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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봄 집회
하나님의 건축
3. 그 사람 안으로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요15:1~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장 큰 소망은 어떻게 하면 예수 안에 내가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 안에 있을 수 있는가? 이 문제이다. 그것과 연결해서 나는 어떻게 예수처럼 될 수 있는가? 이 문제가 정말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 가는 문제이고 소원이 되어야 될 것이다. 요즘에는 좀 빗나가서 어떻게 하면 특이한 은사를 받아볼까 능력을 행해볼까 이런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그것은 좀 빗나간 것이고 정통으로 하려면 ‘예수 닮기를 원합니다’하는 노래처럼 진심으로 예수를 닮고 싶은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정도(正道)이다. 부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석가모니같이 되는 것이 소원이고 공자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공자님처럼 되는 것이 소원이다. 알고 보면 그것 이외의 다른 것은 빗나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처럼 되는 것, 그와 같이 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다. 왜냐하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우리의 모든 권리와 축복을 다시 찾으려면 그분 안에 있어야 다시 찾을 수 있지 그분을 떠나서는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 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회복하기 위해서 첫째는 회복할 수 있는 분이 필요하고 둘째는 그 회복할 수 있는 분과 하나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우리에게 다 이루어 놓았다. 사탄은 자기가 아담을 속여서 아담을 타락케 함으로써 우주 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모든 축복을 다 흩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분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것을 이루어 놓았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절대 인간’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절대 인간! 이 사람과 우리가 하나 되면 이 모든 축복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진심으로 믿어 본 사람이면 예수와 같이 되려고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많은 노력을 했지만 참 안 된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아마 불교에 가신 분들도 부처님처럼 되고 싶다는 갈망을 갖고 수도도 하겠지만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서 잘 안되었을 것이다. 물론 불교에 가신 분들도 빗나가서 다른 것 때문에 간 사람도 많지만 정통으로 간 사람이라면 그분과 같이 되고 싶어서 집을 나가기도 하고 산에 들어가기도 하고 밥을 굶기도 하고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그분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우리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참여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성취된 구원이다. 구원은 내가 어떻게 힘을 써서 얻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이루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이 이루어 놓은 것이다.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해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역시 구원도 내가 원해서 내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만들어준 것이다. 우리는 만들어준 것을 받아야 되는 것인데 만들어 준 것을 받지 않아서 문제가 된 것이다.
거룩한 목적도 그분이 만들어 놓았고, 신기한 방법으로 탁월한 방법으로 만드신 것도 그분이시고, 우리에게 거룩한 직무를 준 것도 그분이신데 우리가 그것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구원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그것을 받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못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받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인생의 절대 위치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폭로된 사실을 보게 되는데, 사탄은 모두 감추어서 선악과 이후로 사람은 여러 가지 것으로 포장되어 절대 위치가 감추어져 버리고 없고, 사람이 만든 것이 모두 보여져서 이 사람은 이런 사람,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라는 표시가 붙게 되었다. 딱지를 다 붙게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다. 이것을 다 헤치기 위해 한 사람이 이것을 폭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간 것이다.
십자가는 결국 인생의 비밀, 사람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 위치를 폭로한 것이다. 아무것도 볼 것이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곳에 가서 아무리 쳐다봐도 아무것도 볼 것이 없다. 우리 인생이 기대했던 것은 아무것도 거기에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버리고 갔다. 반대하던 자들은 물론이고 따르던 사람들까지도 다 쳐다보다 가버렸다. 찾던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 찾던 것이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을 거기서 본 것이다. 상상을 해봤더라면 저것이구나 할 텐데 상상도 못해봤으므로 아무것도 없었다.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갈 때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따라갔다. 무엇이 되겠지, 무엇이 있겠지, 저런 사람은 뭐가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갔는데 막상 마지막 자리에 가서 보니 아무것도 볼 것이 없었다. 얼마나 허탈했겠는가. 왜 그분은 그렇게 죽어야 했으며, 하나님은 왜 거기에 그분을 두셨는가? 그것은 우리를 폭로하기 위해서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를 폭로하려한 것이다. 사람은 아무리 가르쳐도 안된다. 선악과 이후에 많은 종교가 생기고 철학이 생기고 도덕이 생겨서 이것은 하지 말고 이것은 해라, 진실하게 살라고 많이 했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이다. 안된다는 것이 이스라엘역사를 통해서 증명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선지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채찍과 당근을 가지고 계속 얘기하는데 우리가 지금 이사야서를 보는데 한 장은 책망하고 한 장은 축복하고 또 한 장은 책망하고 한 장은 축복하고를 계속 한다. 채찍과 당근을 가지고 계속해서 꾸짖고 달래고 꾸짖고 달래고 늘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안 된다는 말은 모든 인류가 안된다는 뜻이다. 그들은 우리 인류의 대표자들이므로 아무리해도 안된다는 것이다.
진실해도 사람을 올바르게 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폭로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진실하게 할 수 없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의 위치가 폭로가 안 되어서 그렇다. 절대 위치가 이탈되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말로해서 안 되니까 결국은 폭로를 한 것이다. 십자가에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저 사람이 참람한 말을 하더니 저렇게 비참하게 죽는구나 하고 지나갔고, 어떤 사람들은 잘 죽었다 저런 이단은 죽어야 된다 하고 저주를 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그래도 뭐가 있을 줄 알았는데 저렇게 될 수가 있나? 이렇게 하고 간 사람도 있었다. 여러 가지 사람이 생겨났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비밀을 완전히 폭로해 놓은 것이다. 예수 같은 사람, 그러한 사람은 저렇게 허망하게 저렇게 아무것도 아니게 될 수가 없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이다. 저렇게 의로운 사람, 저렇게 올바른 사람, 저렇게 충성스러운 사람은 저렇게 될 수가 없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이다. 그것을 믿고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을 믿어왔고 섬겨왔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드러났다. 그를 찾던 사람들은 너무 너무 허탈했다.
이제는 구약성경에 약속했던 모든 것도 거기 가서 찾아보니 없고 말했던 모든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있을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여기서 흑암이 없어지고 혼돈이 없어지고 공허가 없어진 것이다. 왜 인생은 흑암이 왔던가? 그것은 절대 위치에서 떠나있었기 때문이었다. 흑암이 오니까 혼돈이 왔다. 캄캄하면 혼돈이 생긴다. 지금 여기도 당장 불이 다 꺼지면 혼돈이 생긴다. 어디로 나갈지를 몰라서 난리가 날 것이다. 한참 거기서 헤매고 싸우다보면 공허해지는 것이다. 흑암과 혼돈과 공허는 이래서 생긴다.
우리는 예수와 하나되기 위해서, 그 폭로된 사람과 하나 되기 위해서 우리는 길을 잡아야 된다. 어떻게 예수와 하나 되는가? 기도를 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님 같은 사람이 될까? 예수님 마음을 가질까?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참 진실한 기독교인이다. 요즘은 날날이가 너무 많다. 산뿌라를 금니로 만든다는 식으로 하는데 이런 일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예수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그런 것만 신기하고 놀랍게 생각하는데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정말로 예수 잘 믿는 사람 같으면 내가 어찌하면 예수님처럼 될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 같은 마음을 가질까? 이것을 고민하는 사람이 진실한 기독교인이다. 요즘에는 그런 사람이 많이 없어졌고 다른 것만 찾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옛날에는 그래도 그것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사람이 많다보니 그런지 몰라도 비율이 달라지게 되었다. 그런 사람이 더 많이 왔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한사람, 온전한 한사람, 원초대로 회복된 사람 이 사람과 하나 되는 것이 예수와 하나 되는 것이다. 왜 예수와 하나 되고 싶어서 애를 썼는데도 안 되었던가? 그것은 예수를 잘 모르고 하나 되려고 하기 때문에 안 된 것이다. 그분의 사랑을 보고 나는 그분처럼 사랑해야 될 텐데 생각하던지 그분의 능력 행함을 보고 나도 그분처럼 능력을 행해야 할 텐데 이렇게 생각하니 안 되는 것이다.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은 그분의 행함과 하나 되기 이전에 그분의 존재와 하나 되어야 한다. 행동은 기계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행동은 앞으로 기계가 대신해서 할 수 있다. 기계가 더 잘 할 수도 있다.
예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이 사랑은 공산주의가 더 잘했다고 한다. 세계 기독교 대회에서 중공의 모택동이 중공의 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왔다. 왜냐하면 10억 이상의 인구를 절대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킨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겨우 5000명 4000명을 먹였다는 것 밖에 없다. 아무리 마음이 간절했다하더라도 배고파 죽는데 마음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택동이 훨씬 낫다. 이런 일이 실제로 생겼다. 그때는 한창 냉전시대였기 때문에 거기 참가했던 대표자들이 한국에 나와서 입이 다물어져 아무 말도 못했다. 거기는 소련 대표도 참석하고 중국 대표도 참석했다. 세계 기독교 대회를 했는데 거기서 그런 선언문이 나왔다. 예수의 어떤 행동을 본받으려고 하면 그런 일이 발생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해도 해도 그분과 하나 될 수 없고 그분을 본받을 수 없었던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안타까운 사정이었다.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은 존재로 하나 되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어떻게 하면 나는 그분 안에 거할 수 있는가? 그분은 어떻게 내 안에 거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를 항상 모실 수 있는가? 내 마음 속에 항상 모시고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이 숙제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주 완전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제시해 놓았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었는가? 우리와 그분이 하나 되게 하려고 그랬다. 어디서 하나가 되는가? 이 폭로된 이 사람 안에서 밖에는 하나 될 수가 없다. 왜 자신을 폭로시켰는가? 왜 하나님은 그 사람을 폭로시켰는가? 우리 모든 사람을 그 사람과 연합되게 하기 위함이다. 원래 이 사람을 만들 때는 하나님도 그 안에서 사람도 그 안에서 다 하나가 되게 하려고 이 사람을 만들었다. 하나되는 장소로써 하나 되는 요소로써 이 사람을 만들었다. 이 사람이 이탈하니까 모일 자리가 없어서 하나님은 하늘로 올라가야 되고 사람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싸워야 되게 된 것이다. 하나 될 자리가 없고 응집 될 자리가 없고 연합 될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되는가?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연합되는가? 이 폭로된 사람 안에서 연합되는 것이다. 다른 데서는 연합 될 수가 없다.
예수 안에 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폭로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심지어 사탄 앞에서 폭로된 사람. 이것이 진짜 사람이다. 참 사람이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이 여기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나는 예수가 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폭로된 이 사람이 참 사람이다. 이러기 전에는 모두가 다 감추어진 사람이다.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 뭔가로 가려져있다. 그런 사람을 따라간다는 것은 자꾸 가려진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있는 데로 된다면 쉽지만 무엇을 새로 만들려면 어려운 것이다. 그 길이 어렵다는 것은 무엇을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만들고 있는 것은 다 어렵다. 왜 도통하기가 어려운가?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왜 평생을 산에 들어가서 해도 안된다고 하는가? 만들려고 하니까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다 정해 놓았으므로 우리가 어렵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 폭로된 사람도 사실은 원래 있는 사람이다.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한 사람이 폭로되었지만 한 사람이 아니고 모든 인류가 이 안에서 모두 함께 폭로된 것이다. 거기서 나도 없고 너도 없고 한 사람으로 폭로 되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이런 말이 나오는데 아버지께로 어떻게 간다는 말인가? 사람이 어떻게 아버지께로 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 폭로된 사람이기 때문에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 인공위성 타고 간다면 돈을 들여서 가겠지만 할 수가 없다. 기도를 해서 아버지께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해도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 이 사람으로서 밖에는 갈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저절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아버지께로 갈려면 이 폭로된 사람 안에 있어야 된다. 그래야 아버지께로 간다. 다른 방법으로 용을 쓴다고 해서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내가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므로 그렇게 하나가 된 것처럼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한 것이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 것처럼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과 아버지(하나님)가 어떻게 하나가 되었는가? 이 폭로된 자리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우리도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너무 쉬운 일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애쓰는 것도 아니고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 한 위치가 하나님과 사람이 한 자리에 있게 하는 위치이다. 기후를 보면 갑자기 비가 오다가 바람이 불고 태풍이 불고하는지 잘 모른다. 기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무슨 이유가 있으면 더운 공기가 모이든지 찬 공기가 모이든지 눈도 없고 코도 없는 것들이 다 모인다. 저절로 그 자리로 다 모인다. 오라고 하지 않아도 다 온다.
이 사람 안으로 하나님도 오시고 사람도 가고 다 그 자리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이다. 우리가 생각해 봐도 어떤 사람과 내가 만나려면 이 사람 안에서 만나지지 다른 데서는 만날 수가 없다. 진실로 만나지지 않는 것이다. 이 사람 속에서만 우리가 만나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이 사람 속에서 밖에는 만나질 수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는 말이 그 말이다. 왜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가? 여기에 기름부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축복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지기 때문에 축복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이고, 임마누엘은 바로 축복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끌어내리겠느냐? 내가 어떻게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끌어내리는 것도 불가능하고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내려오실 수 있는 자리가 있어야 내려오고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있어야 들어간다. 왜 성막을 만들었던가? 하나님이 내려오실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그런 곳에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는 뜻이다. 하나의 예표이고 상징물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가려면 그리로 가야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한 성막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그리 오시고 사람이 그리 가게 만들어 놓고 그것을 회막이라고 이름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 회막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바로 폭로된 이 사람이다. 병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고 기상천외한 일을 한 사람이 아니고 물위를 걸어갔기 때문에가 아니고 이 사람이 폭로된 그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지는 회막이 된 것이다.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겠다. 이것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 자신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성전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구별한다는 말이다. 하나님 것으로 구별한다는 말인데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이 말은 ‘사실로’라는 말이다. 진리라는 말은 진실이라는 말이고 사실이라는 말이다. 사실은 무엇인가? 폭로된 이 사람이 우리의 사실이다. 거죽을 덮어쓰고 있는 이 사람이 내 사실이 아니고, 바로 십자가에서 죽은 이 사람이 우리의 사실이고 나의 사실이다. 이 사람으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그 말이다. 이 사람으로 모두 구별된 사람들이 교회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 사실로 구별된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들이다. 거룩하게 된 것도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다. 검은 옷을 입어야 되는 것이냐 흰옷을 입어냐 되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걸음을 어떤 식으로 걸어야 되느냐, 잠을 어떻게 자야 되는 것이냐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사실 그것으로 말미암아서만 우리가 하나님께 구별될 수가 있다. 그것이 구별되는 일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주 명백하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있었는가? 바로 그 자리에서 있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것도 역시 그 방법으로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나 사람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다 일반이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는 원리나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되는 원리가 일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쉽다. 지금까지 사람하고 하나 되는 것과 하나님하고 하나 되는 것이 너무 달라서 서로가 되지 않았다. 사람하고 하나 되려면 이렇게 이렇게 사귀어야 되고 하나님과 하나 되려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 되고 서로 다른 것을 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나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한 위치로 만나지게 되는 것이다.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옵소서”. 이것이 중요하다. 과연 그것이 어떻게 영광스러운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사람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영광이 보이지 않으니까 고개를 흔들고 갔다.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으니까 1차적으로는 십자가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여 주옵소서. 2차적으로는 하늘이지만 1차적으로는 십자가였다. 그 십자가의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거기서 영광을 보면 우리 인생이 바꾸어지는 것이다. 인생을 바꾸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되는대로 살아도 된다. 바꾸어도 바꾸어지지 않는다. 폭로된 이 사람의 영광을 보면 저절로 바꾸어진다. 바꾸지 말라고 해도 바꾸어져 버린다. 바꾸기 싫은 사람은 그냥 살면 된다. 하나님도 너무 지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너무너무 쉽고 아주 간단하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 안에 거하는가? 내가 예수 안에만 거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동시에 형제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 이 사람 안에 거하면 모든 것이 거하는 것이 된다. 이 사람 안에 거하는 것이 성전 안에 거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되고, 보좌에 거하는 것이 되고, 형제와 함께 있는 것이 되고,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이다. 왜? 우리의 대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유태인들이 잘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을 했다.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으므로 우리는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침례 받는다는 것은 물속에 잠궈진다는 말인데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었다.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했다. ‘본받아’라는 말은 ‘같이 된다’, ‘같은 모양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동성연애하는 사람을 호모(homosexual)라고 한다. Homogenous는 말은 같게 된다, 같은 모양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분의 모양과 같은 자리에 있으면, 그분의 모양과 같은 자리에서 우리가 발견되면 자세히 보면 우리 자신이 거기서 발견된다.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그것이 나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남이 아니고 바로 나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그 자리에서 연합한 자가 되면 그의 부활 안에서도 역시 연합한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너무 신기하고 기이한 일이다. 다른 모든 종교가 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면서 산꼭대기에서 오라고 부르고 있다. 하도 가팔라서 기어 올라가다가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도가 높을수록 가파르다. 줄타기해서 어쩌다 한 사람정도 올라가고 다른 사람은 다 떨어지는 식이다. 도(道)라는 것이 너무너무 어렵고 어려운 도(道)일수록 높은 도(道)이므로 더 올라가기가 어렵다. 올라가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천신만고 끝에 겨우 한 사람씩 올라가는 모양인데 그 많은 사람들은 다 밑으로 떨어져 버린다. 등반하는 사람들은 참 놀랍다. 어떻게 절벽 같은 바위를 타고 올라가는지 너무 신기하다. 옛날에 한번 삼각산에 갔다가 혼난 적이 있는데 올라갈 때는 바위가 어느 정도 기어 올라갈 수가 있어서 기어 올라갔다. 올라가서 보니 사람이 어지럽기 시작하는데 구름이 지나가는데 세상이 도는 것 같았다. 바위를 붙잡고 있는데도 떨어질 것만 같아서 눈을 감고 간신히 뒷걸음질 쳐서 내려왔다. 구름이 막 움직이니까 하늘이 빙빙 돌아서 도저히 거기 있을 수가 없었다. 직선화된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은 보통이 아니다. 도(道) 닦는 것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이다. 알고 보면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전혀 그런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들어 놓았겠는가?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분이 그렇게 어려운 방법을 만들어 놓았겠는가? 내가 만일 세상에 없는 대학교를 만들었는데 그 수용 인원이 무한정하게 얼마든지 오는 대로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큰 대학교를 만들어 놓았다. 세상에 없는 큰 대학교를 만들어 놓았는데 시험을 어렵게 내면 몇 명이나 들어오겠는가? 그러면 텅텅 비어서 학교가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 대학교를 만든 사람이라면 시험문제를 쉽게 내어서 온 세상의 수험생들이 다 들어오도록 만들 것이다. 그래야 대학이 꽉 찰 것이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만드실 때 자기의 형상이 되고 자기의 모양이 되게 하려고 만들었는데 여기다가 절벽을 타듯이 어려운 길을 만들어 놓았으면 몇 사람이나 거기로 오겠냐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엄청난 투자를 해서 본전을 못 뽑는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아주 쉬운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이래라 저래라 고쳐라 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정체성을 폭로시켜 놓았다. 폭로시켜 놓으면 저절로 다 하나가 되는 것이다. 불교니 기독교니 하고 여러 말을 할 것도 없고 내가 잘 믿느니 네가 잘 믿느니 할 일도 없다. 정통이니 이단이니 할 것도 없다. 다 폭로해 놓았는데 정통이 어디 있겠나. 정통인간이 있고 이단인간이 있겠는가? 인간은 다 인간이다. 다 무언가를 만들어서 그렇다. 우리가 헛된 것에 속으면 안 된다. 이것이 정통이다 이것이 이단이다 하는 것에 속으면 안 된다. 누가 자기를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자기가 다 정통이라고 한다. 가톨릭은 자기가 정통이라 하고 개신교는 자기가 정통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와 함께 장사되는 것이다. 어떻게 내가 그와 함께 침례를 받는가? 십자가 앞에 가면 저절로 침례 받게 된다. 아무 말도 못하고 물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죽으심과 같이 한 자리에 죽으심과 같은 모양이 되면 연합한 자가 되면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고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면 부활에도 연합한 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새 사람이다. 새 사람은 다른 것이 아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생각만 잘하면 금방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이것이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니다. 폭로된 그 사람 앞에 서서 저것이 나구나 알아지기만 하면, 발견되기만 하면 금방 바꾸어진다.
그것이 창세전에 나와 함께 가졌던 영광이라는 것이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그것이 영광스러운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 것인데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그것이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의 형상이 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어야 된다. 오늘 누가 아주 좋은 비유를 하던데 100이 100되기 위해서는 0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1도 2도 3도 안 된다. 3을 넣으면 103이 되고 5를 넣으면 105가 되므로 많이 넣을수록 더 안 되고 더 틀려 버린다. 50을 넣으면 150이 되므로 더 틀려 버리고 잘 한다고 하는 것이 자꾸 더 잘못된다. 0을 갖다 넣으면 그냥 100이 된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는 것이 잘한다고 한 것이 잘한 것이 아니다.
그분이 그분대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이다. 내 영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나를 통해 드러나면 그것이 영광이다. 나는 원래 영광이 없다. 하나님이 드러나시면 영광이다. 성막을 지어놓았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 위에 충만하더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분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스스로 영광스러워지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나타남으로 인해 영광스러워진다. 오늘 여기 있는 형광등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고 전기가 들어옴으로 빛이 나게 된다. 등은 맑을수록 더 좋다. 아무것도 없을수록 더 좋다.
우리가 완전하게 폭로된 이 사람 속에, 이 사람 안에서 발견될수록 더욱 더 영광스럽다. 이것이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영광이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구별이 없었다는 말이다. 형상과 실제가 구별이 없었다는 말이다. 왜?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뭐가 있기 때문에 구별되었던 것이다. 이 구별된 것이 없어지고 나면 우리는 다 영화로운 사람이 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의 영광을 볼 때 거기서 나타난 것을 보고 참 영광스럽다고 한다. 사람들은 나타난 것만 보고 그것을 자기가 어떻게 해 보려고 생각한다. 그것은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모방할 수가 도저히 없다. 다른 데서 와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내가 모방을 하려고 해도 안 된다. 이미 모방하려면 지나가 버리고 없으므로 모방할 수가 없다. 나도 그 자리에 있어야 그렇게 되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낼 수가 도저히 없다. 세상의 영광을 많이 만들다보니 나타난 영광을 못 본 것이다.
“아버지께서 주신 나의 영광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이 안에 나타난 진실이 바로 영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 인생은 금방 바꾸어져 버린다. 아무것도 자기를 위해서는 할 일이 없다. 할 일이 없다는 말이 놀고 잠잔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 할 일이 없으면 남을 위해서 할 일이 너무 많다. 남을 위해서 할 일이 없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할 일이 너무 많다보니 남을 위해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왜 시간이 없는가? 나를 위해서 쓸 시간이 너무 많다보니 남을 위해서 쓸 시간이 없는 것이다. 돈이 왜 없는가? 나를 위해서 쓸 것이 너무 많다보니 돈이 없는 것이다. 헌금할 돈이 없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쓸 돈 때문에 없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는 끝이 없다. 언제까지 하면 끝이 나겠는가. 끝이 없으므로 이 사람은 평생 한번도 쓰여지지 못하고 만다. 자기 위해 할 일을 다 해놓고 하려니 언제 쓰이겠는가? 할 일이 없을 때 되면 쓸모도 없어져 버리고 만다. 돈 쓸 일이 없어지면 사람도 쓸모가 없어진다. 나이가 많으면 돈이 쓸모가 없어져서 돈이 소용없다. 술 먹던 사람이 돈이 있어도 나이 많으면 술을 많이 먹을 수가 없으므로 젊었을 때 같으면 비싼 술도 마시겠지만 나이가 많아지면 조금만 먹어도 취해버리므로 못 먹는다. 돈을 쓸래야 쓸데가 없다. 옛날에 효령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했는데 자녀들이 와서 돈을 주는데 쓸데가 없다는 것이다. 돈도 쓸데가 없는 날이 돌아온다. 돈이 쓸데가 많다는 것은 내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내 할 일이 없어지면 쓸 일도 없어져 버린다. 다 소용없다. 돈을 아무리 쌓아두어도 자기하고 아무 관계도 없다.
이 사람, 폭로된 이 사람을 잘 보면 예수하면 이름만 남게 되기 때문에 폭로된 사람이라고 얘기한다. 십자가에서 폭로된 사람하면 구체성이 있다. 그 사람 안에 우리가 있다. 그것이 바로 나이고 여러분이고 우리 모두이다. 이 사람 안에 거하는 것이, 여기 내가 인정하는 것이 그것을 나로 아는 것이 내가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 안에 거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하려고 애써서 되었나. 옛날에 그 안에 거하려고 많이 해봤다. 이방인으로 오신 분은 그런 노력을 안 해봤겠지만 교회 열심히 다니신 분들은 그분 안에 거하려고 많이 해봤을 것이다. 그분을 모셔보려고 마음속에다 의자를 놓고 그분을 앉혀보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왕좌를 하나 만들어 놓고 앉혀본다고 많이 했었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속고 있다. 내 속에 의자를 하나 놓고 거기에 예수님을 앉혀야 되겠다하는 것은 그럴듯한데 거기에 앉혀지겠냐는 것이다.
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고, 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이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너무너무 쉽고 간단하다. 너무 쉽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크고 어려운 문제인데 저렇게 쉽게 말하면 되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 그런 사람은 공부 못한다.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다. 쉽게 말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 2000년 동안 해 온 것이 이렇게 많은데 그렇게 간단해? 그렇게 간단하기까지 쉬운 일이 아니다. 쉬울 때 감사하다고 생각해야지 그렇게 쉬워도 되나하면 평생 가도 안 된다.
진리는 아주 쉬운데 있다. 가장 쉬운 것이 진리이고 가장 단순한 것이 진리이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가? 내가 어떻게 예수 안에 들어가는가? 그와 내가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 나는 어떻게 그를 닮는가? 나는 어떻게 그와 같이 되는가? 너무 어려운 문제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해도 안 되는 문제이다. 그런데 네가 쉽게 말해서 되겠는가? ‘이것을 믿느냐?’고 예수님께서 묻고 계신다. 알고 보면 너무 쉬운 것이다. 너무 쉬워서 사람들이 못 믿었다. 30살 되는 젊은 청년이 나와서 너무 쉬운 소리를 하니까 믿지 못했다.
“이 성전을 흘어라 사흘 동안에 내가 다시 일으키겠다”. 사흘 동안에 일으킨다는 것은 너무 쉽다. 90년 동안이나 짓고 있는 성전인데 아직도 완공이 안 되어 몇 십 년 동안 더 지어야 할 성전인데 이 성전을 흘어라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겠다고 하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말이 되는 소리였다.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리라. 이것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 자신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성전인데 왜 90년 동안이나 짓고 있냐는 것이다. 90년 동안 지어야 된다는 그 개념 속에서는 사흘 동안에 짓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해할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흘 동안에 짓는 성전이 가장 완전한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시고 다시 살아나기까지 사흘이 걸렸다. 이렇게 지어진 성전이 영원한 성전인 것이다. 90년 동안 지어진 성전은 주후 70년에 완전히 초토화 되고 말았다. 아무리 잘 지어 놓아도 초토화 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가 관념을 바꾸어야 되고 생각을 바꾸어야 되고 완전히 바꾸어야 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절대로 우리에게 올무를 놓으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어떻게 부모가 자식한테 올무를 놓겠는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신기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으로 구원을 한다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200만이나 되는 인구를 바로의 압제 밑에서 해방시켜 나온다면 싸움을 하면 몇 년을 해야 되겠으며 사람이 죽어도 얼마나 죽어야 되겠으며 그 일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맥아더 같은 용사라도 안 될 것이다. 징기스칸 같으면 혹시 모르지만 그것이 안 될 것이다.
하나님 방법은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다. 어린양 한 마리로 해결했다. 거짓말 같다. 어린양 한 마리로 해결하는 일은 아주 거짓말 같은 일이다. 그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다. 징기스칸의 군대를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끄집어내어 왔다고 하자. 그 인간들은 다시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다시 종노릇한다. 어린양 한 마리로 구속하신 그 구속은 영원한 구속이 되었다.
쉬운 것이 진리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너무너무 쉽다. 우리가 관념을 바꾸어야 되고 생각을 바꾸어야 된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 이러니까 안 되고 저러니까 안 된다. 가만히 있으면 된다. 길 잃은 아이가 가만히 제자리에 있으면 부모가 알아서 찾아온다. 아이가 이렇게도 가보고 저렇게도 가보고 하다 보니 방향을 잃어버려서 부모와 엇갈려서 못 만나는 것이다. 가만히 그 자리에 있으면 잃어버린 자리를 알기 때문에 부모가 찾아온다.
하나님도 우리를 잃어버린 자리를 알고 계시므로 간단하게 찾아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찾아오시는 분이다. 우리를 그렇게 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했느니라”. 다른 사람을 쉽게 하려고 죽으셨다. 어렵게 하려면 우리를 죽인다. 군대에 가면 어려운 것은 장교가 자기가 쉽게 하려니까 사병들이 어려운 것이다. 잘못하면 사고 나고 도망치고 하는 것을 일일이 관리하려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수십 명 되는 사람을 관리하려니까 기합을 단단히 주어서 바짝 조여 놓아야 도망치는 놈도 없을 것이다. 자기가 편하려고 하니까 밑에 사람이 괴로운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를 편하게 하려고 죽으셨다. 자기가 편하려면 우리를 괴롭게 할 것인데 우리를 편하게 하려고 그분이 죽으셨다. 우리가 그분의 죽음을 헛되이 하면 안 된다.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고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 했느니라.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너무너무 놀랍고 그 지혜가 탁월하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다”. 지혜가 있다, 머리가 좋다, 생각이 좋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 거기에 대면 부끄러운 것이 된다. 대부분 자기 생각이 너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잘 안되는 것 같다. 하나님 생각과 너무 틀리기 때문에 개념이 틀린다. 90년을 성전을 지으려면 얼마나 많은 설계를 해야 되고 얼마나 많은 공정과 머리를 써야 되겠는가. 보통 사람은 못한다. 아주 좋은 머리로 그것을 만들어 내고 있는 사람한테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고 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다. 아예 못하는 사람 같으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고 하면 한번 봤으면 하는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내가 못하니까 한번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90년을 짓더라도 해 낼 수 있는 그 사람은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고 하니, 네가 참람하다 어찌 그런 허망한 소리를 하느냐고 했을 것이다. 우리 생각은 세상에서 돈 버는 데는 그런 머리가 좋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이 보화를 가져가는 데는 아주 방해물이 된다. 차라리 못한 것이 좋다. 못하면 혹시 하는 호기심이라도 생긴다. 내가 너무 알다보면 혹시가 없다. 이건 이런 것인데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에 전문가가 되어버리면 다른 것은 전혀 모르고 인정도 하지 않는다. 그것만 전문을 했으니까 전문가가 전부인줄로 생각한다.
우리도 전부 아담 전문가이다. 아담 전문가가 되어서 도저히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이 생기지 않는다. 의사 선생님들한테 미안한데 우리 교회는 안과 선생님이 안계시니까 하는 얘기다. 지난주에 눈에 실핏줄이 하나 터졌는데 낫지 않아서 병원에 갔다. 먹는 약 3일분 주고 점안 약 주고 해서 얼마나 걸리느냐고 했더니 한 달쯤 걸린다고 한다. 한 달 동안 눈이 빨갛게 되어서 어떻게 다니나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전문가 선생님이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그전에 비전문가인 우리 교회 형제가 손가락을 따면 싹없어진다고 했다. 말이 허황했지만 혹시나 해서 침으로 손가락을 찔러보았지만 피가 나오지 않아서 그냥 제주도로 갔다. 한쪽에 있던 것이 눈 전체에 퍼져서 다 빨갛게 되고 약을 넣으니까 아주 미세한 반응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눈 전체에 퍼져서 차차 흡수가 되고 시간은 한 달이 걸린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이번 집회 때 빨간 눈으로 여러분을 봐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다. 집회하기 전에는 항상 한 번씩 시험이 온다. 사탄이 한 번씩 꼭 시험을 하는구나. 대구에 와서 교회 형제가 사혈 침으로 피를 빼고 그날 저녁에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한 90%가 걷혀버렸다. 정말 신기하다. 우리 교회에 안과 전문의가 없어서 마음 놓고 말하는 것이다. 손가락 끝에서 피가 조금 났는데 어떻게 눈에 피가 없어지나 참 신기한 일이다.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너무너무 많다. 다 아는 것 같지만 모르는 것이 많다. 의학 정보도 너무나 발달되어 있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우리는 항상 모르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다 안다고 생각 할 수가 없다. 완전히 어떤 아담의 전문가가 되어 있기 때문에 아담이외의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것은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이 분명하게 다른 것은 지구 반대편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동서양이 서로 막혀서 동양의학은 서양의학을 모르고 서양의학은 동양의학을 모르고 이렇게 서로 모르고 있다. 지금도 비행기로 15시간이면 가는 거리지만 막혀서 서로 모른다.
현대의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아주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 모르면 고생을 한다. 이렇게 밝은 세상에서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정보가 날아다니고 인터넷에 온갖 것이 다 뜨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각지대가 많다. 피 한 방울 빼서 없어질 것 같으면 병원에 가지 않을 텐데 그 정보가 없어서 병원에 가고 한 달 동안 고생을 해야 되는 것이다. 집회만 없으면 혼자 숨어 살아도 되는데 여러분 모셔야 되는데 눈이 빨갛게 되어서 걱정을 했는데 한 방에 해결이 되었다. 이만큼 똑같은 물리적인 세계 안에서도 이렇게 정보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보와 세상의 정보를 서로 맞추려고 하면 되겠는가? 맞지 않는 것이다. “사흘 동안 일으키겠다”하는 말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나 믿지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 “세상의 관원의 지혜도 아니고” 이런 말이 나오는데, 이 관원은 종교지도자를 말한다. 십자가 사건은 이상한 것이고 너무너무 묘한 것이다. 이 비밀은 아주 신기한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관원의 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의 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그때 당시 누구인가? 서기관이나 제사장이나 이런 사람들인데 여호와 전문가 혹은 하나님 전문가를 이야기한다. 이것이 이 전문가들의 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비전문가 속에서 나온 것이다. 지구의 한 바퀴만 돌아도 이렇게 어두운데 하늘과 땅같이 먼 세계에서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사람의 생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구원의 방법은 너무나 쉽다. 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이 구원이다. 이 사람과 하나 되는 것이 구원이다. 간단하다. 구원이 천당에 가느냐 못가느냐는 문제가 아니고, 이 사람하고 하나냐 아니냐는 것이다. 이 사람하고 하나면 구원이고, 이 사람하고 둘이면 멸망인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죄사함이든 무엇이든 전체가 다 이 사람과 하나냐 아니냐 둘로 갈라져 버린다. 이 사람과 하나 되는 일을 하나님이 이렇게 쉽게 만들어 놓았다. 하나님이 쉽게 만들어 놓았는지 내가 쉽게 풀어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어도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만드셨고 만드신 이는 그분이 분명하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이렇게 쉬운 것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세상에 왔나니”. 이렇게 쉬운 것이 없다. 하나로 집결되어 버리니 너무너무 간단하고 쉽다. 그 많은 숫자를 약분을 해버리면 간단하게 1/2로 줄어져 버리는 것과 똑같다. 우리 인생의 문제도 약분을 하면 아주 쉽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면 약분이 되는 것이다. 복잡하게 늘어진 것이 약분이 되어서 모든 것이 1/2로 다 줄어져 버린다. 내가 분수를 잘 모르지만 1/2은 확실히 안다. 사과를 딱 쪼개면 1/2이 된다. 그것은 확실히 안다. 1/3, 1/4 가면 좀 헷갈린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야 되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이 안에 있는 영광, 이 폭로된 자리에 있는 이 영광을 보게 되기를 원한다.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험하고 어려운 길을 우리가 가다가 돌아서고 가다가 돌아서고 그렇게 수 없는 세월을 보냈는데 우리 눈을 뜨고 보니 주님께서 얼마나 쉬운 길을 예비해 놓으셨고 완전한 길을 예비해 놓으셨는지 주님 우리 모든 사람이 이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게 해 주시기를 원하고 당신의 기묘한 지혜를 볼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