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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8/ 05. 3.
예수 그리스도를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미혹의 영들(다니엘 70주 해설)
서 달석 목사
서울 중앙 침례 교회 인용
다니엘의 칠년환란기간이라고 하는 다니엘 70주(490년)중 마지막 한 주(7년)가 예수 그리스도 희생과 부활시기에 성취되었느냐? 는 과거주의(Praeterists)나 아니면 소위 교회가 휴거하고부터 7년이 시작된다는 미래주의(Futurism)냐? 라는 성경해석은 양심의 자유에 다를 수 있지만 진실로 구원을 받았다할지라도 성경해석에 있어서 영적 상태가 어리거나 장성하였거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른 영’이라고 쉽게 정죄할 수는 없다. 필자 역시 과거 미래주의 신봉 때에는 역사주의(Historicism) 해석자들을 심하게 비판할 때가 있었기에 아직 영적 눈이 덜 뜨인 그리스도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이 필자의 글에 대해 반박하면서 자신과 다른 해석을 ‘미혹의 영’이라고 단언하는 행위에 응답하여 누가 ‘미혹의 영’에 끌려가고 있는지 일차적으로 분별해 보겠다. 참고로 필자의 과거 바이블뉴스 글들은 1655년 인쇄본 KJVB 번역 이전이었기에 개역 성경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이글은 KJVB 1611년판 1655년 인쇄본을 표준으로 하였음을 밝힌다.
1. 70주가 490년이라는 해석
다니엘 9장 24절의 ‘70주’(Seventy weeks)를 예언 해석자들은 하나같이 1일을 1년으로 계산하는 에스겔 4장 6절과 민수기 14장 33-34절의 40일 정탐기간을 40년으로 계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름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다니엘 9장의 70주는 490년으로 기준을 삼을 것이다. 이 방법은 지난 역사의 모든 성경학자들의 해설과 일치한다.
2. 70주라는 영적의미
어찌하여 70주인가? 히브리 원문의 해석은 “70의 일곱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하비 콘(Harvie M. Conn)은 말한다. 다니엘이 이 계시를 받은 것이 예레미아의 70년 포로가 거의 끝나갈 무렵 포로회복의 약속이 가까운 때였다(단9:1-2). 그러므로 이제 포로의 70이 아니라 메시야가 초림하는 새로운 ‘일곱들의 칠십’의 예언이 주어진 것이며 70주 49는 자유와 해방의 해(year)로서 희년(禧年-a Jubile)즉 안식의 해(레25:10)의 10배인 490년을 염두에 두셨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어떤 ‘시기’보다는 ‘칠십들’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본다. 굳이 연도나 일자를 계산할 수도 있지만 70주 예언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는 사실을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3. 언제부터 다니엘의 70주가 시작되었는가?
세가지 견해가 있는데:
① 주전 538년 고레스 왕 치세때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때(에스라1:1-4) 부터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때부터 메시야께서 기름부으심을 받으신 AD27년까지를 계산하면 아직도 55BC에 해당되기 때문에 합당치 않다. 설령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예루살렘 입성 주후 32년 4월까지라 해도 22년이나 계산적으로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고레스왕에게 성전 건축과 성읍에 대한 말씀을 하셨으나 다니엘 9장 24절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을 고레스왕의 명령이라고는 볼 수 없다.
② 주전 445년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으로 아닥사스다왕이 이 때에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고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린 때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AD 45년에야 70주가 끝나는 시점이 된다. 또한 유대력에 따른 1년을 360일로 계산해야 하며 그레고리력인 365일로 계산할 수는 없다. 왜냐면 다니엘이 계시를 받을 때는 유대력(360일)으로 받았고 365일은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재위 31BC-AD14) 때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76×365일 계산법은 엉터리 계산법이다.
③ 주전 457년 많은 보수적인 학자들은 아닥사스다(Artaxeres)왕의 에스라에게 내린 명령의 때를 70주의 시점으로 본다. 그 이유는 이 때부터 에스라와 학자들과 느헤미야 등이 성읍과 성벽을 재건하였기 때문이다(에스라7장 11-28, 느헤미야 2:8-17, 4:17). 그렇다면 다니엘 70주 시점은 주전 457년이며 이 때부터 다니엘의 70주 490년을 계산하면 주후 33년이 되는데 신구약 공백 1년을 더하여 서기 34년이 된다. 이 때에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마지막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하고 70주 약속이 끝났기 때문에 이방인 고넬료(행10장)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 순교 때까지 유대인에게 약속하신 490년을 지키셨으며, 다음으로 이방인 고넬료에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시점
다니엘 9장 24절의 “지극히 거룩하신 분에게 기름을 부으심이 임하리라”(and to anoint the most Holy)는 말씀에 ‘지극히 거룩하신 분’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시다. 기름부으심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비록 메시야가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라는 뜻이 있을 지라도 가시적으로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다는 예언이다. 그렇다면 세대주의자 박 모씨의 주장대로 예수님의 예루살렘이 입성이 어찌하여 ‘기름부으심’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침례받으시고 성령님의 공인 임재 후에 예루살렘에 여러 차례 올라가셨다. 올라가실 때마다 기름부으심을 받으심이 되는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라는 주장은 처음 듣는 괴상한 이론이다. 구약에 아론, 제사장들, 사울, 다윗, 솔로몬 등은 성령님을 상징하는 기름부음으로 왕의 임명을 받았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공적 임재를 ‘기름부음’이라고 묘사하고 있다(행4:27, 사61:1, 눅4:18-2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성령님이 비둘기 형상같이 임할 때였는데 예수님 출생 이후 4년이 지난 후에 AD 시점으로 하여 (서기)27년 10월에 침례받으실 때 공적이고 가시적으로 기름을 부으심을 받았기에 다니엘 9장 24절의 예언을 이루셨고 70주 중의 마지막 7년의 시점은 서기 27년 10월이 된다. 이 때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으로 침례를 받으신 후 성령님이 임하신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의 공적 선언인 것이다.(단9:25)
5. 다니엘 70주중 일곱 이레 49년과 62이레 434년
다니엘 24절은 70이레의 기간과 그 안에 있을 약속들 내용이고 25절-27절은 70주(490년)의 성취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다니엘 70주를 역사적 특정기간을 분류하여 세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① 처음 일곱 이레(7주 49년)
포로회복과 성읍과 성벽 재건이 있는 기간인데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유대인, 이방인들의 박해를 받으면서 “곤란한 때 들에”(even in troublous times-KJVB)에 성읍, 성벽 그리고 거리들이 회복되었다.(느헤미야 4:1-23) 그러므로 처음 7주는 포로회복 기간으로 어려움을 당하면서 예루살렘이 재건되기 때문에 특별히 7주로 나누어 구별하였다 할 수 있다. 이 첫 7주 49년을 어려움 중에 포로회복 기간이라고 한다.
② 두 번째 62주(434년)
예수님께서 요단에서 침례받으신 후 성령님이 공적 선언으로 임하실 때 즉 기름부으심을 받으실 때인 서기 27년까지 신구약 공백기간으로 말라기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말라기서를 쓰고 구약 예언이 끝나고 신약의 침례 요한까지 신구약 공백기간 약 400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 오실 때까지 62주가 있다고 예언한 것이다. 이 기간은 메시야께서 기름부으심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신구약 중간 시기라 할 수 있다.
③ 세 번째 한 주(7년)
70주의 예언의 극치이며 실질적으로 다니엘 70주를 성취시키는 기간이기 때문에 다니엘 9장 25-27절은 모두 이 7년에 관한 예언이 중심 내용이며 그에 따른 부수적인 예언까지 포함되었는데 즉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니엘 70주의 핵심은 마지막 7년에 달려있는 것이다. 결론으로 70주(490년)는 주전 457년부터 시작하여 서기 27년 예수님께서 침례받으시고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으실 때까지가 69주 즉 483년이며 예수님께서 30세(눅3:23) 되셨을 때 즉 서기 27년 10월부터 3년반 때인 30년 4월 희생하시고 스데반 순교할 때인 34년 10월까지가 남은 3년반으로 7년이 완성되어 70주 즉 490년이 이미 성취되었다.
6. the Prince와 the prince의 해석방법
다니엘 9장 25절 the Messiah the Prince는 26절의 Messiah 예수님이시란 점에는 이의가 없다. 일반적인 the prince(당시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에 대조하여 유일하신 메시야 the Prince(행3:15)로 표기하여 예수님께서 통치자 메시야되심을 증거하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영어에 프린스 P의 대문자와 소문자 표기로 the prince로 표기한 것 때문에 왕 예수님을 모방한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엉터리 해석으로 큰 잘못이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모방자’, ‘흉내내는 자’, ‘대체 그리스도’, ‘부그리스도’란 의미의 ‘호안티크리스토스(αντιχριστος-hoantichristos)’로서 예수님을 모방하는 자를 의미한다. 다니엘 9장 26절의 the prince는 결코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the prince는 한 시대의 정치적 로마의 통치자일 뿐 오랜 세월 예수님을 흉내내는 적그리스도는 결코 아니다. 미래의 칠년에만 적그리스도가 온다는 설은 수많은 순교자들을 기만하는 거짓 영의 증거다. 다니엘 당시는 느브갓네살(the prince)이 유럽, 중동을 모두 통치하는 때였고, 예수님 때는 로마 황제(the prince)가 유럽 중동을 통치하던 때였기에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실제적 통치자가 로마 황제였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를 the prince로 표기한 것 뿐이지 ‘the’가 표기되었다고 적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이스라엘 족장도 the prince(민34:23-28)로 표기되어 있고, 유다의 왕도 the prince(에스라1:8), 잠언에도 the prince(잠14:28) 그리고 the princes 복수로 표기된 곳도 부지기수이다. 심지어 마귀의 왕도 the prince(마9:34)로 표기했다. 그리고 여러 곳에 복수 the princes로 표기한 곳이 많다. 많은 세대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일급 원수인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적그리스도의 영에게 속아 그리스도를 적그리스도로 가르치고 있다.
7. 27절의 그(he)가 the prince 또는 적그리스도인가?
다니엘 9:26절의 “또 장차 (혹은 올) 한 통치자의 백성들이 올 것이요”(and the people of the prince that shall come) 많은 세대주의자들은 통치자의 백성들(people)이 올 것이라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the prince가 온다고 주장한다. 이 구절에는 절대로 백성들(the people)이 주체이지 the prince가 주체가 아니다. 영어를 잘 한다는 그 잘난 자들도 the people of the prince의 주체가 프린스가 아니고 백성들이 주체이란 사실을 억지로 부인한다. “장차 올” 또는 “올 것이요” (that shall come) 주체가 the prince가 아니고 the people 즉 백성들이 올 것이다. 결코 the prince가 무대 전면에 등장하지 안는다. 엉터리 영어문법으로만 그렇게 해석할 것이다. 그렇다면 27절의 ‘그(he)’는 누구인가? the people이 그(he)가 될 수 있는가? 영어를 한다는 잘난 자들은 답변해보라. 27절에 그(he)가 3번 나온다. 그분은 바로 26절의 메시야 그리스도 the Prince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여기서 프린스는 로마 황제(the prince) 베스파시안(Vespasian 제위 AD69-79)을 말한다. 그리고 베스파시안의 백성들 the people of the prince는 베스파시안의 아들 로마 장군 타이터스(Titus 재위 AD79-81년)와 로마 군병들로서 타이터스는 서기 70년 4-8월 예루살렘이 완전 파괴 될 때 백성의 일원이였을 뿐 the prince는 아니였다. 필자는 타이터스를 결코 프린스라고 한 적이 없다. 타이터스는 당시 프린스(the prince 즉 로마황제)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1611년 KJVB판 and the people of the prince that shall come, shall destroy the citie,
1655년 KJVB 인쇄본(한국킹제임스 성서협회) and people of the prince that shall come, shall destroy the city,
현대 KJVB 인쇄본들 and the people of the prince that come shall destroy the city,
현대판 KJVB에 왕의 백성들이 올 것과 성읍을 파괴할 것에 대한 문맥에 부호 , 가 없다.
많은 세대주의자들은 27절의 ‘그(he)’를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26절의 the people(백성들)이 주체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영문법에도 없는 the prince만 올 것이다 하여 27절의 ‘그’라고 억지주장을 한다. 참으로 예수님을 적그리스도로 가르치고 믿는 미혹의 영인 것이다.
8. 어찌하여 다니엘 9장 27절의 ‘그(he)’가 예수 그리스도인가?
① 단 9:24-27절까지 ‘그(he)’분 되시는 the Messiah, the Prince 되시는 예수님 외에 한 개인으로서 결코 다른 인격이 등장하지 않는다. the people of the prince의 prince는 로마 황제로서 예수님의 시대 로마에는 등장하되, 예루살렘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the people(로마의 군병들)이 등장할 뿐이기에 ‘그(he)’가 될 수 없다.
② 세대주의자들은 26절의 62주간들 후에 메시야가 끊어져(shall Messiah be cut off,) 없어지고 그것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데는 동의한다(사53:1-6). 그리고 “메시야가 끊어져 없어진 때”는 침례받으시고부터 3년 6개월 후의 골고다 희생을 말한다. 여기서 세대주의자들은 ‘69주’까지만 성취되었고 예수님 공생애 기간 3년반은 7년에 포함시키지 않고 먼훗날로 미루어 버린다.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어떤 성경 말씀이나 암시도 없다.
③ ‘그(he-예수님)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주간의(또는 위한) 언약을 확정하심’(and he shall confirm the covenant with many for one week): 한 주간의 언약이란 무엇인가? 24절의 언약으로,
․허물이 마치고(to finish the transgression,)
․죄들을 종결시키며(to make an end of sins,)
․죄악에 대하여 화목을 이루시고(and to make reconciliation for iniquity,)
․영존하는 의를 가져오며(and to bring in everlasting righteousness)
․그 환상과 예언을 봉인하고(and to seal up the vision and prophecy)
․또 지극히 거룩하신 분에게 기름부으심이 임하리라(and to anoint the most Holy)
④ ‘한주간의 언약’이란 24절의 죄사함의 언약으로서 70주의 마지막 칠년에 24절의 언약을 확정(confirm)하신다. 언약을 처음으로 세운다면 24절과 같이 ‘make’나 ‘stand’가 아니면 ‘새로 계약을 맺다’라는 표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확정’은 이미 24절에서 세워졌기 때문에 그것을 예수님께서 확정 즉 성취하신다는 뜻이다. 여행자는 비행기 예약을 먼저 하고 탑승 3일전에 이미 예약(covenant)한 탑승 계획을 확정(컨펌-confirm)해야 탑승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해외 여행을 자주 해 본자들은 ‘예약’과 ‘컨펌’의 의미를 잘 이해할 것이다. 27절의 ‘그(he)’가 적그리스도라면 그가 언제 미리 언약을 맺은 적이 있었기에 여기서 확정(confirm)할 수 있단 말인가? 언약과 확정의 의미도 모르는 자들이 무슨 성경을 연구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he)’가 적그리스도라면 어찌하여 7년만 언약을 맺으며 그 내용은 무슨 조약 또는 계약인가? 평화조약이라도 영구적인 조약을 체결해야 될 것이 아닌가?
⑤ 많은 이와 이미 맺었던 언약을 어떻게 확정하셨는가? 26절의 62주 후에 “메시야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요(shall Messiah be cut off) 그러나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니라(but not for himself;” 즉 70주의 마지막 칠년 중간에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 “many”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요1:29, 요일2:1-2, 히10:10 KJVB) “이것은 죄들을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니라”(For this is my blood of the new testament, which is shed for many for the remission of sins. 마26:28, KJVB 1655인쇄본)
⑥ 보수적인 성경출판사의 KJVB 관주 성경들도 27절의 언약을 마26:28절의 예수님의 속죄언약이라고 표기하였다. World Bible Publishers - Iowa USA 1611-1900초기까지의 KJVB들의 관주에는 단9:27절의 ‘그(he)’의 언약을 하나같이 마 26:28절의 예수님의 죄사함의 언약으로 표기하고 있다. 다니엘 9:27절의 ‘그(he)’를 적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학설은 하나같이 1830년 이후 예수회 음모 이후부터 나왔고, 그 산실은 달라스 신학교이고, 뿌리는 6명의 제수이트 회원인 카니시우스, 바이라, 알카자, 리베라, 벨라민, 라쿤자 등과, 예수회 앞잡이 에드워드 어빙 그리고 형제교회 지도자 존 다비 등으로 누룩을 퍼뜨린 장본인들이다. 결론으로 ‘그(he)’ 즉 예수님을 적그리스도로 보는 자들은 적그리스도 영을 소유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의 많은 KJVB 영어성경에는 관주에는 다니엘 9:27절의 언약을 마태복음 26:28절의 예수님의 언약이라고 표기하면서도 해설에는 미래의 7년 적그리스도 언약이라고 주장하여 자체 모순에 빠지고 있다.
9. 희생예물과 봉헌 예물의 폐지란?
다니엘 9장 27절의 성전, 예물, 제사등은 모두 예수님 피흘리실 때까지만 유효했다. 성전은 건물을 의미하는 ‘히에론’과 모임을 의미하는 ‘나오스’가 있지만, 성소 휘장이 찢기기 전에도(마27:51-52) 비록 건물은 아니였지만 사람들이 모인 성전의 부속건물 지역이나 그 안의 장소들을 ‘나오스’로 표기한 곳이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서신이나 계시록의 성전은 모두가 ‘나오스’(모임)로 표기되었고, 그 날 이후 건물 성전은 없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성전은 성령님의 전(고전3:16-17)인 교회(딤전3:15)이며 이 성전(교회-성도들의 모임)은 지금도 지어져가고(엡2:20-22)있고, 하나님께서는 건물 별장을 가지고 계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70번째 주 7년의 중간인 3년반에 골고다에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그분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염소들과 송아지들의 봉헌 예물이 필요없게 되었고, 예수님의 몸과 피로 동물 제사를 폐지하셨다.(히10:1-18) “and in the midst of the week he shall cause the sacrifice and the oblation to cease-그주간의 중간에 그분께서 희생예물과 그 봉헌 예물을 폐지시키실 것이니라”(단9:27) 9장 27절의 ‘그(he)’가 적그리스도라면 오히려 예수님의 피를 부정하게 하려고(히10:26-31) 율법에 따른 동물희생 행위를 도와주고 장려할 것이지 금지하겠는가? 실제로 과거 교황은 유대인들에게 건물신전을 예루살렘에 건축해주고 동물의 피를 흘려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믿게하여 유대인을 우롱하려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예수회(Jesuits)가 그 짓을 준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에 성소의 휘장을 찢어 율법을 폐지하셨던 것이다.(마27:51,52, 히9:12-14, 10:19-20)
예수 그리스도 희생 이후 70주의 후 3년 반인 서기 34년 10월 스데반이 순교할 때까지(행7:54-60) 그리고 서기 70년 8월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성전 기물들이 로마로 약탈되어 갈 때까지(증거 - 로마의 타이터스 개선문) 유대인들은 염소들과 송아지들의 피를 뿌려 가증함이 날개로 덮듯 배도가 극에 달한 짓을 하였다(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 참조). 또한 예수님의 피가 아닌 짐승의 피를 천사가 ‘예물’이라고 표현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피흘리실 때까지는 그것들이 유효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제발 더 이상 짐승의 피를 그만 뿌리라고 유대민족들에게 쓴 서신이 ‘히브리서’이고 그 내용은 “예수님의 피로 단 번에 죄사함을 얻었다”(히10:10)는 내용이다. 유대인들의 죄가 남았다면 이 편지를 썼겠는가? 히브리서가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며 그 내용이 ‘단번속죄’로서 죄(sin)와 죄들(sins)을 모두 사했다는 내용인데 어찌 먼훗날까지 남겨두었던 말인가?
10. 유대인들의 죄는 다니엘 9:24절, 26절, 27절 죄사함에서 제외되었고 먼 훗날 7년에 사해지는가?
일부 세대주의자들의(박만수씨의 경우) 논리는 다니엘 70주의 약속이 네 백성(이스라엘), 거룩한 성(예루살렘)과 관계되었고 7년이 남았으므로 유대인들의 죄들(sins)이 용서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 죄(sin)와 죄들(sins)을 나누어서 죄(sin)만 용서되었고 죄들(sins)은 남아있다가 먼 미래에 용서된다고 한다. 참으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부인하는 해괴망측한 마귀의 이단논리다. 죄와 죄들은 사실 하나일 뿐이다. 구약에는 속죄제(sin), 속건제(sins)들이 있는데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성취되었다. 오해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 죄들을 모두 사함받았다고 해서 결코 성도들이 죄가운데 살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깊히 명심하라.
첫째: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우선으로 하되 모든 이방인들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롬3:29-31, 4:9-25)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메시야가 끊어져 없어지는 때인 69이레 후 한 이레 7년 중간에 유대인, 이방인의 모든 죄(sin)와 죄들(sins)의 죄를 담당하셨다. 세상 죄를 지신 예수님(요1:29), 세상 화목예물(요일2:1-2), 모든 사람의 죄(히10:10)를 담당하신 예수님이시다.
둘째 예수님의 피는 유대인,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으며, ‘죄’(sin)와 ‘죄들’(sins)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용서하셨고, 세상의 죄(sin)와 죄들(sins)을 담당하셨다. 유대인들의 죄들(sins)을 남겨두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피의 효력을 쪼개서 먼훗날 역사하도록 유보하지 않으셨다. 이런 논리는 기본 신학적 무지의 발로일 뿐이다. 기본적인 복음도 구원도 받지 않는 자들의 미혹의 영이요, 마귀적인 이상한 교리이다.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히브리서 1장 3절에 유대인들의 죄들(sins)을 정결케 하였다고 했다. 이어서 1-13장까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수없이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유대인들의 죄들을 남겨두었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다 사했다고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보낸 히브리서와 야고보서가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죄들을 남겨두셨다면 이방인의 죄들도 남겨두셨고 더불어 호리만한 죄들(마5:26)이 남아있다면 우리 모두 지옥행일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주님은 모든 죄들을 사하셨다(골2:13 - having forgiven you all trespasses). “그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 한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드리심으로 인하여 우리가(히브리서-유대인과 이방인) 거룩하게 됨을 얻었느니라-by the which will we are satisfied, through the offering of the body of Jesus Christ once for all”(히10:10, KJVB) 예수님께서는 죄(sin)와 죄들(sins)을 모두 완전히 단번에 사해주셨다.(마9:6, 마26:28, 행2:38, 행5:31, 13:38, 롬3:25, 갈1:4, 엡1:7, 2:1, 골1:14, 2:11, 히1:3, 7:27, 9:28, 10:11,12 벧전2:24, 요일2:2, 계1:5 등)
셋째: 사탄은 할 수 있으면 자칭 잘난 자들, 배교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축소시키려 한다. “죄들(sins)은 용서하지 못했다”(박만수 씨의 사상) “7년 기간에는 믿음 50%, 행위 또는 율법 50%로 구원받는다”(피터 럭크만, 이송오 씨의 사상) “예수님의 피는 유대인들의 죄만 사했다” 또는 “이방인들의 죄만 사하셨다” 또는 “원죄만 사하셨고 자범죄는 남았다”라는 사탄의 교리는 로마 카톨릭교리와 같은 독한 사탄의 악질 누룩이다. 그것을 믿는 자는 결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들은 성경도 KJVB도 영어도, 히브리어, 헬라어도 모르는 몰지각한 육에 속한 자요 성령님이 없는 자들이다.
넷째 : 70번째 7년중 전 삼년반은 예수님 목회기간이고 후삼년반(서기 34년 10월까지)은 유대인 우선 전도기간이였다. 주님께서는 다니엘의 70번째 주 7년중 전 삼년 반에 공생애 활동을 하셨기에 유대인 우선으로 복음을 증거하셨고 명령하시기를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보다 잃어버린 이스라엘에게 먼저 가라하셨고(마10:5-6) 이방인은 개(마15:24-28)들로 비유하셨다. 예수님 승천 이후 스데반 순교때인 70주가 완성되는 34년 10월까지는 유대인 중심 즉 유대인 우선으로 죄들이 사해졌다고 복음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믿지 않고 스데반을 돌로 죽여 버렸다(행7장). 주후 34년 10월까지 70주가 만료됨으로 해서 이제부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되는데도, 사도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도록 베드로에게 각종 더러운 짐승(이방인들) 환상, 그리고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초청 복음을 듣고 죄사함을 받았고(행10:43), 이방인의 문이 열린 이후 바울 사도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그 때부터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된 것이다.
성경은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죄가 사해졌다고 최우선적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전도하여 삼천명(행2:41), 다음으로 오천명(행4:4) 이상이 죄(sin)와 죄들(sins)이 사해졌다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 날부터 오늘까지 구원의 문이 열린 은혜의 날 구원의 날인 것이다.(고후6:1-2)
다섯째: 유대인, 이방인의 죄와 죄들이 완전히 단 한번에 용서되었다면 다니엘 70이레 490년은 이미 종결되었다. 왜냐면 70주 안에 다니엘 9장 24절이 성취될 것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7년이 남아있지도 않고 ‘칠년대환란’이란 특정기간은 결코 없다. 사실 다니엘 70주의 핵심 예언은 9:24절의 예언성취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70주는 완료된 것이다.
여섯째: 다니엘 9:24절의 여섯 가지 예언은 모두 70주 마지막 7년에 완전히 성취되었다.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구원받는 일은 없다. 봉인은 계시록 일곱 봉인이 아니다. 다니엘 9장 24절의 봉인, 이상, 예언은 완전히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고 계시록의 일곱 봉인은 예수님 이후로 전개될 역사적 예언인 것이며, “영원한 의”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 안에서 믿는 우리 또한 의로워져있다.(롬3:1-25, 5:1-11, 히10:10-18)
일곱째 : 다니엘 9장 27절의 ‘그(he)’분 되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고 서기 70년 그것이 로마인들에 의해 성취되었다. 눅19:41-48, 21:20-38, 눅19:26-27, 마22:7, 23:37-39, 24:1-51, 단9:26, 신28:44-57) 또한 적그리스도가 결코 유대인이란 어떤 근거도 없다. 다니엘, 계시록 예언 어디에도 유대인이란 근거는 없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계시는 전 역사에 걸쳐 그리스도 행세를 해온 교황권이 적그리스도이다. “교황권과 로마 카톨릭을 모르면 기독교를 모르는 자들이다.” 아모스 구 선교사. 결론으로 : ‘칠년대환란설’은 카톨릭 예수회(Jesuits)의 악성종양이요, 괴악한 누룩이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종교개혁(사실은 종교개혁이 아니라 개혁-Reformation)을 하면서부터 유럽 전역에 성경에 눈이 뜨이고 복음의 불길이 번지게되자, 사탄은 비상이 걸리게 되었다. 다급한 사탄은 재빨리 정신과 신체 장애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of Loyola), 본명은 돈 이니고 로페즈 드 레칼데(Don Inigo Lopez de Recalde)로 하여금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조직을 결성하게 하였는데 그것을 예수회(제수이트-Jesuits) 또는 예수회(Society of Jesus)라고 부른다. 예수회원중 프란시스코 리베라(Francisco Rivera, 1537-1591) 예수회 추기경 로버트 벨라민(Rovert Bellarmine 1542-1621), 루이스 알카자(Luis de Alcazar 1554-1613) 마누엘 라쿤자(Manuel Lacunza, 1731-1801) 특히 라쿤자는 “영광과 장엄 속에 메시야의 재림”(라틴어 - La venidadel Mesias en gloria y majesta) 책을 유대인 랍비 벤 에즈라(Ben-Ezra)의 명의로 저술하여 계시록, 다니엘 주석을 편집 과거주의(Praeterism)또는 미래주의(Fururism)로 해석하여 7년간만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적그리스도는 교황권이 아니고 한 개인일 뿐이라고 조작하였고, 다니엘 9장 24절-27절을 왜곡시켜 개신교회에 침투시켰던 것이다. 이 누룩을 개신교회에 침투시켰던 사탄의 큰 머슴들 중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 1792-1834) 그리고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등이다. 교황권은 분명히 적그리스도이다. 과거 수많은 아나뱁티스트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바티칸 교황권 제수이트들에게 종교재판 이름으로 약 8천만 명이 피흘려 순교했다.
그러므로 개혁시대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 마틴 루터(Martin Luther), 존 위클맆(John Wycliffe), 존 녹스(John Knox),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 존 칼빈(John Calvin), 츠빙글리(Ulrich Zwingli),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 아이삭 뉴턴(Sir Issac Newton), 존 허스(John Huss), 존 폭스(Jhon Fox), 휴라티머(Hugh Latimer), 니콜라스 니들리(Nicholas Ridley) 토마스 크렌머(Thomas Cranmer), 존 웨슬레(John Wesley),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죠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챨스 피니(Charles Finney) 챨스 스펄존(Charles H. Spurgeon) 그리고 근대의 위대한 전도자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딘스데일 영(Dinsdale Young),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등은 하나같이 “칠년대환란설”을 믿지 않았고 교황권이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가르쳤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The Vicar of Christ)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다닌다. 그것이 적그리스도이다.
KJVB 성경을 믿는 거듭난 성도들, 특히 KJVB를 신봉하는 바이블 빌리버들(Bible- believers)은 성령님 안에서 겸손하게 성경 해석상의 차이가 있을 때는 권면하고 기도할지언정 미혹의 영이니, 언어에 무지하니, 엉터리니, 어두운 영이니, 빛이 없느니 등 인격적 모독성의 발언으로 비방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어느날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직고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마12:35-37).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4:11, KJVB) “For whosoever exalteth himself, shall be abased: and he that humbleth himself shall be exalted."(1655 인쇄본, 눅14:11)
참고로 반 종교개혁 예수회 학자 스페인의 벨라민 추기경과, 엠마누엘 라쿤자, 개신교로 가장한 장로교의 신비주의자 에드워드 어빙을 소개한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우선적으로 개신교도들의 대부분은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믿었고 가르쳐졌다. 그리하여 교황 아래서 일하는 몇몇의 신학자들은 그러한 압력을 제거시키기 위해 예언을 밝히는 학설을 내놓았으며, 지금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미래신학이라고 불리운다.
'세상에 특별한 지도자 즉 적그리스도가 3년 반 동안 통치하고 나서의 마지막까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힌 사람이 바로 리베라(Ribera 1537~1591)라는 제수이트 신부였으며, 이렇게 예언을 해석하고 7년 대환란 전 휴거설을 발표한 자로서 그러한 학설은 지금 모든 사람들에게 굳게 자리잡고 있다. 불행한 일을 자행했던 그 시대의 거짓 선지자 리베라와 벨라민 추기경(Cardinal Bellarmine - 1542-1621) 같은 제수이트 신부가 활동한 시기는 그때 잠깐이 아니라 그전부터 몇 세기에 걸쳐 크리스천들을 괴롭혀왔다. 19세기에 미래학에 개신교도들의 중요한 부분을 자리 잡고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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