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는 얼마 전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걸 느꼈다. 어렸을 적 지독한 뇌성마비를 앓고부터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뭔가 고막을 울리는 진동을 느낄 수는 있었다. 그것이 규칙적이거나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흡사 모스 부호 같은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는 지금 버스를 기다린다. 꽤 오래 기다린 듯 볼이 빨갛게 붉어져있다. 정류장 주위에 선 사람들도 발을 동동 구르며 차를 기다린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하자 피난 가는 사람들처럼 우르르 버스로 몰려간다. 마치 이번에 타지 못하면 영원히 강을 건너지 못할 것처럼. 버스에 올라탄 마리는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서 있다. 이젠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처음 청력을 잃었을 때는 무척이나 슬퍼했었다. 들을 수 없게 때문이라기보다 사람들이 말하는 모습이 마치 붕어가 어항에서 물을 마시듯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인 듯 하다. 마리는 너무나 빨리 수화를 배웠고 얼마 되지 않아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처럼 익숙해졌다. 사실, 청력을 잃고 한 동안은 자신이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 적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마리는 농아학교 교사다. 다행히 집안은 그리 어렵지 않아 장애인 학교 교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고 지금은 고등반 음악선생님을 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다고 비웃었다. 듣지도 못하면서 무슨 음악을 가르치냐고. 하지만 마리는 청력이 없을 때보다 더 또렷이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최소한 현주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리는 지금 집으로 가는 길이다. 내일 아이들에게 내 줄 숙제를 생각 하고 있다. 뭐가 좋을까? 아이들이 지겨워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숙제를 내 주고 싶은데 쉽지는 않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마리는 내려야 하는 정거장을 벌써 지나쳐 가고 있다. 재빠르게 벨을 눌러보지만 운전기사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버스의 몇몇 승객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힐끗 마리를 쳐다보곤 이미 강을 건너고 있으니 자신들과는 상관없다는 듯 곧 고개를 돌린다. 소리라도 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운전기사에게 수화로 내려달라고 얘기할 까 하다 분명히 웃음거리만 되고 말거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참는다. 버스가 다음 정거장에 서자 마리는 원래 이곳에서 내리기로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내린다. 다시 돌아가야 되는 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마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걸음을 내 딛는다.
마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확히 얘기하면 뇌성마비를 앓기 전 기억이 없다.
마리가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그저 꿈을 꾸듯 펼쳐지는 어릴 적 살 던 동네이다. 이젠 그 기억마저도 희미해졌다.
사람들은 마리가 벙어리이고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꽤 호감을 가졌다. 하지만, 길에서 말을 걸어오던 남자들도 현주의 수화에 금방 죄송하다는 말만을 남기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이젠 마리도 익숙한 듯 그런 사람들을 너그럽게 받아준다.
오히려 마리는 조용한 세상이 마음에 든다. 서로 다투는 소리도 미워하는 소리도 자동차 경적소리도 들리지 않는 세상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젠 너무 익숙해져서 일까? 아니다. 사실 마리는 병을 앓기 전에도 세상이 너무 시끄럽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불필요한 소리들 때문에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싸우는 일을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집 근처에 이른 마리는 꽃집에 들어간다. 잠시 후 마리는 안개꽃 한 다발을 가슴에 안고 나온다. 안개꽃은 마리를 닮았다.
아니 마리가 안개꽃을 닮았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금방 사라질 듯 하면서도 강한 면모가 그렇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장미처럼 자신의 색깔이 강한 꽃들이 주는 극단적 성향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지금쯤이면 나타날 때가 됐는데. 마리는 문득 이런 자신이 우습다. 내가 지금 그 사람을 궁금해 하는 건가? 마리는 마치 시간을 주려는 듯 발걸음을 늦추며 마지막 골목을 지날 때 쯤 살짝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텅 빈 골목은 마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쳐다보고 마리는 조금 아쉬운 듯한 표정이다. 무슨 일일까? 이젠 나타나지 않으려고 하나?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마리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방으로 들어온 마리는 안개꽃을 물이 가득 담긴 투명한 병에 꽂는다. 잠시 안개꽃을 쳐다보던 마리는 욕실로 들어간다.
뜨거운 목욕물에 몸을 담근 채 마리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 마리는 가끔 자신이 어머니의 태반으로 다시 돌아온 느낌을 받는다. 갓 태어난 아기를 물속에 넣으면 익숙하게 헤엄치는 것을 TV에서 여러 번 본 기억도 있다.
사실 물속에서는 부력 때문에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고 특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긴장이 풀리면서 다시 자궁 속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기억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다. 아마도 무의식 속에서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어느 잡지에서 들은 얘긴데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장례를 치르곤 그 시신을 먹는다고 한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시신을 먹음으로써 그 사람을 지배한다고 하기도 하고 그 사람의 영혼을 먹는다고 들은 듯하다. 역시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는 생각에 마리는 피식 웃는다. 만약 누군가의 시신을 먹으면 그 사람의 영혼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이 한 생각에 스스로도 놀란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몸을 일으키며 거울 앞에 서 자신의 몸매를 잠시 쳐다본다. 괜찮은데.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마리는 문득 기억에 대한 생각을 다시 떠올린다. 방금 목욕했던 기억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인간의 뇌는 지혜롭게도 기억들을 계속 밀어내고 새로운 기억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인간의 뇌가 유지되게 한다고 한다. 경이롭기도 해라.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에 대한 새삼스런 놀라움이 느껴진다.
마리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생활 속에서 가끔은 인간의 몸에 대한 감탄을 한다.
일찍 잠자리에 들은 마리는 천장을 바라다본다. 내가 누구인지 기억한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건 무슨 소용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그렇다는 것을 마리는 사실 알고 있다. 마리는 천천히 감겨오는 자신의 눈꺼풀을 느낀다.
이른 아침, 마리는 무척이나 분주하다. 조금은 늦게 일어난 듯 방금 감은 머리도 말리지 못한 채 옷핀을 찾고 양말을 찾느라 허둥지둥한다. 집 근처 정류장에서 조급한 얼굴로 버스를 기다리는 마리는 시계만 연신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굴리지만 버스는 올 기색이라곤 없다.
꽤 오래 버스가 오지 않은 듯 정류장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선 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아이들보고 늦지 말라고 해놓고 내가 늦다니. 마리는 버스 안에서 오늘따라 막히는 도로사정에 조금은 짜증이 난다.
마리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학교로 향하고 있다. 아이들은 이미 다 나와 있겠지. 자연스럽게 들어가야 하는데. 괜히 미안한 척하면 더 이상하게 보일거야. 하지만 조급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교무실에 들르지 말고 바로 교실로 가야지 하다 몇 반 수업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늘 몇 반 수업이지? 3반인가? 아니면 5반? 가방을 뒤져 보지만 늘 갖고 다니던 수첩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하루 이틀 수업한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반이 헛갈리다니. 내 머리가 불필요한 기억들을 밀어내고 있나? 하지만 모든 기억이 순서대로 밀려나는 것은 아닐 텐데. 어느덧 교실 앞에 선 현주는 잠시 머뭇거리다 3반을 기웃댄다. 선생님이 없는 걸 보니 이 반이 맞는 건 같은데. 교실 앞문을 열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들어선다. 교탁 앞에 선 마리는 아이들을 쳐다보며 둘러본다. 이상하다. 아이들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잠깐 출석부를 보면 생각날 지도 몰라. 마리는 서둘러 출석부를 들쳐 빠르게 아이들의 이름을 살펴본다. 출석부의 이름들 중에 분명 익숙한 이름들이 있을 거야. 이럴 리가. 전혀 생각나는 이름이 없다.
다시 고개를 들어 아이들을 쳐다본다. 아이들은 마리를 익숙한 듯 웃음을 띠며 쳐다본다. 우선 인사라도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마리의 머리를 스친다. 수화로 안녕! 좋은 아침! 이라고 인사를 한다. 아이들도 수화로 선생님!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건넨다. 일단 인사는 했는데 다음은 어떻게 한다. 이 반 아이들에게 어디부터 가르치면 되지. 음악시간은 맞나? 계속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는 질문들. 모르겠다. 우선 아무데나 펴라고 할까? 아냐. 앞에 앉은 아이에게 어디까지 배웠는지 물어보는 게 낫겠어. 마리는 맨 앞 아이에게 ‘어디까지 했지?’ 라고 수화로 묻는다. 아이는 ‘53페이지요’라고 대답한다. 마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래, 그럼 거기부터 시작하자’고 얘기한다.
집 앞에 다다른 마리는 발걸음이 바빠진다. 추워서라기보다 뭔가에 쫒기 듯 그렇게 서둘러 걸어간다. 마리의 손엔 저녁 찬거리가 들려져 있다. 마리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쫒기고 있다. 사는 게 그렇지. 무언가에 계속 쫒기면서 사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무 것에도 쫒기지 않는 생활은 또 얼마나 끔찍한가? 그건 생활의 힘이다. 치유력이다. 기분 나쁜 일로부터 쫓겨 가는 것이고 나로부터 도망가는 것이고 어디론가 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그렇게 잊혀지는 것이다.
어느새 집 앞에 선 마리는 현관 키를 꺼내 열쇠구멍에 넣고 돌린다. 이런. 현관문은 이미 열려 있다. 점점 건망증이 심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잘못 된 건 없으니 다행이다.
학교에서 기억이 나지 않아 당황했지만 잘못된 건 없었던 것처럼. 그러고 보니 기억은 아무데도 쓸 데 없는 거추장스러운 악세사리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유일하게 필요한 기억은 배고프다는 느낌이다. 허기는 잊어버려도 다시 기억되고 기억된 듯싶다가도 다시 잊혀진다. 그래서 살아가는 거겠지.
마리는 식사를 한 후 소파에 누워 TV를 켠다. 또 누군가 감옥으로 들어간다. 그 사람은 전에도 들어갔던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에 처음 들어가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TV에서 보는 사람들은 어쩌면 저렇게 똑같이 보일까? 마치 그 사람들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영화배우처럼 느껴진다. 짜여진 각본에 의해서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능숙하고 자연스럽다. 뉴스시간만 되면 분장을 하고 감독이 큐사인을 보낼 때까지 자신이 해야 되는 역할을 맹렬히 연습하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실감나게 연기를 하는 베테랑 배우들. 마리는 자신의 상상이 조금 유치한 듯 느껴지자 자신도 모르게 풋하며 웃음이 터져 나온다. 다른 채널을 돌리자 이번에는 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실감나게 정글을 뛰어다니며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하고 있다. 저건 연기인데 실제보다 더 사실 같아. 사실 가장 뛰어난 배우는 나 자신 아닌가? 한 번도 연습해보지 않은 장면들을 틀리지 않고 정확하고 훌륭하게 연기하는 최고의 배우. 이 영화는 단 한 번의 컷도 NG도 없다. 감독뿐만 아니라 메이크업, 조명, 촬영, 각본 모두 내가 직접 하는 나 자신을 위한 진정한 드라마이자 뉴스이다. 내 인생의 뉴스. 어릴 적 배우를 꿈꿨던 적도 있었다. 마리의 끝없는 상상을 방해한 것은 다름 아닌 소품에 불과한 전화의 수신 램프였다. 마리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화들짝 놀라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전화기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들린다기보다 그냥 육감으로 알 수 있는 소리다. 그 남자다. 이젠 남자의 전화까지 익숙해져버린 마리는 당황하지 않고 전화를 받는다. 남자는 항상 똑같은 말만 계속한다. 하지만 마리는 이 남자의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 속삭이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하기도 하고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닌 듯 지글지글 끓는다. 사실 마리에게는 상관없다. 남자에게 말을 건넬 수도 없을뿐더러 그 남자의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자신에게는 없다. 그저 전화를 받아주고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을 테니까.
오늘은 남자의 이야기가 모두 이해되는 것처럼 귀를 기울여 들어보지만 역시 역부족이다.
남자는 모른다. 마리가 귀머거리이고 거기다 벙어리라는 사실을 모른다. 마리가 말해주지 않은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남자가 전화를 끊은 뒤에도 마리는 계속 수화기를 들고 있다. 남자가 전화를 끊었건 아니건 마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을 리 없다. 마리는 지금까지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까지만 듣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전화기를 들고 있으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착각이 들어서이다. 오늘의 대화는 날씨에 대한 거라고 짐작해본다. 얼마 전부터 기온이 내려가면서 본격적인 겨울에 들어섰기 때문에 남자는 분명히 마리의 건강이 궁금했을 것이다. 아니라도 달라질 건 없다. 잘못된 것 없으니까.
마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소파에 앉는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총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무언가 여자에게 말을 하려고 한다. 안타까운 얼굴의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에게 말하지 말라며 울먹인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지금 얘기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젠 죽어야 하니까. 그건 남자가 마리에게 계속 전화를 거는 이유와 같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게 이유다. 리모콘으로 다시 채널을 돌리자 아까 감옥에 들어갔던 남자는 사라지고 불에 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섬유공장의 화재 현장이 나온다. 기자로 보이는 남자는 무언가 심각한 얼굴로 쉴 새 없이 떠들어 대고 화재 현장 위로 10명이 불에 타죽고 그 이상이 중상이라는 자막이 뜬다. 정말 그럴까?
마리는 평소보다 일찍 학교 언덕을 오르고 있다. 일기예보에서 올 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뼈 속까지 얼어버릴 듯한 추위에 마리는 외투를 끌어올리며 속도를 내 걸음을 옮긴다. 아직 새벽이라 학교는 불도 꺼지고 등교하는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교무실에 들어 선 마리는 먼저 가스난로에 불을 켜고 주전자를 올려놓는다. 참, 세상 많이 좋아졌네. 어렸을 적 난로는 불을 피우기 위해 교실 가득 연기로 가득차는 난리를 겪어야만 훈훈하게 만들어 줬는데 이젠 그런 대가를 치루지 않아도 어느새 훈훈함이 밀려온다. 마리는 주전자에서 새어나오는 김을 신기하게 쳐다보다 잔에 물을 따라 커피를 탄다. 자리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던 마리는 왠지 모를 피곤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왜 이러지. 충분히 잠을 잤는데도 밀려오는 졸음에 스르르 감기는 마리의 눈꺼풀은 세상 전체보다도 무겁게 느껴진다.
이상하다. 지금쯤이면 지나갈 때가 됐는데. 남자는 며칠 째 보이지 않는 마리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처음 마리를 버스정류장에서 봤을 때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람들이 첫 눈에 반했다는 얘기를 마치 무공훈장처럼 자랑할 때 비아냥거리던 자신에게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날씨가 꽤 춥다.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될 거라는 일기예보를 증명이라도 해보이듯이 기온은 영하로 곤두박질치고 바람은 거세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손엔 안개꽃 한 다발이 들려 있다. 처음 마리를 보는 순간 안개꽃을 닮았다는 생각에 매일 마리에게 안개꽃을 주려고 기다렸다. 하지만, 마리는 남자의 어설픈 구애 때문인지 대꾸도 없이 간단히 고개만 까닥하곤 총총걸음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남자는 마리의 썰렁한 반응에 오히려 힘이 났다. 돌아서 가는 마리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묻어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리를 처음 본 건 정확하진 않지만 올해 봄 쯤 이었던 것 같다. 버스정류장 주위로 개나리가 활짝 피어 있을 무렵 개나리 사이로 마리가 지나갔다. 꽃 사이로 꽃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어렵사리 마리의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왠지 마리는 남자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면서도 순수한 남자의 눈빛 때문인지 전화번호는 적어주었다.
집에 없는 것 같다. 보통 집에 있으면 세 번 정도 신호가 울리면 받기 때문이다. 열 번의 신호가 울리는 걸 보면 마리는 집에 없는 거다. 어떡한다. 그냥 집에 갈까? 아니면 더 기다려 볼까? 남자는 조금 더 마리를 기다려 보기로 한다. 남자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 갑을 꺼내는 순간 이미 마지막 담배를 피웠다는 기억이 났다. 담배를 사러가려면 10분쯤 떨어진 편의점까지 가야하는데 그 사이 마리가 지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자는 주저하게 된다.
지금까지 안 오는 걸 보니 오늘은 야근을 할 거라는 생각에 미치자 남자는 성급히 편의점 쪽으로 방향을 돌려 걸어간다.
편의점에 들어 선 남자는 계산대로 바로 걸어간다. 담배를 빨리 사야한다는 생각으로 안절부절 하는 남자의 얼굴은 순간 찌푸려진다. 계산대에는 네다섯 명의 손님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다. 거기다 신입으로 보이는 점원은 갑자기 몰려 든 손님들로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며 계산기를 조작하지만 뭐가 잘못됐는지 계산기는 계속 에러 메시지를 띄운다.
남자는 조급한 마음으로 멀리 골목을 쳐다본다. 몇몇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다. 이런. 언뜻 마리처럼 보이는 여자가 빠르게 골목사이를 지나가는 게 보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 뛰어가 봤자 마리는 이미 집 앞에 이르렀을 것이고 현관 키에 열쇠를 꽂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 스토커처럼 보이면 안 되는 거다. 남자는 그렇다 치고 마리는 얼마나 당황할 것인가. 안개꽃처럼 맑은 현주에게 그런 당황스러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
남자가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계산기는 어느새 정확히 물건의 가격을 찍어대고 한 명의 손님만 남아있다. 남자는 계산대로 걸어가 타임하나를 사서 편의점을 나온다.
다시 골목으로 가볼까. 마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잠시 고민에 잠기며 담배를 피워 문다. 내일 다시 와야지. 그럼, 꽃도 다시 사야겠다. 그런데, 정말 지나갔을까?
집에 들어선 남자는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고 안개꽃을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곧 물병에 안개꽃을 조심스럽게 꽂는다. 벌써 이렇게 꽂아놓은 게 몇 번이나 될까?
남자는 다시 거실로 나와 소파에 털석 몸을 던진다. 리모콘으로 TV를 켜자 누군가 감옥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다시 리모콘으로 TV를 끄고 담배를 피워 문다. 길에서 추위에 떨어서일까? 갑자기 몸이 으스스 떨린다. 이러다 감기에 걸리겠다는 생각에 목욕탕으로 향한다. 뜨거운 물줄기가 남자의 몸으로 떨어진다. 욕조엔 이제 물이 조금씩 차올라 온다. 하지만 남자는 기다릴 수 없는 듯 욕조에 몸을 담근다. 뜨거운 김이 욕실에 서리기 시작하고 남자는 물의 따뜻한 느낌에 서서히 눈을 감는다.
언제부터일까? 기억나는 일보다 기억나지 않는 일이 많아진 게. 어릴 적 일들은 어렴풋하면서도 가장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 반면 일주일 전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어제 일은 더더욱 기억나지 않는다. 그건 아마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 일거다. 그렇다면 필요에 의해서 기억은 존재하는 것일까? 기억나지 않으면 없었던 일일까? 마치 꿈처럼 그저 허상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상상일까? 그것이 맞는다면 내일 아침 회사에 갔을 때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남자에게 회사는 사실 별로 중요한 일도 기억할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는 편이 맞겠다.
아. 얼어있던 몸의 근육들은 착한 아기들처럼 순순히 물에 복종하듯 늘어진다. 이런 노곤함은 생각을 백지로 만든다. 눈을 감아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느낌은 편안하면서도 불안하다. 마약을 하면 이런 느낌일까? 학창시절, 친구들 중 불량스런 아이들은 싸구려 본드를 마시곤 풀어진 눈동자로 나대곤 했다. 마치 천국에 있는 듯한 얼굴로.
퓨웅! 손에서 레이저가 나가고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고 자신이 람보나 외계인처럼 전지전능하게 된다고 했다. 아니 그런 느낌이라고 했다. 그건 가능성이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에 얼마나 남자는 쫓겨 왔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조금만 하면 될 것 같은 혹은 이미 목표를 이룬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 해왔는가를 생각하자 갑자기 오한이 밀려온다. 사실 단 한번이라도 그런 성취감과 쾌감을 느낄 수 있다면 마약이 아니라 더한 것을 해서라도 느껴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어찌 보면 그 친구들은 세상 끝을 경험한 지도 모른다. 남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 짜릿한 쾌감. 언제나 불만으로 가득 찬 일상 속에서 버둥거리며 마약처럼 나를 강렬하게 유혹하던 목표는 결국 나를 더욱 처참하게 만들기만 할 뿐이었다. 욕조에서 넘친 물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남자는 급히 몸을 세워 수도꼭지를 돌려 잠근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곤 거울 앞에 선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는 김을 닦지 않고 그냥 서 있다. 자신 없다. 아니 무섭다. 난 내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남자는 가끔 난데없는 상상에 빠진다. 지금 거울을 닦아냈을 때 낯선 남자가 서 있으면 어떻게 하지. 내가 날 기억하지 못하거나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건 기우다. 아니 아직까진 항상 남자가 서 있었다. 문제는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는 거다. 그건 가능성이다. 남자는 결국 거울을 닦지 못하고 욕실을 나간다.
타다닥. 마리는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창밖은 이미 깊은 어둠에 덮여있다. 몇 시지? 벽에 걸린 시계는 벌써 9시를 가리키고 있다. 마리는 급히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현주는 교무실에 걸린 달력을 쳐다보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개교기념일이다. 그래서 아무도 없었나보다. 난감한 마리는 서둘러 옷을 입고 교무실을 나간다.
버스에 탄 마리는 아직까지 자신의 행동에 어이없어하는 표정이다. 정신이 나갔나. 개교기념일도 까먹고 출근을 하다니. 이래서 기억이라는 건 무용지물이라니까. 마리는 괜히 기억에 책임을 넘기고 싶어진다. 삑삑거리는 메시지 음에 마리는 핸드폰을 꺼내자 문자메시지가 들어 와있다. 엄마다. 맞다. 오늘 엄마와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그것까지 잊어버렸구나. 이정도면 심각한 수준이다. 할 수 없지. 오늘은 집에 가고 내일 전화해야겠다.
집에 가는 길에 마리는 정류장 근처의 편의점에 들렀다. 라면 몇 개와 햇반을 사가지고 나오는 마리의 눈에 뭔가 들어왔다. 바닥에 떨어진 안개꽃 몇 가닥. 마리는 허리를 숙여 안개꽃을 집는다. 누군가 흘리고 갔나보다. 안개꽃은 누구에게 갔어야 하는 것일까? 잠시 마리는 상상에 빠진다. 하지만 곧 편의점을 나선다. 이미 시계가 11시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집 근처 골목을 지나갈 때 쯤 마리는 문득 남자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젠 정말 안 나타날 생각인가 보다. 말해줄걸 그랬나? 아냐. 말해줬으면 벌써 실망하고 도망갔을 거야. 하다가 지치면 포기하겠지. 그래도 서로 모르는 편이 나을 때도 있으니까. 마리도 남자에 대해서 아무 것도 묻지 않았으니까 공평할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내일은 엄마와 저녁식사를 꼭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으로 가는 걸음이 더욱 빨라진다.
마리는 무언가 속삭이는 소리에 잠을 깼다. 그건 꿈처럼 몽롱하면서도 현실처럼 너무도 생생했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들이 만들어내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허공을 떠도는 바람이 가슴에 쌓인 이야기를 뱉어놓는 것도 같았다. 속삭임은 남자의 전화처럼 지글대며 외계의 언어처럼 들린 적은 있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하고 또렷하게 들린 적은 없었다. 어쩌면 이젠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작 세상의 소리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지만 이 소리만은 잘 들을 수 있을 건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소리는 방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류가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바람에 섞여 내려오는 소리인 듯 하다. 인간이 원숭이에서 지금의 사람으로 되기까지의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역사책 같은 소리다. 남자가 한 여자에게 구애하는 달콤한 이야기부터 그 남자가 전쟁에 나가 주검으로 돌아왔을 때 여자의 절망감에 찬 울부짖음 그리고 그 여자의 아기가 커서 다시 죽었을 때 아기의 아내가 흐느끼는 소리까지. 인간의 모든 희노애락, 원초적 쾌감과 고통까지도 모두 담고 있는 그런 소리이다. 눈을 뜬 현주는 천장이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뱅뱅 도는 것처럼 보인다. 이마는 불덩이처럼 펄펄 끊는다. 몸살이다. 현주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전화기를 들었다 내려놓곤 핸드폰을 집어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마리는 엄마에게 와달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침대로 쓰러진다.
학교에도 전화를 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할 수 없다. 전화가 오겠지. 아니면 엄마에게 전화를 부탁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다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천장을 응시하자 조금은 천천히 돌아간다. 마리는 자신을 기다리던 남자가 떠올랐다. 설마. 내가 그 남자를 좋아하고 있나?
아플 때 생각나는 사람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단 한번도 제대로 얘기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을 좋아할 리 없다. 그건 가능성이다. 이런 자신의 생각에 마리는 자신도 놀라지만 당장 불처럼 뜨거운 열을 내릴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오늘은 여자에게서 무슨 말이든 들어야겠다. 계속 이런 식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시간낭비라는 생각보다는 충분히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었다는 확신이 들어서이다.
그리고 이건 예의가 아니다. 남자는 짝사랑은 불공평한 게임이며 어떤 경우도 상대방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믿어왔다. 자신이 대학시절 사귀었던 그리고 자신을 짝사랑하던 모든 이성들에게 예의를 지켜 왔다고 믿는다. 더 이상 만날 마음이 없음을 정중하게 통보하기도 통보받기도 했다. 조금은 비인간적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인간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용암처럼 뜨거운 정열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 예의는 그 만큼 중요한 것이다. 인류의 먼 조상들이 들판에서 짐승을 잡을 때도 조차도 예의는 있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많은 공을 들인 인간만이 가진 고차원적인, 고유의 체계를 그렇게 함부로 손상시켜서는 안 되는 거다.
남자의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은 긴장되기 때문이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 번도 제대로 얘기해 본 적이 없으니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원래 이런 일일수록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불확실성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행동뿐이다. 정류장에 버스가 멈춰 서자 우르르 몰려가고 인파들 사이로 뒤섞인 남자를 태운 버스는 곧 어디론가 떠나간다. 정류장에 이제 아무도 없다. 조금 전 떠나간 사람들은 시간 속에서 사라진 거다. 생활 속 시간들은 좀처럼 먹지 않는 반찬처럼 그 존재의미가 희미하다. 누구도 잘 먹지 않는 반찬을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설령, 그 반찬을 먹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텅 빈 정류장에 한 여자가 멈춰 선다. 마리다. 지금 현주는 기억의 진공 속에 서 있다.
마리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그건 가능성이다.
남자는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시간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지만 오늘은 시간이 지겹도록 가지 않는다. 아니 지겹도록 시간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은 말년병장의 시간처럼 지겹더라도 가고 오게 된다.
남자는 회사 건물을 빠져 나와 여자의 집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도로는 자동차들로 점령되어 꼼짝 하지 못한 채 빵빵대는 자동차들의 항의만 묵묵히 듣고 있다. 자동차안의 사람들은 전당포에 무언가 저당 잡힌 사람들처럼 그렇게 속수무책의 우울한 얼굴로 갇혀 있다.
남자는 안개꽃을 사지 않았다. 그저 여자에게 해야 될 이야기와 벌어질 상황들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해서 일 것이다. 설령, 까먹었다 할지라도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잘못된 건 없다. 오늘은 골목이 아니라 여자의 집 앞에서 기다려야겠다. 골목은 너무도 많은 사이 길로 여자를 놓치기 쉬울뿐더러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여자가 불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남자에게 유리한 곳에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건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던 남자는 문득 처음 여자를 만난 날이 떠올랐다. 버스 정류장에서 여자를 본 남자는 집 앞까지 따라왔던 것이다. 그리곤 바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마리의 당황하던 기색이 역력하다. 남자가 쫒아 온 이유를 말하자 마리의 얼굴엔 당황스러운 듯하면서도 엷은 미소가 지나쳤다. 그리곤 남자는 마리에게 전화해도 되겠냐고 물어보곤 웃기만 하는 마리에게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남자가 마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의 집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문다. 순간 담배 연기가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머리속이 연기처럼 하얗게 돼버리는 것을 느낀다. 남자의 담배가 꺼져갈 무렵 골목으로 불어오는 칼바람은 담벼락에 부딪혀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다 허공에서 몸부림치듯 포효한다. 포효하는 바람소리는 남자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 서서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마리는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다 매서운 바람에 코트 깃을 올려 세운다. 개교기념일이 아니었다니. 그럼, 난 어제 어디 있었다는 거지? 분명 학교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내 기억으론 개교기념일이 맞는 데 말이다. 엄마 말대로 노처녀라 헛것이 보이는 걸까? 내가 가나장애인학교 음악선생은 맞나? 귀머거리고 벙어리인건. 어쨌든 믿지 못할 일이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골목에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괜히 현주의 걸음도 빨라진다.
집 근처에 다다른 마리는 무언가에 놀라 걸음을 살짝 멈춘다. 집 앞에서 서성이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한동안 안보이더니 오늘은 무슨 일로 집 앞까지 와서 기다리는 거지.
거기다 매일 들고 오던 안개꽃도 들지 않은 채 말이다. 남자에게 오늘은 결정을 내려줘야 할 것 같다. 그게 남자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남자는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왔을 것이다. 현주가 기억하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그렇게 그 자리에서 기다려 왔다. 어쩌면 남자가 태어나기 전 남자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기다린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의 눈에 골목 끝에서 걸어오는 여자가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여자는 시간을 거슬러 걸어오고 있다. 남자는 묘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여자를 기다린 건 자신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조상들이고 기억할 수 없는 시간을 이어온 기다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의 먼 조상은 여자를 기다려 온 것이다. 인류의 먼 조상들이 두려워했던 건 예측 불허한 기온변화도 아니었고 언제 자신을 위협할지 모르는 천적도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매일 먹으면서도 기억하지 못하는, 손이 잘 가지 않는 반찬으로 전락 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남자는 어디선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처음엔 허공 속 누군가가 속삭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밖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라는 것을 몸으로 알 수 있었다. 그건 남자의 세포와 뼈 속에 녹아있는 조상들의 소리다. 하지만 아직 남자에게 그 소리는 정확히 이해될 수 있는 언어는 아니다.
마리는 남자 앞에 서 있다. 추위에 얼어붙은 남자의 빨간 볼과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보자 왠지 가슴이 저려왔다.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얘기한 적조차 없는 남자에게서 이런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가능성 있는 일이다. 남자는 마리에게 천천히 걸어온다. 마리와 남자는 서로의 눈을 쳐다본다. 남자는 먼 조상들의 이야기가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생생한 육성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젠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아니 여자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얘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서서히 속삭임들은 인간의 언어적 형태를 갖추고 남자에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어떤 경우에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
마리는 남자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낀다. 남자의 조상들이 기억할 수 없는 시간동안 자신을 기다려 온 시간에 대해 무언가 보상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마리는 남자에게 짧게 얘기한다. 사랑해요. 마리의 말에 남자는 학창시절 친구들이 느꼈던 람보나 외계인이 된 듯한 전지전능함과 같은 절정을 느꼈다. 그들이 얘기한 극도의 짜릿한 쾌감이 무엇인지 알 것 같고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혀왔던 가능성에 대한 절망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마리는 속삭임이 더욱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걸 뱉어낸다.
사랑해요. 아주 오랜 시간동안. 당신의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리고 기억할 수 없는 먼 조상들이 나를 기다린 만큼 당신을 사랑해요.
마리는 알 수 없는 속삭임이 언제부터 들렸는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자는 잊어버렸다. 자신이 벙어리이면서 귀머거리라는 것도. 그렇게 기억은 믿지 못할 것이다. 아침에 먹은 손이 가지 않는 반찬이 기억되지 못하는 것처럼.
하지만 남자는 다시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예의를 지키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지켜져 온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라기 보다 더 이상 예의를 지킬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첫댓글 소설 계속 보내줘서 고맙다. 연락 좀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