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懷 술회
魏徵 위징
中原還逐鹿 중원환축록
投筆事戎軒 투필사융헌
縱橫計不就 종횡계불취
慷慨志猶存 강개지유존
仗策謁天子 장책알천자
驅馬出關門 구마출관문
請纓繫南越 청영계남월
憑軾下東藩 빙식하동번
䖇紆陟高岫 울우척고수
出沒望平原 출몰망평원
古木鳴寒鳥 고목명한조
空山啼夜猿 공산제야원
旣傷千里目 기상천리목
還驚九折魂 환경구절혼
豈不懼艱險 기불구간험
深懷國士恩 심회국사은
季布無二諾 계포무이락
侯贏重一言 후영중일언
人生感意氣 인생감의기
功名誰復論 공명수부론
중원에서는 또 사슴을 쫓으니
(군웅이 할거하며 천하를 다투니)
붓을 거두고 군사를 일삼네
(문보다 무의 시대가 되었네)
합종연횡을 꾀하였으나 이루지 못했지만
강개한 뜻은 아직 남았도다
책략을 갖고 천자를 알현하고
말을 달려 관문을 나가네
갓끈을 청하여 남월왕을 붙잡아 오고
수레 앞 가로목에 기대어 동쪽 번방을 항복받았네
꾸불꾸불 높은 산봉우리들 오르내리다가
겨우 산을 벗어나 평원을 바라보네
고목나무 숲 겨울 새 소리 들리고
빈산에 밤 원숭이가 우는구나
머나 먼 천리 길 오다보니 눈이 피로하고
구비구비 험준한 산길은 혼을 놀라게 하네
어찌 어려움과 위험이 두렵지 않으리오만
국사로 대접해 주는 은혜가 깊이 사무치네
계포는 두 번 승낙하는 법이 없고
후영은 한 마디를 중하게 여겼네
인생은 알아주는 의기에 감격하노니
하찮은 공명 따위야 누가 다시 논할 것인가
[위징]
580년~643년. 당나라 초기 위군 내황 사람. 수나라 말기의 난리 때에 군웅인 이밀에게 붙어 있다가 당에 귀순했다. 황태자 이건성에게 귀의했다가 이건성이 패하자 승자인 진왕 이세민에게 붙잡혔으나 직언을 잘하고 면전에서 반박하기를 서슴치 않아서 태종 이세민의 총신이 되었다. 636년 시중이 되고, 정국공에 봉해졌다. 현재 남아있는 위징의 시는 35수, 그 중에서 악부시 류 31수를 빼면 오언시 4수가 있다. 《북주서》, 《수서》등 역사서를 편찬했고, 《유례》,《군서치요》란 저술이 있다.
[감상]
이 시는 대표적인 오언고시로 평성 元韻이다.
수양제의 실정 후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중원에는 한 마리 사슴을 여러 사냥꾼들이 쫓듯이 군웅이 할거하며 천하를 통일한 천자가 되려고 서로 투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화는 숨을 죽이고 무력이 날뛰는 전쟁의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소진과 장의처럼 군웅을 설득하여 천하통일의 비책을 바쳤지만 그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천하를 걱정하는 진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채찍을 들고서 황제를 뵙고서 말을 달려 동관과 함곡관을 나서는 것이다.
옛날 한나라 종군이란 학자가 무제의 명으로 남월을 귀순시킬 때 긴 갓끈을 요청해서 남월왕을 잡아다가 대령하겠다고 하더니 마침내 남월을 복속시켰고, 또 역이기란 사람이 한 고조의 명을 받들고 제왕에게 가, 수레 앞 가로지른 막대기에 의지하고 유세하여 군대 하나 움직이지 않고 70여 성을 동쪽 번방으로 만들었는데, 나도 그런 임무를 띠고 사신으로 가는 것이다.
꾸불꾸불한 길을 통하여 높은 산에 오르고 나니 평평한 평야가 바라다 보인다. 고목에는 추위 속에 새가 울고 인적 없는 산에는 밤에 원숭이가 울어댄다. 고항 천리 먼 길을 바라보니 눈이 아프고 구절양장의 산길을 가노라니 나의 혼이 놀란다.
나도 사람이니 어찌 어렵고 험난한 것을 꺼리지 않으리오마는, 천하가 나를 국사로 대우함을 깊이 느낄 때 이런 일이 뭐 어렵게 느껴지겠는가? 옛날 초나라 계포는 두 번 승낙함이 없었고, 위나라 후영은 약속을 중히 여겨 목숨을 바쳤으니, 인생은 의기에 감격하는 존재라, 나도 공명 같은 것은 다시 따지지 않으리라.
이 시에서 첫 두 구와 끝 두 구는 명언으로도 유명하다. 전자는 우국개세의 격앙한 의분심을 잘 나타냈고, 후자는 의리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처세의 교계의 구로 인구에 많이 회자되고 있다.
[송계무학 주]
그냥 옮기고 마치려고 했으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어 다시 몇 자 보탠다.
이 시의 출처인 『중국명시감상』 은 2004년에 3만5천 원에 산 책이다. 이석호, 이원규 박사 두 분의 공저다. 그런데 몇 군데 원문과 달리 옮겼다.
5행이 '仗策謁天子'로 '채찍을 잡고 천자를 알현하고'이다. 그런데 인터넷에 '위징 술회'를 치니, 여러 해설이 나온다. 그 중에서 '仗策'의 '仗'을 '병장기, 지팡이, 의지할'으로 읽지 않고 '손바닥 掌'으로 읽어 '책략을 갖고'로 해석하는 것이 있다. 이 책의 해석 '채찍을 잡고'는 매우 어색하다. 그러나 위징이 군웅을 설득할 '책략을 갖고' 태종 이세민을 알현한 것이 순순한 해석이다. 또는 '의지할'로 읽어 '책략에 의지해서, 책략을 들고'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으로 18행은 원문이 '候反重一言'이고 해석은 '후영은 한 마디를 중하게 여겼네'이다. 계포와 후영 두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적 인물 '侯嬴'이 아니고 '侯反'이다. '嬴'이 생략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反'은 아무래도 끼일 자가 아니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에서 어느 분이 올린 '위징 술회'에 '侯嬴重一言'이 있다. 그러면 시 흐름이 순순하다.
또 13행 '旣傷千里目'을 '이미 천리 밖 고향을 바라보는 눈을 아프게 하고'로 해석했다. 무언가 시의 흐름이 구겨진다. 그 넓은 대륙에서 고향이 천리 밖에 안 되는가? 역시 인터넷 검색 다른 해설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길 천리'가 있다. 군웅을 만나러 구불구불 높고 험한 산길 천리를 지나왔는데 낙상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느라 눈이 피로하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이 책을 저본으로 하되 다른 해석을 참고하여 몇 군데를 나름대로의 안목으로 수정하였다.
아무튼 글, 특히 시는 편집하기가 지난하다. 자기 시도 그렇지만 남의 시, 특히 한시들을 수집하여 편집, 책으로 묶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열 번을 교정해 봐도 꼭 한 두 군데 오탈자가 나온다. 그래서 시는 반드시 원본을 봐야한다. 한시는 정말 오탈자가 생기기 쉽다. 뿐만 아니라 국역은 더 어렵다. 한자는 중의인데, 어느 뜻을 취하느냐에 따라 해석과 국역이 달라진다. 더구나 한학자들에 의한 국역은 직역에 그치기 쉽다. 그나마 한시를 알고 쓰는 한학자라면 의역이 되지만 드물다. 한시도 시다. 그러므로 시인이 국역하는 게 알맞지 않겠는가.
앞으로 수백 년 세월이 흘러도 수많은 후학들에 의해 중국한시집과 조선한시집이 편집, 편찬될 것이다. 한시집을 편찬하는 후학들은 일의 편리만을 위해서 선학들의 작업을 그대로 베끼지 말고, 아무쪼록 스스로 발굴, 채집하는 순결한 마음으로 정성을 쏟아야 할 것이다.
내가 이번 생에서는 남이 낸 한시책을 읽으며 감상하지만, 다음 생이 있다면 학자가 되어 좋은 한시집 한 권 낼 것이다.
한국에서 발행된 한시집 말고, 중국에서 발행된 한시집도 말고, 연대가 가장 오래된 문집이나 책자를 구해서 직접 편집해야 오탈자를 최소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