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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운의 <물의 느낌>
수필과 비평 통권 129호(2012년 7월)에 수록
물의 느낌
이고운
등이 물에 닿는다. 물이 등을 만진다. 청진기는 내 귀에다 꽂아주고 등 안쪽의 소리는 물이 듣는다. 뼈를 점검한다. 아! 오래 전에 나무등걸 메고 산을 내려오다 짓눌렸던 척추, 4번과 5번 사이를 빠져 나오려는 물렁뼈를 주무르며 진찰을 시작한다. 찟, 신호가 온다. 내 척추의 역사, 물이 보고서를 타전한다. 회신이 오는가. 이상하다. 추울렁 쿠울렁 바위가 우는 느낌이다. 그 울음이 내 등판에 물타자를 친다. 톡, 톡톡. 아주 노련한 독수리타법이다. 청진기에 웅성거림이 있다. 오래 전에 내가 잊은 고어 같다.
척수에 저장되었다가 기억을 잃어버린 입자들, 그 세세한 그림들을 물거울로 비추어본다. 거울을 포개고 각도를 이리저리 맞추어본다. 아무래도 내 등뼈는 지나치게 단단한가 보다. 두드리는 물의 타자가 현대문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파도가 와서 거든다. 좌에서 우에서, 제 맘대로 흔든다. 눈꺼풀을 덮었으나 눈은 잠들지 않는다. 점점 물속이 환해진다. 포식성이 강한 물방개가 잠수타기놀이를 하고 있다. 어서 잠들라고 주인이 소등을 하였으나, 파도가 굼틀굼틀 내 등짝을 들었다 놨다 잠을 뭉갠다. 깨어있으라는 듯이. 심술을 놓는가, 뒤척이며 안간힘을 쓴다. 뭉친 내 근육을 풀어주려고 딴엔 안마를 하는 모양이다. 엷은 간지럼을 태운다. 그러다가 사정없이 주먹질로 팬다.
점점, 좀 심하다. 왜 이러는지, 파도가 이토록 내게 애달파하는 이유가 뭘까? 물밑으로 생각을 깊이 밀어 넣는다. 울렁거린다. 좌우 전후로 진좌가 커지면서 높낮은 물봉우리를 오고 간다. 참다못한 돌미역들이 물밑을 많이 흔드는가 보다. ‘팩’하는 해초의 효험을 느껴보려고 눈을 감아본다.
파도가 또 잠을 쫓는다. 눈초롱 안으로 저만큼 고래등이 보인다. 푸우 물을 뿜으면서 굼심굼실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검은 파도가 길길이 날뛰며 밀려온다.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멸치 떼 새우 떼가 모였다 흩어졌다, 투망치는 모양무늬를 그린다. 그것도 진정효과가 있기는 있나 보다.
의식의 마지막 지점을 넘어서려는데 등밑에 달린 회전날개에 뭐가 걸리는 느낌이다. 대마도일까? 암초일까? 파도와 물이 서로 갈등하는 걸로 봐서 대한해협을 건너나 보다. 애무가 불규칙해진다. 수심이 얕다지만 늘 역사의 파고가 높았던 곳. 뜨거운 물이 밀려오다 차가운 물이 밀려오다 한다. 왜인에게, 왜바람에, 신들린 수길에게, 수도 없이 깨어졌을 대한해협의 파도들이 이렇게 내 척추의 순도를 점검하는 연유를 짚어본다.
겁먹지 말자고 탕에서 출렁이는 물속에 미리 등을 담그고 나오지 않았는가. 신경을 진정시키느라 마른 오징어를 씹었고, 술로 목을 헹구고 과자부스러기들로 이빨을 깨물지 않았던가. 하지만 메스껍다. 물은 척추를 만지고 어르는데 파도는 등을 두드리고 몸을 흔든다. 울렁일 때마다 머리가 어지럽다. 목에 쥐가 난다. 등으로 받는 애무, 등으로 느끼는 오르가슴이 좀 심하다. 울컥울컥 입으로 쓴 것이 올라온다. 찬바람을 쐬면 좀 나을까 선상으로 나온다. 그때의 바바다. 절망을 겹겹이 칠했던 바다, 지난 역사를 다 쓰려고 밤새워 먹을 가는 맷돌이 돌고 있는가? 검은 낯빛을 번질거리는 파도골짜기에 소주 한 잔 뿌려 잠시 읍을 올린다.
다시 등이 물을 맞는다. 척추를 어루만지는 잔잔한 손길을 타고 역사의 소리들이 청진기로 몰려와 들끓는다. 고국을 돌아보며 바다를 건넜을 귀와 코, 그 베어짐의 귀성(鬼聲)들이 지금도 이렇게 내게 수전파로 오고 있다. 마지막 왕실의 옹주를 위로하는 최 어른의 손길에서 나오는 소리도 나의 애를 끊나니, 슬프게 빼면 더 슬프게, 기쁘게 빼면 기쁨으로 나오는 은의 소리, 오늘이 밤바다를 슬프게 은을 빼면서 지나간다. 젊었던 시인의 별 헤는 밤이 부지런히 어머니를 향해 물결을 탄다. ‘황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어느 바위에 앉아 머리 빗는 인어의 애절한 노래가 수중음으로 울린다. 해저에서 파도를 부수며 수도 없이 건너오는 소리, 소리들. 옛, 그 어느 날 내 척수의 원조들이 이렇게 살아남아서, 대륙붕의 바다를 건너는 등을 아프게 안마한다.
물은 흐른다. 어디를 가나 흐르는 물은 있다.
‘관부연락선’에 흐르던 물, 그 회한을 파도 타는 대한해협의 물은 물이 아니었다. 이제는 ‘부관훼리호’로 바뀌었다. 아늑한 삼등선실에 등에 닿는 물의 느낌. 그냥 흘러온 물이 아니다. 깜깜한 서녘 수평선으로 기우는 조각달을 안주 삼아 강소주 한 잔 입에 탁 털어 넣는 느낌 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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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물의 느낌>에 대한 박양근 교수님의 평설이다. 수필작법을 겸하고 있어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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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소통 : 메를로 퐁티의 몸말과 교감
박양근 교수
몸은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사람에게 주어진 소통수단에 말과 글이 있다. 말을 구어라 하고 글을 문어라고 부른다. 그것에 덧붙여 ‘몸이 말한다’는 것이 있다. 몸이 지닌 표현의 효율성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표현이다. 메라비안 법칙에 따르면 말이 차지하는 비율이 7%라면 신체가 감당하는 생리적 표현은 무려 93%에 이른다고 한다. 독자도 관념적인 일상어보다 비언어적인 몸말과 형이상학적인 물체로 더 많은 내용을 받아들인다. 이것을 문학에서는 이미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몸으로 말하기’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메를로 퐁티는 소통과 담론을 ‘살’(la chair)로 정립한 프랑스의 철학교수이다. 그가 말하는 살은 몸(flesh)과 육(肉)으로서 마음(mind)과 반대개념으로 자리한다. 그가 정립한 현상학도 몸과 살의 직접적인 소통을 더 중시한다. 몸은 정신활동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물체나 공간을 채우는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증명하는 실체인 것이다. 몸이 말함으로써 인간 존재가 더욱 뚜렷해진다는 것이 메를로 퐁티의 ‘살’의 개념이다.
몸의 주체가 되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몸에 연루된다. 세계가 존재하는 까닭도 살은 살아있는 표현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세상은 지각하는 순간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김춘수의 꽃을 생각해보자. 이름을 부르면 꽃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전형적으로 메를로 퐁티가 말한 몸 이론을 바탕으로 한 해석이다. 꽃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나와 관계맺음이 이루어진다. 몸이 느끼지 않거나 입으로 이름을 붙여주지 않으면 꽃은 존재할 수 없다. 나무도, 집도, 친구도, 국가도 존재의미를 상실한다.
왜 수필에서 ‘살’이론이 필요한가.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면서 성찰의 문학이라고 말한다. 성찰은 몸이 사물을 보고 만지고 느낀 후에야 동하기 시작한다. 몸이 마음을 이끄는 형국이다. 선행자각과 후행인지라는 교감은 메를로 퐁티가 제시한 몸의 형상과 다를 바 없다.
지난 호에는 몸으로 말하거나 대상을 몸에 비유한 수필이 다수 발표되었다. 그 중에서 고목의 일생, 바다를 달리는 배의 운항, 슬프나 고귀한 여성의 삶을 다룬 <천명>, <물의느낌>, <배, 몸, 인간>이 주목을 끌었다. 이들 작품은 사람의 몸통, 등, 배가 지닌 주제를 전달하면서 작품의 진의를 성공적으로 의인화하고 있다. 그 점에서 이들의 낯선 화술은 평설의 대상으로서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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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운 : 현해탄의 <물의 느낌>
이고운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지금 현해탄을 오가는 부관훼리호의 삼등선실에 있다. 작가는 선실에 등을 대고 누워있고 배는 선체의 하반신이 바닷물 속에 잠겨있다. 바닷속의 배와 배 속의 작가는 파도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낸다. 등이 선실바닥에 접촉함으로써 온몸으로 느끼고 ‘만세’와 같은 자세가 여느 때보다 긴밀한 접속력을 유지시켜준다. 달리 말하면 작가와 배와 바다 사이에 이루어진 교감이 몸말의 소통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물의느낌>의 첫 문장은 ‘등이 물에 닿는다’이다. 그 문장은 이내 ‘물이 등을 만지다’로 이어진다. 등과 물 사이에 능동과 수동의 구별이 사라지고 주체와 객체의 체위가 모든 문장에서 가능해진다. 모든 곳에서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신과 육체가 상호 조응하는 작용이다. 닿으려면 살과 몸이 마주쳐야 하고 언어를 교환하여야 한다. 이고운은 어떤 수필가보다 소통이 교감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작가의 상상력이 배와 물에 숨겨진 역사를 드러내고 있다. <물의 느낌>에 등장한 화자가 몸말을 번역하는 통신병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찟, 신호가 온다. 내 척추의 역사, 물이 보고서를 타전한다. 회신이 오는가. 이상하다. 추울렁쿠울렁 바위가 우는 느낌이다. 그 울음이 내 등판에 물타자를 친다. 톡, 톡톡, 아주 노련한 독수리타법이다. 청진기에 웅성거림이 있다. 오래 전에 내가 잊은 고어 같다.
작가의 몸이 배의 진동에 반응한다. 모르스의 무선전파처럼 배의 진동과 소음이 작가의 몸에 닿으면서 언어의 자모(字母)를 찍어낸다. 이때 생기는 반응이 의식의 깨침이다. 의식은 외부의 자극이 있을 때만 깨어난다. 이것은 메를로퐁티가 말한 바 있는 살말로서 작가는 교감의 의식을 ‘물방개가 잠수타기놀이’로 표현한다. 작가가 물방개라면 파도의 움직임은 ‘안마와 간지럼과 주먹질’로 풀이된다. 물이 일으키는 안마와 간지럼과 주먹질은 물리적 운동에 속한다. 하지만 물리적 운동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단순한 승객이라면 뱃멀미라는 생리적 반응만 보여주면 된다. 그런데 이고운은 일반 승객이 아니다. 남다른 반응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물의 운동을 ‘물의 느낌’으로 풀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는 지금 부산과 시모노세끼의 한가운데를 달린다. 그곳의 파도는 위력이 세다. 작가는 그 위력을 ‘이토록 애달파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느낀다. 배의 진동은 무엇인가 호소하려는 몸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다. 작가의 몸이 파도를 의미하는 말로 받아들이면서 배의 몸말도 조응한다. 몸이 선실바닥에 얹힌 살덩어리가 아니라 바다의 언어를 전달하는 공명상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거친 파도가 전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일간의 역사적 갈등이다.
수심이 얕다지만 늘 역사의 파도가 높았던 곳. 뜨거운 물이 밀려오다 차가운 물이 밀려오다 한다. 왜인에게, 왜바람에, 신들린 수길에게, 수도 없이 깨어졌을 대한해협의 파도들이 이렇게 내 척추의 순도를 점검하는 연유를 짚어본다.
이고운이 대한해협에 잠긴 역사를 자각하는 순간 지금까지 하나였던 의식과 몸이 분리한다. 먼저 몸이 불편함을 표현한다. 머리가 어지럽고 목에 쥐가 나면서 뱃멀미가 심해진다. 그의 뱃멀미는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 아니다. 그것에 덧붙여 불쾌한 역사가 일으킨 심리적 뱃멀미가 생겨났지 때문에 더욱 참을 수 없다. ‘술로 입을 헹구고, 아픈 등을 두드린다.’ 그러나 이것도 바다와 소통한 결과로서의 몸말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선실바닥에 눕혔던 몸이 선상 위로 올라온다. 그 행위는 고래의 몸 속에 들어갔다가 몸 밖으로 나온 성경 속의 요나와 같다. 요나는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고래의 뱃속에서 소화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배위로 올라온 작가도 작가의식을 되찾아 대한해협에 잠긴 아픈 역사를 풀어낸다. 그 화소는 ‘왜군에게 베어진 귀와 코, 마지막 왕실의 옹주, 최 어른의 소리, 밤 별 헤는 시인’등이다. 나아가 ‘바다를 건너는 모든 한인 승객들의 아픔’을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어디든 물은 흐른다. 하지만 모든 바닷물이 ‘회한의 파도’가 울렁대는 대한해협이 될 수 없고 몸 언어를 지닐 수 없다. 부관훼리호가 운행하는 바다만이 근대역사의 검푸른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작가는 바다가 말하는 내용을 전달할 따름이므로 ‘물의 느낌’은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역사로 기록된 현실인 것이다. 나아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는 교감으로 존재한다.
이고운은 물의 느낌과 배의 진동과 자신의 몸말로 눈물겨운 역사를 해득해 내었다. 독자도 역사의 아픔을 몸으로 받아들인다. 작가가 해협에 깊게 침잠한 덕분에 ‘느낌’으로 읽는 현해탄 역사를 한편의 수필로 남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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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물을 자각하고 목격하고 이야기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다. 이것을 알아챈 메를로 퐁티는 인간의 사유는 마음이 아니라 몸에서 시작하며 몸이 가장 확실하게 서로를 자각시켜주는 언어라고 보았다. 실제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문자보다는 몸으로 소통하였고 관념적인 것일수록 몸이라는 가시적 형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소통방식에 속한다.
작가는 몸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수필은 본질적으로 체험의 문학이고 체험은 몸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작가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몸의 언어를 자각하느냐에 따라 소통의 정도가 달라진다. 결국 체화는 외적 사물을 자신의 몸과 몸말로 표현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 정의를 이미지라고 불렀지만 메를로퐁티는 몸이라는 말을 정립함으로써 대상과 주체와의 관계를 보다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그 점에서 문제작으로 다룬 세 편은 몸말을 의식하여 수필담론의 영역을 넓혔다고 평가할만하다. 수필가는 인위적인 언어가 아니라 생생한 몸말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꾸준히 지속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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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각달 맛이 어떨까? 편강 한 조각 소주 한 잔 수 없이 불렀든 젊은 시절, 황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은~~~~낯으로 물은 줄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