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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48. 진리에 기반한 사랑, 본능에 기반한 사랑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마태복음 5장 43절에서 48절입니다.
(마 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제자도 마흔여덟 번째로 제목은 “진리에 기반한 사랑, 본능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진리에 기반한 사랑이 있고 본능에 기반한 사랑이 있는 것이지요. 오늘 정진호 집사님 대표기도에서 첫 말씀에서 나와 내 가족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회개의 기도를 드리셔서 제가 깜짝 놀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전해드린 말씀의 주제와 일치되는 기도를 드리셨기 때문이지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자도는 한 마디로 본능에 기반한 사랑에서 떠나 진리에 기반한 사랑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전 세계 기독교가 혼란을 겪고 있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교회에서 이런 말을 많이 하지요.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데 사랑을 못하고 있습니다”라든가 “여러분! 사랑합시다”라든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이 하고 있는 본능에 기반한 사랑을 하자는 말에 불과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사랑에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다. 사랑을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그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은 왜 사느냐 하면 사랑 때문에 살아갑니다. 사랑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좀 볼까요?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다고 해서 촛불집회가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정원 사람들이 왜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 사랑 때문에 정치에 개입한 거예요. 개 중에는 자기 식구들을 사랑해서 밥그릇을 지키느라고 윗사람의 명령에 따라서 그렇게 한 사람도 있을 테고 또는 인터넷에 댓글을 달면서 박근혜 씨를 대통령으로 당선을 시켜야 우리 민족이 우리 국가에 이로울 거라는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첫 번째 사람은 이기적이고 좁은 의미에서 자기 몸보신을 하느라고 정치에 개입한 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은 그래도 시야가 넓어서 나름대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답시고 정치에 개입한 사람이지요. 또 그걸 가지고 이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거라면서 촛불을 들고 나서는 사람들도 왜 촛불을 들고 나서냐 하면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비가 쏟아지는데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와서 촛불을 드는 거지요. 거기에 최루액을 뿌리면서 해산을 시키려고 하는 경찰들은 또 왜 그렇겠습니까? 마찬가집니다. 사랑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이지요.
모든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움직입니다. 지금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죄에서 또 시끄러운데 이석기 의원이 자기는 뼛속까지 평화주의자라고 기자회견을 했지요. 그 사람이 평화주의자인지 아닌지 그건 차치하고라도 이석기 의원이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나름대로는 피 끓는 사랑이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이석기 의원을 제거하려고 하고 용공 좌빨 물러가라면서 난리를 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국가에 대한 사랑이 있고 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이 드신 어버이 연합 분들이 피켓을 들고 그 뜨거운 땡볕에 돌아다니는 것 아니에요?
세계적으로는 시리아에 미국이 폭격을 하네 마네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시리아 정부군이 반군에게 화학 가스탄을 쐈다는 거 때문이지요. 아직 확실히 밝혀진 건 아니지만.. 그래서 어린아이들까지 수십 명이 죽고 천 명 이상이 죽었다는 보도도 있는데 그래서 미국이 그걸 응징하는 폭격을 하려고 오바마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유럽이 먼저 폭격을 한다고 했다가 유럽은 지금 물러섰다고 해요. 실제로 화학탄을 쐈는지 안 쐈는지 아직 객관적으로 밝혀지진 않았지만 화학탄을 쏘는 사람이나 화학탄을 맞을 만큼 정부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는 반군이나 그걸 보고 또 폭격을 하겠다고 나서는 미국이나 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다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국은 세계 평화나 세계 질서를 내세우지요. 인류를 향한 사랑을 내세우면서 시리아 정부군을 폭격을 하느냐 마느냐를 의회가 논의를 한다고 합니다.
사랑은 세 가지로 나뉩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사랑이 있고 자기편만 사랑하는 사랑이 있고 인류를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렇게 세 가지 종류의 사랑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매일 매일의 삶을 사랑 때문에 살아가는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사랑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A와 B가 충돌하고 서로 증오하고 해치고 하는 것도 사랑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뿐 A와 B는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사랑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이 세상 사람만큼 사랑에 충실한 인간들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걸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게 아니고 남을 미워하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고 죽어라고 사랑을 하는데 사랑의 대상이 달라서 서로 충돌하는 것뿐이에요. 서로 충돌하고 해치고 할 만큼 지독하게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증오가 왜 생깁니까? 내가 사랑을 하는데 방해가 되니까 증오가 생기고 내가 사랑하는데 배신을 하니까 증오가 생기는 거지요.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움직여요.
사람들이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라고 판단하는 기준도 사랑입니다. 내가 하는 사랑에 도움이 되는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고 내가 하는 사랑에 방해가 되는 것을 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정의와 불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는 사랑에 도움이 되면 그건 정의고 내가 하는 사랑에 방해가 되면 그건 불의가 되는 것이지요. 결국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살아갑니다.
기독교의 문제는 그런 인간의 사랑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하면 본능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자기 본능에 충실한 사랑인 것이지요. 인류애, 거룩한 사랑 등등 하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이라고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조금 대상을 넓히면 가족을 사랑하는 사랑이 되고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랑이 되고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인류애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의 대상이 조금씩 확대되면서 이기적인 사랑이냐 세속 공동체를 향한 사랑이냐 또는 인류를 향한 사랑이냐로 범주만 확대되는 것이지 본질은 자기 사랑입니다.
왜 이웃을 사랑하느냐?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거예요. 이기적인 사람에게 “너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면 결국 너한테 손해야. 남한테 베풀면서 살아봐. 네 행복이 거기에 있어”라고 설득합니다. “국가와 민족이 망하는데 그게 너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니. 그러니까 너를 희생해서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네가 노력을 해야 될 것 아니냐”라면서 교육시키는 것이 국민윤리 교육이에요. 휴머니즘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이 유토피아로 변하기 위해서는 결국 너를 희생하더라도 인류를 사랑해야 해”라고 설득하는 것이 휴머니즘 교육입니다. 다 최종적으로 뭘 지향하지요? “그래야 네가 행복해져”입니다.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의 차이라는 것도 사랑의 대상의 범위가 조금씩 넓어지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그런 본능에 충실한 사랑,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는 또는 공포와 탐욕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본능에 충실하고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랑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서구 기독교란 말이지요.
그 사랑은 진리에 기반한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사랑이고 인간의 감정을 기반으로 한 사랑인 것이지요. 성경에서 말씀하신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진리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의 대상이 조금 넓어지면 그것을 선이라고 부르고 사랑의 대상이 축소되면 그걸 악이라고 부릅니다. 이기적인 인간,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면서 비난하게 되고 비윤리적인 인간, 비도덕적인 인간이라고 비난합니다.
어떤 조폭 두목이 체포가 됐는데 경찰서에 딸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 우리 아빠처럼 선하고 우리 아빠처럼 착하고 우리 아빠처럼 사랑이 많은 분이 없는데 왜 우리 아빠를 잡아가냐고 말이지요. 그 아이는 집에서 가족을 대하는 조폭 아빠밖에 못 본 거지요. 세상 사람들이 고매한 철학과 종교를 들먹이면서 아름다운 삶을 이야기하고 구제를 이야기하고 오늘 성경 본문 말씀에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다면서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를 쓰고 하는 그런 모든 인간의 사랑관은 본능에 충실한 사랑입니다. 결국 누구를 위한 사랑이냐?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에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진리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본능에 기반한 사랑과 진리에 기반한 사랑이 어떻게 다른가를 우리가 성경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 본능에 기반한 사랑은 인간론이고 인간에 대한 분석이니까 성경 말씀 없이 제가 말씀드렸지만 진리에 기반한 사랑은 온전히 성경에서 찾아야 하지요.
사랑에 대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기묘한 언사와 행동을 지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짓이라고 하십니다. 자기편만 사랑하는 것? 그거 누구는 못하냐? 그건 이방인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하고 산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 바로 그것이었지요. 46절을 봉독합니다.
(마 5:46-47)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세상 사람들이 하는 사랑의 본질을 말씀하시는데 그게 바로 당짓기를 기반으로 한 사랑입니다. 그와는 달리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44절입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을 놓고 서구 기독교가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고 봅니다. 자기편만 사랑하면 안 되고 예수님처럼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위해서 오셔서 자기를 희생하시고 등등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선으로 인류애를 설정합니다. 당짓기하지 않는 인류애지요. 그것이 서구 기독교의 사랑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사랑의 범주만 확대되는 것뿐이지 결국 자기본능에 충실한 사랑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같은 산상수훈, 같은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입니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번에 사람들을 개돼지라고 부르면서 저들에겐 복음도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평안을 빌지도 말고 복음을 전하지도 말고 진리를 전하지도 말고 돌아서라. 앞에서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고는 개돼지들에게는 상관할 바가 없으니까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같은 자리에서. 이걸 어떻게 해석할 겁니까? 서구 기독교는 이거 해석 못합니다. 이 모순을 해결을 못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심지어 같은 7장에서는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저주 중에 최고의 저주입니다. 불에 태워 없애버리신다는 거지요. 그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과 불에 태워서 없애버리신다는 말씀이 어떻게 한 자리에서 하실 수 있느냐는 거지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입니다. 앞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인류애를 말씀하셨다면 뒤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지요. 세상 사람들도 이런 저주는 차마 못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어떤지를 보고 그 다음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로마서 16장 17절과 18절입니다.
(롬 16:17-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자기 배만 섬기는 자들,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서는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2장 19절에서 2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 2:19-22)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이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 디모데 한 사람을 빼놓고는 모두 자기 일을 구하는 자들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디모데와 사도 바울 두 사람은 거기서 나왔어야지요. 모두가 자기 배만 섬기는 자들이고 오직 자기와 디모데만 아니라면 왜 같이 있느냔 말이지요. 왜 같이 있느냐?
예수님 말씀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상반된 말씀들과 사도 바울의 상반된 태도는 서구 기독교식의 성경관으로는 그 모순이 해결이 안 됩니다. 왜 해결할 수 없냐 하면 인간의 감정과 본능에 기반한 사랑으로 성경의 사랑을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진리에 기반한 사랑이지요.
예수님께서 그처럼 두 가지 모순된 말씀을 같은 산상수훈에서 하시는데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를 우리가 마태복음 12장 46절에서 50절 말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봉독하겠습니다.
(마 12:46-50)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진리에 기반한 사랑은 첫째로 인간의 본능에 기반한 사랑을 해체시킨 다음에 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시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원수가 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원수가 되도록 만든다고 하셨지요. 천륜 인륜 관계를 다 해체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능에 기반한 사랑을 제거시킨 후에 진리에 기반한 사랑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이 모여서 하는 사랑이 진리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하는데 가장 훼방이 되는 것이 바로 본능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시는 겁니다.
함께 모여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진리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첫 번째는 모일 수 있게 하는 사랑이고 그 다음에는 모여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진리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둘로 나누시면서 첫 번째 계명은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두 번째는 네 자신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죄라고 말씀하시지 않아요.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을 주시기 위함이지 자기를 부인하고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동시에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이유는 자기가 부인되어야 그 다음에 진정한 복이 오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데에 내 자신이 방해가 되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것이고 그때 제거 대상은 내 싸르크스란 말이지요. 내 싸르크스를 제거하는 것은 나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과 은혜를 내가 받는 데에 내 싸르크스가 방해가 되기 때문에 내 싸르크스, 내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서구 기독교에서 특히 영성 운동한다는 사람들이 자기애를 많이들 문제로 지적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랑을 지적하고 종교적인 열심도 자기애 때문에 한다는 지적도 많이 해요. 그 얘기 자체는 맞습니다. 그러나 자기애를 부정하는 것이 결론이 되면 안 됩니다.
내가 먼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래서 네 자신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말씀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네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데에 집중하고 그 다음에 네 이웃들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라 그 말씀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사랑이에요. 진리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진리에 기반한 사랑은 첫째는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고 나를 부인해서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도록 하는 것, 그리고 둘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것처럼 내 이웃도 변화시키는 것, 그 다음 셋째는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여서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인데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한다는 것의 핵심도 서로를 더욱더 성숙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양육을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보조수단이 구제지요.
이 사랑을 하는 데에 훼방이 되는 것을 먼저 제거를 해야 되는데 그에 대해 가장 명료한 말씀이 누가복음 14장 26절입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는 것을 제시하십니다. 즉 자기 편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제거지요. 그 다음 더 본질적으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의 핵심인 자기 존재에 대한 사랑까지 제거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조건이란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자, 즉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그 일은 바로 다른 사람들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인간의 사랑이예요. 본능에 기반한 사랑 감정에 기반한 사랑. 그걸 다시 세분해서 말씀드리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 공포와 탐욕 즉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고자 하는 그 처절한 몸부림 자기 사랑이지요. 그리고 그 자기 사랑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가족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보다 더 넓은 눈으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 더 깊은 차원의 깨달음이랍시고 하는 것이 인류를 사랑하는 것. 중심은 뭡니까? 나를 보호하고 나를 세우는 겁니다. 나를 보호하고 나를 세우는 테크닉이 그렇게 세 가지가 있는 거예요.
이타적인 사랑과 인류애는 약간 성격이 다르긴 합니다. 인류애는 자기 자신까지 포함된 인류를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타적인 건 자기 희생을 얘기하는 거라서 조금 다른데 altruism, 이타주의는 자기 자신에게 해를 입힘으로써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것도 결국 왜 하냐 하면 그것이 자기를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해를 입히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시키는 그것도 결국은 자기를 세우는 극단적인 방법입니다.
이처럼 본능에 기반하고 감정에 기반한 사랑 체계를 가지고 성경말씀을 보니까 예수님의 두 말씀의 모순과 충돌이 해결이 안 되는 거지요. 나중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동생들이 어떻게 됐지요? 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경우에는 사도 요한의 섬김 속에서 계속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했다는 기록들이 있고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 중에 야고보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큰 기둥이 됐습니다. 기둥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야고보서를 쓰기도 했지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던 그 상황에서는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결국 예수님의 모친과 예수님의 동생들도 다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요. 즉 그리스도의 제자도에 들어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예수님의 동생들이 제자도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와 아들의 정을 끊어야 되고 형제간의 정을 끊어야 됩니다. 인간의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를 청산해야 그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서 같은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들어올 수가 있는 거예요.
서구 기독교는 집단 이기주의인 윤리 도덕에 기반한 사랑 또는 인류애라는 사랑의 두 가지를 가지고 성경의 사랑을 봐요. 그러니까 그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거지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그랬다가 개돼지처럼 여기라고 그랬다가 영원히 불에 태워버린다고 말씀하시는 그 세 가지의 그 말도 안 되는 그 조합을 해결 못합니다.
진리에 기반한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도 아니고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사랑도 아니고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랑도 아니고 인류를 사랑하는 사랑도 아니에요. 그건 다 인간의 생존 본능에서 나오는 사랑들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진리에 기반한 사랑 즉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내가 다른 사람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고 한 사람이라도 더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고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루고 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이제는 힘을 합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려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리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에 내 모든 것을 바치는 것만이 사랑이에요. 그게 아닌 다른 모든 것은 인간들의 사랑입니다. 진리에 기반한 사랑이 아니에요. 요즘 진보 기독교가 대세로 굳어지고 하면서 교회에서는 구제에 써야 된다는 얘기들 많이 하지요. 아주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러셨지요? 삼천만 원어치 향유를 나에게 부은 것 잘한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 주변에 있기 마련이고 삼천만 원어치 향유를 나에게 붓는 것이 더 의로운 올바른 행동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사랑은 한 사람이라도 더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던지고 내 자신까지 던지고 내 삶을 송두리째 바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해가는 훈련과정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다 나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일에 집중됩니다. 오로지 회개와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달라는 소망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훈련 단계에 있는 모습이고 그 훈련 단계가 끝나고 밖을 향해 사명을 감당하는 단계가 되면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나처럼 만드는가? 내 목숨을 거기에 바치는 겁니다.
물론 첫 번째 대상이 누구지요? 내 가족이지요. 예수님이 결국 모친 마리아와 동생 야고보가 그토록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가족에게 그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제 외손녀가 조금 있으면 돌인데 저는 선율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왜냐? 선율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울었다 웃었다 하면서 허덕이다 죽는 거 외에는 그 아이에게 주어진 삶이 없어요. 형벌의 삶 외에는 그 아이에게 주어진 삶이 없습니다. 부모가 노력을 해서 모든 교육을 다 시켜주고 세상에 남부러울 것 없는 남편감을 구해주고 유산을 수십억 수백억 남겨주고 별 걸 다해도 선율이의 삶은 울었다 웃었다 하다 죽는 것 외에는 허락된 삶이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는 한. 그러니 선율이를 볼 때 제 소원은 오로지 뭐겠어요? 어떻게 하면 선율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가? 그 생각밖에 없는 겁니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 선율이가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사고 당하지 않도록, 영양 상태가 좋도록 모든 것을 공급합니다. 그러니까 세상 부모가 하는 일들을 안 한다는 게 아니에요. 다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는 목적이 다른 거지요.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 오직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 그것 외에는 없어요. 나머지는 다 형벌의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형벌을 받은 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메커니즘이에요. 형벌의 메커니즘입니다. 그 사랑을 가지고 있는 한은 성경말씀이 해석이 안 돼요. 제 멋대로들 해석하는 거지요.
2차 대전이 기독교 국가들끼리 벌인 전쟁이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 생깁니까?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전장에서 양쪽 진영에서 찬송가를 불렀다는 거예요. 그게 뭐하는 짓들이냐는 거지요.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모순을 몰라요.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랑이 발동을 해서 내 국가와 네 국가가 다르니까 우리는 같은 크리스찬이지만 서로 죽인다 그거지요. 이처럼 형벌 시스템에 속한 사랑, 즉 자기의 본능에 기반한 사랑이 제거되지 않으면 성경 해석부터 왜곡됩니다.
진리에 기반한 사랑으로 옮겨가는 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한 중요한 속성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한다는 의미의 본질이 바로 사랑이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떤 사람을 개돼지 취급을 할 수 있고 사도 바울처럼 갈라서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기 배만 섬기는 자들, 자기의 일만 생각하는 자들과 왜 함께 있느냐? 그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푯대를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자기 일만 생각하고 비록 지금은 자기 배만 섬기는 육에 속한 자들이지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동의했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리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사람들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양육시키려고. 푯대를 공유했기 때문에, 같은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전한 약속의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헤어지라고 할 때는 그 사람들이 그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에요. 로마서 16장에서도 너의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에게서 떠나라는 거지요. 똑같이 육에 속한 자고 똑같이 자기 생각밖에 안 하고 똑같이 자기 일만 생각하는 자들이더라도 복음에 동의한 자들, 푯대를 공유한 자들은 자기 자신까지 허비하면서 섬기는 것이고 그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딴소리 하는 자들, 그 푯대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또는 다른 푯대를 자꾸 제시하거나 왜곡된 복음을 자꾸 퍼뜨리려고 하는 자들과는 절대 같이 갈 수 없다는 거지요. 이 두 가지의 모순되어 보이는 말씀이 합해지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 3절 말씀과 9절 말씀입니다. 먼저 1절에서 3절입니다.
(고전 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지금 고린도교회 지체들이 이 모양 이 꼴입니다. 그렇지만 버리지 않지요. 섬깁니다. 왜냐하면 9절 봉독하겠습니다.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현재는 육에 속한 자들이지만, 즉 너희들 자신 생각밖에 못하고 본능에 기반한 사랑, 감정에 기반한 사랑밖에는 못하는 자들이지만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다. 왜? 복음에 동의했기 때문이에요. 비록 아직은 자기 생각밖에 못하는 자들이지만 말이지요.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직 되지 못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을 섬긴다 그겁니다. 같은 푯대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이 되는 겁니다. 인류애? 어디 인류애가 끼어듭니까? 고린도후서 6장 14절부터 18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후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함께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근데 언제 함께 간다고요? 그들을 활용할 때는 함께 가지요. 또는 그들 중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가 있는가 찾으려고 그들과 함께 합니다. 그게 고린도전서의 말씀이지요. 우리 자주 비교해서 봤던 말씀이지요. 고린도전서 5장 9절과 10절입니다.
(고전 5:9-10)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는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그런 자들과 함께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세상에 나가서는 음행하는 자, 토색하는 자, 그러니까 탐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도 어울려서 살아야지요. 그래야 그 중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를 찾아낼 수 있고 그래야 그들을 활용하면서 하나님이 나라에 필요한 재물들을 벌어들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밖에 나가서는 우상 숭배하는 자와 심지어 음행하는 자, 탐하는 자, 토색하는 자 다 사귀라는 겁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귀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와서는 음행하는 자와는 절대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거지요. 인류애가 어디 있습니까 인류애가? 국가 사랑 민족 사랑이 어디 있어요? 가족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성경에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제자가 된다고 예수님께서 못을 박아 놓으신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 인류애 등등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면 성경이 해석이 됩니까? 해석이 안 됩니다. 제멋대로들 기독교 윤리학이니 구원론이니 교회론이니 제멋대로들 창작물을 쓰는 거지요. 왜? 본능에 기반한 사랑 감정에 기반한 사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에게 진리를 점점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앞으로도 점점 더 깊은 진리의 세계로 우리가 들어가게 될 터이고 그 진리를 깨달아 간만큼 우리도 따라서 실제로 그렇게 변하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 깊어져 갈 터인데 그 핵심이 사랑이 바뀌는 겁니다.
인간은 사랑이 없으면 못 삽니다. 사랑 때문에 살아요. 노래 제목처럼 “사랑밖에 난 몰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사랑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분쟁도 일어나고 그래서 증오도 생기고 그래서 싸움도 일어나고 별 일이 다 생기는데 그 사랑이 없어져야 해요. 그 사랑이 없어지고 진리에 기반한 사랑이 우리에게 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고 설치고 있으니 일이 점점 더 꼬이는 거지요. 그러다 결국 개독교 소리까지 듣고....
이 두 가지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현실에 가면 그게 꼬입니다. 모순이 일어나요. 그래서 시청 앞에서 진보 기독교와 보수 기독교가 부딪히고 싸우고 그 엉망진창인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뭐냐 하면 본능에 기반한 사랑, 감정에 기반한 사랑으로 성경을 보는데 보수 기독교는 윤리 도덕에 기반한 사랑으로 성경을 보고 진보 기독교는 휴머니즘에 기반한 사랑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양쪽이 다 틀린 거지요. 윤리 도덕도 심지어 효도도 자식 사랑도 본능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제거되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너희에게서 제거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 사랑이 제거되지 않으면 내 사랑이 너희들 속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에 기반한 사랑이 너희에게 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기반한 사랑의 삶을 너희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기반한 사랑을 하는 삶은 인류 역사에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삶이 뭔지도 몰랐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인류 역사에 그런 삶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어요. 세상의 모든 고귀한 철학이나 사상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상이 사랑을 이야기하고 모든 철학이 사랑을 이야기하고 모든 종교가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오직 예수님만 다른 사랑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만 그런 삶을 실제로 살았던 거예요.
하지만 그 뒤에 기독교는 어떻게 됐습니까? 다시 세상 사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기적인 사랑, 공동체 지향적인 사랑, 인류애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제거되어야 할 사랑으로 다시 돌아간 게 서구 기독교입니다.
우리에게 진리에 기반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고 앞으로도 더욱 깊게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 사랑이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 사랑입니다.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고 내 이웃도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는... 그리고 그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여서 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그것이 진리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이런 삶은 이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고 이 세상 누구도 그런 사랑이 있다는 것 조차도 몰랐는데 예수님께서 그 사랑을 선포하셨고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 복음에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상황 설명까지 덧붙여서 전한 것이 사도 바울의 복음입니다. 핵심은 똑같습니다.
그 복음이 우리에게도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 실제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론과 실제가 하나로 합쳐지는 거지요. 그 일이 우리에게서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이 실제로 성취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적인 회개는 본능에 기반한 사랑, 감정에 기반한 사랑을 하던 삶에서 진리에 기반한 사랑을 하는 삶을 갈망하면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사랑이 바뀌는 것이 회개에요. 그리고 진리에 기반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 제자도입니다. 현실 생활 따로 있고 신앙생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하고 직장에서 일해서 돈을 벌고 사업을 해서 돈을 벌고 결혼하고 애를 낳아 키우고 물 한 잔 마시고 밥 한 그릇 먹는 것까지 일상생활 전체가 그 사랑을 하는 삶이고 제자도입니다. 안에서는 구제와 양육, 밖에서는 전도와 활용입니다.
우리는 본능에 기반하고 감정에 기반한 사랑이 우리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내 자신 안에서 다시 솟아나는 것도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가 혹시 지금 본능에 기인한 사랑, 감정에 기반한 사랑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그게 체크가 되는 순간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지체들 중에서 그 사랑에 휘말린 사람을 보면 즉시 권면하고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인 진리에 기반한 사랑을 우리에게 굳건하게 심어주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오늘까지 인도해 오셨습니다. 참 파란만장한 길을 우리가 걸어왔는데 사랑이 바뀌는 과정들이었습니다. 앞으로 매일의 삶에서 이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어지는 성찬에서 우리에게 사랑이 바뀌는 일을 한 단계 더 깊게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인도하실 줄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저희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본능에 기반한 사랑, 감정에 기반한 사랑으로 이 세상을 버러지같이 살다가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순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저희들을 선택하시고 진리에 기반한 사랑으로 교체하시는 신비한 일을 해 오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깊은 회개 가운데에서 진리에 기반한 사랑을 하는 삶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어지는 성찬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성찬을 행할 때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 안에 있는 진리에 기반한 사랑을 더 깊게 만드실 것을 믿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더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만드셔서 그 일에 사용하실 줄을 믿습니다. 이 모든 일을 약속하신대로 이루실 줄 믿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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