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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46
창세기 15:1-7
아브람의 믿음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한 전쟁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사건의 중심이 롯이 아닌 아브람이라는 사실이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이었다. 아브람은 자기 집에서 기른 힘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에 근거하여 붙이신 전쟁이었다는 것을 멜기세덱을 통해 확인시켜 주셨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브람이 대단한 믿음으로 이루었다는 식으로 이해한다. 그 근거로 15장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6절)라는 말씀을 이야기한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 가장 큰 문제점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는 것이다. 의로 여기신 근거가 아브람이 믿었기 때문이라면 아브람의 믿음은 행위가 된다. 이는 성경 전체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라는 말씀과 상충된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 “여호와의 말씀”은 히브리어로 ‘다바르’이고 “이르시되”는 ‘아마르’이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아브람에게 임하심으로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브람이 말씀이 되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셨다는 의미이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잠시 잠깐이었고 아브람은 두려움 중에 있었다. 흔히 아브람이 물리친 적들이 다시 공격해 올 것 때문에 두려워하였다고 이해하나 본문의 문맥에서 아브람이 상속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후손이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즉 후손이 없으므로 앞으로 자신의 집을 누가 지켜줄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한마디로 아직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인정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임하여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방패”란 히브리어 ‘마겐’은 ‘가난’(보호하다, 둘러싸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다(왕하 19:34, 왕하 20:6, 사 38:6). 구약의 곳곳에 하나님을 방패로 묘사한다(삼하 22:3, 시 3:3, 84:9 등). 이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신 33:29, 삼하 22:36, 시 7:10, 18:2).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3-17)
“믿음의 방패”란 방패가 믿음의 소유라는 뜻이다. 즉 구약에서 하나님이 방패라고 하였는데 그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신 방패라는 뜻이다. “상급”이란 ‘사카르’인데 ‘삯, 보수, 임금’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이 아브람에게 삯으로 보수로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여전히 자기 집의 힘이 되는 후손에 대한 관심만 있었다. 그래서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2-3절)라고 하였다. “주지 아니하셨으니”라는 말은 ‘로 나탄’이다. 즉 하나님께서 씨(후손)를 주시지 않았다는 모든 원인을 하나님께 돌린다. 아담이 선악의 나무를 취하였을 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먹었나이다”(3:12)라고 하였을 때 “하나님이 주셔서”라는 말이 ‘나탄’이다. 일이 잘되든 못 되든 모든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내 집에서 길린 자”라고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내 집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방식을 자기식대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혹자는 “엘리에셀”의 게마트리아(알파벳에 해당되는 숫자로 해석하는 방법)가 ‘318’이기에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14:14)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브람이 엘리에셀을 아들로 생각하여 자기 집의 힘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4-5절)라고 말씀한다. “몸”의 히브리어 ‘메에’는 ‘배, 창자, 생식기’를 뜻한다. 엘리에셀을 아들로 삼아서 될 문제가 아니라 아브람의 생식기를 통해 날 후손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확인시켜 주신다. 이 말씀 역시 양적인 팽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땅적 존재에게 하늘의 진리로 충만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참고 1:28, 9:1, 계 7:9).
그리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6절)라고 말씀한다. “믿으니”라는 말의 히브리어 ‘아만’은 ‘확실하게 하다, 지지하다, 충실하다, 신실하다’라는 뜻으로 이 말에서 파생된 말이 ‘아멘’(진실로)이고 명사형이 ‘에무나’(믿음)이다. 이 말은 ‘신실함, 충실, 진리’로 번역되고 때로는 “성실하심”(시 100:5), “진실하게”(왕하 22:7)라는 말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9-20)
“진실함”이 히브리어로 ‘에무나’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신부로 삼아 결혼 관계가 영원토록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실 것을 말씀하셨다. 부부의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 음란한 아내 고멜을 찾아서 데려오는 선지자 호세아의 모습을 통해 바로 하나님의 자신의 신실하심, 믿음으로 나타내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성실, 진실,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보증한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진리’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출 17:12)
여기서 “내려오지 아니한지라”라는 말씀이 히브리어 ‘에무나’이다. 즉 견고하게 되었다, 확실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이루셨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모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견디어 낼 수밖에 없었고 버텼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자면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라는 말씀을 단순히 아브람이 믿었다고 문자적으로 볼 것이 아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람에게 나온 믿음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식으로 아브람이 믿었다면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8절)라는 물음이 아브람에게 나와서는 안 된다.
그래서 1절에서 이미 “여호와의 말씀(다바르)이 환상 중에 임하여 이르시되(아마르)”라고 하였고 또 4절에서도 “여호와의 말씀(다바르)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아마르)”, 5절에서 “이르시되”(아마르)라고 두 번, 7절에서도 “또 그에게 이르시되”라고 ‘다바르’를 ‘아마르’하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즉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아브람에게 임하심으로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기에 믿음으로 드러났고 그것이 의가 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 11:8-9)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히 12:2)께서 아브람을 이끌어 믿음이 되게 하셨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말씀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브람에게 주어졌기에 비로소 아브람의 “의”가 된 것이다(롬 1:17). 이런 점에서 신약에서 바울 사도가 이렇게 밝혀준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하늘에서 의가 와야 했다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의 의, 이 땅의 의는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땅의 것,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종교 행위들은 결코 의라고 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모든 종교 행위들을 배설물로 만들어 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7절)라고 하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아브람을 이끄셨다는 믿음의 여정을 표현한 말씀이다. 결국 아브람이 ‘믿음’으로 받아 들이도록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의’이고 이는 후손에 대한 약속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6-58)
아브람이 단순히 메시아의 날을 기대만 하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날을 보았다고 말씀한다. 후에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하였을 때 이삭 대신 수양을 번제로 드려 실제로 대속의 의미를 보았다. 아브람의 의가 여기에 있다. 후손에 대한 약속 안에 바로 여자의 후손, 메시아의 오심이 포함되어 있다. 후손에 대한 약속의 궁극적 성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갈 3:16). 그러므로 아브람이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은 것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주어져 아브람의 의가 되었고 그것이 곧 구원이고 생명이다(2023070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