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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사의 일상-힘날세상 스크랩 17 금강(錦江)을 따라 흘러가는 목선(木船)이고 싶다
미라마 추천 0 조회 23 12.07.23 15: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라톤 기행 17

 

금강(錦江)을 따라 흘러가는 목선(木船)이고 싶다

 

 

Y형!

벌써 한 시간이 넘어가는데도 나는 아직도 신성리 갈대밭에 서 있습니다.

금강(錦江)을 달려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즈음에 한 해의 모든 것을 다독거리며 붉은 울음을 토해 내는 황혼을 가슴에 안고 갑신년의 마지막 달을 달려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이 갈대밭에서 한 발자국도 내디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굽이치던 금강이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를 지나며 쌓아 놓은 7만 여 평의 옥토를 따라 이어지고 있는 갈대밭에서 나는 바람자락 하나도 마음에 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따금씩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떼들의 군무(群舞)에도 나는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강둑에 서서 터져 나오는 갈대들의 울음소리만 내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고 있을 뿐입니다.

 

여름이 막 시작할 무렵에 아무도 발걸음 하지 않는 이 곳 갈대밭을 찾았습니다. 그 날 봄을 지나며 거세어진 바람은 온통 푸른 빛을 흘리며 여리디 여린 갈대잎을 쿵쾅거리며 밟아대고 있었습니다. 그 무자비한 바람의 발길에 사정없이 짓밟힌 갈잎은 울음도 울지 못하고 쓰러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몸을 일으킵니다. 갈대는 시련을 이겨내는 무엇이 있습니다. 가느다란 허리를 움켜쥐고 짓찧어대는 고통 정도는 자신을 짓밟아대는 바람줄기 속에 슬쩍 풀어 놓아 버리는 지혜를 갈대는 가지고 있습니다. 갈대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람 속에서 갈대는 강인한 의지를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도하고 거만한 눈길을 나누어 이웃과 함께 짙고 두터운 울타리를 만듭니다. 초록물이 주르르 흐를 것 같은 울타리를 쌓습니다. 갈대는 그대로 젊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름날의 따가운 햇살을 받아 갈대는 가을을 준비합니다. 여름밤 총총히 박힌 별빛을 머금어 그리움을 배우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어대는 폭우 속에서 갈대는 가느다란 잎새를 내밀어 새떼들을 키우며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조용한 울음을 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가을이 끝을 보이기 시작할 무렵,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습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찾아 온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갈대밭을 거닐며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자기들만의 웃음이 있고, 눈물만이 있습니다. 갈대밭에 들어선 사람들은 갈대숲을 거닐지만, 오직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눌 뿐, 갈대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 갈대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키워 오던 꿈을 모아 이마에 한 떨기 꽃을 피웁니다. 누구도 보아주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고 볼품없는 꽃 모양에 스스로도 부끄러워합니다. 그때서야 갈대는 자신을 제대로 바라봅니다. 자신의 존재를 향하는 눈을 뜹니다.

갈대는 조용히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울음은 내면적 성장을 위한 조용한 노력입니다. 신경림은 그런 갈대의 울음이 삶의 전부라고 노래합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 갈대

 

그러고 보면 신성리 갈대밭은 온통 깨달음의 세상입니다. 갈대밭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울려나오는 ‘조용한 울음’을 보았을까요? 앙상한 갈잎 사이에서 부서지는 바람줄기가 자신이 만들어내는 눈물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요?

이제 달리기를 시작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부여잡는 갈대의 울음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다소곳이 담아가야겠습니다. 갈대의 울음이 바로 나의 울음이고, 나의 울음이 바로 나의 삶인 까닭입니다.

Y형!

충청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는 웅포대교를 건너 비포장 강둑을 따라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이제 겨울로 들어서는 문턱이지만 오후의 햇살은 어깨를 포근히 감싸줄 만큼 따뜻합니다. 느릿하게 달리는 발걸음마나 여유로운 생각들을 담아내면서 아내와 나는 나란히 달립니다. 금강의 물줄기가 군산에서 바다를 품에 안는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가 불쑥 신혼시절을 들추어냅니다. 군산의 단칸 셋방에서 우리들이 그렸던 삶의 그림은 건너편 산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마을만큼이나 수더분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림에 색을 입히지 않았습니다. 색을 칠하고 나면 더 이상 상상의 나래를 펼 여지가 없을 것이라는 아내의 말에는 약간의 끈적거림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저 사람 사는 정(情)이 담겨 있고, 남들의 눈에 추한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을 그 그림 속에서 대학교 1학년인 ‘드리’와 고3인 ‘글’이 웃고 있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이 강둑을 따라 이어집니다. 한여름의 푸르름으로 살아있던 들녘에는 휑한 바람줄기만 가득합니다. 우리들의 삶도 그런 것인가 봅니다. 자기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더 넓고 큰 세상으로 날아가 버린 아이들의 방을 기웃거리면서 그리워하는 것은 그 허전한 둥지에 남아 있는 부모들뿐입니다.

 

Y형!

참으로 오랜만에 마라톤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진안 용담호를 따라 달리는 대회는 참으로 좋았습니다. 참가자가 너무나 적었기에 나는 혼자서 달리는 듯한 느낌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이어지는 호숫가를 따라 이어지던 주로(走路)는 많은 사잇길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깊고 깊은 골짝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호젓한 길이 다가올 때마다 나는 주로를 버리고 그 길을 따라 달려 가고 싶은 충동을 심하게 느꼈습니다. 그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끄트머리쯤에서 달구지에 세월을 실어 나르는 할아버지와, 넘어갈 듯한 굴뚝으로 짙은 연기를 피우며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밥을 짓고 있을 할머니를 만날 것 같은 생각에, 나는 한 동안 그 길을 바라다보았습니다. 그 길을 달리고 싶은 마음이 넘쳐납니다. 노부부의 삶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를 들으며 깊어가는 가을을 내 삶의 페이지에 끼워 넣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회에 참석한 이상 그 길을 따라 달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픔입니다. 그것은 내 발길을 억누르는, 내 마음을 짓누르는 혹독한 구속입니다.

Y형!

일년 반이 넘게 마라톤 기행을 하면서 줄곧 내 가슴에 품고 다닌 화두(話頭)는 자유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늘 자유를 꿈꾸었습니다. 소란스러움과 혼탁한 기운에 싸여 있는 도시를 버리는 일은 언제나 편안함과 느긋한 마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조각 낯선 객창감(客窓感)은 내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쳐 주었습니다.

진양호를 따라 달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둠이 밀려오기 직전에 진양호에 도착하여, 진양호를 바라보고 있는 어느 허름한 여관을 찾아 들었습니다. 여장(旅裝)을 풀기가 바쁘게 어둠의 치마자락에 싸여가는 진양호를 향해 앉았습니다. 어둠은 금세 호수를 감싸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던 호수의 그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아직까지 내 가슴 속에 고스란히 담아두고 있습니다. 그 어둠은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여관의 창(窓)을 타고 밤이 새도록 넘어 왔습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의 주로(走路)에는 자유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언제나 자유롭게 달리고 싶습니다. 저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떠다니는 작은 목선(木船)이고 싶습니다. 문득 당대(唐代)의 시인 전기(錢起)의 시가 생각납니다.

 

夾水蒼山路向東 내를 낀 푸른 산길 동쪽으로 향하다가

東南山豁大河通 동남으로 산을 뚫고 황하로 흐르는데

寒樹依微遠天外 하늘 밖 멀리 차디찬 숲이 어렴풋하고

夕陽明沈亂流中 붉은 저녁놀이 어지러이 강물에 잠긴다.

孤村幾歲臨伊岸 물가에 이 외딴 마을이 언제부터 생겼던가

一雁初晴下朔風 맑은 날 북풍을 따라 내려가는 외기러기야

爲報洛陽遊宦侶 낙양의 벗들에게 소식을 전해 주려므나

扁舟不繫與心同 강위에 매지 않은 쪽배가 바로 내 마음이라고.

- 錢起, 自鞏洛舟行入黃河

 

Y형!

한 무리의 새떼가 날아오릅니다. 붉다 못해, 붉은 기운이 바다 속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세밑의 태양 속으로, 갑신년 한 해를 노래하던 새들이 날아오릅니다.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가창오리, 노랑부리저어새, 댕기물떼새, 뒷부리장다리물떼새, 뿔논병아리, 재빛개구리매, 고니, 홍머리오리, 흰비오리, 되새, 검은가슴물떼새......

거칠게 시간을 흘리고 있는 금강의 탁류(濁流)에 몸을 맡기고 있는 새떼들을 바라보며, 저들이 안고 있는 삶의 이야기들을 생각해 봅니다. 세파(世波)에 시달리면서 이어가는 우리 인간들의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롭고 가슴저릴 새들의 이야기는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붉은 노을을 남기고 가라앉고 있는 갑신년의 실루엣 속으로 묻히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울퉁불퉁한 삶의 공간도 그렇게 붉은 노을 속에서 빨갛게 가라앉아 갑니다. 나 또한 오늘 달리면서 흘린 땀방울과 함께 한 해 동안 내 주변에서 맴돌던 아픔과 굴절된 시?공간들을 황혼의 바다 속으로 던지고 있습니다.

이제 겨울의 들머리를 흐르고 있는 금강에는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새들의 군무(群舞)가 있을 뿐입니다. 금강에서 만나는 새들은 모두다 철새입니다. 시베리아에서 그 힘든 날갯짓을 해가며 이 곳 금강까지 날아오는 이유는 단순히 먹이만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하늘을 가릴 정도의 거대한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도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그렇게 바라볼 뿐이지 사실은 새들이 이어가는 힘겨운 삶의 한 과정입니다. 새들은 잠시 머물면서 자신들의 삶의 족적(足跡)을 그려 놓고는 훌쩍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새들은 강물 속으로 자맥질을 하면서 공격적이고 잔인한 모습으로 고기를 잡아 먹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세상의 번뇌와 아픔에서 완전히 초월한 듯한 고귀한 자세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새는 그 고기를 잡아 먹던 부리를 열어 아름답고 부드러운 선율로 노래를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런 새들을 향해 온갖 찬사를 늘어 놓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새를 보고 다시 순수니, 고귀함이니, 아름다움이니 하면서 끝없는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은 본질과 현상이 같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칫 현상만을 보고도 마치 본질을 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의 삶이 언제나 모순 덩어리인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억설(臆說)일까요?

 

Y형!

금강(錦江)을 바라봅니다.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 장수읍(長水邑)에서 발원하여 충청도를 돌아 무려 400km를 흘러 9885㎞²의 유역을 적시고, 서해의 군산만(群山灣)으로 유입하는 한국 6대 하천 중의 하나로 남한에서는 한강?낙동강 다음으로 큰 강입니다. 임금을 향해 활을 당기는 형상이라고 하여 반역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불평 한마디하지 않고 그저 입술을 다문 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흐르는 금강이 쌓아 놓은 그리움의 두께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산굽이를 돌아 내리며, 너른 들녘을 안 흐르며 지켜보았을 역사의 면면(面面)들을 누가 자신 있게 말하겠습니까? 죽도(竹島)에 잠겨 있는 정여립의 한(恨)과, 곰나루에서 분노함성으로 타올랐던 동학군의 창검(槍劍)과, 낙화암의 깎아지른 절벽에서 꽃잎처럼 휘날려 버린 삼천 궁녀의 가녀린 심사(心思)를 금강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가 감히 입이나 열 수 있겠습니까?

탁류(濁流)라고 세인(世人)들은 입방아를 찧어 대지만 그래도 금강은 조용히 역사를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그 너른 가슴이 터질 정도로 많은 새떼들의 어리광을 끌어 안고 금강은 오늘도 아무 말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천 리나 되는 인간의 속세(俗世)를 흘러오면서 썩을 대로 썩어버린 가슴을 흐릿한 물결로 덮은 채 서해로 흘러드는 모양이 왜 그렇게 슬프게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도히 흐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강은 오후의 햇살 속에서 수 만 조각의 울음을 울고 있습니다. 강물은 그리움의 열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Y형!

달리기는 언제나 힘을 실어 줍니다. 그리고 여행은 마음을 살찌워 줍니다. 여행의 끝에는 언제나 그 여행의 길이만큼이나 길다란 이야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여행에서 돌아온 자는 거짓말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그 거짓말이 아름답고 값어치가 있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한 마리 싱싱한 생선과 같은 것임을 압니다.

늘 그렇듯이 나는 마음의 문을 서둘러 닫습니다. 달리기를 마치는 지금, 그 동안 풀어 헤쳐 놓았던 명상의 새떼들을 불러 들여 내 마음에 곱게곱게 갈무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새떼들의 군무(群舞)를 보듬고 나는 늘 꿈을 꿉니다. 곁에서 변함없는 표정으로 동반주하는 자연의 노랫소리를 따라 콧노래를 부르며 청아한 마음으로 주로를 달리는 또 다른 마라톤 여행을 위한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라톤 기행이 가져다주는 기쁨입니다. 힘날세상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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