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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아줌마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비결 1 -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 (42P)
- 사르밧 과부의 믿음과 감사를 통해 깨닫는 은혜 -
- 주의 종을 잘 섬겨 받는 은혜와 축복 -
당신이 사르밧과부 만도 못한가?
오늘,
여기에 서서,
나의 삶의 地坪(지평)을 영분별하다.
열왕기상 17:8-24절
(8)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臨)하여 가라사대, (9)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屬)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留)하라. 내가 그곳 과부(寡婦)에게 명(命)하여 너를 공궤(供饋)하게 하였느니라. (10)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城門)에 이를 때에 한 과부(寡婦)가 그 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請)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11)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請)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 오라. (12)저가 가로되 당신(當身)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盟誓)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爲)하여 음식(飮食)을 만들어 먹고 그 후(後)에는 죽으리라. (13)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爲)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後)에 너와 네 아들을 위(爲)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地面)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17)이 일 후(後)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女人)의 아들이 병(病)들어 증세(症勢)가 심(甚)히 위중(危重)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여인(女人)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當身)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相關)이 있기로 내 죄(罪)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女人)의 품에서 취(取)하여 안고 자기(自己)의 거처(居處)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自己) 침상(寢床)에 누이고, (20)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主)께서 또 내가 우거(寓居)하는 집 과부(寡婦)에게 재앙(災殃)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番)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願)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24)여인(女人)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當身)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當身)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眞實)한 줄 아노라 하니라.
‘성령님의 시종’, ‘殉命의 사람’ 배종부 목사가 인도하는
<성령의군대 연합기도대성회>
2004.4.4일 주일저녁부터 <365성령집회> 시작:
오늘, 2004.4.4일 주일저녁부터 시작되는 <365성령집회>에 성령의 기적들이 일어나고, 은사가 터지고, 병이 고쳐지고, 하나님의 성령의 살아계신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이 집회는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못하지만,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인도해 주옵소서. 아멘.
2007.11.17.토 새성교회당에서 시작,
2014.11.29일 현재 7년 85회째 7년 차 기념성회
시작한지 85개월이 지난 <성령의군대> 기도대성회이다.
지난 주 대지 만평의 땅에 영주 임마누엘찬양원 일일부흥성회를 인도하고 왔다.
권태성 장로와 부인 황권사가 32년 간을 찬양으로 인도해 온 선교단의 역사가 600교회 공연, 16개국 공연의 대기록을 낳고, 100여 명의 현악기 위주의 찬양단원과 총 300여 명의 찬양단을 양성하여 전국적으로 4개 처소에서 매주 집회를 갖고 있었다.
일개 장로와 권사도 저렇게 사역하는데, 목사요, ‘성령님의 侍從(시종)’이요, ‘殉命(순명)의 사람’인 나는 얼마나 부끄럽고, 도전을 받았는지...
영적 성장은 단순히 영적 지식을 알고 은혜 받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훈련으로 된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훈련이다.
1>.예배훈련
(많이 드려라, 신령과 진정으로, 삶의 축으로 삼으라, 365성령집회, 혼자서 예배하라. 정식으로 예물까지 드리며...)
2>.기도훈련
(기도 자리에 오래 머물러라, 기도하고 간구하라, 방언기도, 금식기도, 골방의 삶, 쉬지않는, 작정기도, 중보기도...)
3>.묵상훈련
(말씀훈련-정독, 다독, 요약, 묵상QT, 개론 총론 공부, 설교듣기, 설교 읽기, 영적독서...)
4>.단순화훈련(기쁨, 감사, 행복, 평안, 만족, 해방, 자유...)
5>.헌금훈련(물질이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은 공허한 구호...)
6>.성령훈련(기도, 열매, 동행, 은사, 축사, 영적도구...)
7>.헌신과 충성훈련(자기부인, 섬김, 드림, 희생, 인색함 버리기, 주의 종 동역...)
8>.대인관계훈련
9>.사회생활훈련
10>선교와 전도훈련
서론:한국교회를 조망하다
사람에게는 밝은 면, 아름다운 면과 어두운 면, 추한 면이 있다. 전자는 남에게 보이는 면, 후자는 남에게 감추는 면이다. 굳이 남의 어두운 모습, 추한 모습을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곧 내속에 숨어있는, 감추고자 하는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각자가 은밀하게 지고 가야 할 사람의 "감추고 싶은 추한 이면(裏面)"이란 무엇인가?
1>.사역의 초라함-허명(虛名)을 날림, 사람들이 아는 부흥사 배종부 목사는 실상 허명(虛名)의 사람이 아닌가?
2>.목회의 비애-4,000명 출석교회 목사의 사례 200만이다. 2,000명 출석 교회 목사의 사례가 300만이다. 목회 활동비랄 것이 없다.
3>.경제적 가난-빛 좋은 개살구의 모습
4>.목표와 비전의 고통-분명히 하나님께 받았고, 그 길을 가고 있는데, 순적한 형통의 길이 잘 열리지 아니함,
스스로 위로 받는 면이 있다.
총리대신이 된 요셉의 삶,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된 모세의 삶, 왕이 된 다윗의 삶, 주님께 드려진 베드로와 스데반과 사도 바울의 계속되는 고난...
우리는 큰 면에서 보면, 다 같다.
5>.죄악의 문제-
자기 삶의 진실성과 성실성과 순수성의 문제,
돈 사용의 문제,
특정 악습과 죄악의 문제-낭비벽, 술 담배, 음란과 간음성,
6>.대인관계의 부정성과 고통
면목동의 교회 건축한 목사와 회계집사 부부의 아들 교통사고 죽음,
목사를 쫓아 내는 어느 교회 목사의 눈 멈과 회복,
장로 때문에 불행한 목사,
별거하는 부부 등의 왜곡된 대인관계의 문제 등등...
우리는 그 속에서 몸부림치며 오늘도 또 살아가는 것이다.
다 만족한 삶이란 게 어디에 있나?
각자의 짐을 지고 하나의 잠간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1.이제 교회 부흥관을 바꾸어야 한다
1>.그릇된 교회 부흥관과 자본주의 논리
일반적으로 교회 부흥이란 개척하여, 또는 한 목사가 부임하여 교세가 늘어나고, 교회당을 신축하고, 땅을 사고, 부대시설로 기도원 수양관 복지센타 등을 짓고, 해외에 교회를 몇 개 짓고 선교사역을 활발하게 하고, 대내외적인 폭넓은 사역의 장을 넓히면 ‘교회 부흥’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어야 하고, 목사와 장로들은 이러한 교회 부흥을 여전히 꿈꾼다.
그러면 우리 시대에 교회는 늘어가고, 목사는 늘어가고, 매년 교인은 5% 가량 줄어가는 이 한국교회의 쇠퇴시대에 이러한 부흥관이 과연 옳은 것일까?
한국 장로교의 통계:
합동 285만, 11,593교회, 통합 281만, 8,592교회, 고신 47만, 1,853개, 기장 29만, 1,656교회, 합신 15만, 899교회...
2>.부자와 한국교회의 예
한국사회에 근면한 삶과 정상적 부를 형성하여 부자가 된 사람이 몇 명인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숫자는 5% 미만이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부흥 성장한 교회들이 정상적으로 불신자를 전도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논리로 아름답게 부흥 성장한 교회가 그 비율로 볼 때 얼마나 될까?
한국교회 부흥이란 한 마디로 남의 교회 교인을 빼앗아 온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란 남을 죽이고 내가 사는 사회이다.
국가가 할 일은 이것을 적당히 조절해 주는 일이다. 부자가 너무 많이 갖지 않도록, 가난한 자가 너무 열 받지 않도록...
한국 정부는 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얼마나 간단한가?
그런 짓을 한 자들이 모든 것을 다 쥐고 있음으로...
부자교회 대형교회와 가난한 교회 작은교회 개척교회들과의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상생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비극이다.
3>.대기업과 한국교회의 예
소위 말하는 갑과 을의 관계이다.
한국교회는 대기업 논리를 철저히 신봉한다. 수단 방법 윤리는 필요 없다.
교회가 부흥 성장하고 대형교회가 되면 하나님의 뜻이고, 그 목사는 성령 충만하고, 천당의 맨 꼭대기에 올라 가는 목사이고, 개척교회, 작은 교회 목회하면 그는 불충한 목사이고 능력이 없는 목사이고 숨은 죄가 있는 목사이고 사명을 감당치 못한 목사임으로 지옥 가야 마땅한 죄인인 시대가 우리 시대의 한국교회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불신 한국사회에 언제나 먹칠을 하는 것은 대형교회 목사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작은 교회 목사들은 드러나지도, 소리를 낼 수도 없는 사회구조이기 때문이다.
4>.우리 시대의 올바른 교회 부흥관
한 개인의 “거룩한 내적 회심”이다.
한 담임목사의 거룩한 내적 회심이다.
그로부터 시작되는 작은 하나 하나의 성령의 진정한 거듭남의 역사가 진정한 교회 부흥이다.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살면, 모든 영역이 하나 하나 새롭게 거듭나기 시작한다.
현대 물질문명의 혜택으로 사람들은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 속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은 옛날보다 점점 완악해지고 있습니다. 그 특징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감사하다는 말이 적어졌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을 보아도 감사보다는 원망이 많고, 가정에서도 감사보다는 불평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고 우리에게 매일 생활에서 감사할 것은 물론, 절기를 정해서 의무적으로 감사제를 지킬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사르밧 과부의 믿음과 감사의 행위를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되며, 그러한 감사는 어떠한 역사를 일으키는가에 대해서 말씀 드림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그 당시의 환경
엘리야와 연관된 중요한 두 여인이 있습니다. 사르밧과부와 수넴의 귀한 한 여인입니다. 두 여인의 기사는 놀라운 말씀의 은혜를 줍니다. 오늘은 사르밧과부의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사르밧 과부의 생활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당시의 환경부터 살펴 보아야 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 아합왕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이 아합왕은 하나님의 택한 민족의 치리자로서 하나님을 섬겨야 됨에도 불구하고, 이방신을 섬기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아합왕은 이방의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임으로 이세벨이 들여 온 바알과 아세라신을 온 백성들에게 숭배토록 하였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2024년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주술과 무당, 점쟁이 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야당은 온통 주사파에 물들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죽어 있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영적인 누란의 위기 가운데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3년 6개월 동안 극심한 가뭄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뭄은 주위의 이웃 나라에까지 임해서 같은 고난을 겪게 하였습니다. 그 가뭄이 얼마나 심한지 하늘에서는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았으며, 모든 산천초목은 말라 죽고, 짐승은 물론 사람까지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하늘에서 땅에서 바다에서 연속적으로 사고가 터졌습니다. 저는 그 때 하나님의 진노인 것을 즉각 깨달았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월호 사건이 터졌습니다. 300여명의 아이들이 어른들의 죄악으로 바닷물 속에 수장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한 마디로 너희 전부를 이렇게 바닷물 속에 처넣어 버리고 싶다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목사들을 제일 먼저, 정치가들을, 경제인들을, 교육자들을, 소위 ‘長(장)’이라는 모든 인간들을 전부 싸그리...
이후로도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박근혜를 버리신 하나님의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어떠한 사고도 없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명박은 초기에 광우병 파동으로 일년 반 동안 하나님 앞에 근신의 몸가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말이 많지만 영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더 인정합니다.
그 때 아합왕은 이 가뭄의 원인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서 비롯된 자신의 잘못임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엘리야를 죽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내 탓이냐, 너의 탓이냐?”
이 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지금 야당이 하는 짓이 바로 이 짓입니다.
여당과 정부가 너무 밉지만, 그래서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목사와 장로, 성도들이 서로 남 탓 합니다.
그래서 아합왕은 엘리야를 잡기 위해 이스라엘 전 지역에 현상수배까지 내걸었습니다.
이 때 엘리야는 아합의 낯을 피해 그릿 시냇가에 숨어 지내다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으리라](9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르밧으로 내려 갔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 나뭇가지를 줍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여인이 바로 사르밧과부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역사는 가장 어려울 때에, 느닷없이 만나게 됩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이 여인에게 처음에는 물을, 그 후 물과 함께 떡을 얻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아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가루 한 웅큼과 기름 조금 밖에 없었지만, 떡을 만들어 믿음으로 먼저 하나님의 선지자를 대접함으로, 그 기근 중에도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기적의 사건이 있음을 분명히 간증합니다.
바로 우리교회 성00 권사입니다.
성권사는 죽도록 헌금을 합니다.
온 몸을 다 바쳐 교회와 목사에게 헌신 충성합니다.
어느 날 근심어린 표정으로 나를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빚이 늘어나 2,000만원이 되었는데, 돈이 돌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딸 아름이가 워십을 하다가 무릎이 깨어졌는데, 보상금이 2,200만원이나 나온 것입니다. 할렐루야!
지금도 이렇게 밥을 굶는 주의 종을 공궤하는 종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현장을 찾으려면 개척교회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있는 개척교회 현장으로는 절대 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너무나 쉬운데...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의 현장을 찾아가면 되는데...
이 시대에는 기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성도들과 목사들이 기적의 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분명하게 할 말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날 개척교회에 다니지 아니하고, 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천당을 못갈지 모른다.”는 지적입니다.
이유는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개척교회를 다녀야 진정으로 축복이 있다.”고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2. 기적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엘리야가 오기 전까지 사르밧과부에게는 땔 나무도 없었고, 먹을 양식이라고는 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5,16절에 보니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르밧과부가 주의 종의 말대로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의 종의 말씀하신 대로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굶어 죽지 않은 본문의 기적입니다.
한 끼의 양식도 채 되지 않았던 가루와 기름이 적어도 2년 반 동안이나 먹을 수 있게 되다니, 이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5초에 한 명이 굶어 죽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1분에 6명이 태어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죽습니다.
“아아! 굶어 죽는다.
태어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굶어 죽는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나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강 건너 불 구경이기 때문에...
오호라!
“강 건너 불구경 귀신!”
이것이 우리 시대, 말세의 징조 중에 하나인 “무정하며...”의 현상인 것입니다.
(딤후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末世)에 고통(苦痛)하는 때가 이르리니, (2)사람들은 자기(自己)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自矜)하며 교만(驕慢)하며 훼방(毁謗)하며 부모(父母)를 거역(拒逆)하며 감사(感謝)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無情)하며 원통(寃痛)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讖訴)하며 절제(節制)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善)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배반(背叛)하여 팔며 조급(躁急)하며 자고(自高)하며 쾌락(快樂)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敬虔)의 모양(貌樣)은 있으나 경건(敬虔)의 능력(能力)은 부인(否認)하는 자(者)니 이 같은 자(者)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어느 교회로 가야 하겠습니까?
당신이 사는 동네의 가장 가난한 개척교회로 가십시오.
그리고 밥을 굶는 목사를 먹여 살리십시오. 큰 교회는 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신이 <성령의군대> 기도대성회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복 받을 일을 한번 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르밧과부의 사건과 같은 이런 종류의 말씀 앞에 오늘날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지 아십니까?
1>.말씀 자체를 믿지 않고, 동화나 무슨 신화로 여깁니다.
2>.성경시대와 현재의 간격을 둡니다.
‘그 때는 그랬으나, 지금은 과학시대’라는 논리입니다.
3>.주의 종을 섬기라는 말에 아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신앙생활의 복을 받는 가장 쉬운 비결이 나의 목사님을 잘 섬기는 것인데,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4>.기적 자체를 아예 불신합니다.
우리 시대의 과학주의, 현실주의, 이기주의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1>.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목사님을 모시면 됩니다. 다른 목사는 또 다른 사르밧과부가 모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사님을 모시라고, 나를 이 교회에 보내신 것입니다.
세상이 모두 기근이 들어 먹고 살기가 어려운 형편에, 아니 목숨이 절박한 이 시간에 알지 못하는 손님 한 분을 모신다는 것은 큰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여인은 극심한 가난에다, 기근으로 인한 고난의 풀무 가운데 죽음에 임박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서 엘리야를 공궤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요 불가능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불평이나 원망없이, 다른 이견없이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거절하지 아니하고 영접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자기가 죽어도 주의 종을 먼저 살렸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의 자녀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기 때문에, 그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지자를 영접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사건은 훗날을 위한 하나님의 안배였습니다. 주의 종이 죽은 자기 아들을 살릴 사람이기에, 이 일을 위하여 주님이 먼저 그 가정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일은 작은 것을 먼저 요구하시고, 믿음으로 순종으로 응답하자 더 큰 3년 기근에 생명을 연장하게 하시고, 마침내 죽어버린 아들까지 살리는 기적의 서막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이 사르밧과부가 말씀 앞에 순종함으로 믿음을 보인 데서 출발합니다.
여인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순종합니다.
목숨을 걸고 순종합니다.
(13)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爲)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後)에 너와 네 아들을 위(爲)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地面)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여러분과 하나님의 종인 내가 만난 것은 하나님의 길고 긴 섭리의 과정에 서막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위대한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에게는 영적인 비전을 제시하시고, 이 어려운 현실속에서 여러분의 헌신과 충성, 사랑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놀라운 내일의 기적을 예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믿음과 순종, 주의 종을 사랑하는 동역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누가 있습니까?
교인들이 너무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주의 종과 삶과 마음을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척교회로 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동역해야 할 사람들이 모두 큰 교회에 가서 안일하게 하루 하루 거지처럼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위대한 개척교회 목사를 크게 들어 쓰시고 싶은데, 그를 통하여 세상을 바꾸고 싶은데, <성령의군대>가 온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기를 소원하시는데, 동역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개척교회 목사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말라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자꾸만 지연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종을 보내 세상을 바꾸려 하시는데, 동역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골방에서 기도하다가 굶어 죽습니다. 하나님이 또 다른 종을 보냅니다. 그도 굶어 죽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상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환경이 좋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되어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법칙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전 지역에 현상금이 붙은 사람입니다. 그 상황에서 엘리야를 영접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엘리야를 영접했고, 그 결과 그와 같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어렵고, 고통스럽고, 믿고 순종할 수 없는 환경에서 주님을 믿고, 주님이 보내신 사자를 영접하고 삶을 함께 할 때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대와 환경과 공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2>.이 여인은 하나님의 종의 말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주의 종을, 그 종의 말을 하나님처럼 믿은 것입니다.
사람을 믿지 않는데, 어찌 그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엘리야는 강단에서 “말씀”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속에서 대화체로 “말”을 한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목사의 말씀과 말”을 구분합니다. “강단에서 설교한 것은 말씀이고 사석에서 한 말은 그냥 말”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강단에서 선포한 말씀도 분석하여 “말씀”과 버릴 “말, 사설(私設)”을 일일이 구분합니다.
이는 한 마디로 그 심성이 못된 것입니다. 이미 은혜받을 자의 반열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얘기해 봅시다.
우리는 설교들을 때 다 나의 선입견과 주관으로 설교를 듣지, 진정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온전히 복종하는 자세로 말씀을 받습니까?
엘리야 선지자가 마지막 떡 하나 밖에는 만들 수 없는 가루와 기름으로 "먼저 나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오라. 그리하면 기근이 지나기까지 그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겠다."라고 했을 때, 이러한 약속은 절망에 처해 있는 그 여인에게 극도의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아니, 이런 환경에 처하면 사람들은 쉽게 이성을 잃게 되며,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자리까지 나아 갈 수도 있습니다. 여인이 믿은 것은 전적으로 여인을 살리려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열왕기하 6장 24절 이후에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아람의 벤하닷이 많은 군대를 모아 사마리아성을 에워싸자 그 성이 여러 날 동안 포위되어 크게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그 굶주림이 얼마나 심한지 경제는 폭등하고 민심은 날로 흉용해져만 갔습니다. 사람들의 송사가 들어왔는데, 자식을 삶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너무나 기가 막혀 그 자리에서 옷을 찢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람이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기 자식까지도 잡아먹을 정도로 비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때에 엘리야는 여인에게 마지막으로 아들과 먹고 죽을 떡을 가져 오라고 했으니, 그걸 누가 가져 올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 가뭄에 주의 종이 아니라 양식을 뺏어 먹으려는 사기꾼으로 의심할 수도 있었고, 둘째는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 같은 가난한 과부에게 와서 요청할 것이 없지 않은가 하고 그 말씀을 믿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믿겠나이다" 라고 했듯이 이 여인도 바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선지자 엘리야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우리는 그 약속을 받고 나갈 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시대가 변했어요. 이제는 아무나 믿으면 안돼요. 어떤 세상인데... 먼저 보여 주옵소서." 라고 하는데,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안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라는 사람들은 사실 믿지 않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천당 갈 사람이 희귀한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
믿음의 선진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3>.말씀대로 복종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고,](13절)
이 약속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는 말씀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선으로 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환경이나 형편이 어떠하든지 어느 시대, 어느 장소가 되었든지 '먼저'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의 종과 동역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적이 왜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순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먹고, 쓰고, 남은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조금 있는 양식이 '먼저'하나님께 드려질 때 넘치도록 풍성해진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함으로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경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만 아까워 여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드리는 적은 것에 비해 하나님이 주시는 넘치는 축복을 바라보고 가슴 벅찬 기대와 감사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00 장로님은 30년 전, 남의 빚으로 인하여 항상 쪼들리는 생활을 했었습니다, 누님(김00 목사님)과 두 분이 공무원으로 부지런히 벌어도 생활은 언제나 적자였습니다. 그러던 중 십일조를 하면 가난의 저주가 물러가고 물질의 축복을 받는다는 말씀을 듣고 담대하게 십일조를 시작하셨습니다.
"둘이 벌어서 알뜰하게 살아도 못사는데 하나님 앞에 드리자. 사람한테 빚질지언정 하나님께는 빚지지 말자." 라는 결단을 내리고 믿음으로 십일조를 실천하자 참으로 신기한 일이 그 가정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환난의 거센 바람이 멈추고 재난이 물러가더니, 물질의 쓰임새가 막아지고 적자였던 재정이 점점 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쌓을 곳이 없도록 복 받은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만약 그 당시, "내가 먹어도 부족한데 이걸 하나님께 드리다니?" 하고 안드렸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적자인생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것 가지고는 못산다, 하나님 것으로 살자!"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먼저 드림으로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믿음에는 항상 선택이 따릅니다. "하나님이냐? 사람이냐? 영적으로 살 것인가? 육적으로 살 것인가?" 이럴 때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래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계3:14)라오디게아 교회(敎會)의 사자(使者)에게 편지(便紙)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忠誠)되고 참된 증인(證人)이시요 하나님의 창조(創造)의 근본(根本)이신 이가 가라사대 (15)내가 네 행위(行爲)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願)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富者)라 부요(富饒)하여 부족(不足)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困苦)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내가 너를 권(勸)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鍊鍛)한 금(金)을 사서 부요(富饒)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羞恥)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者)를 책망(責望)하여 징계(懲戒)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悔改)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門)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音聲)을 듣고 문(門)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 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寶座)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寶座)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者)는 성령(聖靈)이 교회(敎會)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또한 하나님의 요구는 그 강도가 강해집니다. 엘리야가 처음에는 물 한 그릇을 요구했으나, 다음에는 떡까지 요구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적은 것부터 요구하며 차츰 차츰 우리의 믿음을 키워 나갑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심으로 거기서 하나님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진정 믿음이 있는 줄 아십니까?
순종하는 자세가 그래서 중요하고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는 것 같아도 순종을 보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큰소리치지 말고, 순종하십시오. 주의 종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와 함께 하십시오, 그를 돕고, 그를 살리십시오, 주의 종은 정말 중요합니다. 나의 축복의 시금석이요 시험의 시금석이 나의 목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종을 통한 하나님의 시험에 걸려 넘어져 축복을 유산하고 맙니다.
사르밧과부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순종함으로 그와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주의 종이 곧 하나님이었습니다. 주의 종의 말도 안되는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주의 종 앞에 감히 당신이 말씀이니 아니니 판단하지도 마세요.
4>.기꺼이 드리는 자에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이 여인이 엘리야에게 행한 대접은 하나님께 향한 그 여인의 마음의 표현이었으며 이 헌납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순수한 제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아까워하지 않았고, 관습으로 하지 않았으며, 마지 못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순수한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헌금, 예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헌금을 심어야 물질 축복의 열매를 거둡니다. 예배를 심어야 존귀해집니다. 기도를 심어야 기적이 창조됩니다. 헌신과 충성을 심어야 당신의 자녀가 위대한 인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하나의 큰 시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떡은 자기의 생명과 같은 마지막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큰 시험이요,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따져보면 환경이 그래서 그렇지, 떡 한 조각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극히 작은 것이 사실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는 한 가족이 초코렛 하나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먹는 모습이 나옵니다.
여기 떡 한 조각은 바로 생명입니다.
사르밧과부는 그 생명을 주의 종에게 드린 것입니다.
오직 하나 믿음으로, 믿음에서 나온 순종으로...
그런데 왜 우리에게 그것이 그렇게 많아 보일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떡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적은 것을 하나님과 함께 나눔으로 많은 양식을 얻었습니다. 두 사람이 한 끼 밖에 먹지 못할 것을 가지고 세 사람 이상이 몇 년을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으로 살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것으로 살면 하나님의 풍성함 속에서 그와 같이 부요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떡을 만들어 먼저 엘리야에게 드림으로 그 여러 식구가 먹었으나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수 많은 과부들이 이스라엘에도, 이방에도 많았는데 왜 하필이면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가 보냄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그녀를 살리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천하 만곳에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하고, 자신의 자녀도 돌볼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특별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축복하시고 그 아들을 살리시는가를 깨닫고 그 길을 나도 걸어가라고 주님이 말씀하시기 위하여 본문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특별한 기적, 특별한 축복을 받길 원하지만,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기적을 창조할 특별한 믿음을 얻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그것을 받을 만한 특별한 믿음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환경이 좋아서, 특별한 사람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사르밧 여인은 최악의 상태였지만 특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최선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특별한 믿음을 소유하십시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와 사업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동네 아줌마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비결 2 - 룻의 이야기 (27P)
* 오늘,
여기에 서서,
나의 삶의 地坪(지평)을 영분별하다.
♥ ‘코로나19’ 로 인한 한국교회의 ‘교회당 폐쇄’, ‘예배 폐쇄’ 사태에 대한 회개를 위한 무기한 금식기도성회 ♥
제 5일의 금식기도:
인도자:<성령의군대> 지도목사, 새성교회 담임목사 배종부
찬양인도:드림콰이어(Dream Choir) 찬양단
장소:서울 새성교회당
일시:
2020.3.15.주일 오전-18.수 저녁, 총 8회 금식기도성회 4일 1차
주제: ‘悔心(회심)의 말씀의 능력’ 8편
2020.3.22.주일 오전-25.수 저녁, 총 8회 금식기도성회 4일 2차
주제: ‘오늘, 여기에 서서, 나의 삶의 地坪(지평)을 영분별하다’ 8편
주일 오전 11:00, 주일 오후 2:00
월, 화, 수 오후 2:00, 저녁 7:00
*가까운 곳에 계시는 <성령의군대> 동역자들께서는 함께 동참해 주시고, 멀리 계신 분들은 각자 교회에서 함께 회개하며,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3일의 금식기도성회에 카톡으로 3,000명을 초청했다.
기도하자고...
새성교회 성도들 외에는 단 3명 만이 와서, 함께 예배하고 기도한다.
반대로 이 어려운 형편에 세상 시류에 역행하는 짓을 한다고, 욕만 잔뜩 먹고, 비방만 받았다.
룻기 1:1-5절
1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 가서 거기 살더니,
3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년 쯤에,
5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2015년 사랑하는 친구요 동역자인 이00 목사님을 모시고 5일 간 매일 저녁 부흥성회를 했다. 이 부흥성회는 새성교회가 세워진지 17년 만에 겨우 세번째로 실시하는 부흥성회였다. 그 만큼 나 배종부 목사의 생애와 새성교회는 시련과 환란과 연단이 많았었다.
이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많은 영감이 떠올랐다.
룻은 영적, 정신적, 가정적, 경제적, 환경적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좁은 길로 걸어 가, 시온의 대로를 개척했다. 그녀가 오직 주님을 바라 보며 달려 갈 때에, 하나님은 기적의 손길로 보아스를 만나게 하시고,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되게 했다. 동네 아줌마가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믿음과 기도와 고난과 하나님의 비전’ 이 룻의 인생을 바꾼 것이다.
‘고난의 환경’ 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 속에서 나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연단의 섭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람’ 을 만나고, ‘하나님의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는 환경’ 을 만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골방기도’ 이다. 오로지 골방기도 만이 믿음을 키우고,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게 한다.
내게는 소중한 사람들이 여러 방면에 많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은 나의 성도 들이다. 그리고 성령의 동역자 들이다.
이 분들은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의사 부인 들인 조선영 집사, 이혜리 집사, 양선아 집사 등이 어제도 와서 내게 기도를 받고 가면서, 내 양손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해 주고 간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 당신에게 다가 온 하나님의 사람을 잘 붙들어라. 그 분이 성령의 사람이거든, 무엇을 던지든지 그를 붙들어라.
옆 사람에게 “성령의 사람인 당신을 기대합니다.” 인사하라.
‘한나’ 는 오직 기도하여,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한나는 주의 종의 말씀을 믿었다.
성도에게 주의 종이 얼마나 중요한가?
나에게 말씀을 던지는 주의 종은 참으로 소중한 분이다.
내 목사님이 얼마나 소중한가?
동네 아줌마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데는 언제나 빠지지 않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곧 ‘주의 종과의 관계, 믿음, 골방기도, 고난,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사람 만남...’ 등이다.
고난을 기뻐하라. 역경을 기뻐하라.
바야흐로 당신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이 다가 올 때, 하나님의 사람인가를 분별하라.
문제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 개척교회가 신유 은사가 있는 집사를 모시고 신유부흥성회를 하고 있었다. 길을 가던 여의사가 찬송 소리에 끌려 교회당으로 들어 왔다. 그리고 기도를 받고서는 고통하던 오십견이 나아 버렸다. 짧은 세월 2년을 섬기는 동안에, 이 여의사가 엄청난 헌금과 70여 명 전도로, 혼자서 교회를 부흥시켜 버렸다.
2015년이 저물어 가는 지금 이 시간, 우리 새성교회에는 무슨 일이 일어 나려 한다.
뭔가가 꿈틀 꿈틀 댄다. 내 눈에 뭔가가 보인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토록이나 염원하던 부흥이다. <성령 컨퍼런스>가 시작되고, 김0정 목사가 오고, 강0나 목사가 오고, 교회 리모델링이 시작되고, 성령의 동역들이 일어나고 있다.
동네 아줌마여! 일어나라.
동네 아줌마여! 깨어나라.
동네 아줌마여! 기도의 주인공이 되라.
동네 아줌마여! 봉사> 충성 헌신> 산순교> 순교의 주인공이 되라.
동네 아줌마여! 이제 역사의 주인공이 되라. 기적의 주인공이 되라. 성령의 주인공이 되라.
네 당대만 바라 보지 말고, 네 자녀들, 네 손자들, 네 증손자 들을 바라 보며, 룻처럼 고난속에서 믿음을 심고, 인내를 심고, 기도를 심고, 눈물을 심고, 봉사> 충성 헌신> 산순교> 순교을 심으라.
헌금을 심으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내일을 위하여 심을 줄을 모른다.
제 며느리가 이렇게 하소연한다.
“월급이 200만 들어 왔는데, 헌금이 무려 50만원이예요.”
“헌금은 아끼지 말아라.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으로 채워 주신다.”
그래서 올바른 멘토의 가르침이 중요한 것이다.
복을 받으려면, 심지 않고 어떻게 받나?
백년을 바라 보고, 300년을 바라보라.
500년을 바라 보고, 1,000년을 바라보라.
나는 천국 가도, 내 후손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된다. 나는 손자 하건이를 보며 비로소 하나님의 장구한 계획을 생각한다.
이제 나는 20년 이후면, 천국 간다. 그러나 내가 뿌린 비전의 역사는 계속된다.
나의 손자 하건이는 사무엘이다. 나의 비전의 아들이다. 손자 하건이가 이 세상에 와서 일년을 사는 동안 가장 많이 한 일은 예배이다. 밤낮으로 예배 드리고 또 드렸었다.
한 인생이 이보다 더 축복될 수는 없다.
요셉을 보라.
애굽에서 나갈 때에 ‘내 유골을 갖고 나가라’ 한다. 480년 만에 요셉의 예언대로 출애굽이 이루어졌다.
에녹을 보라.
노아를 보라.
모세를 보라.
아브라함을 보라.
베드로의 생애를 보는 예수님을 보라.
사도 바울을 보라.
히브리서 기자들의 믿음의 눈을 보라.
이제 나는 멀리 바라 보기로 했다.
하나님의 비전을 꿈꾸며 나아 가기로 했다.
내 당대에 성취하지 못해도 좋다.
오늘 하루, 이 시간, 이 순간 순간 믿음으로 나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하루 하루 믿음의 전진을 계속하는 것이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그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긴 밤을 세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
주 복음 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 길 다 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 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찌라도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 주시리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
주 복음 전하리
나의 시온성은 멀리 뵈는 곳이 아니다.
불과 20년 후면 갈 곳이다.
이제 세상 영광, 부귀, 출세, 젊음, 돈, 행복, 인정 받음, 사람의 추대... 이런 것 별로 의미 없다. 어디 ‘長(장)’ 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 우스운 일이다.
교회 부흥! 이미 왔는데 뭘 더 꿈 꿔!
내 소원은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일이다.
나는 이제 세상 영광, 부귀 영화를 다 버리고, 진실로 하늘의 길을 걷기로 다짐했다.
기꺼이 고난과 가난과 고통의 길을 걸으리라. 다 버리고 훌훌 털고 단촐하게 나의 길을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비바람이 앞 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 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험한 파도 앞 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모진 바람 앞 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고난의 길 이 길은 생명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그제 꿈에서 내가 어디 멀리 여행을 갔는데, 이제 집에 돌아오려고 짐을 챙기니 옷들이 가득했다. 코트 등의 외투만 5-6벌이 되었다.
여행 중에 왜 그렇게 쓸데없이 거창한 것들을 가득 준비하는 것일까?
그것들을 챙기느라 바쁜데, 수 많은 아이들이 다들 줄을 지어 질서정연하게 돌아 가는데, 어른인 나 혼자 대열을 흐트러뜨리며 내 짐을 챙기니, 안내하는 선생 비슷한 사람이 나를 지적하여 불러 내어 내 뺨을 때리기에, 화가 나서 냅다 갈기면서, “너는 그런 자격이 있는 놈이 아니야!” 하는데, 이게 가만히 보니 갑질 중의 갑질이었다.
내가 대한항공의 조현아 같은 꼴이 된 것이었다.
문제는 ‘내가 왜 그렇게 쓸데없는 거창한 옷들을 챙기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세상의 군더더기들을 이제는 그만 챙겨야 한다.
내가 이제 챙길 것은 사람의 영혼 뿐이다.
영혼이여! 나의 영혼이여 이제는 눈을 뜨라.
나는 더 단촐해야 한다.
천국 가는 길에 그렇게 쓸데없는 많은 것들을 나를 위해 챙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 줄이고, 더 단촐해야 한다.
돈 씀씀이도, 소유물도, 사람관계도...
‘시’를 하나 지었다.
하늘에 구름처럼, 들판의 바람처럼...
나는 푸른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면 사라지고 없듯이,
그렇게 살고 싶다...
나는 인적없는 들판에
바람이 스쳐가고 가면 아무 흔적이 없듯이,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가고 싶다...
모든 인생은 결국
그렇게 사라진다.
무엇을 남기려 들지 말라.
큰 업적을 남기려 들지 말라.
그것도 주님 앞에 교만이요 죄악이다...
네 주제에...
이제 더 이상
“더-, 더-, 더- ...” 하지 말자.
허세와 세상사랑과 돈을 버리자.
진실로
청빈과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아보자.
“더-, 더-, 더- ...”라는 세상적 욕망을 버리고,
진실로 성령안에서
‘청빈과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기를...
나는 이제 늙어간다.
더 이상의 다른 가능성을 바라보지 말자.
나의 달려 갈 길만 잘 달릴 수 있어도
하나님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이다.
사실 나는
그런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지 아니한가?
여기까지 나를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
감사하나이다.
내가 무엇을 더 바라리요?
올 한해!
선물로 주신 이 나날들을
목사인 내가 그렇게 살고,
성도들이 그렇게 살기 바라는 표어를 다시 되뇌어본다.
<새성교회 성도 10 訓>
1.우리는 영적인 좁은 길로 갑니다.
2.우리는 오직 예수님과 함께 삽니다.
3.우리는 예배, 기도, 헌금, 전도에 교회의 우선 목표를 둡니다.
4.우리는 언제나 성령으로 행합니다.
5.우리는 선교에 힘을 다합니다.
6.우리는 이 땅에 보물을 쌓지 않습니다.
7.우리는 내 남은 날을 계산하며 삽니다.
8.우리는 기도, 말씀, 찬양, 은혜, 성령, 믿음으로 삽니다.
9.우리는 온전히 자기를 부인합니다.
10.우리는 청빈과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삽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주님! 제가 그렇게 살다가 가게 해 주세요...
배목사야!
인생은 그냥 하루 하루 사는 것이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채워 주고,
밥 먹고...
자고...
아프고,
울고,
기뻐하고...
그리고
늙고,
죽는 것이다.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네가 잘났다고 여기지 않을 만큼 분별할 수 있도록
이제는 나이도 들지 않았느냐?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별로 없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
너는 별로 뛰어나지도 않고...
특별히 못난 것도 아니다.
사람이 자기가 잘나고 못나서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
넌 네 그릇 만큼
네 길을 하나님 앞에서 경주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여...
그러나 욕심을 부리지 말아라.
무리하지 말아라.
돈을 좇아 가지 말아라.
사람도 좇아 가지 말아라.
이제는 네 나이가 누구를 좇아 갈 나이가 아니니라.
그냥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여 살아라.
오늘도 사랑하는 동역자 친구 목사는
온 몸에 암이 퍼진 채로
인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순간 순간 힘들어 하며,
그러면서 죽어 간다.
아아!
그 괴로움의 시간들이
너무 너무 지겹단다...
뼈만 남은
새카맣게 타버린 얼굴,
퀭한 눈동자,
겨우 겨우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말들,
이렇게 찾아 와 주는 것이 고맙단다...
아아! 그 마지막 고통의 시간들이
그 소중하고 또 소중한 시간들이
어떻게 지겨울 수가 있을까?
내가 그 시간들에 처한다면 너무 너무 바쁠 것 같은데...
정리할 일,
만나야 할 사람,
가장 중요한 것,
주님 앞에 일생의 기도를 드리는 일 등등...
아마‘너무 힘들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했으리라.
‘어차피 버리고 갈 세상 길,
너무 의미 없다.’는 말이리라.
사랑하는 친구 목사는
이제 자기의 갈 길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다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남을 네 눈의 기준으로
이렇게 저렇게 재고,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도
죄악이요, 교만이다.
이제 너도
곧 그런 시간이 온다...
천년, 만년 이 땅에서 살 것처럼 호들갑 떨지 말아라.
보라.
다 가 버리지 않느냐?
네 불쌍한 아버지도,
네 가련한 어머니도,
그렇게 믿음으로, 믿음으로 살다 간 장인 어른도...
아아! 새삼 그러고 보니
나는 부모님의 기도로
이 은혜 중에 살고 있구나!
그럼 너는
오늘 죽어도 좋겠느냐?
아닙니다. 오늘은 아닙니다.
내일은?
아아! 주님. 너무 너무 죄송합니다.
내일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그럼 언제?
빨리 준비할게요.
한 20년만 더 시간을 주세요.
그러면 뭔가를 주님 위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하루 하루 열심히
무엇인가를 이루며 살게요...
세상 버리고,
나를 버리고,
사람 버리고,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 집착하는 사람들 다 버리고...
돈 버리고,
오직 금식(禁食)하며 골방에서 살게요.
세상에 나가서 설치지 않을게요.
남 앞에 서서 잘난 척 하지 않을게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살게요.
내 남은 짧은 세월
오직 주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게요.
너무 많이 먹어
돼지가 되지 않을 게요.
호리호리한 몸을 가지고
날렵하게 살게요.
주님 앞에 둔감하지 않고, 민감하도록...
영적으로 보다 더 예민하도록...
성령 하나님이 나타나시기 가장 좋은 사람으로
그렇게 살도록...
정욕을 버리라.
욕심을 버려라.
목회 성공을 버리라.
인기와 잘남을 버리라.
칼로 자르듯 잘라버리라.
다 지나가는 것이며,
부질없는 일들이다...
이 한 마디 기억하라.
“다 지나 감이니라.”
지난 금식하던 41일 동안 잘 버리더니,
죽을 먹기 시작하는 단 하루 만에
도로 다 챙기누나!
이게 네 본래 모습이다...
아아!
슬프다.
부질 없다.
보람 없다.
가치 없다.
도로묵이다...
정욕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죄악의 생각을 버리고,
세상을 버리고,
나의 계획도 버리자...
주님!
“욕심을 버립니다.”
잠언 30:8-9절의 말씀은 저의 평생의 기도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2015.1.18일
주님! 오늘 다시 마음을 비웁니다.
아프던 가슴이 이제 다 정리하고 나니,
평안해졌습니다.
불쌍한 우리 모두에게 평강을 주옵소서.
우리의 연약함과 허물과 부족함과 죄악이 있을지라도,
<성령의군대>의 대행진이 그침이 없게 하옵소서.
저의 부족함을 회개합니다.
다시 마음을 비웁니다.
아무 것도 없던 그 원위치로 되돌아갑니다.
원래 저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평생을 살다가,
가게 해 주옵소서.
2018.9.8.아침
이00 목사의 설교 중에 깨달은 영감:
성경 인물이나 역사적 인물 중에, 신앙 선조들의 기도는 공통점이 있다.
1.죽음과 고난의 현장에서 오로지 기도했다는 사실이다.
2.하나님의 축복의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3.사명을 위해 기도하고, 사명 때문에 기도했다는 사실이다.
4.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명을, 그 기도를 하나 같이 위대하게 들어 쓰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비전을 들어 쓰신다” 는 말을 이제 나는 내 생에서 현실로 체험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들어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도’를 들어 쓰신다.
5.그들은 사명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죽음도 기꺼이 감수했다는 사실이다.
6.개인의 부귀영화와 유익은 영적으로 볼 때에, 아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적인 형통함과 축복은 천국의 영광에 비교하면 반딧불과도 같은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을 위하여 살 것인가?
곧 떠나 가는데...
이제 나의 삶은 진실로 천국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이 자기 몸의 가시를 ‘사단의 사자’ 라고 표현할 때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렇게 말했을까?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유익과 안일을 위해서는 더 이상 간구하지 않았다. 나 배종부 목사의 30년 담낭염은 같은 가시가 아닌가?
주의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고난과 고통은 가장 큰 축복이요, 성화의 도구이다.
형통함을 기뻐하지 말라. 고난과 고통을 기뻐하라.
감사하라. 고난과 고통 그 자체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이요,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고 고난이 가중되어야 진실로 영혼이 깨끗해지고, 그것이 진정한 축복임을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어찌 깨달을 수 있으리!
그러나 너의 부족함과 허물과 죄 때문에 고난 고통 당하지 말고, 진실로 주님 때문에 고난, 고통을 당하라.
하나님이 반드시 이00 목사에게 목양교회 빌딩 전체를 선물로 주신다.
110만원 월세는 다른 돈이 아니라, 건축헌금이다.
이번 부흥성회는 이 건축헌금 한 달 분을 드리는 것이다.
000만 사례+건축헌금 110만이다. 그 중에 40만원은 이00 목사 부부가 드린 것이다. 할렐루야!
이00 목사에게 부흥성회들을 연결해 주라.
그는 진실하고, 말씀의 은혜가 깊다.
구리 은혜로교회 김00 목사 초청 성령부흥성회
“8번의 40일 금식기도의 종,
이런 숨은 성령과 능력과 신유와 은사의 종을 만나 본 적이 없다.”
산본 한마음교회 홍00 목사 초청 말씀사경회
“나는 오늘까지 이보다 더 친근하고, 설교 잘 하는 종을 만나 본 적이 없다.”
서울 생명교회 김00 목사 초청 은혜부흥성회
“내 생애에 이 만큼 진실하고, 하나님의 예언의 능이 있는 종을 만나 본 적이 없다.”
5월 이후에 부흥강사는 또 기도하여 고르리라.
강사님들이 새성교회 부흥성회 오시면, 담임목사는 드릴 사례를 벌기 위하여 부흥회 나가고 없다. 오셔서 내 교회처럼 부흥회 하고, 설교하고, 온 교인들 마음껏 안수하고 축복하시고, 그리고 대접 받고 가시는 것이다.
얼마나 좋으냐?
주님 안에서 교제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133:1)형제(兄弟)가 연합(聯合)하여 동거(同居)함이 어찌 그리 선(善)하고 아름다운고? (2)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鬚髥) 곧 아론의 수염(鬚髥)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3)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山)들에 내림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福)을 명(命)하셨니 곧 영생(永生)이로다.
며느리가 이00 목사님의 진실함이 너무 좋다고 한다. 설교가 그렇게 은혜가 된다고 한다. 이00 목사님의 부흥성회 설교들을 들으면서, 나의 수년 간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이목사님에게 흘러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일째 성회! 이목사님이 성령 충만하여 설교를 정말 잘 한다. 요셉의 보디발 아내 유혹 장면은 정말 재미있다.
이00 목사님은 ‘진실한 목사, 한결 같은 사람’ 이라는 표어가 탁 떠오른다.
2015년 12회 새성교회 외부강사 초청 부흥성회는 바로 나의 부흥성회와 같다. 연간 60회 부흥성회 중 12회는 이미 실시하고 들어 가는 것이다.
가까운 교회 목사들을 초청하라.
두려워 하지 말고, 마음껏 실시해라.
룻은 스스로 좁은 길로 걸어 가, 마침내 시온의 대로를 개척했다.
한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단지 동네 아줌마들이었다.
이들 동네 아줌마들이 역사의 주인공들이 된 것이다.
기적의 주인공들이 된 것이다.
나오미-불행의 산들을 넘어서...
룻기1:1-21절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 가서 거기 살더니,
3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 쯤에,
5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6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 오려 하여,
7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 오려고 길을 가다가,
8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 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 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 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 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 가라 하니,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 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9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 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 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부자와 큰 가마솥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보릿고개가 있었다. 지난 가을에 마련한 쌀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거둘 때가 되지 않은 봄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초근목피로 겨우 겨우 생존을 이어 갔다. 한 해 흉년이 들면, 그 어려움은 배가 되고, 몇 해 동안 흉년이 계속되면 살아 남는 사람이 아주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때에 양반 지주들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자기 가족들은 풍족하게 먹으면서 창고를 더욱 철저하게 지키고 절대로 쌀을 밖으로 내지 않는 졸부요,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먹거리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대문 밖에다 큰 가마솥을 걸고서 매일 죽을 쑤어서 마을 사람들을 구제하는 지사 형의 부자이다.
만일 당신이 이런 어려운 때를 만난다면 어떤 태도를 취하겠는가?
지금 우리 교회들은 너무 어렵고 힘들다. 이러한 때에 당신은 교회와 목사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룻기에 대하여 설명하라.
룻기에는 소수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일상생활을 배경으로 하여 서로 아끼며 사랑하는 내용들을 진솔하게 묘사하고 있다.
기록 연대는 BC 11세기 말이며, 저자는 사무엘로 본다. 다윗 왕조의 계보를 보여 주며, 기업 무를 자 제도를 통하여 장차 인간의 죄 값을 치를 메시야의 등장을 예표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시며, 진정한 사랑은 역경 속에서 꽃 피는 것을 보여 준다. 룻의 희생적 사랑과 나오미의 이타적 행위 및 보아스의 기업 무르는 행동은 하나님의 통치 원리가 무한한 사랑이며, 또한 사랑을 실천하는 자에게 축복이 뒤따름을 보여 준다.
본서의 무대가 되는 지명은 모압으로 사해와 아라비아 사막에 둘러 싸인 험준한 고원지대이다. 또한 베들레헴은 나오미의 고향으로 장차 예수님이 탄생하실 곳이다.
룻1:1절의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 즉 사사시대는 대략 몇 년 가량인가?
BC 1390년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사울이 왕으로 즉위하던 때까지의 356년 정도 계속된 정치적, 영적, 도덕적 혼란기와 암흑기를 사사시대라 한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은 외적의 침입과 내부적 우상 숭배, 도덕적 타락으로 심히 혼란하고 고통스러웠었다.
룻1장에 나타나는 과부가 된 3 여인의 비참한 처지와 그들의 구원과 축복으로 가는 회복 과정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비극과 아픔을 당한 한 가정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회복과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한 성경이 룻기이다.
오르바는 선한 여인이었으나, 일반 여인이 택하기 쉬운 평탄한 길로 걸어 갔다.
나오미는 경건한 신앙인이었으나, 생에 닥친 너무나 극심한 고생과 슬픔, 어려움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부정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부 룻을 만남으로, 그녀의 노년이 더할 수 없는 축복의 자리로 나아 가게 된다. 좋은 사람과 환경을 만나는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아야 하며, 늘 기도해야 한다. 남편을 잘 만난 여인은 일생 행복하며, 목사를 잘 만난 성도는 영육의 지복을 누리며 산다. 장로를 잘 만난 목사는 목회의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룻은 역경과 고통 속에서도 내면의 영적 질서와 자기 신분과 위치를 잃지 않은 탁월한 여인이다. 인생에게 고귀한 것은 그저 주어지는 법이 없다. 받을 만한 자가 받아 누리는 것이다. 부를 누리는 자는 그 만한 자격이 있고, 지위와 권세를 누리는 자는 그 만한 그릇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과 사람을 부정적인 눈, 질시의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내면을 갈고 닦아 성숙한 인격, 안전하고 평탄한 삶, 내일을 기약하는 삶을 설계하며 살아야 한다.
룻1:22절의 “모압 여인 룻”이란 표현은 “이스라엘이 멸시하는 이방 여인”, “아버지 롯과 불륜 관계로 시작된 민족의 비천한 여인”이란 뜻이다. 그러나 룻은 이 모든 한계와 역경을 뛰어 넘어, 자신의 운명을 바꾼 여인이다. 하나님의 은총과 인도하심, 축복은 누릴 만한 자세가 되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고향을 떠나는 가정(룻1:1-2절)
이 가정의 가장은 엘리멜렉이었다. 그 아내는 나오미, 큰 아들은 말론, 작은 아들은 기룐이었다. 베들레헴 떡집에 살던 이들은 흉년을 맞아 도저히 살지 못하게 되자, 이주를 결정하게 되었다. 이주를 결정한 사람은 엘리멜렉이었다.
‘떡집’ 에 살면서 왜 굶주리게 될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 양식이 있는 교회와 하나님의 품 안에 살면서도 영혼이 무기력하고, 힘이 없으며, 육신적 삶도 굶주리고 가난하게 살까?
그리고 종국에는 왜 거기서 기근을 느끼고 떠나게 될까?
이유는 분명히 나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믿음생활을 바로 하지 못하고, 축복을 창조하도록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나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다.
고향을 떠나는 엘리멜렉의 표면적인 동기는 흉년을 피하여 살아 남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 숨겨진 이기적인 동기는 굶주려 죽어 가는 이웃을 외면하고, 다분히 자기 자신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악한 의도가 엿보인다.
나만 살겠다는 생각들
사람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나만 살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중에는 함께 고난의 쓴 잔을 마시며, 끝까지 동역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엘리멜렉이 고향 유다 베들레헴을 떠난 표면적인 이유는 흉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사실상 부자 가정이었다. 엘리멜렉은 흉년으로 굶어 죽게 되어 고향 땅을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니었다. 부자가 미리 머리를 써서 흉년이 들어 살기 어려운 고향 땅을 버리고, 예방 조치로 풍요로운 땅으로 모든 가산을 정리하여 일찌감치 풍부하게 계속 누리며 살려고 도피한 것이었다.
룻기1:21절에 보면,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 오게 하셨느니라.” 했다.
엘리멜렉은 미리 계산을 다 하고, 굶주려 죽어 가는 이웃들을 내버려 두고, 풍족한 양식을 가지고, 혼자 살기 위하여, 재산을 다 정리하여, 먼 이국 땅으로 미리 이민을 가 버린 것이었다.
이는 일종의 부자의 도피 행각이요, 부동산 투기와 같은 것이다. 자기 가족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극도의 이기심을 드러낸 행위이다. 고향 땅에서 굶주려 죽어 가는 사람들 눈치 때문에 아예 멀리 도피해 버린 것이다. 여기에는 크리스챤의 이타적인 삶이 전혀 없다.
한 때 한국에 전쟁이 난다고 하니까 부자들이 너도, 나도 미국으로, 캐나다로 앞 다투어 이민을 떠난 적이 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아픔은 부동산 투기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망가져 가는 일이다. 부동산 투기는 서민들을 죽이는 일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축복하실 수 없다.
엘리멜렉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며, 약삭 빠르게,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불신자처럼, 악하게 처신했다. 하나님이 이 사실을 밉게 보셨다.
부자로 가서 잘 살겠다던 모압 땅 이민생활은 이내 다가 온 그의 죽음으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하나님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그를 일거에 죽여 버리신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 내일과 운명을 모른 채 오늘 육신적인 삶에 모든 것을 걸고 발버둥을 친다.
이라크의 우화이다. 어떤 사람이 시장에 갔더니, 한 예언자가 당신은 오늘 칼에 찔려 죽을 운명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는 급히 집으로 돌아 와 모든 돈을 더 털어 천리마를 한 필 사서 죽음을 피하여 하루 종일 말을 달려 천리 밖의 바그다드로 도망을 갔다. 그는 그 곳에서 한 괴한의 칼에 찔려 타관 땅에서 비명 횡사하고 말았다.
내일을 모른다. 내 생명의 끝을 모른다. 나의 장래사를 모른다. 나의 훗날 빈부귀천을 모른다.
축복의 땅에 다소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나 혼자 잘 살겠다고 도망 간 엘리멜렉의 뒤를 하나님의 저주가 뒤따라 간 것이다.
뒤를 이어 나오미 가정에 밀어닥친 연속적인 불행은 기가 찰 정도이다. 하나님이 엘리멜렉과 그의 아들들의 삶과 그들의 행동과 처신, 가정 자체를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단적인 증거가 나타난다. 이들 가족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아야 할 만한 뭔가 잘못된 죄와 악이 숨겨져 있었다.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고난과 고통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이다. 하나님은 아예 이 가정을 대를 끊어 버리려고 작정을 하셨다.
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의 예정인가?
하나님이 죽이려고 작정하시는데, 누가 피하겠는가?
예수 잘 믿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살 일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무서움을 알 일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며 살 일이다.
이방 땅에서 겹치는 불행(룻1:3-5절)
이 가정에 처음으로 닥쳐 온 불행은 모압 땅으로 이주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일어난 가정의 기둥인 가장 엘리멜렉의 죽음이었다.(룻1:3절)
이 가정에 연이어 찾아 온 두 번째 불행은 모압 땅 이민생활 10여 년에 찾아 온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의 죽음이었다.((룻1:5절)
졸지에 나오미의 가정은 홀로 된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이방여인 오르바와 룻, 세 청상 과부 만이 남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산은 다 탕진되고,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희망의 빛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이 가정은 끝나버리고, 대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
옛날 중국의 한 변방에 노인이 살고 있었다. 이 노인에게는 말이 한 필 있었는데, 어느 날 고비가 풀려서 말이 도망을 가고 말았다. 사람들이 찾아 와 “전 재산인 말을 잃어 버렸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위로했다. 노인은 태연하게 괜찮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망간 말이 두 필의 말을 데리고 돌아 왔다. 사람들이 또 찾아 와 “웬 횡재냐고? 부자가 되었다.”고 축하했다. 노인은 내일 일은 모른다면서 담담했다.
며칠 후, 노인의 외동아들이 새로 들어 온 말을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영영 불구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다시 찾아 와 위로했다.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노인은 역시 태연자약하게 “앞 일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훗날 전쟁이 일어 났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다 전쟁에 끌려 나가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불구라는 이유로 전쟁에 끌려 나가지 않았으며 생명을 부지했고,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얻어 결혼하고 아들, 딸 잘 낳고, 백년해로 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무엇을 가르치는가?
화가 복이 되고, 복이 화가 되는 인생사를 말씀한다. 성공이 실패가 되고, 실패가 성공이 되는 인간의 삶이 인간만사 새옹지마이다.
현재 어렵고 절망스러워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하며, 현재 형통하고 잘 된다고 해도 결코 교만하지 말 일이다. 지금 잘 되어도 내일에는 어떤 패망과 멸망이 닥쳐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불행에 대한 신앙적인 해석과 대처
신앙인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패망을 신앙적으로 잘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1.돌이키는 인생:닥친 불행을 통해 잘못 살아 온 자신의 지난 날의 죄악의 삶을 깨닫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 오랜 시간 깊은 회개와 통곡과 눈물로 삶을 돌이켜 바로 잡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울며 후회한다고 회개가 아니고, 진정으로 삶을 돌이켜 바로 잡는 결단이 있어야 회개이다.
2.인생관의 정립: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한,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그릇된 태도와 불신 악습을 고쳐야 한다. 이제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겠다는 은혜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3.영적인 사람:지난 날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신없이 방종하게 살고, 세속적으로 살고, 준비 없이 살았던 삶의 태도를 버리고, 바로 잡아야 한다.
4.사명자의 길: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 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하여 내 일생을 바치리라 결단하는 사명자의 충성과 헌신의 은혜를 덧입어야 한다.
나오미가 바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간다. 나오미는 자신의 가정이 당한 비극과 고통을 은혜로 잘 해석한다.
1.나를 나오미(희락)라 칭하지 말고, 마라(괴로움)라 칭하라.
정말 그랬다. 그녀의 지나 온 반생은 불행, 불행의 연속이었다. 나오미 스스로가 불행한 인생임을 자타에 인정하고, 회개하는 한없이 낮아지는 태도를 취한다.
2.“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 오게 하셨느니라.“(룻1:21절) 나오미는 풍요로운 부잣집 안주인의 자리에서 완전히 거지가 되고 말았다.
단순히 재물의 사라짐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과 대를 이을 두 아들의 상실을 통하여 나오미는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 온 지난 10년의 반생을 가족을 대신하여 눈물로 회개하고 반성하며 돌이키고 있는 것이다.
3.나오미는 새로운 인생을 결단한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떠난 이 불행의 삶을 청산하고, 벗어 나기 위하여 불행의 근원지인 모압 땅을 떠나 고향 땅으로 돌아 가려 한다.
사실 과거 고향 땅에서는 부자로, 하나님의 은혜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 풍요로운 떡집을 떠나 온 이후에, 그녀의 10년 반생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으니, 그 애환이 오죽 하겠는가?
축복의 고향 땅을 떠나 온 것은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의지였으나, 이제 고향 땅으로 돌아 가는 것은 나오미의 의지였다. 나오미는 다시 축복의 땅을 찾아 돌아 가기로 결단한 것이다.
시련과 연단, 고난의 생애를 겪은 후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영적 해석은 하나님의 품으로, 축복의 지경 안으로 다시 돌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근본적으로 삶을 돌이키는 선회가 있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나오미가 굳이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 가고자 한 이유는 흉년이 끝났기 때문이었다.(룻1:6절) 그러나 그녀의 영적 심성 속에는 이방 땅 모압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린 것을 마음으로나마 회개하고, 되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이 이방 땅에서는 의지할 곳도, 희망도, 하나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치 기생 라합이 자기 동족, 문화, 사회 속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듯이, 나오미는 이제 본래 자기가 나온 고향, 축복의 베들레헴, 떡집으로 돌아 가려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게 되는 인생살이
제 사모는 저와 결혼하여 지나 온 20 년 이상의 세월을 고생 속에 살아 온 것에 대하여 회한이 많은 모양이다.
“내가 이렇게 살 줄을 몰랐다. 이렇게 목회자 남편을 만나 고생할 줄 알았으면, 절대 시집 오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 당시 나는 정말 세상 천지를 모르는 어리석은 바보였다.” 라고 말한다.
제가 달랜다.
“겨우 젊은 날 20 몇 년을 살고서 인생을 다 평가하지 말아! 아직도 남은 세월이 많아!”
난들 이렇게 살 줄 누가 알았는가?
이것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요 대답이다.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내가 이렇게 살 줄 몰랐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고백이다.
예전에 어쩌면 나오미는 고향 땅을 떠나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절대적 가부장 문화권 속에 사는 힘 없는 아내로서는 남편을 만류할 수 없었다.
원래 못나고 이기적인 사람일수록 아내를 짓밟고, 무시하고, 더욱 더 쓸데없는 권위를 내세우기 마련이다. 큰소리치는 사람은 그래서 깡통이다. 사람이 은근히 실속이 있어야 한다.
약속의 땅 베들레헴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이방 땅으로 이주를 결행한 엘리멜렉의 그릇된 삶과 그의 죄악이 쌓여 본인도 죽고, 두 아들도 죽었다. 이제 나오미는 비로소 자기의 가정을 신앙적으로, 자기의 입장에서 자기의 의지대로 이끌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나오미는 사실 남편에게 순종하여,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남편의 뜻을 따라 최선을 다해 남편이 선택한 이방 땅에서 살아 보려 했다. 남편이 죽은 이방 땅에서 모압여인들을 아내로 얻어, 두 아들을 출가시켰었다. 남편의 원대로 그 곳에 정착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결국 두 아들마저도 죽고 나자, 하나님의 뜻은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제 나오미의 가정은 처참한 청상 과부 3사람 만 남은 절대 절망의 가정이 되고 만 것이었다.
여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처음이 잘못되면 과정은 물론이요, 결과까지 깡그리 잘못된다. 처음이 불신앙과 하나님 없는 삶으로 출발하면 나머지 과정과 결과는 뻔한 실패요 파멸이다. 신앙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 삶의 과정, 신앙생활의 모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면, 축복과 하나님의 도우심은 없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
목회를 오래 한 목사님들이 목회는 힘든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나는 체험적으로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목사가 열심히 노력하면 교회는 저절로 부흥되는 줄 알았다. 사람들이 항상 내 마음대로 움직여 줄 줄 알았다.
지금은 “목회란 정말 어려운 것이구나!” 인정한다.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로구나!” 깨닫는다. “교회 부흥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정한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목회해야지, 사람을 믿고 사람을 의지하고 목회하면 안된다는 사실도 이제야 분명히 안다.
사람이 인생의 시련과 연단, 고난 속에서 배우는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나오미는 지나 온 실패의 10년 인생 길을 기도 중에 곰곰이 뒤돌아 본다. 이 모든 일들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주도면밀하게 해석을 해 본다. 결론이 나왔다.
1.자신과 자신의 가정은 하나님을 떠났던 것이었다.
2.자기의 가정은 동족을 돌보지 않은 이기적인 죄악의 가정이었다.
3.자기의 가족들은 작은 어려움을 신앙적으로 잘 감당하고 인내하지 못했었다.
4.그리하여 자기의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의 그늘을 떠났던 것이었다.
5.그러면, 이제라도 약속의 땅, 선민의 땅, 축복의 땅을 찾아 돌아 가야만 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이제 잃어 버린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모든 것을 상실하고 잃어버린 상태이지만, 오직 실낱 같은 신앙의 끈 하나에 희망을 걸고 고향으로 돌아 오는 것이다.
불행은 자기 탓으로 돌리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나오미
나오미는 자기와 자기 가정의 불행을 전적으로 자기 탓으로 돌린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룻1:13절) 라고 말한다.
자기의 죄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치셨다고 말한다. 남 탓하지 않는다. 죽어 버린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 자기의 탓으로, 자기의 허물로, 자기의 죄로 돌린다.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는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은혜를 유지하는 유일한 비결은 자기 탓으로, 자기 부족함으로, 자기 죄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 책임을 스스로 지는 의미에서 나오미는 자기의 “희락” 이란 의미의 “나오미”란 이름을 “괴로움”이란 의미의 “마라”로 바꾼다.
룻2:20절의 “기업 무를 자”란 누구이며,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어떤 제도인가?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보장제도로써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부당한 피해를 당했을 경우에 보상해 주는 제도 중의 하나이다.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가난이나 삶의 어려움으로 기업이 다른 사람에게 팔렸을 경우,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대신 구입하여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경우인데, 특별한 경우 죽은 자의 부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 주는 일까지 담당하는 것을 말한다. 상속권이 가까운 친족부터 우선권이 있는 법을 확대한 것으로, 구약의 좋은 사회보장제도 중의 하나였다.
“기업 무를 자”란 “회복시켜 주는 자, 구속자”란 뜻으로, 가난한 친족의 토지나 집을 매수하여 속량해 줄 권리와 의무를 지닌 자를 말한다.
룻3:9절의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란 의미는?
일평생의 보호를 원하여 남성에게 구혼하는 행위를 완곡하게 표현한 문학적 어법이다. 시모 나오미는 룻에게서 보아스의 사람 됨됨이를 듣고 그가 자기 며느리를 아내로 삼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여 룻을 강권하여 보아스에게 보냈고, 룻은 보아스를 신뢰함으로 그에게 일생을 맡길 결심을 하고 그의 잠자리를 찾아 간 것이다. 룻이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며, 의복을 입은 것”은 신부와 같이 단장하는 모습을 말한다.
이는 특수한 경우로 이것을 혼전 성관계의 근거로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보아스는 진실하고, 경건하며, 신중하고, 노련한 사람으로 결혼 전에 룻을 취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새벽 어두울 때에 돌려 보내는 性的(성적) 인내와 지혜를 발휘했다. 사람의 한 가지 모습이 곧 그의 인격과 삶을 통전적으로 보여주는 법이다.
룻4:7절의 “신을 벗어 준다”는 의미는?
“기업 무를 권리”, 곧 땅을 살 수 있는 권리를 양도한다는 표시이다. 비슷한 일례로 “수형제도”를 거부하는 시동생에게 형수는 그 신발을 강제로 벗겼다. 이는 시동생이 형의 가문을 잇기를 거부함으로 가문의 대가 끊어지게 했다는 모욕을 주는 의미이다.
“기업을 무름”은 우리를 죄악에서 속량하신 예수님의 대속을 상징하고 있다.
룻3:1절-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축복하고, 개가하기를 원한다.
나오미는 얼마나 신앙적으로 성숙하고, 남을 축복하는 귀한 여인인지 모른다. 이 모든 고귀한 영적 성숙함은 자신이 몸소 겪은 삶의 애환과 고난 속에서 훈련된 것이었다.
몇 년 전에 자동차 뒷 유리창에 자주 보이는 문구가 있었다.
“내 탓이요.”
카톨릭에서 전개한 아름다운 운동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스티커를 부친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내 탓” 이면 운전자가 보는 앞 유리창에 부쳐야지, 왜 뒷 자동차에 탄 사람들이 보는 뒷 유리창에 부치는가 말이다. 그러면 남 탓이란 말이 아닌가?
남을 축복하고,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 주는 사랑의 영성이란 정말 고귀한 인격의 높은 신앙 모습이다.
영세교회 김종수 목사님은 일생 동안 “사랑의 천국방언”을 가르쳤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잘-했습니다. 믿겠습니다.
얘야! 괜찮다. 다 모르고 그랬는 걸 뭐!
얘야! 괜찮다. 너 나와 같이 살자.
얘야! 괜찮다. 내가 썩어야지! 내가 썩어야지! 내가 썩어야지!
얘야! 걱정 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만 봐라.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얘야! 잘 믿어야 한다.
얘야! 잘 살아야 한다.
얘야! 잘 죽어야 한다.
얘야! 영원히 천국에서 더 잘 살아야 한다.”
나오미는 어느 누구보다 인생의 아픔과 고난을 많이 겪은 여인이었으나, 남 탓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잘못으로 인정하며, 남을 축복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사는 여인이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모두 이런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한다.
다윗 임금의 증조부를 두 팔에 안고서...(룻4:13-17절)
나오미의 귀환은 너무 늦은 듯 보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너무 늦지 않았다. 누구든지 하나님로 돌아 오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란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 가야 할 마지막 시간이다.
모든 삶이 다 망가지고, 모든 재산을 다 잃어 버리고, 모든 가족을 다 죽게 만들고, 죄 없으나 깊이 회개하는 죄인이 되어 돌아 온 나오미!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 앞에 진정 아름다운 신앙으로 바로 서고, 모든 이들을 축복하며 살았다.
사람이 극한 고통을 겪으면, 두 종류로 바뀐다. 마음이 완악해져서 모든 대상과 사람들에 대하여 반항적, 공격적, 부정적, 비관적이 되어 버리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오히려 더욱 더 성숙하고 선해져서 남의 고통을 알고, 남을 위해 살아 가려는 사람이 있다.
나오미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올바른 깨달음을 채득한 여인이다. 깨달음의 은혜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룻1:8-9절-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 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축복하고, 친정으로 돌려 보낸다.
시어미 나오미의 말을 듣고, 큰 며느리 오르바는 울며 친정으로 돌아 간다. 그러나 작은 며느리 룻은 끝까지 시어미를 버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따르며 효도하고 정성을 다 했더니, 하나님이 상상할 수 없는 복을 주셨다.
저는 이번 주간에 두 글을 읽고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나는 인터넷에서 본 “우동 한 그릇”이란 글이요 다른 하나는 지금 인용하고자 하는 글이다.
어느 할아버지가 돌이 채 안된 아기를 키우고 있었다. 이들이 죽자, 어린 젖먹이를 내버리고 어미가 도망을 가 버린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 돌아 다니며 아기에게 젖을 얻어 먹이다가, 굶기다가 했다.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해서 술이 취하면 정신없이 아무데서나 잠을 자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면 아기는 마냥 방치되어 굶고 있는 것이다.
한번은 할아버지가 이웃 아주머니에게 우리 아기가 멀리 외국으로 입양을 가게 되었다며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할아버지도, 아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2일인가 지났을 때, 한번은 지나 가는 사람의 귀에 희미하게 우는 아기의 소리가 들려 왔다. 열흘 쯤 지났을 때 아버지의 소식이 궁금하다며 딸이 찾아 와 보니, 할아버지는 오래 전에 숨져 있었고, 아기는 그 옆에서 굶어 죽어 있었다.
아기가 죽으면서 얼마나 손톱으로 긁었는지 손끝이 다 닳아, 피가 맺혀 있었다.
아아!
이 아기의 엄마가 아기를 버리지 않았다면, 아기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저렇게 비참하게 아기를 죽도록 내버리고 간 그 엄마가 과연 복을 받고 잘 살인가?
만일 룻이 동서 오르바처럼 의지할 데 없는 시어미를 버리고 갔더라면, 그렇게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
룻2:20절-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도다.“
나오미는 또한 보아스를 축복한다.
그녀는 일생 동안 남을 축복하며 사는 여인이었다.
생각해 보라.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를 저주하면, 내가 잘 되겠는가? 반대로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를 축복하면, 내가 망하겠는가?
모든 이를 축복하며 사는 나오미를 하나님은 축복하셨다. 하나님은 그녀의 잃어 버린 모든 것을 다 회복해 주셨다. 나오미는 세상 최고의 성왕인 다윗 왕의 할아버지를 자식으로 품에 안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기생 라합의 남편이 살몬이다. 살몬의 아들이 보아스이다. 룻이 바로 이 보아스에게 시집을 가서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된 것이다. 나오미는 다윗왕의 외고조할머니인 것이다.
룻4:13-17절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이렇게 노래한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찌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는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1.가정 안에서나, 교회 안에서, 또는 직장이나 사업터에서 당신이 주도하지 않은 일이 잘못되었을 때 당신은 누구를 탓하는 사람인가?
2.당신은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삶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앙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운명과 팔자 만을 탓하며, 벗어 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냥 떠내려 가고 있는 인생인가?
3.화라고 생각했던 것이 복이 되고, 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화가 된 경험이 있는가?
그 시련과 연단과 절망 속에서라도 낙심하지 말라. 반대로 지금 잘못 살면서도 형통하다고 자만하지 말라. 인생은 연속적으로 굴러 가는 공과 같은 것이다.
내 인생이 지금 어떠한 국면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바로 살라. 기러면 기회가 올 것이다.
4.당신을 얼마나 다른 사람을 축복하며,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인가? 혹시 당신은 나의 미운 원수가 망하기를 바라는 악한 심성의 소유자가 아닌가?
5.당신은 혹시 영적인 축복의 고향을 떠난 자가 아닌가?
떠났다면 이제 돌아 올 시간이 되지 않았는가?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를 바로 가다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