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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에 탄광선교30년을 돌아보며 쓴글이지만 김요한 주교님과 산업선교를 기리는 의미에서 이곳에 올립니다.
황지탄광선교, 그 후의 문곡교회
유명희 전도사 (테레사 문곡교회 시무)
*1991년 8월25일 성공회신문 300호
문곡교회를 아십니까?
문곡교회의 전 이름은 황지교회이다. 문곡교회는 80년 7월, 황지읍, 장성읍, 철암, 통리가 합쳐지며 태백시로 승격되어 행정구역으로는 ‘태백시 상장동’에 위치한다. 강원도에는 성공회가 춘천과 태백, 두 곳에 있는데 영동고속도로를 경계로 문곡교회는 대전교구에 속한다. ‘문곡’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75년인데 예로부터 이 지역을 부르던 호칭이다.
문곡교회는 65년 5월 16일에 황지 성 프란시스 성당으로 축성되어 올해 26주년이 되었는데 실제 성공회가 이 지역에 처음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은 그보다 3년 전인 62년부터이다.
강원도 산간지방 탄광촌교회가 30살이 되기까지 지내온 날들은 광산의 독특한 특성이 삶의 애환과 같이 그대로 배어있다. 탄광촌교회 30년 삶을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더듬어 보려는 것은 그것이 개척교회에 대한 관심과 새로운 선교현장에 대한 관심만큼 소중한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황지탄광선교 사업(1962년~1967년)
광부선교의 경험과 관심이 많은 김요한 주교님이 우리나라 광산지대인 황지에 탄광선교를 62년에 시작한 것은 한국교회의 선교에 분명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김주교님이 이 지역에서 하신 구체적 선교사업은 ‘광부들과 청소년 선도 계몽사업, 의료사업, 교육사업, 빈민구제사업’ 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성당 축성 전에 활동의 근거지는 ‘계몽의 집’이었다. 이 계몽의 집은 김주교님이 62년에 지은 한옥으로서 광부들과 청소년들, 이 지역 주민들에게 교육, 친교, 예배를 중심으로 그 외 모든 사업을 총괄하는 선교본부였다. 또한 광업소가 밀집해 있던 ‘소도리’에도 잠깐동안이지만 회당이 있었다.
의료사업은 교회에 있는 진료소에서 행하고 마을을 차량으로 다니며 무료로 진료하는 것이었다. 이 의료사업은 5.16 후 태백산지역에 국토건설단(삼청교육대와 같은)이 투입되어 새로운 산업도로를 건설하는 현장에 의약품을 지원 협력케 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태백산 지역 국토건설단 지단장으로부터 김주교님에게 수여된 감사장이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귀하는 영국인 선교사로서 당지단 예하 제30건설대에 귀중한 의약품을 보내 주시고 뿐만 아니라 누차 방문하시여 건설원의 건강을 보호 또는 사기를 앙양시켜 주심과 한국 경제 5개년 계획에 열원적 성원을 가해 주셨음으로·······. 62. 7. 1” 이때 만들어진 도로는 ‘황지에서 통리가는 길’, ‘소도에서 상동가는 길’ ‘소도에서 사북, 고한 가는 길’이다.
청소년 선도는 4H구락부를 조직하여 산간지대인 이 지역에 인접한 산을 계단식 경작지로 개간할 때 이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개간은 세 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는데 제1개간지는 문곡역 뒷산이고, 제2개간지는 화전의 앞덕(산이름), 제3개간지는 매봉산 천의봉(예수원 목장 뒷산)이다. 이를 개간할 수 있는 여건은 4H구락부의 인력과 주교님의 노력으로 한미재단의 480구호양곡인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를 많은 양 확보하여 노동한 주민들에게 댓가로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양곡배급은 교회에서 직접하지 않고 읍사무소와 동사무소를 통한 행정기구와의 연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60년 초에도 황지읍에는 중학교가 없어 장성까지 다녀야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에 접하여 주교님 사재를 털어 건물자재와 학교 부지를 구입하여 중학교를 설립하는 준비과정에서 문교부 관할이 되었다. 당초에 주교님은 1주일에 1시간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로 세우고자 의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황지중학교는 63년 3월에 개교하였고 66년에 황지고등학교가 설립되었는데 황지중학교와 태백 유일의 인문계 고등학교인 황지고등학교는 이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인재양성에 큰 몫을 맡고 있다.
젖소분양사업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인데 지금까지 25년간 지속되고 있는 사업이다. 이 곳 여건이 고산지대이고 주민들의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하여 젖소를 기르기로 착안하였다. 먼저 미국에서 보낸 10종류 풀씨를 심어 토질을 조사한 후 젖소 10마리를 64년도에 들여 와, 목장소유주이며 수의사인 김상규(현 72세, 안식교회 장로)씨에게 담당하게 하여 66년부터 분양하였다. 젖소 분양을 젖소관리위원회(회장 김상규)를 구성하여 분양받을 수 있는 자격으로 ‘목장이 있고 초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황지에 거주하는 자’에 한하여 젖소 한 마리(당시 분양가 100원, 현재는 15만원이다)를 임대해 주고 암송아지를 낳으면 새끼는 반납하고 어미소는 갖는 방법이다. 이 사업으로 한 사람이 적게는 한 마리, 많게는 4-5마리씩 25년간 분양받은 사람은 25명 정도이고 분양된 소는 60마리에 이르고 있다 한다.
이런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신학생들은 특수 목회실습으로 탄광에 들어가 노동을 통한 사목을 훈련받기도 하였다.
성직자로는 김주교님을 비롯 65년 관할사제로 부임한 하성근(누가)신부님과 여러 성직자, 전도사, 영국인 여선교사 등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선교사업으로 도움을 받은 주민들이 성공회를 고마운 교회로 기억하고 있으며 이 지역인사들도 성공회가 이룬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김주교님은 우리나라가 6.25를 겪은 후, 채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 들어와 빈곤에 허덕이는 우리의 실정을 잘 알고 있던 터에 5.16군사혁명정부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황지교회 축성일이 군사혁명 4년 뒤인 65년 5월16일이란 점에서 짐작된다.
석탄산업이 가장 활발해지던 시기인 68년도에 김주교님이 사임하시고 관할사제도 다른 교회로 전출되면서 황지탄광선교는 교회로서만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새로운 전환기, 예수원과 황지교회
황지교회는 68년부터 인접한 예수원 대천덕신부님 관리 하에 있게 되었다. 성직자, 봉사자들이 떠나고 모든 사업이 정지되고 난 뒤의 썰렁한 교회는 한 달에 한 두 번 미사를 드렸고 예수원에서 파견한 전도사가 맡고 있었다. 72년에 서병오(베드로)신부님이 관할사제로 부임하여 신명새마을재건중학교와 유치원을 약1년간 운영하였는데 74년 전출한 뒤부터는 계속 대신부님이 관할사제였다가 86년에 현재 주철주(예레미야)신부님이 관할사제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상주하는 목회자가 없어 교인들끼리만 미사없이 1년 가까이 예배를 본 적도 여러 번 있었는데 이럴 때마다 교회는 침체의 늪으로 떨어지곤 하였다. 이런 실정을 78년 10월부터 79년 11월까지 침례교회가 이사를 와서 성공회, 침례교 서로 다른 두 교단이 한 교회 안에서 공동예배를 드린 적도 있었다는 점은 이 교회를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전도사는 성공회신학원 출신인 박수철(어거스틴)전도사가 1년 넘게 있었는데 그 외 전도사들은 예수원에서 파견된 전도사들이 약 10여명에 이른다. 그도 그럴 것이 강원도 산간벽지에 단 한 군데인 성공회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다른 성공회 교회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보니 자연 가까이 있는 예수원으로 급할 때는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받는 처지가 오래동안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현재 축성된 성당이면서도 성막은 없어진지 오래이고 개역성경, 개신교 찬송가책을 더 사용하는 형편이다.
문곡교회는 지금 주신부님이 주일마다 예수원 목장에서 나와 주일미사를 집전하며 미사 참석 숫자는 15명 내외이고, 교인들 직업은 광업을 비롯해 자유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곳에서 일하던 신부님이나 전도사 등 모든 목회자들이 3년 이내에, 빠르면 몇 달 만이라도 이곳을 떠나가는 것이 기정사실처럼 되어왔다는 것이 이 교회 교인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또 한가지 사제관 역시 늘 비어있어 이 관리문제도 교인들의 고질적인 어려움이었다. 이런 문제들은 그간에도 몇 차례 “교회 문을 닫자” “성공회 간판을 내리자”는 등의 의견들이 거론되게 한 요인들이다.
선교 30주년 축성27주년 기념미사, 1992년 5월 17일 설교하시는 윤주교님
맨 오른쪽 회색양복 입은 분이 김상규장로님, 교회 뒷 벽에 황지탄광선교 사진액자들이 걸려있는 모습이 보인다.
당시 전국어머니연합회장이셨던 홍아가타회장님과 문세실리아부회장님이 사람들 사이에 보인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안애단신부님 어머님도 함께 하셨다.
그리스도의 소망을 찾는 교회로
문곡교회는 이 지역에서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 이 지역의 밥줄로 50여년간 지탱되어 온 탄광의 뿌리가 그대로 있고 여전히 탄을 캐는 탄광촌이기에 탄광선교로 시작된 이 교회의 사명을 지금도 그대로 이루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소망이 계셨기에 30년간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여 왔다고 본다.
광산지역은 농업이나 어업과는 또 다르게 참으로 독특한 지역이다. 그것은 광산 일이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기에 늘 불안함과 긴장이 온 몸을 조이듯 이 지역을 조여왔기 때문이다. 또한 석탄산업이 60년대나 70년대처럼 수요가 많지는 않으나 탄캐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광부들이 절반이 줄었을지언정 아직도 4만명이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 자체가 석탄 캐는 일로 모든 경제가 몇십년 동안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란 조치로 인한 석탄경기 침체는 이 지역 전체가 새로운 전환을, 그러나 암담하기만한 내일을 향해 몸부림 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가 해야할 일은 곳곳에 산적해 있다. 그러나 우선 우리 문곡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지역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다.
“탄광에서 수고하시는 우리 교우와 가족과 이웃들, 모든 근로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 주소서.”
“우리 교회에 주신 사명을 올바로 찾아 주님의 역사가 이 지역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기도로 준비하며 하느님께서 소망하시는 계획대로 이 교회를 인도해주실 것을 믿는다. 그것은 이 교회가 세워진 처음의 목적이기도 하다.
*추가하는 글
91년에 젖소관리위원회 회장을 지내신 김상규장로님을 만나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증언과 다른 자료를 참고해 보면 김주교님께서 고아를 양아들삼으시고 대성당 구내에 살게 하였는데 주교님 부재시에 누군가 내보냈다 하지요.
주교님이 돌아와서 크게 화를 내셨다 합니다. 그 소재를 수소문하다보니 국토개발단으로 강원도에서 있는 도로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해서 미 8군 헬기를 빌려타고 강원도 지방에 가서 보니 석탄이 보이는 황지였는데 거기에 내려서 그 지역 유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합니다. 그때 김상규장로님도 함께 만났던 분입니다. 주교님께서 자신을 소개하고 "내가 이 지역을 위해 도와주고 싶다, 무엇을 도와주면 좋겠느냐?"
하셔서 두 가지를 건의했다 합니다. 하나는 황지에 중학교가 없어 장성까지 다녀야 하는데 중학교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과 이곳 사람들의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서 영양보충을 위한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합니다.
그후 10종류의 풀씨를 보내왔는데 심어보고 이 지역 토질에 맞는 풀을 심기위한 것이었고 또한 그 풀에 맞는 젖소를 보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합니다. 그후 10마리 젖소가 통리인지 부산항인지 도착했다 합니다.
학교건설을 위해서 건축자재가 기차화물로 통리역에 도착해서 김상규장로님이 트럭이 있었는데 실어나르고 했다고 전합니다.
또 한 가지 사업은 양친회라 해서 우리가 아프리카 어린이와 후원자 간 1:1 결연을 하는 것 처럼 이 지역 빈곤한 가정 어린이와 해외 후원자간 결연사업을 했습니다.(그때 사진에 보면 후원받는 어린이가 약 60명 정도 되어 보였습니다.)
국토개발단에서 수여한 감사장이 문곡교회 다락에서 발견되어 액자에 넣어 교회 한편에 걸어놨었는데 그 아래 수여자 이름이 중령이었나 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계몽의 집 위치는 현재 태백교회 옆에 있는 학원건물 그 자리였다고 합니다.
문곡교회에 91년 3월7일 이사하고 27일 기념촬영한 필자, 성당 화재 전의 문곡교회
92년 12월 24일 성탄축하의 밤
오래동안 학생회에서 성탄을 준비하고 호소식을 하는 전통이 있었던 듯 스스로 준비해서 발표회를 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교회 안에 꽉 채우고 함께 즐거워하였다.
성탄 장식한 문곡교회, 희미하게 제가 보입니다.
93년 3월 달란트시장
학생회 소풍
필자가 2년 4개월간 사역 후 대전대성당 전도사로 떠나던 93년 7월 11일 주일미사 송별점심식사 준비하시는 신자 분들
(성당 안에서) 왼쪽부터 (지금은 고인이신 두 분 어머니) 에텔드레다어머니, 강애란 학생, 성클라라 어머니, 민헬레나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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