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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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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휘(來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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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喜復 수 첨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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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제 (喜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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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간 (喜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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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준 (錫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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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수 (麟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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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春洙 삼일운동 대표33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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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민 (和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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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和世 영화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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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수 (哲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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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和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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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宙煥 방송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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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錫永 내부주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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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弼洙 갑오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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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현 (樂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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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봉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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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수 (宅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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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칠 (樂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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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환 (泰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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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 부 | 성 명 | 주요 직책‧행장 |
13 | 언상 (彦相) | 정후기(鄭垕基) (1674 ~ 1747) 隱士 | 숙종34년(170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1732년 숭릉참봉(崇陵參奉) 1733년 평시서봉사(平市奉事) 만년에 무송정을 짓고 장암 정호가 제액을 썼다. 증손 희승이 수승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아들 희주가 가장을 짓고, 손자 진사 국휘가 행장을 쓰고, 지평 김일주가 묘표를 쓰고, 5대손 일수가 무송정 유허비를 세웠다 晩築撫松亭 丈岩鄭澔*題額 以曾孫姬升貴贈司僕寺正 姬柱述家狀 孫進士國輝述行狀 持平金日柱撰墓表 五代孫一洙立撫松亭遺墟碑 * 정호(鄭澔) : 1648(인조 26)∼1736(영조12). 조선 후기 문신 |
14 | 후기 (垕基) | 정한주(鄭漢柱) (1731 ~ 1792) | 통덕랑 손자 희승이 수승 동지중추부사로 귀하게 되어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以孫 姬升 貴 贈承政院左承旨 |
15 | 한주 (漢柱) | 정내휘(鄭來輝) (1753 ~ 1822) | 통덕랑(通德郞) 아들 희승이 수 동지중추부사로 귀히 되어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以子姬升貴贈戶曹參判 |
16 | 내휘 (來輝) | 정희복(鄭喜復) (1774 ~ ?) 老典 | 수 첨지중추부사(壽 僉知中樞府事) |
16 | 내휘 (來輝) | 정희간(鄭喜艮) (1794 ~ 1854) 孝 |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두터웠다. 재산이 있든 없든 같이 나누니 마을에서 칭송하였다. 誠孝根天 志體兼養 友于彌篤 有無與共 鄕里稱服 |
16 | 내휘 (來輝) | 정희승(鄭喜升) (1797 ~ 1854) 老典 | 수 동지중추부사(壽 同知中樞府事) |
17 | 희간 (喜艮) | 정석준(鄭錫駿) (巢陵) (1829 ~ 1885) 孝 儒學者 | 천성이 대쪽같이 엄정하였으나 부보에 지극히 효도하며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고산 임선생 문하에서 배웠으며 경서와 행의가 드높아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인근학자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賦性簡嚴孝友純至 受業于鼓山任先生 經術至行爲世推重 遠近來學者日塡門庭
* 고산 임헌회(任憲晦) : 1811년 ~ 1876년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 아버지는 천모(天模)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익화(益和)의 딸이다.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 등의 문인이다. |
17 | 희간 (喜艮) | 정석영(鄭錫永) (石陵) (1840 ~ 1911) 관직 | 고산 임헌회 선생 문하에서 배웠으며 경행이 현저하였다 내부주사 통훈대부로 승자
受業于鼓山任先生門 經行著世 內部主事 陞通訓 |
18 | 석준 (錫駿) | 정춘수(鄭春洙) (靑吾) (1875 ~ 1951) 삼일운동 민족대표33인 | 삼일운동 민족대표로서 삼년 옥고로 치루며 항절불굴 하였다 목사, 기독교조선감리교 감독 문학박사 김상기(金庠基) 찬 비명, 대통령 박정희 서 충북공화당부 입석
以 三一運動民族代表 三年縲絏抗節不屈 牧師 監理敎 監督 - 13세 후기 - 14세 한주 - 15세 내휘 - 16세 희간 - 17세 석준 |
18 | 석영 (錫永) | 정필수(鄭弼洙) (1861 ~ 1894) 동학혁명 선봉대장 | 1894년 갑오혁명의 주무로서 충청도임을 맡았다. 고종 갑오년 9월 24일에 청주병영에서 처형되었다
以甲午革命主務 忠淸道任 高宗甲午 9월 24일 處刑于淸州兵營
< 동학운동>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이 운동은 처음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통하여 정치운동으로 성장하고 뒤에 민란과 결합하여 동학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황현(黃玹)이 “동학이 난민과 합쳐졌다”라고 표현한 것은 이 경우를 가리킨 것이다.
* 정필수의 집 : 충북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 *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여 1894년 9월 이종묵, 홍순일 등과 함께 선봉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청주 무심천 변에서 효수 당함 |
18 | 석영 (錫永) | 정택수(鄭宅洙) (1870 ~ 1917) 孝 | 1891년 진사,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고 문장에 능하여 명망이 높았다
孝友文章 著名于世 |
19 | 춘수 (春洙) | 정화세(鄭和世) (1917 ~ ) | 영화제작자협회장 마의태자(1956), 오해마세요(1957), 춘희(1959), 미행자(1962) 등 11편 제작 |
20 | 화성 (和成) | 정주환(鄭宙煥) (1946 ~ ) | 한국방송공사 주간, 심의실 심의위원 - 13세 후기 - 14세 한주 - 15세 내휘 - 16세 희간 - 17세 석준 - 18세 철수 - 19세 화성 |
21 | 태환 (泰煥) | 정용승(鄭用昇) (1939 ~ ) 과학자 | 4.19 의거 참여 대기환경박사, 이학박사, 한국교원대학 교수, 대한민국과학상, 국제환경상, 한림원 종신회원 - 13세 후기 - 14세 한주 - 15세 내휘 - 16세 희간 - 17세 석영 - 18세 필수 - 19세 낙현 - 20세 태환 |
22 | 재덕 (在德) | 정정호(鄭貞鎬) (1943 ~ ) | 진잠농협조합장 - 13세 후기 - 14세 한주 - 15세 내휘 - 16세 희복 - 17세 석주 - 18세 영수 - 19세 화룡 - 20세 규환 - 21세 재덕 |
* 정호(鄭澔) : 1648(인조 26)∼1736(영조12).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 철(澈)의 현손이며, 종명(宗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溭)이고, 아버지는 감찰 경연(慶演)이다. 어머니는 민광환(閔光煥)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하로 매우 촉망받았으며, 1675년(숙종 1) 송시열이 귀양가게 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에 힘썼다. 그 뒤 여러 형제의 권유로 1682년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이 되자, 오도일(吳道一)이 붕당을 키우고 권세를 부린다고 탄핵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출되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당하자, 그는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가 경성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풀려나 지평·수찬·교리 등을 역임하고, 1696년 이사상(李師尙)을 논핵하는 등 과격한 발언으로 파직되었다.
1698년 다시 수찬·집의·사간을 거쳐 이듬해 동래부사로 나갔다가, 1700년에 신은(新銀) 12만여 냥을 왜에 상매(商買)한 관계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기용되었고, 1702년 승지·부제학을 거쳐 1704년 함경도관찰사에 이어 1710년 대사간·대사헌을 지냈는데, 당론을 일삼는다 하여 흥해·갑산 등지에 유배되었다.
1713년 대사성에 재임용되어 송시열의 묘정배향을 건의하였다. 1715년에는 부제학으로서 유계(兪棨)의 유저(遺著)인 ≪가례원류≫의 발문을 썼다. 그 내용에 소론인 윤증(尹拯)이 송시열을 배반했다는 내용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노론이 승리함으로써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 때 윤선거(尹宣擧)의 문집 ≪노서유고 魯西遺稿≫가 간행되자, 효종에게 불손한 내용으로 썼다 하여 훼판(毁板)하고 윤선거 부자의 관작도 추탈하게 하였다.
1717년 세자(世子 : 뒤위 경종)의 대리청정에서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시행하도록 했고, 예조판서를 거쳐 다음 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1721년(경종 1)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숙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나와 우의정에 승진되어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 4대신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누차 상소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2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영중추부사로 죽었다.
* 고산 임헌회(任憲晦) : 1811년 ~ 1876년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 아버지는 천모(天模)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익화(益和)의 딸이다.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 등의 문인이다.
1858년(철종 9)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다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전라도사·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4년(고종 1) 장령·집의·장악정(掌樂正)이 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 때 만동묘(萬東廟)의 제향을 폐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절대 부당함을 재삼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하였다. 1874년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헌·좨주 등에 임명되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 하여 그의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연기의 숭덕사(崇德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전재문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정춘수(鄭春洙) : 1873년 2월 12일 ~ 1953년 1월 10일
1873년 2월 12일 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명옥(明玉), 호는 청오(靑吾)이다. 1882년부터 1897년까지 한문을 배우고, 1904년부터 1907년까지 감리교 성서학원(聖書學院)에서수학하였다.
1907년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에 입학해 1911년 12월 졸업하였으며, 1911년 목사 안수를 받아 1913년부터 1916년까지 개성 북부교회(北部敎會)를 맡았다. 1916년 9월부터 원산 상리교회(上里敎會)를 담임하면서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21년 5월 출옥하였다. 1922년 9월부터 1924년 8월까지 개성 북부교회, 1924년 9월부터 1926년 8월까지 개성 중앙교회(中央敎會)를담임하였으며, 1926년 9월부터 1930년까지 남감리교회(南監理敎會) 춘천지방 장로사(長老司)를 지냈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 간사로 선출되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평양 신양리구역 목사로 있다가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서울 동대문교회(東大文敎會)를 맡았다. 이 무렵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신흥우(申興雨)가 조직한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에 참여하였고, 경성(京城) 수표교교회(水標橋敎會)를 담임하였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같은 해 9월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났다. 1939년 9월에는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다.~~~~~이하생략
□ 동학혁명 선봉대장 정필수 관련
< 「동학혁명의 성지(聖地) 보은」, 채길순 중에서 발췌>
3. 동학 포교의 중심지 장내리
1864년 창도주 최제우가 대구 장대(將臺)에서 처형되자 교권을 이어받은 최시형(崔時亨․1827~1898)2)은 경상 북부와 강원도를 거쳐 단양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간다. 또 최시형은 상주 지방의 교도들과 상의하여 최제우의 가솔들을 속리산 자락 왕실촌에 피신시킨다. 관에 쫓길 때 도계(道界)를 넘어 피신하기 쉬운데다 도인들이 많아서 뒷바라지가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은은 왕실촌을 넘어 들어오는 길 외에 추풍령을 넘어 황간 청산으로 통하는 길과, 상주에서 팔음산을 넘어 청산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이런 지리적 조건 때문에 보은 장내리는 최시형의 도피처인 동시에 교세 확장의 교두보로, 뒷날 동학교단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실제로 교세는 속리산 너머 상주와 미원 회인 문의 회덕 청주 청산 영동 옥천 등지로 교세가 분포했는데, 당시는 여러 접주들의 연원(淵源)이 얽히고 설킨 상태에서 동학교도가 엄청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먼저 보은 장내리와 가까운 청산 문바우를 주목할 수 있다. 청주 손병희와 황간 조재벽(趙在壁) 접주의 주선으로 청산 문바위골 김성원(金聖元)의 집에 최시형의 도피처가 마련되었는데, 당시 동학교도들 사이에 작은 장안이라 불리워질 만큼 비중이 컸다. 1893년 3월에는 청산 포전리 김연국(金演局․1857-1944)의 집에서 창도주의 조난 일을 맞아 손병희 이관영 권재조 권병덕 임정준 이원팔 등과 제례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서 당시 이 일대의 동학 교세를 가늠케 한다. 또 황간 조재벽 대접주는 황간 청산 옥천 영동 회덕 진잠 금산까지 상당히 넓은 지역으로 교세를 떨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상주 지방에는 동학교도들이나 접주 및 대접주들이 많았으며, 청주 문의 미원 지방에도 교세가 성했다. 이 중 청주군 북면 금암리 일대는 손병희 손천민 서우순 서장옥 음선장 최동석 정필수 정석복 김자선 권병덕 등 10 두령을 꼽을 만큼 교세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곳을 교두보로 충청도 북부는 물론 호서와 경기 강원 지방으로 널리 교세가 확장되고 있었다. 이처럼 빠른 교세 확장과 함께 1886년에는 육임제를 두어 포 조직을 강화하게 되자 대도소가 있는 보은 장내리는 명실 공히 동학의 중심지가 된다.
* 1894년 9월 청주성 전투
청주성전투는 9월 24일 쌍다리 장터(북일면 세교리) 싸움과 청주성 공격이 동시에 일어난 듯 하다. 9월 28일 관보에 청주 읍성을 닷새 동안 연일 공격하였으나 28일 패퇴했다. 충청도관찰사의 장계에 의하면 9월 24일 동학교도 수만이 청주를 습격하여 병마절도사 이장회가 친히 전투하여 수십명을 살해하였다. 9월 30일 동학군이 청주성을 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0월 1일 병마절도사 이장회, 군관 이용정 등이 동학두령 이종묵, 정필수, 정석복 등을 체포하여 무심천변에서 군중 앞에 효수하여 경계했다 등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 인터뷰 : 청주지도자 정필수의 증손자 정용승씨, 1994.3.22. 한겨레 >
청주지도자 정필수의 증손자 정용승씨 할아버지 ‘한’ 풀어드려야죠! 절반만 세운 비석 국가에서 마무리를
정필수는 청주에서 동학군 지도자로 맹활약했다. 그를 증조부로 둔 정용승(56)씨는 1백년은 족히 묵었을 한지를 여러 뭉텅이 꺼내 놓았다. 사람 키만한 책장 반을 메울 만큼 많았다.
“몇 해 전 집수리하는 중에 거두어 모았어요. 뭔지 몰라 물어 물어 찾은 충북대 신영우 교수로부터 귀한 자료라 듣고 보관 중이에요.” 그도 교수다. 교원대에서 대기과학을 가르치는데, 한자 보다는 영어가 가까워선지 “ 무슨 내용인지 잘 몰라 안타깝다.”
수백 장 가량의 한지는 거의 고조부 것이다. 마을서 서당하다 상경해 내부주사를 지내던 고조부가 고향의 두 아들, 집 근처 운적산에 훈련장을 만들어 동학군을 조련하던 장남 필수와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진사로 급제한 차남에게 띄운 서한도 백여 장이다.
“ 33살의 아들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청주 감영의 친구에게 선처를 부탁했는데 이미 총살된 뒤였답니다. 관보에도 나옵디다. 농민만 동학군이 아닌거죠. 증조부님이야 분명히 농민이 아닌데, ‘항일’ 그것으로 뭉친거겠죠.”
정필수는 어린 시절, 손병희와 한 마을, 충북 청원군 북이면에 살았다. 나이는 동갑이었고 집이 5백 미터 떨어졌다. 지금 정씨가 작은 농장을 꾸민 청원군 강내면으로 온 집안이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이사오기 전 까지이다.
또 3.1운동 33인 가운데 한 분인 정춘수 감리교 목사도 증조부의 14살 아래 사촌으로 같이 살았다. “아마도 이 곳이 엄청난 근거지인 것 같죠?”
정씨는 두 분의 묘를 집 옆에 모셨는데, 필수 할아버지 앞에는 반석만 놓았다. “상석은 나중에 국가가 세우라고 남겼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그렇게 해서 억울한 한을 풀어드려야죠. 명예회복을 해달라고 말입니다.”
청주 정인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