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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SGI의 날’ 기념제언
“내적인 정신혁명의 만파(万波)를”
‘타자(他者)를 향한 시선’에 입각한 자기규율
제29회 ‘SGI의 날’을 기념해 나의 소감을 말하면서 세계평화를 위한 모색의 일단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21세기에 들어와 국제사회는 새로운 위협의 대두와 그 대응을 놓고 격진(激震)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3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동시다발테러 사건’ 이래 많은 일반시민을 희생시킨 무차별테러가 각지에서 잇따라 발생하는 한편, 핵무기와 화학무기 등의 대량파괴무기 확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특히 작년에는 이라크의 대량파괴무기 사찰문제가 큰 초점이 되었습니다.
이라크문제가 제기한 난제
12년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수많은 결의를 성실히 준수하지 않은 이라크에 대해 군사력을 행사한 것의 시비(是非)에 대해 국제사회의 의견이 나뉘는 가운데 3월, 미·영 양국이 최종적으로 공격을 단행했습니다.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21일간의 전투로 후세인 정권의 붕괴를 보았지만, 그후 이라크를 점령통치할 미국과 관계국, 나아가 유엔을 표적으로 한 테러와 습격사건이 계속 일어나면서 이라크 부흥과 중동지역 안정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미는 3년 전, 테러조직 ‘알 카에다’ 소탕을 위해 군사력이 행사된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달에 간신히 헌법이 채택되긴 했지만 여전히 구 탈레반 세력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테러가 계속되는 등 치안의 악화가 우려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새로운 위협을 간과하거나 방치하지 않기 위해서 국제사회의 강한 의지와 행동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군사력에 중점을 둔 어프로치(접근)만으로는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꾀하기란 용이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부흥문제에 더하여 세계에서 지금 큰 초점이 되는 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화평(和平) 문제이며 북한의 핵개발 문제입니다.
모두 앞이 불투명한 상황에 있습니다만 이런 전란과 대립이 계속되는 시대의 두터운 암운과 함께, 심각함을 띠고 있는 것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품기 시작한 생각, 즉 잇따라 문제가 일어나 군사력 등 강제적인 힘으로 사태의 타개를 시도하고는 있지만, 평화를 향한 확실한 광명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며 초조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폐색감(閉塞感)이 아닐까요.
대증(對症)요법이 아니라 발본(拔本)요법의 길을
확실히 군사력으로 상징되는 하드파워를 행사해 일시적으로 사태를 타개하려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증요법적인 성격이 강해 도리어 ‘증오의 씨앗’을 분쟁지역에 남겨 사태를 고착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많은 식자가 우려하는 바이며 사실 그런 상황은 도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과거 두 번의 제언에서 거듭 군사력 등의 하드파워가 ‘증오와 복수의 연쇄’에 빠지지 않고 무엇인가 효과를 낳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지(保持)하고 행사하는 측에 철저한 자기규율, 자제심의 작용이 있어야만 한다고 호소하고, 소프트파워를 포함한 형태로 국제사회가 보조를 맞추어 대처해가는 것의 중요성을 호소한 것도 그런 강한 우려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런 행위의 뒷받침으로써 문명을 문명답게 하는 증거인 ‘타자(他者)를 향한 시선’에 입각한 자기규율의 정신이 없으면 거기에 설득력은 생기지 않고 평화와 안정으로 결부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라크에 대한 군사력 행사의 시비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균열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거기에서 얻은 교훈을 각국이 진지하게 고려하면서 대증요법의 틀을 초월하여 발본요법을 위해 무엇이 요청되는지를 함께 모색하여 건설적인 대화를 거듭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요구되고 있지 않을까요.
즉 테러와의 투쟁이라는 극히 현대적인 ‘비대칭전’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막고 얼마간의 실효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테러리스트 쪽의 자제를 바랄 수 없는 이상 그것과 대치하는 쪽이, 하드파워의 행사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는 자제심을 견지하면서 빈곤과 차별 등 테러리즘의 온상에 과감히 메스를 가하는 용기있는 도량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문명의 증거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자유와 민주주의를 문명의 과실(果實)인 보편적 이념으로 내세워 말해도 ‘타인의 행동을 보고 내 행동을 고치는’ 자제심에서 나오는 호소, 메시지로 뒷받침되어 있지 않으면, 그리고 ‘무리하게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편으로 하는 힘’(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의 조지프 나이 원장)인 소프트파워의 ‘형태’로서 민중의 마음에 닿지 않으면 내실이 따르지 않는 헛된 슬로건으로 끝나버리고 만다―그런 우려를 도저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나는 그런 사태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대응(그 기본적 자세에 대해서는 작년, 재작년의 제언에서 말했습니다)과는 차원을 달리 하여, 돌아가는 것 같아도 테러와 무력보복의 끝없는 응수로 상징되는 황량한 시대의 폐색상황, 시대정신을 썩게 하는 뿌리 부분에 나 나름대로 메스를 가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도 약간 언급하기는 했지만 자칫하면, 인간이 인간인 것의 심부(深部)에, 표층부분이 아니라 심층부분에, 어떤 종류의 뿌리가 썩는 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부분을 절개하지 않는 한 폐색상황에 진정한 숨통을 틔울 수 없는 용이하지 않은 사태에 직면해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것은 만년의 석존이 ‘자귀의’(自歸依=스스로를 의지처로 하는 것)라고 강조하고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남겼듯 인류가 ‘타자’의 거울에 비추어 ‘자기’를 의식하고 자각하기 시작한 이래, 말하자면 인류의 정신사적 과제이지만, 본고는 그런 과장된 테마를 논급하는 장(場)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선을 글로벌한 지평에서 발밑으로 옮겨 현대일본에 닥친 과제인 교육문제에 접근해 논해보고자 합니다.
‘자유와 규율’이 호소한 것
교육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청춘시절 독서의 추억을 하나 회고하며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나의 청춘이라고 하면 말할 나위도 없이 종전을 사이에 두고 시대가 급격히 변화하고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180도 전환한 혼란기였습니다. 전시 중의 어두운 시대, 가혹한 압정, 전쟁에서의 해방감도 있어서 점령군에 의해 초래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말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신선하고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손에 든 한 권에 당시 게이오대학 교수를 하셨던 이케다 기요시씨가 쓴 이와나미신서의 ‘자유와 규율’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 이케다씨가 영국의 퍼블릭스쿨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8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3년간 공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지지할 수 있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청년기 특히 퍼블릭스쿨 연대(12, 3세∼18, 9세)의 준엄한 인격의 도야, 단련 없이는 있을 수 없으며, 만약 그것이 없다면 자유는 멋대로 하는 방종과 다름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생생하게 그려낸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이 민주주의 모국의 정체(政體)를 지탱했던 암부(暗部) 즉 민족적, 계급적 차별 또는 식민지 수탈이라는 ‘부(負)’의 측면은 말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반군국주의, 반파시즘의 압도적인 조류에 있어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말은 나날의 식량조차 부족한 가운데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의 별 같은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자유와 규율’에는 앵글로 색슨류(流) 민주주의의 정수가 응축되어 있는 듯한 신선함을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책 속에 이런 인상 깊은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시의 경찰견을 훈련하는 전문기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날에 난 훈련을 쉬기로 하고 있다. 그런 때는 자칫하면 훈련 중 내가 정말로 화를 내는 일이 있다. 훈련과정에서 개를 꾸짖는 것은 필요하고 채찍을 쓰거나 때에 따라서는 발로 차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진짜로 화를 내게 되면 그 개는 더 이상 훈련시킬 수 없다. 개가 나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경멸하는 인간의 훈련 같은 것은 개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전문기사에게 있어 훈련하는 상대는 어느 의미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며 더없이 소중한 파트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인격의 상호 도야, 훈육의 장인 교육에 빗대어 “3년 가까운 독일 유학에서 둔재가 배운 것이라 하면 이것 하나밖에 없다”고까지 단언하고 있습니다.
의미 깊은 말입니다. 왜 이 에피소드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가 하면 이 전문기사에게 경찰견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자유롭게(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세찬 저항감을 보이는 ‘타자’로서 확실한 실재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자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있고 타자나 외부의 저항, 벽을 의식하기 때문에 자제심이 작용한다. 따라서 자기 제어가 잘 안 될 때는 훈련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
주위를 둘러보면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스스로 정신의 의욕, 긴장감, 자신을 다스리는 마음없이는 타자와 어울릴 수 없다. 그 긴장감이 없다면 순식간에 경멸을 사고 경찰견은 전문기사에게 있어 타자이기를 그만둔다. 타자가 시계에서 사라지고 그에 따라 자기의 존립조차 위태로워지고 말아 당연한 귀결로서 훈련의 성과는 오를 리가 없다.
이런 사정은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경우 몇 배수나 미묘한 문제로 나타날 것입니다. 저자는 “20년 가까이 교단에 서 있어도 아직 이런 당연한 도리가 몸에 배지 않는다”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만, 훌륭한 교육자다운 정직하고도 솔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력 저하와 ‘집안 주의’
이 책이 출판된 후 반세기 남짓 지났지만 돌이켜보면 오늘날 청소년을 둘러싼 상황―학교교육에 한하지 않고 가정교육, 사회교육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교육의 세계에 과연 명교수 이케다 기요시씨가 제시한 것 같은 건전하고도 건강한 긴장감, 의욕이 유지되고 있을까요.
종래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부 젊은이들의 행동이 세상의 빈축을 사기 시작한 지 오래지만, 그런 현상은 사회 전반의 교육력이 쇠약해져 자기와 타자의 대치가 낳는 정신의 긴장과는 전연 관계없는, ‘이완된 것’이 터질 듯하다는 것을 알리는 (위험성을 예지, 경고하는) ‘갱도의 카나리아’가 아니겠습니까.
한때 ‘전후 일본의 2대 명물은 어린이를 무턱대고 귀여워하는 것과 관광지의 쓰레기’라는 야유를 받았습니다. 인간이나 자연과 준엄하게 마주 대하는 것을 간과해온 전후 민주주의하에서의 이완상황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격이라는 것은 ‘자유와 규율’이 말하고 있듯 ‘자기와 (자연환경을 포함한) 타자’의 교류, 반격이 낳는 긴장감 속에서만 단련된다고 하는 자명한 이치는 시간이 흐르고 풍요로움이 늘수록 소홀히 여겨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와 타자,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별이 안 되고 사적 공간에 틀어박히거나 본래 공적 공간이어야 할 자리에서도 태연히 사적인 행동으로 밀고 나가는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을 마사타카 노부오씨(교토대학 교수)는 ‘집안주의’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어디에 있어도 ‘집안’에 있는 것과 아무 다를 바 없이 응석만 부리고 있다면 타자를 의식함으로써만 형성되는 자기규율의 형식인 공덕심(公德心=공중도덕을 존중하고 지키려는 마음)이나 최저한의 매너, 긴장감 같은 것을 익힐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노력해서 그렇게 하려는 의지를 계속 가져야만 획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항감없는, 진정한 타자의 반응이 없는 밋밋하고 평탄한 사회는 자유로운 듯해도 그렇지 않고 어딘지 숨막힐 듯한 살기 힘든 사회라는 것, ―작사가인 아쿠 유씨가 적절히 ‘뭐든 있지만 아무것도 없다’고 평한 것처럼―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듯하지만 항상 뭔가 욕구불만에 사로잡힌 듯한 폐색상황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어렴풋이 알아차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계승되지 않는 사회습관
지인인 어느 저널리스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올해의 ‘이미다스’(=최신정보지식사전) 별책부록 중 하나가 ‘이럴 때 어떻게 할까? 최신 매너 55’라는 소책자로, 문자 그대로 젓가락질부터 시작해 관혼상제의 에티켓까지 여러 예의범절의 노하우를 간추려 수록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연감’ 부록은 대부분 본체의 내용을 보완하는 듯한 성격의 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이례적이며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아닐까”라고.
확실히 그런 노하우의 대부분은 옛날엔 가정이나 지역사회 속에서 자연히 익힌 것인데 그것이 새삼스럽게 문제된다는 것도 하나의 사회현상이겠지요.
그런데 내가 왜 교육황폐 같은 밀접한 문제를 논급해 왔는가 하면, 그런 상황이 드러내는 모순, 병리는 폭력의 연쇄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현대문명이라는 대상황의 병근(病根)과 깊은 곳에서 공통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소상황이든 대상황이든 관계없이 타자를 보지 못하게 되면 인정불감증이라고 할까, 주위 사람들, 사물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시니시즘(냉소주의)으로 상징되는 생명감각의 둔화, 마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런 병리는 청소년의 마음의 어둠에서, 내가 재작년 제언에서 “자기편의 인적손실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 상대방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주고 게다가 그 규모조차 확실치 않다는 상황이 인간의 생사라는 근본적인 일에 대한 불감증을 항진시킨다”라고 경고한, 현대 하이테크전쟁의 병리로 확실히 이어지고 있을 터입니다.
이라크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시행착오라기보다는 고전을 계속할 것을 강요받고 있는 듯합니다. 과연 서구사회와는 다른 종교적 이념에 근거한 윤리관, 가치관을 갖는 이슬람 사회의 사람들에게 그런 보편적 이념이 어떠한 의미, 매력을 가질까라는 종류의 반문은 신중하게 이루어졌을까요. 타자 감각은 충분히 발휘되었을까요. 모두 소상황에서 그 기저부가 공통된 큰 테마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친근하고 가능한 것에서부터 ‘일보’를 내딛고자 합니다. 앞에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만 그것이 문명의 궤도수정이라는 대사업을 향한 실천적 직도(直道)일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시작되는 ‘평화의 문화’
우리들은 작년 3월 유엔의 초두리 사무차장을 창가대학과 창가여자단대 졸업식에 맞이하여 학창(學窓)에서 여행을 떠나는 것을 세계평화로의 여행에 비유한 진심어린 축사를 받았습니다.
이 사무차장이 올해 초 내게 신년 메시지를 보내주셨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속에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데 있어 가정과 가족의 역할이 대단히 강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사회와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가정에서는 자립적이고 창조력있는, 곤란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이 성장합니다. ‘평화의 문화’의 메시지와 관용, 상호이해, 다양성 존중의 가치를 가정에서 유소년기부터 배울 수 있다면 수십 년 후의 세계는 대립과 폭력이 만연하는 오늘날의 사회와는 크게 다를 것입니다”라고.
유엔이라는 글로벌한 입장에서 평화를 위해 땀흘리고 있는 사람의 말이니만큼 천금의 무게를 갖고 있습니다.
세계정세의 혼미가 깊으면 깊을수록 하드파워에 의한 응급조치와 함께 혼의 차원까지 닿는 소프트파워에 의한 정신토양의 개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항구평화에 일보도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그 개척작업에 없어서는 안 될 장(場)이 가정과 가족이라는 작고 원초적인 공동체다라는 인식에 이르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순직하신 외무성의 오쿠 가쓰히코 대사가 ‘이라크 소식’에서 사태의 심각함을 한탄하면서도 “그래도 구원은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이들의 빛나는 눈입니다.” “이라크 어린이들의 반짝이는 눈을 보고 있으면 이 나라는 장래 꼭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라고 쓰신 것은 정말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라크를 비롯한 분쟁지역에서 불신과 증오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고 있는 어른들의 눈을 보고 있으면 절망적인 기분조차 듭니다만 일변하여 어린이들의 빛나는 눈을 접하면 이 인류사의 아포리아(난제)에도 한줄기 빛이 비치는 듯한 느낌이 깊어집니다.
그것을 위해서도 그들이 자라나고 혼을 활성화시켜가는 장인 교육현장에 더욱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청년을 더없이 사랑한 은사 도다 조세이 제2대회장이 젊은이에게 하신 열렬한 호소가 떠오릅니다.
“중생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싸움이다. 그런데 청년은 부모조차 사랑하지 않는 자도 많은데 어찌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 무자비한 자신을 초월하여 부처의 자비의 경지를 회득(會得)하는 인간혁명의 싸움이다”라고.
중생을 사랑한다고 하는 불교의 극치이며 인류애의 정수인 자비라 해도, 부모를 사랑한다고 하는 자신과 관계 깊은 ‘일보’ 없이는 허풍이 되고 만다. “발밑을 파라, 거기에 샘이 있다”고 하듯 하루하루 착실한 행동 속의 ‘일보’는 사소한 것 같아도 실은 거기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단순한 육친의 사랑을 초월해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하나의 인격 즉 ‘타자’로 자리매김하여 접하고 반응하고 서로 도야하는 단련의 지속이야말로 착실한 ‘일보’이며, 그것은 ‘집안’에서 발길을 되돌려, 지역사회에서의 공덕심의 발로에서 시작해 건전한 애국심 그리고 보편적 인류애를 향해 똑바로 발걸음을 향해 갈 것입니다.
액상화현상(=지층이 진동을 받아 강도를 잃어 액체처럼 물렁해지는 현상)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 요즘의 시대정신의 참상, 쇠퇴를 보고 있으면 평화라는 큰 문제도 그런 친근한 곳에서부터 인식해 재고, 삼고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그것이 없다면 발본적인 수단은 아니라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 차원에서 확고한 ‘일보’를 내딛고자 합니다.
여기서 은사가 남긴 불멸의 말이며 메시지인 ‘원수폭 금지선언’에 지금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싶습니다.
1957년 9월 서거 약 7개월 전, 병이 소강상태였을 때 스승이 전 생명을 쥐어짜내 하신 이 선언은 전 인류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핵무기를 ‘절대악’이라 지탄하고 그 폐절을 위해 노력하는 사명을 ‘유훈으로 해야 할 제일의 것’으로서 청년들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그 핵심부분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있습니다.
“핵 또는 원자폭탄의 실험금지운동이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나는 그 깊은 곳에 감추어진 손톱을 뽑아버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만약 원수폭을 어느 나라든, 이기든 지든 그것을 사용한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세계의 민중은 생존의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 권리를 위협하는 것은 마이며 사탄이고 괴물입니다.”
당시는 동서냉전 대립의 격화에 따라 미·소를 비롯해 각국이 핵실험을 되풀이하며 성능향상에 기를 쓰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스승이 사형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청년들에게 철저한 정신투쟁을 호소한 것은 ‘묵시록적 무기’라고도 불리는 핵무기의 악마성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사형이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진의는 어디까지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생활을 순식간에 재와 먼지로 바꾸어도 아픔을 느끼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불법에서 설하는 ‘타화자재천’<1>이라는 생명에 잠재된 마성을 근원적으로 단절하는 중요성을 호소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핵무기를 ‘힘에 의한 균형’이란 관점에서 필요악이라 시인하는 핵억지론(核抑止論)의 환상을 부수고 그 근원에 있는 생명경시 사상에 강한 경종을 울린 선언의 의의는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깊은 곳에 감추어진 손톱을 뽑아버리다’
그중에서도 내가 오늘날의 문제에 통하는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치나 군사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난 생명이라는 근원적 차원에서 ‘깊은 곳에 감추어진 손톱을 뽑아버리고 싶다’고 한 투철한 시선, 안력(眼力)이며 식견입니다.
본론의 문맥에 가깝게 말하면 ‘손톱을 뽑아버리다’란 자기 마음 속에 ‘타자’를 부활시키고 그 확실한 반응을 느끼면서(반응을 느끼지 못하고 또는 무시하며 상대를 뜻대로 하려는 것이 타화자재천으로, 타화의 ‘타’란 따라서 내가 말씀드리는 ‘타자’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기를 컨트롤해가는 ‘자기규율의 마음’이며 욕망의 제어, 즉 내면의 제패라 해도 좋습니다. 뜻하는 바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손톱을 뽑아버리다’라는 어려운 작업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들과 관계 깊은 ‘일보’에서 시작되어 원수폭 금지라는 인류사적 과제까지 기저부가 공통되는 연속적인 테마가 될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래, 서구 합리주의에 입각한 근대문명은 욕망이 향하는 대로 자아의 제한없는 표층적 확대를 가장 중요한 원리로 하여 돌진해 왔습니다.
지구상 전 민중의 ‘생존의 권리’를 담보로 하면서까지 특정국의 우위와 안전보장을 꾀하려는 핵무기는 그 두드러진 존재이며, 과학기술이 군사목적과 결부되어 탄생한 ‘욕망에 봉사하는 문명’ 특유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을 제어하는 브레이크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타자를 향한 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공덕심, 공적 의식이라 바꿔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가 세계를 석권했던 시대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회장은 ‘인생지리학’에서 이런 정치풍조를 ‘국민적 이기주의’라 평가하고 “국가는 개인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의 목적은 즉 개인의 심중(心中)을 실현하는 욕망”이라고 지적한 다음, 한 인간의 인생도 국가와 마찬가지로 그 최종목적을 ‘인도(人道)’에 두어야만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도’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의 행복까지도 추구하며 행동하는 속에서만 완수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점, 마키구치 초대회장이 그 교육사상에 강한 공감을 품고 있던 미국의 사상가 듀이의 민주주의론 근저에 있는 ‘공중(公衆)’의 아이덴티티(자신이라는 것의 근거)는 시사적입니다.
듀이는 ‘공중과 그 제문제’라는 논고에서 작가 허드슨이 그린 월트셔의 어느 마을의 정경을 통해 하나의 구체적인 모티브를 부각시킵니다.
“각각의 집은 인간 생활의 중심이며 또 새나 짐승들의 생활의 중심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 중심은 서로 접하고 있어, 그들은 마치 손잡은 어린이들의 줄처럼 연결되어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오두막에 사는 사람이 힘에 부치는 나무조각이나 그루터기를 쪼개다가 어쩌다 무겁고 잘 드는 도끼를 발에 떨어뜨려 큰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사고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1마일이나 떨어진 마을 반대편 구석까지 날개돋힌 듯 전해질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당장 이 사고를 알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재난이 일어난 순간 동료인 마을사람에 대한 것, 날카롭게 빛나는 도끼가 발 등에 떨어지고 상처에서는 붉은 피가 솟구친 것을 생생하게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또한 마치 자기 발을 다친 것처럼 느껴, 그 몸에 충격이 전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현대정치의 기초’)
동료의 몸을 덮친 재난을 단순히 사실로서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 아픔을 자기 일처럼 느끼고 추체험(=다른 사람의 체험을 마치 스스로 체험한 듯 느끼는 것)하는 그 생기넘치는 감수성, 생명감각이야말로 ‘공중’의 아이덴티티의 핵심을 이룹니다.
내가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그 압도적인 실재감, 아주 생생한 생의 리얼리티입니다.
거기에서는 인간끼리는 물론 새나 짐승 등의 동물들, 대지나 초목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성의 윤곽을 선명하게 각인하면서, 그렇다고는 해도 결코 무관계는 아니고, 운명공동체로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은 아이덴티티를 획득하며 자신의 생을 살고 또 죽어가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공동체라는 전체 속에서 개인의 생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연상을 작용시키면 톨스토이의 작품중, 작자의 자화상에 가깝다고 하는 인물― ‘카자흐’의 오레닌,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 등 도회지의 인텔리겐차에게 어쩌다 계시처럼 찾아오는 만유생명(萬有生命)과 합일해가는 혼의 고양감(高揚感)과도 통하는 것입니다.
듀이는 “이렇게 친밀한 상태가 있다면 국가 같은 것은 하찮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볼테르가 “당신의 저작을 읽으면 사람은 네 발로 걷고 싶어진다”라고 비꼰 루소류(流)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루소가 거기에서 인민주권의 사회이론을 구축해간 것처럼 모든 ‘인위’를 배제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듀이의 ‘공중’이라 해도 제1차 세계대전 후 본격적인 대중의 정치참여가 진행되던 시대의 이상적인 공동관심, 공적 의식을 고찰한 것입니다. 즉 촌락 등의 소공동체가 해체되는 속에 형성된 국가라는 틀을 ‘대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공중을 구성원으로 하는) 대공동사회’로 메타모르포제(변용)시켜갈까라는 테마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듀이가 명시적으로 때로 암시적으로 말했듯 촌락공동체의 마을사람이 공유한 공덕심, 공적 관심의 모체인 아이덴티티의 원기(原基=개체발생에 따라 기관이 형성될 때 그것이 형태적·기능적으로 성숙되기 이전의 단계)와 같은 것을 어딘가에 계승, 보지해가지 않는 한 대공동사회 형성은 어려울 것입니다.
듀이는 대공동사회를 형성하는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매스커뮤니케이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매스컴이 건전한 공덕심, 공적 관심을 기르는 데 충분한 역할을 완수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매스컴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타자에 대한 무관심, 냉소주의의 만연은 도저히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듀이가 제기한 과제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증폭되면서 현대로 이어져왔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 추세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 현대의 2대 사조라고 해야 할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과 버추얼리제이션(가상화)입니다.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어울려 포스트(=후) 산업사회라는 문명사의 새로운 국면을 열고 있습니다.
최근엔 미국의 ‘독주’라는 상황도 있어 글로벌리즘에 대한 비난이 강해지고 있지만, 정보화 그 자체는 맞서기 어려운 하나의 트렌드(유행)이며 그 공죄(功罪), 빛과 그림자를 속단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가지는 정보화사회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버추얼(가상)성이라는 것입니다.
가상화가 초래하는 위험성
근대화를 계승한 정보화의 분류(奔流=세찬 흐름)는 편리성과 효율성이라는 무차별적인 힘으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면서 종래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가정, 지역, 직장, 학교, 국가 등의 틀을 해체 혹은 약체화시키고, 사람들을 떼어놓고 있던 거리, 공간의 벽을 제거함으로써 순식간에 글로벌한 네트워크사회를 나타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은 비약적으로 넓혀지고 텔레비전이나 퍼스널컴퓨터에 의해 지구 반대편의 정보도 눈 깜짝할 사이에 안방에 들어옵니다. 그 결과 물질과 서비스, 취미와 오락, 직종, 거주지, 국적, 가족구성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선택의 자유, 행동의 자유도 대폭 확대되었습니다. 그것은 큰 장점이지만 거기에는 큰 함정이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가상성(假想性)이라는 것입니다.
네트워크사회를 상징하는 두 가지 수단인 화폐와 정보는 모두 버추얼 리얼리티(가상 현실)이며 리얼리티(현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정보는 물론 화폐라 해도 실체경제와 호환성을 갖고 있는 단계라면 몰라도 거기에서 분리되어 투기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머니 게임의 세계가 되면 욕망은 제한이 없어지고 현실 특유의 반응, 안정감과는 이질적 차원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그 결과는 자기증식을 추구하여 지칠 줄 모르는 배금주의의 초래입니다. 화폐라는 것의 마력입니다.
그러므로 필요불가결한 것은 화폐나 정보 등의 가상 현실은 현실을 보완하고 보강하는 것은 가능해도 그것을 대신하지는 못한다라는 관점이 아닐까요.
아무리 정보기기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해도 인간이 서로 직접 접하는 장(場)―친밀한 대화, 회의나 수업이 없어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고 돈이 물질이나 서비스를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2>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즉 가상 세계는 타자를 상대함으로써 자기를 마주한다고 하는, 인간이 살아가는 것의 현실 그 자체인 힘들고 인내가 필요한, 어느 의미에서는 고통조차 수반하는 내적인 갈등, 싸움―불교에서는 애별리고(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 원증회고(怨憎會苦=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 등으로 설합니다―과는 본래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갈등과 싸움이 없다고 치자, 가능한 피해 지나가자고 하는 것이 편리성, 효율성에 내장되어 있는 벡터(힘의 방향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와 타자의 대치로 인해 생기는 자제심, 자기규율의 마음, 공덕심이나 공적 관심도 생기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정보 네트워크사회를 지탱하고 구성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에 변함은 없습니다. 그의 호칭은 기존의 모든 구속, 유대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개인’입니다. 그 자유로운 개인은 동시에, 범람하는 정보에 미혹되지 않는 자기결정이 가능한, 발을 땅에 디딘 ‘자립·자율적 개인’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가상성을 바탕으로 한 정보화사회는 그런 개인을 단련시키는 장으로서는 기능하기 힘듭니다. 정보화의 장래를 전망할 때 최대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습니다. 과연 시류의 연장선상에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
그러므로 나는 발상을 전환하여 친근한 ‘일보’를 소중히 하자고 거듭 호소하고자 합니다.
월트셔 마을사람들처럼 타자의 부상을 듣고 ‘자기 발을 다친 것처럼 느껴, 그 몸에 충격이 전해지는’ 것처럼 건강하고 생생하기까지 한 현실감, 아픔을 느끼는 감각이나 생명감각이야말로 가상 세계의 폐색성에 숨통을 틔우고 나아가서는 전쟁을 억지하는 최대의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전사자를 앞에 두고 저 아소카왕<3>에게 전쟁에서 평화로 회생(回生)한 내적인 드라마를 연기하게 한 것과 같은 뿌리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돌파구, 회로는 우리들과 가까운 곳에서 반드시 발견될 것입니다.
‘무통문명’이라는 발상에 주목
그런 점에서 모리오카 마사히로씨(오사카부립대학 교수)의 최근 저서 ‘무통(無痛) 문명론’은 현대문명의 병리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어 흥미깊습니다.
그는 ‘세이쿄신문’ 지상(올해 원단호)에서 그 착상을 “무통문명이란 괴로움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구조가 사회 구석구석까지 둘러쳐진 사회”를 말하며 “무통문명이란 ‘괴로움’을 철저하게 피하려 하기 때문에 ‘생명의 기쁨’을 경험하는 가능성을 인간에게서 빼앗아버려 그 결과 인간은 깊은 기쁨이 없는 공허한 생을 물질과 돈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슬픔이 없기 때문에 기쁨도 없다.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즐거움도 없다. 그런 걸리는 것이 없는 미지근한 물 같은 사회에서 치명적으로 쇠약해지고 없어져가는 것이 타자이며 타자를 향한 시선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자신의 괴로움을 철저히 무통화한 사람이야말로 타인의 괴로움을 가장 느끼지 못하고, 타인의 호소를 가장 들으려 하지 않고, 타인을 일방적으로 눌러 없애놓고 그것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타자와 충돌해도 자기 쪽의 ‘틀’을 바꾸려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대화는 찾아오지 않고 ‘타인을 밀어젖혀서라도’ 자신을 확장해가게 된다”라고.
바로 ‘타화자재천’이라는 마성의 작용입니다. 이런 막다른 상태에서 탈출할 힘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그것을 인간을 내측(內側)에서 바꾸는 생명의 힘에서 구하고 그 복권(復權)이 급선무라는 것을 호소했습니다.
석존의 사문유관(四門遊觀)
그의 이런 문제제기는 우리들이 신봉하는 불법과 극히 가까운 지향성을 가진 것이기도 합니다.
그 사상은 석존 출가의 동기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생로병사’를 둘러싼 사문유관의 에피소드에 상징적으로 나타납니다.
고대 인도에서 석가족의 왕자로 태어난 석존은 아무 부족함없는,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무통문명과도 비슷한 생활을 보내다가 어느 때 큰 의문이 가슴에 일어났습니다. 경문에서는 그 소식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유복하고 이렇게 매우 다정하고 유연했지만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어리석은 범부는 자신이 늙어가는 것이고 또 늙는 것을 면할 수 없는데 타인이 노쇠한 것을 보면 생각에 잠겨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한다. 자신의 일은 간과하고.”
“어리석은 범부는 자신이 병드는 것이고 또 병을 피할 수 없는데 타인이 병든 것을 보면 생각에 잠겨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한다. 자신의 일은 간과하고.”
“어리석은 범부는 자신이 죽는 것이고 또 죽음을 면할 수 없는데 타인이 죽은 것을 보면 생각에 잠겨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한다. 자신의 일은 간과하고.”(나카무라 하지메 ‘고다마 붓다 1’)
석존 출가의 동기는 생로병사라는 인간존재의 근본에 존재하는 ‘고(苦)’를 직시한 것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고가, 생로병사의 비극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자신의 일은 간과하고’를 되풀이하여 훈계하고 있듯―그것들을 꺼려야 할 것으로서 차별하는 생명의 오만에 그 원흉이 있다는 것을 석존은 예리하게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잊은 문명이 부른 비극
그렇다면 불법의 출발점은 타자의 아픔이나 괴로움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신의 문제로 하여 정면으로 맞서는 가운데 자기 생명을 단련하고 ‘자타 함께 행복’해지는 것을 지향하는 삶의 자세를 촉구하는 것에 있으며, 그 힘든 작업 속에서만 진실한 ‘생의 기쁨’이 숨쉰다는 것을 호소한 점에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무통문명론은 아니지만 ‘죽음을 잊은 문명’이라고도 불리는 현대는 생로병사라는 근본과제로부터 눈을 돌리거나 그것을 바이오 테크놀러지(생명공학)나 첨단의료에 의해 표면적으로 관리하에 두려고 하는 시도만이 앞서, 그런 괴로움을 극복하면서 생을 진정 풍요롭게 하기 위한 이상적인 인간과 사회를 모색하는 노력에 소홀했다는 면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죽음을 잊은 문명은 죽음을 가능한한 타인의 문제로서 외부화하고 그것에 대한 아픔이나 괴로움을 마비시킴으로써,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각지에 있어서 대량학살 등의 참극을 멈추게 하는 사회의 브레이크를 약화시켜 ‘메가 데스(대량사)의 세기’를 초래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앞서 언급한 ‘원수폭 금지선언’에서 도다 제2대회장이 “그 깊은 곳에 감추어진 손톱을 뽑아버리고 싶다”고 호소한 것은 죽음을 잊은 문명의 상징적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핵무기를 지탄하여, 현대문명의 암부(暗部)를 척결하고 그 전환을 꾀하는 것에 최대의 요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타인만의 불행이 있을 수 없듯, 자기만의 행복도 있을 수 없다―작은 에고를 부수고 타자 속에 자신을 느끼고 자신 속에 타자를 느끼면서, 서로 생명의 빛으로 비추고 최고로 인생을 빛내가는 삶의 자세야말로 불법이 설하는 세계관·생명관의 필연적 귀결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여러 의미에서 마디가 되는 내년 2005년을 앞두고 ‘평화와 공생의 지구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 방책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내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지 60년이며, 유엔 창설 60주년, 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지 60년에 해당합니다.
이런 역사적인 마디에 입각해 나는 ①유엔의 강화와 개혁 ②핵군축 추진과 핵폐절을 위한 방도 ③’인간의 안전보장’(휴먼 시큐리티) 확충이라는 세 가지에 대해 각각 언급하고자 합니다.
유엔 개혁 자문위원회 발족
먼저 제1로, 유엔 강화와 그 개혁에 대해서입니다.
이라크 문제에서 군사력 행사의 시비와 함께 큰 초점이 된 것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심각한 대립에 따른 유엔의 기능 부전(不全)이었습니다.
이런 사태에 대한 두려움이 넓혀지는 가운데 유엔의 아난 사무총장의 호소로 유식자에 의한 유엔 개혁에 관한 자문위원회가 발족하여 지난달에 첫회합을 가졌습니다. 동 위원회에서는 ①평화와 안전보장을 위협하는 현재의 과제에 대해 상세하게 검토할 것 ②이런 과제에 대처하는 데 있어 집단적 행동이 달성할 수 있는 공헌에 대해 고찰할 것 ③유엔 주요기관의 기능 및 그들의 관계에 대해 재평가할 것 ④유엔의 조직과 프로세스(절차) 개혁을 통해 유엔을 강화하는 방법을 제언할 것 등을 주안으로 토의를 진행하여 올 가을까지 사무총장에게 보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에(2000년 10월) 동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한 타이의 아난 전 수상과 21세기의 유엔을 화제로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아난 전 수상은 “각국이 얼마나 유엔을 효율적인 것으로 하고자 원하는가, 그것이 그대로 유엔의 현실에 반영된다”라고 국가의 집합체라는 데서 오는 한계를 지적하시면서도 다음과 같이 유엔의 의의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유엔의 존재 자체는 환영할 만한 것입니다. 희망은 있습니다. ‘만약 유엔이 없었다면’이라고 생각하면 ‘유엔이 있어서 세계가 보다 나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나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확실히 유엔 무력론(無力論)이나 불요론(不要論)은 일부에서 뿌리깊게 주장되고 있으며 지금의 유엔에는 시대의 변화에 어울리지 않는 면이 적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에 대신할 존재가 현실에 없는 이상, 글로벌한 풀뿌리 민중의 힘을 결집하여 유엔을 강화해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해 행동을 계속해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라크문제에서 얻은 교훈을 충분히 염두에 둔 다음 ‘앞으로 이와 같은 어려운 판단을 해야 할 사태가 생겼을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에 대한 룰과 체제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검토해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연대의 기축은 어디까지나 유엔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191개국이 가맹한 가장 보편적 기관인 유엔이야말로 국제협력의 기초가 되고 그 활동에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제에 서서 나는 유엔의 강화와 개혁에 대해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긴급특별총회로 의견집약을
하나는 총회의 권한 강화입니다.
유엔헌장이 정하듯 평화와 안전 유지에 관계된 주요한 임무를 갖고,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결정을 할 권한을 갖는 것은 안보리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심의에 있어서는 다섯 상임이사국에게만 인정되는 거부권제도의 존재로 인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기능부전에 빠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나는 모든 가맹국에 의한 ‘글로벌한 대화의 장’이며 가장 대표성 높은 총회의 권한을 제도면이나 운용면에서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와 안전 유지에 관한 총회의 권한은 안보리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라는 점이 헌장에 규정되어 있지만 안보리가 거부권 등에 의해 기능하지 못할 경우 긴급특별총회를 소집하여 일정의 권고를 할 수 있는 체제가 운용면에서 거듭되어 왔습니다.
소위 ‘평화를 위한 결집’이라 불리는 것으로 1950년에 유엔총회가 채택한 결의에 입각해 안보리 9개국의 찬성을 얻거나 유엔 가맹국의 과반수가 찬성하면 개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와 평화에 대한 새로운 타입의 위협이 대두하고 앞으로도 어려운 결단을 해야 할 경우가 적지 않으리라 생각하면, 특히 군사력 행사를 포함하는 강제조치의 시비를 놓고 안보리가 분규했을 경우에는, 긴급특별총회를 개최하는 것을 정착화시키고 거기에서 토의한 것을 안보리에 피드백(환원)시켜가는 구조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엔의 힘과 신뢰의 원천은 국제사회에서 합의를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조치에는 ‘실효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소프트파워의 원천인 ‘정통성’ 확보가 불가결합니다.
문제해결을 위해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그 방책을 발견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의견을 집약·반영시키는 제도야말로 21세기의 유엔에 요구되는 존립기반이 아닐까요.
지난달에는 유엔총회에서도 총회의 활성화와 권위 향상을 위한 여러 조치를 강구하는 결의가 전회(全會) 일치로 채택되었지만 보편적 대화의 포럼인 총회는 유엔 강화의 포인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쟁지역에 끊임없는 지원을
또 하나는 분쟁시부터 평화구축까지의 프로세스에 관련되는 유엔 여러 기관의 활동을 조정하여 일관성을 갖도록 하는 환경정비입니다.
요즘 분쟁지역에서는 지원이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공백상태가 심각한 과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 해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작년 5월에 ‘인간의 안전보장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고서에서는 분쟁 중과 분쟁 직후에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구조가 정비되지 않은 점에 근거해 “각자에게 규정된 임무분담에 구애받지 말고 사람들을 보호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장 먼저 생각함으로써, 무수한 지원관계자가 각각 상하 구조에 따라 무질서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 상태를 타개할 필요가 있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또 “특히 국제적인 군사개입 후에는 분쟁하에 있어서 ‘보호할 책임’은 ‘재건할 책임’이 있어야 비로소 완수된다. 즉 중요한 것은 분쟁이 정지됐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 후의 평화의 질이다”라고 하며 모든 활동의 출발점을 분쟁에 의한 피해나 상처에 괴로워하는 사람들과 사회의 니즈(=요구)에 두고 단일 리더십 아래 그것들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요즘 분쟁이 복잡화하는 가운데 여러 지원을 총합적으로 추진하는 것의 긴급성이 높아지고 있는 점을 감안해, 그 시도를 국제적으로 강하게 리드하기 위한 기관을 유엔에 설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유엔에서 그 임무가 사실상 종료된 신탁통치이사회<4>를 ‘평화부흥이사회’ 같은 명칭으로 발전적으로 개조하여 그 역할을 맡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전에 나는 신탁통치이사회를 변화시켜 난민고등판무관이나 인권고등판무관과 밀접한 연계를 가지면서 분쟁에 괴로워하는 지역에서 문화적, 민족적 다양성을 보장해가는 역할을 갖게 하면 어떨지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요소도 가미하면서 ‘평화부흥이사회’가 인도지원에서 평화구축에 이르는 여러 활동의 추진과 조정의 근본적인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활동 추진에 즈음해서는 당사국과 주변국이 협의하는 장을 계속적으로 가지면서 활동 진척상황을 정기적으로 관계국에 보고하는 제도를 마련해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노력도 필요할 것입니다.
광범위한 민중의 지원불가결
어쨌든 유엔의 강화를 실현시키려면 가맹국뿐만 아니라 민중 레벨에서의 강력한 후원이 불가결합니다. 특히 유엔은 자금난이라는 난제도 오랫동안 안고 있어 가능한 한 폭넓은 지원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작년 2월에는 브라질의 카르도수 전 대통령을 의장으로 하는 ‘유엔과 시민사회의 관계에 관한 현인(賢人) 패널’이 발족하여 시민사회의 의견 등을 참고한 보고서의 정리가 추진되고 있어, 유엔 강화를 향한 기운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조류를 더욱 높이면서 2000년에 실시된 ‘밀레니엄 포럼’과 같은 형태로 내년 유엔창설 60주년에 맞추어 NGO(비정부기구)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대표가 참가하는 ‘유엔 민중포럼’을 개최하여 평화의 21세기를 위한 유엔 강화의 길을 만들어나갈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내가 창립한 평화연구기관 ‘보스턴 21세기센터’에서도 이제까지 유엔 창설 50주년 때에 ‘민중의 제언’을 제출하는 등 유엔 지원활동을 계속해 왔는데, 앞으로도 연구협력과 심포지엄 개최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민중에 의한 유엔지원의 글로벌한 연대를 넓혀가고자 합니다.
국제형사재판소 활동을 궤도에
이 유엔 개혁에 관한 제안과 아울러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잇따라 발생하는 테러에 대한 대응책으로써 ‘법에 의한 해결’의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2001년 9월에 채택된 안보리 결의에 입각해 유엔에 ‘테러대책위원회’가 설치된 것에 이어서 작년 6월에 에비앙에서 개최된 G8 서밋(주요국 수뇌회의)에서 동 위원회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 등을 목적으로 한 ‘테러대책 행동그룹’이 설치되었습니다.
테러를 미연에 막거나 그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각국의 법제도 정비·확충과 함께 꾸준한 국제협력이 불가결합니다. 나는 이런 국제적인 체제를 통해 예방적인 조치에 주력하면서 테러를 일으키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간요(肝要)라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시도와 함께 중요한 것이 국제형사재판소의 체약국을 늘려 활동을 궤도에 올리는 것입니다.
전쟁범죄와 대량학살, 인도에 대한 죄 등을 저지른 개인을 심판하기 위한 상설법정인 국제형사재판소는 작년 3월에 발족식을 갖고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세계 각지에서 잇따라 발생하는 분쟁과 테러 등의 ‘증오와 폭력의 연쇄’를 끊음과 동시에 힘에 의한 해결이 아니라 ‘법에 의한 해결’의 어프로치(접근)를 국제사회에 정착화시켜가는 데 있어 핵이 되는 제도입니다.
간신히 설립된 재판소가 진정한 유효성을 발휘하려면 보다 많은 나라가 참가하여 보편성과 신뢰성을 확보해가는 것이 불가결합니다.
특히 테러에 관해서는 작년 8월에 유엔 안보리에서, 분쟁지역에서 활동하는 유엔 요원과 인도원조 요원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는 ‘전쟁범죄’에 해당한다고 비난하는 결의가 채택되었습니다.
이것은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준 이라크 바그다드의 유엔 현지본부에 대한 폭탄 테러를 근거로 한 것인데, 이러한 무도한 테러를 제도적으로 방지하기 위해서도 그것을 국제형사재판소 같은 사법제도 아래서 심판하는 원칙을 확립해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 SGI(창가학회 인터내셔널)로서도 유엔 NGO로서 의식계발 등의 활동에 힘쓰면서 국제형사재판소를 지원해가는 세계적인 조류를 높여가고자 합니다.
또 이와 관련하여 이제까지 주로 국가간의 전투나 국내분쟁에 대해 정비되어온 ‘국제인도법’을 강화하여 테러에 대한 조치나 국경을 넘는 내전을 비롯한 새로운 사태에 있어서도 국제인도법의 정신이 준수되도록 요구해 나가야 합니다.
CTBT의 하루라도 빠른 발효를
제2로, 핵무기의 군축과 폐절에 대해 전망해두고 싶습니다.
지난달 이란이 국제원자력기구의 추가의정서<5>에 서명하여 핵사찰 전면 수용에 합의한 것에 이어, 리비아도 핵무기를 포함하는 대량파괴무기의 개발·제조계획 전면폐기와 국제사찰단의 즉시 수용에 합의했습니다.
모두 핵불확산 체제면에서 큰 전진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핵무기의 위협을 지구상에서 없애려면 아직도 길은 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근본적으로 타개하기 위해 나는 요즘 핵문제에 있어 주요 테마인 불확산에서 핵군축, 핵폐절로 중점을 전환시켜가는 것이 간요라고 강력히 호소하고 싶습니다.
물론 불확산을 위한 제도정비는 핵군축을 추진하는 데 있어 전제조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1996년에 채택된 CTBT(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의 조기발효를 거듭 호소해왔습니다.
조약에 정해진 핵실험을 감시하는 국제적인 관측망 정비는 착실하게 추진되고 있으며 이것이 궤도에 오르면 핵실험을 계속 감추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고 합니다.
7년 동안이나 미발효 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정부가 작년에 신형 소형핵과 강력한 지중관통형 핵폭탄의 연구예산을 편성하는 등 핵실험 재개로 이어지는 움직임도 우려되고 있습니다.
작년 7월에는 조약의 발효요건국인 알제리가 비준했습니다만, 미국을 비롯해 나머지 요건국인 12개국이 비준하여 CTBT가 하루라도 빨리 발효하도록 국제여론을 높여갈 필요가 있습니다.
또 CTBT와 관련하여 핵보유국이 비보유국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는 ‘소극적 안전보장’ 서약을 글로벌한 규모로 제도화시켜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조치를 하나하나 진지하게 거듭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앞서 말한 문명의 증거인 자제심의 형태입니다. 그것이 메시지로서 널리 민중의 마음에 닿는 것이 전쟁과 테러를 억지하는 최대의 힘이 될 것은 자명한 이치라는 점을 거듭 강조해두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핵보유국이 핵군축을 성실하게 이행해야만 핵관련조약의 신뢰성과 실효성을 높여, 불확산 체제의 안정화로 이어져갈 것입니다.
핵군축 서약은 NPT의 기둥
애당초 NPT(핵확산 금지조약)의 주요한 목적은 핵무기의 불확산에 있습니다만 한편 핵군축 조치에 대한 성실한 교섭이 조문에 명기되었기 때문에 핵관련조약 중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나라들이 참가하기에 이른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1995년에 조약의 무기한 연장이 결정되었을 때 이와 아울러 ‘조약의 재검토 절차 강화’와 ‘핵불확산과 핵군축의 원칙과 목표’라는 제목의 문서가 채택되어 핵군축을 위한 체제가 정비된 것도 그런 국제사회의 강한 의지 표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작년 제언에서 NPT 재검토회의가 개최되는 내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지 60년에 해당한다는 것에 입각해 각국 수뇌가 참가하는 ‘핵폐절을 위한 특별총회’ 개최를 제안함과 동시에 유엔에 핵군축 전문기관을 새롭게 설치할 것을 토의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2000년의 재검토회의에서 채택된 최종문서에 ‘핵무기 전폐를 달성하겠다는 핵무기국의 명확한 약속’이 포함되고 ‘핵무기 전폐로 인도하는 과정에 모든 핵무기국의 적절하고 빠른 시기의 참가’가 합의된 것을 중히 받아들여 이것을 현실화시키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기도 한 핵보유 5개국이 NPT 전 가맹국에 대한 공통의 책임감을 갖고 교섭을 개시하여 핵군축의 성실한 이행을 완수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는 2005년의 재검토회의나 혹은 특별총회를 향해, 보유 5개국이 교섭개시에 합의하는 것이 출구가 보이지 않는 핵무기 문제에 타개의 실마리를 주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또한 ‘핵폐절을 위한 타임 테이블(=계획표) 만들기’에 착수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자 합니다.
북동아시아의 항구 평화를
이 핵무기 문제와 관련해 지금 큰 초점이 되고 있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해두고 싶습니다.
2002년 12월 핵시설 재가동선언 이래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우려가 국제사회에 높아지는 가운데 작년 8월 미국, 러시아, 중국, 한국, 북한, 일본 6개국에 의한 협의가 중국의 베이징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진전은 얻을 수 없었지만 의장 총괄에서 볼 수 있듯 ‘대화를 통해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여 항구적인 평화를 개척할 것’ ‘평화적 해결의 절차 속에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 등의 점에서 합의하는 등 협의 체제를 유지하고 대화를 계속해가는 것에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후의 협의 재개는 난항을 거듭해 이달 북한이 미국의 비공식 대표단을 받아들여 핵관련시설 시찰을 인정하는 등의 움직임은 있었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고 있지 않습니다.
일본으로서는 납치문제를 절대로 미루거나 하물며 피해 지나갈 수는 없지만 동시에 각국이 의장 총괄의 정신을 견지하면서 간신히 단서를 잡은 ‘다국간 대화’ 체제를 적극적으로 키워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두 번째 협의의 조기개최를 바라는 동시에 이 6자 회담을 제도화시킴으로써 한반도와 북동아시아에 있어 신뢰양성을 인내심 강하게 추진해 결국엔 ‘북동아시아 공동체’ 같은 다국간 포럼이나 ‘북동아시아 비핵지대’ 설치를 목표로 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보호받는 쪽에서 공헌하는 쪽으로
제3으로 들고 싶은 것은 ‘인간의 안전보장’ 확충입니다. ‘인간의 안전보장’은 요즘 종래의 안전보장관 재검토 등을 통해 형성되어 온 것으로 국가의 안전에서 인간의 안전으로 중심축을 옮긴 새로운 안전보장 체제입니다.
그것은 전쟁과 테러, 범죄 등의 직접적 폭력뿐만 아니라 빈곤과 환경오염, 인권억압과 차별, 교육과 위생분야의 낙후 등 인간의 안전과 존엄을 위협하는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극히 포괄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엔의 아난 사무총장은 연두 메시지에서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빈곤, 기아, 불결한 음료수, 환경악화, 감염 등 100만 단위의 인명을 빼앗는 위협에 대처하는 노력이 소홀해졌다”고 하며 세계의 지도자들에게 올해는 그 조류를 바꾸어 대책을 도모하도록 호소했습니다만, 인간의 안전보장이 주로 대상으로 하는 것은 이런 사회적 문제입니다.
유엔개발계획이 그 기초적인 개념을 제창한 이래 중요성을 차츰 인식하게 되어 2001년에는 ‘인간의 안전보장위원회’가 설립되고 작년 5월에 앞서 말한 보고서가 발표되었습니다.
거기에서는 이제까지 국제사회에서 했던 논의 등도 참고해 인간의 안전보장을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 자유를 옹호하고, 광범위하며 심각한 위협이나 상황에서 인간을 지키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내가 특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실현하는 두 기둥으로서 인간의 ‘보호’와 함께 ‘능력 강화’를 내걸고 있는 점입니다.
즉 사람들이 단순히 ‘보호받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갖추어진 강함과 힘을 이끌어내는 환경을 만들어 나감으로써 스스로 행복을 쟁취하면서 사회에 ‘공헌하는’ 삶의 자세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인간의 안전보장 실현을 위해 불가결한 또 하나의 요소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해, 또 자기 이외의 인간을 위해 행동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신장시킨다는 점이 인간의 안전보장과 국가의 안전보장, 인도활동, 혹은 많은 개발사업과의 차이이며 그 중요성은 능력이 강화됨으로써 사람들이 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잠재능력까지도 개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통해 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가는 도전이야말로 무너지지 않는 평화의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성교육 보급이 사회안정의 포인트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인간의 안전보장을 확충하기 위해 가장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고의 앞부분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뭐니뭐니해도 ‘교육’입니다.
세계에는 현재 읽고 쓰지 못하는 8억6000만명의 성인과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1억2100만명의 어린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네스코(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를 중심으로 ‘만인을 위한 교육’ 캠페인이 전개되어 기초교육의 완전보급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또 작년에는 ‘유엔 식자(識字)의 10년’이 스타트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배움의 빛을 주고 본래 갖추어진 힘을 이끌어내서 가능성을 개화시키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식자(識字)입니다만 특히 문맹자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여성의 식자율을 높이고 초등교육을 보급시키는 것은 여성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큰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지난달 발간된 유니세프(유엔 아동기금)의 ‘세계아동백서’에서도 세계의 개발목표 달성은 어떤 것이든 여자교육의 진전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하며 국제개발노력에 있어서의 개혁을 조급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금 등의 면에서 초등교육 보급이 뒤떨어지고 있는 나라가 많아 그 장벽을 국제협력에 의해 해소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유엔이나 세계은행의 계산에 따르면 세계에서 소비되는 연간 군사지출의 나흘 분을 매년 교육분야로 돌리면 2015년까지는 전세계에 초등교육을 보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충당할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 초등교육의 완전보급은 유엔 ‘밀레니엄 개발목표’<6>의 8대 목표 중 하나를 달성하는 것이며 나는 이것을 후원하기 위해 예를 들면 ‘글로벌 초등교육기금’ 같은 형태로 국제적인 자금협력 체제를 강화시키자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이 기초교육을 보급시키는 노력과 함께 전쟁없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기초가 되는 것이 ‘인권교육’입니다.
분쟁을 없애려면 그것을 낳고 에스컬레이트(격화)시키는 적대의식과 차별감정을 극복하여 평화공존해가기 위한 토양을 만드는 것이 불가결합니다.
또 분쟁으로까지 이르지 않은 경우에도 세계적인 경제불황과 맞물려 실업문제를 비롯해 여러 형태로 마찰이 일어나 사회의 긴장을 높이고 있는 사례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인이며 공저자(共著者)인 미국의 저널리스트 고(故) 노먼 커즌스씨는 “인간의 상처나 아픔에 무심한 태도는 교육실패의 더없이 명백한 증거다”(‘인간의 선택’)라고 경고했습니다만, 이런 상황을 방치해두면 사회에 증오와 분노의 감정이 침전하여 더욱 분쟁을 초래할 위험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3년 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된 유엔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세계회의’에 보낸 메시지에서 유엔 ‘인권교육을 위한 10년’(1995∼2004)에 이어지는 형태로 유엔 ‘평화를 위한 인권교육의 10년’을 설치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작년 8월에는 유엔의 인권소위원회에서 ‘제2차 인권교육을 위한 10년’ 설치를 유엔총회에서 선언하도록 권고를 했습니다.
나는 이 움직임을 환영하고 또한 그 실시에 있어서는 특히 차대(次代)를 짊어질 어린이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평화와 공생의 지구사회’ 만들기로 이어지는 인권교육 추진에 힘을 기울이자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올해는 ‘노예제 반대투쟁 및 폐지 기념의 해’이기도 합니다만, 이런 과거의 중요한 교훈에 입각하면서 인종차별과 불관용을 극복해가는 토양을 길러 나가야 합니다.
SGI로서도 유엔기관의 활동을 지원하고 다른 NGO와도 연계하면서 평화교육과 인권교육의 글로벌한 추진을 위해 최대한 노력해가고자 합니다.
정보사회의 윤리
이 인권교육에 관련하여 요즘 정보화사회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매스미디어가 특정 민족과 인종에 대한 차별감정을 부채질하는 등의 예와, 인터넷상에서 특정 민족과 인종을 공격하는 페이지 등도 눈에 띠고 있어, 분쟁과 헤이트 크라임(증오에 의한 범죄)의 온상이 되는 것이 우려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스위스에서 유엔의 ‘세계 정보사회 서밋’ 제1회 회합이 개최되어 정보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격차가 확대되는 이른바 ‘디지털 디바이드(정보 격차)’ 문제가 큰 초점이 된 것을 비롯해 이상적인 정보사회를 여러 각도에서 묻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거기에서는 보도의 자유와 미디어의 독립성이 네트워크사회에서도 불가결하다고 하는 한편, 미디어에 정보의 책임있는 취급을 요구하는 취지 등을 포함한 ‘서밋 선언’이 채택되었습니다.
나는 내년에 튀니지에서 개최되는 제2회 회합에서는 정보사회의 윤리에 대해 더욱 깊이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도적 경쟁을 세계적 규모로
어쨌든 인간의 안전보장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새롭고 대담한 발상과 꾸준한 노력의 축적이 불가결합니다. 이미 타이와 같이 ‘사회개발 및 인간의 안전보장성(省)’을 설치한 나라도 있지만, 이런 예 등을 참고로 하면서 각국이―마키구치 초대회장이 지향한 ‘인도적 경쟁’ 같은 형태로 절차탁마하여―좋은 의미에서 경쟁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또 그 시도를 통해 얻은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거나 기술교류와 인적교류를 추진하는 등, 인간의 안전보장을 세계적인 규모로 실현시켜가야 한다고 강력히 호소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도전은 국가 레벨에 그치지 않고 광범위한 민중의 이해와 행동으로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결실을 맺습니다.
‘지구상에서 비참이란 두 글자를 없애고 싶다’는 은사의 열렬한 소원을 가슴에 품고 내가 창립한 도다기념 국제평화연구소에서는 이 인간의 안전보장과 ‘지구사회의 운영(글로벌 거버넌스)’을 관련지은 연구 프로젝트에 힘을 기울여 평화연구의 세계적 네트워크를 만들고자 노력해왔습니다.
또 한 사람의 인간이 일어서서 자신의 가능성을 무한하게 꽃피우면서 사회에 공헌해가는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임파워먼트(계발운동)’는 SGI가 추진하는 ‘인간혁명’ 운동의 골격을 이루는 이념이기도 합니다.
이 이념에 입각해 우리들은 사회적 활동으로서 유엔의 군축캠페인과 인권캠페인, 또 지구 서밋(유엔 환경개발회의)을 비롯한 국제회의에 협력하는 형태로 핵의 위협전, 전쟁과 평화전, 현대세계의 인권전, 환경과 개발전 등을 세계 각지에서 순회하여 풀뿌리 민중 레벨에서의 의식계발을 추진해 왔습니다.
작년엔 평화교육의 일환으로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와 제네바의 유엔 유럽본부 등에서 ‘라이너스 폴링과 20세기전’을 순회하고 올 2월에는 SGI가 중심이 되어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세계의 어린이들을 위한 평화의 문화 건설전’을 개최할 예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전시는 모두 시대변혁의 파도를 일으키려면 먼저 지구를 둘러싼 문제 하나하나를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만년의 미래를 향해 평화의 종을
나는 현재 21세기의 세계가 기조로 해야 할 ‘평화의 문화’를 제창해 온 평화학자 엘리스 볼딩 박사와 대담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박사는 “인간은 현재의 이 시점에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순식간에 큰 타격을 받고 맙니다”라고 말하며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장기적 관점에서 미래를 응시하면서 건설적인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호소하셨습니다.
생각하면 1975년 1월, SGI가 발족할 때 나는 세계에서 모인 멤버 앞에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여러분은 부디 자기자신이 꽃을 피우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전 세계에 평화라는 씨를 뿌리며 그 존귀한 일생을 마쳐주십시오. 나도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이 신념은 지금도 전혀 변함없습니다. 평화라고 해도 결코 일상을 벗어난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현실의 생활 속에 또 생명과 인생에 어떻게 평화의 씨를 뿌리고 키워나갈까. 여기에 영속적인 평화를 향한 견실한 전진이 있다고 나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전에 도다 제2대회장은 만년의 미래를 전망하여 “이윽고 창가학회는 장대한 인간 촉발의 대지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그 긍지와 사명감을 가슴에 안고 SGI 발족 30주년인 내년을 목표로 하여 ‘평화의 문화’를 구축하는 민중의 글로벌한 연대를 더욱 넓혀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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