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명창 김소희(1917~1995)
“소리만 잘 하려고 허지 마. 우선 사람이, 인간이 돼야지 올바른 국악인이여.” 예술에서나 일상에서나 조금도 흐트러짐없이 단아하고 향기있는 삶과 예술로 귀감이 됐던 한평생 소리꾼으로서의 외길을 걸어 무소불통 빛나는 예술혼을 불태웠던 만정 김소희 선생
판소리의 대가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인 만정은
지병인 간암으로 서울 소격동 자택에서 다소 쓸쓸하게 보내다가 95년 78세의 나이로 이 세상과 하직했다. ‘달밤의 기러기 울음소리’를 남겨두고.
쪽진 머리에 옥비녀와 옥색치마로 화사하게 단장하고 쥘부채 하나로 관객을 울리고
웃긴 고인의 판소리는 구성진 가락과 풍부한 방울목으로 유명했다.
‘고려청자의 쑥물 든 하늘빛과 조선조 백자의 희디겨운 옥빛이 어려있고 가을밤 기러기 소리며 청전의 학울음 소리와 낙목한천의 찬바람 소리를 느끼게 했던 목소리. 평평한 목소리로 나가다 한량없이 높은 소리로 냅다 휘잡아 올려가지고 거기에서 애절비절하게 쥐어짜다가 톱질로 비벼 차근차근 말아들이는 애원성으로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던 명창’(중앙일보 95년4월19일 분수대)이라는 평을 듣는 그는 애기명창으로 어릴 때부터 일찌기 이름을 날렸다.
하늘이 내린 목을 타고 났다. ‘천구성’인 것이다.
만정선생은 처신이 당당하고 매사에 맺고 끊음이 분명했다.
김소희 명창의 소리를 들으면 여러 명창의 소리가 들어있다 한다.
춘향가에는 송만갑명창의 소리가 있고, 정정렬명창과 김소희명창 자신의 소리가 들어있다.
만정은 동·서편의 소리를 두루 섭렵하고 자기 소리로 승화시켜 김소희제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들어보아도 가성이나 꾀목을 쓰지 않고 담담하게 소리를 냈다.
군산대 최동현교수는 19세기말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던 진채선 이래
우리의 여창 판소리가 이룩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만정을 꼽으면서, 윤곽은 크고 바르게 그리면서도 세부는 아기자기하고 부드럽게 엮어가는 것이 그의 소리였다고 평한다. 이매방에게 배운 살풀이며, 정남희에게 배운 가야금이며, 김월하에게 배운 가곡이며 여러 부문에 걸쳐 두루 일가를 이룬 그는 거문고 양금 서화에도 한자락 경지에 올랐다.
1917년 고창에서 본명을 순옥으로 하고 농부의 둘째딸로 태어난 그는 가세가 기울면서 9살때 부모의 곁을 떠나 광주 언니집 신세를 졌다. 광주여고보 시절인 13세때 당대의 명창 이화중선의 공연을 보고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울리고 웃기는 가락이며 가사, 부채를 꼬나쥔채 관객을 온통 탄성의 도가니로 몰고가는 발림, 오금을 못쓰고 빨려들게 하는 아니리 등에 완전히 도취되고 말았다”고 만정은 전북일보 김현기기자와의 인터뷰(1972년8월20일자, ‘나의 편력’기사 중에서)에서 그 때의 감회를 밝혔다.
앉으나 서나 누우나 자나 무대 생각뿐이어서 열병에 걸린 것처럼 공연이 계속되는 10여일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설극장의 포장문을 들추고 맨 앞자리에 앉았던 그녀가 소리공부를 위해 처음 찾은 이는 동편제의 대가 송만갑. 그는 첫 대면에서 들어본 그녀의 소리 흉내에 “어쩔 수 없구나. 네가 타고 났다.”며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소리 한평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정정렬에게서 춘향가, 전남 화순의 박동실에게서 수궁가 적벽가 등을 배웠다.
17살까지 오직 배우기만 열중해온 그는 당시 북과 고전무용의 권위자로 명성을 떨치던 한성준선생의 사설무용연구소에서 창을 배웠다. 라디오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무렵, 한성준씨를 전속반주자(북과 장고)로 라디오 생방송을 하면서 만정의 진가는 더욱 발했다.
콜럼비아레코드 회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춘향가를 취입한 것도 이 때.
21세에 결혼한 그는 10년만에 부군을 여의고 3남매(2남1녀를 두었으나 장남 사망)를 혼자 키운다. 제자들에게는 엄하면서도 다정다감했고 후배 소리꾼들에게는 예술가는 품위가 있어야지, 천박하게 놀아서는 안된다며 몸소 예인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던 이 시대의 명창 만정은 안향련 김동애씨(작고)를 비롯해 성창순 신영희 남해성 박량덕 이명희씨 등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만정의 소리법통을 이어받은 명창 안숙선씨는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95년4월24일) “만정선생은 늘 우리 곁에서 거대한 산처럼 우리를 보호하고 감싸주셨는데, 이젠 잘못을 저질러도 따끔하게 꼬집어 주실 분이 없어요. 그분 소리는 격렬하면서도 처지지 않는, 절제된 소리의 정수였다. 기쁨도 슬픔도 드러나지 않는 그야말로 과장이 없는 소리 그 자체였다. 스승은 비록 가시고 안계시지만 그분의 소리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려 한다.”고 밝혔다.
친딸 박윤초씨(55세, 국악인, 김소희선생기념사업회 대표)는 96년 1주기를 맞아 열린 추모공연에서 고인의 장기였던 판소리 춘향가 중 춘향이가 이도령을 그리며 부르는 「갈까부다」를 열창, 고인의 예술혼이 아직도 살아숨쉬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95년 범국악인장으로 치러진 만정 영결식장에서 만정과 각별한 사이인 소고당 고단(78)이 76년 만정의 육순을 맞아 지은 시에 고인이 직접 곡을 붙인 ‘만정가’가 뱃노래 가락에 실려 불리어져 구슬픈 마음을 더했는데 고단은 그 뒤 만정의 방일영문화재단 국악대상 수상 축하의 마음을 다음과 같은 가사로 답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이지적인 용모에/ 차돌같은 가슴속에 영롱한 별빛이/ 애수를 호소하듯 비취비녀 다홍댕기/ 옥색갑사 치마저고리 자주고름 늘어뜨려/ 합죽선 손에들고 「범피중류」 「옥중가」를/ 열창할때 기막힌 그감동 그여운은/ 몽환인듯 생시인듯 깨닫지 못할지다”라고.
만정은 72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판소리공연으로 기립박수를 받는 등 이름을 세계에 떨쳤다. 90년부터 시작된 병마를 무릅쓰고 국악부흥과 후진양성에 힘썼던 그는 병색이 완연했던 93년 76세의 고령에도 대한민국국악제를 진두 지휘했고 영화 ‘서편제’에 구음으로 출연, 94년을 국악의 해로 제정하는데 기여했다. 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에서 심청가의 한 대목에 구음을 붙여 개작한 소리 ‘떠나가는 배’는 세계인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73년 국민훈장 동백장, 82년 제 1회 한국국악대상, 8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 91년 동리대상, 94년 제 1회 방일영 국악상 수상, 95년 작고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으며 음반으로는 심청가와 춘향가 완창 앨범 등이 있다.
만정은 본인이 생전에 터를 잡아놓은 고창군 고창읍 화산리 묘역에 잠들어 있다.
살 수만 있다면 팔순 기념무대에서 사그라지면 사그라진대로 나의 목을 숨김없이 펼쳐보이고 싶다던 그녀, 말년에 낙향해서 조그만 예술전수관을 지어놓고 제자들이나 키우고 싶다던 그녀가 팔순을 한해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자료협조 : 전북일보 『20C 전북50인』-1999년
|
첫댓글 김소희 명창의 고향이 고창 흥덕으로 내 고향과 가깝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