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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이기순 스크랩 사대부의 숨결이 깃든 닭실마을(20회)
13 이기순(浪山) 추천 0 조회 54 10.06.11 13: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대부의 숨결이 깃든 닭실마을

 

 

 

 

 ‘충절세향’임을 알려주는 닭실마을비

 

 

  태백산과 소백산의 연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친 곳 봉화 땅. 산이 높고 물이 맑아 이곳을 은둔처로 삼고 찾아든 선비들이 많은 탓에 봉화엔 일찍이 정자 문화가 발달하고 고택들 또한많다. 특히나 한수정이 있는 춘양과 내성촌 유곡은 봉화의 양대 사대부촌으로 유명하다.

  조선 조 중종 대에 충재 권벌( 權?)이 기묘사화로 내성촌으로 들어와 세거지로 삼은 곳이 바로 봉화읍 유곡리 닭실 마을. 닭실마을은 충재 선생의 종택이 자리하고 있는 안동 권씨의 집성촌이다. 마을 뒤로 문수산이 에워둘러 그 지릉들이 좌청룡 우백호의 지형을 이루고, 서남으로 뻗어내린 백설령이 알을 품은 암탉의 형세를 이루어 ‘닭실’로 불린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니 유곡(酉谷)으로 유래되었다.

마을 앞의 옥적봉이 안산 역할을 하며 수탉이 활개치는 형상을 하여, 닭실 마을은 그야말로 금계포란의 명당지세를 갖추었다. <택리지>에서도 이곳을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 경주의 양동과 더불어 삼남의 4대 길지로 꼽았을 정도다.

  봉화읍을 지나 태백 방향으로 5분여를 달리면 내리받이 언덕길 왼켠이 닭실마을. 산자락 아래 즐비하게 늘어선 한옥 마을 풍경이 한 눈에 금방 사대부가의 양반촌임을 알 수 있다. 마을 앞을 지나던 36번 도로가 새로운 곳으로 옮겨지면서 이곳은 다시 한적한 길이 되어 버렸다. 도로변에 세워진 마을비가 ‘충절세향(忠節世鄕)’임을 일러준다.

 

         

                                        오백 년 숨결이 살아있는 닭실마을 전경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머리 속의 상념은 먼 옛날 아득한 시절 속으로 빠져든다. 돌담과 흙담장의 골목길에서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흙내음이 바람결에 흠뻑 밀려온다. 인공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요, 제멋대로 생긴 자연석을 쌓아올린 담장들이 푸근한 질감으로 다가온다. 우리네 정서가 깃들인 고향의 풍경이다.

 

        

                                   돌담장과 한옥이 조화를 이룬 골목길

 

  뿐이랴, 돌담길을 휘돌아 권벌 선생의 종택 솟을대문 앞에 서면 옛 선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종가는 양반가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입구(口)자형의 구조다. 수백 년 풍상에 퇴색한 기둥이며 이끼긴 기와지붕이 고풍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리네 전통적인 가옥들은 주변의 산세들과 조화를 이루어 알맞은 높이로 솟아있는 모습이라서 더욱 정답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는 빌딩이며 들판에 우뚝한 나홀로 아파트의 살풍경한 모습은 그 얼마나 어색하고 부자연스런 흉물이던가.

         

                                              권벌 선생 종택의 솟을대문

 

 

  종가 뒤편 높은 곳에 사당이 보이고, 종가 우측의 쪽대문을 나서면 서재로 쓰이던 충재(沖齋)와 청암정 절경이 자리하고 있다. 청암정은 널찍한 거북바위 반석 위에 솟아있는 정자다. 마치 거북이가 등에 정자를 지고 있는 모습으로, 6칸 넓이의 팔작지붕 누대에 2칸 폭의 맞배지붕 마루방을 붙여서 만든 건물이다. 정자를 중심으로 사방에 연못이 둘러있고 소나무며 향나무, 왕버들이 우거져 주위의 운치를 한껏 더해 준다.

  옛 사람들의 뛰어난 풍류와 미적 감각이 한결 돋보이는 모습이다. 단아한 모습의 돌다리를 건너 정자에 오르면 ‘청암수석(靑巖水石)’ 현판의 전서체 네 글자가 선연하다. 당대의 문장가이며 명필이었던 미수 허목의 글씨다. 퇴계 이황과 번암 채제공의 편액도 걸려있으니, 그만큼 다양한 인물들과 교류가 있었음을 헤아릴 만하다. 문우들과 어울려 독서와 시회를 열기도 하고, 마음 통하는 지기들과 세상을 걱정하며 담론을 나누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풍류와 낭만이 넘친다. 정자의 주인공이 교유했던 선비와 학자들의 정도에 따라 정자가 지니는 의미와 가치도 한층 다르게 느껴질 뿐 아니라, 그의 학식과 덕망이 어떠했을지도 미루어 가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시인묵객들의 풍류가 서린 청암정

 

 

  권벌(1478~1548)은 중종(中宗) 때 사람으로 호는 충재. 도승지, 예조참판을 거쳐 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한성부판윤 등의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조정이 사화를 거듭하자 이곳 유곡으로 내려와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다가 다시 벼슬길에 나아간다.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더니, 1547년(명종 2) 윤원형이 윤임을 배척하자 이를 반대하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구례로 유배된 후, 다시 삭주(朔州)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청암정 뒤편의 충재박물관은 충재일기(보물261호), 근사록(보물262호), 연산일기, 세초도 등, 문화재 400여 점이 보관된 충재 권벌의 기념관이다. 근사록은 논어의 ‘절문근사(切問近思)’에서 따온 말로 주자와 여조겸이 일상생활에 절실한 글들을 뽑아 편집한 것으로 충재 선생이 늘 가까이 하던 서책이다.

   

         

                                       명승으로 지정된 석천계곡과 석천정사

 

  닭실 마을에서 내성천 지류를 따라 내려가면 10여 분 거리에 석천계곡이 위치한다. 좌청룡 우백호의 지형이 아우르며 수구(水口)를 이루는 곳이 바로 2km 남짓의 석천계곡이다. 물길이 마을 앞을 안고 돌면서 그 흐름이 굽어있는 활의 모양 같다 해서 궁수(弓水)라 하며 풍수에서는 아주 좋은 물길로 평가한다. 수구가 빗장을 걸어 놓은 듯 잘 여며져 있는 것을 수구관쇄(水口關鎖)라 하니, 닭실 마을의 명당 기운이 새나가지 않고 잘 갈무리 된다고나 할까. 더할 수 없는 전형적 배산임수의 형세로 명당이라 꼽는 곳이 이런 곳이 아닐까.

  애시당초 봉화읍에서 삼계리로 접어들어 석천계곡을 통해 들어가야 닭실마을의 풍수와 지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도로가 마을 곁을 지나면서 동네 입구가 바뀌었다. 지금의 마을비가 있는 입구는 말하자면 동네 옆구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좌청룡의 능선을 도로가 가로질러 가면서 출입구를 허리쯤으로 옮겨 놓았으니 마을의 운세가 빠져나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나 혼자 공연한 걱정을 하면서 계곡을 훑어 내려간다.

  청암정과 석천계곡 일대가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되었을 정도이니, 그 풍광은 가히 승경이라 이를 만하다. 계곡의 바닥은 광활한 통반석으로 계류는 티없이 맑은 명경지수다. 적당히 소(沼)를 이룬 곳에는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유히 노닌다. 아름드리 울창한 노송은 하늘을 뒤덮고, 골짜기 동편엔 석천정사 이끼 낀 기와지붕이 세월을 멈추고 섰다. 계곡을 건너기 위해 바위돌에 걸쳐 놓은 외나무다리는 어떻고. 지팡이를 더뎌짚은 노승 한 분이 홀연히 나타날 것만 같은 상상에 젖어본다. ‘청하동천(靑霞洞天)’이란 바위벼랑의 글자대로 신선이 살고 있을 만한 별천지의 세계가 바로 여기러니.

 

         

                                      석천계곡의 반석 위에 놓인 외나무다리

 

  석천정사는 34칸의 큼직한 건물로 충재 선생의 큰아들인 권동보가 지었다 하나, 오백 여 년의 풍상에 쇠락해진 건물을 보수하느라 지금 공사가 한창이다. 정사 뒤편 암벽의 석천정(石泉亭) 각자 아래 돌우물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물이 솟아난다.

  정자에 올라 시원하게 불어오는 솔바람을 맞으며 자연과 하나 되어 시문을 외고 학문을 논하던 옛 사람의 풍류를 어이하면 알거나. 천고의 세월을 지켜오다 풍우에 지쳐 쓰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앉으니, 나도 또한 겨드랑이 깃이 돋아 잠시 신선되어 오른다. 산굽이를 감고돌아 동구에 서면 순간 선계를 다녀온 듯 착각 속을 맴돈다.

 

                                                  (문학저널 연재 20회. 201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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