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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2권
9. 거룩한 마음가짐(梵住)
1. 계속해서 생각함(隨念)의 명상주제 다음에,
자애(mettā, 慈),
연민(karuṇā, 悲),
더불어 기뻐함(muditā, 喜),
평온(upekkhā, 捨)이라는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brahmavihāra, 梵住)을 설명한다.
9.1. 자애 수행
이 가운데서 이제 자애를 닦고자하는 수행자는,
만일 그가 초심자라면 장애를 끊고 명상주제를 배워 공양을 마친 뒤,
식곤증을 떨쳐버리고 한적한 곳에서 잘 마련된 자리에 편안히 앉아,
먼저 성냄의 위험과 인욕의 이익을 반조해야 한다.
2. 왜 그런가?
이 수행으로 성냄을 버려야 하고 인욕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지 못한 허물을 버릴 수 없고 알지 못한 이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반이여, 성내거나, 성냄에 휩싸이거나, 마음이 [성냄에] 시달릴 때 생명조차 앗아간다(,A.i.216)”라고 시작하는 경을 통해 성냄의 허물을 보아야 한다.
“관용이 [그 특징인] 인욕은 최상의 고행이고
열반은 최상이라고 부처님들은 설하신다(D.ii. 49: Dhp.184)”
“인욕의 힘과 [인욕의] 힘의 군대를 가진 자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설한다(Dhp.399)”
“인욕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S.i.222)”
이상과 같은 경 등을 통해서 인욕의 이익을 보아야 한다.
3. 이와 같이 성냄의 허물을 살펴보고 성냄으로부터 마음을 격리시켜, [많은] 이익을 가진 인욕에다 묶어두기 위해서 자애의 수행을 시작해야 한다.
수행을 시작할 때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제일 먼저 자애를 닦아서는 안되고,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자애를 닦아서는 안된다’고,
먼저 사람에 대한 허물을 알아야 한다.
4. 왜냐하면 이 자애는
① 싫어하는 사람 ② 아주 좋아하는 친구 ③ 무관한 사람 ④ 원한 맺힌 사람,
이 네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는 제일 먼저 닦아서는 안된다.
특히 이성에 제한하여 자애를 닦아서는 안되고,
죽은 자에 대해서는 절대로 자애를 닦아서는 안된다.
5. 무슨 이유로 싫어하는 사람 등에 대해서 제일 먼저 자애를 닦아서는 안되는가?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자의 위치에 두는 것은 피곤하기 때문이다.
아주 좋아하는 친구를 무관한 사람의 위치에 두는 것도 피곤하다. 그 친구에게 사소한 괴로움이라도 일어나면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다.
무관한 자를 존경하는 분의 위치와 좋아하는 자의 위치에 두는 것도 피곤하다.
원한 맺힌 사람을 생각 할 때는 노여움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싫은 사람 등에 대해 제일 먼저 자애를 닦아서는 안된다.
6. 이성에 대해서 자애를 닦을 때 애욕이 일어난다.
한 대신의 아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친근한 장로께 여쭈었다.
‘존자시여, 어떤 사람들에 대해 자애를 닦아야 합니까?’
장로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의 부인을 사랑했다. 그가 자애를 닦을 때 밤새 벽과 싸웠다.
그러므로 이성에 제한하여 자애를 닦아서는 안된다.
7. 죽은 사람에 대해서 닦을 때 본삼매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근접삼매도 얻지 못한다.
한 젊은 비구가 그의 스승에 대해 자애를 닦았다. 그의 자애수행은 전진이 없었다.
그는 대장로를 뵈러 가서
‘존자시여, 저는 자애를 통한 禪의 증득(mettā-jhāna-samāpatti)에 능숙합니다.
그런데 도무지 증득을 이룰 수가 없으니 어찌된 영문입니까?’라고 여쭈었다.
장로는
‘여보게, [명상주제의 대상인] 그 표상을 찾아보게’라고 말씀하셨다.
찾아본즉 그의 스승이 사망한 것을 알고서 다른 자를 대상으로 자애를 닦으면서 증득에 들었다.
그러므로 죽은 자에 대해서는 절대로 자애를 닦아서는 안된다.
8.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거듭거듭 닦아야 한다.
‘내가 행복하기를, 고통이 없기를!’ 혹은
‘내가 원한이 없기를, 악의가 없기를, 근심이 없기를, 행복하게 삶을 영위하기를!’이라고.
9. 그렇지만 『위방가』에서는 설하셨다.
“어떻게 비구가 자애가 가득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고 머무는가?
마치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어떤 사람을 보고 자애를 갖는 것처럼,
그는 모든 중생들에 대해 자애로 충만하다.(Vbh.272)”
『무애해도』에서는
“어떤 다섯 가지 때문에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慈心解脫)은 제한 없이 충만한가?
모든 중생들이 원한이 없기를, 악의가 없기를, 근심이 없기를, 행복하게 살기를! 모든 생명들이 … 모든 존재들이 … 모든 인간들이 … 모든 몸을 가진 자들이 원한이 없기를, 악의가 없기를, 근심이 없기를, 행복하게 삶을 영위하기를! … (Ps.ii.130)”
「자애경」(Metta Sutta)에서도 설하셨다.
“참으로 행복하고 안은(安隱)하기를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Sn.1450”
그렇다면 [이런 경의 말씀들은 앞의 설명과]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자신에 대한 수행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긋난다]고 한다면 것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10. 왜 그런가?
이것은 삼매로 설했고 이 [앞에서 자기를 대하여 닦음은] 본보기(sakkhi)로 설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백년이나 천년동안 ‘내가 행복하기를!’이라는 등의 방법으로 자기에 대한 자애를 닦는다고 해도 본삼매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행복하기를!’하고 닦을 때,
‘마치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고 고통을 두려워하고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중생들도 참으로 그와 같다’라고,
자기를 본보기로 삼을 때 다른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에 대한 원이 일어난다.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시면서 이 방법을 보이셨다.
“마음으로 모든 방향으로 찾아보았건만
어느 곳에도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자 얻을 수 없네.
이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각자 자신이 사랑스러운 것
그러므로 자기의 행복을 원하는 자, 남을 해치지 마세.”-S.i.75; Ud.47.
11. 그러므로 그 증거로 제일 먼저 자기를 자애로 가득 채워야 한다.
그 다음에 [자애를] 쉽게 일으키기 위해,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존중하고 공경하는 스승이나, 스승에 필적할 만한 분이나, 은사나 은사에 필적할 만한 분에 대하여,
그 분에게서 발견되는 좋은 말씀 등과 존중과 공경을 생기게 하는 계행과 학식 등을 계속해서 생각하여
‘이런 참된 분(眞人)께서 행복하시기를. 고통이 없으시기를’하며,
이런 방법으로 자애를 닦아야 한다.
그는 이런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본삼매에 든다.
12. 그러나 이 비구가 이만큼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런 한계를 부수고자 할 때는,
그 다음으로 아주 좋아하는 친구에 대해,
아주 좋아하는 친구 다음에는 무관한 자에 대해,
무관한 자 다음에는 원한 맺힌 자에 대해 자애를 닦아야 한다.
닦을 때 각각의 경우에 마음을 유연하고 적합하게 만들어 각각 그 다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13. 그러나 원한 맺힌 자가 없거나 대장부 기질을 타고나서 해를 입더라도 남들에 대해 원수라는 인식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는
‘무관한 자에 대해서는 자애심을 적절하게 닦았다.
이제 그것을 원한 맺힌 자에게 적용시키리라’고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다.
‘무관한자 다음에 원한 맺힌 자에 대해 자애를 닦아야 한다’라는 것은 원한을 맺은 적이 있는 자와 관련해서 설한 것이다.
14. 만약 그가 원수에 대해 마음을 가져갈 때 그가 지은 해약이 기억나서 적개심이 일어난다면,
처음에 언급한 [세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 대해 거듭거듭 증득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거듭거듭 그 사람에 대해 자애를 닦음으로 적개심을 제거해야 한다.
15. 만약 이와 같이 노력해도 제거되지 않으면,
톱 등의 비유의 경책을 계속해서 생각하면서
적개심을 버리기 위해 거듭거듭 노력해야 한다.
그는 이와 같이 자신을 경책해야 한다.
‘오, 성난 자여, 세존께서 설하지 않으셨던가?’
“비구들이여, 무지막지한 악당들이 양쪽에 자루가 달린 톱으로 사지를 토막토막 자르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음속에 화를 낸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M.i. 129)”
“화를 낸 자에게 화로써 앙갚음을 하는 자는
처음 화를 낸 자 보다 더욱 비열하다.
화로써 앙갚음하지 않을 때
승리하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한다.
상대방이 화난 것을 알고서
마음챙기면서 고요하게 머무는 자는
자기와 남 둘 모두를 이롭게 한다.(S.i.162)”
“비구들이여, 적을 즐겁게 하고 적에게 도움 되는 일곱 가지 법이 있어 여자거나 남자거나 간에 화난 자에게 찾아온다.
무엇이 일곱인가?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에게 이와 같이 원한다.
‘이 자가 참으로 흉한 꼴이 되기를’이라고.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비구들이여, 적은 자기 적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이 화난 사람은 화에 압도되고, 화에 정복되어, 비록 목욕을 하고 향수를 뿌리고 이발과 면도를 하고 하얀 옷을 입더라도, 그는 화에 압도되어 흉한 꼴이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적을 즐겁게 하고 적에게 도움 되는 첫 번째 법으로 여자거나 남자거나 간에 화난 자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에게 이와 같이 원한다.
‘이 자가 괴롭게 잠들기를! …
이 자에게 행운이 따르지 않기를! …
이 자에게 부가 따르지 않기를! …
이 자에게 명성이 따르지 않기를! …
이 자에게 친구가 없기를! …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이나 천상에 태어나지 않기를!’ 이러고,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에 선처에 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이 화난 사람은 화에 압도되고, 화에 정복되어 몸으로 삿된 행위를 하고, 말로 삿된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삿된 행위를 한다.
그는 화에 압도되어 몸으로 … 말로 … 마음으로 삿된 행위를 하여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에는 비참한 곳, 나쁜 곳(惡處), 파멸처, 지옥에 태어난다.(A.iv.94-96)”라고
“비구들이여, 마치 화장터에서 사용된 나무토막 있어 양끝은 불타고 중간은 악취가 난다면 마을에서도 그것을 장작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숲에서도 장작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사람은 그와 같다고 나는 말한다.(A.ii.95. lt.90)”
그러므로 이제 그대가 이와 같이 화를 내면 세존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아니리라.
화로써 앙갚음 할 때 처음 화낸 자 보다 더 비열하여 승리하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리라.
그대의 적이 지은 일들을 그대 스스로 그대 자신에게 지을 것이고, 화장터에서 사용된 나무토막과 같을 것이다.
16. 그가 이와 같이 노력하고 애를 쓸 때 만약 적개심이 가라 앉는다면 좋은 일이다.
만약 가라앉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고요함과 청정한 상태와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할 때 믿음을 일으키는 그런 법을 기억하면서 적개심을 없애야 한다.
17. 어떤 자의 경우는 몸으로 짓는 행위만 고요하다.
그의 고요한 상태는 중대한 소임을 볼 때 모든 사람들이 안다.
그러나 말로 짓는 행위와 마음으로 짓는 행위는 고요하지 않다.
그러면 그런 것들은 기억하지 말고 오직 몸으로 짓는 행위의 고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18. 어떤 자의 경우는 말로 짓는 행위만 고요하다.
그의 고요한 상태는 모든 사람들이 안다.
즉, 그는 천성적으로 친절하게 환대함에 능숙하고, 친절하게 말하고, 좋은 말을 하고, 기뻐하는 말을 하고, 환한 얼굴을 하고, 먼저 공손하게 말을 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법을 외우고, 의미와 표현을 원만히 갖추어 법문을 설한다.
그러나 몸으로 짓는 행위와 마음으로 짓는 행위는 고요하지 않다.
그러면 그런 것을 기억하지 말고 오직 말로 짓는 행위의 고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19. 어떤 자의 경우는 마음으로 짓는 행위만 고요하다.
탑전에 예배하는 등에서 그의 고요한 상태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하다.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은 자는 탑전이나 보리수나 장로들에게 예경 할 때 공손하게 예배드리지 않는다.
법을 듣는 자리에서 마음이 산만하거나 졸면서 앉는다.
마음이 고요한 자는 조심스럽고 공손하게 예배한다.
귀를 기울여 신중하게 몸과 말을 통해 마음의 깨끗함을 나타내면서 법을 듣는다.
이와 같이 어떤 자의 경우는 마음으로 짓는 행위만 고요하다.
그러나 몸으로 짓는 행위와 말로 짓는 행위와 말로 짓는 행위는 고요하지 않다.
그러면 그런 것을 기억하지 말고 오직 마음으로 짓는 행위의 고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20. 그러나 어떤 자의 경우는 이런 세 가지 행위 중에서 단 한 가지도 고요하지 않다.
그러면 지금은 비록 이 자가 인간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며칠도 못 가서 여덟 가지 큰 지옥이나 열여섯 가지 작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그 사람에 대해 연민을 일으켜야 한다.
연민을 통해 적개심은 가라앉는다.
어떤 자의 경우 이 세 가지 행위가 모두 고요하다.
그러면 그가 가진 세 가지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그가 원하는 기억하면 된다.
그런 사람에 대해 자애를 닦는 것은 어렵지 않다.
21. 앞서 설한 이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도반들이여, 이것이 적개심을 제거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니 비구에게 적개심이 일어나면 이것으로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A.iii.186-90)”라는,
『증지부』 『다섯의 모음』에 있는 「절복진노경」(折伏瞋怒經, Āghātapaṭivinaya Sutta)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22. 만약 그가 이와 같이 애를 써도 적개심이 일어나면 이와 같이 자기를 훈계해야 한다.
만약 원수가 자기의 영역으로 삼은
그대의 [몸에] 고통을 줄지라도
무엇 때문에 그대는 그의 영역이 아닌
그대의 마음에 고통을 주려하는가.
많은 도움을 주었고 눈물을 흘리던
가족들마저 버렸거늘
무엇 때문에 크나큰 해약을 초래하는
그대의 적인 화는 버리지 않는가.
멋대로 부리는 화는 참으로
그대가 보호하는 계행의 뿌리를 멸절시키나니
그대같이 어리석은 자
또 누가 있겠는가.
다른 자가 비열한 행위를 했다고
그대는 불같이 화를 낸다.
왜 그대는 그대 스스로 남이 했던
같은 일을 하려하는가.
만약 나를 화나게 만들고자
남이 불쾌한 행위를 했다면
무엇 때문에 그대는 화를 내어
남의 소원을 만족시켜주려는가.
그대가 화를 내어 그에게 고통을 줄 수도
혹은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화가 초래한 고통으로
당장에 그대 자신을 태우리.
만약 원수들이 분노로 인해
눈멀어 악처의 길을 간다면
무슨 이유로 그대도 분노하여
그들을 따라 가려는가.
적이 분노로 인해 그대에게
해로움을 끼쳤다면
그 분노만을 끊어버려라.
무엇 때문에 적절치 않게
그대에게 불쾌한 행위를 했던 [사람을] 괴롭히는가.
오온의 법들은 순간적인 것이다
이미 없어져버렸거늘
지금 그대는 누구에게 화를 내는가.
그에게 고통을 주려해도 그가 없다면
누구에게 고통을 주겠는가.
그대의 존재가 바로 고통의 원인이거늘
무엇 때문에 그에게 화를 내는가.
23. 만약 이와 같이 자기를 훈계해도 적개심이 가라앉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나 남에게 업이 각자 자기의 주인임(kammassakatā)을 반조해야 한다.
우선 이와 같이 자기 것을 반조해야 한다.
‘여보게, 그에게 화를 내어 무엇을 할 것인가?
화냄으로 인한 그대의 업이 장차 그대를 해로움으로 인도하지 않겠는가?
그대의 업이 바로그대의 주인이고, 그대는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대의 권속이도, 업이 그대의 의지처이다.
그대는 그대가 행한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이 행위는 정등각을 얻게 하는 것도 아니고,
벽지불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고 아니고,
성문의 지위에 이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범천과 제석과 전륜왕과 지방의 왕 등 가운데 어느 지위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이 행위는 교단으로부터 물러나게 하여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 지경에 처하게 하고, 지옥 등 갖가지 고통을 겪게 한다.
이 [화내는 업을 행할 때 양속에 시뻘건 숯과 똥을 쥐고서 다른 자에게 던지려는 사람처럼 첫 번째로 자신을 태우고 악취나게 한다.’라고.
24. 이와 같이 자기의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고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반조해야 한다.
‘그가 나에게 화를 내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그 자신을 해로움으로 인도하지 않겠는가?
이 존자는 자기 업의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이 존재의 권속이고, 업이 이 존자의 의지처이다.
이 존자는 그가 행한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이 행위는 정등각을 얻게 하는 것도 아니고,
벽지불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도 아니고,
성문의 지위에 이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범천과제석과 전륜왕과 지방의 왕 등 가운데 어느 지위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이 행위는 교단으로부터 물러나게 하여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 지경에 처하게 하고, 지옥 등 각가지 고통을 겪게 한다.
이 [화내는 업]을 행할 때 바람을 안고 서서 다른 자에게 먼지를 뒤집어쐬우려는 사람처럼바로 자신이 뒤집어쓸 뿐이다.’라고.
세존께서 이처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분노하지 않고 청정하고 허물없는
그런 사람에게 화를 내면
그 악은 바로 그 어리석은 자에게 돌아가나니
마치 바람을 향해 던지 가는 먼지처럼.(Dhp.125)”
25. 만약 그가 이와 같이 업이 자기의 주인임을 반조해도 가라 앉지 않는다면, 그는 천인사께서 전생에 수행한 덕들을 반조해야 한다.
26. 이것이 반조하는 방법이다.
‘여보게, 출가하여, 그대의 스승께서는 깨닫기 전, 아직 정등각을 성취하지 않은 보살이셨을 때 4아승지와 10만겁동안 바라밀을 완성하시면서 곳곳에서 적들이 살해하려할 때에도 결코 화를 내지 않으셨다.
27. 예를 들면, 「실라와 자따까」(Sīlava Jāaka)에서 실라와(Sīlava)왕이 자신의 왕비에게 간통을 한 나쁜 대신이 적의 왕을 불러들여 3백 유순이나 되는 왕국을 점령할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출동한 대신들에게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공동묘지에 땅을 파고 천명의 대신들과 함께 목까지 묻혔을 때 마음으로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 재칼들이 와서 땅을 파헤쳐 주어서 영웅적인 힘을 발휘하여 목숨을 구하여 야차의 신통으로 자기의 궁전에 들어갔을 때,
자기의 침상에 적의 왕이 잠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화를 내지 않고 서로 맹세를 하여 친구로 여기면서 말했다.
“남자는 포부를 가져야 하고
현자는 싫증내지 않아야 한다.
나는 내가 원하던 대로 되었음을 보노라.(Jā.i.267)”
28. 「칸띠와디 자띠까」(Khantivād ī Jātaka, 忍辱主義者)에서는,
우치한 까시(Kāsi) 왕이
‘사문이여, 당신은 어떤 교리를 설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인욕을 설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왕이 가시 박힌 매로 채찍질하게 하고 손발을 자를 때에도 그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29. 이미 성년이 되어 출가한 자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쭐리담마빨라 자따까」(Cūḷa-Dhammapāla Jātaka, 小護法 本生譚)에서는 아직 자리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할 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전단향으로 목욕한
왕국의 계승자 담마빨라
그의 팔에 잘립니다.
왕이시여, 제 숨이 넘어갑니다.(Jā.iii.181)”
라고 그의 어머니가 탄식하는 와중에도 왕이었던 그의 부친 마하빠따빠(Mahā-Patāpa, 大怒)는 마치 죽순을 자르듯이 그의 손발을 자르게 했지만 그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의 머리를 자르라고 명령했을 때,
‘지금 이 마음을 잘 제어 할 때다.
오, 담마빨리여, 지금 그대의 머리를 자르라고 명령한 아버지, 머리를 자르는 사람, 탄식하는 어머니, 그대 자신,
이 네 사람 모두에 대해서 평등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굳게 결심한 뒤,
조금도 화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30. 인간의 모습으로 이와 같이 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축생이었을 때에도 그와 같이 했다.
찻단따(Chaddanta)라고 이름하는 코끼리가 되어서 독이 묻은 화살이 배꼽을 찔렀을 때도 해로움을 가한 사냥꾼에 대해 마음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큰 화살에 찔렸을 때 코끼리는
마음속에 화내지않고 사냥꾼에게 말했다.
친구여, 무슨 목적으로, 무슨 이유로
나를 죽이려는가. 이것은 누구를 위함인가.(Jā.v.51)”
이와 같이 말했을 때
‘존경하는 분이여, 까시나라의 왕후가 당신의 상아를 목적으로 저를 보냈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녀의 소원을 성취시켜주려고 여섯 색깔의 광채가 찬란하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상아를 뽑아주었다.
31. 큰 원숭이가 되었을 때 바위의 절벽으로부터 사람을 구해주었다.
그 사람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돌을 들어 머리를 내리쳤다.
“마치 숲속의 다른 짐승들처럼
이것도 사람들의 먹거리로다.
배고픈 자가 이 원숭이를 잡아먹은들 어떠리.
만족스럽게 [먹고 남은] 고기는
여행의 준비물로 가져가리라.
긴 여행을 마치도록 식량이 되겠구나.(Jā.v.71)”
원숭이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한채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존경하는 분이여, 당신은 나의 친구입니다.
당신이 이와 같이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긴 수명을 가진분이십니다.
다른자를 막아 주셔야 옳습니다.(Jā.v.71)”
라고 말한 뒤, 그 사람에 대해 마음속으로 화내지도 않고 자기의 고통도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그 사람이 안전한 곳까지 이르도록 해 주었다.
32. 부리닷따(Bhūridatta)라는 용왕이 되어 포살의 계목을 준수하기 위해 개미굴의 꼭대기에 누워있을 때,
겁의 종말을 예고하는 불과 같은 약을 온 몸에 뿌렸을 때에도,
상자에 넣어 인도 전역에서 장난감처럼 다룰 때에도,
그 바라문에 대해 조금도 화내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상자에 넣을 때에도
손으로 눌러 짜부라뜨릴때에도
계를 피하는 두려움 때문에
알람바나(Ālambāna)에게 화내지 않았다.(Cp.85)’
33. 짬빼야(Campeyya)라는 용왕이 되어 뱀장수가 괴롭힐 때에도, 조금도 화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실천하고 포살을 준수할 때
뱀장수가 나를 잡아 왕실의 성문에서 가지고 놀았다.
푸른색, 노란색, 빨간색 등
그가 생각하는 색깔이 그 어떤 것이든
그의 생각에 따라 그가 원하는 대로 되어주었다.
육지를 바다로 변하게하고
바다를 육지로 변하게 할 수도 있었다.
만약 내가 그에게 화를 내었다면
그는 그 순간에 재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마음대로 했더라면
계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파계한 자는 구경의 경지를 성취하지 못한다.(Cp.85)”
34. 상카빨라( Saṅkhapāla)라는 용왕이 되었을 때,
날카로운 창으로 여덟 군데에 상처를 낸 뒤, 상처의 구멍에 가시 돋친 넝쿨을 쑤셔 넣고 튼튼한 밧줄로 코를 꿰어, 16명의 마을 청년들이 장대에 메어 옮겨 다니면서 땅바닥에 몸을 내동댕이쳐 큰 고통을 겪게 했을 때에,
화를 내어 흘깃 쳐다보기만 해도 마을 청년들을 모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지만,
눈을 뜨고 조금도 화난 모습을 짓지 않았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알라라(Aḷāra)여 나는 14일과 15일에는
항상 포살을 준수한다.
그때 16명의 마을청년들이
밧줄과 견고한 창을 가지고왔다.
포악한 자들이 코를 찢어 밧줄에 꿰어
나를 잡아 낚아 갔다.
이와 같이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에도
포살을 놓치지 않았다.(Jā.v.172-73)”
35. 이들뿐만 아니라 「마뚜뽀사까 자따까」(Mātuposaka Jātaka)등 다른 곳에서도 여러 가지 놀랄만한 일이 있다.
일체지를 얻으셨고 신을 포함한 세상에서 가히 견줄 수 없는 인욕의 덕을 지니신 세존을 그대의 스승으로 언급하면서,
‘적개심을 일으키는 것은 그대에게 가장 적당치 않고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라고 [반조해야 한다]
36. 만약 그가 이와 같이 천인사께서 전생에 수행하신 공덕을 반조하는데도 오랫동안 오염원의 노예가 되었던 탓에, 그 적개심이 가라앉지 않으면 그는 그 시작이 알려지지 않은 윤회를 반조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이전에 [그대들의] 어머니가 되지 않았던 중생을 얻기 어렵고 … 이전에 아버지가 되지 않았던 중생을 … 형재가 … 자매가 … 아들이 … 이전에 딸이 되지 않았던 중생을 얻기 어렵다.(S.ii.189-90)”
그러므로 그 사람에 대해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이 사람은 전생에 나의 어머니가 되어서 [나는] 열달 동안 그녀의 모태에서지냈으며,
[태어난뒤] 오줌, 똥, 침, 코등을 마치 전단향 처럼 역겨워 않고 치워주고 가슴에 안고 놀아주었으며 등에 업어서 키워주었을 것이다.
그는 전생에 아버지가 되어 양들이 다니는 길과 갈고리를 사용해야만 하는 험난한 길 등을 다니면서 상업을 하였고,
나를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양쪽에서 진을친 전쟁터에 나갔고, 배를 타고 대양으로 항해했고, 또 다른 어려운 일들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워야지하는 생각으로 갖가지 수단으로 돈을 벌면서 나를 키웠을 것이다.
형제, 자매, 아들, 딸이 되어서이 사람은 이런 저런 도움을 주었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 화를 내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37. 만약 이와 같이 해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다면 이와 같이 자애의 이익을 반조해야 한다.
‘오, 출가자여. 세존께서 이와 같이 설하지 않으셨던가?
“비구들이여,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짓고 수레로 삼고 기초로 삼고 확립하고 굳건히 하고 열심히 시작할 때 열한 가지 이익이 기대된다.
무엇이 그 열한 가지인가?
편안하게 잠들고, 편안하게 깨어나고, 악몽을 꾸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인간 아닌 자들이 좋아하고, 신들이 보호하고,
불이나 독이나 무기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마음이 쉽게 삼매에 들고, 안색이 맑고,
매하지 않은 채 죽고, 더 높은 경지을 통찰하지 못하더라도 범천의 세상에 태어난다.(A.v.342)”
만약 그대가 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면 이러한 이익을 잃게 될 것이다.
38. 이와 같이 해도 가라앉힐 수 없다면 요소(界)들을 분석해야 한다.
어떻게?
“오, 출가자여. 그대가 그에게 화를 낼때 무엇을 대하여 화를내는가?
머리털을 대하여 화를 내는가?
아니면 몸털, 손, 발톱… 오줌을 대하여 화를 내는가?
혹은 머리털 등에 있는 땅의 요소(地界)를 대하여 화를 내는가?
아니면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를 대하여 화를 내는가?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 열두 가지 감각장소(十二處), 열여덟 가지요소(十八界) 등을 의지하여 이 존자는 ‘어떤 분’이라고 불린다.
그 가운데서 물질의 무더기(色蘊)를 대하여 화를 내는가?
아니면 느낌의 무더기, 인식의 무더기, 상카라들의 무더기, 알음알이의 무더기를 대하여 화를 내는가?
혹은 눈의 감각장소(安處)를 대하여 화를 내는가?
형상의 감각장소(色處)를 대하여 화를 내는가? …
마노의 감각장소(意處)를 대하여 화를 내는가?
법의 감각장소(法處)를 대하여 화를 내는가?
혹은 눈의 요소(眼界)를 대하여 화를 내는가?
형상의 요소(色界)를 대하여 화를 내는가? 눈의 알음알이의 요소(眼識界)를 대하여 화를 내는가?’라고.
이와 같이 요소들을 분석할 때 마치 바늘 끝의 겨자씨처럼, 허공에 그림처럼 화는 발판을 얻지 못한다.
39. 요소들을 분석할 수 없을 때 보시를 통해서 [성냄을 제거해야 한다.
자기의 소유물을 남에게 보시해야 하고 남의 소유물을 자신이 받아야 한다.
만약 남의 생계가 청정하지 못하여 그의 자구를 사용할 수 없다면 자기의 소유물을 보시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할 때 반드시 그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가라앉는다.
그 사람의 경우도 그가 전생부터 품어오던 화가 그 순간에 가라앉는다.
마치 찟딸라 산의 사원에서 발우을 보시받은 대장로의 경우처럼.
탁발음식만 수용하던 장로는 세 번이나 대장로에 의해 거처로부터 쫒겨났지만,
‘존자시여, 이 발우는 8개 금화의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재가자인 저의 어머니께서 보시한 것입니다. 법에 걸맞게 얻은 것입니다.
선량한 청신녀에게 공덕이 되게 하소서’라고 말하면서,
발우를 보시로 올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보시는 참으로 큰 위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설하셨다.
“보시는 조어되지 않은 사람을 조어하고
보시는 모든 이로움을 성취시킨다.
보시와 상냥한 말씨를 통해 [시주자는]
편안해지고 [시물을 받는 자는] 머리를 숙인다.”
40. 이와 같이 하여 원수에 대해 적개심이 가라앉으면,
좋아하는 사람, 아주 좋아하는 친구, 무관한 자 등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 원수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거듭거듭 자애를 닦으면서, 자기 자신과, 좋아하는 사람과, 무관한 사람과, 원한 맺힌 사람이라는, 이 네 사람에 대해 평등한 마음을 성취하면서 한계를 부수어야 한다.
41.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만약 이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 무관한 사람, 원한 맺힌 사람과 함께 넷이서 한 자리에 앉아있을 때,
강도가 와서
‘존자시여, 한 명의 비구를 저희들에게 주시오’라고 말한다.
그 이유를 물은즉
‘그 사람을 죽여 목의 피를 뽑아서 제사지내고자하오’라고 대답한다.
그때 이 비구가 아무개나 아무개를 잡아 가기를 하고 생각한다면 한계를 부수지 못했다.
만약 이 세 사람은 잡아가지 말고 나를 잡아가기를 생각한다 해도 한계를 부수지 못했다.
왜 그런가?
잡혀가기를 바란 사람에겐 해로움을 원하고 나머지 세 사람의 이로움만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강도에게 줄 수 없다고 보고,
자기와 그 세 사람에 대해서 평등한 마음을 일으킬 때 한계를 부순 것이다.
42. 그래서 옛 스승들은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과 좋아하는 자와 무관한 자와
싫어하는 자, 이 넷에 대해 차별을 볼 때
그를 원하는 대로 자애를 얻는 자라 하지도 않고
자애에 능숙한 자라고 부르지도 않나니
그를 다만 중생의 번영을 원하는 자라 부른다.
비구가 넷의 한계를 부수고
신을 포함한 온 세계를
자애로 평등하게 채울 때
한계가 없는 그는 앞의 사람보다 크게 수승하다.”
43. 이와 같이 한계를 부숨과 동시에 비구는 표상과 근접[삼매]를 얻는다.
한계를 부순 뒤 표상을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지을 때 어려움 없이 땅의 까시나에서 설한 방법대로 본삼매에 든다.
그러면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버렸고,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며, 세 가지로 좋고, 열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자애와 함께한 초선을 얻는다.
이것을 얻은 뒤 차례대로 그 표상을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지을 때 4종선(四種禪)의 경우 제2선과 제3선을, 오종선의 경우 제2선과 제3선과 제4선을 얻는다.
44. 그는 초선 등의 어느 하나를 통해서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문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 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고통 없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문다.(Vbh.272)”
왜냐하면 초선 등으로 그 마음이 본삼매에 든 자 만이 이 변환(vikubbanā)을 이루기 때문이다.
45.
‘자애가 함께한’: 자애를 가진(mettāya samnāgatena).
‘마음으로’(cetasā): 마음으로(cittana).
‘한 방향을’: 어떤 한 방향에서 첫 번째로 취한 이런 중생을 언급하면서 한 방향에 포함된 중생들의 가득함을 설했다.
‘가득 채우면서’: 닿고서, 대상을 삼고서.
‘머문다’: 거룩한 마음가짐(梵住)에 확고한 위의로 머문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첫 번째 방향 등에서 어떤 한 방향을 가득 채우고 머물 듯이,
그 다음에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방향]에도 그와 같이 한다는 뜻이다.
46. ‘이와 같이 위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윗방향으로라는 뜻이다.
‘아래로, 주위로’:
아랫방향과 주위의 방향에도 이와 같다.
여기서 아래라는 것은 아래의 [지옥중생 등]을 뜻하고, 주위라는 것은 간방위들을 뜻한다.
이와 같이 마치 경마장의 말처럼, 모든 방향에 자애가 함께한 마음을 보내고 돌아오게 한다.
이렇게 각각의 방향을 취하여 제한적으로 자애가 충만함을 드러냈다.
47. ‘모든 곳에서’라는 등을 설한 것은 제한 없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모든 곳이란 모든 장소(sabbattha)를 뜻한다.
‘모 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저열하거나 중간이거나 수승하거나, 친구가 적이나 무관한 자 등으로 분류되는 모든 중생들에 대해서 자기를 대하는 것처럼 한다. 이 자는 다른 중생이라고 구분 짓지 않고 자기와 같다는 듯을 설한 것이다.
‘혹은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란 ‘마음의 온 상태를 다하여’, ’조금도 남겨두지 않고’라는 뜻이다.
‘모든’: 모든 중생. 모든 중생과 연결된이란 뜻이다.
세상: 중생의 세상이다.
48. ‘풍만하고’ 등으로 시작하는 동의어를 보이기 위해 여기서 다시 자애가 함께한을 말했다.
혹은 여기서는 한정적인(odhiso) 충만의 경우에서처럼 ‘다시 그처럼’(tathā)이라는 단어와 ‘이와 같이’(iti)라는 단어를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라고 설했다. 혹은 이것은 결론으로 설한 것이다.
‘풍만하고’는 가득 채우는 것에 풍만함이라 보아야 한다.
경지로 이것은 광대하다.
익숙함과 무량한 중생을 대상으로 가지므로 이것은 무량하고, 악의와 적의를 버리므로 원한 없고, 슬픔을 버리므로 고통이 없다. 즉 고통이 없다는 뜻을 설했다.
이것이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라는 등의 방법으로 설한 변환(vikubbanā)의 뜻이다.
49. 이런 변환은 오직 본삼매에 든 자만이 성취할 수 있다.
그래서 『무애해도』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 것도 본삼매에 든 자만이 성취할 수 있다고 한 것으로 알아야 한다.
“제한 없이(anodhiso) 가득 채운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慈心解脫)은 다섯 가지 방법으로 [닦는다],
한정적으로(odhiso) 가득 채운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일곱 가지 방법으로 [닦는다].
[모든] 방향에 가득 채운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열 가지 방법으로 [닦는다].(Ps.ii.130)”
50. 이와 같이하여
“모든 중생들이 원한이 없기를, 악의가 없기를, 근심이 없기를, 행복하게 살기를!
모든 생명들이 … 모든 존재들이 … 모든 인간들이 … 몸을 가진 모든 자들이 원한이 없기를, 악의가 없기를, 근심이 없기를, 행복하게 삶을 영위하기를!(Ps.ii.130)”
51.
“모든 여자들이 원한이 없기를, 고통이 없기를, 근심이 없기를, 행복하게 살기를!
모든 남자들이 … 모든 성자들이 … 모든 범부들이 … 모든 신들이 … 모든 인간들이 … 악도에 떨어진 모든 자들이 원한이 없기를, 고통이 없기를, 근심이 없기를, 행복하게 살기를!(Ps.ii.131)’이라는,
일곱 가지로 한정적으로 가득 채운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닦는다고] 알아야 한다.
52.
“동쪽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원한이 없기를, 고통이 없기를, 근심이 없기를, 행복하게 살기를!
서쪽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 북쪽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 남쪽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 동북방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 서남방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 동북방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 서남방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 아래에 있는 모든 중생들 … 위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원한이 없기를, 고통이 없기를, 근심이 없기를, 행복하게 살기를!
동쪽에 있는 모든 생명들이 … 모든 존재들이 … 모든 인간들이 … 몸을 가진 모든 자들이 원한이 없기를, 고통이 없기를, 근심이 없기를, 행복하게 살기를!
동쪽에 있는 모든 여자들이…모든 남자들이, 모든 성자들이, 모든 범부들이, 모든 신들이, 모든 인간들이, 악도에 떨어진 모든자들이 원한이 없기를, 고통이 없기를, 근심이 없기를, 행복하게 살기를!
서쪽…북쪽…남쪽…동남방…서북방…동북방…서남방…아래…위에있는모든여자들이…원한이없기를, 고통이없기를, 근심이없기를, 행복하게 살기를!(Ps.ii.131)”이라는,
이런 열가지로 [모든] 방향에 가득 채운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닦는다고] 알아야한다.
53. 여기서 ‘모든’이란 남김없이 포함함을 뜻한다.
‘중생’:
물질등의 오온에 대해 애욕과 탐욕으로 집착하고(sattā) 강하게 집착하기 때문에(visattā) 중생(sattā)이라 한다.
세존께서 이처럼 설하셨기 때문이다.
“라다여, 물질에 대한 열망, 탐욕, 즐김, 갈애가 있다.
거기에 집착하고 강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중생이라 부른다.
느낌에 대한…인식에 대한…상카라들에 대한…알음알이에 대한 열망, 탐욕, 즐김, 갈애가 있다. 그것에집착하고, 강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중생이라 부른다.(S.iii.190)”
그러나 이‘중생’이라는 단어는 인습적 표현으로 탐욕을 여읜자에게도 사용된다.
마치 짖어진 대나무로 만든 다른 종류의 부채에도 야자수로 만든 부채라는 단어를 사용하듯이.
그러나 문법가들은 뜻을 고려할 필요 없이 이것은 단지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뜻을 고려하는 이들은 사뜨와(眞性)와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주장한다.
54. 숨쉬고 있기 때문에 생명(pāṇa, 살아 숨쉬는 자)들이다. 들숨과 날숨에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듯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존재(bhūta,태어난 자)들이다. 완전히 생겼고 태어났다는 뜻이다.
인간(뿍갈라, puggala)의 뿜(puṁ)이라는 단어는 지옥을 뜻하며, 그곳에 빠지기(galati) 때문에 뿍갈라(puggala, 인간)라 한다.
몸(attabhāva)은 육체(sariīra)를 뜻한다. 혹은 오직 오온을 뜻한다. 그것으로부터 생긴 개념(paññatti)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몸에 포함된 것(pariyāpanna)이 몸을 가진 자(attabhāpanna)들이다.
‘포함된’이라는 것은 한정 짓는 것이다. ‘그 속에 포함된’ 이라는 뜻이다.
55. 중생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그 나머지 모든 단어들도 일상적 표현에 따라 모든 중생들의 동의어라고 알아야 한다.
물론 모든 생물, 모든 생명 등 모든 중생들의 다른 동의어들도 있지만 분명한 것으로 이 다섯 가지를 취하여 제한 없이 가득 채운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닦는다고] 설했다.
56. 중생이나 생명 등은 단지 단어만 다를 뿐 아니라 뜻으로도 실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제한 없이 가득 채움에 대한 언급에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뜻을 취하지 말고 이 다섯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로 제한 없이 자애를 가득 채워야 한다.
‘모든 중생들이 원한이 없기를!’하는 것은 하나의 본샘매이다.
‘고통이 없기를!’하는 것도 하나의 본삼매이다. 고통이 없다는 것은 괴로운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다.
‘근심이 없기를!’하는 것도 하나의 본삼매이다. 근심이 없다는 것은 근심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행복하게 살기를!’하는 것도 하나의 본샘매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 중에서 분명한 것으로 자애를 충만해야 한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각각에 대해 네 가지 본 삼매로 제한없이충만함에 스무 가지 본삼매가 있다.
57. 그러나 한정적으로 가득 채움의 일곱 가지에는 네 가지의 본삼매로 스무 여덟 가지 본삼매가 있다.
여기서 여자, 남자라는 것은 성별에 따라 설한 것이고,
성자, 범부는 성자와 범부에 따라 설한 것이고,
신, 이간, 악도에 떨어진 자는 재생(再生)에 따라 설한 것이다.
58. [모든] 방향에 가득 채움의 경우 동쪽의 모든 중생들로 시작하는 방법에 따라 각각의 방량에 스무 가지 본삼매가 되어 이백가지 본삼매가 있고,
동쪽의 모든 여자들로 시작하는 방법에 따라 각각의 방향에 28가지 본삼매가 되어 이백여든 가지 본삼매가 있다.
그러므로 모두 사백여든 가지 본삼매가 있다 이와 같이 『무애해도』에서 언급한 모든 삼매는 528가지이다.
59. 이와 같이 이러한 본삼매 가운데 어느 하나로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닦을 때,
이 수행자는 편안하게 잠들고(§37)라는 등의 방법으로 설한 열한 가지 이익을 얻는다.
60.
① ‘편안하게 잠들고’:
다른 사람들은 몸을 뒤치고 코를 골면서 불편하게 잠들지만 이렇게 잠들지 않고 편안하게 잠들고 잠들 대에도 마치 증득(等至)에 든 것과 같다.
61.
② ‘편안하게 깨어나고’:
다른 사람들이 신음하고, 하품하고, 몸을 뒤치면서 고통스럽게 깨어나지만 그렇게 깨지 않고 마치 연꽃이 피듯이 행복하게 찡그리지 않고 깨어난다.
62.
③ ‘악몽을 꾸지 않고’:
꿈을 꿀 때에도 길몽만 꾼다. 예를 들면 탑전에 예배를 드리고, 공양을 올리고, 법문을 듣는 것 등이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강도들에 의해 포위되고, 야수들에 의해 쫓겨 다니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을 꾸지만 그와 같은 악몽을 꾸지 않는다.
63.
④ ‘사람들이 좋아하고’:
가슴에 걸려 매달려 있는 진주 목걸이처럼, 머리를 장식하는 화환처럼,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한다.
64.
⑤ ‘인간 아닌 자들이 좋아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듯이 인간 아닌 자들도 좋아한다.
위사카( Visākha) 장로의 경우처럼.
그는 빠딸리뿟따(Pāṭaliputta)의 지주였다고 한다.
그곳에서 살 때 이와 같이 들었다.
‘땀바빤니 섬(스리랑카)은 탑전의 화환으로 장식되어있고, 황금 가사로 빛나며, 어디든 원하는 곳에 사람이 않거나 누울 수 있고, 기후가 좋고, 거처가 적당하고, 사람들이 선량하고, 법을 듣기에 적합하여 이 모든 것을 여기서 쉽게 얻을 수 있다’라고.
65. 그는 자기 재산을 부인과 자식에게 물려주고 오직 한 냥의 금화만 옷단에 꿰매어 집을 나섰다. 해안에서 배를 기다리느라 한달을 지냈다.
뛰어난 장사술로 여기서 물품을 구입하여 저기다 팔면서 합법적인 매매를 통해 그 동안에 금 천 냥을 모았다.
마침내 [스리랑카의] 대사(大寺, Mahāvihāra)에 와서 출가를 원했다.
66. 그가 수계를 위해 금강계단으로 인도될 때 허리띠 속에 달려 있던 금 천 냥의 주머니가 땅에 떨어졌다.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존자시여, 금 천 냥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청신사여, 출가한 후로는 이 돈을 다룰 수 없으니 지금 처리하시오’라고 말하자,
‘위사카의 출가 장소에 오신 분들은 빈속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주머니를 풀어 계단의 뜰에 뿌리고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67. 그가 다섯 안거를 지낸 뒤 두 가지 계본(dve-mātikā)에 능통하고 통달하였으며 자자(自恣)를 끝내고는 자기에게 적합한 명상주제를 들고서 각 절에서 넉 달씩 지내며 상주하는 대중들과 평등하게 소임을 보면서 다녔다.
이와 같이 다닐 때,
숲 속에 서서 사자후를 토하던 위사카 장로는
자기의 덕을 찾으면서 이 뜻을 읊었다.
‘구족계를 받는 이래로 이곳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결점이란 없었으니
복받은 자여, 그대의 큰 이득이로다’라고
68. 그가 찢딸라 산의 승원에 갈 때 갈림길에 이르러 이 길로 가야할 까 저 길로 가야할까하고 망설이면서 서있었다.
그때 그 산에 머물던 산신이 손을 펴서
‘이 길입니다’라고 그에게 보여주었다.
69. 그가 찢딸라 산의 승원에 가서 그것에서 넉 달을 지낸 뒤 날이 새면 떠나리라고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경행처의 끝머리에 있는 마닐라 나무에 살던 목신이 계단에 앉아서 울음을 터뜨렸다.
장로는
‘그대는 누구시오’라고 물었다.
‘존자시여, 저는 마닐라야(Maṇiliya, 마닐라 나무에 사는 자)입니다.
‘왜 우시오?’
‘존자가 떠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 사는 것이 당신들에게 무슨 덕이 있습니까?’
‘존자시여, 존자가 이곳에 사실 때 신들은 서로에게 자애를 가집니다.
이제 존자가 떠나시면 그들은 서로 다툴 것이고 독설을 퍼부을 겁니다.’
장로는
‘만약 내가 여기 살아 당신들이 행복하게 산다면 좋은 일 입니다’라고 말하고,
다시 넉달을 그곳에서 지냈다.
다시 그곳에서 떠날 생각을 했다. 신이 다시 그곳에서 울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장로는 그곳에서만 지내셨고 그곳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와 같이 자애에 머무는 비구를 인간이 아닌 자들도 좋아 한다.
70.
⑥ ‘신들이 보호하고’:
마치 부모가 자식을 보호하듯이 신들이 그를 보호한다.
71.
⑦ ‘그에게 불이나 독이나 무기가 악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자애에 머무는 자의 몸에 대해 이들이 악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들어가지 못한다.
마치 여신도 웃따라(Uttarā)에게 불이 해치지 못했던 것처럼,
『상응부』를 독송하던 쭐라시와(Cūḷa-Siva)에 장로에게 독이 해치지 못했던 것처럼,
상낏짜(Saṁkicca) 사미에게 무기가 해치지 못했던 것처럼,
그의 몸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72. 여기서 어미 소의 설화를 이야기한다.
한 어미 소가 어린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고 한다.
어떤 사냥꾼이 이것을 맞히리라고 긴 손잡이가 달린 창을 손으로 휘두르면서 던졌다.
창이 그녀의 몸을 때리자마자 야자수 잎처럼 되돌아 왔으니 그것은 근접 삼매의 힘 때문도 아니고 본삼매의 힘 때문도 아니다.
오직 송아지에 대한 강한 모성애의 마음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자애는 큰 위력을 가진다.
73.
⑧ ‘마음이 쉽게 삼매에 들고’:
자애에 머무는 자의 마음은 빨리 삼매에 든다. 더디지 않다.
74.
⑨ ‘안색이 밝고’:
줄기에서 떨어진 야자처럼 그의 안색은 깨끗하다.
75.
⑩ ‘매하지 않은 채 죽고’:
자애에 머무는 자는 매한 채 죽지 않는다. 매하지 않은 채로 마치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
76.
⑪ ‘더 높은 경지를 통찰하지 못하더라도’:
자애의 증득보다 더 높은 아라한과를 얻지 못할 때 여기서 죽어 잠에서 깨어나듯 범천의 세상에 태어난다.
이것이 자애수행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