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TV의 고장으로 아내가 거실 TV를 차지하면서 나는 리모컨 권력을 잃어버렸고 아내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실로 10여 년 만에 팔자에도 없는, 어쩌면 20년 전 <서울의 달> 이후 처음으로 주말드라마를 연속으로 두 편이나 보게 되었다.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시청률의 제왕’을 꼭 빼닮은 드라마를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면서 ‘까닭 없는 분노, 어이 상실, 도대체 왜 한국 아줌마들은…? 프로이트가 내 처지가 되었다면 무어라고 했을까?’ 곰곰이 생각하면서도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지 못하고 끝내는 주말드라마 두 편을 다 보고 말았다. 아내가 기대 가득한 얼굴로 “아! 다음 주가 기다려지네”라고 탄성을 발한 후에야 리모컨을 회수할 수 있었는데 내가 보고 싶어 했던, 실은 열 번도 넘게 보았던 슈퍼액션 <쇼생크 탈출>은 이미 엔딩 스크롤이 올라가는 중이었다.
모름지기 현대 여성, 특히 차가운 도시 여자, 그중에서도 미시즈(Mrs)라면 리모컨권을 소유해야 하지만, 소유해야 할 것이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진정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어감에도 오늘날 한국의 여성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리더가 되지 못하는 까닭은 이런 드라마의 ‘고아 여자아이→아이 뒤바뀜→(훌쩍 건너뛰어서) 재벌 남자와의 우연한 만남→사랑→연적의 등장→거짓말의 횡행→결혼→친모의 출현→비밀의 폭로→이혼→파멸→진실의 승리’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커다란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이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물론 여성 대통령의 존재가 대한민국 여성 전체의 지위 격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사회제도나 법률, 정치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회제도나 법률, 정치시스템을 개선할 책임은 여성에게도 정확히 50%가 있는 것이다.
한 가지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예로 이러한 경우를 들 수 있다. 마을버스와 시내버스의 여성 운전기사가 늘어나는 것은 안전과 승차의 측면에서 환영할 현상이다. 그러나 그 여성 운전기사가 “빨리빨리 타쇼”라고 와일드하게 면박을 주거나 정지선을 위반하거나 꼬리물기로 교통흐름을 방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여성은 나이를 먹을수록 남성호르몬이 증가한다는 자연현상을 입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배려 깊은 사회를 만드는 데에도 걸림돌이 된다.
또 한 가지 평범하면서도 더 중요한 예를 들어보겠다. 아이가 학교에서 90점을 받아왔을 때 100점을 받게 하기 위해 갖은 돈과 방법을 쏟아부어 책상머리에 18년이 넘게 붙들어 앉히기보다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가치 있는 삶과 미래 개척에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련만 밤낮으로 각고면려(刻苦勉勵)하는 모습은 보는 이마저 서글프게 한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책임 혹은 ‘이렇게 살지 않아야 한다’는 원한이 있어서라고 못난 남자로서, 못난 남편으로서 어쩔 수 없이 수긍을 한다.
“여자의 원한이 천지에 가득 차서 천지운로를 가로막고 그 화액이 장차 터져 나와 마침내 인간 세상을 멸망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이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비록 성신(聖神)과 문무(文武)의 덕을 함께 갖춘 위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세상을 구할 수가 없느니라.”
자못 준엄한 경고가 담긴 이 문구는 증산도 <도전(道典)> 2편 52장에 실린 말인데 남자라면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여성 해방은 선거에서나 법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다. 여자들의 마음에서 시작한다”는 엠마 골드만(Emma Goldmann)의 말은 남녀 모두가 가슴에 새겨야 되지 않을까 싶다.
2014년 여름 진도에서 순진무구한 생명들에게 안겨준 죽음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한 계절이 바뀐 가을, 그 앞바다에서 처절하게 싸운 이순신을 다룬 영화 <명량>이 나라를 휩쓸고 있다. 갈가리 찢기고 상처 입은 이순신의 눈빛과 조선 수군들의 피에서 어떤 감동을 느끼고, 무엇을 찾을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라 해도 한순간에 천만을 훌쩍 넘어서는 질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여자가 리더인 나라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여성들이 리더인 나라다. 학교 교장선생님이 여성이라면 학교 폭력의 증가곡선이 완만하게 하락한다거나, 군 사단장이 여성이라면 부대 폭력이 급속도로 줄어든다거나 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통계는 아직 없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입증 자체가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현실임에도 세월호의 책임자가 여성이었다면 무고한 생명들이 그렇게 안타깝게 사라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 해도 “나에게는 아직 12개의 꿈이 있다”라고 자신 있게 외치기보다 “나에게는 아직 리모컨권이 있다오”라고 말하는 여성이 더 많다면 사랑과 아픔의 가치를 실천하는 진정한 여성 리더가 차츰차츰 여러 자리에서 빛을 발하기는 더 어렵지 않을까?
김호경은 화제의 소설 <명량>을 집필한 소설가. 1997년 제21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장편소설 <낯선 천국>, <구두는 모든 길을 기억한다>, <마우스>가 있으며, 영상소설 <형사>, <비열한 거리>, <철의 제왕 김수로>, 에세이 <우리들의 행복했던 순간들>, <가슴 설레는 청춘 킬리만자로에 있다>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