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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판정의 도덕적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1. 들어가는 말
인간 생명의 신성성이라는 전통적 윤리는 지난 수천 년간 유대교 기독교 사상의 중심이었다. 나는 공적인 추론, 즉 종교적 신념과 무관한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추론에서는 전통적 윤리가 옹호될 수 없음을 논증하려 한다. 나는 우선 인간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이해가 지난 30년간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하는 점부터 살피겠다. 일견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이슈를 내가 택한 이유는 우리가 만든 변화가 실은 비논리적인 것임을 보이기 위함이요, 그 변화를 통해 인간 생명의 신성성의 전통적 교설이 이미 심각하게 침식당하고 있음에도 그걸 되돌리길 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둘째, 나는 이 문제가 사망으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불가역적으로 의식을 소실한 사람들에 대한 결정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살피겠다. 다음으로 나는 심각한 장애를 갖고 태어난 신생아의 치료 문제를 논의하고, 줄기세포를 얻을 목적으로 인간 배아를 파괴하는 행위와 낙태에 관해 간략히 논의한 뒤 자의적 안락사의 문제 또한 고려할 것이다.
2. 죽음에 대한 관점의 변화
1968년 당시 죽음의 법률적 정의는 세계 공통적으로 심장박동과 혈액 순환의 정지에 기초해 있었다. 그 해 이후 별 논란도 거치지 않은 채 뇌사는 미국을 포함한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죽음의 또 다른 기준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선진국 중에서 일본만이 유일하게 뇌사를 인정하길 꺼렸고 지금도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회의적 입장은 변화의 실제적 결과가 바람직함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
죽음의 기준이 변화한 것은 죽음의 본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뇌사는 윤리적 이슈가 아닌, 의과학적인 이슈로 받아들여졌다. 널리 퍼진 이러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죽음의 새로운 기준은 하버드 대학교의 헨리 비처 교수의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명백한 동기는 당시로선 새로운 시술인 장기 이식을 위한 신선 장기들을 이용가능하게 하는 데 있었다. 비처가 이끌었던 하버드 위원회는 1968년 발간한 역사적인 보고서에서 죽음의 본성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더 깊어졌기 때문에 죽음의 정의가 바뀌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 대신 위원회가 사망의 새로운 정의를 권고한 이유는, 현 상태가 여러 사람들과 관련 기관에 큰 부담이 되고 있고, “비가역적인 혼수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장기가 제대로 쓰였을 때 갖는“생명을 구하는 잠재력”을 방해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담을 피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판단, 그리고 장기들이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판단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판단이다. 이 정의가 새로운 과학적 발견 또는 중환자 의학이라는 현대적 방법에 힙 입은 바 모호함을 명료하게 한 것뿐이라는 생각은 널리 유포된 오해이다. 사망의 새로운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마음 든든한 생각에 도전하는 것은 그 누구(의사, 병원, 뇌사자 가족, 장기의 잠재적 수혜자)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이것이 새로운 정의가 별 논쟁 없이 성공을 거두어 온 데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분명해지고 있다.
뇌 기능이 완전히 정지한 환자들 중 일부는 분명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 유기체이다. 그들은 중환자실에서, 심지어는 한 사례는 가정에서, 장기간 유지되고 있다. 임산부 환자가 태아를 출생한 사례도 있다. 만약 한 인간이 모든 뇌 기능이 정지된 이후에 수년간 인간 유기체로 “생존”할 수 있다면, 이는 뇌가 통합된 유기적 기능에 핵심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사람들의 생존이 기계에 의존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는 투석 환자의 신장 기능이 기계에 의존한가고 해서 투석 환자를 사망했다고 간주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뇌 기능이 불가역적으로 소실된 환자들이 기계 혹은 여타 기술에 의해 유지된다고 해서 그들을 사망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은 사람이라면 앞서 내가 인용한 하버드 위원회의 보고서의 구절에서 “불가역적인 혼수상태”가 사망을 뜻하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원회는 또한 “지력의 영구적인 소실”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불가역적인 혼수상태”는 사망한 사람에게 사용하기 이상한 용어이며, 이는 전뇌사(全腦死)와 동의어가 아니다. 의식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이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는 것은 뇌간(腦幹)과 중앙 신경계가 기능을 계속하고 있는 반면 의식은 불가역적으로 소실되었다는 뜻이다. 지속적 식물 상태(PVS) 환자들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요즘은 이를 가리켜 혼수상태라고 말하지 않는다.
앞서 인용한 하버드 위원회의 보고서는 바로 뒤이어서 “우리는 여기서 중앙 신경계의 어떠한 활동도 감지되지 않는 혼수상태 환자들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위원회가 사망을 재정의할 때 내세웠던 이유들 - 뇌사는 환자, 가족, 병원 및 공동체에 큰 부담이 됨. 또한, 이식용 장기가 낭비됨 - 은 각 측면에 있어서 뇌 전체 기능이 정지된 환자들뿐만 아니라 불가역적인 혼수상태에 있는 모든 환자들에 똑같이 적용된다.
그렇다면 왜 위원회는 관심사를 뇌 활동이 전혀 없는 환자들로만 한정했을까? 그 이유는 아마도 뇌 전체가 죽은 환자의 신체 기능을 하루 이틀 정도 밖에 유지할 수 없다고 위원회가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뇌간이 살아있는 환자의 경우 음식, 수분 및 기초적인 간호만 제공되면 신체는 얼마든지 유지된다. 두 번째 이유는 아마도 1968년 당시에는 어떠한 뇌 활동도 감지되지 않는 경우만이 신뢰성 있는 -사망 판정을 받은 사람이 나중에 “깨어날” 가능성이 없는 - “불가역적인 혼수상태” 의 진단 형식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뇌 활동이 전혀 없는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면 호흡이 곧 멈출 것이고 이는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사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지속적 식물 상태 환자는 기계적 도움 없이도 계속 숨을 쉴 수 있다. 따라서 만약 하버드 위원회가 불가역적인 혼수상태의 환자들 가운데 뇌 활동이 일부 있는 사람마저 죽은 것으로 정의하면 그건 아직 숨 쉬고 있는 사람을 매장해도 된다고 제안하는 셈이 된다.
이제 우리는 뇌 기능이 완전히 정지한 환자들의 신체 기능을 수개월 또는 몇 년이라도 유지할 수 있음을 안다. 따라서 죽음의 정의를 뇌 기능의 전적인 소실에 한정했던 첫 번째 이유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기술 발달은 두 번째 이유도 제거해 버렸다. 몇몇 장기간의 지속적 식물 상태 환자들의 경우 회복 불능이 되는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신뢰성 있는 수단이 아직 없긴 하지만, 다른 예들에서는 새로운 뇌 영상 기법에 힘입어 의식과 연관된 뇌의 부분이 죽어 버려서 의식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뇌 기능이 완전히 소실된 환자들에만 사망의 정의를 한정했던 세 가지 이유들 중에서 이제 마지막 한 가지 - 자발적인 호흡이 있는 환자들에게 사망을 선언하는 문제 - 만이 남았다.
지금처럼 사망의 정의가 불만족스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해결책은, 애초에 하버드 위원회가 뇌사를 옹호할 때 제시했던 이유들이 갖는 함축과 오늘날 개량된 진단법을 결부시켜, 의식의 불가역적인 소실이라는 죽음의 정의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의식이 불가역적으로 소실될 때, 우리의 생존에 있어서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있어 주기를 바라는 이유를 모조리 잃게 되는 것이다.
의식의 중요성, 의식과 뇌의 연결이 “왜 뇌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해답을 준다. 전뇌사 지지자들은 이제껏 이 질문에 만족스런 답을 내놓지 못했다. 뇌의 죽음은 한 인격체의 일생에서 문제되는 모든 것의 종말이다. 뇌에서 의식을 담당하는 부분의 죽음이 한 인격체의 일생에서 문제되는 모든 것의 종말임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불가역적인 소실을 통해 사망을 정의하자면, 사망의 기준은 대뇌 피질, 대뇌 반구 또는 대뇌라 불리는 곳의 기능이 불가역적으로 정지되는 것이다. 더 정교한 정의를 내리지 않아도 되게끔, 나는 뇌에서 의식 작용을 위해 필요한 부분을 “higher brain”이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진정 우리는 사망의 새로운 개념, 즉 체온이 있고 자발적으로 호흡하는 인간더러 죽었다고 하는 그런 개념을 도입하기를 원하는가? 이런 식으로 죽음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는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망했다”는 것은 인간 또는 의식이 있는 존재를 넘어서 훨씬 더 넓게 적용되는 말이다. higher brain은 고사하고 뇌가 없는 생명체도 살고 죽는다. 왜 우리 모두가 잘 이해하고 있는 용어를 만지작거리는가? 하버드 위원회가 제안했던, 이보다 훨씬 더 온건한 수정조차도 대부분 사람들이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에 아직 녹아들지 못하고 있다. 신문 헤드라인에서 “뇌사 여성이 아이를 낳고 죽었다”고 읽는 건 흔한 일이다. 사랑하는 친척이 침대에 누워 기계의 도움 없이 정상적으로 숨을 쉬고 있는데도 환자가 사망했다고 말하면 그 말을 곧이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뇌사를 향한 첫 번째 변경의 옹호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중요한 윤리적 결정을 과학적 사실인양 위장하려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망의 전통적 정의에로 회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우리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다수의 장기들을 얻을 기회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유로, 우리는 의식의 불가역적인 소실을 사망의 정의로 하는 데 까지 나아갈 수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계의 도움 없이 정상적으로 호흡하고 있는 환자가 사망했다는 점을 인정하기 어려워하지만, 그들은 뇌를 자신들의 관심 부분과 무관심한 부분으로 명확히 구분한다. 그 이유는 산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뇌의 기능 중 우리가 관심을 갖는 기능과 그렇지 않은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뇌의 어떤 기능이 문제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 의식과 연관된 기능이라고 답할 것으로 나는 믿는다. 만약 의식 경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여전히 보유한 환자로부터 주요 장기를 적출하는 경우가 생겨난다면, 공공의 항의는 다음 경우에 비해 훨씬 더 거셀 것 같다. 뇌에서 호르몬 분비가 계속되고 있으므로 뇌의 기능이 전적으로 중지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법적으로는 사망하지 않은 환자로부터 장기를 적출하는 경우(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보도가 있었다).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다보면 higher brain의 죽음을 사망과 동일시하는 쪽으로 가기 쉽다. 그러나 이것만이 유일한 결론은 아니다. 의식이 불가역적으로 소실되었을 때 인간이 사망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역설적이다. 그 대신 우리는 사망의 전통적 정의를 받아들이되 무고한 인간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끝내는 것이 언제나 잘못이라는 윤리적 견해를 거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의식이 불가역적으로 소실된 환자에게 (적절한 동의가 있는 경우) 생명 유지 장치를 중단하거나 그로부터 이식용 장기를 적출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허용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의식의 불가역적인 소실을 사망으로 재정의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실제적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하버드 위원회식으로 표현하면, 의식을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돌봐야 할 필요 대신 우리는 환자 가족, 병원, 병상을 원하는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주게 된다. 뇌의 모든 기능이 멈춘 환자들의 경우만이 아니라 뇌간이 기능하는 환자들의 경우에도 우리는 이 부담을 덜어주게 된다. 이때 우리는 도움 없이 자발 호흡을 하고 있는 환자에게 어떤 의미의 사망 선고를 내리지 않아도 된다. 끝으로, 우리의 윤리적 판단이 투명해지게 되고 따라서 관련 이슈들에 대한 공공의 이해가 은폐되지 않고 증진된다.
이 제안에 대한 심각한 반론은, 제아무리 논리적으로 강력해도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성공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뿐이다. 결국 이 제안은 인간 생명의 신성성이라는 전통적인 교설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혹자는 요새처럼 견고한 교설과 충돌해서 깨지고 마느니, 교설 안에 머물되 의식을 불가역적으로 소실한 사람들에까지 죽음의 정의를 확장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말할 것이다. 달리 말해, 뇌사가 진정한 사망이라는 허구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이 허구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허구가 유용할 때도 있으므로 때로는 그냥 두는 게 더 낫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예에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허구는 어쨌든 붕괴되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생명의 신성성 교설은 의료와 법률 영역에서 점차 포기되고 있다. 만약 미국에서 아직 그렇지 않다면 네덜란드, 벨기에 및 영국에서는 그러하다. 윤리에 있어서 허구 보다는 진실이 일반적으로 더 나은 토대이다.
3. 배아, 태아 및 유아에 대한 삶과 죽음의 결정
지금까지 나는 인간 생명의 신성성의 전통적 견해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조차도 뇌 기능의 불가역적 소실과 관련된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을 보였다. 이 문제들에 대한 정합적이고 일관성 있는 해법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평소에 당연시해왔던 생각, 즉 무고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항상 잘못이라는 생각에 대해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인간 생명의 신성성이란 우리가 좀처럼 의문시하지 않는 것인 까닭에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쇼킹한 제안이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이런 믿음을 포함하여 우리가 당연시하는 믿음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광범위한 합의의 어떤 문제, 다시 말해 죽음의 정의를 뇌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와 관련해서 변경하자고 할 때 이미 그런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음을 내가 보였기를 희망한다. 여기 이 문제를 더 끌고 나가는 한 방법이 있다. “인간을 죽이는 것이 가령 닭을 죽이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인가?” 하고 자문해 보라. 당신이 채식주의자가 아닌 한, “예”라고 대답할 것이 확실하다. 설령 당신이 나처럼 채식주의자라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거리나 학교에서 무작위로 사람들을 죽인다면 그것은 도살장에서 일상사로 벌어지는 일보다 더 큰 비극이라고 생각할 게 거의 틀림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왜 그런가? 우리가 종교적 가르침을 끌어들이지 않는 한, 대답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가 우리가 속한 종(種)이 닭의 종과 다르다는 그 사실만이어서는 안 된다. 단지 어떤 종족의 구성원이라는 점이 도덕적으로 주요한 차이를 낳는다면 그것은 종차별주의가 될 것이다. 우리와 유사한 정도로 지적인 외계인이 있어 평화적이고 우호적이지만 우리와 종이 다른 종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들이 우리 종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죽이는 것이 용인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을 무작위로 죽이는 것이 인간 아닌 동물을 죽이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라면 그 차이는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 하는 점과 분명 관련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나는 그 차이가 동물에겐 없지만 인간이 보유한 고도의 정신 능력과 유관한 게 틀림없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단지 쾌락과 고통과 느낄 수 있는 능력도 아니요, 모자 관계의 단절 때문에 고통 받는 그런 능력도 아니다. 타종족의 구성원을 죽이는 것에 비해 우리가 인간을 죽이는 것을 훨씬 더 나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이 단지 의식을 넘어서 자의식, 즉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분명 도덕적으로 유관한 어떤 것에 기반 하여, 살아있는 존재들을 죽이는 것을 구분하는 이유를 갖게 되었다. 다른 것들이 동등하다면, 한 존재가 자신이 생명을 갖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 생명을 끝내는 것이 진정으로 나쁜 일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고, 자신의 존재가 시간에 걸쳐 있음을 인식하는 존재. 죽음으로 인해 잃게 될 것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존재, 죽음으로 인해 좌절을 겪을, 미래에 대한 욕망을 품을 수 있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이 분명해진다. 공공장소에서 자행된 자살 폭탄 테러의 희생자와 같은 전형적인 사람들은 인간 아닌 동물들은 갖지 못한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가령 신생아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신생아들은 인간 아닌 동물들에 비해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될 잠재성이 있다는 반박이 대번에 나올 테지만, 만약 이것이 신생아를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라면 우리는 인간 태아도 매우 유사한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할 터이니 그렇게 되면 인간 태아를 죽이는 것마저도 심각한 잘못이 될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이 결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태아와 배아에 대한 이 결론은 오도되었다는 게 나의 견해이다. 세계 인구는 이미 60억 명을 넘어섰고, 지구 자원의 고갈, 특히 일산화탄소 배출량이 한계점에 이르게 될 90억 내지 100억 명을 향해 증가하고 있다. 부모가 자녀들을 되도록 많이 낳는 것이 의무가 아니요,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설령 각각의 자녀가 모든 확률에 있어서 유일무이하고 합리적이며 자의식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똑같은 이유에서 나는, 인간 태아가 모든 확률에 있어서 유일무이하고 합리적이며 자의식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낙태에 반대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줄기세포를 이용하는 연구가 한국에서 널리 논의되고 있으므로, 태아에 대한 나의 논의가 인간 배아 줄기세포를 얻을 목적으로 파괴되는 인간 배아의 경우에는 한층 더 명확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덧붙이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이 배아들이 호모 사피엔스 종의 일원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사실이 배아에게 생명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우리 종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특별대우를 해서는 안 된다. 체외상태의 배아는 클리닉에서의 인공적인 조작 없이는 더 자랄 수 없다. 이 같은 초기 상태의 배아에게는 고통, 쾌락을 느끼거나 의식 경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이 분명하다. 이렇듯 배아 생명권의 근거를 배아의 잠재성에서 찾을 수 없다면, 정자와 난자 주인들의 동의가 있는 한 배아를 파괴하는 데 대해 도덕적으로 반대할 근거가 없다. 만약 수백만 명이 고생하는 주요 질환의 치료에 줄기 세포가 진정으로 유망하다면, 그리고 인간 배아가 이러한 줄기 세포의 최적의 자원이라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줄기 세포를 얻어야 할 윤리적 의무마저 진다고 논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4. 심한 장애 유아의 치료
지금부터 장애 유아의 생사 결정에 대한 내 견해를 설명하겠다. 내가 위에서 밝힌 이유에서, 나는 어떤 신생아를 죽이는 것도 합리적이고 자의식적인 존재를 죽이는 것과 도덕적으로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 견해가 유아 살해는 도덕적으로 무관한 사안임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와는 달리, 유아 살해는 대단히 잘못된 일이지만, 보통 그것이 잘못된 이유는 주로 아이를 임신하고, 이미 그 아이를 사랑하고, 양육하고자 원했던 부모에게 미치는 해악 때문이다. 신생아의 죽음은 일반적으로 부모의 비극이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떠한 전망조차 갖지 못해 본 유아의 비극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는 신생아에 대한 생사 판정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내가 심한 장애 신생아의 치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인데 그 당시에는 의사들이 그런 아이들을 “자연적으로 내버려두는” 게 흔한 관행이었다. 이것은 어떤 수술도 하지 않고, 어떤 항생제도 쓰지 않은 채, 그 아이들이 며칠 몇 주 혹은 몇 달에 걸쳐 서서히 죽어갔음을 의미한다. 부모의 의견을 묻지 않는 경우가 흔했고, 아이에게 더 이상 해줄 게 없다고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건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짓이었고, 너무 몰인정한 일이었다.
그러나 심각한 장애를 지닌 몇몇 유아들에 대한 전망을 가늠하는 데 있어, 나는 그 전망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삶을 연장하는 것이 항상 좋은 일은 아님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누가 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물론 유아 자신은 이런 결정을 할 수 없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부모는 유아의 생사에 의해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며, 바로 그들이 가능한 가장 풍부한 정보를 근거로 아이의 생존을 위해 현대 의학의 자원을 사용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 발언 우선권을 지녀야 한다. 나는 의사가 특정 장애를 지닌 생명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견해를 지닐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결정에 대해 의구심을 지닌 부모는 의사로부터 얻는 정보에만 의존하지 말고, 특정 장애우 대표 단체나 장애우 부모, 간병인과 접촉하여 다양한 정보를 구할 것을 촉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여전히 종종 합당한 근거에서 아이가 살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결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직을 수락할 즈음, 나는 그런 사례를 일상적으로 접하는 신생아중환자실 실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에게 부모의 의견을 구한 후, 그들이 자신들의 아이가 생존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데 동의한다면, 그는 호흡기를 끌 것이고 심지어 아이에게 음식과 수분을 공급하는 튜브를 제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아이에게 극약을 주사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는 거기에 중요한 도덕적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무엇인지 설명하진 못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대답하기를, 가용한 의료적 치료를 의도적으로 유보함으로써 죽음을 허용하는 것과, 신속하고 인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기 위한 적극적 개입을 심리적으로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나는 이 둘 사이에 중요한 도덕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나는 엄밀히 말해 후자가 덜 고통스럽기 때문에 종종 도덕적으로 더 낫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전망이 매우 나쁠 때조차도, 모든 의사들이 이 의사처럼 부모와 상의하고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 의사에게 내 견해를 밝혔던 그 즈음, 나는 내가 B 부인이라고 부를 한 여성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내 아들 존[실명 아님]은 거의 2년 반전에 단지 1파운드 14온즈의 체중으로 11주나 일찍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 아이는 이미 임신 29주에 있었고 두개골 내에 출혈이 없었기 때문에 상태가 양호할 것이라고 했지요. 그 아이는 단지 동일 연령의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을 필요가 있을 뿐이라구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존은 잠재적인 우측 반신불수와 함께 경련성 양측 뇌성마비를 지니고 있었고, 지각계통의 문제를 지니고 있었고, 언어발달이 뒤쳐졌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그가 아마 다수의 학습장애를 지닌 “정상” 지능을 지닐 것이라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아이의 지적 기능이 어떤 수준일지 알지 못해요. 그 아이가 CP 아동들에 비해 더 잘 기능하는 건 확실하고, 최소한 납득할 만한 “정상”적 삶의 기회가 아주 작은 아이들보다는 기능이 더 좋을 것이지만, 이것이 논의하고자 하는 문제는 아니지요.
내 남편과 나는 우리 아이(세 아이 중 둘째)를 사랑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B 부인, 당신 아들은 수많은 장애를 가지게 될 거예요. 당신은 우리가 이 아이에게 삽관하기를 여전히 원하시나요?”라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아니요”일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을 뒤엎는 직감이었을 것이지만 최상의 대답이었을 것에요. 그리고 존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다른 아이들에게 최상의 이익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가 성장해 감에 따라 그가 극복해야 할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슬퍼집니다.
내가 받은 이런 투의 편지가 이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B 부인이 전형에서 벗어난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각한 장애를 지닌 아이들의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의 삶에 대해 그들이 출생했을 때나 출생 후 바로 사망했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물론 다른 부모들은 매우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다.
B 부인은 심각한 장애를 지닌 아이를 가질지 그렇지 않을 지 선택하는 기회에 직면했을 때 우리들 대부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관련된 또 다른 핵심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틀림없이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선택했을 삶이 아닙니다. 내 남편과 나는 우리가 심각한 장애를 지닌 아이의 부모가 될 자격이 없다는 점을 숨겨 온 셈입니다. 우리는 만약 그런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낙태했을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나는 이런 아이의 임신에 잘 대처할 만큼 특별한 사람은 아니라고 느꼈어요.
이것은 분명 일반적인 견해이다. 선전 진단은 35세 이상의 임산부에게 권고 사항이다. 그리고 이 연령의 여성 거의 대부분은 이 권고를 받아들인다. 검사결과 태아가 다운증후군이나 척추이분증과 같은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면, 거의 모든 여성은 임신을 중단할 것이다. 그들의 동기는 복합적일 수 있다. B 부인처럼, 부분적으로는 자신이 스스로 심각한 장애를 지닌 아이의 부모가 될 자격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아이”에 대한 최선의 것을 바라면서, 그들 역시 잘못 시작된 삶을 종료하고 아마도 다시 시도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이슈들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오늘날 대부분의 부부-자녀가, 최소한 선진국에서는, 가족계획을 한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아마 둘 또는 세 아이를 가질 것이다. 가령 다운증후군 태아를 낙태하는 결정은 “반-생명”은커녕, “반-자녀”도 아니다. 이것은 “내가 단지 두 명의 아이들만 가질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완전하고 풍요로운 삶에 대한 가장 좋은 전망을 지니기를 원한다. 그리고 시작시점에서 이런 전망이 심각하게 어둡다면, 나는 차라리 다시 시작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결정이다.
이것은 분명 받아들일 만한 합당한 견해이다. 이 견해는 장애를 지닌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대한 편견을 반영하는가? 이것이 편견이라면, 매우 널리 퍼진 편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모든 것이 동일하다면 장애가 없는 아이들을 갖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하반신 마비와 같은 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는 연구에 많은 돈을 쓰겠는가?
장애를 지닌 아이들의 출생을 방지하지 하는 결론 에 도달하거나 심지어 종종 낙태란 결론에 도달하게 될 때 우리들 대부분은 이 추론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정확하게 동일한 추론에 대해 우리가 놀라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낙태 반대론자가 옳은 점이 있다면, 분명히 출생은 존재 그 자체의 본성에 있어 어떠한 결정적인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태아에서 유아로의 발달은 점진적인 것이다. 출생이 만들어내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유아가 좀 더 쉽게 포기되어 입양될 수 있다는 점이다. 별로 심하지 않은 장애아의 경우 아이를 입양할 부부가 있다면 그 아이의 삶을 종결시키느니 이게 더 나은 결과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후기 태아와 신생아 사이의 구분 말고는, 나는 우리가 출생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하도록 강요하는 몇몇 비임의적인 선을 가질 필요가 없다면 출생에 선을 그을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실제 도덕적으로 구분하는 선은 좀 더 나중에 발생하는데, 자의식이 시작되는 때라고 제안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분명한 선이 그어지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 내 동료인 쿠시(Helga Kuhse)와 나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 바 있다. 부모와 의사가 함께 신생아에 대한 생사 결정을 내리는 데 출생 후 28일간의 결정시간이 재량권으로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것이 매우 임의적인 것이어서 실제로 가능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출산 후 유아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내려지자마자 곧 이런 결정들이 내려져야 하며, 적절히 고려할 시간에 대한 부모의 요구는 허용한다는 점만을 말하고자 한다.
심한 장애를 지닌 아이에 대한 이 절에서 내가 지금까지 논의했던 것은 유아의 맥락에서, 유아에 대한 부모의 결정이란 맥락에서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마무리하고 싶다. 지금까지 논의했던 것의 그 어떤 것도 장애를 지닌 성인이나 좀 더 성장한 아이들에 대해 직접 적용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휠체어에 앉아 있고, 맹인이라는 사실은 한 “사람”으로서의 지위와 어떤 관련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은 그 사람의 삶을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종결시키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부모들이 나중에 성장하여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거나 맹인이 될 아이들의 삶을 종결시키는 것을 내가 허용하고 있다 점을 인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견해를 따른다면 자신들이 오늘날 생존해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낙태의 관점에서 많은 경우 사실이다. 그리고 산전 상담 때문에 몇몇 경우에 있어 사실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부모들은 가령 유전적인 장애를 피하기 위해, 기증된 정자를 이용하도록 조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이것을 산전 상담을 금지시킬 이유라고 보겠는가?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의 부모가 낙태할 수 없었다면 생존해 있지 않았을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살아 있다. 왜냐하면 그랬다면 그들의 부모는 또 다른 아이를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나는 이전에도 여러 번 말해 왔듯이 내가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사회에 통합되고, 교육 받을 수 있어야 하며,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일할 수 있도록 사회로부터 가능한 모든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5. 자의적 안락사와 의사 조력 자살
전통적 윤리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은 의학적 치료 여부를 결정할 환자의 권리가 점점 더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 사회라면, 의사결정능력이 있는 말기 환자가 충분한 정보에 근거하여 더 이상 자신의 삶이 살 가치가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 결정을 존중하는 의사가 이를 실행에 옮기려 할 때, 살인의 부도덕성에 대해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해 온 사람들이 자의적 안락사의 입법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정부가 시민의 사적 생활에 불필요한 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말기 환자와 의사가 죽을 시기를 결정하는 사적인 결정에 정부가 간섭해야 한다고 믿는다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플로리다 출신의 여성 테리 시아보의 급식 튜브를 제거하는 문제로 남편과 친정부모 사이에 법정 다툼이 벌어졌다. 시아보의 생명을 연장하려고 시도했던 생명권 옹호론자들의 노력이 가져온 큰 아이러니는,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수많은 미국인들이 15년간이나 식물인간 상태에 있었던 시아보와 같은 상황이 되면 나는 더 이상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명시적인 생전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아보의 급식 튜브 제거를 둘러싼 논쟁으로 인해 급식 튜브 제거가 상당히 늘어날 것 같다. 이 사례에서 의사결정능력이 있는 환자의 결정권이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시아보 사례 자체의 이슈를 넘어 적극적 자의적 안락사 및 의사 조력 자살과 같은 광범위한 죽을 권리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재점화되었다.
19세기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익의 최선의 판단자요 수호자라고 논증했다. 밀이 든 유명한 예는,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을 발견할 때 당신이 그 사람들을 멈추게 한 뒤 다리 붕괴의 위험성을 알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들이 계속 가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비켜서서 그들을 통과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다리를 건너는 그들만이 자신의 행동의 중요성과 위험의 가능성을 저울질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밀이 든 예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존재는 정보를 습득, 반성 및 선택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개인적 자유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라면, 삶이 계속될 가치가 있느냐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는 바로 그 자신이어야 한다는 밀의 주장에 동의해야만 한다. 만약 판단 능력이 손상된 사람이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을 이유로 살기보다 죽겠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살인에 반대하는 통상적인 이유-살인은 죽임을 당하는 존재로부터 생명이 가져올 선(善 )을 빼앗기 때문-는 그 사람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이유로 뒤바뀌게 된다.
우리 사회의 어떤 구성원들에게 자의적 안락사는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자의적 안락사라는 발상에서 그들의 견해는 암묵적으로 존중된다. 그것은 완화 요법이나 치료 유보처럼 원하는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하나의 옵션이지, 모든 사람들이 택해야만 하는 죽음의 양식은 아니다. 완화 요법과 비치료는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옵션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완화 요법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종류의 품위 있는 죽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완화 요법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합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완화 요법을 통하면 도움 못 받을 말기 환자가 거의 없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별 관련 없는 주장이다. 5% 정도가 여기 해당될 것이다. 설령 그 수치가 0.05 퍼센트라고 해도 근원적인 논점은 여전히 성립한다. 어떤 환자도 도덕 또는 종교의 가르침을 지키느라고 자신이 질색하는 방법으로 죽게 되어서는 안 된다.
6. 죽게 방치함
생사 문제에 관해 내가 옹호해 온 입장이 갖는 더 넓은 함축이 있다. 심한 장애를 갖고 태어난 신생아의 치료 케이스에서 우리가 죽게 내버려 둠과 의도적인 살인 사이의 구분을 비판해야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계 최빈국의 절대 빈곤 주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실패하는 경우에도 이 구분의 적절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더 소비하느라고 원조를 유보함으로써 “죽게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살인과 동일시될 수는 없겠으나 그 결과가 나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며, 매년 1천 8백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 빈곤으로 인한 사망과 관련이 있다. 이 문제는 제 2강의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번역: 구영모, 최경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