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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5권. 18세기, Le XVIIIe siècle 273-506
제08장, 18세기 중기(1740-1775) (연속): 정신의 이론 (연속), 흄의 회의적 비판과 아담 스미스의 감정주의.
- Deuxième Période (1700-1740) (suite): Théorie de l’esprit (suite):
La critique sceptique de Hume et le sentimentalisme d’Adam Smith 355-376
1절 흄의 관점 Le point de vue de Hume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 스코틀랜드의 에딤버러에서 태어났다. 법학공부를 포기한 후에, 상업을 시도했고, 그리고 1734년[스물셋]에 사르트(Sarthe)에 있는 라플레쉬 프랑스에 있었다가, 1737년[스물여섯]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별 성공없이 인간 자연론/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 Being an Attempt to introduce the experimental Method of Reasoning into Moral Subjects을(1권과 2권은 1739년, 3권은 1740) 출판했다. 1741년[서른]과 1742년[서른하나]에 도덕론과 정치학 시론(Essays Moral and Political, 1741)의 1권과 2권이 나오고, 1748년[서른일곱]에 3권이 나온다. 그 이전에 1746년[서른다섯]에 생 클레르/클레어(William St Clair of Roslin, 20th Baron of Roslin, 1700-1778) 장군의 비서였다. 그리고 1748년에 그는 비엔나와 튀린에서 외교 임무로 보냈다.
시론들의 성공은 아마도 그를 고무시켰기에, 인간 자연론의 난해한 관념들을 제시하기 위하여 이런 형식을 선택할 것이다. 1748년에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Philosophical Essay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748이 나왔다. 1758년부터 An I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로 단어를 바꾸었다. 그리고 1751년[마흔]에 도덕원리에 관한 탐구(An I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 1751)를 1752년에 정치적 담론들(Political Discourses, 1752)을, 영국사(The History of England)(1754, 1756. 1759)을 썼다. 그리고 「종교의 자연사(The Natural History of Religion)」는 그가 살아있을 때 나온 작품들을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1763년(쉰둘)에서 1765년(쉰넷)까지 대사의 비서로서 파리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파리에 있을 때, 파리는 철학과 문학의 세계 속에 “꽃들로 덮여있었다”고 한다. 그는 1766년(쉰다섯)에 영국에서 쉴 곳을 찾는 루소를 동반하여, 파리를 떠났다. 그러나 루소와 흄 사이에 곧바로 불화가 생겼다. 그런데 그는 1768년[쉰일곱]에 런던에서 차관(sous-secrétaire d'État)직을 맡기 위해 대사 비서직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1769년[쉰여덟]에 스코틀랜드로 은퇴했다. 그의 사후, 1779년에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1779)가 출판되었는데, 아마도 1749년[서른여덟] 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356)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는, 상상작용을 마치 많은 오류들의 가장 큰 근원들 중의 하나인 것처럼 비난했다. 합리주의는 허구적 신념들을 이법의 명증성에 대립시켰다. 그런데 18세기의 비판자들은 합리주의에서 나온 거대한 체계들 속에서 순수 상상작업의 작품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어떤 데카르트와 어떤 말브랑쉬의 “통찰들(des visions)”에 대해 말할 뿐이다. 이 어떤 이들은 합리주의가 추방했다고 믿었던 것에 대한 희생자들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경험에 지지를 받으면서, 상식적이고 통속적인 이법보다 더 충실하고 보다 신중한 “이법(raison)의 이름으로 말한다. 이런 이법으로부터 흄은 이법 또한 상상작용의 열매이라고는 것을 제시하려 할 것이고, 비판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이 비판에서 모든 지지점을 걷어내려 할 것이다. 마치 비코가 역사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흄은 인간들 사이에서 통일성을 찾는 것은 이법 속에서가 아니라, 상상작용 속에서이다. (356)
철학을 인류성에 봉사하는 것으로 보기에 급급한 많은 사상가들 사이에서, 흄은 우리에게 마치 순수 사변가인 것처럼 나타나는데, 그에게서 철학적 사유의 요청들이 정확하게 행동의 요청들과 반대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 만큼이나 행동[행위]에서, 외적 세계 또는 원인성을 믿는 만큼이나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쁜 짓이고 게다가 불가능하다. 그 만큼이나 철학자는 조심스럽게 자연을 찾아야하고 그리고 믿음들을 정당화하는 자격들의 가치를 찾아야만 한다. 사람들은 흄의 회의주의는 로크(1632-1704)와 버클리(1685-1753)의 철학들에 대한 자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발전이라고 토마스 리드(Thomas Reid, 1710–1796)이래로 일상적으로 인정했다. 로크가 우리가 보았던 대로 실체의 용어를 비판했던 이후로, 정신들의 원인성(la causalité)은 건드리지 못한 채 남아있으면서도 버클리가 물리학적 원인성을 비판했던 이후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흄에게 남은 것은, 동일한 원리에 영감을 받으면서 정신적 실체의 용어와 더불어 원인성 일반의 용어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거짓이 아닐지라도 이 개념작업(la conception)은 흄의 철학적 태도를 충분히 가치 있게 하지 못했다. 개념작업은 원인으로서 관용 또는 종교와 같은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오히려 어떤 행위가 원인을 호출하지 않는 때인 그 찰나들마다에서 원인이 그를 어디로 인도하기를 원하는지 개념작업은 반성의 여지를 남겨놓는다. 그는 고대 아카데미아학자들과 회의주의학자들 이래로 가장 덜 학설적인[이론적인] 사상가들 중의 한 사상가이다. “그는 자유에 관한 토론에 대하여 쓰기를, 종교와 도덕성을 위하여 위험한 귀결들로부터 핑계를 끌어내면서 어떤 가설을 반박하는 것, 그것은 보다 공통적인 추론의 방법으로 나온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 그 방법 보다 더 많이 비난받아야할 것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견해가 불합리성으로 이끌 때, 그 견해는 확실하게 거짓이다. 그러나 한 견해가 위험한 귀결로부터 나온 것에 대하여, 그 견해가 거짓이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흄은, 진리와 인간적 필요들 사이에 섭리적인 상응을 인정하였던 그의 세기에 매우 많은 사람들과 같은 그런 자들에 속하지는 않는다. 형이상학적 탐구들은 그것들의 유용성(utilité)에 의해서도 그것들의 안락함에 의해서도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이 탐구들은 정력적인 정신들의 운동(le sport)과 같은 것이다. “이 탐구들이 매우 힘들고 또한 매우 피곤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마치 정력적이고 활기찬 건강을 갖추었다면 맹렬한 연습들을 필요로 하는, 그리고 힘들고 짓눌린 인간들의 일반성에서 나타나는 작업[노동]들에서 즐거움을 찾는, 어떤 신체들과 마찬가지로 정신들에도 마찬가지이다.” (357)
그의 목표는 그의 시대의 많은 인간들의 목표이다. 특히 꽁디약의 목표는 형이상학을 가지고 과학을 만드는 것이며, 그는 인간 오성의 연구에서, 천체 역학에서 뉴톤에게 성공을 가져다 준 절차를 사용한다. 그것은 사물들에 관한 우리의 개별적인 판단들로부터 가장 일반적인 원리들로 이행하는 탐구이다. “이 원리들은 각 과학에서 모든 인간적 호기심의 한계들을 표시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357)
그러나 이런 정식은 이미 흄의 독창성을 잘 표시하고 있다. 철학은 비판(la critique)이다. 오성의 비판, 도덕의 비판, 문학의 비판, 예술의 비판인 철학은 분석과 귀납법을,통하여 이것들의 원리를 대해 탐구하는 인간의 평가들과 믿음들로부터이다. 그러나 철학은 이번에는 우리가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원리를 평가하는데, 마치 뉴턴주의자가 중력 작용을 설명하는데 조심하듯이, 조심해야할 것이다. 이런 귀결로 흄의 구상은 관념들의 계보학 또는 혼성작업(composition)과는 아주 다르다. 그의 구상은 우리 판단들의 원리들에 대한 정당화에 관한 것이다. (357)
2절 인식의 비판 – La critique de la connaissance 357.
그것은, 흄의 첫 작품 인간 자연론/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 1739) 속에서, 물질들의 서투른 성향(disposition, 배치) 때문에 약간 난해한 어떤 것이다. 사람들은 로크 작품에 대해 단순히 다시 다룬다고 우선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1부에서는 관계들의, 양태들의, 실체의 관념들이 관념들의 연합처럼 다루어지는데, 마지막 장에서는 추상관념들에 대한 버클리의 비판을 확정하고 있다. 제2부에서 공간(l’Espace)과 시간(le Temp)의 관념에 관해서 그리고 현존의 관념에 관해서 다룬다.제3부에서는 인식과 개연성에 관해서 다루는데, 이는 로크의 오성론(1689)의 재료들이다. 그런데 9년 후에 출판된 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1748)은, 인간 자연론/본성론(1739)의 긴 부분들을 빠뜨리면서, 흄의 주제들을 훨씬 더 잘 분간하고 있다. (35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자연론/본성론(1739)은 첫 부분부터 우리를 새로운 지평 위에 자리잡게 했다. “관념주의/이데아주의(l’idéisme)”는, 즉 그의 반대자들에 의해 로크의 학설에 붙여진 이름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다시피, 원리적으로 우리 오성의 모든 대상들을 단순한 또는 복잡한 관념들로 환원하였다. 단어를 도입했던 데카르트에게서 관념/이데아(l’idée)은 이미지 또는 실재성의 표상[재현]이었다. 로크에게서 이데아/관념은 표상적[대리적]이라는 정도에서, 이데아는 단지 정신과 정신의 대상 사이에서 매개물이다. 로크는 대상 관념과 표상관념 사이에 선택할 수 없었다. 로크는 한 관념은 다른 한 관념에만 닮을 수 있다고 하는 버클리의 반대에 부딪혀야만 했다. 흄은 확실하게 이데아주의(l’idéisme)의 선상에 머물렀으나, 그는 인상들과 관념들 사이에서 난점을 제거하는 구별을 행했다. 말하자면 인상들이 원본들이거나 또는 모델들이며, 관념들은 이것들의 복사물이다. 인상들은 강하고 생생한 반면에, 관념들은 약하다. 이로부터 관념 전체는 인상의 대리[표상]이라는 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관념은, 관념자시니 강도성에서만 우월하다는 동일한 자연으로부터 나온 인상의 대리[표상]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버클리의 비판을 피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리하는 관념을 간직하였다. 흄은 좀 더 멀리 나갔으며, 그는 이로부터 관념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격률을 끌어냈다. 만일 사람들이 그 인상 또는 인상들을 – 관념은 인상의 복사물인데 - 할당할 수 없다면, 어떠한 관념도 유효하지 않으며, 어떠한 관념도 현존조차 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러한 것은 단순 관념들로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단순관념들을 복합 관념들로 모음[모더기]은 인상들의 그러한 모음[무더기]에 여전히 참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흄은 그 자신의 결률에 하나의 유보조항만을 만들었으나, 더 많이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들이 있다. 만일 사람들이 눈 앞에 연속적인 색상의 색감들[뉘앙스들]을 제시한다면,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이 색감들 중의 하나를 빠뜨렸다고 한다면, 눈은 빠뜨린 색감을 깨닫을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것에 대해 그 이전에 미리 그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상응하는 인상 없이도 단순한 관념은 있다. 이러한 논평에 의해 흄은, 정신이 모자이크 같은 인상과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정신을 새로운 인상으로 인도하는 도약(un élan)이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359)
이런 격률은 밑바탕에서 흄 비판의 유일한 원리이다. 흄은 정신의 내부자체에서 즉 인상 속에서 관념을 정당화하는 표본[모델]을 발견하면서, 흄의 비판은 내재적 비판이 된다. 을 하게 된다. 흄의 고유한 대상은 인상의 연구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연구는 해부학과 생리학에서 유래하지 철학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그 대상은 오로지 관념들이며, 인상들의 복사물들이다. 이 복사물들의 다양한 관계들은 인상들과 더불어 관념들 사이에 정신의 망을[직조를] 형성한다. 그런데 인상은 어느 정도로는 문제의 절대자이며, 사람들은 그것의 조건들을 더 멀리 찾아가지 않는다. (359)
흄은 로크를 읽으면서 꽁디약이 거기서 보았던 것과 동일한 결함에 대해, 말하자면 복합 관념의 형성작업에 대한 주제에서 로크의 임의적이고 단호하지 못함에 대해 놀라게 되었다. 단순 관념들이라는 재료들을 가지고 복합 관념들이 구축되는 어떤 방식으로부터, 그것은 사람들이 로크에게서 잘못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꽁디약이 구축의 규칙들을 스스로 얻은 대신에, 흄은 경험에 의해 관념들을 연결하기 위해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놀이로 들어가는 힘들(les forces)이 어떤 것인지를 탐구한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상상작용의 질서에 대한 보편적 원리들을 재발견한다. 그 보편적 원리들은 말브랑쉬와 그에 앞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매우 강하게 지적했던 것들이다. 두 관념이, 닮음[유사]의 때문이든지 또는 왜냐하면 관념들로 복사되는 인상들이 인접해 있기 때문이든지, 결국 왜냐하면 한 인상은 원인으로 표상되고 다른 른 인상의 한 인상의 결과로 표상되기 때문이든지, 결합(connexion, 연동)으로 들어간다. 법칙들이 우리의 관념들과 맺는 관계는, 뉴턴 인력 법칙이 물체들에게 맺는 관계와 같다. 이 법칙들은, 물체들이 정신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며, 마치 인력법칙이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듯이, 모든 복합 관념들을 형성한다. 흄은, 데카르트주의자들과 특히 말브랑쉬가 이런 법칙들로부터 탐구했던, 소위 말하는 생리학적 설명들을 단지 다시 증거 하였다. 이런 설명들은 그에게서는 기원적이고 원초적이다. (359)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연합론자라는 용어가 나중에 다루어진다는 의미에서, 흄은, “관념연합론자”가 아니다. 게다가 그의 심정적 인력은 보편적이 아니다.인력이 보편적이 아니라는 것인데, 우선 왜냐하면 심정적 인력은 그 계열을 하나의 관념에 멈추게 하는 지배력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왜냐하면 어떠한 겹합 없이도 환상 속에서 둘 또는 여러 관념들의 임의적 통합 속에 그리고 상상작용 속에 종종 변하는 비규칙성이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비규칙성이 있다. 마치 말브랑쉬처럼 흄은 연합적 결합들을 마치 우리 오류의 중요 원인들의 하나처럼 생각했으며, 특히 “우리가 관념들을 고려함에서 정신의 행동들이 극히 적게 차이 날 때”마치 관념들을 매우 자주 혼동하게 하는 유사성처럼 생각했다. (360)
따라서 흄은 우선 로크 체계의 빈칸을 채우기를 원했다. 상상적 결합(connexion imaginative)은 단순 관념과 복합관념 사이의 매개물이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관계의 복합 관념을 갖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것들 사이에 유사성의 관념연합에 의해 통합되었던 관념들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초상화와 모델의 비교는, 즉 관계의 복합 관념은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을 암시하게 하는 결합을 따라간다. 실체라는 복합 관념은, 즉 하나의 이름에 의해 지칭된 단순 관념들의 집합체의 관념은, 단순관념들이 인접에 의한 연합에 따라 상상작용에 의해 재통합될 때 형성된다. (360)
그러나 좀 더 앞으로 나가보면, 그는 로크가 첫째 문제도 풀지 못했듯이 또한 풀지 못했던 한 문제를 발견했다. 그것은 관념들에서 인식으로 이행의 문제인데, 로크가 이 단어[인식]에 부여한 의미에서 그러하다. 로크에게서 인식은 두 관념들 사이에 관계의 (무매개적이거나 또는 매개적인) 지각작용이거나 또는 현존의 직관적인 지각작용이이다. 그리고 인식은 항상 확실하다. 흄의 첫째 독창성은, 인식 바깥에 이런 열거[나열]이 남겨져 있는 인식의 거대한 몫(la portion, 영역)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경험 바깥에 있는 사실들의 현존을 우리가 주장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이것들은, 사실을 재료로 하는(en matiere de fait) 모든 참조사항들이고, 다소 그럴듯한 추론들이다. 과거 사실들을 재발견하기 위해 인간적 증거를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든지, 사람들이 다가올 사실들을 예견하기 위하여 앞선 경험을 사용한다든지, 사람들은 로크의 틀 속에 들어있지 않은 추론하는 방식을 사용한다.왜냐하면 그 추론하는 방식은 현실적 경험도 아니고, 관념들의 관계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이[추론방식이] 단순한 개연성만을 제공한다는 핑계 하에 인식으로부터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아마도 과거에 또는 미래에 머물 때, 그것은 가끔 정확하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확실성을 허용한다.우리는 태양이 내일 뜬다는 것을 확실하게 안다. 수학적 확실성과 다른 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진실이지만,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인식]에서 그래도 여전히 완전하다는 것을 안다. (369)
이런 참조는, 확실하든 또는 개연적이든 간에, 어쨌거나 원인과 결과의 결합에 근거한다. 우리가 증거 속에서는 현실적 결과들을 과거의 원인으로 결론지우는 것은, 그리고 예견에서는 우리가 갖는 현실적 경험의 원인으로부터 [미래에] 생산될 결과로 결론지우는 것도, 이런 연결들 덕분이다. 따라서 우리의 확실성의 토대들을 사실 그대로(en matiere de fait)인식하기 위하여 깊이 탐구해야 하는 것은 이런 결합의 자연이다. (361)
사실상, 사람들은 이런 연결을, 수학적으로 확실성을 기초하고 있는 관념들의 관계들 중의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을 탐구했다. 선천적으로 두 관념들 속에서 이것들의 관계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이 두 관념들을 검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원인에서 결과로 가는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러한 원인을 검사하면서(예를 들어 물의 온도가 낮아짐), 원인 그런 결과를 낳는 원인이라는 것(얼음의 응결)을 발견할 것인가? 분명히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단지,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 뿐이다.흄은 이점에 관하여 로크의 반대자들이 “관념주의자들/이데아주의자들(l’idéiste)”라고 불렀던 자들의 학설을 참조한다. 원인이라 부르는 사물의 관념을 모든 의미에서 상의하고 되돌려 놓으면, 우리는 거기서 결과를 생산하기 위해 어떠한 효과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제기한 유일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만일 효과가 원이라 불린 현성 속에 있지 않다면, 그러면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말브랑쉬가 원인을 신속에 놓았는지, 버클리는 보다 일반적으로 원인을 정신 속에 놓았는지를 안다. 그럼에도 동일한 점에서 출발하는 흄은 완전히 구별되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만일 우리가 어떠한 힘에 대해서도, 사실의 어떠한 효과성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왜 그리고 어떻게 이 사실이, 우리가 매우 큰 신뢰를 가지고 기대하는, 다음 사실로 피할 수 없이 뒤따른다고 우리가 믿는가? 말브랑쉬와 버클리가 처음에 제기해야만 했던 초기 문제인데, 왜냐하면 사실들 사이에 연결이 있다는 것을 믿기 이전 효과가 어디에 있는 지를 사람들은 자문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효과성에 관한 탐구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이런 믿음의 원리에 관하여 탐구했다는 것이 흄의 중요한 장점이다. 감각적 사물들을 그 자체로 설명되기에 불충분함을 알기에 이런 우리를 정신적 실재성에 단번에 이르게 하려고 하는 변증법은 중요하지 않고,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음의 동기들을 찾는 내재하는 비판이 중요하다. (361)
일반적으로 믿음(croyence)란 무엇인가? “한 대상의 관념은 사람들이 관념에 일하한다고 믿는 믿음의 본질적인 부분이지, 전체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지 않는 많은 사물을 구상한다(concevoir). 믿음이 관념에 첨가될 때, 단지 관념은 실재적인 어떤 것의 인식이 되며, 허구(une fiction)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흄에 따르면 지금까지 어떠한 철학자도 이 믿음을 설명하지 않았다. (361)
또한 여기서, 흄은 상상적 연결들의 성질[고유성]들에 의존 한다. 믿음은 그 자체로서 파악되면, 단지 특별나게 고양된 생생함의 정도를 가진 관념일 뿐이다. 관념을 믿는다는 것은 관념의 내용에 아무 것도 보태지 않는 것이다. 믿을 수 없음(incrédule)과 믿음(croyant)은 정신 속에서 동일한 관념들이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서 관념들은 보다 힘있고, 생생하며, 견고하고, 확고하며, 안정성을 갖는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짧은 이야기(꽁트)처럼 취급하는 전승을 역사로서 취급하는 자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믿게하는 관념의 이런 특별한 뉘앙스는 현재의 인상들과 연합적 연결들로부터 유래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관념보다 더 생생한 인상은 그것의 생생함과 힘의 어떤 것을, 인상과 연결 속에 있는 관념들에게 전달하는 특이한 성질을 갖는다. 이는 마치 사유가 자신에 의해 생명성을 얻게 되어, 자신의 어떤 활력을 간직하는 것과 같은데, 이때는 인상이 그것에 인접해있는 사유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이다. 이리하여 종교들에서, 감각적 이미지들과 장엄한 예식들이 믿음을 강화한다. (362)
거기에서 이런 귀결이 나온다. 인상과 관념 사이에 연결을 강화하는 것이 동시에 관념을 믿는 것을 강화하고, 나아가 믿음을 의심으로부터 면제하게 한다. (362)
우리는 거기에서, 원인이 현재 있을 때 우리가 결과의 출현을 믿게 하는 이런 믿음의, 즉 원인과 결과의 연결이 필연적이라는 판단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모든 설명 요소들을 유지한다. 사람들은 계속하여 인접하는 사실들 사이에서만 우리가 어떠한 필연적 연결을 인정한다는 것을 처음에 관찰할 것이고, 그리고 그 연결의 계속이 여러 번 관찰되었다. 이런 반복이 사실들의 짝을 이루는 자체에 전혀 효과를 주지 않으나, 그것은 우리 정신 속에서 습관(une habitude, custom)을 생기게 한다. 습관은 정신을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이행하게 하는 상상적 연결을 강화한다. 연결을 강화하면서 습관은 저항할 수 없는 민음을 생산할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 연결은 한 관념의 점점 더 쉬운 이동일 뿐이며, 습관이 생성하는 [정신적] 경사[경도]이며, 한 대상으로부터 일상적으로 그 대상을 동반하는 관념으로 이행하게 하는 경사이다. 따라서 원인의 관념은 모든 다른 관념과 마찬가지로 인상의 복사물이지, 우리가 사물들 속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한 능력의 복사물이 아니고, 오히려 습관적 감정이라는 이런 내적 인상 또는 반성의 인상의 복사물이다. 그러나 외적 대상들로 펼쳐지는 이런 정신의 보편적 경사[경도]는, 이런 필연성이 - 우리가 고려하는 대상들 속에 그러나 대상들을 고려하는 정신 속에가 아니라 - 있다는 것을 가정하게 한다. (363)
이런 원인성의 “설명”은 오히려 그것의 파괴가 아닌가? 왜냐하면 이 설명이 우리가 그것의 희생물인 것으로 착각(l’illusion)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만일 인간 이법이 비판적 반성의 산물이었다면 그리고 논증에 의해서 확립될 수 있을 것이라면, 이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면 다른 논증들이 이 논증을 파괴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판단의 중지에 이르러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이 추론들 속에서 어떠한 오류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일상에서처럼 계속하여 실재성을 믿고 생각한다.” 원인성의 믿음이란 “사유하는 부분이라기보다 오히려 감각적 부분의 작동(l’acte)이며”, “감각작용 또는 파괴한다는 것이 관념들에게는 불가능한 개념작용의 특별한 한 양태이다.” 만일 믿음과 반성 사이에 반대성질이 있다하더라도, 이 반대성질이 믿음을 해칠 수 없다. “우리가 일련의 조용하고 깊은 반성을 형성하는 견해들과, 우리가 일종의 본능 또는 자연적 충동을 포함하는 견해들 사이에서, 정신과 함께하는 이것들의 일치와 이것들의 조화의 이유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만일 이 두 견해들이 반대가 된다면, 더 나을 것이라는 견해를 예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한 우리의 주의가 주제에 오래 적용되는 만큼, 철학적이고 인위적인 원리는 보다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유가 느슨해지려는 찰나에, 자연은 우리에게 첫째 견해에로 이끌어가도록 펼쳐질 것이다.” (363)
자발적 믿음은 상상작용의 자연에 기인하며, 따라서 최종적으로 판단자이다. 반성은 그것을 확정할 수도 없고, 그것에 도달할 수도 없으나, 게다가 보다 높이 침투할 수 없지만 단지 그것의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상상작용의 원리와 습관의 원리를 더욱더 추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363)
그럼에도, 만일 외적 현상들이 습관에게 역할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습관은 이런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동일한 또는 비슷한 현상의 반복을 경험 속에서 찾지 못했다면, 원인과 결과적인 연결에 대한 믿음은 스스로 생산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우주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우주에서는 동일한 조건들이 결코 생산되지 않아서 믿음이 스스로 형성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깊은 자연과 사물들의 깊은 자연 사이에 조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흄의 사유를 너무 압박하는 것이리라.흄은 감정 속에서 우리 믿음을 정당화하고자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믿음이 현존하고 성공한다는 것을 적어도 이의제기했다. 그 철학자의 정신이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강요된 태도는 보다 자연적인 개념작업에 대해 편안함과 용이함에 반대일 수가 전혀 없다. (364)
상상작용에 관하여, 흄은 원인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18세기 이래로 철학을 흔들었던 세 가지 중대한 문재들에 대한 회의적 해결책을 기초하였다: 세 가지란, 외적 세계의 현존, 영혼의 불멸성, 개인적 동일성이다. (364)
왜 우리가 우리로부터 구별되고 영속적인 물체들의 현존을 믿는가? 이 때에 감관들은 단지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라지는 대상들만을, 그리고 순수 인상들로 바뀌는 대상들만을 제공하는데, 이 경우에 순수 인상들은 무매개적으로 주어진대로 있으므로,쾌락 또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우리 바깥에 있지 않는데 말이다. 그것은 확실히 이유(la raison, 이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모든 추론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상상작용만이 놀이 속에 들어간다. 거기에서 또한 확실하게, 상상작용은 하나의 조건에서만 실행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집단이든 계열이든 간에 인상의 어떤 덩어리들이 간헐적인 찰나들에서 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작용의 고유성들만이, 어떻게 우리가 찰나들 각각에서덩어리들이 동일한 물체들이라고 – 이 물체들이 이것들의 출현의 간격들에서 연속적으로현존한다고- 믿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같은 물체(le même) 즉 동일한(identique) 물체는 한 찰나에서 다른 찰나로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물체이며, 여러 다양한 찰나들에서도 중단 없는 방식으로 지각된 물체이다. 이 경우에 한 찰나에서 다른 찰나로 이행은 매우 편안하여[익숙하여] 겨우 느껴질 정도이다. 이제 간헐적으로 생산되는 인상의 한 덩어리의 경우를 가정해보자.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이전도 또한 동일한 대상의 경우에서 만큼이나 거의 같은 편안함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사유의 편안한 미끄러져감은 우리에게 이런 대상들의 동일성을 믿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의 간격은 이런 믿음에 대립되기 때문에 우리는 연속적 현존의 허구(la fiction)을 창조한다.(364)
이러한 것 그 위에서 철학적 반성이, 즉 회의주의자들의 반성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우리로부터 독립적이게 하고자 원했던 이런 인상들은, 마치 모은 착각들이 그것을 제시하듯이, 감관들에 밀접하게 의존적이다. 이 때에 독단적 철학은 자발적 믿늠에 흥미들을 갖는다. 그리고 이 철학은 그 자체적으로 소멸할 수 있는 우리 지각작용들과 구별되고 영속하는 실재대상들의 세계를 발명한다. 이 철학은 간헐적인 지각작용들을 회의론의 이법에, 그리고 연속적인 현존을 상상작용에, 양보한다. 이런 “상반되는 두 원리로부터 나온 괴물 같은 열매”는, 흄이 말하기를, 철학적 믿음과 반성이 상반된 방향(sens, 의미)이라는 것을 명증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철학은 오로지 다음을 증거하다. “자연은 완고하다; 이법이 자연을 공격하는 것이 아무리 강할 지라도, 자연은 지평을 양보하지 않은 것이다.” 독단론자들에게서 외적 세계의 이론이 파악했던 다양한 형상들은 상상작용의 이런 필요로부터 유래한다. 변화들 속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 물질[휠레]은 하나의 허구(une fiction)인데, 우리가 동일한 물체에서 속한다고 선언하는 계속적인 국면들 사이에서 동일성을 재정립하여야만 하는 허구이다. 그것[휠레]의 실체적 형상은 편안한 이전을 표현[설명]하게 한다. 이런 이전으로 우리는 하나의 성질에서 다른 성질들로 이행한다. 이때 다른 성질들은 습관적으로 재통합하는 때이다. 이런 고려에서 보면, 로크에게 받아들여졌던 데카르트의 역학이론 또는 보일의 역학이론은 도형에, 운동에, 견고함에만 독립적인 현존을 승인한다. 반면에 “제2” 성질들, 소리들, 맛들 등등은 정신 속에 있는 인상들일 뿐이다. 이것[성질]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 동일한 자연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소리들 또는 냄새들의 역학적 원인들을 찾고자 할 때, 이것들에는 내밀한 모순들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상상작용의 경사[경향]가 우리로부터 구별된 물체들을 표상하기에 만족하기를 [성질들이] 원한다면, 이 성질들은 자발적 상상의 믿음에, 즉 외적 세계로부터 어떠한 감각적 성질도 배제하지 않는 믿음에 속하는 모든 가치를 부인한다. (365) (57NMJ)
3절 종교의 비판 – La critique de la religion
사람들은 이런 예를 통해서 흄이 독단적 철학을, 마치 자발적 믿음을 갖지만 완전히 무용한 일종의 고등구조처럼, 판단한다는 것을 본다. 그의 독단론의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 인데, 특히 영혼의 정신성의 독단과 인격적 동일성의 독단은 그의 시대에 마치 자연종교에 필수불가결한 서곡처럼 판단되었다. 클라크는 이런 자연 종교를 계시종교의 입문처럼 생각했다. 흄은 자신의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들(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1779)에서 이런 자연 종교의 자연을 훨씬 더 깊이 제시한다. 그가 말하기를 자연종교는 철학사에 속하기보다 훨씬 더 교회사에 속한다. 교회의 교부들 중에 많은 이들은, 교회의 권위를 더 잘 보증하기 위하여 인간적 이치에 상대적인 완전한 회의주의를 인정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하여, 모든 이단은 이법의 보편적 능력의 믿음에서 왔다. 그러나 많은 종교들이 알려진 시대에, 교회 당국들은 균형을 유지하였고, 목사들은 이법의 보편성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적어도 마치 입문처럼)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이 경우는 앞선 경우들에 완전히 유비적 이었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거기에서 철학적 반성 위에 자발적 믿음들을 근거하는 주장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에 비판으로, 흄은 인간 자연론의 긴 두 개의 색션을 (영혼의 비물질성과 인격적 동일성에 관하여), 도덕론과 정치학 시론(Essays Moral and Political, 1741)의 둘째 색션을 (기적에 관하여), 결국 주목할 만한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1779)를 다루었다. (366)
영혼의 비물질성에 대한 소위 말하는 철학적 증명들의 가치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인상들 또는 관념들이 그것들의 자연에 의거하여 정신적 실체에만 내속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속(inhésion)이 무엇인지도, 실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어떻게 사람들이 실체를 인식할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가 단지 인상들만 또는 인상들의 복사물인 관념들만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양태로서 인상은 실체를 표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유가 비물질적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사유가 분할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물론자들이 사유를 너비에 연결하는 것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면서, “신학자들”도, 분할불가능한 사유가 스스로 펼쳐져 스스로 분할됨이 없이, 너비를 지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동일한 잘못을 범했다. 더욱이 유심론이 진실로 유물론과 차이가 없듯이, 유심론은 스피노자주의로부터도 실재로 구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서는 현존하는 모든 것을 실체의 양태로 되게 하는 그 단순한 실체는, 그것에 대해 오해하여, “신학자들”의 단순한 실체에(여기서 아마도 읽은 것은 버클리이다) 닮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신학자들의 단순한 실체에게 지각작용들의 전 체계가 연결되어 있고, 사실이라면 정신이 아닌 모든 것은 지각작용이다. 이런 문제에 관하여, 상반된 독단주의들은 일치하고 있고, 그것들이 사유를 끝까지 따라갔더라면, 하나[유심론자]은 종교에 약간 쓸모 있듯이 다른 하나[유물론자]는 그 만큼 종교를 해칠 것이다. (366)
마치 영속적 실재성에 대한 믿음처럼, 인상들과 관념들을 변하게 하는 전개보다 상위인, 자아동일성의 믿음도 또한 마찬가지로 토대가 거의 없다. 정신 속에서는 서로 구별되는 인상들과 관념들만 있다. 그리고 이것들 사이에 깊이 지각될 수 있는 어떠한 실재적 연결도 없다. 우리 자아의 동일성이라는 용어는, 마치 외적 물체들의 동일성의 용어가 태어나는 것을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태어난다. 우리 자아의 계속적인 상태들은 기억 속에서 이것들의 닮음 덕분에 특히 이것들을 재통합하는 원인적 연결 덕분에 연상된다. 그리고 상상작용은 이렇게 우리의 영속성의 허구를 창조한다. 이것은 게다가 흄이 인간 자연론/본성론의 부록에서 잘 만족하지 못하게 제시했던 설명이다. 그 부록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사유 속에 또는 우리의 의식 속에 계속적인 우리 지각작용들이 통합되는지를” 그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가 철학자들이 말해온 소위 말하는 자아의 내밀한 의식을 전혀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어째거나 확실하다. (367)
신의 현존의 합리적 증거들에 관하여, 흄은 이 증거들이 추론 양태들의 – 이 양태들이 우리를 일상적으로 재통합하는데 – 부정확한 적용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이 증거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증거는 이 시대에 목적인들에 의한 증거이며, 볼테르는 싫증나도록[실컷] 반복했다. 증거는 인위적 기계주의와 우주 사이에 유비(l’analogie)에 근거한다. 세부 사항에서 우주는, 우주 또한 지적 저작자를 요청할 수 있을 정도로, 이런 기계주의들의 하나와 충분하게 비슷하다. 따라서 거기에 경험과학 속에 가장 습관적인 추론들 중의 하나가 있으며, 즉 클라크의 선천적(a priori) 증거들과는 아주 다른 개연성의 논증이 있다. 합리주의자 클레안테스(Cleanthes)는 회의주의자 필론필로(Philon) 만큼이나 신비가인 데메아(Demea)에 충격을 준다. 데메아는 자기 결론 때문에 충격을 입는데, 왜냐하면 이 증거가 신과 인간적 조작자와 동화되기 때문이다. 필론은 자기 원리 때문에 충격을 입는데, 증거가 인간적 제작의 기계주의 와 우주 사이에 확립한 유비 때문이다. 사람들은 경계지워진[한정된] 원인에 맞는 매우 잘 경계지워진[한정된] 부분 과 자연이 도처에서 동일하게 있는지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거대한 전체 사이에 어떤 유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이의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토대 지워진 유비를 가정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으로 가장 환타지한 방식으로 [유비의] 역할을 하게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필론은 즐거운 뛰어난 솜씨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마치 인간적 예술가처럼, 어떤 유한한 신을, 즉 사람들이 그로부터 원인을 물을 수 있는 어떤 신을, 그리고 세계의 작품은 협력작업에 기인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치 저항들을 만난 예술가처럼 불완전한 신을 또는 아마도 다수의 신들을, 가정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경우에 그의 손으로 작업할 수 있는 신체적 신을 가정해야만 한다. 또한 사람들은 클레안테스의 유비적 방법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훨씬 그럴듯하게 우주를 하나의 유기체에 동화시킨다. 그리고 사람들은 신 속에서 세계의 영혼을 보며, 더하여 의식도 구상도 없이 식물들 속에 질서를 생산하는 힘들과 같은 식물적 힘을 본다. 그리고 에피쿠로스의 우주발생론을 거부할 어떠한 이유도 없는데, 왜냐하면 신학자들이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일지라도 하나의 운동은 의지적 대행자 없이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무게 또는 전기성). (368)
게다가 클라크의 증거도 또한 비판할 수 있다. 처음에 불가능하다. 존재(un être)를 마치 필연적으로 현존자(existant)처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상상작용은 존재가 어떤 것이든 간에 존재의 현존을 부정하는데 자유롭다. 더욱이 이런 존재를 가정하면서, 왜 존재가 신이라기보다 오히려 물질 일 수 없는 것일까? 잘 알려진 물질의 성질들이 우주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결국 왜 존재 밖에서 우주의 충분 이유를 찾는가? 사람들이 임의적으로 존재가 한정된 전체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말이다. (368)
자연종교는 신의 현존뿐만 아니라 신의 섭리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 현존은 신의 섭리에 대해 반대하여 말한다. 사람들은 이런 난점을 해소하려고 애쓰는 변신론의 논증들을 안다. 인식한다. 지겹게 되풀이 되는 이 주제에 관하여, 흄은 완전히 새로운 두 가지 논평을 한다. 우선 온섭리에 반대하는 무서운 논증, 즉 인간적 고통[고민]이 많은 인간들을 종교로, 즉 그들이 위안을 찾는 종교로, 이끄는 이유가 동시적이라는 것을 역설로 인정해야만 한다. 더욱이 모든 신학자들이 그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우주를 상상한 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 그 우주에서 악의 근원들은, 우리가 이것들을 알고 있는 대로, 사라졌을 것이고, 또 그 우주에서 활동성의 동기는 고통인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즐거움일 것이고, 또한 그 우주에서 신의 특별한 의지들은 매 순간에 일반 법칙들에 연결된, 신학자들이 말하는, 나쁜 효과들을 무화시킬 것이고, 또 거기에서 인간에게서 노동의 역량은 더울 발전될 것이고, 또 거기에서 목적성은 보다 완전할 것이다. 한마디로 어떠한 논증도, 사물들의 마지막 근원이 인간과 무차별적이지 않아는 것을, 증거하지 못한다. (368)
사람들은 원인성 원리의 기원에 관한 비판적 반성이 파괴하는데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필연적 연결을 믿는 정상적 인간의 자발적 태도를 정당화하는데 있다. 회의주의는 반성의 매우 드문 찰나들에서, 전 생애를 위한 믿음이 있다. 회의주의는 종교의 소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인가? 회의주의는 이런 소재들에서 신앙의 서곡일 것인가? 이것은 대화들(1779)의 마지막 대담이 믿게 할 수 있는 것인데, 대담에서 필론은 어떻게 자기의 자연종교에 대한 비판이 계시[종교]에 자유로운 영역으로 남는지를 진술한다. 그가 교회의 교부들에게 부여했던 관념들과 닮은 관념들을 자신이 진술하는 이 원문들은, 우리가 원인적 연결에 속하는 자연적 믿음에 관하여 인용했던 원문과 나란히 간다. 이 자연적 믿음은 이런 용어의 비판에서 불구하고 존속한다. 이런 선언은 18세기에 매우 습관적인 신중함의 척도들 중의 하나인가? 이 선언은 신중한가? (369)
여기서 한 가지 구별을 해야만 한다. 흄에게서 상상작용은 우리 믿음들의 자연적 근원이다. 그렇다고 상상작용의 모든 작업은 정당화된다는 귀결이 나오지 않는다. “상상작용 속에서 영속적이고 저항할 수 없으며 보편적인(마치 원인성처럼) 원리들과 변할 수 있고 연약하며 비규칙적인 원리들 사이에 구별해야만 한다‥… 전자들의 원리들은 우리의 모든 사유들과 우리의 모든 행동들의 토대이다. 후자들의 원리들은 진실하지도 필연적이지도, 심지어는 삶의 품행 속에서 유용하지도 않다.” 물체들의 현존에 이르는 추론과 유령들을 믿는 자들의 추론은 둘 다 자연적이다. 그러나 후자의 추론은 이런 의미에서 자연적이다. “사람들은 질병이 마치 자연적 원인들로부터 오는 것처럼, 자연적이라고 한다. 그 원인들이 건강에 반대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흄에 따르면 분명하게 실증적 종교들에서, 믿음들의 많은 부분이 규칙없고 부조리한 환타지에 의존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 분명하게도 12번째 대담에서 사람들이, 그가 수많은 종교들 중에서 이런 종교가 사회적 연관이 있기는커녕 불협화의 원인이라고 말했던 것도 읽는다. 그 종교는 하찮은 계율에, 황홀경에, 맹신에 이끌려져, 결국에는 영원한 구원에 대한 고민으로 속좁은 이기주의를 생성한다. 또한 사람들은 시론 속에서 “기적에 관하여” 장을 읽을 수 있는데, 그 장에서 그는 기적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근거하는 추론의 실증적 잘못을 분간하려 애쓴다. 그 믿음이 기대를 거는 인간적 증언은,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매우 높은 개연성에서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모든 사건들이 자연적 법칙들에 따라 생산된다는 확실성의 균형을 이루게 허용할 수 없다. 성 메다르(Saint-Médard)의 광신자들의 유명한 소란들(incidents)은, 이것은 흄이 파리에 체류 동안에 일어난 사건인데, 그가 보기에, 어떻게 동일한 사실에 관하여 모든 증인들의 완전한 일치가 그 사건의 현존을 얼마나 잘 증거 해주지 못할 수 있는가를 제시하리라는 것이다. (370)
이런 조건들에서 회의주의자 필론의 선언문들의 범위를 파악하기 위하여, 흄은 종교에 관하여 원인성에 관해서 행했던 작업과 비슷한 작업을 해야만 했고, 그는 토지(foncier, 태생)와 자연이 갖고 있는 것을 단어의 충만한 의미에서, 또 종교적 믿음에서 분간해야만 했다. 이것이 흄이 「종교의 자연사(The Natural History of Religion)」에 관한 주목할만한 소품에서 처음에 윤곽들을 부여한 작업이다. 이 소품은 특히 다신교에 근거하고 있다. 흄은 거기에서 그 당시에 유행하는 두 해석들과 싸웠다. 첫째는, 매우 오랜 것인데, 인류가 신으로부터 계시된 유일신앙으로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신론은 그 신앙의 타락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는, 퐁뜨넬에서 발견되는데, 그는 다신론이 과학들[학문들] 중의 첫째 학문이었다고, 그리고 인간에 자연의 관조에 의해서 또 원인들의 탐구에 의해서 거기에 도달한다고 말했다. 여기도 그리고 작품의 도처에서, 흄은 단순한 이론적 사색이 깊은 믿음의 뿌리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어떻게 원시인이 자연의 규칙적 질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가? 그것은 감정이고, 희망이며, 자가 숙명에 관한 걱정이다. 이런 것들은 다신론에서 태어난다. 신들은 사물들의 질서의 원인들이기에 앞서서, 선행을 끌어들이기를 배워야 하는 인간을 또는 존재들을 위하여 선행하는 존재들이거 또는 나쁜 행실의 존재들이다. (370)
여기서 사람들은 흄이 종교의 실증적 이론을 전개할 수 있었을 방향을 안다. 그는 종교에서 인식의 확장을 보기보다, 가장 깊은 인간적 필요들의 만족을 보았을 것이다. (370)
4절 도덕론과 정치학 – La morale et la politique
도덕론에 관한 흄의 사변들은 그의 인식의 학설과 종교의 학설과 동일한 구상을 하고 있다. 이런 학설들에게 사변들이 아마도 앞서 앞설 것이다. 가지고 있다. 사변들이란, 도덕적 합리론 비판, 믿음(la croyance)에 호소, 감정에 호소이다. 그가 목표로 삼는 합리주의는, 당시 영국에 매우 널리 퍼져있는 클라크의 합리주의이다. 수학적 연관들만큼이나 객관적으로 정의된 것으로 도덕적 연관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강요된 선행자의 연관, 동포애의 연관, 우정의 연관 등이 있다. 이 덕목은, 이법(la raison, 자연의 이법)에 의해 인식된 이 연관들에 부합하여 행위하는 데 있다. 배은망덕한 이는, 또는 자기 친구보다 형제를 선호하는 이는 이 연관들의 자연에 관하여 스스로 속고 있다. 흄은 주목하기를, 이법은, 한 작동이 목적에 맞는지 안 맞는지, 그리고 규칙에 부합하는지 않는지를 우리에게 잘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하거나 비난하는 심정(심장)이 없다면, 그 작동이 그[이법]로부터 이 목적에 맞는 어떠한 집착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에게 잘 말할 수 있다. 오성으로서는 외디프스에 의한 [친부] 라이오스의 살해와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살해는 둘 다 부모살해(deux pafficides)의 경우이다. 그러나 둘째에 의해 범죄이며, 그리고 그 감정은 객관적인 연관들에 의해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자연의 내적 구성에 의존한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지성에 의해 지각된 대칭이 아니라 오히려 지성을 동반하는 즐거움이다. (371)
그럼에도 흄은 허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처럼 결심을 도덕적 감관 또는 도덕적 접촉에 맡기는 사람들과 다르다. 도덕적 판단들(인과성의 판단에서처럼) 속에는 설명되어야만 하는 보편성이 있다. 그에 따르면, 보편성은, 우리의 작동들이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에게서 만나는, 시인[긍정] 또는 부인[부정]으로부터 온다. “덕목은 영혼의 행동전체 또는 성질전체이며, 이 영혼은 감정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에게서 즐거운 감정과 시인하는 감정을 자극한다.” 도덕 감정은, 만일 그 감정이 그것의 척도에 따라 판단하는 사회에 관련이 있을 경우에만, 감관으[의미]로부터 온다. 사람들은 이 주제에 사회[교제]들에 따라 판단들의 변이들과 불일치들을 대립시킬 것이다. 사람들은 자살 또는 어린이들의 판매전시를 인정하는 고대 사회들을 보지 못했는가? 흄이 주장하기를, 합의란 중요점들에서 있는데, 예를 들어 솔직함과 용기에서 있다는 것이고, 풍습들의 차이는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일탈[편향]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판매 전시는 매우 가난한 지방에서 부친 사랑의 형식들 중의 하나이다. 애국주의는 영국과 프랑스에서처럼 자유로운 나라에서 동일할 수 없다. 그 나라(프랑스)에서 애국주의는 전제 군주(le despote)의 사랑으로 환원된다. 용기(la bravoure)는 전쟁하는 인민들에게서와 평화로운 인민들에게서 동일한 뉘앙스를 가질 수 없고, 어떤 감정들은 다른 감정들을 희생시켜서만 발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족 감정들을 질식시키는 프랑스의 사회성이 그렇다. 흄은 “인위적 생애들[삶들]”에서만 예외를 보았는데, 이 인위적 생애[삶]들은, 사회의 남는 여백에서, 이것[삶]들의 법칙들을 그 이것[법칙]들 자체로 주어지기를 바란다. 마치 철학 속에서 자기의 규칙을 찾으려 한 어느 디오게네스의 삶처럼, 또는 어느 파스칼의 삶처럼 말이다. 즉 그가 판단하기를 “종교적 미신 또는 철학적 망상”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얼마나 이런 “감정주의”가 곧 다가올 낭만주의와 거리가 멀고, 그려져 있는 여정들 바깥에 자신의 길을 찾는 영웅주의와도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본다. (372)
상상작용과 감정은, 이것들의 깊이와 이것들의 본질에서 파악되면서, 학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반성의, 통합성의, 진리의 요소들로 남아있다. 그런데 합리주의가 두려워하고 낭만주의가 승리하게 되는 혼란한 권능들로 남지 않는다. (372)
정치적 관점에서 흄은 휘그당에도 로크의 자유주의에도 반대이다. 그는 정부의 합법성이 항상 취소할 수 있는 원초적 계약에, 즉 봉기할 권리를 허용하는 계약에 근거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리당과 더불어 신적 권리와 절대주의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문제의 항목들을 뒤집어버리는데, 정부의 기원에서 정부의 합법성을 찾지 않는다는 의미에서(기원이란 대부분 알려지지 않은 시기이며 일반적으로 그것은 폭력이며, 계약이란 거기서 낯선 것이며 단지 허약한 기반일 뿐이다)이다. 그러나 현실의 사회적 유용성에서는 허용하는 원리(principe)를 찾는다. 그러나 허약한 [정치적] 조치에서는(정부들에 따라 다르지만, 다른 곳에서보다 영국에서는 더욱 강했지만), 사회를 나쁘게 하는 정부에 반대하는 저항(une résistence)을 인정하였다. (372) (57OKA)
5절 아담 스미트, 도덕론자. - Adam Smith Moraliste 372.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도덕적 품행들의 몇 규칙들을 또한 감정 속에서 찾는다고 생각했다. 1723년에 태어나서, 글라스고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거기서 그는 허치슨(Hutcheson, 1694–1746)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1751년에 글라스고(Glasgow University)대학에서 논리학의 교수, 그리고 도덕학 교수가 되었다. 1759년에 도덕 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이 나왔다. 1765년에 그는 버클루 공작(duc de Buccleuch, s.d.) 아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이 아들과 더불어 그는 여행하여 프랑스에서 뚤루즈에 그리고 파리에 체류했다. 파리에서 그는 경제학자들의 모임에 자주 드나들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1775)의 준비에 전적으로 전념하였고, 그는 이 책을 1776년에 출판했다. (373)
도덕감정의 이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은, 그가 지성주의자의 도덕의 전형으로 여기는 양심론(la casuistique, 결의론)에 반대하여 호기심 자극하는 쪽수들로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양심론자들의 모든 저작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양심론자들은 감정에 의해서만 정확한 방식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을 헛되이 그 방식으로 규정하려고 애쓴다. 이런 이유에서 보면, 어떻게 [도덕적인 현실적] 지점을 고정시키는 불변하는 규칙들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 지점에서 특별한 각 경우마다, 정의 미묘한 감정은 하찮은 소심함일 뿐인데 말이다.” 그러한 뉘앙스들은 (그리고 도덕적 삶은 그런 뉘앙스들로 이루어져있다) 우리들이 느끼며 겪는 무매개적인 공감 또는 반발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공감과 반박은 시인[인정]과 부인[부정]의 판단에 의해서 번역될 수 있다. 이 판단은 흥미[관심]에 의해 암시되지(dicté 규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가치] 평가는 우리에게 유용한 것인지 또는 가끔은 손해인지의 행동들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 평가는 이법으로부터 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마치 쿠드워쓰(Cudworth, 1617–1688)와 캠브리지의 도덕론자들이 평가를 도덕적 판단들의 일반성으로 규정하듯이 말이다. 이런 일반성은, 아담 스미스가 이것을 인정하는데, 마치 경험적 법칙의 일반성처럼 귀납법에 의해 얻어진다. 우리는 어떠한 행위를 기원적으로 시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 행위를 검토하면서 그 행위가 몇몇 일반적 규칙들에 부합하는 것으로 또는 반대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일반적 규칙들은 경험에 의해서, 몇몇 상황들로 복합된 행위들이 일반적으로 시인되거나 또는 부인된다는 것을 재인하면서 확립된다. 게다가 아담 스미스는, 허치슨처럼 사람들이 도덕적 감관[의미]에 호소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감관, 예를 들어 감관이 지각하는 색깔이 어떤 색깔이라 할지라도, 시각의 감관은 동일하게 남아있어야 하는 반면에, 우리의 시인들은 우리가 시인한 감정들 자체처럼, 여러 뉘앙스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부드러운 감정에게 부여하는 시인[인정]은 우리가 고양된 감정에게 부여하는 시인과는 전혀 닮아 있지 않다. 하나는 우리를 부드럽게하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고양시킨다. 이 둘이 자극하는 감동들(les émotions, 감명들) 사이에 전혀 닮음이 없다. 따라서 시인은, 그 깊이에서 감정의 소통, 즉 공감(une sympathie)일 뿐이다. 이런 공감은 만일 공감이 완전히 무관심하였을(désintéeressée) 때만 도덕적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자신 스스로를 판단하기 앞서서 먼저 판단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불편부당한 구경꾼의 관점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정확하게 판단 한다. (37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 스미스는 판단하는 우리들의 방식에서, 일종의 일관성 없음(l’inconséquence)을 주목한다. 만일 공감이 감정에 집착일 뿐이라면, 우리는 단지 인간의 품행을 부추기는 의도들에 따라서만 인간의 장점과 단점을 판단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일련의 행운 또는 불운, 성공과 좌절이 판단의 의도들의 장점과 단점에 근거하는 판단을 거의 전적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우리의 공감은, 인간이 그 자체 속에서 실재적으로 겪는 감정과 일치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들이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감정과 일치한다. 아담 스미스는 일종의 일관성 없음과 판단하는 피상적 방법이 그가 이해하는 한에서 도덕적 삶의 조건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도덕론자인 라로슈푸코(La Rochefoucauld, 1613-1680)의 예에 의해서, 얼마나 감정의 깊은 분석이 “가장 순진한 품행도 의심을 품게 하는지를” 안다. 스미스의 “공감”은 타자의 의식 속에 우리를 깊이 들어가게 하는 일종의 직관이 아니다. 감정의 이런 도덕은 마치 루소의 감정 도덕이 그러한 것이 될 것처럼, 강한 내부의 도덕이 아니다. 흄에게 있어서처럼, 감정은 실천적 역할 하며, 그 감정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다. 그러나 목적론은 흄에게서처럼 잠재적(latent)으로 남아있으면서, 여기서 모든 쪽수들에 터져 나온다. 도덕적 삶을 인도하는 공감은 신적인 섭리를 증거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정치 경제학에서, 아담 스미스는 어떻게, 정부들의 반성적 조치들이 국가들의 부들을 증가하기에 충분하다는 조건에서, 전적으로 자발적인 이기주의의 놀이가 충분한지를 제시할 것이다(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1775), 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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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 챨스 본(Charles Edwyn Vaughan, 1854-1922) 영국학자, 루소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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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 카릴(William Walter Carlile, 1862–1950) 영국 보수당 정치인. 캠브리지 대학에서 교육 받고 군인이 되었던 이 정치인이 흄에 대한 또는 철학책을 썼다는 이야기는 없는데...
1864 마이나르두스(Hermann Meinardus, 1864-?) 바렐 출생, 독일 신학자, 철학자.
1866 샤프(Frank Chapman Sharp, 1866–1943), 미국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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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 테일러(Alfred Edward Taylor, 1869–1945), 영국 관념론 철학자. 형이상학, 종교철학, 도덕철학에 관심.
1872 켐프 스미스(Norman Duncan Kemp Smith, 1872–1958), 영국 철학자, 심리학과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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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 라뽀르뜨(Jean Laporte, 1886-1948),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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