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지도론 제24권
39. 초품 중 십력(十力)의 뜻을 풀이함
[부처님의 힘과 관련된 법]
【經】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礙智)ㆍ18불공법(不共法)과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두루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익히고 행해야1) 하느니라.
【論】
【문】 이 10력과 4무소외 등은 바로 부처님의 위없는 법이어서 마땅히 앞에서 설명해야 하거늘, 어째서 먼저 9상(相)2)과 8념(念)3) 등을 설명하였는가?
【답】 6바라밀은 바로 보살로서 마땅히 수용해야 하므로 이미 앞에서 설명했으며, 37품(品)4) 내지 3무루근(無漏根)은 바로 성문의 법이다.
보살은 이 6바라밀을 행해 힘을 얻기 때문에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초월하려 하며, 또한 성문과 벽지불을 향하는 사람을 교화하여 부처님 도에 들게 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소승(小乘)의 법은 온갖 중생을 버리고 이익되는 것이 없다고 꾸짖으면,
모든 성문들은 말하기를,
“그대는 바로 범부라 아직 번뇌[結使]를 끊지 못했으므로 이 법을 행할 수 없다”고 한다.
꾸짖음이 헛되고 마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보살은 37품(品) 등을 구족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성문의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비록 이 모든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들은 삿된 행을 행하게 되므로 이 바른 행[正行]을 행하여 항상 이 모든 법의 불가득공(不可得空)5)을 버리지 않으며 또한 서둘러 열반의 증득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보살이 이 소승을 이해하거나 행하지도 못하면서 꾸짖기만 한다면 누가 그를 믿으려 하겠는가.
비유컨대, 마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께서 만일 먼저 6년 동안 고행(苦行)을 하지 않은 채 고행을 도가 아니라고 꾸짖으셨다면 믿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더 심한 고행을 하시다가 불도를 이루셨을 때에 비로소 이 고행의 길을 꾸짖으시니 사람들이 모두 믿고 받아들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6바라밀의 뒤에 차례로 성문의 법을 행하는 것이다.
또 이것은 비단 이러한 성문의 법만은 아니다.
이 법 중에는 화합하여 중생의 뜻을 버리지 않고 온갖 불법을 두루 갖추었고 불가득공의 지혜이기 때문에 보살의 법이라 한다.
【문】 만일 보살이 37품의 모든 법을 구족하게 된다면, 어찌하여 성문법의 지위6)에 들지 않는 것인가?
【답】 구족(具足)7)한다 함은,
두루 갖추어 관하여 알면서도 증득을 취하지 않으며 똑똑히 관하면서 알기 때문에 구족한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게송을 말씀하셨다.
모든 것[一切]은 폭력[杖痛]을 두려워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이가 없나니
제 몸을 용서하듯 잘못을 알아서
중생에게 폭력을 가하지 말지니라.
비록 “온갖 것은 매질의 고통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무색계(無色界)의 중생은 몸이 없고,
색계(色界)에서는 비록 몸은 있다 하더라도 채찍질이나 매질이 없다.
욕계(欲界) 중에서는 모든 부처님이나 전륜성왕이나 야마천(夜摩天) 이상에서는 모두가 폭력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고 폭력을 당하게 되는 두려운 곳에 있는 이를 위하여,
‘모는 것[一切]’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구족한다 함도 역시 그와 같아서 증득함을 구하거나 법에 집착하지 않는 이를 위하여 짐짓 구족한다고 말씀한 것이다.
또한 나는 이미 앞에서,
“중생을 버리지 않고 불가득공의 지혜와 화합하기 때문에 성문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한 바이다.
【문】 6바라밀로부터 3무루근(無漏根)에 이르기까지 다만 “구족해야 한다”고만 말씀했는데,
이로부터는 무엇 때문에 모두,
“이 일을 알고자 하고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한다8)”고 하는가?
【답】 성문의 법에는 분량이 있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구족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로부터 이하의 이 모든 부처님 법은 심히 깊고 한량이 없어서 보살은 아직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 일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또 성문의 법은 이해하기도 쉽고 알기도 쉽기 때문에 “구족한다”고 말하지만,
보살의 법과 부처님의 법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또 성문의 법은 전체의 모양[總相]으로서 다만 괴로움[苦]을 알고 괴로움의 원인[苦因]을 알며 괴로움이 다함[苦盡]을 알고 괴로움이 다하는 길[盡苦道]을 알 뿐이다.
예를 들어 마치 두 종류의 의사가 있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은 다만 병을 알고 병의 원인을 알고 병을 낫게 함을 알고 병을 낫게 하는 약을 알지만,
온갖 병을 알지 못하고 온갖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온갖 병을 낫게 함을 알지 못하고 온갖 병을 낫게 하는 약을 알지 못한다.
또 다만 사람의 병을 치료할 줄만 알고 짐승들의 병은 치료할 줄 모르며,
혹은 한 국토의 병을 치료할 수 있어도 다른 국토의 병은 치료할 수 없으며,
수십종의 병은 치료할 수 있어도 404종의 병과 그 병의 원인 및 병을 낫게 하는 일과 병을 낫게 하는 약을 모두 모르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다른 한 사람은 네 가지에 대해서 모두 두루 알며, 약도 병도 두루 다 안다.
성문의 사람은 마치 병을 다 두루 알지 못하는 작은 의사[小醫]와 같고,
보살마하살은 마치 병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약마다 알지 못함이 없는 큰 의사[大醫]와 같다.
이 때문에 성문의 법은 구족해야만 하고 보살의 법은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10력]
부처님의 10력(力)이라 했는데,
시처(是處)9)와 불시처(不是處)10)를 사실대로 아시니, 이것이 첫 번째 힘[一力]이시다.
중생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업(業)과 모든 받는 것을 알고 업을 짓는 곳을 알며 인연을 알고 과보를 아시니, 이것이 두 번째 힘[二力]이시다.
모든 선(禪)ㆍ해탈(解脫)ㆍ삼매(三昧) 및 정(定)을 알고 더럽거나 깨끗함을 분별하는 모양을 사실대로 아시니, 이것이 세 번째 힘[三力]이시다.
다른 중생들의 모든 근기[根]의 상하를11) 사실대로 아시니, 이것이 네 번째 힘[四力]이시다.
다른 중생들의 갖가지 욕망을 아시니, 이것이 다섯 번째 힘[五力]이시다.
세간의 갖가지 수없는 성품을 아시니, 이것이 여섯 번째 힘[六力]이시다.
온갖 도(道)가 이르는 곳과 모양을 아시니, 이것이 일곱 번째 힘[七力]이시다.
갖가지 전생의 일[宿命]을 알되 공통된 모양ㆍ공통된 인연과 한 세상ㆍ두 세상 나아가 백천의 세상과 겁초(劫初)와 겁진(劫盡)에 이르기까지 안다. 곧
“나는 저곳의 중생으로 있을 때는 이러한 성과 이름으로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고락(苦樂)을 받고 이러한 수명을 살았다.
그곳에서 죽어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 세상에서 죽어서는 다시 저 세상에 태어났으며,
이 세상에서 태어났을 때의 이름과 성씨와 음식과 고락과 수명의 길이는 또한 이와 같았다”고 아시니,
이것이 여덟 번째 힘[八力]이시다.
부처님의 천안(天眼)은 청정하여 모든 하늘과 사람들의 눈을 지나므로 중생이 죽고 날 때 단정하거나 추하거나, 크거나 작거나, 악도(惡道)에 떨어지거나 선도(善道)에 떨어지는 등 이러한 업의 인연과 받는 과보를 다 보신다. 곧
“이 중생들은 나쁜 신업(身業)을 성취하고 나쁜 구업(口業)을 성취하고 나쁜 의업(意業)을 성취하여 성인을 훼방하고, 삿된 소견[邪見]으로 삿된 소견의 업을 성취한지라, 이 인연 때문에 몸이 무너져 죽은 때에는 악도로 들어서서 지옥에 태어난다.
또한 저 중생들은 착한 신업을 성취하고 착한 구업을 성취하고 착한 의업을 성취하여 성인을 비방하지도 않았고, 바른 소견[正見]으로 바른 소견의 업을 성취했으므로, 이 인연 때문에 몸이 무너져 죽은 때에는 선도로 들어서서 천상에 태어난다”고 함을 보시니,
이것이 아홉 번째 힘[九力]이시다.
부처님은 모든 번뇌가 다 하였기 때문에 무루의 마음으로 해탈[無漏心解脫]하고 무루의 지혜로 해탈[無漏智慧解脫]하여 현재의 법 중에서 스스로,
“나의 태어남[生]은 이미 다했고 청정함은 확고해졌으며[持戒]12), 할 일은 이미 마쳤고[已作] 뒷몸[後有]은 다했다”고 함을 알되 여실히 아시니,
이것이 열 번째 힘[十力]이시다.
[10력을 설명하는 까닭]
【문】 이 10력은 보살은 아직 얻지 못하고 성문과 벽지불도 얻을 수 없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설명하는가?
【답】 성문의 사람은 비록 얻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만일 이 10력의 공덕을 듣게 되면,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큰 공덕이 있으시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스스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좋은 이익을 얻게 됨이 적지 않겠구나”라고 하며,
신심(信心)이 청정하게 되어 괴로움이 다하는 길13)에 들게 된다.
모든 보살이 이를 듣게 되면 보살의 도를 부지런히 닦으면서 장차 이러한 10력 등의 큰 공덕의 과보를 얻게 될 것이다.
또 어떤 성문이나 보살이 염불삼매(念佛三昧)14)를 닦을 때는 비단 부처님 몸만을 염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갖가지의 공덕과 법신(法身)15)도 염해야 하나니,
마땅히 이렇게 부처님을 염해야 한다. 곧
“온갖 종류16)와 온갖 법을 잘 아시기 때문에 일체지인(一切智人)이라 하고,
온갖 법을 사실대로 잘 분별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에 일체견인(一切見人)17)이라 하며,
온갖 법을 현전에서 아시기 때문에 일체지견무애인(一切知見無礙人)18)이라 한다.
마음이 온갖 중생에게 평등하시기 때문에 대자비인(大慈悲人)이라 하고,
큰 자비가 있으시기 때문에 세구(世救)19)라 한다.
여실한 도에서 오셨기 때문에 여래(如來)라 하고,
온갖 세간의 공양을 받을 만하시기 때문에 응공인(應供人)이라 하며,
뒤바뀌지 않은 지혜를 성취하셨기 때문에 정변지(正遍知)라 하고,
계율ㆍ선정ㆍ지혜를 성취하셨기 때문에 명행(明行)이라 한다.
이루어서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선서(善逝)라 하고,
세간의 총체적인 모양[總相]과 개별적인 모양[別相]을 아시기 때문에 세간해(世間解)라 한다.
세간을 벗어나는[出世間] 안온한 도를 잘 말씀하시기 때문에 무상조어사(無上調御師)라 하고,
세 가지 가르침[敎法]으로 중생을 제도하시기 때문에 천인사(天人師)라 하며,
온갖 세간의 번뇌의 잠에서 스스로 깨어나시고 또한 사람들도 깨어나게 하시기 때문에 각인(覺人)이라 한다.
일체의 바람이 구족되었기 때문에 유덕(有德)20)이라 하고,
10력이 다 성취되었기 때문에 견서(堅誓)21)라 한다.
4무외(無畏)를 얻으셨기 때문에 인사자(人師子)22)라 하고,
한량없고 심히 깊은 지혜를 얻으셨기 때문에 대공덕해(大功德海)23)라 하며,
온갖 기설(記說)24)에 걸림이 없으시기 때문에 여풍(如風)25)이라 한다.
온갖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 미워하거나 사랑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여지(如地)26)라 한다.
온갖 번뇌[結使]의 잡초를 태우시기 때문에 여화(如火)27)라 하며,
온갖 번뇌의 습기를 잘 끊으셨기 때문에 구족해탈(具足解脫)이라 하고,
가장 높은 곳에서 머무시기 때문에 세존(世尊)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공덕이 있으시기 때문에 마땅히 부처님을 염[念佛]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18불공법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또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이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실 때에 부처님의 대중 및 모든 외도의 재가자나 출가한 이들이며 모든 하늘ㆍ용ㆍ귀신28) 등 갖가지 대중이 다 모여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삼매왕삼매(三昧王三昧)에 드셔서 큰 광명을 놓아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이 많은 세계를 두루 비추시니, 땅은 여섯 가지로 진동했다.
그때 이 반야바라밀과 6바라밀 내지 3무루근(無漏根)을 말씀하셨다.
이 가운데 어떤 중생이 의심하기를,
“어떤 힘이 있으시고 몇 가지의 힘이 있으시기에 이렇게 불가사의한 감동(感動)과 이익을 지으실까?”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마음에 이런 의심이 있음을 아셨기에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의 지혜 힘이 있느니라.
이 힘에는 열 가지 작용이 있으니, 이 열 가지 지혜 때문에 이러한 감동과 변화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여기에서 지은 것보다 더 뛰어날 수 있느니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10력을 얻고자 하면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의 제자가 세상마다 선근을 행하다가 한 조그마한 죄의 인연 때문에 외도에 떨어지게 되는 일이 있는데,
외도들은 항상 말하기를,
“부처님은 실로 공덕의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환술(幻術)의 힘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흘리는 것이다”고 하면,
부처님의 제자로서 외도에 떨어진 이는,
“만일 그렇다면 부처님은 대인(大人)이 아니로다”라며 마음으로 의심하게 된다.
이러한 삿된 비방을 없애 주기 위하여 말씀하시되,
“나는 실로 10력과 4무소외가 있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하나니, 이는 환술의 속임수가 아니다”고 하시는 것이다.
또 모든 보살이 보살의 길을 닦을 때는 고행(苦行)의 일을 마치기가 어렵고 이루기도 어렵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거나 쉬고 싶어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이 10력을 행하면 장차 한량없는 과보를 얻을 것이다”고 하신다.
비유하건대 마치 장사꾼의 우두머리가 상인들을 위로하며 말하되,
“그대들은 부디 고달퍼하거나 게을리 하지 말라. 부지런히 힘써 노력하여 저 보배 산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7보(寶)29)와 여의보주(如意寶珠)30)를 얻게 되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보살들을 위로하시면서,
“고달퍼하거나 싫증을 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보살의 도를 닦아야 한다. 이 10력을 행하면 장차 한량없는 과보를 얻게 될 것이다”고 하신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이익되는 인연이 있으므로 10력 등을 말씀하신 것이다.
【문】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힘이 있으시거늘, 무엇 때문에 10력만을 말씀하는 것인가?
【답】 모든 부처님께서 비록 한량없는 힘이 있으시다 하더라도 사람들을 제도할 인연 때문에 이 10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그 일을 이룩하시는 데에 족하다.
가능함과 불가능함을 아는 지력[是處不是處智力]31)으로써는,
“이 중생은 제도할 수 있고, 이 중생은 제도할 수 없다”고 함을 분별하고 헤아리며,
업보를 아는 지혜의 힘[業報智力]32)으로써는,
“이 사람은 업장(業障)33)이고, 이 사람은 보장(報障) 34)이며, 이 사람에게는 아무 장애가 없다”고 분별하고 헤아리며,
선정해탈삼매의 지력[禪定解脫三昧智力]으로써는,
“이 사람은 맛[味]에 집착했고, 이 사람은 맛에 집착하지 않았다”고 함을 분별하고 헤아린다.
상하근지력(上下根智力)35)으로써는 중생의 지혜의 힘이 많고 적음을 분별하고 헤아리며,
종종욕지력(種種欲智力)36)으로써는 중생들이 좋아하는 바를 분별하고 헤아리며,
종종성지력(種種性智力)으로써는 중생들의 깊은 마음의 나아가는 바를 분별하고 헤아리며,
일체지처도지력(一切至處道智力)37)으로써는 중생의 해탈문38)을 분별하고 헤아린다.
숙명지력(宿命智力)39)으로써는 중생들이 먼저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사지력(生死智力)40)으로써는 중생이 태어나는 곳41)과 아름답고 추함을 분별하고 헤아리며,
누진지력(漏盡智力)42)으로써는 중생이 얻는 열반을 분별하고 헤아리신다.
부처님은 이 열 가지 힘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하게 하되 자세하고 진실하여 그르침이 없으며 모두가 구족함을 얻게 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비록 한량없는 힘이 있으시기는 하나 다만 이 10력만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시처불시처의 힘으로는 틀림없이 이 인연으로부터는 이런 과보가 나온다 함을 아신다.
이 안에는 통틀어 아홉 가지 힘을 포섭하는데, 중생을 제도하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첫 번째 힘]
첫 번째 힘[初力] 가운데서는 분별하여 아홉 가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 세간의 중생은 바로 눈앞의 곡식이 종자로부터 나왔음을 보면서도 잘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과 인연과보이겠는가.
부처님은 안팎의 인연과보에 대하여 분명하면서도 두루 아시기 때문에 힘[力]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이 중생은 업과 번뇌의 인연 때문에 속박되고 청정한 선정과 해탈의 인연 때문에 벗어난다”고 함을 아신다.
부처님은 이 온갖 중생들의 3세(世) 동안에 세 가지의 모든 업과 모든 번뇌의 가볍고 무겁고 깊고 얕고 거칠고 세밀한 것을 모두 두루 아시기 때문에 힘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온갖 중생의 모든 선정과 해탈과 삼매의 크고 작고 깊고 얕은 해탈의 인연을 모두 두루 아시기 때문에 힘이라 하며,
중생으로서 근기가 둔한 이는 후생의 몸을 위하여 죄와 복업의 인연을 짓고, 근기가 영리한 사람은 태어나지 않기 위하여 모든 업을 모으는 데,
부처님은 이러한 상하 근기의 좋고 나쁜 모양을 아시기 때문에 힘이라 한다.
온갖 중생은 두 가지의 욕망으로 상하 근기의 인연을 짓고, 두 가지의 욕망으로 선과 악이 갖가지로 달리함을 부처님은 두루 아시기 때문에 힘이라 하며,
두 가지의 욕망은 두 가지 성품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깊은 마음이 나아가는 바를 두루 아시기 때문에 힘이라 한다.
온갖 중생은 갖가지 성품의 인연 때문에 두 가지의 길을 가게 되는데, 이른바 선도와 악도이다.
갖가지 문으로 이르는 곳을 부처님은 두루 아시기 때문에 힘이라 하며,
과거 세상과 미래 세상의 인연과 과보와 지혜가 걸림이 없으시니, 이것을 숙명(宿命)과 생사(生死)의 지혜의 힘이라 한다.
과거와 미래의 인과(因果)를 알고 이미 모든 방편을 알아서 인연과 과보의 상속함을 무너뜨리나니, 이것을 일컬어 누진력(漏盡力)이라 한다.
부처님은 3세(世) 안의 두 가지 인연을 아시고 중생의 근기와 욕망과 성품을 분별하고 헤아리면서 번뇌를 다하게 하기 위하여 법을 말씀하나니, 이것이 누진의 힘이다.
[시처와 불시처의 힘]
【문】 어떤 것이 시처(是處)와 불시처(不是處)의 힘인가?
【답】 부처님은 온갖 법들의 인연과 과보의 정해진 모양을 아시나니,
“이 인연에서는 이와 같은 과보가 생기고 이 인연에서는 이와 같은 과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치 『다성경(多性經)』43) 가운데 설해지는 것과 같으니, 시처와 불시처의 모양과 같기 때문이다.
여인의 몸으로써 전륜성왕이 된다 하면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온갖 여인은 모두가 남자에 속해 있어서 자유롭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인은 전륜성왕조차도 될 수 없는데 하물며 부처가 되겠는가.
만일 여인이 해탈과 열반을 얻는다면 역시 남자로 인하여 얻게 되며 저절로 도를 증득하는 일은 없다.
두 전륜성왕이 한꺼번에 세상에 출현한다고 하면 도리에 맞지 않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원업(怨業)을 성취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두 전륜성왕조차도 오히려 세상에 같이 하지 않는데 하물며 두 분의 부처님이겠는가.
나쁜 업으로 즐거운 과보를 받는다 하면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쁜 업으로는 세간의 즐거움조차 얻을 수가 없는데 하물며 세간을 벗어난 즐거움[出世樂]이겠는가.
만일 나쁜 행을 하고도 하늘에 태어난다 하면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쁜 행을 하면 천상조차도 태어날 수 없는데 하물며 열반이겠는가.
5개(蓋)는 마음을 가리워 산란하게 하고 7각(覺)의 수행을 멀어지게 하는데 열반을 얻는다 하면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5개는 마음을 가리워서 7각의 수행을 여의게 하므로 오히려 성문의 도조차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부처님의 도이겠는가.
마음에 가리움이 없어야 부처님의 도를 얻을 수 있는데 하물며 성문의 도이겠는가.
이와 같은 등의 시처(是處)와 불시처(不是處)는 『다성경(多性經)』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니,
모든 논의사(論議師)44)들은 이 부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다시 더 널리 시처와 불시처를 설명하는 것이다.
만일 “부처님은 허물과 죄과가 있다”고 하거나,
“모든 성현은 외도의 스승을 구한다”고 하거나,
모든 성현은 스스로 말하되,
“내가 바로 부처이다”고 하거나,
“모든 성현은 악도에 떨어진다”고 하거나,
“진리를 보아 끊은 번뇌가 다시 생겼다”고 하거나,
“모든 성현은 죄를 다 덮어 감춘다”고 하거나,
“수다원(須陀洹)은 25유(有)를 돌아다닌다”고 한다면,
이런 모든 것은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니,
마치 현성(賢聖)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5역(逆)을 저지른 사람이나 다섯 가지 황문(黃門)45)이나 네 가지의 악도(惡道)에 떨어진 중생이나 울다라월(鬱多羅越)46) 사람이나 마의 권속은 세 가지 장애[三障]로 막혀 있거늘, 만일 도를 얻는다고 말한다면, 모두가 도리에 맞지 않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법하는 이를 가벼이 여기고 법(法)을 가벼이 여기며 자기 자신을 가벼이 여기면서 계율을 깨뜨리는 어리석은 이가, 만일 법의 기쁨[法喜]을 구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역시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가 “내가 바로 부처이다”고 말하면서, 이 신구(身口)의 악을 참회하지도 않고 부처님을 뵙고자 하거나,
승가를 파괴한 죄[破僧罪]를 짓고도 참회하지도 않고 부처님을 뵙고자 하거나,
사정취(邪定聚)에서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고, 정정취에서 사정취에 들어가며, 정정취에서 부정취(不定聚)에 들어간다고 하거나,
부처님 법을 제외하고 따로 참된 득도가 있다고 하거나,
사람은 도를 얻으면 당연히 그 몸은 죽게 된다고 하거나 하면,
모두가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인연(因緣)으로 나는 것을 제외하고 의식[識]이 이름과 모양[名色]을 내는 어떤 법이 있다고 하면, 도리에 맞지 않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처님께서 심부름을 보내서 아직 일이 끝나기도 전에 만일 막히거나 장애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자삼매(慈三昧)에 들어갔는데 만일 다른 인연으로 죽었다거나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갔다거나 견제도(見諦道) 안에 있다가 죽었다거나 한다면, 모두가 도리에 맞지 않으니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만일 부처님과 부처님 어머님[佛母]을 해쳤다 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륜성왕의 여인 보배[女寶]와 상마(象馬)와 주장신(主藏臣)과 주병신(主兵臣)이 만일 태(胎) 속에 있다가 죽거나 모자(母子)가 한꺼번에 일찍 죽었다고 한다면, 모두가 도리에 맞지 않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울다라월(鬱多羅越) 사람이나 여인 보배나 부처님 어머님이 목숨을 마친 뒤의 다음 몸은 악도로 들어간다 하면, 모두가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유위(有爲)는 항상하고 열반은 무상한 것이라거나,
범부가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번뇌[結使]를 끊었다거나,
온갖 모양을 취하는 선정 가운데서 거룩한 도[聖道]를 닦았다거나,
무루의 도[無漏道]는 유루의 인[有漏因]이라거나,
땅[地]은 축축한 모양이고 물[水]은 단단한 모양이며 불[火]은 찬 모양이고 바람[風]은 머무르는 모양이라 한다면,
모두가 도리에 맞지 않으니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무명(無明)은 모든 지어감[行]을 낼 수 없고 나아가 태어남[生]은 늙어 죽음[老死]을 낼 수 없다 하면,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 개의 마음이 한꺼번에 다섯 가지 식(識)을 내어 분별하면서 모양을 취한다 하거나,
집착하고 여의고 잠을 잘 때에도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거나,
잠을 자면서도 선정에 들어갈 수 있다거나 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다만 다섯 가지 식[五識]만이 상속하면서 나고 의식(意識)은 나지 않는다고 하거나,
다만 다섯 가지 식에만 달라붙어서 상속함이 있다고 하거나,
다만 다섯 가지 식들만이 능히 반연[能緣]하므로 능히 반연하는 모양[能緣相]이라 이름하면서 무색의 법[無色法]도 능히 반연하고 과거와 미래도 능히 반연하며 3세(世)를 여의는 법도 능히 반연한다고 하거나,
다만 다섯 가지 식만이 증촉(增觸)과 명촉(明燭)이 있어서 선정을 닦고 착한 율의[善律儀]와 착하지 않은 율의[不善律儀]를 받으며 근심과 기쁨이 있고 무각무관(無覺無觀)이 있으며 모든 감관[諸根]을 더하여 늘게 한다 한다면,
모두가 도리에 맞지 않으니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비식(鼻識)과 설식(舌識)에는 은몰무기(隱沒無記)가 있다고 하거나,
범부의 제6식(識)은 나를 여의고 동작[行]한다고 하거나 하면,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이와 같은 것 등은 한량없이 도리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는 일[不是處]들이다.
도리에 맞는 일[是處]도 역시 그와 같나니,
부처님은 이 도리에 맞는 일과 도리에 맞지 않는 일들을 아시므로 분별하고 헤아려 보아 제도할 수 있는 이면 그를 위하여 법을 말씀하고 제도할 수 없는 이면, 그를 위하여 인연을 짓게 하신다.
비유하건대 마치 용한 의사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혹은 치료할 수 없는지를 아는 것과 같다.
성문이나 벽지불은 아는 것이 적기 때문에 혹은 제도하지 않아야 할 이를 제도하려 한다.
마치 수라(首羅)는 제도해야 하는 데도 제도하지 않는 것과 같고,
마치 사리불(舍利弗)은 제도하지 않을 이인 것과 같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일이 없고 파괴할 수도 없고 보다 수승한 이도 없나니, 모두를 두루 아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첫 번째의 힘[初力]이라 한다.
[두 번째 힘]
업보지력(業報智力)이라 함은,
몸과 입으로 짓는 업과, 이 생[此生]에서 지음이 없는 업[無作業]과, 받은 바의 계율에 대한 업과, 또한 악업은 낮이나 밤이나 따르면서 업의 작용[業用]을 내고 죄와 복의 업을 내는 것이다.
이 업을 부처님께서는 요약하여 세 곳[三處]에 속했음을 말씀하셨나니, 이것을 온갖 업상(業相)이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온갖 중생이 지은 업(業)은 과거 세상의 것이요 그 과보(果報)도 역시 과거 세상에 있었고 업은 과거 세상의 것이지만 그 과보는 현재 세상에 있으며,
업은 과거 세상의 것이지만 그 과보는 미래 세상에 있게 되고,
업은 과거 세상의 것이지만 그 과보는 과거 세상과 현재 세상에 있으며,
업은 과거의 것이지만 그 과보는 과거 세상과 미래 세상에 있고,
업은 과거 세상의 것이지만 그 과보는 현재 세상과 미래 세상에 있으며,
업은 과거의 것이지만 그 과보는 과거 세상과 미래 세상과 현재 세상에 있게 됨을 아시며,
현재의 업도 역시 그와 같음을 아신다.
또 착한 마음[善心] 가운데서는 선(善)과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의 업보(業報)를 받으며,
착하지 않은 마음[不善心]과 무기의 마음[無記心]도 역시 그와 같다.
또 즐거운 업[樂業]의 인연 때문에 즐거운 과보를 받고,
괴로운 업[苦業]의 인연 때문에 괴로운 과보를 받으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업[不苦不樂業]의 인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받는다.
현보(現報)의 업의 인연 때문에47) 현보를 받고,
생보(生報)의 업의 인연 때문에 생보를 받으며,
후보(後報)의 업의 인연 때문에 후보를 받는다.
부정업(不淨業)의 인연 때문에 고뇌의 과보[惱報]를 받고,
정업(淨業)의 인연 때문에 고뇌 없는 과보[無惱報]를 받으며,
잡업(雜業)의 인연 때문에 뒤섞인 과보[雜報]를 받는다.
또 두 가지 업이 있으니, 곧 반드시 과보를 받는 법[必受報業]과, 반드시 과보를 받는 것은 아닌 업[不必受報業]이다.
반드시 과보를 받는 업은 여윌 수가 없다.
혹은 때[時]를 기다리기도 하고 사람[人]을 기다리기도 하며 장소[處]48)를 기다리기도 하면서 과보를 받는다.
마치 사람이 전륜성왕과 같이 복을 받아야 하면 전륜성왕의 좋은 세상을 기다리다가 그때에 나와서 비로소 받는 것과 같나니, 이것은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사람을 기다린다 했는데, 사람이란 곧 전륜성왕을 말한다.
장소를 기다린다 함은 전륜성왕이 나오게 되는 그 장소이다.
또 반드시 과보를 받을 업이면 기능이나 공훈을 기다리지도 않고 좋거나 궂거나 간에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오는 것이니,
마치 천상에 태어나는 사람에게는 복과 쾌락이 저절로 이르고, 지옥에 태어나는 사람에게는 죄와 고통이 저절로 따르는 것과 같다.
인연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 업은 깊고 중하기 때문이다.
또 반드시 과보를 받는 업이면 마치 비유리(毘琉璃)49)의 군사들이 도(道)를 얻은 7만 2천의 모든 사람과 5계(戒)를 지닌 한량없는 우바새(優婆塞)를 살해할 때에 목련(目連)과 같은 큰 신통을 지닌 사람도 그것을 구제할 수 없었던 것과 같으며,
또한 마치 박구라(薄拘羅)50)는 그의 계모[後母]가 불 속ㆍ끓는 물속ㆍ강물 속에다 던져 넣었는데도 죽지 않은 것과 같다.
마치 부처님께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실 적에 비록 출가하여 걸식을 하시면서 좋은 공양을 바라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5백의 수레에 왕이 먹는 음식을 실어 왔고 잎사귀 안에서 멥쌀이 나왔으며 밥에 따라 맛있는 국이 나오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선악의 업을 반드시 받게 된다.
그 밖의 것은 반드시 받는 것은 아니다.
욕계(欲界)란 세 가지의 업보를 받는 곳이다. 곧 즐거운 느낌[樂受]의 업과 괴로운 느낌[苦受]의 업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業]의 업이다.
색계(色界)에서는 두 가지의 업보를 받으니, 즐거운 느낌의 업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업이다.
무색계(無色界)에서는 한 가지의 업보를 받으니, 즉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업이다.
혹은 일[事]을 기다리는 것51)도 있나니, 이 일에 의거하여 업보를 받게 된다.
마치 불가라바왕(弗迦羅婆王)52)의 못 속에서 천 개의 잎사귀가 붙은 큰 수레바퀴만한 금빛 연꽃이 나오자 이로 인하여 그 큰 모임은 유쾌하게 즐거웠으며 많은 사람들이 출가하여 도를 얻게 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온갖 중생들의 모든 업을 지은 곳이 혹은 욕계인가, 색계인가, 무색계인가를 아신다.
욕계면 어느 세계[道]에 있고, 만일 천상의 세계면 어느 하늘에 있으며, 만일 인간이면 어느 천하에 있고, 또 염부제(閻浮提)이면 어느 나라에 있으며, 만일 이 나라이면 어느 성(城)ㆍ어느 마을ㆍ어느 동네ㆍ어느 거리ㆍ어느 집에 있고 어느 장소에 있다 함을 아신다.
또 이 업은 어떠한 때에 지었는가를 아신다.
곧 과거의 한 세상 두 세상 나아가 백천만의 세상에 이르기까지를 아신다.
그리고 이 업의 과보는 이미 얼마를 받았고 얼마는 아직 받지 않았으며, 얼마는 반드시 받을 것이고 얼마는 반드시 받을 것은 아니다 함을 아신다.
또 착하거나 착하지 않게 쓰여지는 사물을 아시나니,
이른바 칼53)이나 몽둥이54)나 교칙(敎勅)55)으로 죽이게 될 것과, 자살(自殺)하거나 혹은 사람을 보내서 죽일 것 등을 아신다.
그 밖의 여러 나쁜 업도 그와 같이 아시고 착한 업도 역시 그와 같이 아신다.
마찬가지로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고 선행을 닦음을 아시나니,
보시할 때에 베푸는 바가 토지인지 방사(房舍)ㆍ의복ㆍ음식ㆍ침구ㆍ7보ㆍ재물인지를 아시고,
계율 가운데서도 받는 계율이 자연계(自然戒)56)인지 심생계(心生戒)57)인지 구언계(口言戒)58)인지 일행계(一行戒)59)인지 소분계(少分戒)인지 다분계(多分戒)인지 만분계(滿分戒)인지 일일계(日日戒)인지 7선도계(善道戒)60)인지 10계(戒)61)인지 구족계(具足戒)인지 정공계(定共戒)62)인지를 아시며,
착한 복을 닦는 것에서도 초선(初禪)인지 2선ㆍ3선ㆍ4선인지 자심(慈心)인지 비ㆍ희ㆍ사심(悲喜捨心)인지를 아신다.
이와 같은 등의 착한 업의 인연이나, 또는 간탐ㆍ성냄ㆍ두려워함ㆍ삿된 소견ㆍ삿된 벗 등에 관한 갖가지 악업의 인연을 아시고,
복된 업의 인연으로서는 믿음ㆍ연민ㆍ공경과 선정과 지혜와 선지식 등의 갖가지 선업의 인연을 아신다.
이 모든 업은 자재(自在)함으로 온갖 하늘과 사람으로서는 바꿀 수 있는 이가 없으며, 억천만의 세상 동안에 항상 그 중생을 따르면서 버리지 않음은,
마치 빚쟁이가 빚진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과 같다.
또 인연을 구족하게 되면 곧 그 과보를 주게 됨이,
마치 땅속에 있는 종자가 인연과 시절의 화합을 얻어서 곧 싹이 나게 되는 것과 같다.
이 업은 중생으로 하여금 6도(道) 가운데에서 생(生)을 받게 함이 화살보다 더 빠르다.
온갖 중생이 다 모든 업보의 몫63)이 있음이,
마치 부모가 재산을 물려주면 아들들이 모두 받아야 할 몫을 얻는 것과 같다.
이 업의 과보는 때가 되면 막거나 중지할 수 없으니, 마치 겁(劫)이 다할 때의 불과 같다.
중생이 태어나야 할 곳에 따라 그곳에 안전하게 잘 놓이게 됨은,
마치 큰 나라의 왕이 자격에 알맞는 관직을 주는 것과 같고,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에 이 업이 와서 그의 마음을 가리우는 것이,
마치 큰 산이 물건들을 가로막는 것과 같으며,
이 업이 갖가지의 몸을 주게 됨은,
마치 조각하는 사람이 갖가지의 형상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만일 사람이 바른 행으로써 지은 업이면 곧 좋은 과보를 주고,
만일 삿된 행으로써 지은 업이면 곧 나쁜 과보를 줌은,
마치 사람이 왕을 섬길 때에 그의 일에 따라 보수를 받는 것 같다.
이와 같이 모든 업의 모양과 과보를 분별하신다.
또 마치 『분별업경(分別業經)』64)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악을 행한 사람도 좋은 곳에 가 나고 선을 행한 사람도 나쁜 곳에 태어나느니라.”
그러자 아난이 말씀드렸다.
“어찌하여 그러한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악인이 지은 금세(今世)의 죄업은 아직 성숙하지 않았는데 전생에 지었던 착한 업이 벌써 성숙한지라, 이 인연 때문에 지금 비록 악을 행하고 있다 하더라도 좋은 곳에 와 났으며,
혹은 죽으려 할 때에 착한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이 생겼으므로 이 인연 때문에 역시 좋은 곳에 태어나기도 하느니라.
선을 행한 사람이 나쁜 곳에 난다 함은,
지금 세상에 짓는 착한 업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과거 세상에 지었던 악이 벌써 성숙한지라,
이 인연 때문에 지금은 비록 선을 행하고 있다 하더라도 불행한 곳에 태어나며,
혹은 죽으려 할 때에 착하지 않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생겼으므로 이 인연 때문에 역시 불행한 곳에 태어나기도 하느니라.”
【문】 성숙하고 성숙하지 않은 이치는 그럴 수 있다 하겠지만, 죽으려 할 때에 잠깐 사이의 마음이 어떻게 종신토록 행한 힘보다 뛰어날 수 있는가?
【답】 이 마음은 비록 잠시 동안이기는 하나 그 마음의 힘이 맹렬하고 날카로우니,
마치 불과도 같고 독과도 같아서,
비록 적은 것이라 하더라도 큰 일을 이룰 수 있다.
이 죽으려 할 때의 마음은 결정코 맹렬하고 씩씩하기 때문에 백 년 동안 행한 힘보다 수승하다.
이 맨 나중의 마음을 대심(大心)이라 하는데 몸과 모든 감관을 버리는 일이 급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싸움터에 들어갔을 때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음을 씩씩하다[健]고 하는 것과 같다.
마치 아라한이 이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때문에 아라한의 도를 얻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갖가지 죄복의 업보에 대해 그 과보를 바꾸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성문(聲聞)의 사람은 다만 나쁜 업에 대한 죄의 과보와 착한 업에 대한 복의 과보만을 알므로 이와 같이 자세히 분별할 수가 없지만,
부처님은 이 업과 업보를 모두 두루 아시는 지혜의 세력이 걸림 없고 끝이 없으면서 무너뜨릴 수가 없기 때문이니,
이것을 두 번째의 힘[第二力]이라 한다.
[세 번째 힘]
선정해탈삼매 정구분별지력(禪定解脫三昧 淨垢分別智力)65)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선(禪)은 4선을 말한다.
부처님은 이 선을 도와주는 도의 법으로서 이름과 모양[名相]ㆍ뜻의 갈래[義分]ㆍ차례[次第]ㆍ훈수(勳修)ㆍ유루(有漏)ㆍ무루(無漏)ㆍ배울 것이 있는 것[學]ㆍ배울 것이 없는 것[無學]ㆍ깨끗한 것[淨]ㆍ더러운 것[垢]ㆍ맛[味]ㆍ맛들이지 않은 것[不味]ㆍ깊은 것[深]ㆍ얕은 것[淺]ㆍ분별(分別) 등을 다 아신다.
8해탈(解脫)은 마치 선(禪) 중에서 모양을 분별하여 설명한 것과 같다.
선(禪)은 온갖 색계의 정[色界定]을 포섭하며 해탈을 설명하면서 온갖 정(定)과 선바라밀(禪波羅密)66)을 포섭하나니, 곧 이 모든 해탈ㆍ선정ㆍ삼매의 해탈ㆍ선ㆍ삼매를 모두 정(定)이라 한다. 곧 정은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 것[心不散亂]을 이름한다.
더러움[垢]은 탐애와 소견과 잘난 체함[慢] 등의 모든 번뇌를 말하고, 깨끗함[淨]은 진실한 선정[眞禪定]이라 하나니, 탐애ㆍ소견ㆍ잘난 체함 등의 번뇌가 섞이지 않음이 마치 순금과 같은 것이다.
분별(分別)이라 함은,
모든 선정 가운데에서 한마음으로 행하는가[一心行], 한마음으로써 행하지 않는가[不一心行], 항상 행하는가[常行], 항상 행하지 않는가[不常行], 들어가기 어려운가[難入], 들어가기 쉬운가[易入], 나오기 어려운가[難出], 나오기 쉬운가[易出], 따로따로 모양을 취할 것인가[別取相], 전체로 모양을 취할 것인가[總取相], 바꾸어 다스릴 것인가[轉治], 바꾸어 다스리지 않을 것인가[不轉治] 등을 말한다.
바꾸어 다스린다 함은,
마치 음욕에 대해서는 자심관(慈心觀)으로 다스리고,
성내는 사람은 부정관(不淨觀)으로 다스리며,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변무변(邊無邊)67)을 사유(思惟)하게 하고,
들뜬 마음에 대해서는 지혜로써 모든 법을 분별하게 하며,
매몰된 마음[沒心]이라면 그 마음을 끌어내는 것[攝]과 같은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바꾸어 다스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 선정 중에서는 마땅히 때[時]와 머무르는 곳[住處]을 분별하여야 한다.
만일 몸이 야위게 되면 이것은 선정을 행할 때가 아니니,
마치 보살이 고행을 하면서,
“나는 이제 선정을 일으킬 수 없구나”라고 생각한 것과 같으며,
또한 사람들이 많은 곳은 역시 선정을 행할 곳이 아닌 것과 같다.
또 부처님은,
“이 선정은 부서져가는 것[失]68)이고, 이 선정은 머무는 것[住]69)이고,
이 선정은 더욱 늘어나며[增益]70), 이 선정은 열반에 이르게 한다”고 아신다.
또 부처님은,
“이 사람은 정(定)에 들기 어렵고 정에서 나오기도 어렵다. 들기도 쉽고 나오기도 쉽다.
들기는 쉽지만 나오기는 어렵다. 들기도 어렵고 나오기도 어렵다”고 함을 다 아신다.
또 부처님은,
“이 사람은 이 같은 선(禪)을 얻어야 한다”고 아시며,
“이 사람은 선을 잃고 5욕을 받으리라”고 아시며,
“이 사람은 5욕을 받고 나서 도로 선을 얻고, 이 선에 의거하여 아라한이 되리라”고 아신다.
이와 같은 온갖 선정과 해탈이 곧 삼매이다.
이 선정을 부처님은 심히 깊은 지혜로써 모두 다 아시며 무너뜨릴 수도 없고 보다 나은 이도 없나니,
이것을 세 번째의 힘[第三力]이라 한다.
[네 번째 힘]
중생의 상하 근기를 아는 지혜의 힘[知衆生上下根智力]71)이라 함은,
부처님은 중생에 대해,
“이 사람은 영리한 근기[利根]72)이다, 둔한 근기[鈍根]73)이다, 중간 근기[中根]74)이다”라고 아시나니,
날카로운 지혜를 상(上)75)이라 하고 무딘 지혜를 하(下)76)라 한다.
부처님은 이 상하근지력(上下根智力)으로써 온갖 중생을 분별하시되,
“이것은 영리한 근기요 이것은 중간 근기며 이것은 둔한 근기이다.
이 사람은 이러한 근기라 이 세상에서는 다만 초과(初果)만을 얻을 수 있고 다시는 그 밖의 것은 얻을 수 없다.
이 사람은 다만 제2과(果) 또는 제3과 또는 제4과만을 얻을 수 있다.
이 사람은 다만 초선(初禪)만을 얻을 수 있다.
이 사람은 다만 제2선 또는 제3선 또는 제4선만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 멸진정(滅盡定)77)도 역시 그와 같다.
이 사람은 시해탈(時解脫)78)을 증득할 것이다.
이 사람은 불시해탈(不時解脫)79)을 증득할 것이다.
이 사람은 성문 가운데 첫째갈 수 있다.
이 사람은 벽지불 가운데 첫째갈 수 있다.
이 사람은 6바라밀을 구족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리라”고 분별하신다.
이렇게 아신 뒤에 간략하게 말씀해 주어서 제도시키고, 자세히 말씀해 주어서 제도시키며 혹은 간략하게 또는 자세하게 말씀해 주어서 제도시키신다.
혹은 부드러운 말로써 가르쳐 주기도 하고, 혹은 간절한 말로써 가르쳐 주기도 하며 혹은 부드럽고도 간절한 말로써 가르쳐 주기도 하신다.
부처님은 또한 분별하시되,
“이 사람은 다른 근(根)은 있지만 신근(信根)이 더욱 나게 해야겠다,
이 사람은 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이 나게 해야겠다,
이 사람은 신근으로써 바른 계위[正位]에 들리라.
이 사람은 혜근으로써 바른 계위에 들리라.
이 사람은 영리한 근기이나 번뇌[結使]에 막혀 있음이 마치 앙군리마라(鴦群梨摩羅)80) 등과 같다,
이 사람은 영리한 근기이면서 번뇌에 막혀 있지 않음이 마치 사리불이나 목련 등과 같다”고 하시나니,
근기가 비록 둔하더라도 막힘이 없음이 마치 주리반타가(周利般陀伽)81)와 같거나 근기가 둔하면서 막혀 있는 이도 다 아신다.
또 “이 사람은 진리를 보아 끊을 바[見諦所斷]는 근기가 둔하나 사유에서 끊을 바[思惟所斷]는 근기가 영리하다.
혹은 사유에서 끊을 바는 둔하나 진리를 보아 끊을 바는 영리하다.
혹은 이 사람은 온갖 근성에 같이 둔하고 같이 영리하다.
혹은 이 사람은 온갖 근성에 같이 둔하지 않고 같이 영리하지도 않다.
혹은 이 사람은 먼저의 인(因)의 힘이 크다.
혹은 이 사람은 지금의 연(緣)의 힘이 크다.
혹은 이 사람은 속박되려 하다가 해탈을 얻었다.
혹은 이 사람은 해탈하려 하다가 속박을 당하였다”고 아신다.
비유하건대 마치 앙군리마라가 어머니를 죽이고 부처님을 해치려 하다가 해탈하게 된 것과 같고,
마치 어느 한 비구가 4선(禪)을 얻었으면서도 증상만(增上慢) 때문에 도리어 지옥으로 들어간 것과 같다.
또 “이 사람은 악도(惡道)에 떨어지리라. 이 사람은 나오기가 어렵고 이 사람은 나오기가 쉬우리라.
이 사람은 빨리 나오겠고 이 사람은 오래오래 되어야 나오리라”고 함을 아신다.
이와 같이 온갖 중생들의 상하 근기의 모양을 모두 다 두루 아시니 무너뜨릴 수 있는 이도 없고 보다 수승할 이도 없다.
이것을 네 번째 힘[第四力]이라 한다.
[다섯 번째 힘]
중생의 갖가지 욕망을 아는 지혜의 힘[知衆生種種欲智力]82)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욕망[欲]83)이란 믿고 기뻐하고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 등을 이름한다.
五욕을 좋아한 이는 마치 손타라난타(孫陀羅難陀)84) 등과 같고,
명문(名聞)85)을 좋아한 이는 마치 제바달다(提婆達多) 등과 같으며,
세간의 재물과 이익을 좋아한 이는 마치 수미찰다라(須彌刹多羅)86) 등과 같고,
출가(出家)를 좋아한 이는 마치 야사(耶舍)87) 등과 같으며,
믿음을 좋아한 이는 마치 발가리(跋迦利)88) 등과 같고,
지계(持戒)89)를 좋아한 이는 마치 라후라(羅睺羅)90) 등과 같으며,
보시를 좋아한 이는 마치 시발라(施跋羅)丹註: 부처님의 장모(姑)인 감로녀(甘露女)가 낳았다.91)와 같다.
두타(頭陀)와 욕망을 멀리 여의기[遠離]를 좋아한 이는 마치 마하가섭(摩訶迦葉)92)과 같고,
좌선(坐禪)93)을 좋아한 이는 마치 예발다(隸跋多)94) 등과 같으며,
지혜를 좋아한 이는 마치 사리불(舍利弗) 등과 같고,
다문(多聞)95)을 좋아한 이는 마치 아난(阿難) 등과 같으며,
비니(毘尼)96) 알기를 좋아한 이는 마치 우바리(優婆離)97) 등과 같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제자에게도 각각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범부에게도 역시 저마다 기뻐하는 것이 있나니, 어떤 이는 음욕을 기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성냄을 기뻐하는 이도 있다.
또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은 음욕이 많다거나 성냄이 많다거나 어리석음이 많다 함을 다 아신다.
【문】 어떤 것이 음욕이 많고 성냄이 많고 어리석음이 많은 모양인가?
【답】 마치 『선경(禪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나니, 3독(毒)의 모양이 이 안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모양을 안 뒤에,
음욕이 많은 사람은 부정(不淨)의 법문으로 다스리고,
성냄이 많은 사람은 자심(慈心)의 법문으로 다스리며,
어리석음이 많은 사람은 인연(因緣)98)의 법문으로 다스리게 된다.
이와 같이 원하는 것을 좇아 법을 말씀하신다.
이른바 착한 욕망일 때는 그 마음을 따라 법을 말씀하심이 마치 배가 흐름을 따르는 것과 같고,
나쁜 욕망일 때는 고언(苦言)99)으로 가르침이 마치 굴대로써 굴대를 나오게 하는 것과 같다.
이 욕지(欲智) 안에서 부처님은 모두 두루 아시니 깨뜨릴 수 있는 이가 없고 보다 수승한 이가 없다.
이것을 다섯 번째의 힘[第五力]이라 한다.
[여섯 번째 힘]
성지력(性智力)100)이라 함은 부처님께서는 세간의 갖가지 다른 성품[別異性]을 아시는 것이다.
성품[性]은 쌓고 익힌 것[積習]이라 하고, 모양[相]은 이 성품으로부터 생기며, 욕망[欲]은 성품에 따라 행위를 짓는 것이다.
간혹 욕망으로부터 성품이 되고 익힌 욕망[習欲]으로 성품을 이루기도 한다.
성품은 깊은 마음속에서 하는 일이요 욕망은 인연 따라 생긴다 하나니, 이것이 욕망과 성품에 대한 분별이다.
세간의 갖가지 다른 것이라 함은 저마다 성품이 많고 성품은 한량없어서 헤아릴 수 없나니, 이것을 세간의 다름[別異]이라 한다.
두 가지의 세간이 있나니, 세계의 세간[世界世間]101)과 중생의 세간[衆生世間]102)이다.
여기서는 다만 중생의 세간을 말할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에게는 이와 같은 성품이 있고 이와 같은 욕망이 있다.
이러한 곳으로부터 왔으며,
선근(善根)103)이나 불선근(不善根)104)을 성취했으며,
제도할 수 있거나 제도할 수 없으며,
일정하거나 일정하지 않으며,
반드시 그렇거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며,
어떠한 행을 행하고, 어느 곳에서 태어나며, 어느 땅에 있다”함을 다 아신다.
또 부처님께서는 이 중생은 갖가지 성품과 모양이 있음을 아시나니,
이른바 향해 나아가는 바에 따라 다음과 같이 치우쳐 많음을 아신다.
“이와 같이 귀히 여긴다, 이와 같이 깊은 마음으로 섬긴다, 이와 같이 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업을 짓는다, 이와 같이 행한다, 이와 같이 번뇌가 있다,
이와 같은 예법(禮法)있다, 이와 같이 결정한다, 이와 같이 위의가 있다,
이와 같이 안다, 이와 같이 본다, 이와 같이 생각하여 분별한다.
그만큼의 번뇌가 생겼다, 그만큼의 번뇌는 아직 생기지 않았다,
집착하는 바에 따라 욕망을 낸다. 욕망에 따라 마음이 물든다,
마음의 물듦에 따라 향해 나아간다, 향하는 것에 따라 귀중히 여긴다,
귀중히 여기는 것에 따라 항상 거칠게 생각[覺]하고 세밀하게 생각[觀]한다,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에 따라 쓸모없는 이론을 다툰다,
쓸모없는 이론에 따라 항상 염(念)한다, 염함에 따라 행을 일으킨다,
행을 일으킴에 따라 업을 짓는다, 업을 지음에 따라 과보가 있다.”
또 부처님은 이 갖가지 성지(性智)의 힘으로써 다음과 같이 아신다.
“이 중생은 제도할 수 있다. 이는 제도할 수 없다.
이는 지금 세상에서 제도할 수 있다. 이는 뒷세상에서 제도할 수 있다.
이는 즉시 제도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때에 제도할 수 있다.
이는 바로 눈앞에서 제도할 수 있다. 이 눈으로 보지 않는 데서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부처님이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성문이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함께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반드시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결코 제도할 수 없다.
이 사람은 간략한 설명으로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자세한 설명으로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간략하게 또는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칭찬해주어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굴복시켜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맞아들여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버리어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세밀한 법으로써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거친 법으로써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간절한 말[苦言]로써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부드러운 말로써 제도할 수 있다.
이 사람은 간절한 말과 부드러운 말로써 제도할 수 있다.
이것은 삿된 소견이다. 이것은 바른 소견이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은 아주 없다[斷滅]는 데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은 항상함[常]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은 있다는 소견[有見]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은 없다는 소견[無見]에 대한 집착이다.
이는 살기를 바란다. 이는 살기를 싫어한다. 이는 부귀의 즐거움을 구한다.
이는 두터운 사견(邪見)에 집착해 있다. 이는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음을 말한다.
이는 삿된 인연을 말한다. 이는 바른 인연을 말한다.
이는 지음이 없는 업[無作業]을 말한다.
이는 삿되게 짓는 업을 말한다. 이는 바르게 짓는 업을 말한다.
이는 구하지 않을 것을 말한다.
이는 삿되게 구할 것을 말한다. 이는 바르게 구할 것을 말한다.
이는 나를 귀히 여긴다. 이는 5욕을 귀히 여긴다.
이는 이양(利養) 얻는 것을 귀히 여긴다. 이는 음식을 귀히 여긴다.
이는 실없는 일을 말하기 좋아한다. 이는 대중들을 좋아한다.
이는 시끄러운 데를 좋아한다. 이는 멀리 여의기를 좋아한다.
이는 탐애를 많이 행한다. 이는 소견을 많이 낸다.
이는 믿음을 좋아한다. 이는 지혜를 좋아한다.
이것은 수호해야 한다. 이것은 버려야 한다.
이는 계율 지니기를 귀히 여긴다. 이는 선정을 귀히 여긴다. 이는 지혜를 귀히 여긴다.
이는 깨치기가 쉽겠다. 이는 강설(講說)해 주어야 깨치겠다.
이는 인도할 수 있겠다. 이는 구절마다 잘 이해한다.
이는 영리한 근기[利根]이다. 이는 둔한 근기[鈍根]이다. 이는 중간의 근기[中根]이다.
이는 벗어나게 하기도 쉽고 구제하기도 쉽겠다.
이는 벗어나게 하기도 어렵고 구제하기도 어렵겠다.
이는 죄를 두려워한다. 이는 중한 죄가 있다.
이는 생사를 두려워한다. 이는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는 음욕이 많다. 이는 성냄이 많다. 이는 어리석음이 많다.
이는 음욕이나 성냄이 많다. 이는 성냄이나 어리석음이 많다. 이는 음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 모두 많다.
이는 번뇌가 얇다. 이는 번뇌가 두텁다.
이는 때[垢]가 적다. 이는 때가 많다.
이는 지혜가 가리워져 있다. 이는 겉치레의 지혜만 있다.
이는 넓은 지혜가 있다.
“이 사람은 5중(衆)의 모양과 12입(入)ㆍ18계(界)ㆍ12인연(因緣)과 가능함[是處]ㆍ불가능함[不是處]과 괴로움[苦]ㆍ쌓임[集]ㆍ사라짐[滅]ㆍ도(道)를 잘 알며, 정(定)에 잘 들어가고 정에서 나오고 정에 머무른다.”
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아신다.
“이는 욕계(欲界)의 중생이다. 이는 색계(色界)의 중생이다. 이는 무색계(無色界)의 중생이다.
이는 지옥ㆍ축생ㆍ아귀ㆍ인간ㆍ천상의 중생이다.
이는 난생(卵生)105)ㆍ태생(胎生)106)ㆍ습생(濕生)107)ㆍ화생(化生)108)이다.
이는 모양이 있다[有色], 이는 모양이 없다[無色],
이는 생각이 있다[有想], 이는 생각이 없다[無想],
이는 목숨이 짧다. 이는 목숨이 길다.
이는 다만 범부로서 아직 욕망을 여의치 못한 이다.
이는 범부로서 아래 경지[下地]의 욕망은 여의었으나 아직 선욕(禪欲)을 여의지 못한 이다.
이와 같이 하여 나아가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에까지 이르며, 이는 도를 향하고[向道], 이는 과위를 얻고[得果],
이는 벽지불이고, 이는 모든 부처님의 무애해탈(無礙解脫)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5도(道)ㆍ4생(生)ㆍ3취(聚)ㆍ가명(假名)ㆍ장애[障]ㆍ음(陰)ㆍ입(入)ㆍ계(界)와 선근(善根)ㆍ불선근(不善根)ㆍ모든 번뇌[結使]ㆍ땅[地]ㆍ업(業)ㆍ과위[果]를 분별하시며,
이는 제도할 수 있고 이는 제도할 수 없다고, 사라짐[滅]의 지혜로써 분별하신다.
이와 같은 등의 분별로써 세간의 갖가지 다른 성품을 알고 장애 없는 해탈을 얻으셨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다름을 부처님은 모두 두루 아시니 깨뜨릴 수 있는 이도 없고 보다 수승한 이도 없다.
이것을 여섯 번째의 힘[第六力]이라 한다.
[일곱 번째 힘]
일체지처도지력(一切至處道智力)109)이라 했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업(業)이 곧 길[道]110)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업의 인연 때문에 두루 5도(道)를 다니고, 업이 있으면 능히 업을 끊고서 이르는 곳이 있기 때문이니,
이른바 세 가지 거룩한 길의 갈래[三聖道分]와 무루의 마음[無漏思]이다.
이 때문에 모든 업이 바로 온갖 곳에 이르는 길[一切至處道]이라 한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오별오지삼매(五別五智三昧)단주(丹注)에서는 무루삼매선오지(無漏三昧禪五支)라 한다.가 온갖 곳에 머무르면서 이익되는 일을 이루어 마친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제4선(禪)이 곧 그것이다. 왜냐하면, 제4선은 온갖 모든 선정이 이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든 경전에서의 설명과 같이 이 착한 마음[善心]과 안정된 마음[定心]과 어지럽지 않은 마음[不辭心]은 마음을 가다듬어서 모두가 제4선 안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념처(身念處)와 같은 것이 곧 이르러야 할 곳의 길이니, 이 모든 길은 이익의 근본이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온갖 거룩한 길[聖道]111)이 그것이니, 이 거룩한 길로써 뜻대로의 이익을 얻는다”고 하며,
어떤 논자(論者)는 말하기를,
“온갖 착한 길과 온갖 불행한 길과 온갖 거룩한 길에서는 저마다 모든 길의 이를 곳[至處]을 알게 되나니, 『모수경(毛豎經)』112)에서의 설명과 같다”고 한다.
부처님은 이 모두를 두루 아시니, 무너뜨릴 수 있는 이도 없고 보다 수승한 이도 없다.
이것을 일곱 번째의 힘[第七力]이라 한다.
[여덟 번째 힘]
숙명지력(宿命智力)이라 했는데,
숙명에는 세 가지가 있다.
곧 신통[通]이 있고 명(明)이 있고 힘[力]이 있는 것이다.
범부의 사람은 다만 신통이 있을 뿐이고, 성문의 사람은 신통도 있고 명도 있으며, 부처님은 신통도 있고 명도 있고 힘도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범부의 사람은 다만 전생에 겪었던 일만을 알 뿐이고 업의 인연이 상속함을 모르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범부의 사람은 다만 신통만이 있고 명은 없는 것이다.
성문의 사람은 쌓임의 진리[集諦]를 알기 때문에 업의 인연이 상속하면서 생김을 분명하게 안다.
이 때문에 성문의 사람은 신통도 있고 명도 있다.
만일 부처님의 제자라면 먼저 범부일 때에 전생 일을 아는 지혜[宿命智]를 얻고 견제도(見諦道)에 들어가서 쌓임[集]의 인연을 알아 제8의 무루의 마음[無漏心]에서 소견을 끊게 되기 때문에 신통이 변하여 명이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명은 소견의 근본[見根本]이라 하기 때문이다.
만일 부처님의 제자가 먼저 거룩한 도를 얻고 뒤에 전생을 아는 지혜가 생겨도 역시 쌓임[集]의 인연의 힘을 알기 때문에 통이 변하여 명이 된다.
【문】 부처님께서는 본시 보살이었을 때에 먼저 전생 일을 아는 지혜를 얻으셨으며 모든 보살은 무소유처(無所有處)113)의 모든 번뇌를 여읜 뒤에 거룩한 도에 들거늘,
어찌하여 부처님은 “나는 초저녁[初夜]에 처음으로 명(明)을 얻었다”고 하셨는가?
【답】 이때는 명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중 속에 계시면서 “나는 그때에 이 명을 얻었다”고 말씀하셨을 테지만,
대중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이 명을 초저녁에 얻었다”고 하신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국왕이 아직 왕이 되지 않았을 때 아들을 낳았으나,
뒤에 왕이 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왕자(王子)를 어느 때에 낳았습니까?”라고 물으면,
대답하기를,
“왕자는 모시[某時]에 낳았다”고 하나니,
이 낳았을 때는 아직 왕이 되기 전이었으나, 지금은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왕자라 여기면서,
“왕자는 그때에 낳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숙명지(宿命智)가 생긴 때에는 아직 명(明)이 아니고 다만 신통이라 부르지만, 새벽[後夜]에 쌓임의 인연을 알았기 때문에 신통이 변하여 명이 된 것이다.
이에 뒷날 대중 가운데에서 말씀시기를,
“나는 초저녁에 이 명을 얻었다”고 하신 것이다.
【문】 통과 명의 뜻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힘이라 하는가?
【답】 부처님은 이 명으로써 자기 자신과 중생을 아시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세계의 전생 인연과 겪었던 갖가지를 모두 두루 아시므로 이것을 힘이라 하며,
이것을 여덟 번째의 힘[第八力]이라 한다.
[아홉 번째의 힘]
생사지력(生死智力)이라 함은,
부처님께서는 천안(天眼)으로써 중생의 나고 죽고 하는 곳을 아신다.
범부는 이 천안으로써 아무리 많이 보아도 사천하(四天下)까지 보고 성문은 아무리 많이 보아도 겉으로 소천(小千)세계114)를 보며, 그 위와 아래도 역시 두루 보게 된다.
【문】 대범천왕(大梵天王)115)도 역시 천(千)의 세계를 볼 수 있거늘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대범천왕은 스스로 천(千)의 세계 안에 서서는 곧 두루 보게 되지만, 만일 가[傍]에 서게 된다면 그 밖의 곳은 보지 못한다.
그러나 성문은 그렇지 않아서 머무르고 있는 곳에서 언제나 천의 세계를 볼 수 있고,
벽지불은 백천의 세계를 보며,
모든 부처님은 한량없고 끝없는 모든 세계를 보신다.
범부가 지닌 천안의 지혜는 바로 신통[通]이지 명(明)이 아닌 것도 역시 그와 같다.
곧 다만 있는 일들만을 보고 업의 인연을 따라 생을 받는 것을 보지 못하나니,
마치 숙명(宿命)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또 천안을 얻은 사람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이는 아니로두(阿泥盧豆)인데 색계(色界)의 4대(大)로 만들어진 물질로서 절반[半頭]만이 청정한 것이 그의 천안이지만,
부처님의 천안은 4대로 만들어진 물질로서 완전하게[遍頭] 청정하나니,
여기에 차별이 있다.
또 성문이 머무르는 삼매 중에서 천안을 얻으면 곧 그 머무른 바의 삼매 중에서 유각유관삼매(有覺有觀三昧)나 무각유관삼매(無覺有觀三昧)나 무각무관삼매(無覺無觀三昧)를 능히 보며,
부처님은 들으신 삼매 안에 머무르는 대로 보고 싶으면 모두 보신다.
무각무관삼매에 의거하여 천안을 얻기도 하고, 유각유관삼매나 무각유관삼매 가운데 들어 능히 보시기도 한다.
또 성문의 사람은 이 천안으로써 볼 때에 머무르고 있는 삼매의 마음이 다른 삼매에 들어가면 천안이 곧 소멸되지만,
부처님은 그렇지 않아서 마음이 비록 삼매에 드셨다 하더라도 천안은 소멸되지 않는다.
이 지혜로써 온갖 중생이 나고 죽고 하면서 나아가는 바를 두루 아시니, 무너뜨릴 수 있는 이도 없고 보다 뛰어난 이도 없다.
이것을 아홉 번째의 힘[第九力]이라 한다.
[열 번째의 힘]
【문】 누진지력(漏盡智力)116)에 있어서 아홉 가지 지력[九力]은 지혜의 분별에서는 차별이 있지만 그 번뇌가 다하는 일[漏盡]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온갖 성문과 벽지불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비록 번뇌가 다한 것은 동일하다 하더라도 지혜117)의 분별에서는 큰 차별이 있다.
성문은 지극히 큰 힘으로 사유에서 끊어야 할[思惟所斷] 번뇌[結使]를 생분(生分)118)과 주분(住分)119)과 멸분(滅分)120)의 세 때에 끊게 되지만,
부처님은 그렇지 않아서 하나의 생분시(生分時)에 모두 다 끊는다.
성문은 견제에서 끊어야 할[見諦所斷] 번뇌는 생길 때에 끊고 사유에서 끊어야 할 것은 세 때에 소멸하지만,
부처님은 견제에서 끊어야 할 것이나 사유에서 끊어야 할 것이나 모두 다름이 없다.
성문은 처음 거룩한 도[聖道]에 들어갈 때에 들어갈 때와 도달할 때가 다르지만,
부처님은 곧 한마음 안에서 들어가기도 하고 도달하기도 하며,
한마음 안에서 일체지(一切智)121)를 얻고 한마음 안에서 온갖 장애를 무너뜨리며,
한마음 안에서 온갖 불법을 얻는다.
또 모든 성문에는 두 가지의 해탈이 있으니, 번뇌의 해탈[煩惱解脫]122)과 법장의 해탈[法障解脫]123)이 그것이다.
부처님 역시 온갖 번뇌의 해탈이 있고 또한 온갖 법장의 해탈이 있으시다.
하지만 부처님은 저절로 지혜를 얻으며, 성문은 가르치신 도(道)에 따라 행하여 얻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부처님께서 지혜로써 온갖 중생의 번뇌를 끊는다면 그 지혜는 역시 다하지도 않고 줄지도 않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불이 이글거리는 철환(鐵丸)을 약간의 솜 위에다 놓으면 비록 이 솜은 탄다 할지라도 불의 뜨거운 세력은 줄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온갖 번뇌를 다 태운다 할지라도 그 지혜의 힘은 역시 줄어지지 않는다.”
또 성문은 다만 자기 자신의 번뇌가 다한 것만을 알지만,
모든 부처님은 자신의 번뇌가 다한 것도 아시고 다른 이들의 번뇌가 다한 것도 아시나니,
마치 『정경(淨經)』124) 중에서 설명과 같다.
또 부처님만이 유독 중생의 마음속에서 분별하는 98사(使) 196전(纏)125)이 있음을 아시며, 부처님을 제외하면 아는 이가 없다.
부처님만이 또한 유독 고법지(苦法智)와 고비지(苦比智)에서 끊는 그러한 번뇌의 성품을 아신다. 나아가 도비지(道比智)에서도 역시 그와 같으며,
사유에서 끊어야 할 9해탈도(解脫道)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부처님은 온갖 중생의 이러한 일을 모두 두루 아시니, 성문이 조금 알고 조금 설명하는 것은 모두가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누진지(漏盡智)의 세력이 크셔서 무너뜨릴 수 있는 이도 없고 보다 수승한 이도 없나니,
이것을 열 번째의 힘[第十力]이라 한다.
[10력 사이의 관계]
【문】 이 10력에서 어느 지혜가 가장 수승한가?
【답】 각각 자기 지혜의 일에서는 그 큼이 마치 물은 능히 젖게 할 수 있고 불은 능히 타게 할 수 있는 것과 같나니, 저마다 스스로의 힘이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첫 번째의 힘이 가장 크나니, 10력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며,
어떤 이는 말하기를,
“누진력(漏盡力)이 가장 크나니, 일을 마치고 열반을 얻기 때문이다”고 한다.
또한 논자(論者)는 말하기를,
“이 10력은 모두가 장애 없는 해탈[無礙解脫]을 근본으로 삼으므로 장애 없는 해탈이 가장 으뜸이다”라고 한다.
[10력을 말씀하신 까닭]
【문】 만일 이 10력이 유독 부처님만의 일이라면 제자로서는 지금의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인데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말씀하신 것인가?
【답】 10력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해서이고, 지혜 없는 사람이 마음을 결정하여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4중(衆)126)으로 하여금,
“우리들의 큰 스승만이 홀로 이러한 힘이 있으시며 온갖 중생들과는 공통되지 않는다”며 기뻐하게 하려는 까닭이다.
또 모든 외도들이 말하기를,
“교담씨(憍曇氏)127) 사문은 항상 고요한 것에 머물러 지혜가 움츠러져 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지성스런 말씀으로,
“나는 열 가지 지력(智力)과 4무소외(無所畏)에 안주해서 두루 갖추었다”고 하신 것이다.
대중 안에 계시면서 두루 갖춘 지혜의 말씀으로 중생을 교화하면서 마치 사자의 외침처럼 범륜(梵輪)을 굴리시나니, 온갖 외도나 하늘이나 세상의 사람으로서는 굴릴 수 있는 이가 없다.
이러한 비방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이 10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문】 겸손한 사람이라면 한 가지 일의 지혜조차도 자신을 칭찬하지 않거늘,
하물며 나가 없고[無我] 집착함이 없는[無所著] 사람이라면서 스스로 10력을 칭찬함이겠는가?
이러한 게송이 있다.
자기를 칭찬하고 자기를 헐뜯으며
다른 이를 칭찬하고 다른 이를 헐뜯는
이러한 네 가지 일이야말로
지혜로운 이는 행하지 않는다.
【답】 부처님은 비록 나가 없고 집착함이 없지만, 한량없는 힘이 있으신지라 대비(大悲)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만 10력을 말씀할 뿐이요 자신을 칭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비유하건대 마치 훌륭한 장사꾼의 길잡이가 나쁜 도적들이 그 장사꾼들을 속이면서 길이 아닌 데를 지시하는 것을 보면 길잡이는 가엾이 여기는 생각 때문에 장사꾼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이니,
그대들은 저 속임수를 쓰는 자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삿된 의사들이 병자들을 속이면 어진 의사는 그들을 가엾이 여기며 말하기를,
“나에게는 좋은 약이 있으니 당신들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저 속임수를 믿고 스스로 고생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 부처님의 공덕은 깊고 무한하여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않는다면 아는 이가 없다.
중생들을 위하여 조금만이라도 말씀하면 이익되는 것이 매우 많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스스로 이 10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제도해야 할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들을 위하여 말씀하시니, 해야 할 말씀 가운데서 차례로 10력을 말씀해 주신다.
만일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제도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스스로 말씀하신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해와 달은 나오면서,
“나는 천하를 비추어 주므로 마땅히 명칭이 있어야 하리라”고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과 같다.
해와 달이 이미 나왔으면 반드시 저절로 명칭은 있게 된다.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명칭이 있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그 공덕을 말씀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 청정한 말씀으로 설법하면 그 광명은 중생의 어리석은 어두움을 깨뜨리게 되므로 저저로 큰 명칭이 있게 되나니,
그러므로 부처님은 스스로 10력 등의 모든 공덕을 말씀하신 것일 뿐 아무런 허물이 없다.
힘[力]이란 능히 이룩함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열 가지의 힘[十種力]으로써 지혜를 더욱 자라나게 하므로 논의사(論議師)128)를 깨뜨리고,
이 열 가지 힘으로써 지혜를 더욱 자라나게 하므로 법을 잘 말씀하신다.
이 열 가지 힘으로써 지혜를 더욱 자라게 하므로 따르지 않는 이를 꺾어 조복할 수 있고,
이 열 가지 힘으로써 지혜를 더욱 자라나게 하므로 모든 법에서 자유자재할 수 있나니,
마치 큰 나라의 왕이 신민(臣民)과 대중 가운데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성문의 법[聲聞法]으로써 10력의 뜻을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1)
이에 해당하는 범어는 yogaḥ karaṇīyaḥ. ‘반야바라밀을 향해 노력을 기울인다’는 의미이다.
2)
범어로는 navasaṁjñāḥ.
3)
범어로는 aṣṭānusmṛtayaḥ.
4)
범어로는 saptariṁśad bodhipākṣikadharmāḥ.
5)
범어로는 anupalambhaśūnyatā.
6)
범어로는 śrāvakaniyāma.
7)
범어로는 paripūrayati. ‘완전하게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8)
해당하는 범문은 prajñāpāramitāyāṁ śikṣitavyam. ‘반야바라밀다에 대해 배워야만 한다,’ ‘반야바라밀다를 향해 배워야만 한다’이다.
9)
범어로는 sthāna. ‘가능한 일’을 의미한다.
10)
범어로는 asthāna. ‘불가능한 일’을 의미한다.
11)
해당하든 범어는 indriyaparāparatā. 곧 ‘근기의 수승함과 저열함’을 의미한다.
12)
범어로는 uṣitaṁ brahmacaryam. uṣitaṁ의 어근 √vas는 ‘살다, 머물다’(dwell, live)외에 ‘확고해지다(to be firm)’ 등의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는 후자에 해당. 곧 ‘범행이 확고해졌다’이다.
13)
범어로는 duḥkhakṣayamārga.
14)
범어로는 buddhānusmṛtisamādhi.
15)
범어로는 dharmakāya.
16)
종류에 해당하는 범어는 ākāra로서, ‘밖으로 드러나는 모양’이나 ‘구조’를 뜻하는 말이다.
17)
범어로는 sarvadarśin.
18)
범어로는 apratihatajñānadarśana.
19)
범어로는 Lokatrātṛ.
20)
범어로는 Bhagavat. 세존(世尊)을 말한다.
21)
범어로는 Dhīra.
22)
범어로는 Puruṣasiṁha.
23)
범어로는 Mahāguṇasāgara.
24)
범어로는 vyākaraṇa. 수기(授記)를 말한다.
25)
범어로는 vāyusama.
26)
범어로는 pṛthivīsama.
27)
범어로는 tejaḥsama.
28)
범어로는 각각 Deva, Nāga, Yakṣa.
29)
범어로는 saptaratna. 금(金, suvarṇa)ㆍ은(銀, rūpya)ㆍ유리(琉璃, vaiḍūrya)ㆍ수정(水晶, sphaṭika)ㆍ차거(車渠, musāragalva)ㆍ산호(珊瑚, lohitamuktikā)ㆍ마노(瑪瑙, aśmagarba). 경설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다.
30)
범어로는 cintāmaṇi.
31)
범어로는 sthānāsthānajñānabala.
32)
범어로는 karmavipākajñānabala.
33)
범어로는 karmāvaraṇa. 죄업(罪業)이라고 하기도 한다.
34)
범어로는 vipākāvaraṇa.
35)
범어로는 indriyaparāparajñānabala.
36)
범어로는 nānādhimuktijñānabala.
37)
범어로는 sarvatragāminīpratipajjñānabala.
38)
범어로는 vimokṣamukha.
39)
범어로는 pūrvanivāsajñānabala. 곧 ‘전생에 머물던 일을 아는 힘’을 말한다.
40)
범어로는 cyutyupapādajñābala.
41)
범어로는 upapattisthāna. ‘태어나는 곳’ 혹은 ‘태어나 머무는 상황’을 말한다.
42)
범어로는 āsravakṣayajñānabala.
43)
범어로는 Bahudhātukasūtra.
44)
범어로는 upadeśācārya.
45)
범어로는 paṇḍaka. 남근이 제거된 남자 혹은 완전한 남근을 갖추지 못한 자를 말한다.
46)
범어로는 Uttarāvatī, Uttarakuru.
47)
해당 범문은 dṛṣṭadharmavedanīya. ‘눈에 보이는 업으로 인하여’를 의미한다.
48)
범어로는 sthāna.
49)
범어로는 Virūḍhaka, Viḍūḍabha. 비루리(毘樓璃)라고도 한다. 파세나디왕이 왕비감을 요구하자 석가족은 신분이 낮은 여자를 대신 보냈는데,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비루리이다. 그는 뒤에 이 일을 알고는 크게 분개해 사위성을 공격해 석가족을 멸망시켰다고 한다.
50)
범어로는 Bakkula.
51)
범어로는 vastvapekṣa.
52)
범어로는 Pukkusāti.
53)
범어로는 śastra.
54)
범어로는 daṇḍa.
55)
해당 범어는 vadhaśāsana. 곧 살해의 징벌을 말한다.
56)
범어로는 dharmatāprātilambhikaśīla.
57)
범어로는 caitasikaśīla.
58)
범어로는 vākśīla.
59)
범어로는 ekadivasaśīla.
60)
범어로는 saptakuśalakarmapatha.
61)
범어로는 daśa-śīla.
62)
범어로는 samādhi-śīla.
63)
범어로는 karmadāyāda.
64)
범어로는 Karmavibhaṅgasūtra.
65)
범어로는 dhyānavimokṣasamādhisamāpattīnām. saṁkleśo vyavadānaṁ vya- vasthānam.
66)
범어로는 dhyānapāramitā.
67)
범어로는 antānantabhāvanā. ‘끝이 있고 끝이 없음’을 말한다.
68)
범어로는 dhvaṁsa.
69)
범어로는 sthiti.
70)
범어로는 vardhana.
71)
중생의 상하 근기를 아는 지혜의 힘[知衆生上下根智力]이다. 범어로는 parapud- galānām indriyaparāparajñānabalam.
72)
범어로는 tīkṣṇendriya.
73)
범어로는 mṛdvindriya.
74)
범어로는 tīkṣṇajñāna.
75)
범어로는 para.
76)
범어로는 apara.
77)
범어로는 saṁjñāvedayitanirodhasamāpatti.
78)
범어로는 samayavimukta.
79)
범어로는 asamayavimukta.
80)
범어로는 Aṅgulimāla.
81)
범어로는 Cūḍapanthaka.
82)
범어로는 nānādhimuktijñānabala.
83)
범어로는 adhimukti. 일종의 욕심을 말한다.
84)
범어로는 Saundarananda.
85)
범어로는 yaśas.
86)
범어로는 Sunakṣatra.
87)
범어로는 Yaśas.
88)
범어로는 Vakkali.
89)
범어로는 śikṣā.
90)
범어로는 Rāhula.
91)
범어로는 Śaivala.
92)
범어로는 Mahākāśyapa.
93)
범어로는 pratisaṁlayana.
94)
범어로는 Revata.
95)
범어로는 bahuśrautya.
96)
범어로는 vinaya.
97)
범어로는 Upāli.
98)
범어로는 pratītyasamutpāda.
99)
범어로는 paruṣa-vacana. paruṣa는 ‘마디가 많은,’ ‘거친,’ ‘격렬한’ 등을 의미하는 형용사이다.
100)
범어로는 dhātujñānabala.
101)
범어로는 lokadhātu.
102)
범어로는 sattvadhātu.
103)
범어로는 kuśalamūla.
104)
범어로는 akuśalamūla.
105)
범어로는 jarāyuja.
106)
범어로는 aṇḍaja.
107)
범어로는 saṁsvedaja.
108)
범어로는 upapāduka.
109)
범어로는 sarvatragāminīpratipajjañānabala.
110)
범어로는 pratipad.
111)
범어로는 āryamārga.
112)
범어로는 Romaharṣaṇīyasūtra.
113)
범어로는 ākiñcanyāyatanaṃ.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114)
범어로는 sāhasracūḍika lokadhātu.
115)
범어로는 Brahmarāja.
116)
범어로는 āsravakṣayajñānabala.
117)
범어로는 jñānaviśeṣa.
118)
범어로는 utpādabhāga. ‘생겨날 때’를 말한다.
119)
범어로는 sthitibhāga. ‘머물 때’를 말한다.
120)
범어로는 bhaṅgabhāga. ‘소멸할 때’를 말한다.
121)
범어로는 sarvajñāna.
122)
범어로는 kleśavimukti. ‘번뇌로부터의 해탈’을 말한다.
123)
범어로는 dharmāvaraṇavimukti. ‘법의 장애로부터의 해탈’을 말한다.
124)
범어로는 Praśāntasūtra.
125)
전(纏)이란 번뇌(anuśaya)를 말한다.
126)
범어로는 catuṣpariṣad. 사부대중을 말한다.
127)
범어로는 Gautama.
128)
범어로는 upadeśācārya.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