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This subject brings us to the question, “Where can we put an end to suffering (dukkha)?” 44) 이 주제(새로운 업)는 다음 질문을 하게 합니다. “어디에서 고(둑카)를 소멸시킬 수 있습니까?” WE DON’T PUT an end to suffering in the monastery, in the forest, in the home, or on the mountain. We have to put an end to suffering right at the cause of suffering itself. What we must do is investigate and find out the way suffering arises in us each day and from what root it originates. Then we have to cut off that particular root. Yesterday’s suffering has already been and gone. It can’t come back, it is over and done with. It is suffering that arises today, right now, that is the problem. Suffering that may arise tomorrow is not as yet a problem, but the suffering arising and existing right now must be eradicated. So then, where is it to be eradicated? It must be eradicated at its root. We must study life until we realize that, as the Buddha said, suffering arises simply from grasping and clinging. 수도원이나 숲이나 집이나 산에서 고(둑카)를 소멸시키지 않습니다. 고(둑카) 그 자체의 원인에서 바로 고(둑카)를 소멸시켜야 합니다. 해야 할 것은, 매일 우리 내부에서 고(둑카)가 일어나는 길과, 고(둑카)가 생기는 뿌리를 조사하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뿌리를 잘라야 합니다. 어제의 고(둑카)는 이미 있었고 이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며, 끝나고 종료되었습니다. 오늘 바로 지금 일어나는 고(둑카)가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내일 일어날지 모르는 고(둑카)는 아직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어나서 바로 지금 존재하는 고(둑카)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고(둑카)는 어디에서 제거될 수 있을까요? 이 고(둑카)는 그 뿌리(근원)에서 제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붓다께서 말씀하신, 고(둑카)는 오직 움켜쥐고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삶을 공부해야 합니다. It is usually proclaimed eloquently, but ambiguously, that birth, aging, and death are suffering. But birth is not suffering, aging is not suffering, death is not suffering where there is no attachment to “my birth”, “my aging”, “my death”. At the moment, we are grasping at birth, aging, pain, and death as “ours”. If we don’t grasp, they are not suffering, they are only bodily changes. The body changes thus, and we call it “birth” the body changes thus, and we call it “aging” the body changes thus, and we call it “death” but we fail to see it as just bodily changes. We see it as actual birth, and what is more, we call it “my birth”, “my aging”, and “my death”. This is a multiple delusion because “I” is a delusion to start with; so seeing a bodily change as “my birth”, or “my aging” is yet a further delusion. We fail to see that these are simply bodily changes. Now just as soon as we do see these as only bodily changes, birth, aging, and death disappear, and “I” disappears at the same time. There is no longer any “I”, and this condition is not suffering. 보통 태어남, 늙음, 죽음이 고(둑카)라고, 유창하지만 애매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의 태어남’, ‘나의 늙음’, 및 ‘나의 죽음’이라고 집착하지 않으면, 태어남, 늙음, 및 죽음은 고(둑카)가 아닙니다. 집착할 때 우리는 태어남, 늙음, 고통, 및 죽음을 ‘우리 것’이라고 움켜쥡니다. 움켜쥐지 않으면, 그것들은 고(둑카)가 아니며 단지 몸의 변화일 뿐입니다. 몸이 그렇게 변화합니다. 그 변화를 태어남, 늙음, 및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남, 늙음, 및 죽음을, 몸이 단지 변화하는 것으로 보지 못하고, ‘실제적인 태어남 등’으로 보고, 게다가 ‘나의 태어남’, ‘나의 늙음’, 및 ‘나의 죽음’으로 보고 이렇게 부릅니다. 이것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미혹(무지)이기 때문에 ‘복합적인 미혹(무지)’입니다. 그래서 몸의 변화를 ‘나의 태어남’ 또는 ‘나의 늙음’ 등으로 보는 것은 한층 더 깊은 미혹입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단순한 몸의 변화로 보지 못합니다. 지금 바로 이것들을 단순한 몸의 변화로 보자마자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사라지고 이와 동시에 ‘나’가 사라집니다. 더 이상 어떠한 ‘나’도 없습니다. 이 상태는 고(둑카)가 아닙니다. The Buddha said, “Birth is suffering, aging is suffering, death is suffering”, and the majority of people, almost all in fact, misunderstand him. They point to the condition of birth, the condition of aging, and the condition of death as being suffering. Some can’t explain it at all. Some, hesitant and uncertain, explain it vaguely and ambiguously, evasively hemming and hawing. This is because they forget that the Buddha said “Sañ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the five aggregates, when clung to, are suffering). The aggregates are body and mind; together they constitute the person. If there is grasping at anything as being “I” or “mine”, then the five aggregates are suffering. Those five aggregates are a heavy burden, a source of suffering. There is fire and brimstone in those five aggregates. So the five aggregates, if associated with grasping and clinging, are suffering. 붓다께서는, “태어남은 고이고, 늙음은 고이고, 죽음은 고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사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태어남의 상태, 늙음의 상태, 및 죽음의 상태를 고(둑카)가 되는 것으로 초점을 맞춥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전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주저하고 의심하며 모호하고 애매하고 파악하기 힘들게 더듬거리며 설명합니다. 이러한 오해는 사람들이 붓다께서 말씀하신, “산킷떼나 빤추빠다낙칸다 둑카(Sankhittena pancupadanakkhandha dukkha)”, 즉 “집착할 때 오온(다섯 무더기)은 고(둑카)이다”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 (다섯) 무더기는 몸과 마음이며, 함께 ‘사람’을 구성합니다. 만일 어떤 것을 ‘나’ 또는 ‘나의 것’으로 움켜쥐면, 그때에 다섯 무더기(오온)는 고(둑카)가 됩니다. 다섯 무더기(오온)는 무거운 짐이고 고(둑카)의 근원입니다. 다섯 무더기(오온)에는 불과 유황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 무더기(오온)는 움켜쥐고 집착하여 그것에 연루되면 고(둑카)가 됩니다. Now suppose these five aggregates are in the condition known as “aging”. If the mind does not grasp at and cling to them as “aging”, or as “my aging”, then they will not be suffering. We shall then see the body as empty, the feelings as empty, the perceptions as empty, the willed activities as empty, and consciousness as empty. We shall see the whole flowing and swirling conditioning of everything as empty. Without clinging it cannot be suffering. Such are pure pañncakkhandha (aggregates dissociated from grasping). Such are the five aggregates of an arahant, or what we presume to call the five aggregates of an arahant. For really, an arahant cannot be described as being the owner of the five aggregates, but we look on those aggregates as being the receptacle of the virtues of arahantship. That type of mind cannot grasp at the aggregates in any way as being “mine”, still we presume to call them the pure pañncakkhandha of an arahant. 이제 이 다섯 무더기(오온)가 ‘늙음(나이를 먹음)’이라는 상태에 있다고 해 봅시다. 마음이 ‘다섯 무더기’를 ‘늙음’이나 ‘나의 늙음’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않는다면, 다섯 무더기(오온)는 고(둑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몸을 빔(空)으로, 느낌을 빔(空)으로, 인식을 빔(空)으로, 의지적 행위를 빔(空)으로, 의식을 빔(空)으로 볼 것입니다. 모든 것의 ‘흐름과 소용돌이 상태 전체’를 빔(空)으로 볼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것도 고(둑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할 때 ‘순수한 오온(집착하지 않는 무더기)’이 됩니다. 그러한 (순수한) 오온은 아라한의 오온이며, 우리는 아라한의 오온이라 가정하고 그렇게 부릅니다. 실제로 아라한은 오온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 오온을 아라한 상태의 덕성이 있는 무더기로 간주합니다. 아라한의 마음은 여하튼 오온을 ‘나의 것’이라고 움켜쥘 수 없지만, 그 오온을 아라한의 순수한 오온이라고 가정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Where to put an end to suffering? We have to eliminate suffering at the root of suffering, namely grasping and clinging to things. Suffering due to attachment to wealth must be eradicated there in that attachment. Suffering due to grasping and clinging to the illusions of power, prestige, honour, and fame must be eradicated there in that grasping and clinging. Then wealth, power, and prestige will not be in themselves suffering. So find out where it arises and eliminate it there. In the words of the old-time Dhamma experts, “whichever way it goes up, bring it down that same way.” 어디에서 고(둑카)가 끝날까요? 고(둑카)의 뿌리, 즉 사물에 집착하는 것에서 고(둑카)를 제거해야 합니다. 부(재산)에 집착하여 생긴 고(둑카)는 그 집착을 근절시켜야 합니다. 권력과 위세와 명예와 명성의 환영에 집착하여 생긴 고(둑카)는 그 움켜쥠과 집착을 근절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부(재산)와 권력과 위세는 그 자체로서는 고(둑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둑카)가 일어나는 곳을 찾아 그곳에서 제거하십시오. 옛날, 담마에 정통한 사람들의 말 중에, “어떤 식으로 올라오든지 똑 같은 식으로 떨어뜨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
출처: 붓다 담마 원문보기 글쓴이: 호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