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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9권
16.5. 징과연 (懲過緣)
『유마경(維摩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얼마 안 되는 애절한 충고의 말로써 비로소 계율에 들어갈 수 있다.”
또 『서경(書經)』에서 말하였다.
“남의 충고를 듣되 붙이 흐르듯이 하라.”
이렇게 말하였으니 이런 말은 기록해 둘 만하다.
성질이 사납고 어그러진 사람은 믿지 않고, 사나운 말은 길들이기 어렵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많이 부끄러워하며 항상 스스로 경계하라 남의 말 듣기를 바라면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
지금 그 말을 경계하여 그 몸을 바르게 하려는 이는 먼저 그 마음부터 꺾어버리고 다음에 그 뜻을 꺾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였다.
“한 곳(마음)을 제어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이것을 비유하면 금산(金山)의 굴 속에 여우와 토끼가 감히 머무르지 못하고 깊은 못, 맑은 바다에서는 개구리와 맹꽁이가 감히 자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 뜻을 깨끗이 하면 세 갈래 세계의 과보가 그치고 네 가지 덕이 항상 원만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뜻을 성곽처럼 막고 입을 병처럼 지키면 이른바 금하(金河)의 부탁이 이 사람에게 소속되어 있게 되고 옥문(玉門)의 교화가 넓어져서 믿음이 생길 것이다.
이미 이 세 가지 업(業)을 단속하면 네 가지 걱정을 능히 제거할 수 있다.
그 무엇이 네 가지 걱정인가?
이른바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이다.
그러므로 『수태경(受胎經)』에서 말하였다.
“중생들이 태(胎)를 받을 때에는 갖가지 고난을 다 겪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깜깜하고 아득한 것이 그 모양은 마치 떠다니는 티끌 같다가 열 달이 다 차려교 할 때에는 어머니의 태 안에서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업의 바람이[業風]재촉하면 그 머리가 산문(產門)을 거쳐서 땅에 떨어지게 되는데
그 때에 회초리를 맞는 듯한 감촉은 마치 칼산[刀山]에 닿는 것 같고,
바람이 불어닥칠 때의 차가운 감촉은 마치 싸늘한 얼음과도 같다.
그런 때를 당하여 태어날 때 받는 고통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또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등불 심지가 오직 기름에만 의존하고 있다가 그 기름이 이미 다하면 심지의 세력도 오래지 않아 멈추고 마는 것처럼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오직 왕성한 혈기를 믿다가 그 혈기가 이미 다하게 되면 노쇠해진 심지가 어찌 오래도록 머물 수 있겠는가?.”
또 『출요경(出曜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늙음의 고통을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젊을 때에는 의기(意氣)가 왕성했지만
닥쳐오는 늙음의 핍박을 받아
쇠약해진 몸은 지극히 말라빠지고
기력이 다해 지팡이에 의지하고 다닌다.
또 부처님께서 죽음의 고통에 대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기운은 끊어지고 정신은 떠나가고
형체와 뼈는 쓸쓸히 차가워진다.
사람이나 물건은 한 통속이라서
태어나면 죽지 않는 것 하나도 없다.”
또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대개 죽음이라는 험난한 곳은 양식도 없고 가야 할 곳은 현격히 먼데 반려(伴侶)도 없으며,
밤낮없이 늘 가도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고 깊고 어두운 데다 밝은 등불도 없으며 들어기는 문은 없으나 처소는 있다.
비록 아픈 곳은 없으나 치료할 수도 없고 가도 막는 사람 없지만 벗어날 수도 없다.”
또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말하였다.
“혼자 나고 혼자 죽으며 혼자 오고 혼자 간다.
괴로운 땅이거나 즐거운 땅이거나 간에 제 몸이 스스로 감당해야지 남이 대신하지는 못한다.
깊숙하고 깜깜하며 그 이별은 장구(長久)하다. 가는 길이 같지 않아 만나 볼 기약이 없으니 다시 서로 만나기란 참으로 어렵고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대체로 태어날 때는 친족들이 모두 모여 기뻐하면서 자애(慈愛)의 정을 다하지만 죽음 때에는 아침에 죽으면 저녁에 염(斂)을 하고 곧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면서 서로 이별하는 상황으로 통곡하면서 보내건만 가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보내고 돌아오면 방은 텅텅 비어 있고 쓸쓸하고 적막하여 다시 볼 수 없으니 살고 죽음과 있고 없음의 변화는 잠시 잠깐이다.”
그러므로 『출요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거듭 죽음의 괴로움에 대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목숨이란 마치 과일이 익기를 가다리면서도
항상 떨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이미 생겨나면 모두가 고통이 있으니
어느 누군들 죽지 않을 수 있으리.
마치 사형수[死囚]가
장차 사형장[都市]으로 끌려 갈 때에
움직일수록 죽음의 걸로 자꾸만 가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도 이와 같다네.
마치 강물이 빠르게 흘러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도 이와 같아서
한 번 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또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였다.
“열 가지 만업(慢業)이 있으니 마땅히 이런 업은 짓지 않아야 한다.
첫째, 존중해야 할 복전(福田)인 화상(和尙)ㆍ아사리(阿闍梨)ㆍ부모(父母)ㆍ사문(沙門)ㆍ바라문(婆羅門) 등에 대하여 존중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으며 공양하지 않으면
이것은 만업이 된다.
둘째, 모든 법사가 훌륭하고 미묘한 법을 얻고는 대승의 심오한 법에 의하여 나고 죽는 도에서 벗어날 줄 알고
다라니(陀羅尼)를 얻고 많이 들음을 성취하여 지혜의 창고를 갖추고 잘 설법하는데도
그를 믿거나 받지도 않고 공경하거나 공양하지도 않으면
이것은 만업이 된다.
셋째, 법을 듣고 받을 때에 만약 심오한 법을 듣고는 마땅히 탐욕 여의는 마음을 내고 한량없이 기뻐하면서도
법사를 찬탄하지 않음으로써 대중들을 기쁘게 하면
이것은 만업이 된다.
넷째, 교만한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며,
자신의 실체를 반성하지 않고 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것은 만업이 된다.
다섯째, ‘나’라고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공덕과 지혜가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 아름다움을 찬탄하지 않고
덕이 없는 사람을 보고는 도리어 그 선을 말하며,
만일 누가 남을 칭찬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질투심을 일으키면
이것은 만업이 된다.
여섯째, 만약 어떤 법사가
‘이것은 법이요 이것은 계율이며, 이것은 진실이요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라고 알면, 미워하고 질투하는 까닭에
‘그것은 법이 아니요 계율이 아니며, 진실이 아니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말하여 남의 믿을까지 무너뜨리나니
그러므로 이것은 만업이 된다.
일곱째,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아
‘나는 법사가 되었으므로 마땅히 일을 담당하지 않아야 하고 또한 다른 사람을 공경하거나 공양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범행(梵行)을 닦는 존장(尊長)이나 덕 있는 이들은 다 나를 공경하고 공양해야 한다’고 하면
이것은 만업이 된다.
여덟째, 얼굴을 찡그리거나 사나운 눈으로 남을 보는 일을 멀리 여의고 항상 온화한 얼굴로써 중생들을 평등하게 보며,
말은 언제나 부드러워서 거칠거나 사나움이 없고 성내고 원한을 가진 마음을 여의되,
그 법사에 대하여 그의 허물과 나쁜 점을 말해 달라고 하면
이것은 만업이 된다.
아홉째, 잘난 체하고 교만하게 구는 마음으로 많이 들은 사람에 대하여 공경하거나 그에게 나아가 법을 들어야겠다는 마음을 내지 않고 어려운 것이 있어도 머물러 둔 채 자문(諮問)하지도 않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이 선(善)이며 어떤 것이 선한 것이 아닌가?
어떤 일을 꼭 해야 하고 어떤 일을 꼭 해서는 안 되는가?
어떤 업을 지어야 오랫동안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고 어떤 일을 행하면 중생들에게 이롭지 않은가?
어떤 일을 행해야 밝음에서 밝음으로 들어가고 어떤 일을 행하면 어둠에서 어둠으로 들어가는가?’라고 하는 말이다.
이와 같은 무리는 잘난 체하는 마음 때문에 거기에 빠져서 해탈하는 요긴하고 바른 길을 알지 못하나니
이것이 만업이 된다.
열째, 아만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얻기 어려운 부처님 법을 만나지 못하여 전생에 심은 선근(善根)을 모두 녹여 버리고 꼭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함으로써 꾸짖고 책망하는 마음을 일으켜 서로 비방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법에 머무르면 마땅히 삿된 길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다만 보리심(菩提心)의 힘이 하열해질 뿐 그것 때문에 보살이 해야 할 바를 아주 버리지는 않는다.
비록 보살의 도(道)를 아주 버리지는 않더라도 한량없는 백천 겁 동안 오히려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거늘 더구나 그 법을 들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만업이 된다.”
또 『출요경(出曜經)』에서 말하였다.
“중생들 교만에 얽매어 있고
또 교만에 물들고 집착하며
소견에 미혹된 바되어
생사의 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범부가 저지른 악이 비록 적다고 해도 뒷세상에 매우 고통을 당하고 끝없는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독한 것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사람들의 마음을 맞추어 주지 않는 것처럼 속인들이 생업을 경영할 때엔 죽은 뒤의 일을 돌아불 줄 모른다.
그러나 살아서는 보전할 수 없고 죽어서는 반드시 어둠이 이르리니 이렇게 위급한 목숨[危命]을 살펴 보면 그 위급함이 아침에 닥쳐오지 않으면 저녁 때가 될 것이다.
잠깐 사이에 흉하게 변하여 덧없게 되건만 부질없이 전택(田宅)을 닦고 처자들을 사랑하고 연모한다.”
또 『법구유경(法句喩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에 계셨다.
그 때 성 안에 어떤 바라문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나이는 팔십이었으나 재물은 수없이 많았다. 그의 사람됨은 교화하기 어려웠고 도덕(道德)을 알지 못했으며, 덧없음[無常]을 헤아리지 못했다.
또한 좋은 집을 지어 앞에는 사랑채를 뒤에는 별당을 두었는데, 시원한 다락과 따뜻한 방이 있었고 동쪽과 서쪽의 두 곁채에는 수십 칸의 행랑이 있었다. 다만 뒷 별장의 앞 자양만은 미처 마치지 못하였다.
그 때 바라문은 항상 스스로 그 일을 경영하면서 온갖 일을 지휘하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도안(道眼)으로써 이 노공(空)이 그 날이 다 가기 전에 죽어서 장차 뒷세상으로 나아가리라는 것을 보셨다.
그런데도 그는 스스로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한장 바삐 돌아다니면서 집을 짓는 일을 경영하느라 복덕을 짓는 일에는 정신이 없었으니, 너무도 가련하고 불쌍한 일이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을 데리고 그의 집으로 가서 그 늙은이를 위문하였다.
‘얼마나 수고가 많은가? 지금 이 집을 지어 누가 살려고 그러는가?’
그는 대답하였다.
‘앞 사랑채에서는 손님을 대접하고 뒷 별장에서는 제가 살 것이오며, 동쪽과 서쪽의 두 행랑채에서는 마땅히 아이들과 종들을 살게 할 것이며, 또한 재물들도 보관할 것입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다락에 머물고 겨울에는 따뜻한 방에 들어가 살 작정입니다.’
부처님께서 노공에게 말씀하셨다.
‘숙덕(宿德)의 명성은 들은 지 오래되었으나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좀 늦있다.
부처님에게는 살고 죽는데에 대하여 유익하고 요긴한 게송이 있다.
그대에게 주고 싶은데 가부(可否)를 알 수 없으니, 바라건대 잠시 일을 중지하고 함께 앉아서 이야기할 수 없겠는가?’
노공이 대답하였다.
‘지금은 한창 바빠서 앉아 이야가할 겨를이 없으니 훗날 다시 오시면 꼭 함께 앉아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른바 요긴한 게송이나 말씀해 주십시오.’
이에 부처님께서는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자식이 있고 재물이 있다 하여
어리석은 사람은 그저 허먹이고 았구나.
‘나’라는 것도 또한 ‘나’가 아니거늘
자식이나 재물이 무슨 소용 있겠느냐?
더울 때는 마땅히 여기에서 거처하고
추울 때는 또한 저기에서 거처하리라고
어리석은 사람은 미리 생각이 많건만
닥쳐오는 변란은 모르고 있구나.
어리석은 사람은 더더욱 어리석음으로 덮여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지혜롭다 하나니
어리석으면서 지혜롭다 자칭하면
이것을 두고 매우 어리석다 한다네.
바라문이 말하였다.
‘이 게송을 잘 설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 너무도 바쁘나 훗날 와서 다시 이야기하십시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못내 슬퍼하시면서 떠나가셨다.
노공은 그 후에도 손수 집 석가래를 올려주다가 석가래가 떨어지면서 머리를 치는 바람에 머리가 깨져 즉시에 목숨을 마쳤다. 온 집안의 통곡소리는 사방 이웃을 놀라게 하고 진동하게 하였다. 부처님께서 그곳을 떠나셔서 그리 멀리 가지도 않아 곧 이런 변이 있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좀 더 가시다가 마음 어귀에서 수십 명의 범지(梵志)들을 만났다.
그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디에서 오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죽은 노공의 집에 가서 그를 위해 법을 설하였으나 그는 부처의 말을 맏지 않고 덧없음을 알지 못하더니 지금 갑자기 죽어 뒷세상으로 나아갔느니라.’
부처님께서는 모든 범지들을 위하여 앞에서 설하신 게송의 이치를 다시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곧 도적(道跡:須陀洹)이 되었다.
그러자 세존께서 다음 게송을 설하셨다.
어리석고 어두운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을 친근히 하는 것은
마치 표주박으로 맛을 보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을 오래도록 가깝고 친근히 해도
오히려 그 법만은 알지 못하느니라.
활짝 열려 통달한 사람이 지혜로운 이를 친근히 함은
마치 혀로써 맛을 보는 것과 같아서
비록 잠깐 동안만 친근히 해도
곧 도의 요긴함을 이해하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이 행업을 짓는 것은
그 몸의 재앙만 불러오나니
통쾌한 마음으로 악을 짓다가
스스로 무거운 재앙을 부르느니라.
행한 일이 착하지 못하면
물러나서 뉘우치고 슬퍼하며
온 얼굴에 눈물을 흘리나니
이러한 과보는 과거에 익힌 업에서 오는 것이다.
그 때 모든 범지들은 거듭 이 게송을 듣고 마음에 더욱 독실한 믿음이 생겨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환희(歡喜)하며 받들어 설천하였다.”
또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어떤 중생이 다른 친우와 서로 파괴(破壞)하고 원결(怨結)을 품은 사람을 보고 잘 화합시키면 그는 목숨을 마친 뒤에 욕애천(欲愛天)에 태어나서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따라 곧 다섯 가지 욕망을 얻어 스스로 즐길 것이다.
만약 어떤 중생이 남이 망하고 다른 이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그들 거기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혹은 위험한 곳에서 남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거나 혹 의혹하고 두려운 곳에서 다른 사람을 안온하게 하면
그 사람은 목숨을 마친 뒤에 정행천(正行天)에 태어나서 천녀(天女)들의 공양을 받고 다섯 가지 욕락(欲樂)을 누리다가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면 그는 바른 견해를 가진 큰 장자의 집안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유연(柔軟)하고 깊은 마음으로 일체의 번뇌[垢]를 여의면 열반(涅槃)과 해탈(解脫)이 마치 손 안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마음이 백납(白鑞)과 같아 선업(善業)을 수행하였으므로 온갖 사람들이 다 믿을 것이요,
거칠고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그 마음이 금강(金剛)과 같아 항상 원결의 마음을 잊지 못하므로 행동을 조복받지 못해서 온갖 사람들이 다 미워하며 사랑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을 것이다.
그 때 공작(孔雀)보살이 부처님 경전을 인용하여 게송을 설하였다.
착한 사람의 마음은 유연하여
마치 잘 제련된 순금과 같네.
이 사람은 안팎이 모두 신하여
속히 온갖 괴로움을 다 여윌 것이다.
만약 마음의 그릇이 잘 단련되면
일체가 다 유연해지나니
이 사람이 선한 씨앗 내는 것이
마치 좋은 복밭과 같느니라.”
또 『가조아나함경(呵鵰阿那含經)』에서 말하였다.
“아나함에는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여덟 가지 일이 있다.
무엇이 그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으려는 것이요,
둘째는 믿고 있다는 것을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자신의 수치 스러움[羞]을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자신의 부끄러움[慚]을 남에게 알려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정진하는 것을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요,
여섯째는 스스로 관찰하고 있음을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선정을 얻었다는 것을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요,
여덟째는 총명하고 지혜롭다는 것을 남에게 알려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진 않는 까닭은 남으로 하여금 번잡스럽고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게송을 말한다.
첨복화(瞻蔔花)는 쑥대 같은 마음을 고쳐 주고
이란(伊蘭)은 꽃다운 나무를 변하게 한다.
법 수레도 때로는 결함이 있고
흰 설도 항상 희지만은 않네.
세 가지 이로움 가만히 기뻐하고
네 가지 틈 있는 행동 마땅히 보호해야 하며
노력하여 더욱더 스스로 힘써야 하고
경계하고 진실로 사모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