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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바울, 로렌스와 파트모스의 요한(Nietzsche et Paulus, Lawrence et Jean de Patmos, 1978)」
질 들뢰즈와 파니 들뢰즈, 서문으로 in Apocalypse(Paris: Balland, 1978), pp. 7–37.
- Critique et clinique, Minuit, 1993, 제6장, pp. 50-70. 재수록
- D.H. Lawrence, Apocalypse, présentation de Gilles Deleuze, traduction nouvelle par Fanny Deleuze, Paris, Éditions Desjonquères, coll. "Littérature et idée", 2002. 198 p. 18 Euros Diffusion: PUF.
- [본명: 그랑주앙(Denise Paul « Fanny » Grandjouan, s.d.) 들뢰즈 부인(1956 결혼) 로렌스 번역가. - 파니 들뢰즈(Fanny Deleuz, s.d.)는 들뢰즈의 부인으로 로렌스 영어번역가이며, 1978년 로렌스의 Apocalypse를 번역했다. 그 서문을 들뢰즈가 썼다.] / [들뢰즈 부인과 같이 서문을 썼는지 들뢰즈 혼자 썼는지?]
-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의 수필 Apocalypse, 1931(essai).
이 제목의 대구는 의미 심장하다. 니체가 바울을 유대교 사제 비판하듯이, 크리스트교의 성직자가 하는 상층을 실재화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런 내용은 니체와 철학에서 분석하면서 길게 비판하였다. 들뢰즈의 표현으로 칸트의 비판을 비판할 때 망치로 두드려깨듯이 부셔버렸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 들뢰즈가 로렌스의 묵시록(Apocalypse)을 빌어서 이 책의 번역문 서문에서 비슷한 비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묵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과 달리 파트모스 섬의 요한이며, 이 후자의 요한은 다른 인물일 것이라고 한다. 로렌스에 의하면 사도 요한의 복음서와 요한의 묵시록은 내용이 너무나 차히가 있고, 또한 두 글이 전혀 다른 문체와 내용을 지니고 있으며, 게다라 묵시록은 문장이 잘 짜여진 즉 희랍어를 잘 아는 자가 썼다고 주장할 정도이다. 들뢰즈는 이 두 글이 그리스도의 이중 의미에서 종교적 측면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확장하여 공동체와 그 변혁에 적용해보면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52SLI)
판단(jugement)은 학문에서 지식의 확장을 위한 방편이며, 현실의 관습적 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판단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면, 종교적으로 ‘최후의 심판’과 같이 된다. 이 판단이 아닌 심판은 일반적으로 선량한 자들이 영원히 살아남을 것으로 여긴다. 그것은 그들의 위안이고 가식이다. 영원성에 기대는 심판은 착각이 기만이다. 물론 이 심판의 역할과 효능은 삶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일 수 있지만, 죽음과 저세상에 빗대어 심판한다는 것은 에피쿠로스 학파가 사기라고 했고, 스토아 학파는 무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삶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다른 방식이 있어야 종교적인 허무주의 극복에 대한 대립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토지위에서 숙명에 따라서 살아라라고 하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는가? 심층에서 표면으로 올라오는 사유와 활동은 그렇게 살아라라고 한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은 그 표면의 현상에서 삶은 참담하고 비참하며, 지배자들의 야만과 폭력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문제거리이다. 종교가 허무주의를 심판을 통해 극복하는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 간단하고 확실하게 보인다. 심층에서 현실을 인정하는 삶은 간단하지도 않고 또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소수의 철학자들은 이 후자에 대해 담론을 남기고 그 담로에 주목하는 것일까? 표면의 현실에서 공동체의 삶이 딱 잘라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교환일까 보시(넘쳐나 주기)일까? (52S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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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장 「니체와 바울로, 로렌스와 파트모스의 요한(Nietzsche et Paulus, Lawrence et Jean de Patmos, 1978)」
복음서(un evangile) 한 권과 「묵시록(l’Apocalypse)」을 쓴 저자가 동일한 요한(사도 요한)인지를 묻는 사람들이 벌이고 있는 현학적 토론에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가 끼어들어 ‘동일한 요한이 아니며, 동일한 요한일 수도 없습니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50, 번71)
문제는 두 개인, 두 저자의 문제가 아니라 두 인간 유형, 즉 영혼의 두 영역, 전혀 서로 다른 두 총체의 문제인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귀족적이고 개인적이며, 부드럽고 사랑 가득하며 퇴폐적이고, 아주 교양있는 것이기도 하다. 「요한 묵시록」은 집단적이고 대중적이며, 교양이 없으며, 증오가 가득하며 야만적이다. (50, 71)
파트모스의 요한은 우주적 공포와 죽음 속에서 작업하는 반면, 「복음서(l’Evangile)」와 크리스트는 인간적이고 영적인 사랑을 부추긴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종교(믿음이 아니라 삶의 방법과 실천)를 발명했으며, 「묵시록」은 권력의 종교를, 즉 믿음과 심판하는 무서운 방식을 가져왔다. 한마디로 「묵시록」은 신의 선물(le don, 보시)이라기보다 무한한 부채(une dette infinie)인 셈이다. (50-51, 72)
「묵시록」이란 텍스트를 읽어나 다시 읽고 나서 로렌스의 텍스트를 읽는 게 더 낫다는 것은 당연하다. ... 「묵시록」, 이것은 좀비들(les Zombis)의 책이다. (51, 72)
로렌스는 니체에 아주 가깝다. 우리는 로렌스가 니체(Nietzsche, 1844-1900)의 안티크리스트가 없었더라면 자신의 텍스트를 쓰지는 못했을 거라 상정해 볼 수 있다. 반 그리스트적 입장을 취한 건 니체가 처음은 아니다. 스피노자도 그랬다. 몇몇 “통찰자(visionnaires)”들은 사랑하는 인격으로서 크리스트와 예수와 장례회사로서 크리스트교를 대립시켰다. .. 니체에서 중요한 대립은 크리스트와 성 바울(saint Paul 8경-67경)의 대립이다. (51, 72)
부드럽고 자애로운 그리스트는 일종의 부타이다. ... 바울은 앞선 자들[사도들]보다 훨씬 더 가혹한 새로운 유형의 사제를 만들어 냈다. “성직 독재[폭군제]의 기법, 집회의 기법, 즉 [영혼]불멸의 신앙과 최후의 심판의 학설(교리)(la doctrine du jugement)”을 만들어냈다. (51, 73)
로렌스는 다시 대립시킨다. 이번에는 크리스트와 묵시록의 저자이며 격한 성격의 파트모스의 요한을 대립시킨다. .. 로렌스는 성 바울이 아니라 파트모스의 요한을 표적을 삼으면서 니체의 시도를 다시 시작한다. (51-52, 73)
크리스트의 기획은 개인적이다. 그 개인은 자체로서는 집단성과 그리 대립되지 않는다. (52, 73)
“.... 이런 관점에서 크리스트[예수]는 자기 사도들과 제자들을 끊임없이 실망시켰다고 볼 수 있다. 크리스트는 고의로 그랬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크리스트는 주인이 되길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제자들을 도와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단지 그들을 사랑하고 했다. 그 사랑이라는 말 속에 감춰진 숨은 의미는 무엇일까?” “...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는 자기 제자들과 사도들에게 극도의 의아심(intrigués)을 품게 했다.” .. 그리고 로렌스는 크리스트교의 중심인물, 그는 유다(Judas)이다. 그리고 파트모스의 요한, 그리고 성 바울이다.(52, 74-75)
집단적 영혼이 원하는 바는 권력(le Pouvoir)이다. 로렌스는 단순한 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즉시 이해했다고 믿는 것은 잘 못이리라. (53, 76).
집단권력은 한편으로는 권력의 파괴를 원하며, 권력과 권능을 증오한다. 파트모스의 요한은 케사르와 로마제국을 철저히 증오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집단적 영혼은 코스모폴리탄[범세계적] 권력(un pouvoir conmotoplitan)을 원한다. (53, 76) [집단 권력의 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의, 묵시록 요한의, 바울의) 집단적 영혼은 위계적이고 초코드화된 권력과 권능을 파괴하고, 세계 시민적이고 노마드같은 권력을 원하며 인민들 속속들이 파고 들기를 원한다. 즉 이 집단영혼은 최후의 심판으로 저세상을 지배하기보다 현실적이고 실재적인 세상에서 지배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집단적 영혼의 계획[기획]을 위해서 유대 성직자에 대해 등 돌릴 것을 무릅쓰고라도 새로운 성직자 종족, 새로운 유형의 성직자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유대 성직자는 보편성도 궁극성도 아직 없었다. 유대 성직자는 너무 지역적이어서 아직 어떤 무엇을 기다려야 했다. 크리스트교 성직자는 유대 성직자와 연결되어 있으면서, 이 둘은 또한 크리스트와는 등 돌리게 되더라도 말이다. (54, 77) [유대교 사제, 묵시록 요한, 바울, 크리스트교 사제 등으로 이어지는 보편화 또는 절대화 과정에서 이 성직자 자신들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평등과 자유의 크리스트’를 배제하고, 크리스트를 부활과 심판의 기능으로 불러오게 된다. 장례회사가 된다. - 이런 관점이 로렌스의 관점이다. 니체보다 한 발 더 나간 것으로 보인다. - 들뢰즈의 이 글(1978)이 바디우(Alain Badiou, 1937-)의 「들뢰즈: 존재의 함성(Deleuze. La clameur de l'Être, 1997)」와 「바울 보편성의 정초(Saint Paul. La fondation de l'universalisme, 1997)」에 대한 반박문이 될 수 있겠다. 바디우는 이 글을 알고 들뢰즈에 비판과 바울을 쓰게 되었을까? - 이 논문 번역을 잘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52SLJ)] [박홍규도 보편성 개념의 획일성을 비판하면서 하나(uni)로 향하여(ver)인데 로마로 향하여 라는 의미이기에 철학적이지 못하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인공대체물들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을 크리스트에게 감당하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크리스트로 집단적 영혼의 영웅을 만들 것이며, 사람들은 크리스트가 결코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을 크리스트에게 시켜서 집단적 영혼에게 되돌려 주게 할 것이다. 오히려 크리스트교는 크리스트에게 그가 항상 증오했던 것을, 집단적 온자아(Moi collectif)[상층 자기(Soi)], 집단적인 영혼(une âme collective)을 주려고 할 것이다. 「묵시록」은 크리스트에 접목된 괴물스런 자아이다. (54, 77) - [성직자들이 장사꾼이 되어서 이익(잉여, 죽은 자의 재산)을 먹고, 크리스트는 장바닥의 곰으로 만들었다. 이미 그는 죽었다(니체). 들뢰즈에게서 크리스트는 부타와 같은 평등주의자, 즉 노마드이다. 예수가 부타의 이야기를 듣고 안듣고 문제가 아니라, 위계사회에서 평등주의는 어느 시대에도 등장한다. 프랑스 대혁명이 끝나고 반혁명이 피를 몰고올 때 바뵈프도 평등주의이다.]
심판하지도 않았고, 심판하기를 원하지도 않았던 크리스트, 사람들은 그를 가지고 심판의 체계에서 본질적인 톱니바퀴로 만들었다. ... 「묵시록」이 승리했다. (55, 78) [사람들이란 성직자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묵시록」이 취하고 있는 방법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유대인들은 시간의 질서 속에서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을 발명했었는데, 그것은 지연된 운명(le destin différé)이었다. 선택된 인민[민족]은 자신의 제국적[정주적] 야망 속에서 좌초했으며, 기다리기 시작했었고, 기다렸고, 그 인민은 “지연된 운명의 인민(le peuple du destin différé)”이 되었다. (55, 78)
그러나 「묵시록」 속에 있는 새로운 것, 그것은 기다림(l’attente)이 전례없이 광적인 프로그램작업(une programation maniaque)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묵시록」은 아마도 큰 구경거리가 될 최초의 큰 프로그램작업-책(야전 교범)이 될 것이다. .. 일곱 봉인, 일곱나팔, 일곱성배, 제1부활, 밀레니엄, 제2부활, 이것들은 기다림을 충족시키고 기다림에 몰두하게 하는 것이다. 일종의 의 미친-베르제르(Floie-Bergère)[환락가]이다. (55, 78-79)
기다림 속에서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것은 복수의 정신(l’esprit de vengence, 복수심)이다. (복수는 요리(un plat)인데, 그 요리는 …)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독차지해야] 한다. ... 일곱째 봉인이 열리기까지는 30분의 작은 기다림, 1000년 동안의 큰 기다림. (56, 79)
지연된 운명은 크리스트교와 더불어 방향을(changer de sens)바꾼다. 왜냐하면 지연된 운명은 이제 이상 지연되어 있지 않고, 다만 미루어져 있을 따름이며, 죽음 이후에(après) 놓여 있으며, 크리스트의 죽음과 각자의 죽음 이후에 놓여 있다. (56, 80)
“내가 죽 봐오나니....” “내가 [이미] 보았느니..” 묵시록적 비전(la vision)은 예언적 말씀(la parole)을 대신하며, 프로그램 작업(la programmation)은 계획(le projet)과 행동을 대신하며, 환상들이란 연극(un théâtre de fantasmes) 전체는 예언자들의 행동을 이어가는 데 마치 크리스트의 수난처럼 이어간다. 환상들은 즉 환상들이라는 복수 본능의 표현은 약한 자들의 복수의 무기이다. 「묵시록」은 예언주의와 단절한다. (57, 80)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시록」은 유대교의 바탕을 매번 제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그러나 「묵시록」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들은 우회로 된 이교도의 바탕의 현전과 재활성화(la réactivation)이다. (57, 81) [전자에서는 유비(allégorie)를 바탕으로 삼고, 후자에서는 (점성술과 제국주의, 전제군주 등의) 혼합양식의 책과 같다. ]
로렌스는 혼합된 책의 두 종류, 오히려 두 극으로 구별한다. 외연적으로 그 책은 [축의 요소나 작가와 다른..] 여러 요소들, 다른 작가들, 다른 장소들, 다른 전통들이 취합하고 있다. 그런데 심층적[깊이]으로는 그 책이 여러 층들을 걸터앉았고, 이 층들을 가로지르고, 이 층들을 요구에 맞게 뒤섞고, 보다 최근의 층 속에 기층(하부층)을 노출하게 하며, 여론 조사-책이지 혼합적 책([livre-] syncrèse)이 아니다. .. (로렌스는 유명한 「묵시록」 제7장의 예를 분석한다. 거기서 신성한 탄생에 대한 이교적 별 같은 성모(la Mère astrale)와 거대한 빨간 용(龍)과 더불어 크리스트의 탄생의 빈 공간[빈 이야기]을 가득 채운다.) (57, 81)
“다윗 이루의 시대를 산 유대인들에게는 자기만의 고유한 눈이 없었다. 그들은 눈이 멀 때까지 자기들의 여호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기네 이웃 사람들의 눈으로 천지를 바라보았다. 예언자들(les prophètes)이 비전을 가져야만 했을 때, 그 비전들은 칼데아적(chaldéennes)이거나 아시리아적(assyriennes)인 것이어야 했다. 예언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들만의 고유한 신을 보기 위하여 여러 다른 신들을 빌렸던 것이다.” 새로운 말씀의 인간들은 이교도적인 늙은 눈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정말로 예언자들 속에 나타나는 것은 이미 묵시록적 요소들이다. 에제키엘(Ézéchiel)은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e, Ἀναξίμανδρος 기원전 610-546)의 구멍 뚫린 바퀴들(des roues trouées)을 필요로 한다(“에제키엘에서 아낙시만드로스의 바퀴들을 발견하는 것은 커다란 위안인 것이다‥…”) (58, 82)
파트모스의 요한은 예수(Jusus)도 복음서들도 매우 잘 못 인식하고 있었고, 거의 알고 있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묵시록 요한]는 [예수의] 상징들에 대한 이교도적 가치에 관하여 오래동안 알았으며, 그 가치가 유대인의 가치와도 크리스트교의 가치와는 다르다고 여긴다.” (58, 82)
자, 로렌스는 「묵시록」에 대한 자신의 모든 공포와 더불어, 그 공포을 통하여 어렴풋한 공감을 체험하고, 심지어는 이 책에 대한 일종의 경탄을 느낀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냐하면 이 책은 침전적(sédimentaire)이고 중층적으로 되어(stratifié)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니체에게도 자신이 공포스럽고 역겹게 느꼈던 그 무엇에서 이 특별한 홀림(마력) 체험하기에 이르렀다. 니체가 “(홀림) 그처럼 흥미 있지”라고 말한다. (58 82) [묵시록은 공포스럽지만 홀리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성 바울은 아직도 귀적이다. 그는 예수(Jésus)의 방식으로 전혀 살지 않고, 다른 유형의 귀족이며, 너무나 교양이 깊어서 침전물을 인정할 수 없고 지우거나 억제할 수도 없다. .. 성 바울은 이교도 바탕에는 어떤 검열의 치료를, 유대교적 바탕에는 어떤 선택의 치료를 감당하게 했도다! (59, 83)
반면에 파트모스의 요한은 인민 출신의 인간이다. 그는 교양없는 일종의 소수의 골족(gallois, 갈리아(59, 83) [여기서 소수 골족이란 비유는 로마인이 아닌 변방족이란 의미이며, 묵시록의 저자도 그런 변방인일 것이라는 로렌스의 추론이다.]
이런 종족들[이교도들]에게 있어서 자연적 우두머리(chef naturel)는 사도 요한도 아니고 성 바울도 아니며, 파트모스의 요한이다. 그들은 크리스트교의 집단적이고 대중적인 영혼인 반면에, 성 바울(그리고 레닌도 마찬가지, 로렌스가 말할 것이다)은 아직도 인민에게 다가가는 귀족이다. (59, 84) [묵시록은 쓴 자는 이교도들의 방식으로 위계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예수의 고유한 활동처럼 평등을 심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 평등주의의 분배가 노마드 분배이다.]
묵시록(l’Apocalypse)은 거대한 기계실이며, 이미 산업적 조직체(une organisation déjà industrielle), 즉 거대도시(Métropolis)이다. 로렌스는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파트모스 요한을 하급 영국인으로, 「묵시록」을 광부(le mineur, 소수자)의 집에 걸려 있는 일련의 판화로 간주하며, 민중적이고 굳건하며 가차없이 경건한 얼굴의 거울(le miroir)로 간주한다. ... 성 바울은 궁극적 사무총장(le directeur)임에 비해서, 파트모스 요한은 노동자이며, 마지막 시간의 가혹한 노동자이다. 회사 사장은 금지하고, 검열하고, 선별해야만 하는 반면에, 노동자는 재료(la matière)를 망치로 두드리고, 펴서 늘이고, 압착하고, 재손질해야만 한다…. (59, 84)
하지만 로렌스는 파트모스의 요한에 대한 자신의 경멸(son mépris, 무시)과 두려움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이교도 세계의 이러한 재활성화(la réactivation)는 「묵시록」에서 가금 감동적이고 장엄하기까지 때문이다. (60, 85)
사람들은 파트모스의 요한이 이교(le paganisme)를 증오한다고 발할 수 없다. ... 그의 적은 이교도가 아니라 로마제국이다. ... 그러나 그는 로마제국의 몰락을 통찰로(en visio) 확신하기 위하여, 우주 전체(le Cosmos entier) 다시 짜 맞추고, 수집하고 되살려야 하고, 그 자신이 그것[우주전체]을 파괴해야 하며, 그 잔해들 아래에다가 로마제국을 끌어다가 파묻을 수 있기 위해서 이다. (60, 85)
로렌스는 우주(le cosmos)를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생명적인 큰 상징들의 장소(le lieu)이자, 살아있는 연결들의 장소이며, 즉 인격적 생명보다 더 많은 생명이다. (60, 84-85)
유대인들과 크리스트교인들은 상징들(les symboles) 대신에 알레고리(l’allégorie)를 대체할 것이다. 그리고 이교도의 세계는 어쨌거나 여전히 살아있으며, 우리의 밑바탕에서 권능을 가지고(avec puissance) 살아갈 것이다. (60, 86) [상징과 알레고리의 각각에 대한 설명은 뒤에 나올 것이다.]
이교도들이 세계에 대해 말하곤 할 때, 그들에게 흥미를 끄는 것은 항상 시초들(les commencements)이었고, 그리고 한 순환(un cycle)에서 다른 순환으로 도약들(les sauts)이다. ... 이교도들과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줄 곧 파괴에 대해 말했을 때, 그들은 거기서 한 요소가 다른 요소에 넘치는 과잉에서 오는 불의(injustice)를 항상 보는데, 불의는 무엇보다 파괴자(le destructeur)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은 파괴(le destruction)를 정의(juste)라 부른다. (61, 86) [부정되었던 것이 긍정로 여기는, 즉 영원회귀에서 새로운 생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히틀러와 안테크리스트 사이에 아마도 많은 유사점이 있지는 않지만, 새로운 예루살렘과 미래 사이에는 거꾸로 유사점이 많다. 여기서 미래란 사람들이 우리에게 허락한 것이며, 단지 공상과학에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 세계 국가의 군수산업의 팽창에서 허락하는 것이다. 「묵시록」은 강제 수용소(안테크리스트)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군사,정치,시민의 거대한 안전보장(la grande sécurité)이다(새로운 예루살렘). 「묵시록」의 현대성은 예고된 파국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찬양의 프로그램이며, 새로운 예루살렘의 영광스런 제도, 궁극적, 심판, 도덕적 권력의 망상적 창설(l’instauration démente)에 있다. (61, 87)
어린 양은 14만 4천명을 표시할 것이다. (61, 87)
“그리고 그 도시(la ville, [새로운 예루살렘])에는 그 도시를 비출 태양도 달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더렵혀진 것은 어느 것도 거기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며, 어린 양의 삶에 대한 책 안에 기입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dans le lives de la vie de l’Agneau)” 본의 아니게 「묵시록」은 적어도 가장 무서운 것이 안테크리스트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그 새로운 도심(cette nouvelle cité)이라는 것을, “자기 약혼남을 위해 꾸미는 약혼녀처럼 준비한” 성스런 도시이라는 것을 믿게 한다. (62, 87-88)
로렌스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들f(pages) 중에는, 이교도 세계의 재활성화에 관한 대목들이 있지만, 그러나 생명적 상징들이 충분히 퇴폐적이고 또 그것들의 모든 살아있는 연결들이 잘려진 체 있는 그러한 조건들에서이다. 니체는 “가장 큰 변조(la plus grosse falsification, 날조)라고 말하곤 했다. 로렌스가 「묵시록」에서 퇴폐와 날조의 정확한 주제를 분석할 때, 로렌스의 힘이 있다[능력이 돋보인다]. (62, 88)
1. 지옥의 변형(La formation de l’enfer):
정확히 말해서 이교도들에게 있어서 지옥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 “셰올(Sheol)과 게엔(Géhenne)등 옛날 유대교에서 나오는 지옥들은 비교적 안온한 장소였으며, 어느 면에서는 불편한 하데스(Hadès) 정도였다. 하지만 그 지옥들은 새로운 예루살렘과 더불어 사라졌고.” “자연적으로(par nature) 작열하는 유황의 못[구덩이]로” 이용되었다. 이 구덩이에서 영혼들은 영원히 불탄다. (62, 88-89) [한마디로 [「묵시록」은 전래된 지옥의 개념을 무서운 지옥으로 변조했다. 파라디가 아니다.]
2. 기사들의 변형(La formation des chevaliers): [내용은 말(馬, cheval)이다.]
진정한 이교도의 말(馬, cheval)이 무엇인지, .. 를 밝히고자 하는 것, ... 하지만 크리스트교와 더불어 말은 이제 사람들이 흔히 “가자(viens!)“라고 말하는 짐꾼(un porteur)일 뿐이고, 그 말은 추상작업들을 운반한다. (63, 89)
3. 색깔들과 용의 변형 (La formation des couleurs et du dragon)
로렌스는 색깔들이 자아내는 아주 아름다운 생성, 변화를 전개한다. 왜냐하면 가장 오랜 용은 빨강색이거나 빨강-황금색이며, 우주 속에 나선형으로 펼쳐지거나 또는 인간의 척추에 감겨져 있다. (63, 89)
빨강색은 인간에게는 위험한 것이 되었다(로렌스는 각혈의 와주에 글을 썼다는 것을 잊지 말 것). 하지만 결국 용은 하얀색으로, 색깔없는 하얀색, 우리 로고스의 더러운 흰색, 일종의 굵은 회생 애벌레로 변한다. (63 89) 읻
4. 여성의 변형(La formation des couleurs et du dragon)
묵시록은 여전히 그녀의 발아래 해와 달로 잘 포장된 우주의 위대한 어머니에게 덧없는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은 그녀로부터 떼어져 “신에게로 올라갔다”. 그녀는 사막으로 보내졌고, 거기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바빌론의 창녀란 전도된 형식으로만 다시 돌아올 뿐이다. (63, 90)
5. 쌍둥이의 변형(La formation des jumeaux)
그리고 이교도 세계는 생생한 결합(de conjonctions vivantes)으로 만들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 쌍둥이는 정확히 말해서 차단기(de disjoncteurs)의 역할을 한다. 쌍둥이는 바람과 비의 지배자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의 문들을 열기 때문이다. 쌍둥이는 천둥의 아들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구름들을 쪼개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정관심의 문지기들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벌어짐을 유지하며 거기에 탄생이 우여곡절이 있으며, 그들은 모든 것이 무제한으로 뒤섞일 수 있을 치명적인 점을 피하면서 물과 피를ㄹ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64, 90)
6. 상징이 메타포와 알레고리로 변형(La formation des symboles en métaphores et allégories)
상징은 구체적이고 우주적 권능(puissance)이다. 민중적 의식은 묵시록은 거친 권력(le Pouvoir brut)을 찬양하면서 상징의 어떤 의미를 간직한다. (64, 91)
로렌스는 상징의 몇 가지 특성들을 차례로 묘사한다. 그것은 감각 가능한 의식의 확장, 심화, 증대를 위한 역동적 방법이다. 그것은 알레고리적 고정관념에 관한 도덕적 의식의 닫힘과는 대립되는 점점더 의식적인 생성, 변화이기도 하다. 그것은 감각작용의 오로지 문턱을 표시하고 또 의식 상태의 각성을 표시하는 강도있는 감화(Affect)의 방법이며 누적적인 강도성이다: 즉 상징은 아무 것도 말하려 하지 않고, 상징은 알레고리의 지성적 의식과 반대로, 설명하지도 해석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공전하는 사유(une pensée rotative)이다. 이 사유에서 한 무리의 이미지들이 불가사의한 점의 주위에 점점 더 빨리 도는데 알레고리의 선형적 연쇄와는 대립된다.(64-65, 91)
“처음에는 네 발로, 그 다음에는 두 발로, 마지막에는 세 발로 걸어가는 건 무엇인가” (65, 91) [상징은 대상들이 있다. 네발에는 어린이와 짐승들, 두발에는 원숭이과 새, 세발달린 이미지는 사막과 바다 저편에 있는 대상들이다. 이들의 무리들이 하나로 집결되어 뭉쳐져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일생이 나온다]
그 상징은 마침표도 단계도 없다. 그것은 항상 한가운데에, 사물들의 한 가운데에, 사물들 사이에 있다. 그것은 중간 만이, 점점 깊어가는 중간만이 있다. 상징은 일종의 소용돌이(un maelström)이다. 상징은 해결이나 결정이 나오는 강렬한 상황을 생산할 때까지 우리를 맴돌게 한다. 상징은 행동과 결정의 과정이다. (65, 92)
이것은 우리의 알레고리 사고와는 정반대이다. 우리의 알레고리적 사고는 능동적 사유가 아니라 쉴새없이 다시 시작하는 연기하는(différer) 사고이다. 그 알레고리적 사고는 우리의 결심 권능(la puissance de décision)을 심판 권력(le pouvoir du jugement)으로 바꾸었다. (65, 92) [싱징은 이성의 결심이고 그 권능이며, 알레고리(메타퍼)는 지성의 판단이고 권력화한다.]
알레고리는 시각적(visuelle)이다. 반면 상징은 다른 모든 감각들을 불러들여서 결합한다. 책이 아직 두루마리일 때, 아마도 상징의 권능을 간직한다. (65, 92)
[이상으로 보아 여기서 상징은 기표로서 상징이 아니라 기의 쪽이며, 의미로서보다 기호작용이다. 게다가 표현들 사이에 또는 안에 있는 내용이지 표현 형식이 아니다. 두루마리로서 뭉쳐져 있는 것이지 펼쳐서 병치되어 셀 수 있는 것이다. 다발이지 나열된 것들이 아니다. (52SMF)]
상징은 알레고리적 사고의 지적이고 선형적인 과정과는 반대로 흐름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66, 93) [알레고리 사고는 톨이고 상징의 사유는 결이다. 즉 홈패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의 차이와 닮았다.]
이교도 세계의 출구(Exit). 「묵시록」은 이교 세계를 마지막으로 들어 올려서 영원히 그것을 파괴한다. 우리는 다른 축으로 되돌아온다: 「묵시록」과 이교도 세상의 대립이 아니라, 아주 다른 「묵시록」과 인격인 한에서 크리스트와 대립이다. 크리스트는 사랑의 종교를, 말하자면 영혼의 개인적 부분으로 된 귀족적 문화를 발명한다. 「묵시록」은 권력의 종교를, 다시 말하면 영혼의 집단적 부분을 지닌 무서운 대중적 문화를 만든다. (66, 93)
복음서를 쓴 자와 「묵시록」을 쓴 자는 동일한 요한이 아니다. .. 즉 “한 메달의 두 양면”인 셈이다. (66, 93)
이러한 상보성(cette complémentarité)을 설명하기 위해서, 크리스트는 집단적 영혼을 “자신이 직접” 무시했으며, 그 집단적 영혼에 자유로운 장을 남겨주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66, 94)
크리스트가 생각했던 방법은 그 정도로 지족한 것이다. 크리스트의 사랑 안에는 추상적인, 아니 더 나쁜 일체화, 아낌없이 주려는 열망(une ardeur de donner sans rien prendre)이 있다. 크리스트는 자기 제자들의 기대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자기 자신의 불가침의 부분마저도 지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뭔가 자살적인 것을 지니고 있었다. 로렌스는 「묵시록」에 관한 자신의 텍스트가 나오기 직전 죽은 사나이(L’homme qui était mort)라는 작품을 썼다. (67, 94)
자기 작품 전체 속에서 로렌스는 이런 임무를 수행했다: 즉 주지 않고 가지거나 또는 아니면 갖지 않고 주는 사람들에게서, 즉 파트모스의 요한과 크리스트에게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나쁜 희미한 빛을 예측하고 추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트, 성 바울, 파트모스의 요한 사이에는 고리가 묶여있다. 즉 귀족이자 개인적 영혼의 예술가인 크리스트는 이러한 영혼을 주고 싶어한다. 노동자이자 부차적 인물인 파트모스의 요한은 집단적 영혼을 요구하며 모든 걸 갖고 싶어 한다. 민중을 향해 나아가는 일종의 귀족이며, 집단적 영혼에 어떤 조직을 부여하고 싶어하는 일종의 레닌인 성 바울은 연결을 닫기 위해 “순교자들의 과두정”을 행할 것이다. 성 바울은 크리스트에게 목표들(les buts)를 「묵시록」에게는 수단들(des moyens)을 줄 것이다. (67, 95)
그러면 개인 영혼 뿐만 아니라, 집단적 영혼을 어떻게 원할 것인가? 니체는 크리스트교에 반대하는 그의 유명한 법(la Loi)에 의하여 안테크리스트를 끝맺는다. 로렌스는 일종의 선언으로 「묵시록」을 끝맺는다. 이 선언을 그는 다른 곳에서 “격려의 지루한 반복, 열거(litanie d’exhortations)”라고 부른다. (68, 95)
이처럼 자기 자신이 개인적 부분을 구원하기. 왜냐하면 사랑은 개인적 부분이 아니며, 사랑은 개인적 영혼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랑은 개인적 영혼으로 어떤 자아(un Moi)를 만드는 것이다. .. 자아란 알레고리, 이미지, 주체(un Sujet)이다. 자아(le moi)는 관계가 아니다. 자아는 반영이다. (68, 96)
성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실상 비슷하지만, 이것들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고자 하지 않았다: 힘들의 삶 또는 흐름의 삶. 자아 속에는 무화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 무화 경향은 크리스트 속에 경사(une pente)를 발견하는 것이고 불교 속에서는 도래(une arrivée)를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방에 견주어서 로렌스의 불신(또는 니체의 불신)이 나온다. (69, 96)
흐름의 삶으로서 영혼은 삶의 의지(vouloir-vivre)이자 투쟁(lutte)이며 전투(combat)이다. 그것[영혼]은 투쟁과 전투라는 흐름들의 선언(la disjonction)일 뿐만 아니라 결합(conjonction), 즉 유대이기도 하다. 모든 일치는 부조화(dissonant)이다. [/] 전쟁(la guerre)의 반대: 전쟁은 자아의 참여를 요구하는 총체적 소멸이다. 하지만 전투는 전쟁을 거부한다. 전투는 영혼의 정복이다. 영혼은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을 단호히 거부한다. (69, 96-97) 영혼은 전투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투와 전쟁을, 다시 말해 전투적인 크리스트교와 평화주의가 크리스트를 혼동가기 때문이다. (69, 97)
그러므로 집단적 문제는 최대한의 결합을 만들어 내거나 찾거나 재발견하는 것이다. .. 우리는 기껏해야 관계의 “논리”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로렌스와 러셀은 전혀 서로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는 분리로 “아니면, 아니면(ou bien, ou bien)” 같은 것을 만든다. (69, 97) .
천재성의 지닌 사람들처럼 로렌스는 자기의 머리띠들(les bandelettes)을 정성스럽게 접어서, 그것들을 정성스럽게 정돈하고서(그는 그리스트도 역시 그렇게 했으리라 생각했다), 이런 생각 주변에서 이런 생각 속에서 맴돌면서 죽는다. .. (70, 98)
(11:28, 52S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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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1)*
요한의 계시록(ἀποκάλυψις ἀπο, en lat. Apocalypsis Beati Joannes Apostoli, en. Book of Revelation, 개신교: 요한계시록(―啓示錄), 가톨릭: 요한 묵시록(―默示錄)는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유일한 예언서다. 계시록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글의 첫머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라고 부르고자 하는 입장도 있다.
저자
교회 전통으로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열 두 사도중의 한 명인 사도 요한이 유배 중에 작성한 문헌이라고 하나, 3세기 교부인 디오니시우스부터 사도 요한과 관련이 없는 요한이 작성한 것으로 의견이 제기되었다. 저자는 에게 해의 파트모스(Patmos) 섬에서 집필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이것이 유배 생활을 하다가 요한 묵시록을 집필하였는지, 또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 파트모스 섬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성서신학계의 주류는 순회선교사, 당시는 순회 예언자로 불리었던 요한이 작성한 것으로 본다. 문헌을 분석한 결과, 그는 고대 그리스어인 헬라어에 능통했으며, 모국어는 헬라어가 아닌 아람어로 추측되며, 유대인으로 구약성서의 전통과 문헌을 충분히 이해하고 읽고 가르쳤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참조2) ********
1200k 아론: 모세의 세 살 많은 형: Aaron, personnage de la Bible hébraïque ou Ancien Testament, frère aîné de Moïse et premier grand prêtre d'Israël, dont les descendants héritèrent du sacerdoce,
630k 에제키엘(Ézéchiel, arb. hazkyal) 구약의 예언자.(ou Tanakh selon la tradition hébraïque), 전6세기경에 살았다. 그의 이름은 « Que le Seigneur le fortifie »(견고한 영주)이다. 기록상으로 597년에 바빌론에 의해 잡혀 갔다. [587년 성전파괴] - [아낙시만드로스와 같은 시대이다. 서로 교류가 있었을까?]
624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전624년?-전544년) 불교의 교조이다. 석가(sakyas 갈대족) 는 부족명으로 “능하고 어질다”라는 뜻이고, 모니는 “성자”라는 뜻이다.
610-546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e, Ἀναξίμανδρος/Anaxímandros 기원전 610-546): 무규정자(l'indétermine, apeiron) / 영원한 운동으로 아페이론이 있다. / 세 개의 불의 바퀴 (des roues trouées)/
6. 나자렛 예수(Jesus de Nazareth, 전06-후29) 태어남. Xristos는 메시아의 번역어이다.
O
8 바울(Paul de Tarse, à l'origine Saul, ou saint Paul 8년경-67년경) 현 터키 남동부 지중해 연안지방인] 킬리키아(Cilicie, Κιλικία)지방의 타르소스(Tarse, Ταρσός) [스토아학파들을 많이 배출한 도시) 출신이다. 로마에서 죽었다. 대낮에 신을 보았다는 점[환각]에서 파라노이아 망상에 빠진 적이 있다.
10 요한(Jean, Yohanan en hébreu, 10-100) 유태인. 예수제자. / 꼴송(Jean Colson, 1734-1801)은 사도 요한과 복음서 요한이 동일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Dans les évangiles synoptiques (évangile de Marc, évangile de Matthieu et évangile de Luc) et le livre des Actes des Apôtres, ainsi que dans une fin ajoutée à l'Évangile de Jean, « Jean, fils de Zébédée », apparaît dans les premiers de la liste des douze apôtres (Mc 3. 16-19, Mt 10. 2-5 et Lc 6. 13-16), avec son frère Jacques dit le Majeur.
190 디오니시우스(Denys d'Alexandrie, lat. Dionysius, 190-264) 교부, 알렉산드리아 주교, 성인품에 오르다. 드니 주교는 묵시록의 저자와 사도 요한을 동일시하기를 거부했다. Denys refusait d'identifier l'auteur de l'Apocalypse avec l'apôtre Jean, auteur du quatrième Évangile et des épîtres johanniques.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리베리아 반도에서 온 유태인 가계의 출신으로 네델란드에서 낸 철학자이다. 그는 그리스트교나 유태교가 지닌 유일신의 불변성과 독자적 고유성에 대해 부정하고, 살아있고 움직이는 자연 즉 신을 주장한다.
[1760 바브프(François-Noël Babeuf, 1760-1797) 그라쿠스 바뵈프(Gracchus Babeuf)라고도 알려졌으며 프랑스의 혁명 시대의 정치 선동가였으며 필진이었다. 그는 평등결사(Societé des égaux)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반동들에 의해 사형 당했다. 혁명가로서 첫 순교자이다.]
1819 귀스타브 쿠르베(Jean-Désiré Gustave Courbet, 1819-1877)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쉰여섯) 안티크리스트(Der Antichrist: Fluch auf das Christentum. 1888)(출판 1906)
레닌 ...
1885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 영국 소설가, 시인 겸 비평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 1928)은 그의 성철학(性哲學)을 펼친 작품이며 외설시비로 오랜 재판을 겪은 후 미국에서는 1959년에, 영국에서는 1960년에야 비로소 완본 출판이 허용되었다. 이 밖에도 많은 중편 및 단편소설, 시집, 여행기, 평론집, 서간집 등이 있다. 『아들과 연인, 1913)
첫댓글 파니 들뢰즈(Fanny Deleuze)는 들뢰즈의 부인이다. 그녀는 영어 번역, 특히 D.H. 로렌스 번역 전문가이다.
여기서는 로렌스의 Apocalypse(Paris: Balland, 1978)의 번역 책의 서문으로 질과 파니가 글을 썼는데,
그 제목이 「니체와 바울, 로렌스와 파트모스의 요한(Nietzsche et Paulus, Lawrence et Jean de Patmos, 1978)」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