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곡동굴을 구경하고 나와 두리번 거리다 마침 오는 택시를 타고 무작정 '쉴모텔'을 가자고 청했다.
이곳 앞에 선정비(善政碑)가 있다고 해서 가 보려는 것이다.
많은 비석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여덟개뿐이다.
열녀비(烈女碑)가 중간에 있는데 옥개석(屋蓋石)의 문양(文樣)으로 봐서는 근래의 것인듯하다.
그나마 글자를 명확히 읽을 수 있는 비석은 이 하나뿐이다.
"부사 이공 최중 선정비"(府使 李公 最中 善政碑).
보통 선정비(善政碑)는 당사자가 부임해 오기 전에 미리 만들어 놓는 예가 많다고 한다.
그래야 백성들을 덜 괴롭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최중" (李最中)이란 분은 정말 백성을 위해 애쓰신 분인듯 하다.
이 地方 암행어사(暗行御史)로도 왔던 분으로 세종대왕 아드님이신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이라고 한다.
墓가 대모산(大母山) 정상 근처에 있다고 하는데 찾아봐야 겠다.
이렇게 이 곳과 연관이 깊은 분인데 어찌 남긴 글씨 하나 없을까? 하고 찾아보았다.
용추폭포 제일 우측에 있는 "별유천지"(別有天地)
"무인 모춘"(戊寅 暮春)에 "광릉귀객"(廣陵歸客)이 썼다고 하는 "別有天地"(별유천지)는 누구의 글씨인지 잘 몰랐다고 한다.
최근에 이것이 당시 삼척부사였던 "이최중" (李最中)선생의 글씨라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한다.
비석군(碑石群)을 보고 다시 택시를 타고 "만경대"(萬景臺)를 찾아간다.
나이 드신 택시 기사님이 어떤 이유로 "만경대"를 찾느냐고 묻는다.
자신은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만경대'를 올라 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나도 서울서 평생 살았지만 남산타워에 가 본 적이 없다고 하며 서로 웃었다.
이곳은 지나가는 사람이 뜸하다.
약간 가파른 길을 올라 왼쪽을 보니 정자(亭子)가보인다.
이 비석은 아마도 이 정자를 세운 "김훈"(金勳)公의 생가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듯하다.
"만경대"에 대한 설명석.
이 언덕이 九美山의 聖山峰이란다.
1613년에 "김훈"(金勳)公이 "만경대"를 세우셨다고 한다.
1924년 정자를 중건했을 때 당대의 명필 옥람(玉藍) 한익동(韓溢東)선생이 44세 되던 해에 쓴 현판.
한익동(韓溢東)선생은 대동강 부벽루(浮碧樓)의 액자( 額子)도 쓰신 분이라고 한다.
海上名區(해상명구)
1872년(고종9) 한성판윤(漢城判尹 : 지금의 서울특별시장) 남파(南坡) 이남식(李南軾)이 썼다고 한다.
이 詩는 "삼척 부사"(三陟副使) 저암(著菴) 유한준(兪漢雋)의 글로 이분의 글씨는 무릉계곡 용추폭포에도 있다.
용추폭포 아래에 있는 유한준(兪漢雋) 이름. 옆으로 용추(龍湫)라고 써 있다.
옛날에는 전망이 좋은 곳이였을듯한데 지금은 세멘트공장이 시야를 가로막고 소음이 심해 앉아 있기 불편했다.
이곳이 이렇게 변할 줄 "김훈"(金勳)公은 아셨을까?
만경대에서 능선을 따라 한참 가다가 전천(箭川)가를 따라 내려가는 길로 가면서 뒤를 돌아본다.
뒤에 두타산(頭陀山)과 청옥산(靑玉山)이 보여야 하는데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다른 분이 찍은 사진에 보이는 두타산(頭陀山)과 청옥산(靑玉山) 전경.
한참을 걸어가니 호해정 안내판이 보인다.
산으로 올라가는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래쪽을 가르킨다.
호해정(湖海亭)
그런데 아무리 다시 살펴봐도 1947년에 세워진 정자(亭子)라고 한다.
그러면 좌측에 있는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의 이 글씨는 이곳을 보고 쓴 글씨는 아니다.
風俗詠蘬 (풍속영귀)
만제(晩齋)홍낙섭(洪樂燮 : 1874년 2월 4일 ~ 1918년 10월 27일)의 글씨.
이분은 이곳이 고향이라고 한다.
모두 살필 시간도 힘도 없지만 이 많은 현액(縣額)의 대부분은 이 정자(亭子)를 만들기 전에 씌어진 글일듯 하다.
정자(亭子) 앞으로는 넓은 주차장과 전천(箭川)너머에 있는 세멘트공장등이 앞을 가려 시끄러운 정자(亭子)가 되고 말았다.
정자 우측위에는 내용을 알 수없는 비석이 하나 있다.
다만 내용중에 봄을 노래하는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 옮겨본다.
春風起(춘풍기) 春日暖(춘일난) 春雲淡(춘운담) 春山靑(춘산청) 春水滿(춘수만)
春草綠(춘초록) 春木榮(춘목영) 春花灼(춘화작) 春鳥嚶(춘조앵) 春男蕩(춘남탕)
春女懷(춘녀회) 春服成(춘복성) 春酒熟(춘주숙) 東西南北 無非春(동서남북 무비춘)
이 비석(碑石)의 내용은 일반인의 이야기가 아닌듯 싶다.
조금은 주술적(呪術的)인 이야기인듯하다.
정자 좌측으로 올라가면 "할미바위"를 알리는 커다란 할머니의 조형물이 있다.
할미바위.
할미바위는 흔들면 흔들리기도 한다는데 올라가기가 무척 힘들듯 했다.
그리고 주변의 나무가 자라서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다.
할미바위 뒤로 돌아가보는데 여기에서만 보이는 꽃이 몇구루 있다.
"나도송이풀"같은데 비교적 꽃이 작다.
할미바위를 바닷가 쪽에서 본 모습.
옛날 다른 분이 찍어놓은 할미바위의 모습.
이곳에서 추암까지는 2K가 조금 넘는단다.
해안을 따라 난 길을 오르자 "을미대"(乙未臺)라고 쓴 碑가 있다.
옆면에 "을미대창립기"(乙未臺創立記)가 적혀 있는데 내 실력으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 길은 "해파랑길 33코스"인데 원래는 군인들의 순찰길이였을듯하다.
간간이 보이는 바다쪽은 시설물과 그의 움직이는 굉음이 내내 울린다.
큰길로 나오는가 싶은데 추암까지는 아직도 2.2K가 남았단다.
그런데 안내판이 가르키는 곳은 길이 아니고 "하수처리장" 입구다.
정문앞에서 돌아 본 하수 처리장.
하수처리장으로 들어가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가면 정문이 나온다.
하수처리장을 빠져 나오면 편도 3차선의 대로를 따라 가야한다.
화창한 날씨에 땀이 비오듯 하고 큰길은 조용해서 더욱 멀게만 느껴진다.
추암 해변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제일 앞에 있는 팬션으로 들어갔다.
옷을 모두 벗어 널고 에어컨을 틀어 말리며 샤워를 한다.
한참을 쉬고나서 점심겸 이른 저녁을 먹으러 해변가로 향한다.
첫댓글 역시 여행가의 진면을 볼수 있네요.
현지인도 모르는 구석 구석을 탐방하는 모습이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