년 3월호 “혜성彗星”이라는 월간지중 종교전선 종횡기(김병순기자)에 보면 우리나라 당시 종교인 현황에서 천도교 6,104,900여명, 기독교 280,700여명, 불교 166,300여명 이었다. 이 생생한 자료에서 보듯이 우리는 희망과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필자가 반세기전 약관20대에 생각을 달리하여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천도교 종학원 제3기생으로 공부 할 때에 의암성사의 미망인 수의당 주옥경 여사께서 “박군,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천도교는 가장 신자수가 많고, 인물이 많고, 돈이 제일 많은 종단이었는데 3.1우동이 끝나고 나서는 점차, 가장 교인이 적고, 인물은 흩어지고 도망가고 죽고, 가장 돈없는 종단으로 변모해 가는 것을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 하고 술회 하시는 것을 들었다. 수의당 주옥경 여사께서는 3.1독립운동의 산 증인이셨다. 성사님이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실 때, 감옥소 부근에 방을 얻어 성사님 보필은 물론 민족대표 33인의 옥바라지와 세탁이며 사식차입 등 온갖 굳은 일은 다 맡아 하셨기 때문에 34인 이기도 하였다.
흔히들 3.1독립운동은 미국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혹자는 말하나 수운대신사의 창도 목적인 포덕, 광제창생 보국안민의 정신에서 면면히 흘러 내려온 민족정신의 발로에서 비롯되었으며 대신사, 해월신사의 순도 순국 정신이 고동치고 있었기에 동학혁명과 개화혁신운동, 기미 3.1혁명이 가능하였다.
3.1혁명정신의 3대 강령인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도 교단의 창도정신과, 의암성사의 양대 운동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봄이 타당 할 것이다. 일찍이 1901년 2월 신해혁명시 상해 국제 반점에서 손문 총통은 “흥국제민興國濟民하고 치평천하治平天下할 영웅은 조선에서 오신 손병희 선생뿐이오. 우리 다 같이 손 선생의 기백과 용기를 배웁시다”고 하였다고 하신 것만 보아도 생전의 기백과 용기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 의암성사는 후일 법정에서 일본 재판관이 어떠한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다” 고 한다. 옥고 중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오로지 나에겐 독립병이 있을 뿐이라고 하시고 그 길로 순도순국 하셨습니다.
자라나는 세대가 몰라도 너무 모른다. 우리나라에 역사가 없다는 가십을 읽은 기억이 난다. 반만년, 아니 9,900년의 끊이지 않은 찬란한 역사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도 역사가 없단다. 한때 일본이 역사왜곡을 한다고 분개해서 일본대사관 앞으로 데모를 간적이 있었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도처에 널려 있는 우리의 역사왜곡이요, 역사의 무지요, 역사의 오류요, 역사의 불감증이다. 당당한 역사의 주체성을 살려 나가야 한다. 독립을 말하고, 건국을 말하고, 광복을 말 하면서도 김구, 유관순, 이승만을 많이 말하면서도 의암 손병희는 모른다. 광복이후에 유관순은 살리고 손병희는 숨기는 교육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어찌 젊은 세대의 탓으로만 돌리겠는가! 어른들의 탓이요, 우리들의 무신경이요, 나의 탓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정치지도자, 학자, 우리 모두의 통열한 반성과 비판이 있어야 한다.
이제 3.1독립운동, 3.1혁명 100주년이 다가온다. 미국은 그 나라의 독립 100주년 기념하여 자유 여신상이 건립 되었고, 미국의 달러에도 독립운동가가 화폐인물로 들어가 있지 아니한가. 불란서 혁명 100주년기념으로 파리 시내에 파리 개선문과 에펠탑을 세우지 않았던가. 그것은 무엇을 뜻함인가. 역사를 존중하고 그 나라 향도, 민주와 독립과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 나라정신이 아니겠는가. 지금 그곳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있다. 부럽고 부러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참된 정신을 하나로 묶을 그러한 곳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정부도 우리교단도 국민도 생각해 볼 일이다.
서울시내에 유관순 기념관도 있고, 김구선생 백범기념관도 있고. 이승만 기념관도 있다. 그러나 이 나라 독립운동의 국부 33인의 영도자 손병희 기념관 하나 없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사실 회고해보면 8.15광복이후에 의암 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회장 동덕여대 조동식박사)에서 4가지 사업을 계획하였는데, 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탑골공원 의암 손병희선생 동상, 우이동 의암 손병희선생 묘소 조성, 의암 손병희선생 기념관 이었다. 모두 사업을 마쳤으나 한가지 “의암기념관”을 이루지 못하고 그 사업회가 해산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 사업은 후대 민족의 몫으로 남겨 놓았다고나 할까!
어찌 유관순 , 김구, 이승만이 의암성사에 비견 되겠는가! 상해임시정부에서 귀국한 김구선생도, 하와이 임시정부에서 귀국한 이승만 박사도 귀국하여 맨 처음으로 찾은 곳이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였다. 왜 그랬겠는가. 의암 손병희 선생은 한성 임시정부, 노령 임시정부에서 처음으로 네 차례나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 되었으나, 감옥에 계신 몸으로 어찌 대통령에 오를 수가 있었겠는가. 감옥에서 2년 만에, 더는 정치활동도, 종교활동도 불가능 하다는 일본 놈의 간악한 계산아래 병보석 되었으나 그길로 회생하지 못하고, 61세의 나이에 순도, 순국 하셨다. 김구, 이승만 양인은 묘소를 참배하고, “이 어른이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3.1운동도, 임시정부도, 조국 광복도 없었을 것이라고” 술회 하였다. 오늘날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왜 그분들이 해외 임시정부에서 귀국 하자마자 봉황각옆 의암성사의 묘소를 제일 먼저 찾아 왔겠는가 하는 그 깊은 뜻을 우리 대통령도, 정부 당국자도 우리 국민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봉황각 앞 구 천도교중앙총부건물 복도에는 탑골공원에서 마지막 배포 되었던 독립선언서가 걸게 그림처럼 걸려 있어 카메라 후렛시의 세례를 받고 있다. “오등은 자에 아 선조의 독립국임과.........”로 시작되는, 과천 공무원 연수원인가에는 5억 원인가를 드려서 제작한 이응노 화백의 유관순 그림이 폭 약 5M의 대형 사진이 중앙에 걸려 있다고 한다. 공무원들에게 유관순 정신을 배우라는 뜻일까. 하여튼 그림이 너무 커서 문을 부수고서야 들어갔다는 신문 가십을 보고서 나는 또한번 놀랐던 일이 기억난다.
금후 100년후의 조국 봉황각을 상상해 보라! 3.1정신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국민의회수립, 상해임시정부수립, 한성정부가 수립 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않는가! “봉황각”! 역사적인 봉황각, 서울시지정문화재 제2호가 축성 된지도 어언 107년이 지났다. 비록 봉황각의 기거 숙식을 하던 열두 칸의 “소 봉황각”은 일제에 의해 3.1 독립운동 후에 철거 되었으나, 28평 규모의 봉황각 만은 6.25사변에도 잘 견뎌내 원형 그대로 보물이 보존돼 오고 있다. 강북구청에서는 구민들이 오래전부터 3.1독립운동 발상지의 올곧은 역사의 뜻을 오늘에 살려 3. 1 독립운동 재현행사를 계속 해 오고 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지금도 이 보물을 소중히 아끼자면서 한밤중에도 영적인 사람들이 봉황각을 찾는다.
“봉황각” 기록에 의하면 대신사님, 해월신사 때부터 봉황이라는 글이 시구에 많이 나와서 봉황각 이라고 정했다고 한다.
“河淸鳳鳴 孰能知”, “鳳兮鳳兮 賢者”, “鳳鳴周室爾應知”, “鳳凰臺役 鳳凰遊”, “봉황대 높은봉은 봉거대공 하여있고”, “受我鳳八各主定”, “南辰圓滿 鳳凰來儀” … 의암성사님의 “鳳凰閣吟”의 시가 따로 있다.
봉황각 주변에 있던 소봉황각 등도 복원 되어야 하고, 봉황각과, 별채 별관은 같은때에 지어져 현존하고 있으나, 다음해에 지어진 12칸의 수련도장은 3.1독립운동 이후에 흘어 졌으니 주춧돌만 현존하는 수련도장은 현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기대 처럼 복원됨이 마땅할 것이다. 봉황각의 보물이 더욱 빛을 발해 봉황각이 빛나게 하자. 봉황각은 이 나라와 세계인류를 위한 기도도장이다. 보국안민 포덕광제의 수련도장이다. 제일수도장으로 거듭 나야 한다.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세상이 고난에 처하였을 때는 기도와 정심수도로써 극복하였다. 또 유서 깊은 봉황각은 천도교 역사에서 보듯이 스승님들이 주로 사찰을 빌려 수련기도 하였던 역사를 마감하고, 처음으로 우리 건물에서 단체 수련도장으로 길을 여신 뜻 깊은 봉황각이다.
“대의大義의 횃불을 높이 드심이여 겨레의 갈 길을 비취시도다
큰 뜻을 천추에 드리우심이여 조국의 역사와 함께 가도다”
우이동 의암성사 묘소의 비문글씨가 눈부시다. 봉황각은 이제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조국독립 광복의 3.1정신 즉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의 정신으로 조국을 하나 되게 하고, 후천개벽의 시천주의 새 종교와 인내천의 새 진리로, 새 문명 새 문화 제3의 물결을 도도히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봉황각 보물의 역사적 사명이 조국통일의 미래를 열어 나가야 할 사명이 바로 여기에 있다. 3.1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봉황각은 보국안민의 계책이 묻어 나오고, 봉황각이 빛나고 의창수도원이 발전하기를 삼가 심고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