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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 (33) 아부쓰보어서(보탑어서) 상
보아라!
우리 가슴속에 보탑은 찬연하다
민중만큼 존귀한 것은 없습니다.
민중만큼 현명한 것은 없습니다.
현대의 저류에는 ‘민중의 시대’로 향하는 확실한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을 수단화하고 인간성을 짓밟은 탁류 역시 격렬하게 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우뚝 솟은 인간’을 육성하는 일이 기로에 선 시대에서는 일체의 근간이 됩니다.
사회를 정화하고 인간존경의 사상을 창조하며 생명존엄의 가치를 확립하려면 ‘한 사람’을 육성하는 일이 21세기 종교의 최대 책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민중의 시대’를 여는 돌파구는 먼저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내적인 ‘보배’에 눈 뜨는 그 순간에 민중개가의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일체는 한 사람의 인간혁명에서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는 진실한 ‘나라의 보배’ ‘사회의 보배’는 도대체 무엇인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주1)만델라 전(前) 대통령은 27년 반에 이르는 옥중투쟁을 견딘 끝에 비도(非道)한 인종차별의 벽을 부수고, 민중승리의 새벽을 열었습니다. 그 만델라 전 대통령이 인생의 신념으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귀중한 재산은 어떤 순도 높은 다이아몬드보다 성실하고 강인한 민중이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성실하고 강인한 민중’이 탄생하면 사회는 틀림없이 선(善)한 방향으로 바뀝니다. 민중 한 사람 한사람이 바로 최고의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체의 기점이 되는 한 사람의 진실한 소생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자신’이 지닌 진실한 가능성을 알았을 때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혁명이 시작됩니다. 존극하고 위대한 자신의 가능성에 눈뜬 사람은 타인도 존귀한 존재임을 압니다.
자타가 서로의 존엄성을 진심으로 인정하면 인류는 경애를 높일 수 있습니다.
자타를 덮고 있는 (주2)무명을 걷어내면 인류는 상극과 갈등의 숙명을 전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존극한 ‘보탑’이라고 깨달은 한 사람이 일어서면 이 지구에 평화와 행복의 큰 탑을 일으켜 세울 수 입습니다.
그러기 위한 니치렌대성인불법입니다.
일체는 ‘자신’의 내적인 혁명으로 결정됩니다.
‘자신’의 본디 모습에 눈떠라. 이 불법의 극리를 가르친 어서가 <아부쓰보어서(보탑어서)>입니다. 니치렌대성인이 아부쓰보에게 가르쳐준 ‘위대한 자신의 깨달음’의 자취를 살펴보겠습니다.
(주1) 만델라 전(前) 대통령 : 1918~.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고, 27년 반 동안 옥중 투쟁을 거쳐1990년 석방되어 1994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노벨평화상 수상.
(주2) 무명(無明) : 생명의 근본적인 무지(無知). 궁극적인 진실을 밝힌 묘법을 믿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또 그 무지에서 일어나는 어두운 충동.
◇
<본문> (어서 1304쪽 처음부터~6행)
글월을 자세히 펴 보았소이다. 대저 보탑(寶塔)에의 공양물(供養物)인 엽전일관(葉錢一貫) · 백미(白米) · 여러 가지 물품(物品)을 보내 주시어 확실(確實)히 받았소이다. 이 취의(趣意)를 어본존(御本尊) · 법화경(法華經)에도 정중히 아뢰었으니 안심(安心)하시오.
글월에 가로되 다보여래(多寶如來) 및 용현(涌現)한 보탑(寶塔)은 무엇을 나타내시는 것이냐고 운운(云云).
이 법문(法門)은 매우 중요(重要)한 대사(大事)이니라.
보탑(寶塔)을 해석함에 있어서 천태대사(天台大師)가 문구(文句)의 팔(八)에 풀이 하실 때 증전기후(證前起後)의 이중(二重)의 보탑(寶塔)이 있는데 증전(證前)은 적문(迹門)이고 기후(起後)는 본문(本門)이니라. 혹은 또 폐탑(閉塔)은 적문이고 개탑(開塔)은 본문이며 이는 즉 경지(境智)의 이법(二法)이니라.
번잡해지므로 이만 줄이고, 결국 삼주(三周)의 성문(聲聞)이 법화경(法華經)에 와서 기심(己心)의 보탑(寶塔)을 본다고 하는 것이니라.
<현대어역>
편지를 자세히 잘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탑에 공양한 엽전 1관과 백미, 여러 가지 물품을 틀림없이 받았습니다. 이 진심 어린 뜻을 어본존, 법화경에도 정중히 보고 드렸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당신 편지에 “다보여래와 대지에서 용현한 보탑은 무엇을 나타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질문한 이 법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탑을 설명하자면 천태대사가 <법화문구> 제8권에 해석할 때, 보탑에는 증전, 기후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증전은 적문을 증명하는 것이며, 기후는 본문을 설해 일으키는 것이다. 또 폐탑은 적문이고 개탑은 본문이다. 이는 즉 경지의 이법을 나타낸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설명하자면 번잡해지므로 이만 줄이겠습니다. 보탑이 출현한 의미는 결국 삼주의 성문들이 법화경에 와서 자기 생명 속에 용현하는 보탑을 본다는 뜻입니다.
보탑 용현이 보이는 장대한 드라마
<아부쓰보어서>는 대성인이 사도유죄 때 집필했거나 미노부 입산 후에 저술하셨다고 말해왔으나, 최근에는 내용으로 보아 미노부 때 쓰신 어서라고 추측합니다.
이 어서 첫머리를 보면 엽전 1관과 백미 등, 진심 어린 공양물과 함께 아부쓰보가 대성인에게 불법의 법문을 질문한 편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질문은 “법화경에서 설한 다보여래와 보탑의 용현은 도대체 무엇을 나타내는가.”라는 내용입니다.
아부쓰보가 질문한 의미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법화경 견보탑품 제11에서 설한, 보탑이 용현하는 장면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보탑품은 사람들 눈앞에 보탑이 갑자기 출현하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거대한 보탑이 대지에서 용현해 공중으로 떠올라 머물며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큰 음성이 들립니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석가모니 세존은 능히 사람들을 위해 법화경을 설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습니다. 이와 같습니다. 그대가 설한 것은 모두 진실입니다.”(주3)
다보여래가 이 음성을 발했는데, 다보여래는 과거세 동방, 보정국의 부처이며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 보탑을 용현시켜 법화경의 진실을 증명하기로 맹세한 부처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보탑의 문이 닫혀 있어서 아무도 다보여래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견보탑품에는 그 뒤 시방세계의 분신제불이 모이는 (주4)삼변토전(三變土田)이 있고, 석존이 보탑의 문을 열어 석가와 다보, 두 부처가 나란히 앉는 전대미문의 일이 잇따라 일어나고 드디어 ‘허공회 의식’을 시작합니다.
그 장대한 의식도 모두 이 보탑의 용현에서 펼쳐집니다.
이 보탑의 규모 자체는 우리 상상을 초월합니다. 높이가 (주5)500유순(由旬)이고 가로와 세로가 각각 250유순이나 되는 거대한 보탑입니다. 작게 어림잡아도 지구 직경의 3분의 1에 이르는 규모입니다.
게다가 이 보탑은 금, 은, 유리, 차거, 마노, 진주, 매괴라는 칠보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거대한 탑이 눈앞에 떠 있다, 어찌 장엄하고 장려한 광경이 아니겠는가, 법화경에서 설하는 이 보탑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부쓰보는 대성인에게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다보여래가 대지에서 용현시킨 보탑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견보탑’, 기심의 보탑을 보다
이 보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전부터 여러 가지로 논했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은 단적으로 “보탑은 우리 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보탑은 어본존이다.
보탑 용현이 지닌 의미는 정말 크고 깊기 때문에 대성인은 “이 법문은 매우 중요한 대사이니라.”고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대성인은 먼저 천태대사의<법화문구> 해석을 근거로 보탑의 의의를 밝히십니다.
즉 이 보탑 용현에는 (주6)‘증전(證前)’과 ‘기후(起後)’라는 두 가지 의의가 있다, 혹은 (주7)‘폐탑(閉塔)’ ‘개탑(開塔)’의 의의가 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대성인은 “번잡해지므로 이만 줄이고”라며 그 이상 전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대성인은 견보탑품에서 보탑이 용현한 본질을 단적으로 “결국 삼주의 성문이 법화경에 와서 기심의 보탑을 본다고 하는 것 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8)‘삼주(三周)의 성문(聲聞)’은 법화경 적문에서 미래의 성불을 약속받은 석존의 제자들입니다. 대성인은 이 성문들이 법화경을 듣고, ‘기심의 보탑’을 보았다는 것이 보탑이 출현한 의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자신밖에 거대한 보탑이 출현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자신 안에 용현했다, 이렇게 깨달아서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동설(天動說)을 뒤집어 지동설(地動說)을 부르짖은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같은 일대 전환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천태대사의 <법화문구>에서는 보탑은 부처의 (주9)‘법신(法身)’이며 회좌에 있던 중생(사중)이 중 그 보탑은 보았다고 설하지만 아직 “기심의 보탑을 보았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견보탑’의 견(見)은 “나타나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기심에 보탑이 용현한다, 내 생명의 우주에 당당하고 찬란한 보탑이 일어선다, 그리고 그 탑을 “본다.”입니다.
요컨대 ‘견보탑’은 보탑이 기심 즉 자기 생명의 본디 모습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아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말법의 우리는 법화경을 듣고 어떤 보탑을 기심에서 보는가, 그 웅대한 가슴속 드라마가 드디어 시작됩니다.
(주3)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석가모니 세존은 능히 평등한 큰 지혜로 보살을 교화하는 법이요, 부처가 호념하는 묘법화경을 대중을 위하여 설하시니 이와 같으니라, 이와 같으니라. 석가모니 세존이 설하는 것은 모두 이는 진실이니라.” (법화경 373쪽)
(주4) 삼변토전(三變土田) : 보탑품에서 석존이 국토를 세 번 바꾸어 같은 하나의 정토(淨土)를 만든 일.
(주5) 유순(由旬) : 산스크리트(고대 인도의 문장어)의 요자나(Yojana)의 음역(音譯). 인도의 거리 단위. 1유순은 제왕이 하루 행군하는 거리로 대략 10킬로미터라고 한다.
(주6) ‘증전(證前)’은 “앞을 증명하다.”로, 보탑안에서 다보여래가 큰 음성으로 ‘석존의 말은 진실’이라고 증명한 일. ‘기후(起後)’는 “뒤를 일으키다.”로, 석존이 분신(分身)의 제불을 모이게 한 일은 본문 수량품을 설하기 위한 기점이라는 것.
(주7) ‘폐탑’은 다보탑이 닫혀 있다는 것. ‘개탑(開塔)’은 석존이 문을 연 것. 개탑으로 허공회의식이 시작된다. 개탑은 본문을 설해 일으키는 중요한 의식으로 신력품, 촉루품에서 부촉이 끝나고 폐탑이 되어 허공회의식이 끝난다.
(주8) 삼주(三周)의 성문(聲聞) : 법화경 적문에서 법설, 비유설, 인연설이라는 삼주의 설법을 들은 성문들이 순차로 개삼현일(開三顯一)의 법문을 영해(領解)하고 성불의 기별을 받았다.
(주9) 법신(法身) : 부처의 삼신(三身, 법신․ 보신․ 응신)의 하나. 법신은 깨달음의 법을 말한다. 또 보신(報身)은 법을 깨달아서 아는 지혜, 응신(應身)은 사람들을 구하려고 나타내는 자비로운 실천의 모습.
◇
<본문> (어서 1304쪽 6행~8행)
지금 니치렌(日蓮)의 제자(弟子) 단나(檀那) 또한 이와 같다.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는 남녀(男女)의 모습 이외에 보탑(寶塔)은 없느니라.
만약 그렇다면 귀천상하(貴賤上下)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는 자신(自身)이 보탑이고 자신(自身)이 또한 다보여래(多寶如來)이니라.
<현대어역>
지금 니치렌의 제자 단나 또한 이와 같습니다. 말법에 들어와서 법화경을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대로 보탑이고, 자신이 또한 다보여래입니다.
말법에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이 보탑
“지금 니치렌의 제자 단나 또한 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석존 재세의 성문과 마찬가지로 말법인 지금 니치렌대성인 문하도 또한 ‘기심의 보탑’을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글월은 대단히 유명합니다.
“말법에 들어와서 법화경은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은 없느니라. 만약 그렇다면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자신이 보탑이고 자신이 또한 다보여래이니라.”
마키구치 선생님도 이 부분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붉은 줄을 긋고 연찬하셨습니다.
아부쓰보는 말할 것도 없고, 함께 편지를 읽었을 부인 센니치니도 얼마나 놀라고 감동했을까요.
대성인이 말씀하신 ‘기심의 보탑’은 경문상으로만 듣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빙긋이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본디 ‘귀천상하’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말입니다. 신분이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불법은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 입니다. 사회적인 위치 등은 전혀 상관없습니다.
<어의구전>에 “나의 몸을 봄은 삼천구족(三千具足)의 탑을 보는 것이고 나의 마음을 보는 것은 삼천구족의 부처를 보는 것이니라.”(어서 797쪽)는 말씀처럼 보탑은 내 몸, 그 안의 다보여래는 내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최고의 인간존엄 사상이 있습니다.
만인의 생명이 존엄함을 모르고 타인을 차별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신의 존엄을 손상시키고, 반대로 만인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보탑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현실의 ‘모습’으로 정의를 증명
대성인은 여기서 “법화경은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습’은 밖으로 나타난 자태, 행동입니다.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이며, 지금 여기서 열심히 사는 한 사람 한사람 그 자체입니다.
대성인은 이렇게 사는 사람 이외에 보탑은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어본존을 수지하고, 제목을 봉창하며 불법을 홍통하는 사람의 ‘모습’은 틀림없이 묘법의 당체로서 순간순간 빛납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나타내는 범부가 그대로 ‘존극한 보탑’으로 나타납니다.
고뇌로 가득 찬 현실 속에서 매정한 욕설에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숙명전환을 위해 그리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황금 같은 존귀한 땀방울은 흘리며 꿋꿋하게 투쟁하는 학회원의 ‘모습’이 바로 틀림없는 보탑입니다.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자신’이 ‘보탑’이고, 또 ‘자신’이 ‘다보여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보여래는 법화경을 증명하는 부처입니다. 증명자는 결코 방관자가 아닙니다. 법화경은 설하는 곳에 반드시 뛰어 들어가기로 맹세했습니다. 법화경이 최고로 진실한 가르침이며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증명했습니다.
나는 경애하는 다보회(多寶會), 보수회(寶壽會), 금보회(錦寶會)의 지도부 여러분의 영매(英邁, 영민하고 비범함)한 자태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원숙한 인생의 벗을 곧잘 ‘다보의 증명자들’ ‘다보의 존귀한 동지’라고 칭송하셨습니다.
20년, 30년, 50년이라는 세월을 순진하게 신앙을 관철하며 나와 함께 파란만장한 광포와 인생의 산을 타고 넘으면서 “이 불법은 위대하다.” “학회는 올바르다.”고 외치며 몸으로 증명하신 분들입니다. 설령 무명(無明)이라 해도 불법상 그리고 인간으로서 최고로 존귀한 대영웅입니다.
그 확신에 찬 한마디의 무게는 인생 그 자체의 무게입니다. 사는 모습 그 자체가 묘법의 증명입니다.
이번 동일본대지진의 고난 속에서 “이것저것 다 빼앗긴 나지만, 오직 하나 남은 가슴의 등불”이라고 읊으며 “또 일어선다.”라고 굳게 맹세한 다보회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노래를 눈물겹게 들었습니다.
여기저기에 “좌절하지 않는다.”라는 불굴의 정신을 불태우는 부모가 계신다, 그 신념에 찬 모습을 동지도 또 지역 유지분들도 신뢰하며 흠모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러러 보는 대보탑이며, 불법의 정의를 증명하는 다보여래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다보회 여러분의 건강과 장수를 나와 아내가 기원하고 또 기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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