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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회의 이후 유럽의 지식인 사이에는 마치 1930년대 스페인과 1950년대 헝가리가 그랬듯이 자유에 대한 열망이 끓어올랐다. 1848년 유럽 모든 국가의 수도에서 일제히 혁명이 터지자 지식인과 노동자들은 바리케이드를 향해 나아갔다. 1818년생인 마르크스는 이때 30세 청년이었다. ‘시대의 아들’인 그가 혁명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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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수염 없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수염을 곤두세우고 분노하는 그의 모습에 익숙하다. 하지만 젊은 날의 마르크스는 낭만주의에 심취한 몽상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청년이었다. 1815년의 워털루전투 이후 성립된 빈 체제 하에서 이탈리아·폴란드 등 피압박 국가의 불행한 처지는 유럽인에게 광범한 자유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지식인들은 혁명의 갈증을 느꼈다. 1818년 5월 5일 태어난 마르크스는 ‘시대의 아들’이었다.
개인 취향에서도 마르크스는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는 19세기 초 유럽 젊은이들을 압도했던 셰익스피어에 대한 열렬한 애착을 공유했고, 셸리·괴테·베토벤에게 강하게 끌렸다. 그의 소설 읽기 취향은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해부한 『보바리 부인』의 귀스타브 플로베르 쪽이라기보다는, 『아이반호』의 월터 스콧과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알렉상드르 뒤마 쪽이었다. 정치인·혁명가로서의 마르크스 이면에는 철학자이자 낭만적 휴머니스트가 잠복해 있었다. 요컨대 그는 수많은 다양한 얼굴을 지닌 인물이었다.
지적 역량과 통찰력에서 마르크스는 19세기 최고의 역사가에 속한다. 그의 가장 뛰어난 역사 서술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1848년 수립된 공화정을 불과 3년 만에 쿠데타로 끝장내고 권력을 장악한 과정을 다룬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유명하다. “헤겔은 모든 세계사의 사건과 인물은 두 번씩 등장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마르크스는 언젠가 딸 라우라가 작성한 질문표에 이렇게 답했다. “아빠가 가장 싫어하는 악덕은?” “굴종.” “좋아하는 영웅은?” “스파르타쿠스.” 그는 50대에 이르러 러시아어를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어를 읽을 줄 알았고, 자연과학에도 흥미를 느꼈다. 쉴 때는 수학 문제에 골몰하곤 했다. 특히 아내가 병석에 누웠을 때는 수학 계산을 통해서만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교사로서의 마르크스는 매우 위압적이었다. 그의 제자인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탄식했다. “내가 에스파냐어를 할 줄 모른다고 어찌나 심하게 나무라시던지! 나는 매일 『돈키호테』를 한 구절씩 번역해야 했다.” 이런 회고담을 읽노라면 마르크스는 대학교수가 됐어야 할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태어난 지 벌써 2세기다. 무엇보다도 ‘경제학자’ 마르크스를 그 시대의 관점에서 제대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지식 인프라의 공백은 궁극적으로 소프트파워와 국가 경쟁력의 약화를 초래할 것이기에.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5/04/3720113.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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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실 사회 교과서에 적힌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 아닌 비판과 함께 사회주의는 함께 비난받아야 할 사조로 점찍힌 채 학생들과 첫대면을 하고 있고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접하는 마르크스는 늘 소련이나 북한과 같은 극단적인 길을 선택한 국가들의 모습, 혹은 흉폭한 전쟁을 일삼는 나라들의 참혹한 현실을 통해 한 차례 걸러진 면들 뿐이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진정한 마르크스를 만나기 위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맞아맞아!^^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지금 민주주의 시대에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은 약간은 좋지 않은 쪽으로 평가되는 것 같아요.. 저 또한 마르크스를 공산주의 사상가로만 보고 그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였는데요.. 정말이지 많은 사상가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네요..
연구 안 된 인물들이 너무 많아...ㅜㅜ
사실 10년전까지만 해도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꺼내기 쉽지 않았을테니까요 ㅎ
오죽하면 신채호 선생마저도 요 근래에서야 인정이 되셨으니
인문학자들이 분발해야지...
오늘 교회에서 "아버지가 '과수원에 다녀오너라'라고 말했을 때 첫째 아들은 '네'라 대답하고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어요'라고 말하고 나중에 그 잘못을 뉘우치고 과수원에 갔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러시더라구요. 많은 사람들은 첫째 아들과 같다고요. 항상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 말씀에 대답은 잘하지만 교회 문을 나가는 순간 그 말씀을 다 잊어버린답니다. 저는 막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첫째 아들이 참 못됬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제가 그 첫째 아들이었지뭐에요.ㅜㅜ 저도 대답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지 "언행일치"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은 형제간에 일어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