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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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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이야기) 스크랩 또다른 옥동서원 이야기
관보 추천 0 조회 142 11.12.15 19: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옥동서원(玉洞書院)
소 재 지 :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546
(원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546번지)
건 축 주 :  황맹헌, 황효헌 형제.
건축시기 :  1518년(중종 13)
사액시기 :  1789년(정조 13)
소 유 자 :  (관리자 : 장수황씨 문중)
문 화 재 :  기념물 52호, 1984, 12, 29일 지정

건축 배경
옥동서원은 황효헌 형제가 신덕리에 황희의 영정을 모신 영당을 건립하한 백화서당이 그 모태이다. 1714년에 사림들의 중론에 의하여 사서 전식을 배향하고 서원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 수봉리로 이건하였다. 1783년에 축옹 황효헌과 반간 황뉴를 추배하였다.
1789년 영남 사림들이 소를 올려, 조정에서 승지 박천형을 보내어 치제하고 옥동서원이라 사액하였다.
1889년에 목사 민종렬이 중수하였으며, 2004년에 강당인 온휘당을 수리하였으며, 다음해에 문루인 청월루를 중수하였다.

건축 특징
옥동서원의 진산은 만경산이며, 그 봉우리는 헌수봉이다. 황효헌 형제가 매년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헌수를 올려 사람들이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봉우리라 하여 이름 지었다 한다. 입구의 문루는 1층이 서원의 외삼문으로 회보문이라 하며, 2층 누각은 청월루라 한다. 양측에 딸려있는 온돌방은 진밀료와 윤택료라 하며 출입하는 외삼문 옆에 부엌이 딸려 있는 특이한 양식으로 누와 정이 결합된 조선 중후기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옥동서원의 첫째 건물인 경덕사는 맞배 기와집이며, 전면에 1칸 정도의 툇마루를 깔았으며, 묘우 내부와 툇칸도 우물마루를 깐 것은 다른 묘우와는 약간은 다르다 하겠다.

건축 구성
옥동서원의 구성은 문루인 청월루의 아래층인 외삼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강학 공간인 온휘당이 자리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양쪽에는 온돌방이며, 중간은 마루이다. 오른쪽 방은 탁장재이며, 왼쪽은 착로재이다.

강당의 뒤쪽 오른편으로 서원 향사 때에 제물을 보관하는 건물인 전사청이 묘우 담장과 연이어 남향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가운데는 우물마루이며, 양쪽은 온돌방이다.

강당 뒤편에는 묘정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삼칸 솟을 대문이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방촌 선생을 비롯한 전식, 황효헌, 황뉴의 위패를 봉안하고, 황희의 영정 모사본이 모셔진 묘우인 경덕사가 자리한다.

옥동서원의 전체적인 구성은 전면에는 강학 공간이며, 후면에는 향사 기능을 가진 조선 전기의 대표적 양식인 전학후묘의 양식이라 하겠다.

현판
경덕사(景德祠)
3칸 두리기둥 사이의 처마에 걸려있는 굵직하고 탄탄하며 그저 편안한 해서체이다. 사당의 이름으로 덕을 높이 여긴다는 뜻이다.
회보문(懷寶門)
옥동서원으로 들어가는 문의 현판이다. 청월루 아래의 외삼문 기능을 하고 있다.
청월루(淸越樓)
입구 누각의 가운데 처마에 걸려있는 행서체의 글씨이다.
옥동서원(玉洞書院)
서원의 주된 건물 가운데 하나인 강당의 처마 가운데에 게판되어 있다.
온휘당(蘊輝堂)
경덕사 앞 강학당의 현판이다.

내력과 기능

향사일
춘기향례(春期享禮) 음력 3월 상정일(上丁日)이고
추기향례(秋期享禮) 음력 9월 상정일(上丁日)이며,
국기일(國忌日)이나 유고가 있을 경우는 중하정일(中下丁日)로 늦춘다.

향례(享禮)

봄과 가을 두 차례 네 분을 추모하는 제사인 향례를 갖는다. 봄에 하는 춘기향례(春期享禮)는 음력 3월 상정일(上丁日)에 지내고 가을에 지내는 추기향례(秋期享禮)는 음력 9월 상정일(上丁日)에 지낸다. 향례 하루 전 제사를 지내는 유사들이 묘우의 청소와 제기를 씻어 놓고, 제물이 도착하면 제관들은 복장을 갖추어 성생례를 마치고, 주방의 각종 식기들이 정돈되어 있는가를 확인하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향례에 관한 연습을 한다.

제사 복식

향례 참가자들은 모두 예복을 입는데 헌관은 사모관대를 갖추어 입고 집사와 유사들은 재복이나 도포에 유건을 갖춘다.

배향위치

경덕사 신문 정면에 황희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오른쪽 동문 쪽으로 전식과 황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왼쪽의 서문 쪽에 황효헌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관련유물
- 영정 원본
방촌 황희의 둘째 아들인 황보신이 상주로 내려와 정착할 때 복사하여 온 영정 원본과, 1752년(영조 28)의 사본, 1844년(헌종 10)의 모사본, 1857년(철종 8)에 그린 모사본 등으로 현재는 원본 외에 3첩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관련인물

관련인물
- 주향자
- 황희(黃喜, 1363 ~ 1452)
조선 건국의 기초를 세운 분으로 처음 이름은 수로(壽老)이다. 자는 구부(懼夫)이며, 호는 방촌(?村)이다. 1387년에 급제하여, 이듬해에 성균학관이 되었으며,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에 벼슬이 올랐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선에서는 세자우정자, 사간, 대언 등을 역임하였으며, 1416년 이조판서로 양년대군의 세자 폐출에 반대하여 공조판서, 판한성부사로 체직되었으며, 1418년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이 되어 교하로 유배되고, 다시 남원으로 옮겨졌다.
1422년(세종 4)에 복직되고, 1431년 영의정에 올라 18년 동안을 재임하면서 농사법의 개정, 예법의 개정, 천첩 소생 천역면제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속육전, 오의례, 국조오례의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조선 명재상 중의 으뜸이라 불리운다. 세종대왕의 조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 전식(全湜, 1563 ~ 1642)
선생의 본관은 옥천(沃川)이며, 자는 정원(淨遠)이며, 호는 사서(沙西)이다. 전여림(全如霖)의 아들이며, 류성룡과 장현광의 문인이다.
158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에 참여하여 많은 공이 있었다. 김익남(金益南)의 천거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을 역임하였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貧寺直長)이 되었으나 사양하고, 160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 예조의 좌랑과 정랑을 거쳐 울산판관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는 낙향하여 정경세, 이준 등과 산수를 유람하여, 세상 사람들이 상사삼노(商社三老)라 칭하였다. 인조 때에 예조 정랑, 수찬, 교리가 되었으며, 이괄의 난에 태복시정(太僕寺正)으로 왕을 호종하였으며, 이귀(李貴)의 실책을 탄핵하고는 대사간, 대사성이 되었다.
1642년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가 되었다. 이후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좌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 황효헌(黃孝獻, 1491 ~ 1532)
선생의 자는 숙공(叔貢)이며, 호는 축옹(畜翁) 또는 현옹(玄翁)이다. 황희의 현손이며, 부사 황관(黃瓘)의 아들이다. 1514년(중종 9) 별시 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로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홍문관직제학,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1526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대사성, 황해도관찰사, 1528년 이조 참의와 이조 참판에 올라 이행(李荇) 등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32년 안동부사로 재임 중 임지에서 갑자기 요절하였다. 담론을 좋아하였고, 풍모가 귀공자 같았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뛰어났다.


- 황뉴(黃紐, 1578 ~ 1626)
선생의 자는 회보(會甫)이며, 호는 반간(槃澗)이다. 황준원(黃俊元)의 아들이다. 정경세의 문인이며, 1612년(광해 4)에 생원이 되고, 이듬해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16년에 승정원주사가 되었으며, 1626년(인조 3)에 지평이 되고 1626년 지평이 되고 이어 경성판관이 되었다. 관직 생활 중에는 거취가 분명하기로 정평이 났다.

* 관련인물

- 황희(黃喜), 황맹헌(黃孟獻), 황효헌(黃孝獻), 전식(全湜), 황뉴(黃紐), 채팽윤(蔡彭胤), 이증엽(李增曄), 정종로(鄭宗魯)

마을이야기

상주 > 서부권 > 모동면 수봉리
- 서원이 위치한 수봉리는 장수 황씨의 동족 마을로서, 중모천이 북에서 남으로 마을을 향해 흘러와 입구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백화산(白華山)과 만경산(萬景山) 사이를 흐른다. 이 마을의 이름은 모두가 정주학에 연유한 지명으로 일관(一貫), 오도(吾道), 신덕(新德), 동산(東山) 등으로 장수황씨의 세거지로 후진들의 교육을 위한 세심한 배려에 의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옥동서원을 건립하게 된 주체인 방촌선생의 영당인 백화서당은 서원의 정면인 중모천 건너편에 남향하여 있는 신덕리로, 학문에 전심하여 학문의 도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의 마을이며 이곳에 있던 영당을 사림의 중론에 의해 서원으로 승격시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우고 사액을 받았다.

서원 뒤쪽에 있는 진산은 만경산으로 산 정상의 이름은 헌수봉이다. 황맹헌, 황효헌 형제가 매년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헌수를 올려 사람들이 이 봉우리를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봉우리라 하여 이름이 헌수봉(獻壽峰)으로 바뀌었다 한다.

서원 앞으로 흘러와 왼쪽으로 휘돌아 나가는 중모천은 수봉리 앞에 이르러 만들어 놓은 깊은 소는 사담이며, 예전에는 마을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논과 포도밭으로 바뀌었다. 이곳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있으며, 바위에는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 없는 세심석(洗心石)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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