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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쟝켈레1959앙리베16L08
앙리 벩송(Henri Bergson, 1959)
쟝겔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PUF, 증보판 1959(초 1931), P. 300.
[차례] 300
서문 Avant-Propre 1
제1장 유기적 총체성 Totalités organiques 5
제2장 자유 Liberté 28
제3장 영혼과 신체 L'âme et le corps 80
제4장 생명 La vie 132
제5장 영웅주의와 성성(聖性) L'héroïsme et la sainteté 182
제6장 개념들의 무와 정신의 충만 Le néant des concepts et le plein de l'esprit 200
제7장 단순성: 환희에 대하여 La simplicité. Et de la joie 229
부록: 벩송과 유대주의 Appenice: Bergson et le judaïsme 255
영혼 전체와 더불어 Avec l'âme tout entière 286
참고문헌 Bibliographie 297
차례 Table des matières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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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단순성, 그리고 환희에 대하여 La simplicité. Et de la joie 229
제1절 단순성에 대하여 De la simplicité 229
제2절 벩송의 낙관주의 L’optimisme bergsonien 244
“단순성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이 단순성! 누가 나에게 줄 것인가!”
페늘롱(Fénelon, 1651-1715),
크리스트교의 완전함과 도덕의 다양한 관점에 관한
견해와 입문 no 40.
제1절 단순성에 대하여 De la simplicité 229
사람들은 벩송이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예언자들과 설교가들의 음색(le ton 말씀)에 관해 설교한 단순성의 회귀에 대해 그렇게 많이 놀라지는 않는다. 충만의 유명론 전체는 우리들을 정신집중에, 그리고 동시에 위대하고 순수화한 단순화에 초대한다. 이 단순화에 의하여 유사-철학의 환상들은 사라지게 된다. 의식의 무매개적인 자료들에 관한 시론은 사실과 법칙처럼 서로서로 대립되는 두 종류의 단순성을 구별한다. 하나는 자연적으로 첫째이며(πρότερα τή φύσει) 권리상으로 마지막이다. 다른 하나는 사실상으로 마지막이며, 관념적으로 첫째이다. 왜냐하면 의식에 의해 바른 방향으로 살았던 계보학적 질서는 거꾸로 거쳐 간 논리학에서는 반대로 구축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연대기[편년체 질서]는 한 번 살았었기에, 있어야만 했던 대로 연역법에게 양보되었던 대로 구축되었다. 이 전자들은 후자들을 통과하며, 결과가 원인이 되며, 파생물이 원초물이 된다. 역사적으로 기원과 관념론적으로 첫째 사이에 연관은 배아와 원리 사이와, 유기적인 가능성과 부정적 또는 추상적 가능성 사이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가장 단순한 것은 당신이 생각했던 [그런] 것이 아니다. 단순성은 두 종류인데, 때로는 요소적이고 추상적이며, 때로는 구체적이다. -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해의 근원이다. 이 오해의 근원은 심리학적으로 거의 모든 우선성의 논쟁[소송]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한편으로 단순주의의 단순성(la simplicité)은 스스로 다양화로 해체되면서 그리고 그 자체와 결합되면서 복잡화(la complication)라는 무거운 건축물들을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 마치 본래적인 복합성(la complexité)처럼 단순(le simple)은 무매개적으로 주어진다. 왜냐하면 복잡과 복합은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된 것은 다면체들의 다면체들, 유기화학의 분자들의 송이들, 원자론의 구성된 구조들이다. 또한 복잡하게 된 것은 의식하는 의식이며 또 한 번 이 의식을 의식하는, 이렇게 무한히 계속하는 의식이다. 결국 복잡하게 된 것은 연관들의 연관들, 매개 작용들, 관계들, 상호관련들 - 추론(logismos, λογισμός)이 된 로고스가 담당하는 이차적 잠재태의 상호관련들 - 이다. 사람들이 단번에 자리 잡은 모든 상황에서 앙리 벩송이 요구하는 복합적 단순성인데, 이 복합적 단순성은 일자와 다자들의 모순적 술어들을 재통합한다. 훨씬 더 좋게 말하자면, 이 복합적 단순성은 모든 범주를 저넘어 있으며, 부정[신학]적(apophatique: ἀποφατικός) 서술을 위해서만 정의할 수 있다. 통일성이라기는 커녕 오히려, 사람들은 통일성을 총체성이라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기체처럼 총체성은 개별성들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총체성은, 길항관계의 힘들의 조화와 더불어, 종합의 모든 풍부한 내포를 가정한다. 종합을 구성하기 위하여 공현존의 내재성은 - 전체는 각 부분들 속에서 다시 살고 있으면서 - 계속의 내재성과 협력했다. 여기서 계속이란 기억에 의하여 과거를 현재 속에서 잔존하게 하고, 선형성에 의해서 현재를 미래에 예상참여하게 한다. 이 상호함축의 체제(ce régime)는, 마치 그것이 우리의 연속적 지속을 설명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결단으로부터 나온 창조적이고 예견 불가능한 새로움을 설명한다. 따라서 여기 요소의 더 이상 자를 수 없는 단순성과 총체적 부분의 복합적 단순성이 마주 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자기에 제공된 가능한 한 무한한 분할자체에 의해서 분할불가능한 부분이다. 후자의 단순성은 다 소모할 수 없는 내포로써 단순이며. 전자의 단순성은 “단순한 자연들”처럼 모든 혼합으로부터 순수한 한에서 순수이다. 이 둘째로부터 사람들은, 단순화하는 추상작업의 그 마지막 한계(terminus ad quem)인 한에서, 그것이 부정적이라고 기꺼이 말할 것이다. 단순화하는 추상작업은 그 단순성으로, 마치 순수 물(l'eau)처럼, 무미하고 색깔 없고 향기 없는 요소(un στοιχεῖον)를 만들기 위하여, 둘째의 단순성을 그것의 모든 성질들로부터 차례로 껍질을 벗긴다. 반면에 첫째의 단순성은, 즉 사물에 앞서 있는 단순성[이데아의 단순성]은, 마치 역동적 도식처럼, 차이들의 모태(la matrice)이다. 이 단순성은 잠재적인 성질들로 매우 눈 깜짝거리고, 훨훨 날아다니고, 번뜩거린다. 이 단순성은 빈약하게 되면서, 그리고 동질적인 것으로 되돌아오면서, 단순(simple)하게 “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 단순성은 통합된 얼굴로 서로 침투되는 이질적 성질들의 얼룩무늬로[혼융으로] 단번에 단순하게 된다. 이리하여 플로티노스가 이유 있다. 즉 단순성은 항상 기원이며, 원리(le principe, ἀρχή)는 항상 단순하다(le plus simple, ἁπλούστατον). τὸ οὐ πρῶτον οὐχ ἁπλοῦν. 그러나 이 단순성은 중대한 알몸(la nuidité, 노출)이, - 원초적 흰색, 라모의 “Ut 폭군” - 여기서부터 복합물(le composé)이 나올 것이다. 이 단순성은 오히려 수축상태(l’état d'involution)에서 싻(움돋움)의 가능성이다. 즉 다양성(le multiple)의 초월적 선가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밀도성을 더 크게 지니고 있는 다수성(le pluriel) 그 자체이다.
따라서 논리적 계열은 살아왔던 질서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의 시작(l’alpha)은 다른 하나의 끝(l’oméga)에 걸려있다. 논리학은 생명의 되돌릴 수 없는 질서를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제작과정의 중첩할 수 있는 도식을 자기 위에 다시 포개지도록(replier) 전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논리학은 셀 수 없을 정도의 양을 나열하기에도, 소진할 수 없는 양을 소진하는데도, 또 차후에 지속의 무한소의 운동들을 재구성하는데도, 이르지 못한다. [논리학에서는] 단순한 사물들을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 말하자면 지속이 만드는대로 행해야한다. 지속은 미래화작업(la futurition)의 기적에 의하여, 순간들의 우글거리는 연속성을 노력을 들이지 않고서 추진한다. 예를 들어 운동을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운동을 모방하는 것이고, 그 운동의 방향에서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노프 출신인 그 디오게네스, 즉 우리들의 영원한 상식인인 디오게네스는 잔인한 제논에게 항상 침묵을 강요할 것이다. 각각의 인간에게 속해있는 유제니오 도르스(Eugenio d’Ors)는 엘레아의 그 인간을 “저주받은 철학자들” 가운데 줄 세우지 않았는가? 조셉트 메스트르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응답할 줄만 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걷는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 “길은 어디론가 나있다. 묻지 말고 걸어라!”라고 썼다. 그런데 엘레아 학자들과 서기들은(les scribes) 또한 어떻게 운동이 가능한지 자문하고, 그리고 자신들의 난문제들 속에서 난처하게 되었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고, 그리고 거북이를 넘어선다. 또한 벩송은 우리가 아킬레스에게 말 걸 것을 우리에게 충고한다. 즉 아킬레스는 그가 어떻게 처신해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아킬레스와 상의해보세요. 멜로디를 들으세요. 당신 스스로 선택해보세요. 쟈끄 마리땅은 그것은 응답이 아니라고 말했고, 인식한다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지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진실로, “행하는” 것이 다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막스 셸러(Max Scheler)는 공감에 대하여, 공감이란 “재생산”이라고 말했고, 이와 같은 의미에서 포레-프레미에(Philippe Fauré-Frémiet, 1889-1954)는 재창조(récréation)에 대해 말했다. 모든 반복(itération)은 이제 재창조이며, 말하자면, 창조적이고 둘째의 반복은 또한 첫째만큼이나 시작(initiale)이다. 그런데 운동이란 재료의 측면에서, 우리들은 모두 발명가들이다. 하나의 사물이 있고, 거기에서 각자는 수완있고, 독창적이며, 또 다른 창조자(conditor alter)이다. 이처럼, 내가 체험한 사랑은 –디오티마의 에로스 - 늙은 새로움이며, 영원히 젊고 신선하고 그리고 연속적인 시작인 반복의 덕분에 의해서 아침과 같다. ‘다시 산다’는(Le Révivre) 것은 여기서 퍼질러내는 실현과정이며, 이 실현과정에서 이차성과 일차성은 하나일 뿐이다. 게다가 만들어진 것(le faít, 사실)은 저기에 있다: 즉 운동들이 끝에 이르고, 다시 운행하는 것들(la révolutions)은 뜻밖에 온다. 깜짝 놀란 관념론자들, 자기 손에 시간 측정기를 들고 있으면서, 항상 사건을 지각하는 관념론자는 왜 개념적 사색작업들이 단숨에 먹어치우는지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효과적인 변화는 사물들을 사로잡는다. 바디우스(Vadius)는 가설적이고 지시적이며, 수사학적인 개념들 속에 허우적거리면서 “자기 용어집 속에서 옴환자(Galeux)가 무엇인지 뒤(Derriére)가 무엇인지를” 아직도 찾고 있다. 관념론은 용기가 부족하다. 결국 우리는 운동의 단순성과 자유작동이, 앞의 단순성과 공연적(coextensive)이 될 수 있는 다른 단순성 때문에, 또 정신의 비상 때문에, 벩송이 직관이라 부른 지혜(sophia), 즉 한꺼번에 쏟아내고 신지적인 지혜 때문에, 지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자. 만일 무한이 불합리하지도 모순도 아니라면, 무한은 쌍(짝수들)에 의해 판단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앙리 브르몽은, 시적 경험을 다시 행하면서, 클로델이 말한 대로, 그 자체로 원인의 역할을 즉 창조자(ποιητής)의 역할을 하면서, 시적 경험을 해석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알랭이 직업(職業)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브르몽의 시작(詩作, la poétique)을 확정한다. 사람들은 직업을 시도하면서 배우는 것이 그것을 사유(생각)하면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무엇인가 속에 지적(예지)작업인 동시에 들고 나면서 아마도 설명될 것이다. 예지작용이 동시에 무엇인가 속에서 들고 나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사람들은 벌거벗은 기호들로부터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 기호들이 이미 하나의 의미(그러나 이때에 예지작용은 이미 선가정 되어 있다)를 갖지 않는다면, 그리고 또 사람들은 표현되지 않은 의미로부터도, 이 벌거벗은 기호들 기호화 의미화하기 위하여 단어들 속에 이차적으로 구현될 듯한 힘든 의미로부터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사실상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벩송은 사유의 주도적인 선행성(la précédence)을 그래도 부인한다. 그 사유에서 언어는 단순히 도구, 봉사자, 또는 수레일 뿐인 것이다. 사유에서 지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우선권(le préséance)은 항상 신화적인 어떤 것이다. 주지주의는 논리주의적이고 발화적인 이 원인들(?)에 기인하는데, 이 원인들을 말하기 앞서서 생각해야 하고, 결정하기에 앞서서 숙고해야 한다. 그리고 벩송 그 자신은, 형식과 내용, 본질과 현존, 가능성과 실재성이 구현하는 것 속에서 단번에 솟아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했다. 거꾸로 가는 원인성은 내려가는 원인성보다 덜 실재적이지 않으며, 전자의 원인성에 의해서 결과는 자기 고유한 원인의 원인이다. 그리고 제임스의 주변을 도는 이론은 주지주의만큼이나 이유가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말하면서(en) 사유할 수 있고, 선택하면서(en) 숙고할 수 있으며, 또는 그 시인처럼 시를 작성하면서(en) 또 작성된 것에 의해서 시를 창조할 수 있도다! 시적작동은 단선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의 상호성이다. 그 작동(시작, 詩作)에서 표현과 반대표현, 직접물결(파동)과 유도된 물결(파동)은 (서로) 간섭한다 [증폭되기도 하고 소진되기도 한다]. 원심력의 도약과 반대급부[구심력의] 도약의 상호일치, 도약과 뒤로의 충격의 상호일치는 즉흥화하는 방식이 아닌가? 실천의 비합리성을 주목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l’habitude, ἔθος)은 성향(la disposition, ἕξις)을, 또 마치 이번에는 성향이 훈련의 조건이며 질료의 형상이나 되는 것처럼 생겨나게 한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착하게 되기 위하여 품행을 바르게 해야한다. 그러나 품행이 방정하기위하여 이미 착해야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내가 두렵기 때문에 달아나고, 그리고 내가 달아나기 때문에 두렵다는 것도 동시에 진실이다! 시타르를 연주하면서 시타르 연주자가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타르를 연주하기 위하여 이미 다소간 시타르 연주자가 되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발견하기 위하여 찾아 애써야만 한다면, 찾아 애쓸 수 있기 위하여 이미 발견했어야만 한다! 파스칼은 고민 고민하여 찾는 자들을 위해 말하면서, 탐구(le recherche 다시 찾기) 그 자체를 위하여 이외의 발견물(la trouvaille)의 첫 지표(표식)으로써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르끼에가 자유의 탐구에 있어서 그 자신 또한 탐문(la quête)은 이미 하나의 발견(une découverte)이라고 생각했다. 진실로 총체성의 선행성은 예지작업에서나 행동에서 순환논법(le diallèle, 악순환)을 이미 해결했다. 그런 점에 따라서, 지성은 발견하지 않고서 찾는데, 마치 바로 그런 점에서 본능은 다른 것을 결코 찾지 않고서 발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직관은 불안한 탐구[다시 찾기]와 즐거운 발견물의 기적적인 일치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욕망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투적인 활동주의는 원(순환논법)을 부셔버린다. 그 원은 탐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첫째 해결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연속화작업(la continuation)을 위해 가치 있게 하는 기술적인 처방들(les recettes)은 시작을, 즉 르끼에가 말하는 대문자 시작(Cornmencement)을 위해서는 가치 없고, 게다가 우선적인 의욕함(le prime vouloir)을 위해서도 가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시작하기를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Incipere non discitur). 또한 알랭(Alain)은 시작하여 끝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작동(현실태)으로 이행의 기능을 상실했던 소심한 자들이 묻기를, 의욕(원)하기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한다. 의욕(원)하기 위하여, 제기랄(mon dieu), 마치 창조하기 위하여 창조해야 한다는 것처럼, 의욕(원)해야 한다: 악순환이라는 원이 아니라 결단을 잘 내린 원이라는 것을, 즉 건전한 동어반복을, 특히 위험한 아름다움을 의욕해야(κάλος κίνδυνος)만 한다. 자기원인(la causa-sui) 그 자체는 순환적인 왜냐하면(un Parce-que)에 의해서 제기된다. 왜냐하면, 누구나 질문에 의해서만 대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원리의 청원(la prétition de principe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은 청원이 살고 있는 운동 안에서 해소되듯이, 마찬가지로 르누비에에 따르면 확실함은(la certitude 확신) 자유로운 선별(la option)자체 안에서, 다시 말하면 작동 중인 사유의 훈련 안에서 성숙해 간다. 그리고 또한 마찬가지로 운동이 애초에[처음에] 해결된 것으로 가정된 문제로부터 명시적인 해결로 나가는 것과 같고, 엘레아학파의 의심으로부터 질병을 낫게 하는 것과 같다. 즉 그는 변증론이 운동을 가능하게 조립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물속에 뛰어든다. 왜냐하면, 일단 효과있게(사실상의) 이루어진 것을 [그 이전에] 하물며(a fortiori) 가능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르끼에가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자유의 작동이다”고 말한다. 자유를 찾는 르끼에도 또한 이미 자유를 발견했도다! 자유는 자유의 활동적인 작동에 의해서만 증거될 뿐이다. 자유란 자유 그 자체에 의해 시작하며, 자유를 말하면서 또 모험적으로 자유롭기를 선호하면서 자유롭게 자유 그 자체를 선택하도다! 자유란, 마치 운동이 기적적인 해결이듯이, 천재적인 즉흥실현이다. 그리고 만일 천재가 탁월하게 창조적 자유인이라는 것이 진실이라면, 사람들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의 저술이 영웅들과 위대한 발명가들에게 역할을 하게 한 것과 같은 역할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 마치 벩송주의 일반이 벩송적으로 사유하듯이, 그리고 마치 사람들이 스스로 운동하면서 운동을 증명하듯이, 마찬가지로 자유란 체험되면서 다시 말하면, 어떠한 종류의 번역들도 이전들도 없이 결심하면서 증거 된다. 이와같이 직관이 시간을 시간적으로 파악하였듯이, 마찬가지로 의지는 무상의 선별(채택)에서 “자동동기”로 확증된다. 고르디오스의 난문제들과 제논의 소심함은 자유 그 자체인 한판(un pari)의 상냥한 자발성에 의하여 단번에 해결했다. 간접적으로 문제적인 임의자유(un libre arbitre 임의재량)를 증명하는 대신에, 벩송은 아주 단호하게 그리고 어떠한 앞선 것도 없이 자유의 무매개적인 명증성 안에 놀이(경기)의 입장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단순성은 모든 도제 수업을 배제하는 스스로 됨(무위, 無爲 une grâce)이다. 즉: “이것에 대해 단지 말하기 위해서(라도) 이 스스로 됨(cette grâce)가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선한 의지로 마음을 바꾸었을 때, 절대적으로 원한다는 것, 순수하고 단순하게 원한다는 것은 매우 쉽다. 짤게 말해 온원함(le Vouloir) 안에는 원하고도 원하는 수많은 이중화들이 갑작스레 축약되어 있다. 순환논법을 공인하는 정념화된 의도는 원하고도 원하는(Velle Velle)이라는 것의 끝없이 많은 핑계거리를 끝장내고, 다시 말하면 위선적인 “원한다는 의지”를 끝장낸다. 이 위선적인 의지는 우유부단의 부재증명(un alibi)이며, 나쁜 의지의 부재증명일 뿐이며, 게다가 더 단순하게 말하면 의지의 부재증명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원하면서 원하고 있다: 사실상(ipso facto, par le fait)!
변증법에 의하여 설명되기에 앞서서 통상적으로 해결된 운동의 시동걸기와 성공이었는데, 이보다 더 단순하고 또 더 분명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우리의 행동에 관해서 일 때 단순한 것은 생명적인 조작에 관해서일 때도 그만큼 단순하다. 끊임없이 조심성들과 주저들 속에 매몰되어 있는 제논의 의지결핍증에게 여기서 무한한 복잡화작용을 찬양하는 목적론적 놀라움이 대답하고, 또 유기체들의 놀랄만한 목정성이 응답한다. 사람들의 눈의 제작과정 퍼즐을 위해서처럼 요소들로부터(ἀπό στοιχεῖων) 조작하는 것으로 재현할 때 눈의 제작과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자연의 “걸작”은, 사람들이 “전혀 다른 질서” 속에 단번에 자리 잡을 때부터, 단순하고 경제적(아낌)이 된다. 금속[청동]을 작업하여 형을 뜨는 유기그릇제조인은 한 제품의 모든 조각들은 열 손가락으로 제작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제품은 [제철로의] 불꽃으로 단 한 번에 제작되었다. 사진사는 한 장면의 유사한 세부사항들 모두를 글자 그대로 실행했던 것이 아니다. 일단 장식과 조명이 선택되면 그는 음판을 제작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과자를 구웠던 제과자는 반죽으로 무한히 복잡한 모든 형태를 자기 손으로 모형을 만들었던 것이 아니다. [화덕의] 불의 열기가 그를 위해 작업했다. 기술에 대해 데미우르고스적인 자발성을 신뢰하는 공예가는 수작업으로 점점 멀리 개입하여 질료(재료)의 힘들의 자동주의로 나아간다. 일단 시작에서 창조적일 뿐인 의도가 단순히 신체적[물리적] 조작을 촉발하고, 그러고 나서 그 조작을 통하여 거창하게 넘어서게 되어있다. 기계적인 작품들에 대해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그 작품이 가정하는 최소의 인위적인 조작에도 불구하고, 유기체에 대해서보다 훨씬 더 진실하다. 우리들 예지(intellect)의 인간형태주의가 꼭 필요한데, 다음을 요청하기 위해서이다: 그 요청에서 자연은, 공간 속에서 터무니 없고, 상상할 수 없으며, 자연의 근면함으로부터는 엉뚱한(déconcertante) 복잡화(le complication)를, 해부학의 무한소에 그리고 생리학의 복합성에 비례시켰다. 회백질의 신경세포들과 추억들 사이에 병렬선의 대응이 없듯이, 사람들은 집적된(모여진) 세포들 속에서 생명의 형식적인 도약을 읽을 수 없다. 이것들은 서로서로 적합[충전되지]하지 못한 두 텍스트이다. 가치적인 자손에서 후손이 절차를 따라가는 모태적 충동을 하나하나 해석할 수 있다면 누가 주장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작업되어 있는 사물들 안에서처럼, 작자는 생겨나기 위하여 처음에만 작자이다. 기적을 행하는 자(마술사)는 자신이 그 기적의 원인이 된 기적에 대해 스스로 놀란다. 그 인간이 결심하고, 그리고 시간은 저 혼자서 흘러간다. 유기체화 한 의도에서 물질로, 그리고 중심에서 주변으로 내려가는 자, 그 자는 신체가 사용된 수단이 아니라 되돌려진 장애물을 표상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하듯이 언어는 그 언어가 표현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감추고 있고, 따라서 사유는 단어들 덕분에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들을 더욱더 반투명하게 하면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스타일(style 기교)”의 줄타기 곡예이다. 모든 것은 단순하고 자연적이 되는데, 그 때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것을 생명적으로 생각하는 때이고, 총체성에서 요소들로 보다 더 강력한 이유로(à plus forte raison) 나아가는 생명적 운동을 뒤따르는 때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기적적이고, 우연적이며, 암중모색이 되는데, 그 때는 사람들이 보다 더 미약한 이유로(à plus faible raison) 또 부분들의 조합에 의해서, 생명성의 놀라운 살아있는 구조들을 재구축하는 때이며, 그리고 살아있는 구조들뿐만 아니라 오히려 결정체의 대칭들, 눈송이의 육각형 문양들, 만화경의 장식적인 도형들을 재구축하는 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함장의 나이를 계산하는데, 이때는 사람들이 배의 속도만을 알아채고 있을 때이다. 이러한 것이 벩송이 왜 자주 경탄할만한 것에 대해, 아주 단순하고 자연적인 사물들처럼 말했는가 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텔레파시, 잔존, 세계의 다수성은 우리들에게 현기증을 일으키기를 그만두게 한다. - 자연에 대한 기적을 행하는 술수는 이번에는 그만한 상상에도 더 이상 충격을 주지 못하도다! - 자연은 봄철에 많은 수국들에게 초원에서 하나하나 뚫고 나오게 하지 않으며, 나무의 꽃들 하나하나 맺혀있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연은 근처의(près) 싹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규모면에서 속고 있는 구두쇠인데, 그는 잔돈을 셈하듯이 싹들의 목록과 일람표를 만든다. 왜냐하면 관대함의 보이지 않는 도약은 그 점에서 봄의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영웅적인 희생은 생명적인 앞으로 던짐의 도약과 시각에 맞게 행진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가장 단순한 작동이기 때문이다. 앞면(l’envers)에 속하는 철학을 위해 그것은 마셔야 할 바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뒷면의 철학을 위해 난점들은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 후자의 철학은 생명과 동일한 방향(sens 의미)에서 그리고 하물며(à fortiori) 시각에서 눈으로 가면서 중심으로부터 나가는 철학이다. 광증인 자(le maniaque 조증환자)가 하나하나씩 이해해나가는 셀 수 없이 많은 순간들의 연속성은 아주 자연스럽게 변이[돌연변이]에 이른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지성 안에는 열광하는 팽창의 원리와 무한정하게 높은 값 매기기의 원리가 있다. 이 원리는 의식의 빗금경사에 기인한다. 의식이 이중화 될 때, 의식의 순진무구함의 매끄러운 전면[이마]이 주름 잡히기 시작했을 때, 그 의식은 윤곽을 드러내려는 광기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한다. 현기증에 사로잡힌 의식은 그 자체 속에[제자기로] 스스로 멈추어야한다는 임의적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이것이 [음악에서] 푸가들과 대위법(le contrepoint)의 논법(le logos)인데, 이 논법은 자체의 다성음을 끝없이 두껍게 한다. 앞 다투어 자기 찌꺼기들을 복잡하게 하는 바로크식의 혼돈(l’imbroglio)은 자기 미로들을 뒤엉키게 하고, 자기가 제작했던 해결할 수 없는(inextricable) 전체 안으로 그 자신 스스로 되감긴다. 거듭제곱의 지수로 커가면서, 복잡화의 변증법적 속도로 전달된 과대망상의 의식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신은 알고 있도다! 이 의식의 주위에 사치의 팽창(le foisonnement)이 무게를 더하는 반면에, 그 의식자체는 항상 더 많이 미묘해지고(se subtiliser), 무게로는 잴 수 없으며 공기 같은 고도의 아이러니가 된다. 그 바깥에는 과도한 무게, [달성한] 기록들, 무기들을 갖추고 장식물들을 갖춘 추세(la course 조류)가 있고, 그 안에는 희박화[과정]이 있고, 극단적인 겉치례[허례의식]가 있다. 중심축(tropicale) 기술과 머리카락들을 넷으로 등분하는데, 여린 의식 사이에서 이 대조, 그것은 퇴폐의 정의(le définition) 자체가 아닌가? 괴물같은 마천루가 무너지기에 앞서서, 이 얇은 가죽으로 된 거상(居像)을 부푼 그 신체와 아주 작은 영혼을 가지고 소화불량으로(d’indigestion) 속을 파헤친 파국에 앞서 앙리 벩송은 지혜가 단순성의 정신이라고 예고한다. 레온 톨스토이(Léon Tolstoï, 1828-1910)처럼, 벩송은 우리를 회개(la pénitence)와 엄숙(l’austérité)에게 초대한다. [우리는] 기술들[기계문명]로부터 생겨난 사치를 속죄해야만 한다. 그리고 부인[부정]의 정신 속에서 빈곤함과 어리석음(la sobriété)을 씻어내는 길을 강요해야 한다... 개념들의 자동주의와 문명의 급성장하는 치장들, 이것들은 중복된 확장(la profusion)의 두 형식이다. 이러한 고려에서 소피즘은 안티-로고스가 아니라 오히려 연쇄추론(le sorite)이 그렇게 제시한 것과 같이 다혈질적인 로고스이며, 즉 열망에까지 밀고나간 선형의 추론, 또는 파스칼의 용어로 기하학적 연역이다. 정신적 에너지와 웃음은 광기로, 몽상으로, 또는 웃음거리로 넘치는 논리가 아닌가? 바벨탑과 제논의 파라독스, 이 해결할 수 없는 두 형식들은 순간의, 자유로운 행진의, 갑작스런 전환의 오해에 기인한다. 그리고 어떻게 고전[철학]들이 의식을 수사학의 메너리즘(일상화)으로부터 정화하였는가를 보세요. 이 메너리즘은 의식을 조심스러움(la sorbre)에로 전환하기 위하여 허접 쓰레기들, 기묘한 것들, 외설적인 것들(curiosa)로 의식을 채웠다(encombrait). 벩송은 고전적이다. 이는 싸구려 잡동사니들, 난잡한 글들, 중국식 문제들의 적이며, 결국에는 돌팔이들과 광대들의 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임수로 고전을 인식하고 있다고 여기는 광대들은 그에게[벩송] 문제들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문제들을 증발시켰다고 비난했다. 왜냐하면 지성은 자신의 수수께끼들과 점치기들을 - 악, 무, 자유재량 등등 - 쉽게 부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성은 적에게 이런 수수께끼들에 대해 자신의 유사-문제거리의 역할을 없애기를 원한다. 그런데 속이는 자의 특성은 즉석에서 인위적인 문제를 발명하면서 진실한 문제를 감추는 것이다. “우리는 먼지를 걷어내고, 그러고 나서 보지 않는다고 불평 한다.” 이로부터 제논의 소피즘(궤변론), 폴 랑즈방(Paul Langevin, 1872-1946)의 포탄을 탄 여행자, 그리고 다른 많은 상대주의적 역설들(paradoxes), 과장된 비유의 유토피아들, “불가능한 가정들”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 주위에, 엘레아학파와 메가라학파의 난문제(les apories)들 자체가 마치 공격할 수 없는 경기들처럼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부조리성들과 더불어 현기증에 빠지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벩송 그 자신은, 문제가 현존하지 않을 때, 그것을 제기하지 않아야한다고 단순하게 말했다. 페늘롱은 “모든 괴물들은 결코 실재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이 괴물들은 사라지게 하기 위하여, 의지적으로 기꺼이 이것들을 보지도, 이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결코 듣지도 않아야 한다. 이들이 사라지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단순한 무저항이 이 괴물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톨스토이에서처럼, 용서의 초자연적인 불의(l'injustice)에 의해서 악을 무장 해제시킬 필요도 없이(왜냐하면 악은 비현존이니까), 복음의 계명을 따르듯이 심지어는 적들을 사랑하는 것도 필요도 없고(왜냐하면 적이 없으니까), 결국에는 설득에 의해서 장애물을 되돌려 놓을 필요도 없다(왜냐하면 장애물이 없으니까). 단지 분석에 의하여 복잡함을 풀어헤쳐 놓는(débrouiller)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가 행해졌다. 즉 그는 수사학적이고 소피스트적인 환영들(les fantasmes)을 사라지게 했다. 누가 아는가? 만일 벩송이 다른 뺨(la joue)을 소란스럽게[문제거리로] 내미는 크리스트의 초대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열린 자애(charité, 사랑)의 이름으로 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또한 심술궂은 악의는 단지 오해와 복잡함일 뿐이기 때문이며, 폭력들은 단순한 불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들끓음”(la brouille)은 내적 친밀함 만큼이나 혼합이 아닌가? 긴장에 의해서나 모든 근육의 정념적 동의에 의해서가 아니며, 유혹에 동의하는 것을 아주 부드럽게 그만두면서 사람들이 유혹을 피하는 것처럼, 그처럼 나의 환영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내가 고행 속에 들어가서 환영들의 저항에 대항하는 것이 필수적이 아니다. 오히려 페늘롱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거기에는 어떤 포기가, 사람들이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서도 성공하는 유연하며 무차별적인 어떤 것이 필요하다. 아니 스스로 떨리는 것은 아무 쓸대 없고, 위축은 진실한 노력도 아니다. 사람들은 벩송이 우리들에게 부여했을 게으름 또는 사임(손 놓음)의 충고에 관하여 아마도 탄핵할 것이다. 사람들은 정당하게 용이함이란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지[알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습관들이 도치를 무시하는 체 한다. 또한 벩송의 정화제(la cathartique)로 토대를 만드는 근본적(급진적)개혁도 모른 체 한다. 단순성은 단순주의(le simplisme)이 아니다. 동일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기억의 심층[깊이]은 감각의 처녀성[신천지]만큼 어렵지 않다. 그리고 불편함은 관념연합들과 추억들을 사용하여 지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자료에서(le donné), 신선하고 재기발랄하고 청춘인 시각을 덮어버리는데 있다. 하플로시스(ἅπλωσις, simplification)는, 루소가 묵가적이고 기원적인 순진무구함에 회귀를 그에게 입히고자 한 그[에밀]자와 같은 역사적 의미도 더 이상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계통발생이라기보다 인격적 금욕에 있으며 그리고 바깥에서 사치의 과도한 짐을 가볍게 하거나 또는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의식의 내적이고 질적인 전환(개종)을 얻는데 있으며 또 의식 그 자체 바향을 바꾸는데 있다. 자, 이러한 것이 진실한 하플로스(ἁπλῶς haplôse)이다. 하플로스는 부정(négative)이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영혼의 정화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다: 벩송은 소위 말해서 모든 문제들이 오해들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치 달인으로 연주하기 위하여, 그리고 연주기법의 상상적 난점들이 기적적으로 토대를 이루기 위하여, 성령의 불의 말씀들이(les langue) 단순하게 피아노에 연합되어야 했듯이, 인간들에게 제시되었다고 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벙어리의 말씀들이 스스로 풀어져 나오기 위하여, 또 말씀들의 선물과 다국어로 표현한 달변이 [국가]민족들을 갑자기 생기 있게 하기 위하여, 이제 마술에 관해서도, 기적을 행하는 술수에 관해서도 고려하지 말고, 오히려 수고(labeur)에 관해서 고려하자. 왜냐하면 어떤 이도 대체할 수 없는 온사건(Evénement)을 피하지 못한다. 아킬레스가 질주하고... 그리고 문제는 현존하지 않는다.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그런데 그가 또한 질주해야만 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몽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진실로 말하자면 효과적이다[실현적이다]. 즉 그 자신이, 개체적 인격으로써 달렸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를 악물고, 눈썹을 휘날리며,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 필수적이 아니라(왜냐하면, 사람들이 땀을 흘리고 머리는 비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원하다’(vouloir)가 필요하며, 그리고 어느 것도 나의 자리에서 원할 수 없다. 원한다, 그리고 전투(싸움)를 결코 중단하지 않는다. 사직하는(손 놓는) 것도 떨림(신들림)도 아닌 착한 의지는, 마치 총체성에 의한 예지작용처럼, 단호한 결단(le fiat)에 의해 힘들여서 그리고 단번에 시작하고 그러고 나서 운동의 명증함으로 향해 부드럽게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이렇게 초기 결단이 부족한 이행에서, 즉 각성에서 잠으로 이행에서, 영혼이 잠들기 위하여 스스로 뻣뻣해지기를 그치기 때문에, 또 영혼이 몽상에 동의하기 때문에 그 영혼은 잠이 든다. 상기의 노력에서 덧없이 사라지는 단어가 아주 부드럽게 자발성에 맞추어 현재하게 된다. 이 자발성은 폭력과 강요에 의해서 이 단어를 강화하기를 거부하고, 또 이 자발성은 그 자체적으로 고유한 기억술이기 때문에 시작하여 끝내기에 이른다. 원하다를 원하는 것, 그것은 숨쉬는 것, 잠드는 것, 또는 현존하는 것보다 더 단순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그것을 현재로(현재형으로)잘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생각하곤 ‘해야만 하도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기 위하여 이미 정당하게 발견했어야만 했고, 따라서 해법[해결]은 질문 자체 속에 있었다. 마치 에드가 포(Edgar Poe, 1809–1849)의 “도둑맞은 편지”가 깊숙이 감춰진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탁자 위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정오의 태양보다 더 비밀스럽지 않은 수수께끼의 열쇠를 왜 그렇게 멀리서 찾을 수 있었는가를 자문한다. 그것은 어떻게 더 일찍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가? 플라톤이 정의에 대해 말하면서, 사냥거리는 우리 발밑에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 피에르 베추코프(Pierre Bézoukhov는 삶(la vie)을 꿈꾸면서, “얼마나 그러한 것이 단순하고 분명한가! 어떻게 나는 현재까지 그러한 것을 알 수 없었나?” 위독한 상태의 이반 일리치(Ivan Ilitch)는 베추코프가 삶에 관해 발견했던 것과 아주 똑같이 단순한 진리를 죽음에 관해서 발견했다. 일리치는 죽음은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 거기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발견 한다: 즉 “얼마나 그것이 선하며, 얼마나 그것이 단순하가!” 죽음의 자리에 거대한 빛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단순성의 부족, 자연적인 부족, 신뢰의 부족으로 그 많은 문제들을 복잡하게 하도다! 극도의 조심성으로부터 생겨난 난제들(les apories)을 단 한 번에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소하기 위하여 원한다는 것은 지각할 수 없는 변이[돌연변이(급변)]로 충분하도다! 예를 들어 성자들과 영웅들은 장애물을 경멸로서 취급하거나 또는 장애물이 현존하지 않는 것처럼 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드물다: 즉 성자들과 영웅들은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한다. 어려움들은? 그들은 이 어려움들조차 보지 않는다. 고통들, 적들, 결국 죽음은? 이러한 모든 것의 어느 것도 그들에게는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정량이 있고 등급이 있고 비례적인 헌신이 근면한 의무이라면, 무한한 희생과 총체적 자기헌신(l'abnégation)은, 마치 극한까지 이행들처럼, 어떠한 것에도 더 이상 값을 매기지 못한다. 타자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낮 인사(bon jour)와 밤 인사(bon soir)만큼이나 단순한 것이 된다. 그래요, 신비가는 단순한 것을 본다. 그리고 단순한 자들에게 모든 것은 단순하다. 심정(le mental)의 회고적 관점에서만 현존하는 대안들과 모순들은 마치 마법처럼 갑자기 토대를 만든다. 우리들의 곤경들은[황당함들은] 순간적으로 확신으로 바뀌고, 당신들의 장애물들은 이유들이 된다. 이것이 유사 난문제들에 대한 청산 또 용해(la liquéfaction)이며 우리들 영혼의 거대한 해방이고 그리고 어느 정도로는 엘레아학파의 거대한 얼음덩어리 속에 갇힌 우리들의 의지(vouloir)를 각성하게 하여 움직이게 하는 이른 봄날의 따뜻함이다. 아킬레스[엘라아 학파가 말하는], 뷔리당의 당나귀, 관점이 경직된 의식, 이 모든 것이 다리가 [얼었다가]녹여지고, 이들을 마비시켰던 무차별을 흔들어 놓고 있는, - 결국에는 디오도로스(Diodore, Διόδωρος, ?-전296)의 낡은 주술들을 몰아내는 - 이 모든 것을 보세요. 이것은 신적이고 아침의 단순성인데, 이 단순성은 그들에게 사지를 풀어 놓고, 우리가 그들에게서 보는 동작들을 그들에게 편안하게, 자연적이고 실수 없이 하게 한다. 가버나움(Capharnaüm, Kefar Naḥum)의 마비 환자에게 예수는 “일어나 걸어라(έγειρε και περιπατει"라고 말한다. 기적이 일어난, 다시 말하면 저주가 풀린 그 마비 환자는 아킬레스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누가 아는가? 그를 초라한 침대에 짱박아 놓았던 것이 아마도 엘레아학파의 소피즘(궤변론)이도다! 단순하게 스스로 일어나면서, 그는 자신의 질병이 현존하지 않는다고 공표한다. 예수는, 마치 죽음이 그 자체가 오해, 신념, 상상적 암시의 산물인 것처럼, 죽음들을 되살려 놓는다. 예수는 라자르(Lazare)의 팔과 다리를 속박하는 작은 띠들을 풀어놓기를 명령한다: “그를 풀어놓아라(Λύσατε αὐτόν)” 운동과 단순성의 우아함(그대로 됨)은 묶인 그 인간을, 복잡들 속에 구속된 그 인간을 갑작스레 움직이게 한다.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의식은 온불신과 온사랑을 따로 떼어 놓았던 하늘의 두께 전체를 주파한다. 거짓말은 첫 등급에서부터 시작하여 무한에 이르기까지 그것의 앙심들, 그것의 주름들(습관), 그것의 속임수들을 다양화 할 것이다. 이 반성적 퇴행에서 그 거짓말은 현기증이 난다. 그 거짓말은 광기가 되고, 마치 조심성(le scruple, 양심가책)처럼 진단할 수(만져질 수)없는 것이 된다. 벩송이 말한 대로, 거짓말쟁이와 축소면에서[환원에서] 동일한 현기증에 의해 미쳐버릴 지경이 된 의심자에 대해 보라. 그는 문을 닫고, 그러고 나서 그가 문을 닫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다시 또 한 번 그의 증명작업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는 무한정하게 주저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절대적으로 확실하기를 원하기 때문이고, 또 현재에 일치된 제일운동의 자발성 안에서가 아니라면 절대적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는 누스(νοῦς) 밖에, 이 첫째 누스를 생각하도록 책임진 둘째 누스를 인정한다는 관점에서, 그리고 바늘에 실 가듯이, 이 둘째 사유를 생각하기 위해 셋째 사유가(νοείν ὅτι νοεί ὅτι νοεί), 그리고 이처럼 아페이론(εἰς ἄπειρον)에까지 인정한다는 관점에서, 플로티노스는 부조리성(l'absurdité, ἀτοπον) 앞에서 정신을 차리고, 이중사유를 유일한 직관 속에(μιά προςβολή) 축약시킨다. 이중사유란 사유자체로 사유되는 사유와 지성적인 것을 사유하는 사유이다. 특히 신지적 사랑이, 이것만이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절대적으로 인간적인 진행보조를 갖출 것인데, 아이러니한 의식이 이 진행보조를 헛되이 제한하려든다. 왜냐하면 사랑의 영감들이 마음에 파고들기 때문이다. 만일 사랑이 처음부터 타고난 신지(그노시스)에 의해 아는 무엇을 연구와 정중함을 통하여 재발견해야 한다면, 그것은 라이프니츠가 말했듯이 “마셔야할 바다”일 것이다. 즐거운 잡동사니 작업에 의해 다윈의 방식으로 본능을 재구축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경우에서[어째거나] 그것이 행해야 할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랑은 사람들이 그것을 그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입을 열기에 앞서서 사랑은 이미 그것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순성이며, 거대하고 새 기운을 불어 넣는 단순성이며, 즉 놀이를 하면서 복잡하게(complexe) 엉킨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푸는 단순성이 아닌가: 아리아드네의 실, 천재적인 데달로스에 의해 건축된 미로의 꼬불꼬불한 굴곡을 관통하여 테세우스를 인도한 실, 그것은 사랑이다. 그러한 것이 기적적인 뜻밖의 발견물이다. 오류가능성 없는 사랑은 모든 복잡화 과정을 푼다. 그리고 거기에는 훨씬 더 나은 것이 있다. 자기 자신이 만든 미로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데달로스는 날개를 제작하여 공중으로 향해 줄을 풀어서, 깜짝 놀란 괴물들을 무시하고 날아오른다. 그는 자기 자신이 제작했던 인위적인 문제[미로]를 아주 단순하게 상공에서 내려다본다. 그는 일종의 “고르디아스의” 해법에 의해, 그 자신이 뒤섞어 엉키게 해놓았던 혼잡(l'imbroglio)을 제거한다. 이것이 탁월한 길(la via recta, 곧은 길)이 아닌가? 즉 직선이며 단순성의 길이 아닌가? “심장[애정]의 약혼자”는 현학자들이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고, 순진무구(innocence)라는 진실한 이름을 그에게 부여하는 것은 아마도 시간일 것이다.
“이점에서 단순한 어떤 것이, 무한히 단순한 어떤 것이 있으며, 아주 특별나게 단순한 것이어서 그 철학자는 그것을 말하는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가장 단순한 이 단순성은 처음에는 우리를 신중함(Sérieux, 성실함)에, 그러고 나서는 환희(la Joie)에 초대한다. 왜냐하면 “단순화”가 모든 사정들에 앞서서 “본질화” 또는 본질에로 환원이기 때문에 신중함에게 초대이다. 삶(인생)은 짧고, 지혜는 자질구레한 장식품들과 완곡한 어법들을 위한 시간이 없다. 단지 본질적인 것만이 있도다! 벩송은 고르기아스의 장황함에 반대하여 소크라테스의 편이 될 것이고 또 웅변술사(웅변가)들의 서두들, 요식 발언들, 완곡 표현들에 반대하여, 즉 그가 말한대로 언어인(homo loquax)에 반대하여 몰리에르의 편에 설 것이다. 군말 많은 정신에 반대하여, 그는 아름다운 건조체를 재현한다. 벩송은 형식적인 말싸움(la logomachie)들로부터 그리고 문법적 범주들로부터 삶(생명)을 순수하게 하기를 원했다. 문법적 범주들은, [비유로서] 지속의 집중된 알콜을, 즉 증류작용을 통해 [순수 엑기스를] 얻기 위하여, 삶을 혼란하게 한다. 그러한 본능은 서설도 없이 거짓 꾸밈도 없이, 정오를 14시에 찾지도 않고서 자기 목표에 똑바로 간다. 벩송주의는 무매개적 자료의 탐구이다. “운동에게 똑 바로 가자”고 벩송은 운동에 대해 말하고, “개입된 개념 없이 그것[운동]을 바라보자!”. 그리고 사람들은 페늘롱의 말을 이해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이처럼 당신의 길을 가시오(시작된 일이 순조롭게 되어간다). 당신들 앞에 가시오”. “착하게 자기 길을 가야 한다. 당신이 거기에 더 많이 보탠 모든 것은 과도하다. 그것은 신과 당신 사이에 구름을 형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엄격한 벌거숭이 체제, 즉 철학적 빈곤이다. 여기에 종교와 도덕의 두 원천이 우리를 끌어넣는다. 그것은 이상이 아닌가? 그 이상으로 향해 사티(Erik Satie, 1866-1925)와 쾌쉬랑((Charles Koechlin, 1867-1950)의 검소함과 포레(Gabriel Fauré 1845-1924)의 금욕주의 자체가 동시에 노력했다. “셈플리체(semplice, 장식음 없는 단순)”라고 포레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들 속에서 충고한다. 왜냐하면 걸작은, 마치 자연의 조작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진(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음표 없는 음악을 마치 영혼의 노래처럼 어떤 것이라 말할 것이다. 그 영혼은 자기의 최고 권한의 청빈함에서 피아노 소곡집(Pièces brèves)(8편)의 광상곡(Capriccio)을 부드럽게 노래하게 내버려 둔다. 이 곡에서는 매일 매일의 삶과 신적인 시의 기적만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마치 우리가 이 극단적 검소(절제)를 끝내기 위해 제시하는 것처럼, 재료 없는 금욕주의는 환희의 왕국에서 가장 유리한 상태에 있다. 이렇게 벩송의 환희, 패늘롱의 순수사랑, 가브리엘 포레의 밤의 거대한 평화는 - 즉 장송곡(Requiem), 열세날 밤들(Treize nocturnes), 이브의 노래(Chanson d'Eve)를 마치 시간들에 대한 기원의 하늘처럼 상연에 올려진 평화는 - 단순성의 평화로운 대양 안에서 재결합한다. 따라서 두 개의 단순성은 없고, 오히려 지식의 청빈과 지식의 순진무구가 함께 하는 단순성만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 단순성은 환희를 위한 다른 하나의 이름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환희 속에는 느끼는 것과 행위하는 것은 서로서로 반대하는 이유가 되기를 그친다. 우리가 원하는 철학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부여할 것이지만, 왜냐하면 결국에는 그 두 가지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행하는 것과 인식하는 것, 효과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은 하나가 된다. 플로티노스가 말한 대로 그래서 픙습들의 단순성과 사유들의 순수성은 하나를 이룬다. (49T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