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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45강
출애굽기 20:18-26
흙과 돌 제단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형제에 대한 것임을 밝혀주셨다. 출애굽의 은혜를 입은 언약 백성들은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살인은 말씀이 낳은 생명을 깨는 것이고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를 깨뜨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 언약을 주심으로 율법에서 계시하는 진짜 남편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는 것이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율법적 행위를 아내로 삼아 우상 숭배하는 간음을 하는 자들이다. 또한 하나님을 도둑질하여 생명을 자기 소유로 취하는 자가 우리이다. 따라서 언약의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이 살인, 간음, 도둑질을 멈출 수 있다. 오직 이웃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짓 증언이 아닌 진리로 화답할 수 있고, 탐심이 아니라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의 온전한 집이 될 수 있다.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18절).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로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다. 진리의 완전한 열 말씀으로 말씀하시니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열심으로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것이었다. 열 말씀 앞에 이스라엘은 죄인으로 두렵고 떨림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말씀에 의해 죽음의 존재로 드러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19절). 언약의 완전한 열 말씀은 모세를 통해 주어지고 모세는 오실 메시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우리가 죽겠습니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죽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죽음에서 살려줄 모세와 같은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것이었다(신 5:4-5).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갈 3:19-20)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천사”라고 번역한 것은 신명기 33:2에서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신 33:2)라고 하신 말씀을 근거한 표현이다. 여기서 “성도”라고 번역한 말이 ‘코데쉬’로 ‘거룩한 자’를 ‘천사’ 즉 복음을 드러내는 존재로 표현한 것이다(행 7:53, 히 2:2). 결국 신명기에서 말씀하는 거룩한 자, 신약에서 표현한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여 복음을 드러내신 상태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중보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시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기 위한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20절). 결국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오실 언약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 가운데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 것이기 때문에 그 두려움이 두려움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이 은혜,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 믿음으로 이끌어 생명이 되게 하신다. 여기서 “부흥”이라고 번역한 ‘하야’는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을 말씀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주어질 것이라는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는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이 죄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거하게 되었음을 계시하는 것이다.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21절). “하나님이 계신 흑암”이란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표현한 것으로 “빽빽한 구름”(출 19:9, 16)을 가리킨다. 모세가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라는 말씀은 중보자를 예표하는 모세가 흑암 가운데 나아감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이 언약의 말씀의 완성이다. 그러나 아직 육의 이스라엘 현실은 멀리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22절). “보았으니”라는 표현은 눈에 보이는 사건으로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야훼의 말씀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야훼 자신을 위한 말씀이다. 그러나 육에 속한 자들은 듣는 귀가 없는 자들이기에 자신들을 위한 아래의 말로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의 강림은 사건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강림 사건을 말씀으로 들리고 보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23절)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로 보면 “신상”이라는 단어가 없다. 번역 과정에서 의역으로 넣은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은의 엘로힘, 금의 엘로힘으로 만들지 말라’라는 말이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은과 금은 예수 그리스도와 대비하여 없어질 세상의 것으로 말씀한다. 이 말씀은 이제 성막을 만들게 될 것인데 그것을 건립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막을 금과 은으로 만들게 되지만 그것 자체가 엘로힘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분명히 하고자 하신다. 그리고 갑자기 제단에 대하여 말씀한다. 곧 성막을 주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제단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24절). “토단”의 ‘미즈베아흐 아다마’는 ‘아다마’는 ‘흙’이라는 뜻이고, ‘미즈베아흐’는 ‘살육하다, 죽이다, 도살하다’라는 말의 ‘자바흐’에서 유래한 단어로 ‘죽이는 장소, 죽음이 담기는 곳, 죽는 곳’이라는 뜻이다. 즉 열 말씀은 희생제물의 죽음을 근거로 하여 희생제물의 죽음이 담긴 곳에서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번제”는 온전히 올려드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화목제”는 원수요 대적자로 존재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제사이다.
그런데 흙으로 만든 제단을 일회용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무너지는 토단으로 쌓으라고 하신 이유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행위로 제사를 하는 것은 온전하지도 못하고 영원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제사를 행하는 그 행위를 자랑할 수도 없고 공로나 업적으로 삼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토단 위에 올려지는 “양”과 “소”라는 제물은 사람의 노력과 정성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짐승과 같은 자신이 올려져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이라고 말씀하신다. “기념하게”는 ‘자카르’라는 단어를 썼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신다는 언약 용어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제단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시기 위해 주신 것이라는 뜻이다. 야훼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기억하신다는 것은 이 땅에 이름을 가진 존재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제단은 야훼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시는(자카르) 곳이지 사람의 이름을 자카르하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자카르하면서 제물을 바친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들어와 새기신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자카르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이 땅에 이름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 씨 가진 남자로 오실 것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제단은 희생제물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두신 곳으로 택하셨다(신 12:5, 21, 26, 14:23-25, 15:20 등). 그러므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 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0-14)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25절). 흙 뿐만 아니라 “돌”로도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다. 흙(히, ‘아다마’)과 돌(히, ‘에벤’)은 아담을 연상하게 하신 표현이다. 즉 흙에서 취한 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인간의 그 어떤 노력이나 공로가 개입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위적으로 무엇을 더할 것이 없다는 것을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한다. 다시 말해서 육의 제사는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열 말씀은 철저히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26절). “하체”의 ‘에르바’는 ‘벌거벗음, 나체, 수치, 부끄러움, 외음부’라는 뜻이다. “층계”가 있다는 것은 높은 곳에 있다는 말이다. 즉 제단을 높게 쌓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하체가 드러난다는 것인데 선악의 나무를 취한 아담의 후손을 낳는 수치스러운 죄악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계시하는 제단은 높게 하여 ‘죄인의 자기 살아남기의 욕망’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결국 열 말씀을 통해 주신 진리의 말씀 성취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베푸시는 은혜이다(2026021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