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광화문 앞에서 복소(伏訴)
솔뫼에 봉소도소 설치
정부에 제출하였던 소장이 반려되자 곧 서울에 올라가 신원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해월은 서병학의 건의를 받아들여 1893년 정월 청원군 송산리[솔뫼] 손천민의 집에 봉소(奉疏)도소(都所)를 설하였다. 손천민이 1월 10일경에 제소문을 만들고 20일경에 각도 두령에게 서울로 모이라는 경통(敬通)을 띄웠다.
경통
황하의 운수가 더디 맑아서 천운의 행보에 어려움이 많다. 서양의 교는 바야흐로 크게 성하고 있는데 우리 도의 운은 잠자듯이 쇠약하다. 우리 스승은 무극대도를 진전시켜 세상을 창명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음의 혹독한 화를 입으니 원통함을 어찌 말하지 않으랴. 우리 모두는 사문에 들어 배운 이로서 비록 먹고 숨쉬는 동안이라도 감히 설원(雪冤;원통함을 씻다)할 일을 느슨히 할 수 있으랴. 이제 각 포 도인들에게 널리 알리니 일제히 모여서 협의하여 원통함을 소청하여 부르짖어야 이치에 마땅할 것이다.
문제는 많은 인원을 서울에 집결시키는 방법이었다. 때마침 정부는 1893. 2. 8[양 3. 29]에 왕세자 탄신일을 맞아 별시(別試)를 치르도록 하였다. 각도의 많은 선비들이 상경할 것이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집결 날짜를 2월 10일로 잡고 11일부터 광화문 앞에 나아가 복소(伏訴;엎드려 호소함)하기로 하였다. 복소를 위한 도소는 남서(南署) 남소동에 있는 최창한의 집으로 정했다.
2월 1일 서병학을 필두로 한 선발대가 상경하였다. 관의 동정과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복합상소의 구체적인 일정을 마련하기 위해 미리 올라온 것이다. 해월은 연로하여 참석치 못하고 도차주 강시원이 손병희, 김연국, 박인호 등과 같이 수만 교도를 이끌고 경성에 올라왔다. [천도교 기록에는 만 여명, 동경일일신문에는 4천 명으로 나왔으나 아마도 1천 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반 도인들은 성밖의 낙산[타락산] 부근이나 남대문 밖 이문동 부근에 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10일 오후 동학지도부는 소장에 임명할 인사를 선정하였고 소두(疏頭)도 결정하였다. 『동학도종역사』에는 소수(疏首) 박광호, 제소(製疏) 손천민, 서사(書寫) 남홍원, 도인 대표 박석규, 임규호, 이용구, 박윤서, 김영조, 김낙철, 권병덕, 박원칠, 김석도, 이찬문 등이 앞장 선 것으로 나온다. 도소에서 봉고식(奉告式)[봉소에 나섬을 한울님에 고하는 의식]을 올렸다.
드디어 11일 아침이 밝았다. 날씨가 화창했다. 봉소인 9명은 예복인 주의(朱衣)를 차려 입고 나섰다. 긴장한 분위기 였다. 정부를 상대로한 교조신원운동이므로 체포되어 극형에 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9명은 소장을 받들고 광화문 앞으로 걸어나갔다. 아침 9시경 광화문 앞에 이르러 복소(伏訴)는 시작되었다.
『동경조일신문』에는 “이번에 세자궁의 탄신을 기해 당원 수백 명이 입경하여 그중에서 수십 인의 총대를 선발하여 한력 2월 8일부터 광화문쪽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정소(呈訴;소장을 드림)할 한 통의 상소문을 붉은 보자기에 싸서 앞에 놓고 그것을 전달할 방법을 4일간이나 구했으나 끝내 전달치 못했다.”고 하였다.
동학도들이 의젓하였고 당당하게 격식을 갖추어 진소하므로 관으로서도 별다른 탄압이 없었다. 저녁 5시가 되면 철수하여 숙소로 돌아갔다가 다음날 다시 나아가 복소하기를 반복하였다. 둘째날인 12일에도 정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날씨는 맑았으나 바람이 차가웠다. 이때 정부는 세자탄신축하 과거시험을 보느라 겨를이 없었다. 김윤식의 『면양행견일기』에 “8일부터 동궁의 탄신일을 맞아 문무(文武) 양과 과시(科試)를 열고 문과에서 6인, 진사과에서 51인을 선발했다고 한다. 9일에는 응제(應製;임금의 특명에 의한 과거시험)에 따라 문과 2인, 진사과 20인을 뽑았다고 하며, 12일에는 갑술생과를 열고 문취 3인, 진사취 30인을 선발하였다”고 했다.
13일 정오까지 9인의 봉소자들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정부는 오후가 되어서야 사알(司謁)을 보냈다.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 그 업에 임하라. 그러면 소원에 따라 베풀어주리라.”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 돌아갔다. 4월 11일자 『동경조일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 작금 동당의 세력은 날로 강대해지고 있으며 앞서 전라도 감사에게 요청한 세 사건에 대한 답변을 얻지 못하게 되자, 이번에는 궐하(闕下)에 엎디어 소원을 관철시키기로 결의하고 결사대 천여 명의 총대(總代)인 30명이 지난 3월 30일[음 2월 12일]에 상소문을 받들고 왕궁의 문전에 꿇어앉은 채 마치 죽으려는 듯이 머리를 땅에 늘어뜨리고 배례하고 있었다.
관리가 여러모로 제지했으나 조금도 물러서려는 모습은 없었다. 3일이 되어도 물러가려하지 않자 왕실은 비답과 처리방법이 궁하여 연일 중신회의를 열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한성부에 들어와 있는 동학의 결사대는 천여 명이라 하며 한편 대원군이 이들을 후원한다 하여 부민은 동요하는 빛이 있다 한다. ...상소에는 외국 종교인과 상인들을 추방하여 생민을 안정시키라는 것도 들어있다 한다.“
당시 정부의 요직에는 정치적 안목을 가진 이가 없었다. 공주와 삼례에서 뜻을 이루지 못해 상경한 동학도의 처지를 생각해주었다면 한 달 후에 사상 초유의 척왜양창의운동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동학으로 하여금 반외세운동을 격렬하게 하도록 내몬 셈이다.
상소문
각 도의 유학(幼學;벼슬하지 않은 사람)인 신 박승호 등은 진실로 두렵고 두렵게도 머리 숙여 삼가 목욕재계하고 백 번 절하면서 천통(天統;임금의 혈통)으로 운수를 융성케 하며 인륜의 바탕을 돈독케 하시어 정성(正聖)의 의가 빛나고 공덕이 밝고 덕이 크시어 요(堯)임금의 크심과 순(舜)임금의 아름다움과 우(禹)임금의 모훈(謀訓)과 탕(湯)임금의 경천으로 지극히 화하시고 신렬(神烈)의 경지에 이르신 주상 전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천지부모이신 주상 전하, 이번에 도닦는 신 등은 모두가 성상인 천지부모가 화육하는 적자들입니다. 이제 곤궁하고 병들어 고통받는 망극한 처지에서 감히 외람되이 죄됨을 무릅쓰고 조심스레 폐하의 발밑에서 부르짖습니다. 전하의 지척 아래서 망언하는 것은 망령되고 두려운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억울하고 통절함이 극에 이르러 부득이한 것으로 천지부모에게 호소하지 못하면 천지지간에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근자에 이르러 실천 행도하는 진짜 선비는 얼마 되지 않고 서로 얽히어 헛된 문장이나 드러내려고 한갓 겉치레만 숭상하면서 경전에서 표절하여 천박하게 이름이나 얻고자 하는 선비가 십에 팔구나 됩니다. 말로는 선비가 되겠다고 하나 덕성을 기르고 도를 따져 학하는 것을 가위 멸시함이 국치(國治)와 연결되니 실로 작은 연고가 아니니 스스로 깨닫지 못함을 통분히 여기며 하늘에 사무쳐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천운이 순환하사 무왕불복의 이치로 지난 경신년 4월에 황천(皇天)이 도우시고 귀신이 도와 경상도 경주 고 학생 신 최(제우)께서 비로소 천명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 포덕하게 되니 최(제우)는 바로 병자년 공신 정무공 진립의 7세손입니다. 도를 펴고 가르침을 행한지 불과 3년에 원통하게도 사학(邪學)이란 이름으로 그릇된 비방을 뒤집어쓰게 되어 갑자 3월 초10일 마침내 경상 감영에서 정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광경을 상상하면 천지가 참담하고 일월이 빛을 잃은 것 같습니다. 만약에 털끝만치의 죄를 저질렀다면 당연히 법대로 벌을 받아야 하므로 감히 설원을 도모하겠습니까마는 사람들의 터무니 없는 모략을 받아 백옥처럼 티없는 이 대도(大道)가 만고에 처음인 횡액을 당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최(제우)는 말씀하시기를 인의예지는 선성(先聖)의 가르친 바이지만 수심정기(修心正氣)는 내가 다시 정했다 했으며, 또한 공자님의 도를 깨닫고 보니 한 이치로 정해졌으며 나의 도와 비교해 보면 크게는 같고 조금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조금은 다르다함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천지를 경건히 받들어 일할 때마다 반드시 마음으로 고하고[심고(心告)] 천지 섬기기를 부모 섬기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어찌 도리에 비추어 모자람이 있다 하겠습니까?
이러한 도리는 선성(先聖)들이 밝히지 못한 것으로써 최(제우)가 창시한 종지인 것입니다. 한울님 섬기기를 마치 부모님 섬기듯 하라는 것으로 어찌 도리에 어긋나겠습니까? 또한 유불선이 겸출되어 삼도(三道)의 덕을 합한 이치이므로 조금은 다르다고 한 것입니다.
동학이라고 한 것은 한울님으로부터 나오고 동에서 창도되었기 때문에 동학이라 한 것입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이 서학으로 배척하고 업신여기게 되자 최(제우)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인즉 동학이다. 하물며 땅도 동서로 나뉘었는데 서쪽을 어찌 동이라 하며 동쪽을 어찌 서라 하겠는가. 공자도 노나라에서 태어나 추나라까지 풍화가 미쳐서 추로지풍(鄒魯之風)으로 이 세상에 전해 오거늘 우리 도는 동쪽에서 받아 동쪽에서 펴니 어찌 서학이라 이름하랴 했습니다. 이런즉 서학으로 돌려서도 안될 것이며 또한 동학을 이단 아류로 지목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감영과 고을에서는 체포하고 가두고 형벌하고 귀양 보내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을 기르고 기운을 바르게 하여 천리(天理)를 삼가고 두렵게 여기도록 해서 모든 사람들이 물흐르듯이 착한 쪽으로 향하도록 해서 성스러운 이는 성스럽게 되고 어진 이는 어질게 되고 밝은 이는 밝게 되게 할 것이니 공부자의 도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데 어찌 조금 다름이 있다고 성인의 도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대저 이 도는 마음을 화평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므로 마음이 화하면 기운이 화하고, 기운이 화하면 형체가 화하고 형체가 화하면 바르게 되고 사람의 근본 도리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최(제우)는 선성들이 밝히지 못했던 대도를 창시하여 우부(愚夫)우부(愚婦)로 하여금 천리의 근본을 다하게 하였습니다. 이 도는 참으로 천하의 무극대도(無極大道)인 것입니다.
전하에게 복원하건데 천지부모의 은덕으로 화육한 이 적자는 신의 스승님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신원해 주시고 감영이나 고을에서 벌받고 귀양가 있는 생령(生靈)들을 살려주십시오.
대저 선비는 나라의 으뜸가는 기운이며 백성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본래 나라가 편안하고 기운이 화평해야 도가 생기는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스럽고 인자한 전하께서는 신속히 교원(校院)을 고치어 선비의 기(氣)를 배양하옵소서. 태조와 종사의 영령들이 양양하게 상제의 좌우에 계시면서 하늘에 영구한 수명을 빌 것이오니 남산을 갈아 숫돌처럼 엷어질 때까지 한강이 말라 띠처럼 가늘게 될 때까지 수를 누릴 것이옵니다.
계사년 규합 시에 송암이 소를 짓다.
중앙 정부를 상대로 한 이번 교조신원운동은 3일만인 13일에 성과없이 막을 내려야 했다. 동학도들이 물러서자 정부는 관리들을 풀어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일설에는 과거보러 올라온 지방 유생들이 동학당 선동에 가담할 움직임이 있어 체포에 나섰다고도 한다. 여하튼 동학도들은 정부의 체포령을 알아차리고 14일 오후부터 15일까지 일단 한강을 건너 서울을 거의 빠져나갔다.
첫댓글 전교조의 시국선언을 연상하게 하네요. 시국선언했다고 그 대표들을 잡아들여 벌을 부고 벌금을 물리는 등, 지금이나 옛날이나 대처하는 방법은 똑 갖네요. 당시 조정에서는 동학의 힘을 과소 평가하였나 봅니다.
세상을 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든지 너와 나는 다르다는 분리와 차별의 원리로 사는 부류와 우리는 다같이 하나임을 느끼고 깨닫는 공동체 의식으로 사는 방법이 있지요. 역사의 지배층, 기득권층은 항상 전자의 논리를 신봉하였지요. 방금 안치환 공연을 보고 왔습니다만 민중 가수답게 우리 손잡고 하나 되자는 노래로 끝을 맺는 것을 보고 더욱 기분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