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 사이의 막내로 태어나다.
형은 12년 위, 누나는 6년 위임. 부농집안. 1923년 5세무렵 아버지 죽다. 그
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사과를 먹기 전에 그리고 먹었다고 한다.
1925년
마을 서당에 다니다가 평양 외가로 가서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선국적인 유화가인 김찬영의 아들이며 뒤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한 반이 됨.
김찬영의 집에 가서 각종 화구와 미술서적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무덤유적 안에서 잠자기도 하고 운동과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소와 새와 게']
1931년
졸업.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미술부에 가입해 교사이던 유화가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음.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 을 그리다.
이후 한글로 이름 쓰기를 실천하다.
이때부터 소를 즐겨 그리다.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 다쳐서 1년간 학교를 쉬다.
1934년
일본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친구들과 교사에 불을 지름.
졸업 기념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가 일었음.
1935년
졸업 후 곧 일본 토오쿄오로 가서 테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
연말에 다쳐 쉬면서 프랑스 어 공부에 몰두.
1936년 21세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분카 가쿠엔으로 옮겨 입학.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상급생이었음.
강사로 나오던 쓰다 세이슈와 친밀하게 됨. 기츠조지의 아파트에서 자취생활을 함.
['달과 까마귀']
1938년
일본인 화가들이 창립한 단체 지유미즈츠가쿄카이(自由美術家協會)의 2번째 공모전(이하 지유텐)에
응모하여 첫 출품에 협회상을 받았으며 동시에 평지들의 대호평을 획득하다.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를 알게 되어 사귀기 시작하다.
1940년
졸업. 토오쿄오에 머물면서 제작에 몰두.
두해전에 이어서 토오쿄오와 경성에서 열린 4번째 지유텐에 <서있는 소>, <망월>, <소의머리>,
<산의 풍경>을 내어 커다란 찬사를 받다.
휴가로 원산에 있으면서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함.
1941년
26세 일본에 있던 미술유학생인 김종찬, 김학준, 이쾌대, 진환, 최재덕 그리고 문학수와 더불어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토오쿄오에서 창립전을 가짐.
<연못이 있는 풍경>을 출품 하다. 이어 경서엥서 열린 전시에도 출품하다.
이어 경성에서 열린 전시에도 출품하다. 5번째 지유 텐에 <망월>과 <소와 여인> 출품, 회우로 추대되다.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대향 이라는 호를 지음.
휴가로 돌아와 개성박물관에 다니며 스케치에 몰두했다.
조선신미술가협회의 주동자인 이쾌대의 형 이여성과 그를 통해 알게 된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글을 읽고 감화받은 결과로 보인다.
['나무와 달과 하얀새']
1942년
27세 6번째 지유텐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소묘>, <목동>, <지일(遲日)> 등을 출품하다.
경성에서 식민 당국의 종용으로 신미술가협회로 바뀐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다.
시인 오장 환, 서정주와 교유한 것으로 보임.
시인 서정주의 증언에 의하면 마사코가 경성으로 와 놀다가 갔다고 한 다.
1943년
28세 7번째 지유텐에 이대향(李大鄕)이라는 이름으로 <소묘1>, <소묘2>, <소묘3>, <소묘 4>, <소묘5>,
<망월>, <소와 소녀>, <여인>을 출품하다.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고 회원으로 뽑힘. 서울에서 3번째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기 위해
조선으로 갔다가 일본으로 다 시 가기를 포기하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 등에서 일하기도 하나, 그림은 거의 못 그리게 됨.
1945년
30세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결혼함.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다.
분가하여 따로 집을 마련해 살다가 소련의 대일 폭격을 피해 다시 이사함.
여기서 8. 15를 맞이함. 10월 서울에서 열린 전람회에 출품했다.
최재덕과 지금의 서울 미도파백화 점 지하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이 등장하는 벽화를 그리다.
명동의 술집에서 친구가 부당하게 여러 사람에게 뭇매질을 당하는 것을 말리다가 순찰중이던
미군정 헌병에게 방망이로 맞아 머리가 터지다.
벽화 사례금으로 골동품을 사서 원산으로 돌아감. 이해말 평양 체신회 관에서 황염수 등과 6인전 개최.
['복사꽃이 핀 마을']
1946년
31세 2월 조선조선예술동맹의 회화부원이 됨.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작업 에 전념하기 위해 금새 사직.
닭을 키우며 이를 그리는데 열중하다 이가 옮아 고생하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림.
시 내 용과 더불어 표지 그림이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을 받아 문초 받음.
이후 부인이 일본인 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치부된 점과 더불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수 없다고 하면서
자주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고.
1947년
32세 6월 친구인 오장환의 시집 나사는 곳 의 속표지 그림.
8월 평양에서 열린 8. 15 기념 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내다.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의 호의 어린 평가를 받기도. 아들 태현 태어나다.
1949년
34세 봄 아들 태성 태어나다.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 소 주인에게 고발당함.
원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금성에 살던 화가 박수근과 친하게 됨.
1950년 35세 6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다.
10월 집이 폭격으로 부서져 가까운 친척집으로 가서 머물다.
전세가 바뀜에 따라 남한군 북진.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 하고 회장이 됨.
12월 초 다시 바뀐 전세에 따라 부인, 두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에 다다름.
범일동의 창고에 거처를 정함.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에 잠시 종사함.
이때 껌을 훔친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군인을 말려도 듣지 않자 화가나 군인을 때리다.
못 견딘 군인이 패를 지어 다시 나 타나서 휘두른 총개머리판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음.
['문현동 풍경']
1951년
36세 이해초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에 다다르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 <피 난민과 첫 눈>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 것임.
서귀포에서 만난 주민이 방을 내주어서 안착하게 됨.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찬으로 하다.
장차 벽화를 그리기 위해 갖가지 조개를 채집하여 솜으로 싸 두다.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 주다.
부산에서 열린 월남작가전에 출품하다. 12월 다시 부산으로 가다.
오산학교 동창을 만나 범일동에 있는 판자집을 얻게 됨.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원조금이 오다.1952년 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하다.
영도에 있는 대한경질도기회사에 다니던 친구 황염수 를 매개로 그 공장에서 당시 미술대 학생이던
김서봉과 두어달 같이 지내다. 3. 1절 경축미술전에 내다.
곤란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감.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 시작되다.
박고석, 한묵 등과 기조 동인을 결성하고 르네 상스다방에서 전람회를 열다.
1953년
38세 부인이 남편 이중섭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오산 후배인 해운공사 소속의 승무원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어김으로써 거액의 빚을 지게됨.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실망과 고민을 안게 되다.
8월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갔으나 일주일 남짓 만에 귀국.
유강렬의 호의로 통영으로 가서 제작하고 개인전을 열다.
['망월']
1954년
39세 봄에 화가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에 머물면서 제작하고 이를 다방에서 전시함.
서울로 가다. 부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열 계획함.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달과 까마귀외 2점을 내다.
친지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개인전 준비에 몰두하다.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연말에 입원, 치료했다.
이 무렵 자신을 베껴먹으려는 일단의 사람들에 대하여 다방의 탁 자를 집어던지면서 대갈일성한
일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간염이 극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5년
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 개최,
유화와 은지그림을 비롯한 소묘 등을 내다.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지그림이 춘화라고 하여 철거 당하고,
그림 값을 떼이기도 하고, 저녁마 다 술로 지내다 빈털털이가 되어 자학과 기진맥진에 빠지다.
구상의 권유로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 로 가다.
여관방을 전전 하면서 제작, 5월에 미국공보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다.
영양부족과 극도 의 쇠약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도 함. 성가병원에 1달여 입원.
친지들이 퇴원시켜 서울로 데려가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가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하다.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김.
곧 나아졌다고 여 겨져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하숙함. 이때 황달이 극심해지다.
[호박정물화와 함께 보기 드물게 그린 화병에 꽂힌 국화 정물이다]
1956년
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
청량리뇌병원에 입원.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으나 곧 다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함.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에 은지화 3점이 소장되기로 결정되다.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두다. 3일 뒤 이를 알고 장례를 치루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다.
1960년
부산 로타리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다.
1972년
서울 현대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의 유작전과 작품집이 마련되다.
1973년
시인, 문필가인 고은이 여러 사람의 증언을 취재한 평전이 연재를 거쳐 출판되다.
1978년
문화훈장이 수여됨. 1986년 30주기를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화집이 발행됨.
1996년
제주도 서귀포시에 살던 집을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개관하다.
1999년
1월 문화관광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 이중섭을 선정하다.
이를 기념하여 이중섭 특별전이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개최되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 나무판에 유채, 41×71cm, 1951년
폭격의 위험을 피해 월남한 이중섭은 부산에서 다시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주민의 호의로 살 곳을 얻어서 비로소 안정을 얻게 되었다.
사는 집지붕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섬이 있는 바닷가 고요하고 깨끗한 느낌을 그린 것이 풍경화다.
뒷날 부산과 통영에서 그린 풍경화들에서 보이는 활달한 필치와는 사뭇 다르다.
[서귀포의 환상] 나무판에 유채, 56×92cm, 1951년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귤이 자라는 따뜻한 날씨와 작으나마 깃들 수 있는 집에서 비로소 안도한 이중섭의 마음을 느낄수 있다.
아울러 아이가 새를 타는 것으로 설정해서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적인 필치가 있으므로
북한에서 생활할 때 강요되다시피 했던 사실주의적인 태도가 남은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도원>과 함께 이중섭이 남긴 그림 중에서 가장 커다란 것에 속한다.
[도원] 종이에 유채, 65×76cm, 1953년 무렵
물이 있고 크고 작은 봉오리들이 있는 곳에 서있는 천도복숭아를 중심으로 네 명의 남자아이가
노는 광경을 통하여 낙원의 느낌을 나타냈다.
젊은 시절 애인에게 보낸 그림엽서들에도 이런 경향이 강했다.
통영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최재덕과 8.15 직후 서울에서 그렸던 벽화도 이런 소재였다고 하는데,
통영에서 멀지않은 산청이 고향이며,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월북하고 없었던 조선신미술가협회의
동인이었던 최재덕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호 대향 을 써서 대이상향 이라는 본래의 의미대로
낙원의 느낌을 물씬하게 풍기도록 하였다.
[길 떠나는 가족] 종이에 유채, 29.5×64.5cm, 1954년
헤어져 있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자신은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광경을 그렸다고 했는데, 이 그림은 이를 옮긴 것이다.
서울에서 개인전을 성공리에 마치면 곧 만나게 될 가족에 대하여 희망에 차서 그린 것이다.
유화가 1점 더 있다. 그림의 테두리는 젊은 시절 큰 영향을 받은 루오가 쓰던 수법을 응용한 것으로
이중섭도 이를 자주 애용했다.
[소]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소는 중등 과정부터 즐겨 그리던 그림의 소재였다고 동창들은 전한다.
소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과 소로 상징되는 민족과 현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돌봐준 의사에게 선물한 이 그림은 그의 배려로 건강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마음을 그림에
보이는 평정한 모습의 소로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 <비둘기가 있는 가족>이 그려져 있다.
[가족과 비둘기]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가족을 그린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경쾌함이다.
가족이란 화기애애함이 넘치는 인간관계임을 강조한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이 그림은 재빨리 완성해 이런 느낌이 더더욱 강조되었고,
그럼에도 등장인물의 개별 특징이 또렷한 것이 큰 특징이다.
[황소] 종이에 유채, 32.3×49.5cm, 1953년 무렵
소는 고개를 들면서 외치는 듯하다.
왼쪽으로 향한 얼굴과 오른쪽으로 향한 눈이 화면의 양쪽 모두를 지배하는 듯하다.
외침이 들리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하여 소의 얼굴과 목 주위를 유달리 주름지게 한 것으로 보인다.
코와 입에 가해진 선연한 붉은 색과 넓은 배경의 붉은 노을을 층지게 하여 이런 느낌을 강화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평원군은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이런 감회를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투계] 종이에 유채, 29×42cm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고자 덤벼드는 설정이다.
푸르고 붉은 빛깔로 그린 닭 부분이 충분히 마른 뒤,
그 위에 덮은 검은 빛깔이 마르기 전에 물감칼로 덮은 물감을 긁어냄으로서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조응하는 색깔과 태세로 보아 고구려 무덤벽화에 나타나는 색채적, 조형적 특징을 계승한 것이라 보인다.
[횐 소] 나무판에 유채, 30×41.7cm, 1954년 무렵 서울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흰 붓질로 된 득의의 작품이다.
소의 상태도 평정을 이루어서 심정이 안정된 가운데 최고조의 상태를 보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도판 16과 같은 붓질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검은빛과 흰빛을 아울러 추사체와 같은 붓질을 보이고 있다.
특히 머리와 또리 부분에 그런 표현이 강하다.
사의성 마저 느끼게 하는 것으로 보아 서예를 비롯한 전통 예술에 대한 소양을 느낄 수 있다.
장자의 우화에 등장하는 솜씨 좋은 소잡이가 생각나는 그림이다
"화가 이중섭, 시대와 끝내 不和했던 천재"평생지기 한묵 화백, 눈물의 회고강연
친구 이중섭과의 추억을 이야기 하는 원로화가 한묵씨
지난18일 ‘이중섭과 서귀포’ 세미나가 열린 제주도 서귀포시 KAL호텔.
백발의 노화가가 강단에 올라섰다. 생전의 화가 이중섭(1916~1956)과 일본 유학시절부터 함께하며
평생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냈던 한묵(89) 화백이었다.
30분간 이어진 화단 원로의 강연은 생전의 이중섭에 대한 상투적인 회고가 아니었다.
시대와 불화(不和)했던 외로운 천재의 예술혼을 기리는 절절한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가면서
노(老) 화백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일부 청중들도 손수건을 꺼냈다.
지금은 전설의 화가로 추앙받는 이중섭 화백이지만 살아 생전 그의 그림은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묵 화백은 회고했다. 북에서는 ‘인민의 적’이라고 공격 받았고 남에서는 ‘풍기문란’이란 이유로
그림이 철거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젊은 날의 이중섭은 멋진 외모에 솔직한 성격으로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한 화백은 “중섭이가 권투를 배워 일본인들이 건방지게 굴면 때려주기도 했죠.
여름에 원산 해수욕장에서 팬티 바람으로 서 있을 때 보면 중섭이 체격이 얼마나 근사했다고요.”
일제 말기, 한 화백은 금강산 온정리에 머물렀는데 이때 원산에 살던 이중섭과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중섭이는 골치 아픈 일만 있으면 휙 하고 금강산으로 달려오곤 했습니다.”
한 화백은 이중섭의 예술적 좌절도 곁에서 지켜봤다. “광복 후 당시 예술동맹에서 중섭이 그림을
소련 평론가들에게 보여줬어요. 그런데 이들이 중섭이 그림을 보고 대뜸 ‘인민의 적’이라는 거예요.
소가 싸우고 닭이 싸우는 듯한 그림이 인민에게 공포심을 준다나요. 내용이 틀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중섭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그의 병은 근본적으로 여기서 출발했을 겁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한 화백은 이중섭의 월남 배경을 짐작했다. “이중섭이 표현의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지 않았나 싶어요. 북에서는 전시하려고 하면 당 문화부 심사를 받아야 했어니까요.
그림을 전부 이데올로기로만 평가했기 때문에 심사할 때 ‘왜 빨간 꽃이 적냐’는 식으로 트집 잡곤 했지요.”
그렇다고 이중섭이 남에서 예술적으로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피란 시절 한 화백은 이중섭과
부산 남포동에서 ‘콩쥐팥쥐’ 오페라 무대장치를 맡았는데 이때 이중섭의 유명한 ‘은종이 그림’이
탄생했다고 한다. “극단장이 가끔 우리에게 담배를 주곤 했는데 중섭이가 어느 날 변소에서 일 보다가
옆에 굴러다니던 꼬부라진 못으로 담뱃갑 은종이에 그림을 그려봤답니다.
이후 우리가 피우던 담뱃갑도 전부 달라고 해서 열심히 그렸지요.”
이중섭은 은종이 위에다 주로 아이들을 그렸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가족들과 장난치는 내용인데
이게 또 문제가 됐어요. 서울서 은종이 그림을 전시하는데 ‘왜 이리 나체가 많냐’ ‘풍기문란이다’
라는 비난을 받고 그림이 강제 철거당했어요. 중섭이에게는 쇼크였지요.” 한 화백은 이어 “중섭이가
일본 여자와 산다고 눈총도 많이 받았다”며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낸 뒤 자포자기 상태에서
술을 많이도 퍼마셨다”고 회상했다.
어느 날 대구에 머무르던 이중섭을 시인 구상이 서울로 데려왔다. “깜짝 놀랐어요, 그 잘생겼던 중섭이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됐을까 하고요. 통 먹질 않고 사람도 몰라보는 거예요.” 거식증에 걸린 것이었다.
한 화백은 친구들과 의논해 이중섭을 당시 육군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가보니까
어느 환자를 꽁꽁 묶어놓고 때려가면서 억지로 음식을 먹이는 거예요.
중섭이도 저런 학대 받는 것 아닌가 싶어 다른 병원으로 옮겼어요. 거기서는 전기 찜질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한묵 화백은 이중섭이 거식증에 시달리며 투병 생활을 하던 과정을 자세히 털어놓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한때 상태가 호전되는 듯했던 이중섭은 다시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이어 적십자 병원에서 죽었다.
“화장하고 나니 중섭이는 없어지고 뼈다귀만 남았어요. 그 가루를 반은 처가 있는 일본에 보내고
반은 망우리 묘지에 묻은 뒤 친구들과 비석을 세워줬습니다.”
[독자 서평]
김용재(dearchosun)
일본인 부인은 어떻게 되셨는지,
자녀는 잘 지내는지, 그리고 떨어져 살게 된 배경은 어떤지.
거식증은 어떻게 왔는지 등등이 너무 궁금한 기사이지만, 설명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그림들은 어느 분이 소장하고 계시면,
왜 본인은 어렵게 살다 가셨는지에 대한 분석이 없는 형편없는 기사입니다.
첫댓글 몇년전 현대갤러리에서 작품을 보았지만 정말 대가입니다...^^*
참 불행했던 천재화가의 이야기네요. 잘 보았습니다.
작품들이 친근감이 가네요.....
멋진 자료 고마워요~~~
천재화가 작품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끔 외롭고 가끔 힘이 넘치고 그리고 뭔가 말 할 듯 하고.........
90년도에 "이중섭"이란 커피솝에서 처음 이중섭의 그림을 만났습니다. 현대적이고 간결한 그림이 선생님의 사진과 함께 멋졌보였어요. 그땐 선생님의 얼굴에서 예술가의 얼굴을 보았었는데.... 점점 잊혀졌어요. 오늘 다시 선생님의 그림을 보니 반갑고 좋았습니다.
제주도서귀포에서도 이중섭선생 생가에대해 봄단장으로.초가집붕이기을 실시한다는데요....감상잘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