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의 소감
영광의 7연승을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피나는 노력을 해왔던가! 오직 높고 험난한 정상의 고지만을 향해 뛰던 이에리사 선수. 73년 유고 사라예보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 우승의 주역으로서 세계를 제패했을 때와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종합탁구선수권대회에서 7연패의 위업을 달성했을 때의 그 벅찬 영광이야 어디에다 비교하겠는가!
그때 그때의 그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애드벌룬을 띄운 듯이 벙벙한 마음과 마냥 꿈길을 헤매고 있는 듯 황홀한 순간, 순간들…. 7년 동안 우승배와 우승기를 들고 기뻐할 때 환호하는 관중들의 박수갈채는 분명히 그에게 뜨거운 감격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감격은 순간이었다. 그가 많은 관중들에게 환영을 받을만한 경기를 했는가 하는 무거운 중압감과, 종합선수권 7연패를 달성한 이후로는 쫓는 자에게 쫓기는 자로 바뀐 입장과 그 책임감 때문에 더욱 무거운 부담감에 시달려야 했을 터이다.
그가 탁구에 손을 대기는 대전 대흥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였다. 홍성여중 1학년 때 탁구선수로서의 재질을 인정받은 것을 계기로 서울 문영여중으로 전학, 본격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했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공부와 운동 외에는 전연 도외시했다 한다. 오직 탁구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때 탁구계에서는 그를 보고 ‘곰’이라고 불렀는데 세계제패와 종합선수권대회 7연패 이후에는 ‘사자’라고 불렀다. 다 큰 숙녀한테 붙여주는 별명치고는 유쾌하지 못했지만 전자의 별명은 아무말 없이 운동에만 전념해온 데서 붙여진 것이고, 후자의 것은 사라예보 대회 이후 세계의 패자(覇者)라는 뜻으로 붙여진 애칭이었다.
어쨌든 누가 생각해도 그는 곰같이 미련스러울 만큼 탁구경기에서는 추호도 양보가 없었다. 국내 경기에서 가장 크고 권위 있는 대회로 매년 11월말, 또는 12월초에 개최되는 종합선수권대회에서도 그는 예의 뚝심으로 전무후무한 7연패의 대기록을 세웠다.
혹자는 동료한테 선수권을 돌려줄 수 있지 않느냐는 얘기들도 하곤 했지만, 다른 것을 몰라도 경기에서만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자신보다 좋은 후배들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도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승부의 세계에서 승부조작이란 있을 수 없으며,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곧 상대방을 기만하는 행위로 서로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실로 한국 여자탁구가 세계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선수들의 노력도 노력이었지만, 그보다는 탁구계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편승한 좋은 결과였다. 탁구라는 것은 기술적인 면에서는 한두 점의 차이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승부의 고비에 이르렀을 때 누가 더 승부에의 집착력을 가지고 끈기 있게 견디느냐는 정신력의 싸움인 것이다. 그는 그 정신력을 기르기 위해 가슴이 메어질 것 같은 벅찬 훈련을 견뎌냈다.
7연패를 하기까지의 순간들
1975년 12월 9일부터 12일까지 그해 탁구 경기를 결산하는 제29회 전국 종합탁구선수권대회가 문화체육관에서 성대히 개막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탁구여왕 이에리사(당시 22세)가 과연 7연패를 하느냐 못하느냐에 관심이 쏠려 보도진은 물론 전 탁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대회 마지막 날 피날레를 장식할 문화체육관에서는 남녀단식 결승경기를 치르기 위한 두 대의 탁구대가 준비되었고, 관전을 위해 모여든 2천여 명의 관중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마침내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한국 구기스포츠 사상 초유의 종합선수권대회 7연패가 걸린 마지막 결승 상대는 역시 당대 최고의 수비수 정현숙 선수였다. 여자탁구의 쌍벽이 만나면서 더욱 흥미를 배가시켰던 경기는 그러나 제 페이스를 찾지 못한 정현숙의 어이없는 0대 3 완패로 끝나고 말았다. 대망의 7연패는 마지막 고비에서 생각보다 쉽게 정복된 것이다.
첫 세트 스타트부터 이에리사는 정현숙의 커트 스트로크에 드라이브를 걸었으나 미스를 범해 첫 포인트를 빼앗겼다. 그러나 이에리사는 부지런히 받아넘기는 정현숙의 맹점을 급습. 7대 2로 단숨에 게임을 역전시키고 7대 6으로 쫓아 올라오는 정의 완강한 수비를 계속 강타와 드라이브로 깨뜨리면서 결국 21대 18로 승리. 한 세트를 선취했다.
제2세트에서는 정현숙이 몇 차례 반격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네트에 걸리는 등 잦은 범심을 범하면서 3대 2의 리드를 마지막으로 이에게 일방적인 독주를 허용. 11대 21로 졌다.
연습부족으로 제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한 정현숙은 활을 그리듯 멋진 롱 커트로 상대의 미스를 유발해내던 수비의 견고성을 잃고 0대 3으로 완패했다. 완벽한 기본기를 갖춘 공격과 수비의 대결에서 공격형의 이에리사가 시종 게임을 주도해 나갔고, 제 3세트 역시 정확한 백 스매싱과 포어 드라이브로 착실히 리드, 21대 6의 큰 스코어로 승리한 것이다.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거목답게 담담한 대답을 했던 이에리사. 그른 이날 단체전과 개인복식도 우승. 3관왕을 차지함으로써 그동안 자아냈던 탁구관계자들과 팬들의 아쉬움을 말끔히 씻어냈다. 그는 이 대회의 우승으로 캘커타 세계선수권대회 이후 침체되었던 기량을 회복, 확고한 탁구여왕의 자리로 복귀하는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물론, 7연패의 고비가 결승전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현숙와의 결승전보다·외환은행의 배옥엽과 만났던 준결승전에서 그는 훨씬 더 힘든 경기를 해야 했다. 배옥엽은 정현숙과 더불어 7년 동안 이에리사를 이긴 적인 있는 단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전형상 드라이브가 약한 쇼트의 명수였다.
도전자의 권리는 승패의 부담 없이 게임에 임할 수 있다는 것. 배옥엽은 가벼운 마음으로 가진 기량을 마음껏 보여주며 게임을 파이널세트까지 끌고 갔던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 세트에서도 16대 10까지 리드. 이에리사의 7연패 꿈을 가물가물하게 했다.
그러나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이에리사는 기술과 정신자세, 관록을 앞세워 대역전극을 연출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서브공격에서 상대를 16점에 묶어놓고 연속 4점을 만회, 14대 16, 다시 추격을 거듭해 19대 19 타이, 공 한 알 차이로 7연패가 저지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이는 당황하지 않고 과감한 드라이브를 시도하여 연속으로 2점을 따내 승부를 마무리했던 것이다.
어려운 상황을 돌파해낸 이에리사의 활약에 암울하던 한국 여자탁구계는 다시 한 번 희망을 가질만했다. 당시의 게임에 대해 이에리사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날씨가 추워 드라이브가 걸리지 않고 마루가 미끄러워 중심이 잡히지 않아 고전했습니다. 반면 배옥엽 언니는 양 사이드를 파고드는 소트가 좋았는데 10대 16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야심을 버리고 도전자의 입장에서 과감히 드라이브를 건 것이 적중했습니다.”
이 같은 이에리사의 작전에 탁구인들은 대만족을 표시했으며 위기를 타개할 줄 아는 그에게서 다시 한 번 정상을 향해 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당시 종합선수권대회에 대비 만족스러운 연습을 하지 못했다는 이에리사는 7연패의 기쁨 뒤에 자신의 독점을 허용하는 한국 여자탁구의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 부족한 것이 너무 많고 공백기가 있었던 나를 꺾을 선수가 안 나왔다는 것은 달리 생각하면 한심한 일이지요.”라고 그는 유망 신인 선수가 나오지 않는 현실을 개탄했다.
스타탄생, 그리고 무적의 7년
1969년 한국 여자 탁구계에는 화려한 스타가 탄생했다. 15세의 어린 나이 여중 3학년으로서 기라성같은 선배들을 모두 물리치고 종합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이에리사를 매스컴이 그냥 놓아 둘리 없었다.
특히 그는 당시만 하더라도 경력이 3년밖에 안된 어린 선수였기 때문에 더욱 인기가 높았다. 그의 등장은 한국 여자탁구의 대를 잇는 스타가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탁구계로서도 큰 경사로 받아들여졌다. 위쌍숙, 조경자, 최경자, 최정숙, 최환환으로 이어지는 스타플레이어들이 짧은 기간 동안 한국 여자탁구를 빛내고 사라진 뒤로는 한동안 세계 진출이 끊겼었다.
이에리사는 장충체육관에서 막을 내린 제23회 전국 종합선수권대회 최종일 여자단식 결승에서 베테랑 김인옥(한일은행)과 막상막하의 시소게임을 벌인 끝에 2대 1로 이겨 처음으로 종합선수권자가 되었다. 최종일의 준결승에서 그는 최용안(산업은행)을 2대 0으로 가볍게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하여 국가대표 선수인 사우스포 김인옥과 대결, 첫 세트를 21대 14로 빼앗은 뒤 둘째 세트를 14대 21로 빼앗겼다. 마지막 세트에서는 탁구 관계자들과 관중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접전을 벌여 21대 19로 제압, 챔피언이 되었다.
센세이셔널하게 첫 우승을 차지한 이에리사는 1970년 12월 장충체육관에서 거행된 제24회 대회 결승에서는 김순옥(대한항공)을 3대 0(16, 10, 17)으로 가볍게 물리쳐 2연패를 했다. 71년 11월, 나인숙(산업은행)으로부터 도전을 받아 역시 3대 0(9, 18, 18)으로 완파, 3연패에 성공했다.
72년부터 75년까지는 4년 연속 커트 스트로크의 세계 제 1인자 정현숙 으로부터 해마다 끈질긴 추격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72년도 26회 대회 3대 0(11, 11, 18), 73년도 27회 대회 3대 0(18, 18, 18), 74년도 28회 대회 3대 1, 75년도 29회 대회 역시 3대 0(18, 11, 6)으로 차례로 꺾어 무적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그처럼 7년 연속으로 정상에 오르는 동안 가장 큰 고비는 앞서 기술했던 7년째 배옥엽과의 준결승전과 함께 5연패를 달성했던 73년도 대회 준결승전을 꼽을 수 있다. 당시 대회는 이에리사-김순옥, 정현숙-김진 등 4명의 대결로 압축되었는데 이에리사와 김순옥의 준결승은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다.
숨가뿐 접전, 이 게임 역시 2대 2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풀세트까지 가는 명승부였다. 이에리사는 김순옥의 쇼트플레이에 막혀 그의 특기인 스핀을 걸지 못했고 스매싱마저 미스가 잦았다. 한 때 스코어는 2대 10까지 기울어 그의 5연패 꿈이 깨지지 않나 할 정도였다. 그러나 여왕 이에리사는 여기서도 끈질긴 저력을 발휘, 끝내는 21대 19로 경기를 뒤집어 결승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8연패 직전 붕괴된 아성
녹색 테이블의 마녀 이에리사의 7년간의 걸친 길고도 고독한 독주는 1976년에야 비로소 막을 내렸다. 그 해 11월 13일부터 21일까지 문화체육관에서 거행된 제30회 종합선수권대회 최종일 결승전. 8연패라는 대기록의 달성여부로 관심이 집중된 이 경기에서 이에리사는 신인 국가대표 이기원(산업은행)과 풀세트 접전 끝에 2대3으로 패배, 외롭게 지켜온 정상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준결승전에서 실업 1년생 최경미(대한항공)의 세찬 도전을 3대2로 힘겹게 누르고 결승에 오른 이에리사는 정현숙을 3대0으로 완봉하고 결승에 진출한 이기원의 속공에 초반부터 고전했다. 「이에리사 8연패 저지」를 외치는 도전자 이기원의 기세는 매우 매서웠다.
1, 3세트를 뺏기고 2, 4세트를 만회한 이에리사는 마지막 제5세트에서 17대 13으로 리드를 잡아나갔다. 그러자 관중석에서는 “역시 안되는구나” 하는 탄식의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관중들 역시 이에리사의 오랜 독주를 저지해줄 유망주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일까. 다음 순간 경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어 이에리사는 오히려 17대 18로 역전을 당하면서 역력한 당황의 빛을 노출시켰다.
역전의 집념을 불태운 이기원이 20대 18까지 게임을 끌고 갔으나, 다시 이에리사의 주 무기인 드라이브 두 알이 내리꽂혀 20대 20 듀스가 되자 두 선수는 모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기원의 신인답지 않은 맹반격이 터진 것은 바로 이때였다. 특수러버의 일종인 페인터러버를 사용, 강한 드라이브로 스피드를 죽여 되받아치는 이기원의 반격에 줄곧 고전했던 이에리사는 마지막 순간에도 같은 공격을 막지 못하고 끝내 20대 22로 무릎을 꿇었다.
게임을 끝내고 허탈한 표정으로 벤치에 걸터앉은 이에리사는 자신도 최선을 다했지만 후배인 이기원이 더 선전했다는 대 선수답게 패자로서 승자를 축하하는 여유를 보여주어 더욱 박수를 받았다.
반면 이에리사와의 첫 공식 시합에서 개가를 올린 이기원은 승부가 결정되는 순간 전혀 실감이 나지 않더라고 수줍어했는데 어떻든 기성 선수가 아닌 76년 들어 새로 등장한 신인 이기원 선수가 8연패의 아성을 깨고 우승한데 대해 탁구인들도 환영의 뜻을 표했다. 7년 아성이 무너진 아쉬움은 있었으나 신인 유망선수가 그 기록을 막아섰다는 것은 한국 여자탁구가 새로운 문을 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으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