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에서 아시아 3대 상인으로 일본 오사카상인, 중국 온주상인, 조선 개성상인이라고 말하는 것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선의 2대 상인은 북의 개성상인과 남의 병영상인이라는 것은 정설이다.
‘병영상인’이란 이름에 낯설은 분도 있을 것이다. 병영상인은 조선의 자랑이었고 조선의 원동력이었다.
병영상인은 자본을 모으는 집중력이 탁월했고 우수한 상인을 선정해 그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병영성안에 있는 시장사람들이 아니라 국토전부와 중국 일본 동남아까지 규모를 넓혔다.
내가 이들을 주목하고 이렇게 언급하는 것은 이들이 조선시대 성공한 장사무리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철학과 실천력은 하나의 작품이고 우리의 자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병영상인들은 개인적 이익에 빠진 얄팍한 장사꾼이 아니라 이익을 공유하여 도로를 신설하며 과감하게 사회투자를 하였고 이익배분도 상인들만의 나눔이 아닌 지역사회 민초들에게 가게 하였다.
소비자 성공 없는 단발성 이익이 아닌 소비자가 유지되고 소비자가 생산되는 선순환을 만들었던 최고의 장사꾼이었다.
강진군 병영을 조금 설명하면 통일신라 장보고가 일본과 중국 코리아를 연결한 무역을 할 때 이곳이 그 무역을 지탱하는 본부였다. 병영상인들은 장보고를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또 하멜이 이곳 병영성에서 7년간 있었기에 병영면에 하멜기념관이 있다.
병영성은 사백년 이상 전라도와 제주도를 총괄하는 육군 총사령부였다. 그래서 이곳 이름이 병영이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가장 아끼며 전시에 도움을 받은 참모는 무의공 이순신장군이다.
무의공 이순신은 늘 충무공 이순신과 왜란 시 선봉에 서서 승리를 견인했고 이순신이 백의종군 등 어려운 길을 갈 때도 변함없이 동행했다. 술과 오락 즐거운 담소를 인도하고 무예가 뛰어난 무의공 이순신에게 충무공 이순신은 정신적으로 군사적으로 많이 의존했다. 무의공 이순신이 이곳 강진 병영성의 총사령관이었다.
병영은 지역으로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지점이고 중국과 일본 조선을 연결하는 삼각점이었다. 당시 이 곳 군인들은 자립형군인들이라 스스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 무기를 들여오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구입하였다.
이런 환경이 결합되어 이곳에는 상인세력이 이만 명이 있었다고 한다. 동학혁명군이 이곳 병영성을 장악함으로 병영성은 폐쇄되는데 병영상인들이 타격을 받지 않았던 것은 이미 병영상인들의 시장은 전국을 넘어 중국 일본 동남아이었기에 이들은 바로 흩어져 장사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병영 상인들이 어디를 가든 개성상인을 능가하는 성공을 했던 것은 이 병영상인들이 밑바닥부터 시작한 사람들이라 막연히 물건을 판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대응한 과학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밑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이 밑바닥은 나중에 보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병영상인들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주희춘님이 병영상인에 대하여 쓴 책 ‘장사의 기술’을 보면 전국적인 유통망, 효율적 관리, 과감한 투자, 겸손의 미덕, 광범위한 시장개척, 신용과 친절, 장사에 대한 근성이 그들의 성공요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곳에 병영상업고등학교가 있는데 상고들의 이름을 다 바꾸는데 이 학교는 병영상인정신을 이어받는 의미로 옛 교명을 쓰고 있다. 전에 병영상고에 초대 받아 학생들을 만났다. 눈빛이 달랐다. 집중력, 그리고 상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자부심이 든든했다. 철학이 기초가 되고 의미를 깊게 하는 것은 생존을 넘어 역시 경쟁력이다.
병영성 복원이 보기 좋다. 한양도성이 산책코스로의 복원이 아니라 이 병영성처럼 당당함의 복원이어야 함을 느끼게 된다.(사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