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 American – 1. 한국에서의 얘기
우규환(사대 60)
골든클럽회보 편집팀이 매월 상당한 분량의 회보를 시간에 맞추어 발간하는 노력과 정성이 고마워 지난 것도
버리지 않고 잘 간직하고 있다. 김영덕 박사의 “6/25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하며” (회보 100호 7-9면, 2020년 8월)를
읽으면서 한국현대사의 진면목을 꿰 뚫어 보는 것 같아 글쓴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었다. 그래서 내가 경험하였던
하찮은 일이지만 일기장처럼 적어보려고 한다. 비록 하찮은 기억들이라도 기록은 남길 가치가 있다는 말을 음미하면서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배경을 공유하고 싶다.
풍기국민학교 4학년 교실에서 점심도시락을 먹고 있을 때였다. (1948년 봄) 좀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밖을 내다보니
군인 2명이 쓰리쿼터 차에서 가마니를 끌어내리고, 가마니에서 무언가 끄집어 내는데 목이 잘린 사람의 머리였다.
군인 1명은 머리채를 들고 폼을 취하고 다른 1명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해방 직후부터 남북분단이 되고,
좌우익 사상이 갈려서 경북북부지역에 소위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가 있었는 데 내가 다니던 풍기국민학교에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공비토벌이 그들의 주임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6학년때인 50년 6월 전쟁이 나서 9/28수복이 될 때까지 학교는 휴교 상태였다. 피란을 가지못한 우리 가족은 뒷마당
쪽에 방공호를 뚫고 UN젯트기 공습을 피했다. 우리집 바로 옆집은 우익이어서 집을 완전히 몰수당하고,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쓰면서 거의 매일같이 인민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인민군들이 각 가정마다 3-4명씩 배치가 되어서 숙소를
제공했는데 식사는 그들 본부에서 해결한 것으로 기억된다. 인민군 아이들의 나이가 고작 16살이고 머리를 빡박
깍은 중머리였는데, 꽤 많은 시간들을 그들과 친구처럼 보낸 기억이 있다. 나보다 두세살 위인 형님과 조카들은
의용군으로 끌려갈 위험이 있어서 밤낮 숨어지내곤 했다. 53년 7월 27일 휴전이 될 때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석방,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의 한국방문 등 큼지막한 뉴스가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다. 우리는 그때
중학생으로 “We do not want truce!”를 외치며 휴전반대 데모를 열심히 했다.
생후 처음으로 집을 떠나 안동에서 사범학교를 다닐 때 (54-57년)
자취를 하며 신문배달도 했다. 동아일보 100여부를 가가호호
배달하는데 2-3시간이 걸렸다. 만화 고바우 영감, 횡설수설 칼럼,
연재소설 청산리전투, 삼국지 연의가 인기 절정이었고 자유당
정권에 대하여 바른 말을 하는 야당지를 학수고대하는 독자들의
눈망울을 의식할 수 있었다.
안동사범을 졸업하고 교사발령을 받아 공무원이 되었다. 18세의 신임교사로
내가 졸업한 풍기국민학교에 부임하니 나의 은사 두분이 그 때도 평교사로 계셨다.
신임교사 환영연을 한다고 술집으로 데려갔는데 술집마담을 총각맛좀 보라고
나한테 떼밀어서 민망하기도 하였다.
교사로 근무하면서 대입준비를 하던 59년은 자유당 말기였었다.
공무원 3인조(교사-면서기-순경)의 조장이 되어서 오전수업을 마친 오후에는
가정방문을 실시했는데 목적은 여당후보를 찍으라는 설득이었다. 자녀들의 담임선생이 오니
거절을 못하지만 참으로 면구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본의 아니게 3/15 부정선거의 전초병이 되었다. 나의 마지막 근무지 국민학교 교장은
내가 입시를 보러서울에 다녀오는 것을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우 선생, 당신 정신이 있오? 없오?
당신 출타하면 근무지 이탈로 즉시 파면이야!”라고 협박하였다. 나는 파면을 시켜도 좋으니 시험을 보러 가겠다 하고
나온 적이 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야당 구호와 “갈아봤자 별수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여당구호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민심이 천심이라 하였듯이 1960년 3/15 한 달 후에4/19가 일어났는데 대학생이 된 우리는 당일 경무대 앞까지
시가행진을 하고 발포명령이 내려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가운데 서울신문사 건물이 불타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신당동 가정교사 집으로 돌아왔다.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하고 ROTC소위로 군복무를 하는 2년동안은 시간이 무척
지루하였다. 젊은 시절인데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대구 제2육군병원에 입원도 했었다.
편도선수술, 치질수술, 포경수술 돈 안들이고 필요없는 끝으머리는 다 잘라내었다.
대구 공군기지에 근무하는 친구 덕분에 공군수송기를 타고 대구-여의도 왕복을 하는 비행기 탑승 첫 번 기록을 세웠다.
월남전이 한창인 66년 3월 부산해운대 탄약창에서 제대를 하고 대학원에 복학했는데 그 때도 가정교사가 생활의
주요수단이 되었다. 서울대 직업보도소에 가정교사 구직 신청을 해 놓았는데 하루는 연락이 오기를 맹아학교
학생이 수학을 배우겠다 하여 국립맹아학교 기숙사를 찾아갔다. 그 때 만난 학생이 고2 강영우 이다.
그는 나에게 고교 수학 중 기하를 가르쳐 달라 해서 한 두 달 가르쳤는데 나는 열심히 가르치고 그는 참으로 애쓰면서 배웠다.
기하에는 주로 도형에 관한 문제가 많은데 강영우는 점자로 기록하면서 내가 가르치는 것을 100% 이해가 빨라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다.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후 Urbana-Champaigne 일리노이대학 캠퍼스 한인교회 부흥회에서 강사로 온
강영우 박사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2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