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태양은 어느 야생의 습지에 내리쬐었다. 거기에는 가문비나무 한 그루가 이끼에 가득 뎦여 서 있고, 자그마한 매들은 그 위를 빙빙 돌고 있다. 박새는 상록수 틈에서 지저귀고 있고, 들꿩과 토끼는 그 밑을 살금살금 숨어 다닌다. 그러나 이제 더 음산하고 이곳에 더 어울리는 밤이 더 다가오고 있으며, 또 다른 종류의 생물들이 잠에서 깨어나 이곳에서의 자연의 의미를 표현하려고 하고 있다.
늦은 밤, 나는 마차들이 덜커덕거리며 다리를 건너는 소리(밤에는 이 소리가 어떤 소리보다도 멀리까지 글린다)와 개들이 짖는 소리, 그리고 때로는 멀리 있는 어느 외양간의 앞마당에서 들려오는 암소의 구슬픈 음매 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는 동안 호숫가는 온통 황소개구리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찬다. 호수에 수초는 별로 없어도 개구리들은 있었던 것이다. 이 개구리들이야말로 그 옛날 술깨나 마시던 주객들과 잔치꾼들의 억샌 혼들로서 그들은 아직도 전혀 뉘우치는 기색 없이 이 저승의 호수에서 돌림노래 한 가락을 멋들어지게 부르려는 것이다. (월든 호수의 요정들은 나의 이 '저승의 호수'라는 표현을 용서해주리라 믿는다.)
이 개구리들은 그 옛날 잔치상에서의 유쾌한 격식을 지키려고 했지만 쉰 목소리에는 엄숙한 말이 나 오히려 이들의 들뜬 기분을 풍자하는 꼴이 되었고, 술은 그 맛을 잃어 단지 배만 채워주는 액체가 되어버렸다. 과거의 기억을 잊게 할 달콤한 도취는 결코 오지 않고 물로 판 포만감과 팽창감만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제일 연장자격인 개구리가 북쪽 물가에서 냅킨 대신 부초 위에 축 늘어진 턱을 괸 채 한때는 경멸했던 물을 한 모금 쭉 들이켜고 나서 "개구울 개구울 개구울" 크게 울면서 잔을 돌린다. 그러자 곧 어느 먼 물가로부터 똑같은 암호 소리가 수면을 타고 들여오는데, 이것은 나이에서나 허리 굵기에서나 두번째 가는 개구리가 자기 몫만큼의 물을 마셨다는 신호이다.
이렇게 이 의식이 호숫가를 한 바퀴 돌게 되면 이 잔치의 주최자는 만족한 듯이 "개구울" 하고 운다. 그러면 하나씩 차례대로 "개구울" 소리를 반복하는데 착오가 있으면 안 되며, 마지막으로 배가 제일 적게 나오고 제일 연약해서 물이라고 샐 것 같은 개구리에 이르러서 끝이 난다. 그 후 술잔은 계속해서 몇 순을 돌며 해가 아침 이슬을 걷을 때까지 잔치는 계속된다. 그때쯤 되면 모두 취해서 쓰러져버리고 최연장자 혼자만 남아 이따끔 "개굴"하고 울어보지만 응답해주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수탉이 우는 소리를 나의 개간지에서 들은 적이 있었는지 확실한 기억이 없다. 나는 어린 수탉을 단지 그울음소리를 들어볼 목적으로 키워봄직도 하다고 생각했다. 한때 야생 꿩이었던 이 수탉의 울음소리는 확실히 다른 새의 울음보다 특이한 데가 있다. 닭을 가축이 아닌 채로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할 수 있다면 아마 그 울음소리는 머지않아 이 근처 숲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소리가 될 것이며, 기러기의 끼룩끼룩 하는 울음소리나 부엉이의 부엉부엉 하는 소리를 능가할 것이다. 게다가 수탉이 나팔 부는 것을 쉴 때는 암탉들이 그 사이를 꼬꼬댁 소리로 메워줄 것이다. 달걀과 닭다리를 따지지 않더라도 인류가 닭을 가축의 대열에 끼워넣은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느 겨울날 닭들이 떼 지어 살았던 숲, 즉 그들의 고향이었던 술을 거닐다가 야생 구탉이 나무 위에서 우는 모습을 본다고 생각해보라. 그리하여 그 울음소리가 날카롭고 또렷또렷하게 몇 마일이고 울려 퍼저 다른 새들의 냐날픈 울음소리를 압도하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그 소리는 여러 민족들을 긴장시키리라. 이 소리를 듣고 그 누가 일찍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다음 날에는 더 일찍 일어나고 끝없이 더 일찍 일어나 나중에는 말할 수 없이 건강하고 부유하고 현명하게 되지 않을 사람이 그 누가 있겠는가?
모든 나라의 시인들이 노래 잘 부르는 본토박이 새들과 함께 이 외국 태생의 새의 노래를 찬양하고 있다. 이 용감한 수탉은 어떤 풍토에도 적응할 수 있다. 그는 토박이 새들보다 더 토박이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의 건강 상태는 항상 좋으며, 그의 폐는 항상 튼튼하다. 그리고 그는 결코 의기소침하는 일이 없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항해하는 선원들까지도 이 닭의 소리를 듣고 잠을 깬다.
하지만 내가 수탉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듣고 곤한 잠에서 깬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개나 고양이, 소나 돼지, 닭을 기르지 않았으므로 내가 사는 곳에는 가정적인 소리가 결여되었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사람을 포근하게 해주는 우유 휘젓는 소리도, 물레 도는 소리도, 솥이 끓는 소리도, 찻주전자 끓는 소리도, 또 아이들이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재래적 관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그전에 권태감을 이기지 못해 죽어버렸을 것이다. 벽에는 쥐들도 살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았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들어올 생각을 한 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지붕 위와 마루 밑에는 다람쥐들이 있었고, 용마루 위에는 쏙독새, 창밖에는 푸른어치가 울었다. 집 밑에는 산토끼나 우드척이 있었고, 집 뒤에는 부엉이나 올빼미, 호수 위에는 기러기 떼와 되강오리가 있었으며, 밤에만 짖는 여우도 있었다. 그러나 농장 주변에 사는 온순한 새들인 종달새나 꾀꼬리는 단 한 번도 내 개간지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내 집 마당에는 큰 소리로 우는 수탉도 꼬꼬댁거리는 암탉도 없었다. 아니 마당 자체가 없었다. 단지 어떤 것에도 막히지 않는 자연이 바로 문턱에까지 와 있을 뿐이었다.
창문 바로 박에는 한창때의 어린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야생 옻나무와 검은달기의 뿌리들이 흙을 뚫고 지하저장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강인한 리기다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면서 지붕의 널빤지를 부비고 있었고 그 뿌리들은 집 밑으로 뻗어 있었다. 강풍이 분다고 떨어져나갈 천창도 차양도 없었다. 그 대신 소나무가 집 뒤에서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혀 땔감이 되어주고 있었다. 큰 눈이 내리면 앞마당의 대문에 이르는 길이 막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문도 없고 마당도 없고 문명 세계로 통하는 길 자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