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갱도의 의구심
진 나라라는 진자를 쓰는 상고시대에는 몇나라가 있을까
진나라는 중국 진시황 나라만 진자를 쓴 것이 아니다
고조선의 삼한인 진한 변한 마한중 진한도 진 나라라고 했으며 발해라고 불리는 대진국도 진 나라라고 하였다
의심이 드는 부분은
중국은 유적지 발굴시 바로 발표 안 하는 것이 이유다
최소한으로 아무리 빨리 잡아 발표해도 3개월 이상에서 몇 년이 걸리는 이유는 무엇 일까?
그것은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조작 후 발표하니 그런 것으로 또한 접근금지는 또 무슨 이유인가 ? ? ? ? ? ?,,,,,,,,,,,,
그리고 보면 중공당국에서 유독 한국인에게만 유적지와 유물과 책 등등에서 접근금지와 금서 시키는 곳이 아주 많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
접근금지 안하고 유적지 방문 시키면 들통이 나니 그런 것이다
한국인의 선조들에 유적이라 접근금지 시키는 것이지 아니면 접근금지 시킬 이유가 없다 바로 당장 자랑하지,,,,,
자랑을 못하고 조작하는 것이 증거다 중화족에 선조들에 것이면 숨길 이유도 없고 접근금지 시킬 이유도 없다 바로 당장 자랑한다.
단재신채호 선생님이 한국의 상고사를 정리한 “책 천고天鼓의 책이 북경대학 도서관에 있어 일련번호 5785 열람신청을” 했지만 천고 책을 구경은커녕 금서조취된 책이라고 하여 책 관람대여 열람 등 어느 것도 해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 것이 증좌로 중공에 역사서에서 기록되어 나오는 역사서내용전부를 의문부호를 가지고 봐야 합니다.
중국에서 대규모 피라미드가 발견 됐습니다.
“세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미국의 한 공군조정사가 발견한 피라미드 군략은 이집트의 기자피라미드 보다 거대하며 개수도 많아서 세계 고고학자들에게는 큰 충격을 준 바 있습니다.
문화대혁명이후 해당 피라미드군략의 발굴 조사가 진행 됐는데 안타깝게도 부랴부랴 중국정부에서 이 피라미드 발굴사업현장을 황급하게 덮어버리는 일이 발생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피라미드 군략은 한민족이 세운 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도 접근금지구역으로 그 부근 근처도 접근을 못하게 하고 있지요
고조선의 유물인 피라미드군략을 우리는 알고 있는지 신화다 역사다 논쟁만 하고 있는 사항의 수준으로 서는 역사를 찾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접근금지 금서 등등에 숨기는 동북공정의 이유를 안다면 그 진시황의 병마갱도가 의문점 많은 것을 숨기고 있음을 알게 되며 거 한번쯤은 의심을 하고 확인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병마용 갱도의 인물상의 모습이 “중국풍이 아니고 조선풍 이라는 것은 토기 인물상에 상투가 있어 고조선에 작품으로 보는 것이며” 옛적부터 지금의 이천십오 년까지 정도는 중국고전 무협영상물을 보면 전부다 상투가 없이 나온다. 그러나 동북공정 이후부터는 최근에 중국 무협영상물에서 상투가 10분에 2정도 같이 나오고 있다가 좀 더 지나서는 반수 이상이 상투를 하고 나오는 영상물도 있으며 중국은 아이가 상투를 틀고 어른 되면 상투를 안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우리에 상투정통성과는 반대로 해석하는 것은 상투문화를 파괴하는 행위로 문화말살음모인 거기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하며 병마용갱도의 진실성을 숨기기 위하여 조선은 상투라는 이미지 지우기 작업이 극에 달함을 느끼며 진시황의 병마용 갱도의 허구역사성을 감추기 위해 동북공정의 행동으로 지금은 조선풍도 같이 섞어서 영상물을 작업하며 가면 갈수록 조선풍의 인물상이 중국풍이라고 속이는 음모로 이제는 상투도 중국 것이다 는 동북공정의 마수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보니 중국영상물이 옛적에는 상투가 아예 없이 나오다가 동부공정 이후에 상투한 인물들이 자꾸 많아지는 이유는 뭘까 ?
그리고 보니 영상물 극중에서 진나라 병사와 백성들은 전부다 상투를 하고 나오는 것을 보면서 언제 바뀌어 홍보하는지 놀라움뿐입니다.
병마갱도의 비밀인 조선에 상투 때문에 거짓이 탈로 날 까봐 악착같이 중국영상물에 상투를 튼 극중 인물들이 계속 많아지는 현상이 병마갱도비밀에 음모를 숨기려는 의도가 엿 보이는 것 입니다
진시황은 6국통일후 15년 안에 멸망 했다 (진 통일기간 B.C 222 ~ B.C 206)
아무리 길게 잡아도 15년 안에 그리 큰 토목공사를 할 시간이 없어 보인다.
진시황의 30년 통치기간으로 길게 잡아도 토목공사 공사시간이 부족해 보인다.
일생을 통일전쟁으로 생을 보낸 진시황이 어떻게 그리 큰 토목공사를 할까 또한 통일후 15년도 못 넘긴 진나라에서 어떻게 그리 큰 공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진시황릉은 시안 북동쪽 30km 떨어진 린통취 여산 국가공원 북쪽기슭에 위치한 진시황의 묘로서 동서 485km 남북 515km 높이 76m의” 거대한 능도 진시황 죽고 겨우 4년 버티고 망한 진나라에서 완공이 가능한지 통일 기간 15년 가지고는 공사완공 기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거짓을 숨기기 위하여 변명하는 것이 왕위를 계승하여 통치시작하면서부터 공사시작으로 30년 여년정도 토목공사 기간이 걸린다고 변명하는데 의구심이 생기며 섭정기간 까지 계산하면 더욱 허구성이 보입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나에 무덤공사 거대하게 해야 해가 말이 되는지 거기에 지도상으로는 위나라 영토에 병마갱도가 표시 되어 보이지만 호갱이 시안이라고 말하니 표기된 지도와는 상이한 차이가 보이며 국경선 근처에다 병마갱도 공사를 한다니 상식에서 차이가 나고 그리고 병마와 군대를 키우기 위한 열정이 집중되는 시기로 국가의 존망으로 승리하기 위한 에너지의 집중이 제일 큰 시기에 다른 일도 같이 거기에다 거대한 공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봐도 말이 안 되고 역사서에서도 전쟁에 대한 일만 기록이 되어 있고 큰 공사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나중에 가서 장성정도로의 공사이야기는 나오지만 그 외 다른 큰 규모의 공사 이야기가 없다.
병마갱도는 규모가 진시 황 능 보다 훨씬 큰 규모로 서너 배 이상 가는 공사규모의 병마갱도는 어디에서 공사기간의 시간을 짜 맞추어 찾아내어야 속일 수 있는데 그 술수가 어떻게 변화 할지 궁금 할뿐이다
더구나 능과 병마갱도와 장성까지 큰 공사를 같이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지 15년 안에 큰 토목공사를 3개를 같이 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지 또한 15년 기간 가지고는 완공시간에 허구성이 보여 왕이 되고나서부터 통치기간 30년 안에 큰 공사 3개와 큰 전쟁을 같이 한다는 일이 가능성이 있는 일인지 그리고 어떻게 6국을 통합 할 수 있다고 미래를 예측 하고 대규모의 큰 공사를 미리시작 한다는 것에 궁금증만 커지며 병마갱도 공사기간이 38년 공사라는 것에 의문으로 38년도 안 되는 것으로 더 짧은 기간 안에 완공 이라는 것은 모순이 보입니다. (병마갱도 공사기간 :왕위계승부터 26년공사 + 황제즉위 9년공사 + 후계자가 3년 = 38년 공사기간)
그리면 13세에 왕위를 받았지만 조태후의 섭정에는 여불위가 있었으며 조태후의 애인인 환관노애의 반란을 진압 하면서 여불위 까지 제거하여 자립한 것이 22세로 그 후50세 까지 27년의 자주권을 가진 왕으로 보면 왕위 계승에 26년 공사가 17년 공사가 되어야 한다. (노애의 반란은 조태후와 노애에서 나온 자식을 왕으로 옹립하고 진시황을 폐위 시키려는 음모로 조태후가 제정이 파탄 나는 대공사를 승인한다는 것이 조태후 입장에서 가능 할까 ? 공사기간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가 얼마나 많으면 공사기간 까지 제시 할까 ,,,,)
그러면 38년의 공사기간에 9년의 허구성이 보이는 것이며 30년 공사기간 안 에 11년의 전국 통합전쟁은 30세 전후하여 전쟁을 시작하여 41세에 통합하고 9년 후 사망 한 것을 보면 전쟁과 함께 규모가 큰 대공사 여러 개를 같이한다는 것은 상식 면에서 수상함을 크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전국을 순행하며 국정의 업무를 보시다가 “210년 순행 중 사구에서 숨진 진 황제를” 보면서 통일 후 전국을 안정화 시키는 정리의 기간도 다하지 못하고 멸망한 진나라가 큰 공사를 완료 할 수 있는지 보통에 왕조를 보면 선조들에 공이 안정기에 들어서면 그 다음에 대통을 받은 왕이 치적을 기리며 큰 공사를 할 수 있다
그 수순도 지키지 못한 진나라가 큰 공사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서 어떻게 의 궁금증만 커집니다.
대진국의 명칭도 발해가 사용 했지 진시 황은 진이라고 사용하고 후대에 대진이라고 이름이 지어준 것뿐이다.
대동사강 (大東史綱) 권지일(卷之一) 단씨조선기(摶氏朝鮮紀)에서 경인년 개천 홍성제의 23년에 임금이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기고 국호를 진단에서 조선이라 바꾸었다 (1929년 김광 편찬 오진영 교정)
사고전(史庫傳) 청사고기(靑史古記)에서 무진원년조 개천홍성제 원년 겨울 10월 3일에 등극하며 국호를 진단 이라 정 하였다
조선의 별칭 = 진단, 진국, 진역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에서는 진단은 동방에 단군의 나라는 뜻으로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의 별칭으로 진단(震檀), 진국(震國), 진단(震旦), 진역(震域) 등으로 불렸다
또한 발해는 국호를 진국, 진단이라 하였다.
대진국의 발해도 진국백성이라고 하며 대진국이 망한 후 선조의 나라 고구리의 리자를 따서 려진인 이라고 한 사실과 고조선의 삼한의 하나인 진조선도 진나라 이라고 부르며 산시성 시안 린퉁구 원산원에 야산에 병마갱도는 삼한의 진조선 영역부분 안에 있으니 어쩌면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 까
단군조선 47대 단군왕조가운데 한 단군 천제왕이 순장의 풍속인 산 사람으로 생명을 죽이는 풍속으로는 안 하고 생명을 중히 여기는 사상으로 순장문화를 종식 시키고 사람 대신에 토기로 대체한 역사적인 일을 기념하기위하여 호기로운 한 단군 왕이 만든 병마용갱도 일수 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의 한, 조, 연, 위, 초, 제나라를 통합 한 것이지 중국대륙을 통일 한 것은 아닙니다.
통합을 대륙통일이라고 속이는 술수에 속지 마십시오.
또한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에 지역이 계속 동으로 동으로 이동하여 춘추전국시대의 지역이 계속커지면서 대륙을 접수하는 형상에 속으면 안 됩니다.
그 커지는 영역 안에는 우리에 삼국의 삶에 터전으로 있던 곳으로 사라진 역사의 터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