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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 부득인 인물이 두각을 나타낼 때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라는 중국의 속담이 있다. 분명히 시대의 흐름은 그 흐름에 편성하는 타입의 인간을 요구하는 모양이다. 안정된 평화의 시대에는 그 평온함을 수호해 주는 인물을, 그리고 격동하는 난세에는 그 격류를 진정시켜 주는 영웅을 요구한다. 이것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역사적인 사실로 흘러왔다. 피가 용솟음치고 육체가 약동하는 삼국시대에는 난세를 수습할 수 있는 풍운아를 찾고 있었다.
유비의 자는 현덕으로 후한의 연수 4년(161년)에 하북의 탁현에서 태어났다. 조조보다 여섯살 아래인 그는 편모 슬하의 가정에서 성장했고 짚신과 멍석을 짜서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가문에 대하여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나라 경제(景帝)의 아들 중에 중산정왕 유승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유승은 훗날, 탁현의 영주로 봉하여져 이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그 몇대 후손이 유비라는 인물이었다.
그의 집 정원 한구석엔 한 그루의 큰 뽕나무가 있었다. 높이가 10미터가 되는, 이 뽕나무는 가지가 무성하여, 먼곳에서 바라보면 마치 임금님이 타는 수레의 우산처럼 보였다고 한다. 뜰 앞을 지나쳐가는 나그네들은 걸음을 멈추고 뽕나무를 쳐다보면서 모두 탄복하여 말했다.
"이것은 보통 나무가 아니다. 이 가문에서는 틀림없이 고귀한 분이 나올 것이다."
유비 또한 어린 시절엔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우산이 달린 큰 수레를 타는 훌륭한 사람이 될거야."
15세가 되자 어머니는 유비를 서울인 낙양으로 유학을 보냈다. 거기에서 유비는 근위군의 학문 지도역을 맡고 있던 노식(盧植)에게서 기초적인 유학과 병법을 익혔다. 동문 수학한 친구로 산서 군벌의 장남인 공손찬이 있었다. 선생인 노식은 훗날, 황건적 토벌에 유비가 참여했을 때의 상관이며, 실직 중에는 유비는 물심 양면으로 공손찬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유비는 어렸을 때부터 보통의 아이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삼국지>의 편자 진수는 유비의 성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홍의관후(弘毅寬厚), 지인대사(知人待士)함은 고조(유방)의 풍격이 있으나, 기권간략(機權幹略)은 위무(조조)보다 미흡하다.'
즉, 침착하며 포용력이 풍부하고, 타인의 장점을 인정하는 데에는 한나라 고조인 유방을 연상케 하는 큰 인물의 모습이다. 반면, 지략이나 임기응변의 재능은 조조에게 뒤진다는 것이었다.
전국 난세의 당시로서는 지력, 무용, 재력, 가문 등등 어느 점으로나 유비는 특별히 눈에 띄는 데가 없었다. 오히려 좀 둔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 요령 부득의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막연히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 불가사의한 흡인력이 유비의 생애에 커다란 보탬이 되고 있는 점은 확실하다.
자신이 태어난 가문에 긍지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대성하지 못한다
유비가 한나라 왕실의 혈통을 잇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 역사적인 확증은 없다. 당시에도 평원령의 지사인 유평(劉平)과 같이, "황실의 혈통을 잇고 있다는 것은 허세에 불과하다. 전신은 하찮은 멍석 장수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라고 비난하면서, 유비를 죽이려고 덤벼든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자신의 가문에 관해서는 확고한 긍지를 지니고 있으면서, "멸망해가는 한나라의 황실을 다시 부흥시킬 수 있는 것은, 그 혈통을 이어받은 유비 이외에는 없다." 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와 평등 사상이 보급된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선진국의 비지니스 사회에서는 '왕실의 혈통'이라는 것은 그다지 큰 설득력이 없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며, 한 사람의 인간적인 가치는 상류 가정이라고 해서 높고, 하층 계급이라고 해서 낮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어떠한 가문의 출신이라 해도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상, 자신의 가문이나 조상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지고 존경의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출신을 숨긴다든가, 비뚤어지게 생각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극단적인 경우, 어느 정도의 재력이 생기고 지위에 오르게 되면, 출생이나 경력을 사칭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무리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려 들지만, 실제로는 인간적인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예전과 달라서 가문이나 혈통이 좋다고 과시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가문에 대해 자부심과 애착을 가지지 못하는 인간 역시, 절대로 대성하지 못할 것이다. |
2. 자신의 대망을 평생동안 변함없이 지속시킬 수 있는가 - 도원결의 젊은 날의 맹세를 소중히 여겨라 도읍에서 수년간 학문을 닦은 후, 유비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업을 돕게 되었다. 그 무렵 하북성 중산군에 장세평과 소쌍이라는 말을 취급하는 상인이 있었다. 전국시대의 말장수는 정부의 고관이나 각지의 호족들과 거래를 하여 돈을 많이 가진 부자였다. 이 두 사람의 말장수도 그러했다. 탁현의 시골로 말을 사러 갔을 때, 우연히 그곳에서 유비를 만나게 되었다. '이 젊은이는 장래에 훌륭한 인물이 될 것 같다.'라고 느낀 부자 상인은, 유비에게 많은 액수의 자금을 원조하였다. 유비는 그 돈을 독립 자금으로 사용할 작정이었다. 때마침,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치안을 유지할 힘을 상실하고 있던 한나라으 조정은, 각지에서 의용군을 모집하고 있었다. 유비의 고향 마을에도 모병의 팻말이 세워졌다. 어느 날, 유비는 이 팻말을 읽으며 무의식 중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옆에서 큰 소리로, "뭐냐! 시퍼렇게 젊은 녀석이 나라의 대란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다니, 한심스럽구나." 뒤를 돌아보니, 키가 하늘을 찌를만큼 큰 털보 사나이였다. "죄송합니다. 당신은 이 근처에 사시는 분인가요." "이 사람은 한나라 왕실의 혈통을 이은 유비라는 자올시다. 황건적이 설치고 다니는 것을 걱정하면서도 이것을 평정할 힘이 없는 자신을 한심스러워 하다보니 그만 한숨이 나온 것입니다." 완전히 의기가 투합된 두 사람이 마을의 술집에서 기염을 토하고 있으려니 또 한 사람, 불그레한 얼굴에 덩치가 커다란 사나이가 뛰어 들어왔다. "그 이야기에 나도 한몫 끼워 주게." 이 사람은 관우, 자를 운장이라 하며, 산서의 해량현출신, 무술사범을 하면서 각지를 유랑하다가, 토벌대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땅을 찾아온 것이었다. 서로 같은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세 사람의 젊은이는, 다음 날 마을에 있는 어느 과수원에 모여 복숭아꽃이 만발한 나무 아래에서 의형제의 인연을 맺었다. 유비, 관우, 장비의 세 사람은 여기에서 형제의 인연을 맺는 맹세를 한다. "우리들 삼 형제는 서로 협력하여 천하 국가와 만민 구제를 위하여 힘쓸 것이다. 세 사람은 출신 가문과 생년은 다르지만, 형제가 된 이상 앞으로는 고난을 함께 하며, 바라건대 같은 날에 죽기를 원함이로다. 천지의 신들이여, 굽어 살피소서." 24세의 유비가 맏형, 23세의 관우가 중형, 그리고 두 살 아래인 장비가 막내라는 순서로, 이제 세 사람의 의형제가 탄생하였다. 그로부터 30여 년간, 세 사람은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다니듯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면서 공통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오늘날까지도 중국, 한국, 일본 등 한자문화권의 나라들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보유하며, 천년 이상의 롱 베스터셀러가 되고 있는 것은, 첫째는 이 젊은 세 사람들의 맹세와 의리가, 변함없이 일관되는 자세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슬프기 때문이다. |
윗사람이 되어 거만하지 말고, 부하에게 대담하게 맡겨라
유비는 말장수로부터 증여받은 군자금을 밑천으로 하여, 수백의 사람과 말을 모아서, 한 무리의 부대를 만들어 이끌고 관군에 참여하였다. 황건적을 토벌하는 전투에서 유비 형제들은 눈부신 전공을 세워, 현위(지방의 무장 대장)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왕실의 혈통을 이은 사람치고는 (혹은 그 때문인지) 유비는 벼슬살이가 서툴러서, 벼슬을 얻었다가도 실직하는 일을 되풀이 하였다. 관료로서는 출세를 못했지만, 유비는 사람들을 거느리는 위치에 섰을 때 거만하지 않으며, 사소한 일들은 부하들에게 대담하게 맡긴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부하들이 그를 잘 따랐다. 모든 일에 있어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으며, 무언가 꼬집어 표현하기 힘든 매력을 지닌 이 사나이는, 상대방에게 경계심을 품지않도록 하는 불가사의한 인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가 어떤 곤경에 빠지면, 어디에서인가 모르게 구원해줄 사람이 나타나서는 이것저것 도움을 주었다. 먼저 이야기했던 부자 상인이나, 학우인 공손찬이 그렇고, 서주의 태수 도겸이나 형주의 군벌 유표도 이러한 부류이다. 도원에서 결의한 때로부터 10년, 유비 일행은 각지를 떠돌아 다닌 후 서주의 외성인 소패에 머물고 있었다. 서주의 장관으로 있던 도겸은 임종에 즈음하여, "유비님은 당세의 영걸이시다. 내가 죽거든 너희들은 그분을 영주로 모셔라." 라고 가신(家臣) 일동에게 유언을 남겼다. 다음 날, 서주의 백성들은 관청 앞에 모여 가신들과 함께 유비에게 태수로 취임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유비는 수고로움 없이 서주의 영지와 수천의 병마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격이었다. 운이 좋았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유비가 유례가 드물게 어진 임금으로서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그가 젊은 시절의 꿈과 맹세를 소중히 간직했기 때문이리라. 속세에 오염되지 않았던 시절에 품는 꿈은 아름답다. 훗날,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젊은 날의 순수했던 이상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도 매년 몇십만의 젊은이들이 사회의 현장에 뛰어들고 있다. "신선한 젊음들이여, 젊은 날의 꿈과 맹세를 배반하지 말라." 라고, <도원의 결의>는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
. 조조와 유비 중 톱으로서의 기량은 어느 쪽이 더 우월한가
- 조조와 유비, 영웅을 논한다.
한 번 배신한 자는 반드시 또 배신한다
한나라 흥평 원년(194년), 유비는 서주의 도겸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유비의 인품에 매료당한 도겸은, 임종에 즈음하여 영토를 양도할 것을 유언하였으며, 그 덕분으로 유비는 수고로움 없이 서주의 영주가 되었다.
그 무렵, 서주의 동남방 일대에 세력을 펼치고 있던 것이 원술이었다. 원술은 전국 옥쇄의 반환 문제로 강남의 손권과 대립하고 있었다. 전국의 옥쇄를 손에 넣은 원술은 제위에 오르기로 결의하고, 그 일을 위하여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그 첫번째 시작으로 서주로 눈을 돌렸다.
한편, 극악 무도한 동탁을 살해한 여포는, 그 공적과 용맹성으로 친다면 어디를 가나 당연히 환영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각지의 군벌이나 영주들이 상대를 해 주지 않아 몹시 애타는 심정으로 각지를 유랑하고 있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벗이 되는 일이 전국의 난세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양아버지와 주군, 두 사람을 살해한 여포의 절개없는 행각에 대해서는 야망에 불타고 있는 군벌들도 정떨어져 하고 있었다.
그 여포가 애첩인 초선과 얼마 안 되는 부하들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서주의 유비였다.
"유비님, 나도 당신도 시골 출신으로 특별한 후원자도 없이 고군 분투를 계속해 왔소. 나는 동탁을 살해하여 의로운 군인으로서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관동 지방의 여러 장군들은 차갑게 대할 뿐이라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소. 여기에서 당신을 만나게 되어 이렇게 기쁠 수가 없소. 좀 어떻게, 나를 당신의 진영에 넣어주지 않으시겠소."
하며, 여포는 타고난 교만성과는 달리 유비에게 머리를 숙였다. 유비도 내심으로는 여포의 무절조를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 야수 같은 녀석을 적으로 돌려 놓으면 득이 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건을 맞추어서 식객의 한 사람으로 집어 넣었다.
'전쟁터에서 펼쳐지는 여포의 강함은 발군인 점이 있다. 일단 유사시에는 무언가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포용력이 큰 유비는 가볍게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비의 의도는 완전히 빗나가서, 한 조각의 절조도 없는 이 야수에게 호되게 손을 물리게 되었다.
한나라 건안 원년(196년), 수춘(지금의 양주)에 본거지를 둔 원술이 서주로 침공해 왔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이끌고, 지금의 회음에 포진하여 원술군과 싸웠다. 유비군이 의외로 강한 데에 속이 탄 원술은 여포에게 밀서를 보내어 내통하기를 원하였다. 그 사례로서 좋은 쌀 20만 석을 증정하겠다고 제시하였다. 여포는 덩실거리며 기뻐하여, 식객의 신분임도 망각하고 유비의 본거지인 하비성을 급습하여 그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두었다. 앞뒤로 적을 맞게 된 유비는 하는 수 없이 여포에게 항복을 요청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여포 쪽에도 착오가 생겼다. 원술이 약속을 안 지킨다는 것은 옥쇄 사건에서도 증명되고 있듯이, 아니나 다를까, 원술은 약속한 좋은 쌀을 보내오지 않는 것이었다.
"저 사기꾼놈! 감히 나를 배반하다니."
자신이 배반하는 일의 상습범인 것을 잊어버리고, 여포는 불같이 노하여 화풀이 삼아 부대를 보내서 유비를 맞아들여 소패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여포 자신은 서주의 태수가 되었다. 결국 유비는 사람이 좋은 탓으로 '행랑채를 빌려주었다가 안채까지 빼앗긴' 셈이 되고 말았다.
대망을 품었거든 경거망동하지 말라
어찌할 방법이 없어진 유비는 허도에 있는 조조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원래 폭군이기는 했지만, 모든 일에 분명한 사리파단으로 일관하는 조조는 여포와 같이 무절조한 사람을 대단히 싫어 하였다. 영락하여 초라해진 유비의 일행을 조조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때, 중신인 정욱이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포나 원술은 하찮은 무리들이어서,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유비는 방심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장래에 반드시 주군님의 무서운 적수가 될 것입니다. 죽이려면 바로 지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조는 정욱의 의견을 물리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다만 한 사람이라도 영웅이 필요한 시대이다. 나를 의지하여 찾아온 영웅을 죽인다면 천하의 웃음꺼리가 될 것이다." 건안 3년(198년), 조조는 호북성의 장수를 멸망시키고, 그 여새를 몰아 남서쪽으로부터 서주를 공격하여, 드디어 숙적인 여포를 죽였다. 허도에 돌아오자 조조는, 유비를 좌장군으로 임명하고 이전보다 더 유비 형제들을 후대하였다. 그 무렵, 각지에 정보원을 파견하고 있던 조조는 원술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지금까지 손책, 조조, 유비, 여포 등과 싸워온 원술은 정세가 도무지 호전되지 않는 것에 싫증이 나서, 본거지인 수춘을 포기하고 서주를 지나 사촌형인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정보를 분석한 결과, 조조는 유비를 총대장으로 삼아 원술의 북상을 저지하기로 했는데, 그러나 결과는 어이가 없이 되어버렸다. 싸우기도 전에 원술이 서주를 눈 앞에 두고 진중에서 죽고 말았던 것이다. 조조는 산동, 하남, 안휘, 호북 등, 각지에 걸쳐 광대한 지역을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영토, 인구, 경제력, 군대의 정예함과 강도, 인재 등등으로 보아 그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원소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이처럼 조조는 헌제를 받들어 내외에 빛나는 실적을 올리고 있었는데, 반면에 이러한 성공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권력과 간사한 아부로 사람을 구슬리고 억누르는 조조와 같은 독재자는 결국 자기 편이 천명, 적이 천 명이다. 특히 황제와 옛 신하들의 눈으로 보면 조조도, 동탁도 모두가 본질적으로는 다를 것이 없는 역신에 불과한 것이었다. 유비가 원술을 정벌하기 위한 출발 준비에 분주한 무렵, 헌제는 처남이 되는 차기장군 동승을 접견하고, 작별할 때에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서 동승에게 주었다. 실은 이 허리띠 속에 조조를 암살하라는 밀서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밀서에 감동한 동승은, 몰래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조를 암살할 준비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가 기대한 근황(勤皇 나라와 황제를 위해 몸을 바쳐 일함)의 지사 가운데에는 한나라 황실의 혈통을 잇는 유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읍에서의 불온한 움직임을, 정보 기관을 쥐고 있는 조조가 모를 리 없었다. 그처럼 상태가 심상치 않은 무렵의 어느 날, 유비는 조조로부터 회식을 하자는 초대를 받았다. 설마 조조가 자신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선뜻 그 초대에 응하였다. 조조는 유비의 얼굴을 보자마자, "현덕님, 요즈음 당신이 있는 곳에 여러 사람들이 출입을 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조." "....." 조조의 의도를 잘 알 수 없었으므로, 유비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조조는 넓은 정원에 면해 있는 정자에서 유비에게 술과 안주를 권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날씨가 이상하게 변하여 검은 구름이 퍼져왔다. 그러자 조조는 검은 구름에서 용을 연상하였는지, "그런데 현덕님, 저 검은 구름을 보시오. 저 구름 속에는 반드시 용이 있을 것이오. 하늘을 나는 용을 인간으로 비유한다면, 천하를 다투는 영웅 호걸과 같은 것이지요. 당신은 여러 지방을 두루 돌아 다녔으니 많은 영웅들을 알고 있겠지요. 당신이 보아 장래에 천하를 잡을만한 영웅은 누구겠소." 유비의 입장으로 보면, 가장 방심할 수 없는 상대가 바로 눈 앞에 있는 인물이지만, 조조의 흉중을 좀체로 알 수 없었으므로 무심히 본심을 말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말을 안할 수도 없었으므로, 원소, 원술, 손책, 유표 등의 이름을 들어 보았다. 조조는 유비가 열거하는 이름들을 일소에 부치며, "그런 무리는 들먹일 필요도 없소. 영웅이란 가슴에는 큰 뜻을 품고, 뱃속에는 큰 계략을 숨기고, 하늘을 감쌀 기개와 땅을 삼키는 기량이 있는 사나이요. 지금 천하의 영웅이라 하자면..." 거기에서 잠깐 사이를 두고 유비를 응시하다가 손가락으로 유비를 찌르듯 가리키며, "결국, 당신과 나뿐이오." 요리에 손을 대려던 유비는 섬뜩해져서 엉겁결에 젓가락을 떨어 뜨렸다. 그 순간 굉음을 내며 천둥이 울렸다. "이것, 참으로 실수를 했소. 저는 천둥에는 아주 약해서 추태를 보였군요." 유비는 그렇게 말하며 그 순간을 적당히 얼버무렸다. "아니, 천하의 영웅도 천둥을 무서워 하시오." 조조는 입을 크게 벌리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현덕님, 당신은 대망을 품어신 몸, 소인들의 꾀임에 빠져 대국을 그르치지 마시오. 우선은 원술을 정벌하는 일이나 잘 하도록 하시오." 그 후에도, 유비는 동승을 비롯한 동지들과 조조의 암살 기회를 노렸으나 실행으로 옮기기 전에 전선으로 출발하였다. 결국 그가 없는 사이에 모반의 계획이 발각되어 동승의 동지들은 전원이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서주에 들어간 유비는 쿠데타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듣자, 공공연히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 이후, 유비는 허도로 돌아가지 않고 이전의 근거지였던 소패성에 주둔하면서, 조조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살피고 있었다. 예전부터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소의 하나가 자도자가 벌이는 정보 활동의 교묘함과 졸렬함이다. 고대의 가장 권위있는 병서 <손자>는 특별히 '용간(用間)'이라는 편을 만들어 전적으로 정보 공작을 논하고 있다. '상대를 알고 자기를 안다'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며, 그를 위해 톱이 된 자는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현대의 기업 전략에 있어서도, 정보 공작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1980년대 전반에 첨단 기술의 중심지인 실리콘밸리에서 발생한 기업 정보 누설에 관한 소송 사건은, 미국 첨단 기술의 경영자들이 기업정보의 수집과 방위에 얼마나 진지하게 매달려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권력을 쥔 자와 제자리를 얻지 못한 유랑자라는 처지의 차이는 있지만,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이 사건은, 정보 공작에 관해서 조조가 유비보다 한 수 위에 있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
4. 일생을 바칠만한 지도자의 매력 - 유비, 삼고의 예를 다하다 최고의 브레인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건안 5년(200년), 권세의 절정에 이른 조조를 살해하기 위한 음모가 발각되어, 주모자인 동승을 비롯한 일당이 모조리 처형되었다. 1년 전에 허도에서 도망을 나와 서주의 태수가 된 유비도, 실은 이 계획에 몰래 가담하고 있었다. 그것을 안 조조는, "유비녀석, 그렇게까지 주의를 주었는데도, 역시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니." 하고, 분노하였다. 원소와 대립하여, 일촉족발의 정세에 있었으나 조조는, '원소보다도 유비 쪽이 오히려 안심이 안 된다. 그놈을 지금 두들겨 놓지 않으면, 나중에 귀찮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병사를 인솔하여 서주와 소패를 공격하였다. 유비 쪽에서는 설마 조조가 몸소 공격해 오겠느냐고 방심하고 있었으므로, 군 전체가 모조리 붕괴되어 유비의 두 부인은 경호를 하고 있던 관우와 함께 붙잡혀 포로거 되었다. 유비는 원소를 의지하고자 도망쳤으며 막내인 장비는 서주 교외에서 산적이 되었다. 관도의 전투에서 유비는 원소 측의 별동대로서 허도의 남쪽으로 돌아가 유격 활동을 하였다. 관우가 식객으로서 조조의 측근에 있음을 알고 유비는 몰래 관우와 연락을 취하여, 드디어 그 일행들과 재회하였다. 원소가 패한 후, 건안 6년(201년), 유비는 호북의 형주로 옮겨 유표의 식객이 되었다. 계속되는 전란의 와중에 있으면서도, 형주는 그 전쟁의 화를 모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야망을 품은 수많은 영웅 호걸이 형주에서 식객 노릇을 하고 있었다. 유비와 그 부하들도 그런 부류였다. 식객 낭인의 선배격으로 사마휘라는 노인이 있었다. '수경'선생이라고 불리우는 이 노인은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녀서 인재에 대해서라면 상세히 알고 있었다. 수경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형세를 파악하고 있는 걸물은 좀처럼 해서는 드물다. 이 토지에서는 우선 복룡(伏龍)과 봉추(鳳雛)가 그런 걸물일 테지." "그게 누구입니까?" "복룡이란 제갈량을 말하고, 봉추란 방통(龐統)을 말한다." 그 후, 유비는 제갈량의 친우인 '서서'라는 인물을 만났다. 유비는 서서의 넓고 풍부한 식견에 탄복하여, 그를 참모로서 맞이하였다. 그런데 서서가 이렇게 말하였다. "저보다 훨씬 우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이 근방의 융중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제갈량입니다. 그는 대단히 우수한 사람입니다." 유비는 수경 선생의 말을 상기하였다. "좋다. 그를 데리고 오도록 하라." "아닙니다. 호출을 받았다고 해서 나올 사람이 아니올시다. 주군님께서 찾아가셔서 예의를 다해 초빙하지 않으면 출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비는 몸소 융중을 찾아갔다. 그리고 세 번만에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삼고의 예'이다. 그때 유비는 47세, 제갈량은 그보다 20세나 아래였다. |
'수어지교(水魚之交)'라고 할 수 있는 인재를 가지고 있는가 제갈량, 자 공명(孔明)은 원래 산동성 낭야군 출신이다. 제갈은 중국에서는 희귀한 두 글자로 된 성씨로, 그 일족들은 대대로 관리를 지내고 있었다. 산동 원주의 부장관이 었던 부친 제갈규가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는 숙부인 제갈현에게 맡겨져서 자라났다. 숙부가 전근을 하는대로 그 임지를 따라 각지를 전전했으며, 숙부가 사망한 후에는 호북성 양양의 서쪽 근교에 있는 융중이라는, 외따로 떨어진 촌락에서 청경우독(晴耕雨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갈량은 식견이 높아, "제대로 된 세상이라면, 나는 춘추시대의 명재상 관중이나, 전국시대의 명장 악의에게 견줄만한 일을 할 수 있다." 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로부터는 '분수도 모르는 촌뜨기 무사녀석'이라고 바보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다만, 친우인 서서와 몇번 만난 일이 있는 수경 선생만은, 그의 탁월한 전략 사상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제갈공명이 유비를 만나기 전까지 살았던 초려 (草慮)(좌), 유비와 뜻을 같이 하기전 제갈공명이 밭을 일구던 곳(우) 유비의 삼고의 예에 감동한 제갈량은, 이분이야말로 내가 평생을 두고 섬길만한 주군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정치적인 포부로서 '천하 삼분의 계'를 설명하고, 유비에게 새로운 독립국을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그 기개와 도량이 장대한 주장에 탄복한 유비는, 크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즉시 제갈량을 군사로 모셔받들고,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대우하였다. 유비가 신참자인 제갈량을 후대하는 것을 보고, 별로 좋지않게 생각한 관우와 장비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두 사람의 의동생을 불러다 잘 알아 듣도록 설득하였다. "공명과 나는 이를테면 물과 물고기 같은 관계이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군웅이 할거하고 있는 이 어려운 세상에서 살아 남아, 우리들의 이상을 달성시키기 위해서는 저러한 인재가 꼭 필요한 것이다. 아무쪼록 이해해주기 바란다." 두 사람은 그제서야 겨우 납득하였는지, 그 이후로는 불평을 하지 않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수어지교'라는 고사 성어의 어원이 이것이다. 유비는 봉추라고 불리우며 자를 사원이라 하는 방통도, 자신의 진영에 가담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현대 비지니스 사회에서는 리쿠르트 기관이나 학교의 추천도 있다. 우수한 인재를 채용할 기회가 많음으로, 톱 자신이 반드시 입사 시험에 입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신인 채용은 별개로 하더라도, 이렇다할 인재를 타사로부터 스카웃할 때, 또는 중도에서 보충할 때에는 톱 자신이 노리는 상대를 만나, 예를 다하여 권유할 만큼의 열의가 없으면 안 된다. 왜내하면, 어떠한 뉴미디어 세상이 오건, 첨단 기술의 세상이 되건, 기업에 있어서는 인재만이 최대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
5. 몸을 던져 싸워낼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 신야, 장판교의 전투 자기 자식보다 부하를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는가 건안 13년(208년) 봄, 형주에서는 당주인 유표의 병이 위중하여, 차남인 유종이 후사를 이었다. 이 사람은 아직 젊고, 더구나 무능하여 실권은 식객인 유비가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오환을 정벌하기 위한 원정에도 성공하여, 화북을 완전히 제압한 조조는, 드디어 시선을 남쪽으로 돌렸다. 그의 입장으로서 보면, 형주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유비가 몹시 마음에 거슬렸던 것이다. '건방진 멍석 장수 녀석, 이번 만큼은 용서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은 조조는, 7월 원정군을 편성하여 단숨에 남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유비는 신야라는 작은 성에서 조조의 대군을 도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습격하였다. 위나라 군대의 선봉은 조조의 조카인 조인이 이끄는 3만의 정예병이었다. 조인의 군대는 기마대를 선두로 하여 일제히 신야성으로 돌격하였다. 처음으로 작전 지도를 맡은 참모 공명의 지시에 따라, 유비의 군대는 신야의 성을 버리고, 주변의 언덕에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조인의 부대가 성 안으로 들어간 순간,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좁은 성안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아차, 속았구나." 조인은 퇴각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때는 늦어서 주변의 언덕으로 부터 유비의 군대가 공격해 왔다. 전방에는 불, 후방으로부터는 화살로 협공을 당해, 조인의 부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되었다. 간신히 본부대로 도망쳐온 병사의 보고를 받고, 조조는 노발대발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유비라는 놈이, 건방진 짓을. 이렇게 된 이상에는 내가 숨통을 끊어 놓고 말리라. 기다리라!" 조조가 본부대를 거느리고 싸움터에 도착했을 때에, 유비군은 신야를 뒤로 하고 철퇴하는 중이었다. 군대뿐이라면 상관 없겠지만, 신야성 안에서 살던 주민 수백 명을 이끌고 가는 터라, 지지 부잔하여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했다. 금새 조조의 기마대가 뒤를 쫓아왔다. "적군은 거치적거리는 비전투원을 거느리고 있다. 단숨에 몽땅 없애버려라." 라고 조조가 지시하자, 일제 공격이 시작되었다.
참모 공명은 조운과 장비를 맨 뒤편에 남기고, 본진을 우선적으로 도망하도록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밤이 되어, 적군과 아군의 구별도 못할 지경의 혼전이 벌어졌다. 맨 뒤편에 남아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던 조운, 자는 자룡은, 거의 한잠도 못 자고 전투에 임하였다. 창끝은 너덜너덜 이가 빠지고, 도대체 적을 몇명이나 죽였는지 자신도 모르는 지경이었다. "아이고 조자룡 장군, 덕분에 살아 났습니다." "적에 사로잡힌 사람이 또 있는가?" "뭐? 부인께서..." "예, 미씨 부인과 어리신 아두(阿斗)님이십니다." 조운이 급히 달려가 보니, 낡은 우물가에서 유비의 부인인 미씨가 주군의 외아들인 아두를 안고 쓰러져 울고 있었다. "부인, 어서 이 말을 타십시오." "아, 조장군, 잘 오셨어요. 어서 이 아두님을 주군님 계신 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적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어서 이 말에..." "아니오, 나는 이 몸으로는 도저히... 그것보다는 그대는 말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할 것이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이 아이를..." 마침, 그때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던 조조는 번개같이 달려가는 적의 기마병을 보았다. "어떤 놈이냐! 저 놈을 잡아라." 하고 조조가 소리를 쳤을 때는, 조운은 장판교의 목전에까지 와있었다. 다리 옆에 서있는 장비를 향하여, "장장군, 뒷일을 부탁하오." 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는 얼른 다리를 건너서 강 건너편에 있는 유비의 본진으로 뛰어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유비 앞에 엎드려 조운이 외쳤다. "주군님, 유감스럽게도 부인은 구출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급히 갑옷을 헤치고 보니, 놀라웁게도 아두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지 아니한가. 조운의 손에서 갓난아이를 건네받은 유비는 급히 위엄과 예의를 갖추고, "이 바보 녀석, 너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둘도 없는 용감한 장수 하나를 잃을 뻔 했구나!" 하며, 짐짓 과시하는 듯한 태도로 어린아이를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경극에 나오는 이 광경은 관람자들의 갈채를 받으며, 관중이 감격하여 울게 만드는 긴요한 부분으로, 유비라는 어진 군주가 얼마나 부하를 소중히 여겼던가를 잘 말해주는 장면이다. |
죽을 고비를 벗어나려면 필사적으로 대처하라 한편 조운에게서 인계를 받은 장비는, 일장팔척의 창을 들고 혼자서 장판교 다리 위에 버티고 서있었다. "뭐야, 저놈은." 하고 조조의 장수 두 명이 장비에게로 돌진했으나, 그 긴 창의 일격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아아..."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위나라 군대의 병사들 사이에서 들려왔다. 그곳까지 쫓아온 조인, 이전, 하후돈 등 여러 장수들도 장비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놀라 말을 멈추었다. 거기에 달려온 조조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자네들, 왜 여기에 멈추어 서있는 것인가." 그러자 다리 위에서 장비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연(燕) 땅의 장비다. 내로라 하는 녀석이 있으면 나와보라!" 위나라 군병들은 이 목소리에 기가 질려 주춤거리게 되었다. 장비는 적군이 술렁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창을 바싹 당기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녀석들아! 덤빌 텐가, 도망칠 텐가, 분명히 하라." "뭣이라고? 겨우 한 녀석밖에 없는 주제에." 하며, 장수들이 달려들려고 하니 조조가 그것을 저지하였다. "참아라." 조조는 전에 안량과 함께 문추를 정벌하였을 때에 관우를 칭찬하니, 관우가, "정승님, 강하기로 말하면 이 사람의 의동생인 장비 쪽이 훨씬 위입니다. 장비는 싸움터에 나서기만 하면, 적의 목베기를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처럼, 아주 간단히 해치우는 사나이입니다." 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하였다. 과연 강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방금 전에 사람이 없는 들판을 달려가듯 활약을 했던 그 적장이 관우라든가, 장비라든가, 유비란 녀석은 좋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군.'라고 조조는 감탄하였다. "됐다. 지금은 일단 물러가도록 하자." 조조가 철퇴한 것은 눈 앞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있는 장비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용사를 죽이는 것을 아깝게 생각한 것과, 강 건너에 복병이 있을런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운과 장비의 분투에 의해서 유비의 본진은 위나라 군대에게 붙잡히지 않고 도망쳐, 피할 수가 있었다. 조운과 장비 두 사람은, 자신의 몸을 내던져 주군 일가를 구했으며 자신들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전법이라는 것은, 결국 사지를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된 셈이었다. |
6. 신뢰하는 일, 신뢰받는 일로써 사람은 크게 된다. - 백제성에서의 유언 일체를 맡길 수 있는 심복이 있는가 이릉에서의 전투에서 패한 후, 유비는 장강 상류에 있는 백제성으로 피신하여 재기를 도모하였다. 승승장구로 추격해온 육손은 백제성 못 미쳐 백 리쯤 떨어진 곳에서 군대를 정확하게 정지시켰다. 오나라 국내는 전승 기분으로 들떠 있었다. 막료의 여러 장수들은 한결같이 손권에게 상신하였다. "전선사령관인 육손 장군은 어째서 진격을 멈추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단숨에 유비의 맥을 끊어 놓아야 합니다." 손권은 급히 사람을 보내어 육손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육손은 이렇게 회답하였다. "백제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간단하오나, 이 이상 진격을 하면 이번에는 아군과 적군과의 전략적인 입장이 반대 상황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적군의 영토이며, 보급에도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또 이 이상 전진하면, 적의 참모인 제갈량이 나설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전략의 귀재이기 때문에 무서운 상대입니다. 한편 북방에 있는 위나라의 움직임에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사람은 진격을 멈추고 있는 것입니다. 제반 정세로 보아, 지금은 오히려 철퇴하여 후방의 방어를 굳게 해야 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손권은 육손의 진언을 받아들여, 전군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육손이 깊이 추격하지 못한 것은, 공명이 고안한 '팔진지도(八陳之圖)'를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이 '팔진지도'는 병법 칠서인 '이위공 문대'에도 나와 있는 비법의 전술로서, 여덟가지의 진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갈량은 이 비술로써 오나라의 육손과 위나라의 사마중달을 격파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실제로 오나라 군대가 백제성의 바로 앞에서 진격을 중지한 것은, 지휘관인 육손의 전략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을 게다. "당신은 위나라의 조비나 오나라의 손권보다 현격하게 뛰어난 인물이시오. 우리 촉나라를 안정시켜서 천하 통일의 대업을 성취할 힘을 가진 사람은 당신밖에 없소. 공명이여, 내가 죽은 후에 황태자인 유선이 보좌할 만한 인물이거든 육성시켜 주시오. 만약 그럴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되거든 서슴없이 당신이 대신 제위에 오르도록 하시오." 하고 뒷일을 당부하였다. 너무나 감격한 공명은 목이 메어 울면서, "폐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불초 제갈량은 어디까지나 수족같은 신하로서 충절을 다하여, 죽는 일이 있더라도 보필하겠습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죽기 전에 뒷일을 당부하고 있다. 이때, 히데요시는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모리 데루토모, 우에스기 카게가쯔, 우키다 히데이에 등 오대 노신을 머리맡으로 불러놓고, "히데요리(秀賴)를 잘 부탁하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원하였다. 유비와의 태도와는 전혀 다르지만, 섭정까지 했던 독재자가 수치도 체면도 없이 오로지 부하에게 간원하는 것은, 인간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며, 부모된 사람으로서는 자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역사가 중에는 이때의 유비의 말이 너무나 훌륭하므로, 이것은 책사가 곧잘 쓰는 잔꾀이며, 이렇게 해둠으로써 공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라 하겠다. 자식들에게 남긴 유서를 보더라도, 유비는 진심으로 공명을 신뢰하였으며,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
전면적으로 신뢰받은 사람일수록 강한 우군이 된다
유비는 또 성도의 자식들에게 이런 유서를 보냈다. -아버지의 병은 처음에는 가벼운 것이었으나, 그후 여러 가지 합병증이 발생하여 이제는 회복될 가망성이 없어졌다. 인생 50세까지 살았으면 단명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물며 아버지는 60여세, 만족한 생애였으며 원망할 일도 후회할 일도 없다. 단지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너희 형제들의 문제뿐이로구나... 악한 일은 작은 것이라 해도 행해서는 안 되며, 선한 일은 작은 것이라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인생에 있어서는 '현명함과 덕망'이라는 두가지 품격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다. 아버지는 덕망이 모자랐다. 이 아버지를 배워서는 안 된다. 고전을 많이 읽고 틈이 있으면 공부에 정진하여, 끊임없이 향상되도록 하라.- 마지막 임종시에 유비는 머리맡에 차남인 노왕(魯王)을 불러놓고, "아버지가 죽거든 너희 형제들은 정승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섬기도록 하여라. 무슨 일이든 정승의 말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라고 유언하였다. 공명에 대한 유비의 신뢰가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리더쉽의 중요한 점은, 믿을만한 부하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일이다. 신뢰가 없으면 우정도, 애정도, 충성도 성립되지 않는다. '무사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만 죽는다.'라는 말도 있듯이, 인간은 전면적으로 신뢰받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면, 그 사람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법이다. 유비의 사후 십수년, 공명은 2대째의 유선이 어리석은 군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러 번에 걸쳐 원정을 시도하며, 촉나라와 유선을 끝까지 지키는 데에 일신을 다 바쳤다. 이것은 오로지 유비의 신뢰와 베풀어 준 후대에 보답하기 위한 충절심이었다. '믿을만한 신하를 전면적으로 신뢰하고 일체를 맡긴다.' 여기에 '어진 군주'로서 칭송되는 유비의 진면목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7.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 맹획을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풀어주다. 적의 심리를 알아야만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유비가 죽은 후, 촉나라 2대째의 황제가 된 아두(阿斗 유아 때의 이름)는 자를 공사라고 하였다. 영제인으로서도 정치가로서도 큰 업적을 이루었던, 일본의 다카사끼 다쯔노스케는 이렇게 말한바 있다. "이대째는,하나는 신사이고, 둘은 인색하고, 셋은 비전이 없고, 넷은 사람을 신용하지 않고, 다섯은 담력이 없다." 이 말로 미루어서는 이대째는 보잘것이 없다는 말인데, 공평하게 보아, 이대째라 하는 사람 중에는 모양만은 번지르하지만, 배짱도 인정도 없는 사람이 적지않다. 중국어에서 '아두'라고 하면 '멍텅구리 이대째'라는 뜻이다. 유선이라는 이대째의 후주는 일정한 주견이 없고, 머리도 나쁘며, 배짱도 없는 사람이었다. 촉나라에서 대를 이어 군주를 섬기는 신하들은 모두가 그를 바보로 취급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제갈공명만은 선왕의 당부를 받들어 음으로 양으로 철저하게 감싸고 돌았다. 공명은 유선을 보필하여, 첫째로 나라 안의 조정을 정비하였다. 선대가 살아있던 시기에 행해진 여러 해에 걸친 원정으로, '천부(天付 천국)'라고 불리웠던 이나라도 완전히 피폐해 있었다. 공명은 농업을 장려함으로써 식량을 확보하고, 세금의 감면과 행정개혁을 실시하여 재정을 안정시켰다. 이 때문에 촉나라의 총생산량은 상승되었고, 백성들의 생활 형편도 좋아졌다. '의식생활이 풍족하면 예절을 알고, 의식 생활이 부족하면 영욕을 안다.'라고 한 '관자'의 말도 있듯이 생활이 안정되니 촉나라의 백성들은 정부와 군주를 신뢰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평화를 노래하며, 밤에는 문 단속을 하지 않고 자고, 길가에 떨어진 물건을 아무도 줍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라 안의 정치가 안정되자 정승인 공명은 비로소 눈을 밖으로 돌렸다. 숙적인 위나라와는 언젠가는 싸워야할 터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촉나라의 주변을 완전히 견고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오나라와의 관계는 소강 상태에 빠져 있었다. 더구나 손권의 성격으로 미루에 이쪽에서 침략을 하지 않는 한, 저쪽에서 먼저 공격해 올 걱정은 거의 없었다.그보다는 촉나라 남쪽의 국경지대가 걱정스러웠다. 그 당시, 촉나라의 남쪽, 즉 지금의 운남에서 월남에 이르는 지역은 민족이 다른 나라로서 '남만'이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촉나라 건흥3년(225년), 남만왕 맹획이 반란을 일으켜 촉나라 남쪽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정승 제갈공명은 손수 군대를 거느리고 반란군을 제압하러 나갔다. 성도를 출발할 때, 참모인 마속이 먼길을 머다 않고, 수십리나 전송을 했다. 호북성의 명가인 마씨에게는 우수한 아들들이 있었다. 모두 병법에 능통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우수한 장남 마량은 새하얀 눈썹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똑같이 우수한 무리 중에서도 특별히 걸출한 것을 '백미(白眉)'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속은 마량의 친아우로, 공명이 평소부터 총애하고 있던 청년장교였다. 마씨 형제는 유비를 따라 촉나라로 들어갔으며, 형인 마량은 몇해 전에 이릉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전송을 나온 마속에게 공명이 물었다. "자네와는 오랫동안 작전 계획을 의논해 왔는데, 자네 같으면 이민족(異民族)을 통치하는 데에는 어떤 정책을 쓰겠는가?" "남만은 중앙에서 먼 데다가, 험한 산세로 격리되어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진압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또 떨어져 나갈 염려가 있습니다. 그 걱정을 없애기 위해서는 여자들까지 모조리 죽이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만, 설마하니 그렇게는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촉나라는 인(仁)을 모르는 나라라고 몰리게 될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나." "황송합니다만은 대체로 전쟁이라는 것은 적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 상책이고, 성이나 영토를 빼앗는 것은 하책이라고 봅니다. 적지의 안심을 수렴하는 것이야말로 적의 땅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좋은 정책입니다. 남만의 땅에서는 이민족을 마음으로부터 설복시키는 정책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가장 우선 되어야 할 것은 덕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것
총사령관 제갈량, 대장 조운, 부대장 위연 등으로 구성된 촉나라의 원정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곧 남만왕인 맹획을 사로잡았다. 공명앞으로 끌려나온 맹획은 대담하게 말하였다. "이곳 월휴(越携)의 땅은 선조 대대로 우리 일족의 영토다. 너희들은 무단으로 남의 땅에 쳐들어와서 우리를 보고 모반자 운운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적반하장 격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러면 이렇게 생포되었어도, 우리 촉나라에는 신하로서 굴복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냐?" "물론이다 허를 찔리지 않았으면 잘못되어도 네놈에게 붙잡힐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풀어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준다면, 다시한번 승부를 가리러 올 것이다. 정면대결을 하여 나에게 이기면 그때는 아무말 없이 너에게 항복할 것이다." 공명은 웃으면서, "좋다 그 기상이 가상하니 풀어주기로 하겠다." 석방된 맹획은 병력을 다시 정비하여 공격해 왔다. 초전패배에 질렸는지, 이번에는 신중을 기하며 좀처럼 육박전에 응하지 않았다. 촉군의 선봉은 위연으로, 이사람은 장비같은 타입이어서 용맹 과감한 것은 좋으나, 저돌 맹진하는 편이므로 남만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어 너무 깊이 진입하였다. '이거 뭔가 잘못 됐는데..'하고 되돌아가려고 했을 때, 남만군의 반전 공격을 받았다. 이날의 남만군들은 등나무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다. 촉군 병사의 칼이나 창은 종래의 갑옷에는 효과가 있지만, 끈적끈적한 기름을 칠한 등나무제의 갑옷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더욱이 남만군의 병사는 몸동작이 빠르니, 무거운 갑옷을 입어 동작이 느린 촉군은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쳐 돌아온 위연에게서 보고를 받은 공명은, "그래 알았다. 내일의 전투에서는 불을 준비하라." 다음날, 촉군은 전투 경험이 많은 장군인 조운을 지휘관으로 하여 맹획에게 도전하였다. 조운은 미리 기름과 마른 풀을 휴대한 별동대를 복병으로 잠복시켜 두고, 맹획군을 그곳까지 유도한 후 일제히 불을 붙였다. 기름을 칠한 등나무 갑옷은 불에 약하다. 순식간에 남만군은 섬멸되고 대장인 맹획은 또다시 생포되었다. "어떠냐,남만왕,항복하겠나?" 공명이 묻자, 패배한 억울함에 분통이 터지는 맹획은, "화력 공세의 전술을 쓸 줄은 몰랐다. 그렇지 않았으면 질 이유가 없는데, 개개의 병사를 비교하면 우리 군대가 훈련도 잘 되어 있고 훨씬 강하다." "그러면 다시 한번 해볼테냐?" 공명은 재차 맹획을 풀어주었다. 이런일을 되풀이하여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에야 맹획은 굴복하였다. "정승님께는 졌습니다. 앞으로 남쪽지방의 사람은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언제까지라도 신하로서 복종할 것을 맹세 합니다." 이렇게하여 남방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평정되었다. 공명은 각지의 통치는 전부 지역의 왕에게 맡기고, 촉군의 군사는 한명도 주둔시키지 않기로 했다. 막료 가운데에는 반란이 재발될 것을 우려하여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공명은 그 반대를 물리치며 이렇게 말하였다. "군대를 주둔시켜 놓으면 양식을 보급하는 것이 큰일이다. 그리고 이 지방의 사람들은 이민족의 주둔군에 대해 절대로 마음을 열지 않으므로, 반드시 반발이 생겨서 언젠가는 저항이 일어나게 된다." 이리하여 촉나라 군대는 전부 철수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수십 년간, 촉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이 지방에서 반란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에서의 완전한 승리는 적의 진지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굴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더욱이 휴먼릴레이션이나 리더십의 문제가 되고 보면, 이 점은 한층 더 분명해진다. 폭력이나 권력, 혹은 돈의 힘으로 상대나 부하를 굴복시켜도 참다운 해결은 되지 않는다. 거기서 반드시 반발이 생겨나고 배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덕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것이 모든 것에 우선 되어야 할 가장 좋은 대응책이라고 말할수 있겠다. |
8. 간담을 서늘케 할만한 행동력을 지니고 있는가 - 사마중달의 신속한 작전 주군에 대한 사모의 정이 넘치는 출사표 '중원을 수복하여 한나라 왕조를 다시 부흥시킨다.'라고 한, 선제 유비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정승 제갈공명의 과제였다. 그는 이 과제를 달성시키기 위하여 몇해에 걸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남방의 반란을 평정하고, 나라 안의 정세도 안정되었으므로 촉나라의 모든 체제는 견고하게 다져졌다. 한편 위나라에서는 황초7년(226년), 문제 조비가 40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태자 조예, 자 원중이 뒤를 이어 즉위하니 명제라 칭하였다. 톱의 교체로 위나라에서는 아직 체제가 갖추어지지 않고 있는 데다가, 더욱이 동부전선에서는 오나라 군대와 작은 충돌을 되풀이 하고 잇었다. 오나라와 손을 잡고 위나라를 협공할 절호의 찬스가 도래한 것이다. 드디어 북벌 원정을 위하여 출발할수 있는 국면이 마련되었는데, 공명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젊고 더구나 범용하기만한 새 제왕 유선이 후방에 남아서 정치를 잘 처리하겠느냐 하는 문제였다. 건흥 5년(227년), 제갈공명은 대군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한중으로 진출하여 주둔하였다. 출발하기에 앞서 그는 주군에게 상주문을 올렸다. -신량이 말씀을 아뢰옵니다. 선제께서는 대업을 성취하지 못하시고 중도에서 타계하셨습니다.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누이고, 익주는 피폐해져 위급한 시기입니다. ......중략....... 신은 원래 평민으로서 스스로 남양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지러운 세상에서 적어도 천수나 다하려 생각했을 뿐, 제후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선제님께서는 저의 비천함을 꺼리지 않으시고, 존귀한 몸을 낮추어 굽히시고, 신의 오두막집을 세 번이나 찾아 주셨습니다. 이에 신은 감격하여, 결국 선제님을 따르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때마침 국운이 위태로워지고,전쟁에 패하여 어려군 지경에서 임무를 받았습니다.그로부터 21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선제님께서는 신의 근직함을 아시고 돌아가실 즈음에 신에게 나라의 큰일을 당부하셨습니다. ......중략....... 신은 입은 은덕에 감격해 마지 않으며, 지금 먼 길을 떠남에 있어 표문을 올리려 하니, 눈물만이 흐르고 더 드릴 말씀을 찾지못하겠나이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출사표'이다. 유비와의 만남으로부터, 백제성에서 유언으로 나라의 일을 위촉받은 일을 말하고, 자기로서는 선제의 신뢰와 후대에 보답함을 일생의 임무로 삼고 있는 심정을 토로하는 동시에, 톱으로서의 마음가짐과 나라안의 인사, 행정, 군사에 걸쳐 세밀한 의견을 일일이 아뢰고 있다. 공명으로서는 살아서 돌아오기 힘든 원정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만큼 어리석은 유선을 돌보는 정성이 엿보이고 있으며, 눈물 없이는 읽어내려 가지 못할 주옥같은 명문장이다. |
방침이 정해지면 즉시 행동으로 옮겨라
한중으로 진출하여 주둔한 공명에게는 성취될 만한 가능성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상용의 태수 맹달을 포섭하는 일이었다. 상용은 형주의 북서쪽에 있는 군사적인 요지로, 거기로부터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중이고 내려오면 형주의 삼각 지점은 양양에 이른다. 위나라와 촉나라를 연결하는 중요한 기점이며, 쌍방에게 있어서 꼭 차지해 두어야만 할 땅이였다. -그대는 예전 촉나라의 신하가 아니었던가. 문제 조비가 죽은 후의 지금, 위나라에는 그대를 이해해 줄 사람이 없다. 위나라에서의 장래성이 없음을 안 이상, 옛 보금자리로 돌아와야 할 것이 아닌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옛날 이상으로 후대할 것을 약속하겠다.-라고 공명은 밀서를 보내어 응하기를 권하였다. 마침 그때에, 형주 전체의 사령관을 맡고 있던 사람이 표기장군(기동부대의 책임자)인 사마의였다. 사마의는 하남성 온현의 명문 출신이다. 8형제가 모두 수재였으므로 이 지방에서는 '사마가의 팔달'이라고 칭송받고 있었다. 그형제들은 모두 달(達)이라는 자를 쓰고 있었으며, 차남인 의(毅)가 '중달'이다. 인재발굴에 열심이었던 조조에게 발굴되었는데, 병법에 정통한 그는 급속도로 두각을 나타내어, 지금은 위나라 왕조에서도 뛰어난 장군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맹달에게 반역의 움직임이 있다는 정보를 포착한 사마중달은 토벌군을 준비하였다. 그러자 장수들이, "맹달이라 해도 지금은 우리 위나라 사람입니다. 이번은 명제에게 정보를 보고하는 데에 그치고, 좀더 태도를 지켜보는게 어떻겠습니다." "아니다. 맹덕은 한조각의 신의도 없는 놈이다. 지금 처치하지 않으면 적에게로 넘어간 후에는 늦는다." 하고 단호히 물리쳤다. 즉시 출발한 사마중달이 거느리는 기동부대는 불철주야로 말을 달려, 거성인 원(苑)에서 맹달이 있는 상용까지 약7백 킬로의 길을 불과 8일만에 주파하여 당도하였다. 한편, 맹달의 측에서도 사마중달의 움직임을 살피고 잇었다. 맹달은 공명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 사람은 정승님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사마의도 이 사람의 마음을 알아챈 모양입니다. 그 자는 위나라의 왕에게 허가를 받은 다음에 공격해 올 것입니다마는, 도읍지까지 왕복하는 것만으로도 한달은 걸릴 것이고, 그로부터 출발하면, 여기에 도착하는 것은 빨라도 한달 반 후일 것입니다. 또한 중달이 손수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 사람은 방위 준비를 굳게 하겠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성문 밖에 사마중달의 군대가 나타난 것을 발견하고는 맹달은 기겁을 할 만큼 깜짝 놀랐다. "마치 신령의 솜씨 같구나!" 방위의 준비도 전투의 준비도 갖추지 못해, 전의를 상실한 맹달은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사마중달은 맹달의 목을 베고 상용을 점령하였다. 작전의 방침이 결정될 때까지는 각 방면에서 면밀히 정보를 수집하고 신중히 검토하지만, 일단 결정한 이상에는 신속 과감히 실행한다. 이것은 비단 전쟁뿐만이 아니라, 평소의 모든 업무수행에 있어서도 극히 중요한 것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자유 경쟁의 원리에 입각하여, 각 기업이 격전을 벌이고 있다. A기업에서 생각하는 것은 B기업이나, C기업에서도 언젠가는 연구된다. 영업상의 노하우에서도, 첨단 기술에서도, 기업계에서는 장기 독점이라는 것이 있을수 없는 법이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실행 단계에서는 주저하며 망설이고 있으면, 어느새에 남에게 추월당하고 마는 것이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성공한 경영자들의 공통점은 업무의 집행이 신속 과감하고, 그 위에 다소의 곤란이 있어도 절대로 녹초가 되어 주저앉지 않는다는 점이다. |
9.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신상필벌레 철저하라 - 울면서 마속을 베다 사활을 결정하는 요소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위나라 내부에 호응하는 세력을 만들려던 공명의 작전은 맹달의 죽음으로 인하여 좌절되었다. 그리고 그 공명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위나라를 구한 것이 사마중달이다. 사마중달은 상용에서 급히 도읍으로 달려가 명제를 배알한 후, 독단으로 저지른 일을 사과하였다. 사마중달을 신뢰하고 있던 명제는 책망을 하기는커녕, 그 신속한 조치를 칭찬하여 정서도독으로 임명하여, 한중까지 진격해온, 공명의 군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건흥 6년(228년) 봄, 한중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명은 눈이 녹기를 기다려 10만의 장병을 거느리고 위나라의 영지 안으로 침공하였다. 한중에서 사마중달의 본영이 있는 장안은 야곡이라는 골짜기의 지름길로 지나서 가면, 열흘이 채 안 걸리는 거리이다. 전에 조조가 한중으로 출정했을 때에도 이 지름길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공명은 이 좁은 골짜기로 가지 않고, 크게 우회하여 기산으로 진출하였다. 그것은 탄탄대로였으나, 배 이상의 거리이다. 신중한 공명은 적의 매복병을 경계하여, 골짜기의 지름길을 피하여 감히 먼 길을 택했던 것이다. 기산을 지나, 천수를 건너, 가정이라는 요충지를 점령한 공명은, 이곳에 병참기지를 설치하였다. 가정은 이 지방 산물의 집산지이며 교통의 터미날이기도 했다. 가정에서 동쪽으로 나아가, 드디어 장안을 향하여 진격하러 하고 있을 때, 사마중달의 방위군이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사마의는 작전에 능통한 사람이다. 반드시 별동대로서 우리 군대의 병참 기지가 있는 이 가정을 공격해 올 것이다." 라고 공명은 작전회의 석상에서 말하였다. "그렇다면 출격을 중지하고, 여기에서 적을 요격할까요." 하고 대장인 강유가 말하였으나, 공명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아니다. 예정대로 출격하자. 여기에는 3만의 병사와 똑똑한 지휘관을 남겨 두면 된다. 누군가 가정을 수비하는 데에 나설 사람은 없는가." 그러자 금방 대답이 들려왔다. "이 사람에게 맡겨 주십시오." 참모인 마속이었다. 공명은 그쪽을 바라보며, "가정은 우리 군대의 중요한 병참 기지이며, 만약 여기를 잃게 되면 전선의 부대는 보급에 곤란을 겪게 된다. 그대는 병법에는 정통하고 있으나 실전경험이 부족하다. 누군가 경험이 풍부한 장수가 함께 하지 않으면 좀 불안하다." "외람되옵니다만,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병서와 참하였고 무술 십팔번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이 좁은 가정을 지키는 것쯤이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부디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사마의는 보통 평범한 장수가 아니다." "사마의라고 해도 인간인데, 그리 대단하기야 하겠습니까. 만일 실패하는 일이 있을 때는 참형에 처해져도 이의가 없습니다." "그래..." 평소에 총애하고 있던 수재인 마속이 그렇게까지 말하므로, 공명은 그만 그를 믿고 방심하고 말았다. "좋다. 그만한 각오라면 그대에게 맡기겠다. 실전에 밝은 왕평을 부장으로 부쳐줄 터이니 모든 것을 잘 상의하여 행하라." 다음 날, 공명은 가장 신뢰하고 있던 강유 장군을 선봉으로 하여, 장안으로 출발하였다. |
'울면서 마속을 베는' 그런 용기를 지니고 있는가
그런데, 가정의 외곽에는 큰 산이 있어, 그곳에서는 가정의 마을은 물론이거니와 길거리 연선도 잘 조망할 수 있었다. 마속은 이 산에 진을 치려고 하였다. 부장인 왕평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평야부의 거리를 제압하는 지점에 진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마속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리석은 짓이다. 이 산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요새다. 병서에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길하다.'라고 써 있지 않는가. 위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오면 돌격하여 내려오자. 그렇게 하면 적을 몰살시킬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무리하게 전체 군대를 산 위에다 야영시켰다. 아직 젊은 마속은 너무나도 교조주의적이었던 것이다. 장안으로 향하는 도중에서 마속이 패했다는 보고에 접한 공명은, 보급선이 단절될 것을 우려하여 전군을 후퇴시키고, 손수 3만의 기마병을 인솔하여 또 하나의 병참 기지인 서성으로 급히 향했다. 사마중달이 그곳을 급습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후, 이 전투가 일단락되자 공명은 한중에서 군법회의를 열고 마속을 심사하기에 이르렀다. 마속의 책임은 대단히 컸다. 그러나 총사령관인 공명은 평소부터 특별히 총애했다. 더구나 그 당시, 촉나라에는 군사적인 인재가 모자랐다. 이러한 비상 사태에 마속과 같은 우수한 인재를 잃는다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막료들은 어떤 징벌이 내려질까 하고 주목하고 있었다. 설마 엄벌에 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바와는 달리, 공명은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마속의 목을 벤 것이었다. 처형이 실행되자 전군의 장병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자세를 바로 하였다. 이처럼 공명은 아끼던 마속을 처형함으로서, 후방에 있던 정적들로부터 냉혹한 인간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냉정함만으로 군대가 통솔되는 것도 아니었다. 군율을 지켜야 할 때는 타협을 불허하는 공명이지만, 부하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두텁고 따뜻하였다. 처형을 할 때에 공명과 마속 사이에는 이런 말이 오고 갔다. "지금까지 정승님은 저를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셨습니다. 소인 역시 정승님을 친아버지처럼 흠모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정승님으 손에 죽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 사람이 죽은 후 가족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대의 가족은 나의 가족이나 같다. 걱정말고 죽음의 길에 오르면 된다." 처형이 끝나자, 공명은 마속의 시신을 정중히 매장한 후 그의 유족들에게 많은 금품을 수여하였으며, 계속하여 유족을 돌보아 주었다. 촉나라 사람들은 공명의이 따뜻한 배려를 알고 모두 감동하였다. 군대, 기업, 국가 등, 조직체라고 이름이 붙은 모든 것의 톱에게 있어서 리더십의 원칙이라는 것은, '신상 필벌' 이외에 없음을 말한다. 이 원칙에 충실한 톱은 리더십에서 성공하며, 적당히 얼버무리는 톱은 반드시 실패한다.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운 일본의 마쯔시다 코노스케(松下幸之助)는 그의 <경영어록>중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세상이 좋아지는 것도 나빠지는 것, 신상 필벌을 적절히 행하는가 어떤가에 달려있다. 지금은 그것이 명확히 실행되지 않고 있다. 꾸짖어야 할 사람을 칭찬하고, 칭찬해야 할 사람을 꾸짖는 일이 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는 회사 운영에 있어서나 어떤 일에 있어서나, 인간의 공동 생활에 있어서는 신상 필벌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상 필벌이라는 것은, 중국의 한나라 시대에 나온 말이라고 하는데, 영원한 진리를 간파한 귀중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도 이것을 잘 실행하고 있는 회사는 대개 번영하고 있다. 신상 필벌의 적정성이라는 것은 일국의 문화의 척도가 되기도 하고, 번영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만큼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10. 진퇴양난에 빠지더라도 당황하지 말라 - 공명이기에 할 수 있는 공성지계 어째서 소수 정예의 조직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제1차 기산 원정에서 실패하고, 가장 아끼던 부하 마속을 잃은 후, 공명은 잠시 한중에서 부대를 정비하는 데에 노력을 쏟았다. 공명은 패전의 원인을 분석하였다. 병력, 장비, 훈련도라는 측면에서는 촉군 쪽이 우수했는데도 패퇴한 것은, 가정에서의 실패라는 국지적인 전투의 성패뿐만이 아니라, 총대장인 자신이 군대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여, 모처럼의 대군을 유효하게 운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원정을 함에 있어서는 쓸데없이 대군을 동원하기보다는 소수 정예의 기동부대를 구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공명은 특수 훈련을 쌓은 부대를 조직하였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레인저 부대이다. 그리고 이 정예 부대의 지휘관에는 공명의 뒤를 이어, 촉나라의 최고 사령관이 된 용맹한 장수 강유를 임명하였다. 그해 가을, 위나라의 형주 방면 사령관인 조휴가 오나라의 육손과 싸워 참패를 당하고 조휴까지도 전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좋아한 것은 오나라의 손권이었다. 즉시 유선에게 서신을 보내와, 자기네 군대의 대승을 선전하는 동시에 촉나라에서도 위나라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중에서 이 정보를 얻은 공명은, 당장에 성도으 유선에게 출진의 상주문을 보냈다. 이것이 세칭 '후 출사표'이다. 이 상주문에서 공명은, 당시 촉나라 국내에서 번지고 있던 원정 반대론을 비판하고, 지금이야말로 선왕 이래의 숙적인 위나라를 쳐야만 할 때라고 역설하였ㄷ라. 공명에게 머리를 못 드는 유선이 반대할 리가 없다. 출진은 곧 허락되었다. 이렇게 해서, 공명은 세번째로 기산에 진주하게 된다. 공명이 또다시 진격해 왔다는 소식을 듣자, 위나라에서는 방위사령관을 다시 사마중달로 바꾸었다. 공명은 오나라의 육손과는 다르다. 일찌감치 총력을 기울여 두들겨 놓지 않으면, 장안은 물론이고 도읍인 낙양까지 위협을 받게 되었다. 명제의 신뢰와 백성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게 된 사마중달은 불과 3일만에 출진 준비를 갖추고 곧 전선으로 향했다. 출진함에 있어서 사마중달은 촉군의 진격 상황의 정보를 세밀히 분석했다. 분명히 적은 기산을 돌아 장안으로 쇄도해올 작전인 모양이다. 기산에서 위수를 건너는데 성공한다면, 나중에는 무인지경을 가듯이 곧장 장안으로 들이닥칠 수가 있다. 따라서 요격하는 위나라 병력은, 위수의 남쪽 연안에 진을 치고 물가에서 적을 공격하는 방법이 가장 좋을 것이다. 거기까지 계산하고 나서, 사마중달은 팔짱을 끼고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가만...' 전선에서 들어온 정보 중의 하나에, 촉군의 소수 부대가 양평관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사마중달은 이 정보에 구애받고 있었다. 이 별동대는 분명히 정찰과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 부대로서, 절대 주력 부대가 아닐 것이다. 혹은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촉군의 장군 가운데에서도 신진이며 감각이 날카로운 강유는, 특히 야전에 능통한 사람이다. 전술적인 밀고 당김은 당대에 드물게 보는 용장이며, 공격부대의 지휘관으로서는 다시 없는 인물이다. 강유는 양평관에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공명은 정보 수집을 중시한다. 평범한 총사령관 같으면 주력 부대에 있겠지만, 그 사람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사마중달은 손으로 무릎을 쳤다. '공명이란 작자는 필시 양평관에 있을 것이다.' 사마중달은 전 부대를 동원하여, 양평관으로 급히 달려갔다. 막료가, "사령관님 위험합니다. 양평관에 있는 적은 우리를 유도하기 위한 속임수일지도 모릅니다." "속임수라도 상관없다. 제갈량만 처치하면, 그 후에도 두려울 것이 없다." "그렇지만 과연 제갈량이 양평관에 있을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아니다. 반드시 있다." 사마중달은 부하의 반대를 물리쳤다. |
'공성지계'-어떠한 난국도 임기응변에 따라 극복할 수 있다
열흘 후, 사마중달이 이끄는 위나라의 대군이 양평관으로 밀려들었다. 그 도착 직전에 정찰대로부터 위나라의 병력이 전방 2킬로 지점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공명에게는 그것이 위나라 군대의 주력 부대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공격군의 주력이 기산에 있다는데, 방위군의 주력이 이곳으로 올 리가 없다. 정찰병이 적의 병력을 과대하게 본 것일 게다.' 그러나 계속하여 들어오는 보고는 똑같은 것이었다. "분명히 위나라 군대의 주력 부대이며, 구름 같은 대군입니다. 동그라미 안에 '毅'라고 쓰인 깃발을 든 기마부대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동그라미에 '의'라는 글자가 쓰인 깃발이라면, 사마중달의 친위대가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명은 사태의 중대성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사마중달이 손수 출동한 것으로 보아 적의 병력은 수 만이 넘을 것이었다. 이쪽은 비전투원을 합해도 5천이 안되고, 기산의 본대에 지원군을 요청한다 해도 급한 상황이라 제때에 맞추어 질 수가 없다. 이래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 "정승님, 중과부적이라 맞수가 안 됩니다. 얼른 철퇴하도록 하시지요." 하고 막료와 참모들이 떠들었지만 공명은 침착한 목소리로, "당황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도망도 갈 수가 없다." 공명은 성 밖에 있던 모든 부대를 즉시 성 안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크고 작은 깃발들을 모두 거두어 들이며 성문과 망루에 있던 병사들을 내려오도록 하였다. 사방의 성문을 활짝 열어 놓고, 도로를 깨끗이 청소하였다. 이윽고 저 앞쪽의 길에 위나라의 기병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성문이 보이는 곳까지 달려온 사마중달은, 이 이상한 마중 광경에 깜짝 놀라 병력을 멈추게 하였다. "아버님, 성문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있는 자는 분명히 공명이올시다. 저자는 어차피 이길 수 없는 것으로 각오를 한 것일까요." 하고 옆에 있던 차남인 사마소가 하는 말을 들으며, "음..." 하고 사마중달은 골똘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공명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아니다. 제갈량은 무의미한 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성을 빈 집처럼 하고 있지만, 반드시 어떤 복병이 숨어있음에 틀림없다. 지금은 후퇴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날 밤, 촉군은 어둠을 타고 뒷문으로 하여 철퇴하였다. 이 '공성지계'는 제갈공명과 사마중달이라는, 당대 두 명장의 허허 실실의 밀고 당김으로 유명한 이야기이다. 스토리가 약간 공명을 두둔하고 있는 감이 없지 않으나, 통신 수단이 원시적이며, 정보 수집의 방법이 유치했던 시대의 일이고, 특히 상대가 제갈공명이다 보니, 사마중달로서도 신중한 위에 더욱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전쟁에 오산은 따르게 마련인 것과 진퇴양난에 처했을 때에도, 일군의 우두머리가 된 자는 당황하지 말고, 냉철히 대처하면 반드시 길은 열린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에피소드인 것이다. |
11. 하늘이 준 기회를 확실히 살려라 - 진창과 호로곡의 전투 성을 함락시키고 보니, 안에 또 하나의 성이... 기산에서 본대와 합류한 공명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위수의 북쪽 연안에 있는 진창성을 포위했다. 진창성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사마중달이 비장의 무기로 여기고 있는 학소였다. 학소는 태원 출신의 무장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으로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성의 외곽에 도달하자, 공명은 곧 작전회의를 열었다. 막료들은 이구동성으로 속전 속결을 주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청년 장군인 강유는, 즉시 성을 공격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위수의 남쪽에는 사마중달이 이끄는 적의 주력군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군대가 이곳 진창을 점령하면, 적군은 강을 건너지 않고, 북쪽 연안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여 북쪽으로부터 장안을 공격할 수가 있습니다. 한시 바삐 진창성을 함락시켜야만 합니다." "음, 분명히 그렇기는 하지만..." 공명은 잠시 생각한 후에, "성을 지키고 있는 학소는 전쟁에 능숙한 사람이다. 성 안에는 식량도 충분히 있을 테고, 힘으로 밀고 들어가면 적의 저항이 심할 것이다," 그래서 공명은 같은 태원 출신이며, 더욱이 학소와 어릴 때에 친구였던 사람을 찾아내어 성 안에서 항복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성주인 학소는 촉군에서 파견된 옛 친구에게, "나는 사마중달님에게서 큰 은덕을 입었으며, 그 기대를 걸머지고서 이 성을 지키는 몸일세. 항복이라니, 당치도 않는 소리다." "그렇지만 중과부적 아니겠나. 승산이 없을 것이야. 모처럼 우리 정승님이 온정을 베풀고 계시니 허세부리지 말고 투항하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네." "자네의 말은 고마우나 사적인 정과 대의는 별개일세. 나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으니 돌아가서 제갈량에게 전해주게. 언제든지 공격해 오라고." 학소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투항을 권고하는 일이 소용없는 것인 줄을 알자, 공명은 즉시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촉군은 먼저 긴 사다리를 사용하였다. 소방수가 쓰는 사다리차의 일종으로서, 당시로는 진귀한 과학적인 무기였다. 몸소 성벽 위에 서서 방위전을 지휘하고 있던 학소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촉군이 긴 사다리를 동원해 온 것을 보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불화살을 쏘도록 하였다. 나무와 대나무로 엮어 만든 사다리는 불에 약했다. 위로 올라가고 있던 촉군의 병사는 모조리 불에 타 죽었다. 사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자, 공명은 성벽보다 높은 망루를 짜서 거기로부터 성 안쪽으로 활을 빗발같이 쏘아대었다. 이것은 제법 효과가 있었으며,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푹푹 쓰러졌다. 그 사이에 공명은 위차라고 부르는 성문 돌파용의 수레를 사용하였다. 그토록 두꺼운 성문도 위차가 내뿜는 커다란 철추에 의해 파괴되었다. 학소는 성문이 파괴된 것을 보자 전군에게 퇴각명령을 내리고, 전에 만들어 두었던 내성으로 도피하였다. 성문을 깨뜨리고 돌입한 촉군은 성 안에 또 하나의 성벽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당시 중국의 성으로서는 내,외벽이 있는 것은 드물었으며, 사전의 정보에서도 이런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
쌍칼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하나의 칼만 보라
"음, 학소란 놈, 대단한 짓을 하는군." 공명은 감탄을 하면서, 이번에는 굴을 파고 밑으로 기어들어가 공격하는 작전을 취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는 안 될 것이라며, 학소는 옆에서 굴을 파고 들어가 공명이 파는 터널을 막아버렸다. 이런 식으로 숨 돌릴 사이도 없는 공방전이 십여 일간 계속되었지만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사마중달이 이끄는 본부대가 위수의 도하 작전을 강행하여 진창으로 접근하여 왔다. 공명은 진창성 공략을 단념하고 진창 북쪽의 산악지대까지 후퇴하여 위나라의 대군과 마주보며 대치하였다. 진창성의 점령에는 실패했으나, 촉군은 아직도 충분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산과 계곡의 복잡한 지형을 이용하여, 공명은 여기에서 가장 특기로 여기고 있는 '팔진지도'를 폈다. 예전, 백제성에서 오나라 제일의 전술가 육손이 이 '팔진지도'로 고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위나라에서 작전이 가장 능숙하다는 사마중달도 이 희한한 포진의 형태에 경탄해마지 않았다. 그도 역시 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포진과 대치한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에, 공명이 쳤던 진형을 <삼국지연의>에서는 '팔괘의 진'이라고 부르고 있다. 요컨데 여덟 개의 진으로 이루어 지고 있으며, 남이 볼 때는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주진이고 어느 것이 후진인지 모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공격하는 부대로서는 공격조를 여덟으로 나누자니 병력이 지나치게 분산될 우려가 있으며, 공격 방법이 틀려지면, 반대로 포위되어 섬멸당할 위험도 있는 것이다. 진영은 여덟 개가 있지만, 병력이 군등하게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여덟개의 진영 중에서 어느 것이 주력적인 진영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선결 문제이다. 검술을 수업한 사람이면 경험이 있겠지만, 이도류(二刀流)와 대련을 할 때에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칼의 움직임을 동등하게 보려고 하며는 패배한다. 일본의 미야모토 무사시가 고안했다고 전해지는 이도류에서는, 왼 손에 짧은 칼을 쥐고 정안(正眼 칼 끝이 상대방의 눈을 향함)의 자세를 취하고, 오른 손에는 긴 칼로 대상단(大上段 칼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든 모양)의 자세를 취한다. 이것이 이도류의 비법이다. 그런데 대개의 적은 두 개의 칼이 움직이는 것을 균등하게 보려고, 시선을 좌우로 번갈아 보기 때문에 틈새를 보이게 되어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도류와 대항할 때는, 상대방의 취한 정안 자세의 짧은 칼만 보고 있으면 된다. 대상단의 긴 칼을 내리치기 직전에는, 그 순간의 움직임이 반드시 짧은 칼을 쥔 왼 손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상대방으로서는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있게 된다. 긴 시간이 지나면 오른쪽 손이 피로해져서, 결국 이도의 자세가 무너지게 되므로 허점이 생긴다. 그 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쳐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도류를 패배시키는 요령이다. 팔진도를 격파하는 방법도 이와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여덟 개의 진영 중에서 주진을 알아내고 그곳으로 전병력을 투입시켜 공격을 하는 것이 유일한 격파 방법이었다. 작전을 연구한 끝에 사마중달도 이 전술밖에 없다고 깨달았다. 연일 계속하여 정찰을 한 결과, 사마중달은 적진의 진영가운데 특별히 연기가 많이 오르고, 밤이 되면 작은 등불이 밀집되어 있는 진영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틀림없이 저곳이 적의 본진이다. 공명은 필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판단한 사마중달은 위나라 군대의 정예군 3만으 선발하고, 몸소 선두에 나서서 단숨에 그 진영으로 돌진하였다. 이때, 사마중달이 여기야말로 촉군의 주력 부대가 잠복하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지역이 '호로곡'이라고 불리우는 장소이다. 호로라는 것은 중국에서는 표주박을 가리키는 말이다. 표주박의 모양을 하고 있는 골짜기로서, 출입구는 좁지만 안이 넓어서 대병력을 주둔시키기에는 다시 없는 지형이었다. 호로곡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것은 촉군의 위연장군이었다. 위연은 당시 촉군에서는 가장 무서운 무장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위연은 그 용맹에 어긋나지 않게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은 당해내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로 패주하였다. '위연이 지키고 있었을 정도이니, 이 호로곡은 틀림없이 촉군의 본진일것이다.' 라고 판단한 사마중달은 주의깊게 말을 전진시켰다. 정찰병으로 하여금 주위를 살펴보게 한즉, "주위의 산에는 적이 매복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골짜기 깊은 곳에는 대부대가 집결해 있는 모양입니다." 라는 보고를 받았다. 주변의 산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고, 아직 이른 아침이라서 엷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으나, 그래도 골짜기 깊은 곳에 많은 깃발들이 세워져 있고, 막사들이 밀집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공명의 본진이로구나! 사마중달은 전군에게 일제히 공격하도록 하는 신호를 보냈다. 곁에 있던 장남인 사마사가 당황하며, "아버님, 골짜기 입구가 막히면 큰일 납니다. 병력의 일부를 남기시지요." "아니다. 적은 대군이다. 지금 병력을 분산시키면 오히려 위험하다." 겨냥하고 있던 적의 진영에 돌입했을 때에야, 사마중달은 비로소 이 진영이 빈 껍질이었음을 일게 되었다. "아차! 적이 안 보인다." 그참에 막료들이 달려와서, "사령관님, 속았습니다. 빨리 돌아가시지요." "알았다. 전군 퇴각!"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주변의 산에서 일제히 함성이 울렸다. 눈 앞의 산정에는 정승기가 올려지고, 공명은 커다란 목소리로, "자. 골짜기에 불을 붙여라." 산꼭대기로 부터 활활 타는 횃불이 빗발처럼 던져져 내려오고, 호로곡의 좁은 입구는 불길로 차단되었다. 도망갈 길을 잃은 위나라의 군병들은 그저 우왕좌왕 할 뿐이다. 그 중에는 촉군이 쏘는 불화살, 횃불, 폭죽에 맞아 온몸이 불덩어리가 된 병사들도 많았다. 골짜기는 이미 불바다였다. 그 대단한 사마중달도 새파랗게 질려서, "우리들 부자도 여기서 죽는 것인가." 하고 분하다는 듯이 장남인 사마사에게 중얼거렸다. 한편 산정에서 바라보고 있던 공명은 곁에 있는 강유를 돌아보며, "이겼다!" "정승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멋진 작전이었습니다 대단히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강유, 앞으로의 전투에는 칼이나 창마이 아니라 화력이 불가결의 것이 될 것이다. 이 점을 잊지 말라." 공명에게는 이로써 유비가 사망한 후의 고생들이 일시에 날아가 버리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사마중달만 없애면 위나라를 멸망시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행운의 여신'의 앞머리를 움켜 잡아라
그러나 역사는 위나라 군대의 편을 들고, 촉군에게는 냉정하였다. 그 전날 밤부터 흐려 있었던 하늘은 갑자기 비구름을 몰고와, 이 때에는 심한 폭우를 좁은 골짜기에 퍼부었다. 강우량이 적은 이 지방으로서는 드문 일이었으며, 그야말로 물동이로 퍼다 붓는 듯한 호우였다. 골짜기를 메우고 있던 일면의 불바다는 사라지고, 사마중달의 부자는 목숨만을 겨우 건져 호로곡을 빠져나갔다. 자신도 비에 흠뻑 젖으면서 공명은 맥없이 중얼거렸다. "아! 하늘은 우리의 편이 아니로구나." 진창의 공방전과 호로곡의 전투는 촉군이 단연코 이기고 있던 싸움이다. 특히 공명의 신기한 전략과 교묘한 용병술이 빛나고 있었다. 야구로 비교하자면 동점인 가운데 공명이 이끄는 촉나라 팀이 9회말 노아웃에 만루로 공격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압승을 하고 있던 공명이 막판에 사마중달을 놓친 것은 그가 적절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승운이 없었다." 라는 것에 틀림이 없다. 단순히 말해서 운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승부를 겨루는 놀이에는 '운'이라는 요소가 따르기 마련이다. 카드를 할 때 잘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리 명수인 사람이라도 운이 없으면 던지는 카드가 모두 예상과 어긋난다. 반대로 운이 있을 때에는 서투른 사람이라도 크게 이길 수 있다. 전쟁이나 회사의 경영은 단순한 도박과는 다르므로, 운만을 의지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운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수긍할 수가 없다. 운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으로, 톱으로서는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이라는 자세로 경영 전쟁에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운을 불러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인생도 도박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은 언제나 운이 좋은데, 자신만은 언제까지나 불운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일생동안에는 반드시 하늘이 주는 찬스가 있고, 운이 돌아올 때가 있다. 그 찬스를 놓치지 않는 것이 승리와 성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
12. 왜 도망가는 적을 쫓아가서는 안 되는가 - 기산의 전투 예기치 못하는 때의 보급선을 확보하여 두라 건흥 9년(231년), 공명은 또다시 대군을 기산으로 진군시켰다. 한중에서 기산까지는 거리가 제법 멀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원정에서 촉군이 가장 고생했던 것은 군량의 보급과 운반이었다. 이번의 원정에 즈음하여 공명은 역시 울트라 C를 고안해서 이 난문을 해결하였다. 기산에는 위나라의 외곽을 둘러싼 성이 있었는데, 공명은 그곳을 포위한 후, 굳이 점령하지는 않고 주변 일대를 소탕하여 발판을 굳히면서, 장안에서 오는 위나라 군대를 요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무렵 위나라의 도읍에서는 대사마(국방장관)인 조진이 병으로 쓰러졌다. 명제는 곧 사마중달을 불렀다. "서쪽의 국경이 또다시 적의 침공을 받아 위태롭게 되었다. 그대의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네." 이리하여 사마중달은 조진을 대신하여 대사마가 되고 장합, 비요, 곽회 등의 장수들을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사마중달이 출정했다는 소문을 듣고 공명은 호적수를 만났다는 듯이, 즉시 부대를 두 갈래로 나누었다. 일부는 그대로 기산성을 포위하고, 자신은 주력 부대를 인솔하여 상규로 진출하여 거기에서 사마중달군을 요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윽고 곽회, 비요 등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의 선봉대가 도착하여 양군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공명은 위군의 선봉 부대를 간단히 물리쳤다. 이어서 사마중달의 본부대가 달려와 대기 중인 촉군과 육탄전을 벌였다. 촉나라 군병들은 전력을 축적해 두고 있었으나, 위나라 군병들은 먼길을 달려왔으므로 기운이 없었다. 이대로 전투를 계속하다가는 전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마중달은 전군에 철퇴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근처의 노성이라는 요새에 가서 틀어 박혔다. 공명은 노성 가까이에 까지 적을 쫓아가서 도전장을 보냈으나, 사마중달은 입을 다문 조개처럼 굳게 틀어박혀서 절대로 성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았다. 성 안에 있는 적의 정세를 알 수 없으므로 무리하게 성을 공격하지도 못하고, 공명은 군대를 하나로 정리하여 기산으로 돌아가 그곳을 본진으로 삼았다. 이 상규의 전투에서 위나라 군대는 참패를 당했다. 수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많은 무기를 빼았겼다. 그런데, 노성에 틀어박혀만 있는 사마중달에 대해서 부하들로부터 불만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여러 장수들은 총대장인 사마중달을 이렇게 추궁했다, "우리 군대는 장안에서 원정을 온 것이지만, 적군은 더 먼곳에서 왔습니다. 병사들의 피로도나 보급선의 거리로서는 적군 쪽의 조건이 더 나쁠 것입니다. 이대로 적을 피하고만 있으면 사기에도 영향이 있고, 적의 의기를 북돋울 뿐입니다. 어서 기마대로 기산을 기습하도록 해주십시오." "아니다. 공명이 의도하는 바를 아직도 잘 알 수가 없다. 좀더 얼마동안은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겠다." "사마장군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공명을 두려워하십니까. 마치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래서는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추궁을 당하고서야 아무리 신중한 사마중달이라도 분기 충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5월, 사마중달은 이윽고 출격할 것을 결심하였다. 때마침 기산의 남쪽에 하평이 이끄는 촉나라의 선봉 부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사마중달은 장합에게 촉의 선봉부대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본부대를 인솔하여 공명의 본진을 공격하였다. "별일이군, 정면으로 부딪쳐 오다니." 공명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강유, 위연 등을 이끌고 성 밖으로 출격하였다. 정공법을 쓰는 정면 대결로서는 위군은 촉군의 맞수가 아니었다. 이번에도 역시 참패를 면치 못하여 많은 손해를 내고 후방으로 철퇴하였다. |
너무 쫓으면 스스로의 몸을 다친다.
어느 날, 촉군의 소수 부대가 위나라의 본진을 기습하였다. 허점을 찔렀으나 사마중달은 당황하지 않고 적의 기습부대를 격퇴시켰다. 그때, 부장군인 장합에게 약간의 병력을 주며 패주하는 적군을 추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장합은 망설였다. "병법에는 '도망가는 적을 쫓아가서는 안 된다'라고 되어 있는데요..." "아니, 괜찮다. 최근 우리 군대는 계속 지고 있으니까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도 저 적군은 섬멸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장합군이 패주하는 촉군의 기습부대를 추격하여 목문곡까지 왔을 때 촉군이 반격을 가해 와, 거기에서 격렬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구원병을 이끌고 나온 촉군의 장군 강유가 쏜 화살은 목표에 어긋나지 않게 장합의 오른쪽 가슴에 꽂히어, 이 상처가 원인이 되어 위나라의 용장 장합은 전사하고 말았다. 병법서 <손자>의 구변편(九變篇)에 야전에서 금해야 할 아홉 조목의 사항이 열거되어 있다. 그 여섯 번째의 항목으로서 '귀사물알'이라는 것이 있다. 상처를 입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적을 무리하게 잡으면, 도리어 달려들어 자신이 다치게 된다는 뜻이다. 연전 연패로 인해 정상적인 신중성을 잃고 있던 사마중달은 이 금기사항을 어기어 장합을 잃게 되고 만 것이었다. '도망가는 적을 너무 몰아넣지 말라.'라는 것이나, '적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퇴로를 남기라.'고 하는 전법은, 중국 무장들의 상식인데 어쩐지 일본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역사상의 유명한 전투를 보면, 일본의 무장들은 추격할 때에는 패적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몰아 넣었으며, 포위를 할 때에는 생쥐 한 마리도 놓치지 않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전술적으로 어느 쪽이 옳다고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
13. 적과 아군의 장단점을 철저히 살펴라 - 오장원에서의 대치 초조함과 소모-장기전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건흥 12년(234년) 봄, 눈이 녹기를 기다려 공명은 대군을 이끌고 야곡에서 위나라로 진격하여 들어갔다. 지금까지는 장안에서 가장 먼 길로 돌아가 기산으로부터 침입했었으나, 이번에는 가장 지름길인 야곡으로 해서 진격하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목우'와 '유마'로 대량의 전략물자와 군량을 운반하고 국경인 야곡을 돌파하여 위수 남부의 평원 지대에 포진을 하였다. 이 평원지대는 '오장원'이라고 불리우는 곳이다. 위나라 측에서는 공명이 또다시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명제는 사마중달의 군대를 증강시키고 출격을 명령하였다. 출진에 즈음하여, 위나라의 군사 관계자는 입을 모아 한결같이 말하였다. "위수의 북쪽 연안에 포진하여 촉군과 강을 가운데에 두고 대치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라고 주장했지만, 방위사령관인 사마중달은 단호하게, "의수의 남쪽 연안은 곡창지대여서 비축된 양식이 많다. 우선 그곳을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라고 말하며, 부대를 인솔하여 위수의 남쪽으로 건너가 배수의 진을 쳤다. 요새를 구축하는 일이 끝나자, 사마중달은 작전회의를 열고 막료들에게 말하였다. "지금까지의 공명의 전투 자세로 보아, 그는 근일 안에 오장원에서 산을 타고 동쪽으로 진출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군대도 방심할 수가 없게 된다. 적군이 동쪽으로 나아갈 움직임이 보이면 선제 공격을 가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촉군은 오장원에서 오래 머무를 진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알 수가 없군. 언제나 속전속결의 적극적인 전법을 취하던 공명이 이번에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어쩐지 기분이 안 좋게 생각된 사마중달은, 오로지 수비를 견고히 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오장원을 중심으로 하는 촉나라와 위나라의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공명으로서는 당초 오장원에 오래 주둔하고 있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동쪽으로 진출하여 무공을 점령하면, 거기서 장안까지는 2백 킬로 정도의 거리이다. 그로서는 사마중달이 두려워 하는 전격 작전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지난 봄 무렵부터 건강상태가 좋지를 않아 연속적인 행군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장원에서 양군이 대치하기를 백여 일에 이르렀다. 병법의 원칙에서 보더라도, 싸움을 오래 끌면 끌수록 원정군에게는 불리하게 되어 있다. 공명은 점차 초조해졌다. 위군에 대해서 이모저모로 싸움을 걸어 보았다. 여러번 사신을 보내어 결투장을 던지기도 하고, 부인용의 장식품을 선물로 보내어 모욕을 주어 상대의 화를 돋구기도 했지만, 사마중달은 그저 참을 뿐으로, 절대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부인이 머리에 꽃는 장식품을 중국어로 '건괵'이라고 한다. 건괵은 뜻이 바뀌어져 여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국의 속담에 '건괵지증'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남자로서의 의지가 없음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면 '너는 불알도 없는 녀석이다.'라고 모욕을 주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 이 속담의 근원이 공명이 사마중달에게 행한 이때의 행위였다. 이렇게 대치한 상황은 질질 끌어만 갔다. 그 사이에도 공명의 건강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 갔다. |
장기전에 강한 사람, 단기전에 강한 사람 사마중달은 적군과 아군의 우열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사기, 병사의 훈련도, 지휘관이나 장교의 능력, 병력, 장비 등의 점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촉군 쪽이 위군보다 한 수 위에 있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상으로도 명백한 일이다. 특히 군사 전략의 귀재인 공명을 우두머리로 하고, 강유, 위연, 양의 등의 젊은 용장을 거느리는 촉군은 단기 결전에는 대단히 우수하고 강하다. 그러나 장기전이 되면 입장이 반대로 바뀐다. 촉군은 한중으로부터 먼길을 왔으므로, 보급을 하는데 고생을 하고 있다. 둔전을 개척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10만이나 되는 장병들을 먹일 수는 없다. 한편 위군은 보급선도 짧은 데다 자국의 영토 내에서 싸우고 있으므로 군량의 조달이 용이했다. 또한 촉군의 병사들은 모두가 쌀의 고장인 사천 출신이라, 먼 북쪽 지방의 풍토나 음식에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병사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하며 속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따라서 전쟁을 오래 끌면 끌수록 원정군은 불리하게 된 것이었다. '적의 실정을 알고, 동시에 자기 편의 역량까지도 알고 있으면, 절대로 전쟁에 패하는 일이 없다. -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손자의 모공편에 있는 말대로 사마중달은 적군과 아군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유혹을 해도, 모욕을 당해도 인내하며 전쟁의 장기화를 기도하였다. 한편 공명도 피아의 우열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전선이 교착화 되는 것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병이 위중하여 진격을 할 수도 없어, 잔꾀를 써서 도발을 시도했으나 적군은 이에 속아 주지 않았다. 여기에 전쟁의 귀추가 있었던 것이다. 적의 실정을 알고 동시에 자기 편의 역량까지도 알고 있으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원리는 전쟁터에서 뿐만이 아니라 비지니스의 세계에서도 훌륭하게 통용된다. 근대적인 영업이론에 도입되고 있는 전략, 예를 들어 마켓상황, 소비자의 의향, 경기동향, 금융정세, 첨단기술, 타사의 현황과 장래성, 금융의 긴축도, 국내외의 시장상황, 개개의 프로젝트의 추진방법... 등의 조사나 정보수집은 모두가 적을 알기 위한 전략이다. 한편 리더십의 연구, 사원연수, 사원의 능력테스터, 생산성의 조사, 인사 배치의 검토, 인재확보, 전력증강의 방법, 대우의 개선... 등은 바로 자기 편을 알기 위한 전략이다. 결국 군대에서나 기업에서나 피아의 현상과 장래성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 승리를 거두기 위한 기본 조건이 되는 셈이다. 상대방의 상황도 모르고 자기 자신의 장단점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은 백번을 싸워도 모조리 패할 뿐이다. |
14. 제갈공명의 이 불요불굴의 정신을 보라 - 제갈공명의 죽음 죽은 공명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도망치게 만들다 교착 상태에 빠진 전선에서 어느 날, 위나라의 본진으로 촉군의 사신이 찾아왔다. 용건이 끝나고 의례적인 연회석상에서 사마중달은 촉군의 총사령관인 제갈공명의 생활모습에 대해 물었다. 사신은 그 정도의 것이라면 이야기해도 상관 없어리라고 생각하여, "제갈량 장군님은 매우 건강하시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군무에 힘쓰고 계십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사마중달은, "그런가, 그것은 좋은 일이로군. 나는 근래에 와서 나이 탓인지 아침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밤에는 졸음이 와서 견디지를 뭇한다. 더욱이 식욕이 없어서 고생을 하고 있다." 라고 시치미를 떼고 말하였다. 그러자 사신은 그 말에 걸려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희 정승님도 식욕은 주욱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마중달은 이 말을 중시하였다. 사신이 돌아간 후 막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저 상태로는 공명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 무렵, 공명은 중태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해의 8월, 드디어는 진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향년 54세였다. 부하인 강유 등은 군대를 정리하여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얼마후, 이 정보를 포착한 사마중달은 기마부대를 인솔하여 추격하였다. 그러자 도중에서 강유는 깃발을 되돌리며, 북을 치고 돌격나팔을 불면서 반격해 왔다. 자세히 보니 촉군의 한가운데에는 정승기가 휘날리고 있으며, 그럴듯한 인물이 수레에 올라 앉아있는 게 아닌가. "공명, 이 자가 아직도 살아 있었구나." 깜짝 놀란 사나중달은 발길을 되돌려 도망을 쳤다. 하루가 지나, 위나라 군대가 추격하지 못할 정도의 지점에 도착한 후에야 강유는 비로소 총사령관인 제갈공명의 죽음을 발표하였다. 이 추격극을 이 지방 사람들은,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도망치게 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누군가가 이 소문을 전하자 사마중달은 억지를 부렸다. "아니, 나 역시도 공명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 그러나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모르지만, 죽은 인간을 상대로 싸워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고 생각이 들었기에 군대를 퇴각시킨 것이오." |
엄한 자세로 일관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제갈공명
공명은 청렴한 사람이어서 사유 재산도 모으지 낳고, 황제에게서 받은 상금은 모두 병사들이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죽은 후에 조사해 보니, 성도에 뽕나무 8백 그루와 척박한 논밭을 조금 가지고 있었을 뿐이며, 저축 같은 것은 없었다. 관직에 오른 후 5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간, 공명은 유비와 그 아들인 유선에 대하여 충성으로 일관하였다. 그가 청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촉나라의 이대의 황제에 걸쳐 충성을 다함으로써 '평천하'라는 큰 로망을 찾았고 그것에 일생을 바쳤다. 2. 불세출의 전략가로서 적벽의 전투, 형주 제패, 촉나라 평정, 남만 제압, 전후 여섯 차례에 걸친 북벌에서 그 귀재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또한 아이디어 맨으로서 연노, 목우, 유마 등의 과학적인 기재와 장기, 팔진지도 등을 고안하였으며 병법의 연구도 많이 하였다. 3. 신상필벌을 제일로 하고 대의멸친(大義滅親 큰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적인 정을 버림)하는 엄격한 리더십을 견지하는 한편,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에 엄격하였으며, 그러나 부하에게는 배려의 정이 두터웠다. 역대의 사가나 중국의 민중들 사이에서 공명은 일반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삼국지>의 편자 진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제갈량은 작전가로서 우수한 인물이었으며, 재상으로서도 백성을 돌보면서, 공평한 정치를 하기에 노력하였다. 신상 필벌에 철저했으나 동정심이 있었으므로, 온 나라의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하는 반면에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다. 엄격한 정치 자세로 일관하면서, 원한을 사지 않았던 것은 공평 무사하며, 또한 공과 사의 구분을 확실하게 했기 때문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매년이다시피 원정을 시도했으면서도 성공시키지 못했다는 것. 아마도 이것은 임기응변을 구사하는 데에 서툴러서, 물러갈 시기를 잘 잡지 못해 실패한 때문일 것이다. '죽은 공명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도망치게 하다. 死諸葛走生仲達' 이것은 공명이 죽고서도 아직 멈추지 않는 파이팅 정신을 칭송한 것으로 다분히 픽션일 경향이 많다. 실제 이러한 분석이 가능할 만큼 공명은 불요불굴의 인물이었다. 아무리 과학 만능의 시대가 되어도, 유물주의의 시대가 되어도 이 정신은 존중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 중에서도 기업의 톱이나 조직체의 리더에게 있어서, 감투 정신이야말로 그 기업이나 조직을 활성화 시키는 묘약이다. 톱이 된 사람은, '사업이 완성되기 전에 간단히 죽을 수 있겠느냐.'하는 집념을 가져주기 바란다. |
15. 비범하라! 평범한 톱은 조직을 망하게 한다 - 촉나라의 멸망 왜 최후까지 도전하지 않는가 공명이 죽고 촉나라의 원정군이 철수한 후, 얼마동안 사마중달은 장안에 머물면서, 촉나라의 움지임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후, 공적에 따라 '태위'라는 무인으로서의 최고인 관직을 수여 받고, 안국 향후로 봉작되어져 나라 최고의 원로로서 존중되었다. 239년, 명제가 죽고, 태자인 방이 불과 여덟 살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는 사이에도 권모술수에 능란한 사마중달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정적이나 비판자를 하나하나 없애 갔다. 이리하여 251년, 그가 73세로 죽을 때에는 위나라의 왕조는 사실상 사마 씨 일족이 장악하고 있었다. 사마중달의 이후는 사마사, 사마소로 이어졌는데, 그들도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위나라 왕조의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었다. 265년, 위나라 마지막 황제인 원제가 선양의 형식으로, 사마중달의 손자인 사마염에게 제위를 물려주니, 여기에 진(晋)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생겨났다. 사마염은 이 왕조의 참된 창시자는 조부라고 생각하여 사마중달에게 선제라는 시호(선왕의 공덕을 칭송하고 기리며 붙이는 명칭)를 붙였다. 촉나라는 이에 앞서 2년 전에 멸망하였다. 공명이 죽은 후, 군사면에서는 그의 제자가 되는 강유, 내정 면에서는 그가 극력 추천한 장원, 비위 등의 삼총사가 나라를 지탱해 가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은 전략가 및 정치가로서는 당대 일류의 인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강유는 공명의 위업을 이어 종종 위나라 영토로 출격하였으며, 공격을 최선의 방어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아두'는 우둔한 이대째라 모처럼의 인재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였다. 263년, 서부의 국경이 촉나라의 강유에게 종종 위협당하는 것에 속을 태우던 사마소는 장군 등애에게 3만의 기동부대를 주면서 강유가 버티고 있는 한중을 피하여 멀리 우회해서 남동쪽의 산길을 거쳐 성도를 공격토록 하였다. 느닷없이 위나라 군대의 출현으로 군사력이 허술한 성도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요절할 만큼 놀란 유선은 재빨리 항복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아들인 북지왕 유심이 반박하였다. "비록 이기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후의 일전을 시도하여 성을 베개삼아 전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쉽게 항복을 한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래서는 저승에서 할아버님을 뵈올 낯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선은 상대도 하지 않고, 성문을 열고서 백기를 들어 투항하였다. 유심은 조부인 유비의 무덤 앞에서 자결하였다. |
이 인간학의 노하우를 배우자
유선 일행은 포로가 되어 위나라의 도읍으로 끌려갔다. 어느 날, 사마소는 술자리를 마련하고 유선을 위로하였다. 유선의 부하들은 모두 먼 타국에서 포로로서 욕을 당하고 있는 것에 가슴을 앓으며,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유독 유선만이 신명이 나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에는 사마소도 기가 막혀서 측근인 고충에게 소근거렸다. "전에부터 저 사람이 멍청하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지만 이런 정도인 줄은 몰랐소. 이래가지고서야 제갈량이 살아있었다손 치더라도 촉나라를 보존시킬 수 있겠소."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만략 유선이 저런 멍청이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영명한 군주님이라도 촉나라를 간단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지리적으로나 생산성, 혹은 인재의 측면에서 보아도, 당시의 촉나라는 정승 공명이 죽은 후에도 위나라와 오나라에 비하여 절대로 손색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톱인 유선이 너무나도 미더운 구석이 없었다. 때문에 멸망했다. 그 후, 유선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역사서에는 일체 기록이 없다. 애처롭다고 보면 애처롭지만, 그의 죽음을 기록할 가치조차 없는 멍텅구리 전하였던 셈이다. 기업이나 국가나 톱이 범용한 곳은, 비록 중역이나 장관이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개개의 사원이나 국민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멸망하고 만다. 촉나라의 멸망은 그 좋은 예이다. 이와 같이 황건지란 이후, 약 백년 사이에 세 개의 왕조가 성립되었고, 그리고 멸망하였다. 중국의 오랜 역사상으로 보면, 위.오.촉의 흥망은 그야말로 '남가일몽'이거나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라는 망했어도 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구나!' 수많은 영웅 호걸들이, 혹은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멸망하고, 혹은 풍운의 뜻을 이룬 후에 남겨진 것은 유구한 중국의 산하-. 여기에 인간학의 노하우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