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과학 기술
3.1. 농업 기술
여말 선초에 걸친 농업 기술상의 두드러진 변화로는 시비법(施肥法)의 개발에 따라 휴한법(休閑法)을 극복하고 연작법(連作法)을 보급시킨 점을 들 수 있다. 또 논농사를 위한 수리 시설로서 둑(堤堰)을 쌓는 일 외에 16세기부터는 보(洑)를 막는 것이 개발되었고, 벼농사에는 우리 나라의 강우량에 맞춰 건경법(乾耕法)으로 생산량을 늘렸다.
또한 한전농업(旱田農業)은 연작에 그치지 않고 기름진 땅에는 윤작법(輪作法)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농업 기술의 발달은 고려 말기 이후 신진사대부들이 중국의 강남농법을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다.
농업 기술의 개선을 위해서는 농서(農書)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고려 말 이후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 農桑輯要』가 간행되기는 했으나, 우리 실정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세종 때 정초(鄭招) 등이 『농사직설』을 편찬하였다.
그 뒤 성종 때 강희맹(姜希孟)은 사철의 농작과 그 기술을 개설한 『사시찬요 四時纂要』와 지금의 시흥 지방인 금양(衿陽)을 예로 농경 방법을 수록한 『금양잡록』을 편찬하였다. 중종 때는 『농사직설』의 보급을 위해 김안국(金安國)이 『농사언해 農事諺解』와 『잠서언해 蠶書諺解』를 간행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농업 기술이 더욱 발달해 수전(水田)은 직파법에서 이앙법으로, 한전(旱田)은 농종법(壟種法)에서 견종법(畎種法)으로 바뀌어갔다. 이앙법은 이미 고려 말기에 삽종(揷種)이라 하여 그 방법이 알려졌다.
이후, 조선 초기에 경상도 북부 일대와 강원도 남부에서 부분적으로 행해지다가 중기에 호서·호남으로 전파되고, 18세기 전반에는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수전의 7, 8할이 이앙법을 택하였다.
이앙농법에는 수리 시설이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1662년(현종 3)에는 제언사(堤堰司)가 설치되었다. 1772년(정조 2)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이 반포되는 등 국가가 수리 시설을 뒷받침하였다.
경상도의 경우, 조선 초기에는 수전이 전체 전결의 3분의 1이었다. 그 중 수리 시설이 된 전결은 약 5분의 1이었으며, 제언의 수는 800개소였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초에 이르면, 경상도에 제언이 1,000개소, 보가 1, 000개소나 되었다.
한편, 이앙법의 보급으로 삼남 지방에서는 논에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널리 행해졌다. 한전에서도 견종법의 시행으로 노동력이 절감되고 시비 관리도 잘 되어 수확이 크게 늘었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많은 농서가 간행되었다. 효종 때 신속(申洬)은 『농가집성 農家集成』을 냈고, 숙종 때 박세당(朴世堂)은 『색경 穡經』을 간행했는데, 이는 한전농업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홍만선(洪萬選)이 낸 『산림경제』도 넓은 의미의 농서에 해당하고, 헌종 때 서유구(徐有榘)가 낸 『임원경제지』는 후기 농서의 집대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